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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ANG

  • 작성자 뒹굴이
  • 작성일 2008-08-24
  • 조회수 694


BIG BANG

 

 

 

 


1.

요란한 TV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콰쾅 거리는 폭발음, 비명소리,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서 전쟁영화 인 듯하다. 정사각형 모양의 얇은 종잇조각에서 러셀 크로우가 튀어나왔다.
“애 같아.”
분홍빛의 소파 뒤에 유진이 서 있다. 그는 구불거리는 짧은 머리에 체크남방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이미지를 풍기게 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파 앞으로 걸어 나간다. 앉아 있는 금란은 유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는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스콧 영화는 아날로그로 보는 게 좋아.”
금란은 집중하고 있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유진은 어깨를 한 번 올려보고는 금란의 옆에 앉았다. 풀썩하는 소리가 났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금란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검은 크레디트를 보던 유진은 그 말에 무심하게 반응했다.
“왜, 괜찮은데.”
“형과 똑같은 소릴 하잖아.”
화면은 검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TV가 꺼진다. 유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일어서려는 금란을 바라보았다. 파인애플?. 과일 말 하는 거야?. 주스. 그럼, 오렌지. 파인애플 먹어. 왜 물어 본거야? 형은 파인애플 아님 안 먹으니까.
“난 네 형이 아닌 걸.”
유진이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부엌으로 걸어가고 파인애플주스를 찾는다. 예전처럼, 당연한 일인 것처럼, 항상 그래 왔다는 듯이. 유리컵에 가득 채워진 파인애플주스는 금란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넘실거렸다. 왜 한잔이야?. 먹는다고 했잖아. 아니, 너 말이야. 안 먹어. 왜?. 안 좋아 하거든. 흐음, 그래. 유진은 물기가 있는 유리컵을 집어 들었다. 한 입 마시자 입가에 거품이 묻는다. 넌, 이상해. 응, 알아.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유리컵을 흔든다. 파인애플이 흔들거렸다. 다시 묻는다. 궁금하지 않아?. 대답이 없다.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 며칠 계속 이런 식이다. 질문을 하고, 질문을 하고. 형 이야기만 나오면 인상을 찌푸리는 주제에.

“보고 싶어.”
“거울을 보면 되잖아.”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하던 금란은 유진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유진의 손에 들린 유리컵을 빼 간다. 싫어한다며. 싫어한다고는 안 했어. 어쨌든, 안 먹을 거잖아. 금란은 자신이 원래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파인애플주스가 담긴 유리컵을 눈  앞에 대고 마구 흔든다. 흔들흔들, 유진이 말했다.
“나래형, 언제와?”
“언젠간 오겠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하네.”
금란은 웃으면서 유리잔을 유진에게 건넸다. 유진은 받아들면서 금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얇으면서 짙은 눈썹. 헝클어진 머리카락. 메마른 입술. 놀라울 정도로 금란은 형을 닮아 있다.
“뭘 그렇게 봐?”
얼굴을 훑어보던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하도 형 닮아서 그런다. 신기하지 않아?”
“신기할 것도 많네.”
금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억지로 웃는 거 보여.”
“병신.”
금란이 낮게 중얼거렸다.
“넌 정말 재밌으면 찡그리듯 웃는데, 너 그거 모르지?”
“알게 뭐야.”
금란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난 애드랑 체스 할 거니까 가.”
“체스? 그걸 아직도 해? 광장에 3D 전쟁게임 나왔던데 그거 하러 가자.”
“싫어. 애드!”
금란이 크게 소리쳤다. 곧이어 로봇하나가 금란 앞에 섰다. 인공적인 말투로 ‘부르셨습니까.’라고 말했다. 유진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참, 너 그건 아려나.”
금란은 애드가 가져온 체스에 말을 올려놓고 있었다.
“형도 웃을 때 찡그리고 웃는 다는 거.”
금란은 대답하지 않고 폰이 움직였다. 유진은 짧게 인사하고 겉옷을 찾았다. 유진이 가려는 걸 눈치 챈 금란은 짐짓 비장하게 말했다.

“나, 형 찾으러 갈 거야.”
옷을 입던 유진의 눈이 커졌다.
“어?”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이었다. 금란은 턱을 어루만지며 체스 판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금란은 유진을 바라보았다. 찡그리듯 웃고 있었다.
“형, 찾아올게.”
유진은 금란의 말투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염려스럽게 물었다.
“언제 가는데?”
금란이 말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내일.”
“어디로?”
“소돔.”
“형이 거기에 있어?”
금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았지만 거짓말이 아니다. 그런 말을 할 금란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가장 친구인 유진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의 유진과는 반대로 금란은 목소리는 차분했다.
“다녀오면, 형이랑 3D 전쟁게임, 그거 하자. 좋지?”
“세 명이서 못하는데….”
유진은 생각에 잠겨 말을 흐렸다.
“그거야 형을 못 데리고 왔을 때 이야기고.”
금란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는 다시 체스에 집중했고 유진은 금란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다 물었다.
“안 데려갈 거지?”
“넌 부모님이 계시잖아. 아, 이겼다.”
금란은 미소 지으며 기지개를 켰다. 떠난다는 소리를 쉽게 내뱉은 금란이 어이없는지 유진은 툴툴거렸다. 그는 금란 앞으로 다가갔고 금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비슷한 두 남자는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어쨌든, 다녀오겠습니다!”
금란은 손을 눈썹 언저리까지 올리며 경례했다. 유진은 그런 친구의 모습을 아니꼬운 듯 쳐다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건강하게 다시 보자.”
유진이 금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2.
예은은 머리를 긁적였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입으로 펜을 물어도 보았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의 답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좀 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에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펜을 꽉 쥐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앞에 놓인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던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쥔 펜을 놓았다. 탁-하는 소리가 났다.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눈을 감는다. 생각이 생각을 하고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언제까지 이 지겨운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 거지? 항상 묻고 있었으나, 답이 없다는 것을 안다. 해답은 모르고 있었지만, 해답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노력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예은은 늘 책에 빠져 살았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지만, 부패해가는 그녀의 행성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책에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해낼 수 없는 문제였다면 태평히 살아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일말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 일말의 가능성은 알아낼수록 더 크게 보여 졌다.
눈을 떴다. 상상했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예은은 우리은하에 멀지 않은 은하인, 안드로메다에 있었다. 안드로메다은하의 행성에 인간이 살리라고는 생각 못한 지구인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예은은 살아있었고, 그녀의 행성을 사랑했다. 그녀의 행성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이 있었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가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모르모트는 부패하고 있었다.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정확히 없었지만, 굳이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한 가지 있었다. 행성은, 변화가 필요할 뿐이었다. 무난하게 흘러가는 행성의 시간은 고여 있었고, 고여 있는 물이 썩어가듯이 행성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부패하고 있는 모르모트.

우주인들에게는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 그들이 생활하고 숨 쉬는 터전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예은도 항상 묻곤 했다.

모르모트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모트가 문제인 건가요?
꿈에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늘 둘.
모르모트에게 문제가 있고, 모르모트가 문제야.

그리고는 끝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생각해야 하는, 어쩌면 생각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후자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년을 살아오며 느낀 것이 그것이었다. 무난함. 나태라고 불러도 좋을 안일함. 일상에 쪄들다가 생을 마감하는 자들. 모르모트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평화롭고, 평화롭고, 평화롭고. 지구와 소돔에게 모르모트에 대한 걸 묻는 다면 곧바로 평화를 말하는 것 정도는 모든 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적절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설령 그것이 이 세상에 좋은 작용을 한다 하더라도 넘치는 건 좋지 않은 것이다. 넘치는 것보단 부족한 것이 나은 것인데, 모르모트는 그렇지 않았다.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라는 건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예은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첫 번째의 문제는? 모르모트의 문제는 지나치게 평화롭다는 점이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생을 마감하는 자들의 표정에 내비치는 웃음. 행복감.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지. 영원히, 죽을 때까지 행복했다고 믿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전자보다 훨씬 더 큰 문제였다. 눈을 감았다.

별이 보인다. 토성, 진성. 미마스. 예은은 토성의 중간 크기 얼음 위성인 미마스를 가장 좋아했다. 언젠가는 미마스를 보러 갈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미마스의 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했다. 예은은 드넓게 펼쳐져 있는 어둠. 그것에 박혀있는, 어둠과는 상반되는 밝음의 점들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모르모트.
그곳에 예은이 살고 있었다.

 


3.
눈을 떴다. 잔상은 사라지지 않고 보이는 것들을 흐릿하게 했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금란의 인상이 구겨진다. 흐릿하던 사물들이 점차 선명해진 덕분에 시계를 볼 수 있었다.
다섯 시. 평소보다 이르게 일어남을 안 그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다시 눕는 순간 찌릿 하는 두통이 엄습해오고 잠은 달아났다. 손을 겹쳐 베고 천장을 보았다. 별. 그리고 어둠. 지구에서 보는 별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그 느낌이 너무 소름끼쳐서, 금란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천장에, 그러니까 별이 수 놓여 있는 그 천장에. 형이 보였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는 우주에 있었다. 째깍거리는 시계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눈을 깜박이던 그는, 후우- 한숨을 내쉬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두통은 사라졌지만, 잠도 데려가 버린 바람에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생각. 흑요석보다도 더 진한, 그런 검정이 하늘을 덮었고 그 검정에, 반짝이는 별들이 박혀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별이 흔들린다. 반짝반짝. 흔들리고 반짝이는 별 밑에 금란이 앉아 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풀의 느낌은 현실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눈물마저도 솟게 해 주었다. 별 밑에서.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 옆에서. 형은 별을 보고 있었고, 금란은 울었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눈이 뜨인다. 꿈.

금란은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죄여왔다.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진 것만 같은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다. 무작정 떠나온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금란은 그게 또 슬펐다.

별이 반짝였다. 형. 금란에게 그 단어는 심장과도 이어져 있었다. 부모 없는 금란에게 형은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큰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형이 지구를 떠난 지도 꽤 되었다. 눈을 감았다. 형의 마지막 모습이 아련하다. 그는 항상 멋있었고, 떠나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금란은 만약 다시 형을 만나게 된다면, 다시 만난 모습이 죽어있더라 하더라도 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형을 가장 사랑할 때 형을 보냈다. 아니, 보낸 게 아니라 버려진 것이 더 맞겠다. 형도 금란을 사랑했지만, 형에게는 그런 금란에게도 말 못할, 그 나름의 소중한 것이 있었다. 형. 형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그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을 고하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싫은 건 맞는데 싫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 사랑하니까. 금란은 사랑이 종말의 마지막, 그리고 탄생의 시작.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카오스도 사랑이고, 멸망도 사랑이라고.
금란은, 형을, 사랑했다.

금란은 컵에 담긴 차가운 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그의 표정에는 짜증이 역력하다. 금란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계속되는 심장의 떨림에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형의 웃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손을 뻗었다. 심장. 형이 미워진다. 꼭, 그렇게 가버려야 했을까? 무엇을? 무엇을 원했기에?
형에게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어?

대답 없는 질문이란 건 안다. 형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조종해야 할 때였다.
10평 남짓 되는 우주선 안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많다. 침실도, 부엌도, 조종석도. 그리고 형의 물건들도 있었다. 유품이라고 해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금란을 꽉 잡고 있었다.
우주선은 갈피없이 떠돌고 있었고 금란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의자에 앉아 연료상태를 보던 그는 연료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벽 쪽에 붙어 있는 침대, 반대의 벽에 붙어있는 냉장고와 식탁이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꽂혀 있는 책.
그리고 형의 물건이 담긴 상자가 있다. 금란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 형의 방은 항상 열려 있었고, 형의 물건은 금란의 것이기도 했지만, 상자는 아니었다. 상자는 형의 것이었다.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금란에게 호기심보단 형이 더 소중했다.
그는 상자에게서 눈을 돌렸다. 시간은 어느새 여섯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조종키를 잡았다. 박힌 크리스털을 만지작거리다가 빨간 버튼을 누른다. 우주선이 왼쪽으로 틀어졌다.

 


4.
예은은 책을 덮었다. 그녀는 책들에 둘러싸여 책상에 앉아 있었다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모르모트는 언제나 아름답다. 이상한 것은 없으며, 잘못된 것도 없다. 모든 게 올바르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 코가 시큰거린다.
차라리 모든 것이 보였더라면?
잘못되어서, 이상하게 보였더라면?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은 음습하게 숨어 있었고 그 때문에 더 부패가 빨리 진행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예은은 생각했다. 진정한 우주시대에 걸 맞는 건 무엇일까, 하고. 로봇이 음식을 만들고 기계와 소통하고 만들어진 목숨에 의존하는 지금에 어울리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시간은 계속 흐른다. 감정은 죽고 죽은 감정은 행성과 위성처럼 공전한다. 유령 같은 잔재가 되어 떠돌다가 인간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 뒤 먼 훗날. 수 백 만년 뒤 그렇게 오랫동안 죽어 있던 잔재 속에서 생명체가 형성되어 진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외계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 새로운 시작. 또 다른 태양계가 시작되어 지는 것이다.

“또 다른 태양계는 먼 훗날의 이야기고, 먼 훗날은 지금으로부터 너무 멀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미래의 시간. 그 미래의 시간까지 변하지 않는 건 너와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말소리에 예은은 의자를 돌렸다. 웬 일이냐, 너. 퉁명스럽게 뱉어낸 말이지만 저절로 입가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소담은 손에 든 바구니를 흔들어 댔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같이 먹으려고 가지고 왔지요. 쓰담 쓰담 해줘.”
소담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예은은 얼굴을 붉혔다.
“두고 가. 나중에 먹을게.”
“에?! 어째서? 같이 먹으려고 가지고 온 건데!”
소담의 목소리에서 섭섭함이 묻어 나왔다. 그녀는 빵을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어 삼키고는,
“지금 먹어야 맛있다고. 버터가 필요해? 아님, 잼?”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듯 예은은 웃음 지었다. 사실, 버터이건 잼이건 상관없다.
 “이거, 이거 수상쩍다. 언제부터 ‘함께’를 남발하며 쓰담 쓰담 해 주시는 사이가 되셨나.”
언제 왔는지 은정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소담의 뒤에서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붉은 빛이 도는 머릿결이 소담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친해하는 여러분. 나도 쓰담 해주란 말이죠. 그러고는 재빨리 빵을 빼어 드는 은정의 모습에 소담은 어이없다는 듯 조소를 터뜨렸다. 너 주려고 가지고 온 거 아니거든? 뭐, 어때. 누구든 먹음 되지. 아아, 난 잼이 필요해. 대령해줘. 젠장, 독을 탔어야 하는 건데. 예은은 티격 대는 둘의 모습을 보며 빵을 집어 들었다. 따뜻하다. 빵도,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 공간도.
예은이 말했다.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우리는.”
진지한 목소리에 소담과 은정은 예은의 얼굴을 쳐다본다.
“당연하지.”
“말이라고 하냐.”
그러고는 넘어지도록 배를 잡고 웃는다.
“으아, 닭살 돋았어. 조예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존경한다. 낯짝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다니.”
한마디씩 내뱉는 소담과 은정의 말에 비로소 얼굴이 붉어진 예은은 멋쩍은 듯 머리를 매만졌다. 빨갛게 상기된 볼은 하얀 그녀의 얼굴과 대조되어 더욱 도드라지게 보였다. 평소 낯간지러운 말을 쉽사리 꺼내놓지 않는 예은이었기에 친구들은 놀라움을 표했고 예은의 빨개진 볼은 식을 줄을 몰랐다. 은정은 그런 예은의 모습이 재밌다 는 듯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예은이 입을 열었다.
“빵 다 먹었음 가도록 해. 홀드, 점검해야 할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쥔 빵을 다시 바구니에 넣었다. 소담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예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예은은 소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두 번 두드렸다. 마치 자네, 수고했네. 라는 식의 행동에 소담은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붙잡고 있으려고?”
소담이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예은은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돌렸다. 흐음. 소담은 적절한 말을 고르느라 뜸을 들였다.
“어떻게 하든, 희망이 없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안 그래?”
소담은 옆에 서 있는 은정에게 도와달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애석하게도 은정은 멍하니 빵 바구니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은이 말했다.
“아니, 이제 마무리 단계야. 소돔의 어느 부분에 홀드가 있는지도 알아냈고 어떻게 하면 그걸 파괴할 수 있는 지도 알아놨어.”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소담의 만류를 듣고 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많던 소담의 절실한 목소리의 말림에도 예은은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야, 너도 좀 거들어. 소담이 팔꿈치로 은정을 치며 속닥거렸다. 은정은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굴더니, 난 할 말 없다고.라고 말했다. 소담이 잠시 째려보자 입맛을 다시고는 한다는 말이
“치…친구! 난 그런 자네의 모습이 존경스럽네.”
이었다. 소담이 눈을 흘겨 떴다.
“가, 아니고 말이지. 나도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달 까.”
은정의 말이 끝나자 정적이 흘렀다. 은정은, 그러니까 내가 말 안한다고 했잖아. 투덜대더니 빵 다 먹어 버릴 거야! 라며 바구니를 낚아챘다. 소담은 다시 예은을 보았다. 예은은 의자에 기대어 팔짱을 낀 상태로 소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꿈을 욕할 생각은 없어.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알아.”
“들어!”
소담이 소리쳤다. 아니, 소리쳤다기보다 그것은 부탁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큰 목소리의 소담에 은정은 우물거리던 빵을 꿀꺽 삼키고는 귀를 기울였다. 소담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알고 있어도 들어. 홀드에 대해 연구한지도 10년이 흘렀어. 네 곁에서 널 보고, 널 들었어. 네가 얼마나 희망을 품고 있는 지도 알아. 하지만,”
예은의 동공에선 아무런 흔들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소담은 그런 예은을 보며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둘의 만남의 끝은 항상 이렇게 끝이 나곤 했다. 예은이 짜고 있는 계획의 문제점을 제시하는 소담과 그런 소담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예은. 또한 늘 이 어색한 상황을 다시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은정이었다. 셋. 셋은 그렇게 서로를 잡고 있다. 서로에게 까칠하게 대하고 가끔은 화를 내어도 그런 것이야말로 셋을 엮어주는 진정한 대화법일지도 몰랐다.

소담이 아무리 화를 내고 말려도 그것이 예은을 위해서 하는 말임을,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하는 말이 아닌 것을 누구보다 예은은 잘 알고 있었다. 홀드는 소돔에 있었고 소돔에 가기 위해서는 모르모트를 탈출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르모트는 자기장 때문에 우주선을 내보내기가 어려운 상황이고, 설사 우주선이 모르모트에 내려오더라도 그것을 타고 나가기란 실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르모트에 도착하는 우주선이라고는 소돔의 우주선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의 우주선이 있다 하더라도 모르모트에서 잠시 연료를 채우기 위해 가끔씩 오는 것 뿐 이었다. 위험부담도 적지 않았다. 몰래 모르모트를 나간 것이 발각된다면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아직 모르모트를 몰래 탈출한 사람은 없었기에 그에 따른 처벌이 어떻게 되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소담은 이런 불가능한 상황에 예은을 걱정했다. 그 걱정을 예은도 알고 있었기에 마냥 말리기만 하는 소담에게 화도 났지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말해주곤 했다.

오늘도 여전히 그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자 예은이 입을 열었다.
“소돔의 산에 홀드가 있어. 그리고 그 산에 오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관광지로 사용되고 있으니까. 물론, 홀드는 산 아래에 있지. 그렇지만 그 곳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야. 소돔이 쓰는 방범기계는 이미 해킹으로 열 수 있게 조치를 했어. 홀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다음 일은 어렵지도 않아.”
홀드가 파괴된 다음의 모르모트 모습을 상상하던 그녀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홀드를 막기만 한다면.”
예은의 목소리를 들은 소담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하던 간에, 이 앤 소돔에 갈 거야. 그리고 홀드를 폭파시키겠지. 소담의 얼굴에 체념하는 표정이 내비쳤다.
“모르모트의 자기장은 파괴되고 우리도 우주로 나갈 수 있어!”

살펴보던 은정이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리곤 씁쓸한 표정으로 둘에게 다가와 말했다.
“친구들. 잘 들어. 나는 홀드 무엇인가에 대해서 큰 관심은 없어. 예은이 네가 미마스를 좋아하고, 소담이 네가 빵을 좋아한단 거. 그런 것만 안단 말이지.”
“자랑이다.”
예은이 쏘아붙였다. 은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근데 또, 있어. 내가 아는 거.”
은정은 친구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런 은정을 보던 예은은 고개를 좌우로 작게 흔들더니,
“여기서 포기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모든 걸 알아냈고 점검했어. 떠날 일만 남았다고.”
라고 말했다. 소담이 맞받아쳤다.
“그게 문제잖아. 떠나는 거.”
“왜 문젠데?”

낮게 깔린 예은의 목소리에 소담은 입을 다물었다. 예은은 ‘젠장’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문을 쾅 닫으며 나갔다. 소담은 입술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갑자기 은정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너 때문이잖아.”
가만히 있던 은정은 입을 쭉 내밀며 내가 뭘?! 하고 되물었다.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5.
밖으로 나간 예은은 산책을 하면서 방금 전 이야기했던 내용을 떠올 리면서 무엇이 옳은 건지 생각했다. 예전부터 소담은 예은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을 듣자마자 극구 반대하고 말렸다. 위험하다면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면서. 그게 옳은 걸까?

사실 소담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옳다는 쪽에 속했지만, 예은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별 다른 성과가 없었다. 옳은 건지 옳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 끝을 보지 않았으니까. 마지막을 볼 거야. 내 생각이 옳을 거야. 항상 내뱉던 말이었다. 홀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러니까, 홀드. 예은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홀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부패해가는 모르모트를 일으켜 줄 것은 홀드밖에 없다. 모르모트를 위해주는 소돔의 처세는 허울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필요한 건 홀드인 것이다!

예은은 계속 생각을 펼쳐갔다.
‘어쩌면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갈 지도 몰라. 소돔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두 번째로 살 수는 없어. 그들은 우리를 잡아먹을 거야. 그 옛날 지구의 인간들이 가축을 잡아먹은 것처럼 말이야. 키우고 있는 거지. 바로 우리를. 난 알 수 있어. 모르모트의 인간들은 고립되어 있어. 소돔은 모르모트가 내뿜는 자기장이 강하다고 말해. 그래서 우리는 우주선을 만들어도 밖으로 내 보낼 수가 없다고 말하지. 나도 처음엔 그 말을 믿었어. 믿을 수밖에 없었지. 부모님이 믿었고, 선생님이 믿었고, 친구들이 믿었으니까. 그렇지만 난 보았어. 그건 분명히 초신성이었어. 강요된 건지도 모르지. 그래. 그렇다면 그건 초신성이 아니야. 단순한 폭발이야. 조종되고 계획된 폭발.’

예은은 제3의 소돔에 대해 생각했다. 예은이 어렸을 적에 제2의 소돔인 모르모트와 같이 제3의 소돔을, 소돔은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런 제3의 소돔이 폭발되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제3의 소돔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보다 적었다. 모르모트의 사람들은 제3의 소돔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숨겨야 했을까? 소돔 사람들 아무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 제3의 소돔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의 이름까지도. 나 또한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거야. 절대로 몰랐을 일이지. 그렇지만 선생님은 죽었어. 아, 선생님이 돌아가시다니. 그렇지만 그렇게 행복해 하시는 선생님의 표정은 처음이었어. 그래. 선생님은 할 일을 다 하시고 돌아가신 거야. 내게 알려 주셨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예은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이 죽었을 때. 그러니까, 돌아가셨을 때. 낯선 선생님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나서 그 말을 전했을 때에 예은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앉아 있으면서도 슬프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유지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예은은 그 말을 세어 보았다. 유.지.선.생.님.이.돌.아.가.셨.다. 하나하나 손꼽아서 세어보았더니 열한글자나 되었다. 그랬는데도, 의미가 없는 말 같았다. 놀라지 않았고, 슬픈 건 더더욱 아니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한 글자가 더 많은 말이 들렸다.

‘선생님을 위해 울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듣고서야 실감이 났다. 아, 선생님이 죽은 것이다. 선생님이 죽은 것이다.
‘선생님은 죽었어.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 아니, 오래전이 아닐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선생님이 죽었다는 거야. 내 곁에 계시지 않아. 선생님의 몸은 우주가 한 부분이 되어 떠돌다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겠지. 죽음을 미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져.’

예은은 인공잔디에 드러누웠다. 유리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건 다 별다른 소용이 없어. 이것 봐. 난 지금 갇혀 있잖아. 선생님도 그랬어. 늘 갇혀 있었지. 하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어. 자유롭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 그렇지만 난 자유롭지 않아. 난 이 곳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내가 만약 이 유리 돔을 나가게 된다면 탁한 공기를 마시게 될 거야. 그리고 자유를 알게 되겠지. 사람들은 이 유리 돔 안을 자유라고 불러. 웃기지도 말라 그래. 진정한 자유는 이런 게 아니야. 모르모트 사람들은 소돔을 몰라. 소돔은 이렇지 않아. 어딜 가나 나무가 있고 유리 돔 따위도 없어. 모든 곳이 초록색이란 말이야!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소돔에 가야 해. 그리고 홀드를 막아야 해. 그것이 선생님을 위한 거고 날 위한 거야.’

예은의 마음속에선 뚜렷한 결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6.
중요한 일은 예은이 결심하고, 소담이 체념한 날의 일주일 후인오늘에 일어났다. 은정은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쌓아놓고 읽어 내려가던 예은을 발견하고 단숨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어.”
은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뭘 뛰어오기까지 하냐. 라며 핀잔하던 예은은 책을 덮고 일어났다.
“집에 없으면 여기지, 바보네.”
예은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은정은 이마에 묻은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처음부터 소담이 에게 물어보는 건데. 에이.”
예은은 소담의 이름에 잠깐 움찔거렸지만 은정은 눈치 채지 못했다. 여기, 되게 덥네. 네가 뛰어서 그런 거야.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너 그 얘기 못 들었지?”
“무슨 얘기.”
“모르는 구나.”
은정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더니,
“일단 나와.”
하며 예은의 손목을 잡았다. 예은은 잡힌 손목을 뿌리쳤다.
“안 돼, 나 오늘 이거 다 읽어야 해.”
예은은 자신의 허리까지 쌓인 책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쌓인 책과 예은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은정이 이깟 책 따위. 라고 말하자 예은은 경멸하는 눈으로 은정을 쳐다보았다.
“이게 더 급해.”
은정은 막무가내로 예은의 손목을 끌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요.”
은정은 아이스크림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손목의 자유를 얻은 예은은 잡혔던 손목을 어루만졌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아 그녀가 지금의 상황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것을 눈치 챈 은정은 그녀 특유의 웃음을 내보였다. 생글생글.
“너, 그렇게 웃지 말라 그랬지. 재수 없어 보인다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
“어.”
예은의 단호한 말투에 은정은 입을 삐쭉 내밀며 구시렁거리더니 애정이 식은 거야? 애정이 식은 거니? 라며 애꿎은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헤집었다. 징징거리는 은정의 말투에 예은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녀 눈에 비친 은정은 입만 뻐끔뻐끔 거리는 붕어 같아 보였다. 예은은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은정이 제 풀에 지쳐 아무 말도 않자 그제 서야 귀에서 손을 떼었다.

그 때였다. 틈을 놓치지 않은 은정은 속사포 풀어내 듯 빠르게 입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어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너도 잘 알잖아?! 너. 손목에 낀 머즈. 그거 누가 사준 거야? 내가 사줬잖아! 내가 그거 사려고 돈을 얼마나 모았는지 아니? 모르지? 모를 거다. 넌 항상 책에 빠져 살았으니까.”
이었으나 점점
“나는 아침부터 너에게 이야기를 전하러 너희 집부터 시작해서 네가 있을 만한 모든 곳에 돌아다녔지만 못 찾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담 이에게 연락을 했지. 소담아, 너 혹시 예은이 지금 어디 있는 줄 알아? 그 때 소담이 목소리를 네가 들었어야 했어. 도서관. 정말, 그래! 무미건조. 무미하고 건조한 목소리여서 난 소담이가 아, 날 골탕 먹이려는 구나. 하고 생각했지! 아니 근데 이게 뭐야? 도서관에 떡 하니 버티고 있잖아?!”
로 바뀌어갔다.
… 내가 언제 떡하니 버티고 있었냐. 예은은 턱을 괴고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은정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 난 이제 아웃오브안중이란 거지? 나쁜 자식들. 왜, 아예 둘이 살림을 차리시지?”
예은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들으면서도 화난다거나 짜증이 난다는 식은 아니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명심해 두길 바란다. 아, 귀여워 죽겠네. 식이 절대 아니다. 그것과는 한참 먼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이다. 열변을 토해내는(그러나 전혀 쓸데없는) 친구의 모습에 피식거리던 예은은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가득 떠서 친구의 입에 쑤셔 박아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많이 먹어, 그래야 쑥쑥 크지. 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껏 부풀려진 볼이 줄어들자 은정은 킥킥대었다. 예은은 그런 은정의 웃음에 함께 킬킬거렸다.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었다.

“그래서, 책보다 가장 중요하단 것은?”
“아이스크림.”
예은은 눈을 깜빡거리며 달콤함에 물들어 있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세상 하직하고 싶지? 예은의 목소리는 짐짓 살벌했다. 은정은 입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 리가 있나. 사실,”
은정은 뜸을 들이다 소곤거리며 말했다.
“개인 우주선이 연료를 채우러 왔대.”
“정말?!”
예은이 목소리를 높이자 은정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뜻을 표했다.
“조용히 해.”
예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선 잔뜩 부풀어있는 기대감을 볼 수 있었다.
“부탁해봐, 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은정은 그렇게 말하고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셰이크처럼 녹아 있었다. 예은의 가슴이 뛰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어떻게 할래? 내가 우주선 주인이 어디에 묵고 있는 지도 다 아는데.”
은정의 생글거리는 웃음이 예쁘게 느껴진 적은 또 처음이었다. 예은은 눈시울을 적시며 고맙다고 말했다.
“별 말씀을.”
은정이 대답했다.

 


7.
모든 것은 빠르게 진행 되었다. 예은은 금란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금란은 처음엔 주저했으나 예은이 소돔에 동료가 있다고 말하자 비로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동의를 표한 금란에게 예은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담은 예은의 울먹거리는 그 소리를 들었고, 괜스레 코가 시큰거렸다. 이제 진짜로 가는 구나. 예은이 금란에게 말하는 걸 지켜보자 무엇인지 모를 감정과 함께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어째서? 막상 코앞으로 닥친다면 울면서라도 말릴 줄 알았는데. 울어도, 쟤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을 거야. 그래, 나는 알아. 중요한 건 이제 헤어지는 거야. 볼 수 없게 되는 거지. 이제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어. 기다리고, 기다리고. 지칠 수도 있겠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식의 생각은 아니었지만,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은정은 모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금란은 소담과 가볍게 인사하고 예은과 이야기를 나눴다. 은정은 그런 둘의 대화를 들으며 앉아 있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는지 작게 하품했다. 소담은 어느 샌가 2층으로 올라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잘 거야?”
침대에 누워 있던 소담은 말소리에 생각을 멈췄다.
“들어간다?”
예은이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들어와 소담의 침대에 앉았다.
“왜 왔어, 가서 이야기 해야지.”
“충분히 했는걸 뭐.”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던 예은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지 머뭇거렸다. 소담은 예은의 태도를 눈치 채고 조용히 기다렸다.
“내일 아침에 일찍 가.”
소담의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앉는다.
“음, 이렇게 일이 잘 풀릴지 나도 몰랐어.”
예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으나 소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그 때 벌컥 문을 열며 은정이 들어온다.
“야, 조예은. 민금란이 불러.”
“버릇없게 민금란이 뭐야?”
예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보고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잖아,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아, 아무튼 너 빨리 내려가.”
예은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에서 나가려다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는지 몸을 돌려 소담의 앞으로 다가온다. 소담은 눈을 깜빡거렸다.
“다시 만날 거지?”
“부탁?”
예은이 웃었다.
“치곤 성의가 없는 걸.”
소담은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맘에 안 들어서, 다시 만나주기 싫다.”
“흐음,”
예은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선물 사올게.”
예은의 말에 소담은 깔깔거렸다.
“기껏 생각해 낸 말이 그거야?”
“자자. 이럴 시간이 없어요. 민금란 씨가 화낼 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 신경질적이던데. 빨리 가 보세요.”
은정이 툴툴대었다. 예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담은 예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불 좀 꺼줘.”
“관심이 없네, 이 자식.”
“나가. 잘 거야. 넌 잠도 안자?”
소담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너. 민금란 그 사람하고 이야기도 한 번 안했잖아.”
“관심 없어. 나가.”
소담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자 은정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솔직하지 못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소담에게 한 말이었다. 은정은 어깨를 들썩이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잠잠해지자 소담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베개가 축축해져옴이 느껴졌다. 심장에서 피비린내를 맡는 기분이었다.

 


8.
안녕.
네가 말했어. 넌 웃고 있었고 난 그게 낯설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늦게 받아들인 현실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게 해서 핀잔을 들었어. 아, 왜 울고 그러냐. 눈물이 맺혀 아른아른한 시선 끝에 네가 있어. 은정아, 소담이 잘 보살펴줘. 넌 날 보며 웃어. 난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려. 비틀린 웃음소리가 나와. 어떻게 그래? 속으로 너에게 물었어. 듣지 못한 너는 대답하지 못해. 누가 잘못일까? 묻지 못한 나? 대답하지 않은 너? 난 네게 벚꽃 잎을 담은 유리병을 건네. 넌 그것을 받아들고 씁쓸하게 웃어. 난 억지로 인사를 해. 내가 웃고 있을까?
돌아 올 거야. 울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웃어.
그 말을 듣고도 난 웃을 수가 없어. 그렇게 너는 떠났어. 올려다 본 하늘에 점점 작아지는 네가 보여.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추질 않아. 떠나는 네 모습을 보며 널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하늘에도 네가 없고 내 곁에도 네가 없어. 그제 서야 난 웃음이 났어. 네가 없는 내가 믿기질 않아서 웃고 있었어. 그래, 괜찮아. 우린 함께 있었어. 이것만으로도 난 웃을 수 있어. 그렇게 믿고 싶어.
안녕, 안녕!

 


9.
금란과 예은을 태운 우주선은 소돔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금란은 침대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적고 있다. 예은은 책장 앞에 섰다. 그녀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투박한 느낌이 드는 책들도 있고, 부드러운 느낌의 책들도 있다. 지구의 책들이어선지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다. 책들의 대부분은 소돔에 관련된 책들이었다. 소돔의 역사. 소돔과 벨라 세대. 롯의 소돔. 예은은 모르모트에서 소돔에 관한 책을 모두 읽어 보아서 낯설지 않았다. 소설도 있었다.
Across the universe.
“어 크로스 더 유니버스.”
예은은 그 글자를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든다. 예은은 그 책을 꺼내보았다. 특이한 향이 일었다. 모르모트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냄새였다.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책의 뒤집어 보니 소설에 대한 짤막한 글이 실려져 있다.

제인은 다니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만을 사랑해 달라 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니엘은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사랑이 사랑을 만들고, 또 그것에 흡족해하는 신의 모습은 다니엘이 사랑하는 것이었다. … 시드니는 다니엘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제인은 다니엘을 사랑했고 다니엘은 시드니를 사랑했다. … 제인의 마지막 말이 시드니의 귓전에 맴돌았다. 밤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줘. 제인은 시드니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기약 없는 헤어짐이 끝이었다. 끝 뒤의 끝은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다.

예은은 단숨에 글을 읽어 내려갔다.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잖아.’ 끝 뒤의 끝. 있을 수 없는 이야기. 예은이 말했다.
“이 책 읽었어요?”
침대에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던 금란은 예은의 말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예은은 소설의 앞표지를 보여 주었다.
“아뇨.”
금란이 작게 대답했다. 예은은 물었다.
“로맨스 소설인거 알아요?”
“뒤표지에 나와 있잖아요. 그 부분 읽고는 안 읽었어요. 그다지, 흥미가 안 생겨서요.”
예은은 그렇구나. 라고 말하면서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다.
“사랑 같은 거 안 믿나 봐요?”
예은이 무심한 투로 물었다.
“믿어요.”
금란이 빠르게 펜을 움직이면서 대답했다. 금란의 짧고 단호한 대답에 머쓱해진 예은은 다른 책을 꺼내려다 다시 입을 열었다.
“믿는다면서, 왜 안 읽었어요?”
금란의 손이 멈춰졌다. 이 여자, 진짜 궁금한 거 많네. 금란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요, 읽어야 해요?”
“그런 건 아닌데, 말이 안 맞잖아요. 뒤표지의 글을 읽고 책을 안 읽었다고 했는데 사랑은 믿는다고 하고.”
“뒤표지 글과 사랑이 상관있어요?”
금란의 얼굴에는 미소가 퍼져 있다. 금란의 말을 들은 예은은 자신이 과민반응 했다는 생각이 들고는 얼굴이 붉어진다. 그런 예은을 보던 금란은 웃으면서 다시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다음에 예은이 꺼낸 것은 일기였다. 장을 넘겨보았다. 종이 끝자락을 잡은 그녀의 하얀 손이 창백하게 보인다.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던 예은은 금란을 더 알게 되어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하고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2039년.
1월 1일. 열여덟 살이 되었다.
1월 8일. TV에서 소돔에 대해 말했다. 소돔이 낯설지 않은 건, 내가 단순히 그 행성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형은 그렇게 말했다. 형의 말이니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1월 10일. 예전부터 형은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1월 14일. 퀸의 Don't stop me now 라는 곡을 형이 들려주었다. 누가 부른 거야? 난 형에게 물었다. 형은 웃으면서 머큐리. 라고 대답해주었다. 수성? 난 되물었지만 형은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웃으며 음악을 들었다.
1월 16일. 형과 영화를 보러 갔다.
1월 19일. 형이 저녁을 사 주었다.
1월 25일. 유진이가 해리포터라는 책을 추천해 주었다. 태양의 노래보다 재미있단다. 믿을 수가 없다.
2월 05일. 해리포터
2월 06일. 해리포터
2월 07일. 해리포터
2월 08일. 해리포터
2월 10일. 정말로 믿을 수가 없다. 태양의 노래보다 더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이 존재했다니! 난 초가 좋다. 초는 이름처럼 나비 같을 것 같다. 왜 그녀가 트리위저드 챔피언이 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고 보니 형은 덤블도어를 닮았다. 그냥 그렇다. 형의 눈을 보고 있으면 덤블도어를 보는 느낌이다.
2월 15일. 형이 이상하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다. 인터넷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이나 빌리는지 모르겠다.
2월 16일. 형이 빌려온 책은 소돔에 대한 책이 많다. 나는 그것을 모두 읽었다. 형이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기분이 좋다.
2월 20일. 형이 담배 피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가르쳐 달라고 하자 머리를 때렸다.
2월 28일. 형을 닮고 싶다.
3월 13일. 형은 오늘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3월 16일. 선생님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써오라고 하셨다. 친구들 모두 부모님이라고 써오지 않을까? 난 특별해 질 거다. 평범한 것은 심심한 것보다 재미없는 일이다.
3월 20일. 젠장! 형의 갑작스런 행동에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절대로!
3월 21일. 형을 잡고 울었다
3월 23일. 형, 제발. 내가 부탁하는 게 안보여?
4월 01일. ……

이상하게도 4월 1일의 다음부터의 일기는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예은은 일기장의 마지막장을 폈다.

2041년.
3월 3일. 시작.

그녀는 일기장을 덮었다. 알아야 될 사실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된 것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금란 또한 나름의 사정과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고 예은은 생각했다. 일기. 금란의 일기는 그가 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럼으로 인해서 형을 얼마나 찾고 싶어 하는지를 잘 대변해주고 있었다.
‘소돔에 도착했습니다.’
맑은 목소리가 우주선 안을 채웠다. 예은은 책장에 일기장을 꽂아 넣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10.
소돔의 우주정거장은 붐빌 대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보며 예은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모든 게 놀랍고 신기했다. 그리고 감격스러웠다. 드디어 소돔에 발을 디뎠다. 오랫동안 염원해오던 소원이 이루어 진 것에 대해 예은은 행복감에 한껏 물들어 있었다. 행복감. 모르모트에서 죽어가던 이들의 얼굴에 내보여지던 것. 예은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 느낌과 함께 일말의 행복을 맛보게 되었다. 우선 둘은 자신의 뜻을 함께 해 줄 예은의 동료를 찾았다. 좌표를 알려주는 예은의 머즈(은정이 선물해준) 덕분에 둘은 새로운 동료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11.
“이유진입니다.”
유진이 건네는 인사에 금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 친구랑 이름이 똑같네요.”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에 유진은 웃었다.
“우선은, 저희 집으로 가요. 괜찮죠?”
유진의 말에 얼굴이 환해진 금란은 옆에 있던 예은을 보았다. 예은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고 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뒤돌아 걸었다. 금란은 숨을 크게 들이 내쉬고 그의 뒤를 쫓아 걸었다. 예은 또한 그 뒤를 쫓았다. 둘 모두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유진의 집은 깔끔했다. 보라색벽지로 뒤덮인 집 안에서 그들은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전 인공심장을 가지고 있어요. 알고 계시죠?”
유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툭툭 찔렀다. 금란과 예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정도까진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 이건 알고 계신가요?”
유진이 금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인공심장은 건전지를 필요로 합니다. 일정한 주기에 따라 건전지를 갈아줘야 하는 거죠.”
유진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동그랗게 생긴 작은 건전지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그것을 금란과 예은에게 보여주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해요.”
“문제요?”
금란이 물었다. 유진은 대답했다.
“네. 이 건전지를,”
유진은 건전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갈아줄 사람이 없다는 거죠. 건전지는 제법 비싸거든요.”
“비싼 것이 건전지를 교체할 수 없단 것과 관련 있나요?”
금란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유진의 말을 경청했으나 예은은 잠자코 있었다. 모르모트에 있을 때부터 유진과 연락을 하고 있어 모두 알고 있던 것이었다.
“비싸기 때문에 건전지를 가지고 도망 가 버리는 거죠.”
금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그건 소돔의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을 텐데요? 난 오늘 처음 들었어요.”
“그럴 만도 하죠. 심장건전지는 요새 들어 부쩍 비싸진 거거든요. 건전지에 필요한 원료가 부족해지자 희귀성이 높아진 거죠.”
유진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심장에 장착되어 있는 건전지를 빼고 난 후 5분 정도의 시간 안에 새로운 심장건전지를 끼워 넣지 않으면 우리는,”
“죽겠군요.”
금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유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맞아요. 우리는 죽어요. 그래서 문제인 거 에요. 심장 건전지는 점차 떨어져 가고 우리는 아마 서로 싸우게 되는 지경까지 다다를 겁니다.”
“그럼, 예은씨도 인공심장이겠네요?”
금란이 예은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소돔이 탄생시킨 모르모트 인 만큼 예은도 인공심장을 가지고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지구엔 소돔에 관한 책은 많았으나 모르모트에 관한 책은 없었기에 금란은 잘 알지 못했었다.
“아뇨.”
예은이 대답했다.
“모르모트는 소돔에서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아니에요. 모르모트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인에 가깝죠.”
유진이 씁쓸하게 웃는 것을 금란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지구에 가까워요?”
금란의 물음에 유진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돔은 어디까지나 실험단계였어요. 그 만큼 잘못된 것이 많았고, 때문에 인공심장까지 달게 된 거죠. 소돔사람들도 당연하게 지구인들이에요. 소돔에서 탄생된 게 아니잖아요. 소돔에서 모르모트를 만들 때에는 한 번의 실수를 겪고 난 후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르모트 사람들은 인공심장을 달지 않아도 된 거였어요.”
금란은 생각에 잠겼다.
‘형은 왜 이런 곳에 온 걸까?’
생각했지만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소돔의 산 밑에 연구소가 있어요. 그리고 그 연구소에 박사가 있어요.”
“‘이정은’ 박사 말하는 거예요?”
“알아요?”
유진이 놀랍다는 듯이 금란에게 되물었다.
“그럼요, 알죠. 소돔과 모르모트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잖아요. 지구에선 꽤나 유명해요.”
금란은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유진은 웃었다.
“그 사람이 영구심장을 연구해요. 난 그가 연구하는 영구심장을, 뺏을 거예요.”
“왜죠?”
금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유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의 말투엔 가시가 서려 있었다.
“살기 위해서죠, 당연히.”
금란은 고개를 들어 유진의 눈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 영구심장을 찾는 다는 그의 말을 듣자, 형이 더욱 보고 싶어지고 있었다.
유진은 더 이상의 이야기는 시간 낭비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예은이 입을 뗐다.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할게요.”
유진과 금란은 예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는 목표와 꿈이 모두 다 달라요. 알고 있죠?”
그녀는 금란과 유진의 눈을 한 번씩 보았다.
“다짐하는 의미에서 한 명씩 말해요. 이유도 함께.”
예은의 말에 금란은 크게 웃었다.
“좋네요.”
“제가 먼저 할게요.”
예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자기장을 뿜는 홀드를 파괴해서 모르모트가 우주선을 이륙 할 수 있도록 할거 에요. 지금 모르모트는 변화가 필요해요. 다른 행성의 문화가 필요하고 새로운 것이 절실하거든요.”
다음은 금란이었다.
“난, 형을 찾을 겁니다. 형은 누구보다 내게 소중해요. 형은 만우절 날, 거짓말 같이 소돔으로 떠났어요. 그리고 난 지금 소돔에 있죠. 형을 찾아서 지구에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3D 전쟁 게임을 할 거예요.”
금란의 마지막 말에 예은은 미소 지었다.
“영구심장을 찾아. 살아남기 위해서. 이 정도면 됐나요?”
간단명료한 유진의 말에 금란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는 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도서관에 가 보기로 하는 게 어떨까요, 난 형의 흔적도 찾아야 하고…….”
“그러죠.”
“그렇게 해요.”
심장. 형. 홀드.
찾는 것은 달랐지만 찾고자 하는 마음은 같았기에 셋은 어느 샌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지만, 셋 중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12.
예은과 금란은 도서관 앞에 섰다. 100개는 되어 보이는 긴 계단 끝의 문은 장엄하고 섬세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금란은 손목에 채워진 머즈의 자그마한 버튼을 눌렀다. 작은 소리와 함께 화면에는 롯/8.11.92. 라는 글자가 올라왔다.
“그 쪽 형에 대해서 알 수 있겠죠?”
희망에 찬 목소리의 예은이었다. 금란은 먼저 걷는 것으로 예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저만치 걸어가는 금란과 유진을 예은은 쫓아 올라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고 금란과 예은의 모습은 소돔의 사람들과 특별히 구별되지 않았다. 많은 것이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금란이었다.

도서관 안은 생각보다 붐비지 않았다. 금란은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그리고 복도 양 쪽에 놓인 책장을 바라보면서 냄새를 맡았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분명 소돔에 있었고 그것도 틀린 사실도,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고향의 냄새. 책들에게는 지구의 냄새가 배어 있었고 금란은 그게 그리워서 왈칵하고 눈물을 터뜨릴 뻔 했다. 형과 함께하던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왜 좀 더 마음을 쏟지 못했나. 어째서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절망은 금란을 조금씩 잡아먹어 망가뜨리고 있었다. 형. 심장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움직였다. 이성적인 게 아니었다. 형이라는 한 단어에는 온 세상의 감정이란 감정이 모두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망가지고 있는 금란의 몸, 그리고 감정.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예은이었다. 예은은 금란의 뒤에서,  금란의 앞에 언제나 함께 있다. 금란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할 때 끌어당겨주었고 금란은 그것이 좋았다. 생각보다 예은은 금란에게 큰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뭐 알아낸 거 있어요?”
예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물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여기 제법 넓은 것 같아요. 못 보던 책들도 여럿 있는 걸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예은이 다시 말했다. 금란은 예은의 질문에 대답하는 적이 잘 없었다. 예은의 질문이 질문을 목적으로 한 말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금란과 예은은 함께 한지 며칠 되지 않았음이 확실했는데도 몇 년을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친구 같아 보였다.
“여기서 이렇게 찾다가는, 한도 끝도 없겠어요. 나누어서 계획적으로 찾도록 합시다.”
유진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13.
연구소의 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철문이 닫히는 것처럼 육중한 소리였다. 소리는 커다란 연구소의 끝까지 울려 퍼졌고 벽에 부딪힌 소리는 다시 되돌아 왔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그 소리보다 더 작은 소리조차 사라질 때까지 여자는 기다렸다. 마침내, 정적이 감돌고 여자의 숨소리만 들릴 때 즈음이 되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걷기 시작했다. 늘씬한 키, 탐스럽게 구불거리는 갈색의 머리카락은 어둠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였다.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는 마침내 은색의 문 앞에 섰다. 문 오른쪽에 있는 정사각형의 화면을 바라보던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눌렀다.
“오송이.”
“인식되었습니다.”
송이는 이름을 말했고 기계는 그녀의 목소리를 인식했다. 은색 문이 열렸다. 송이는 흐트러짐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박사님,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였다. 정은은 키보드로 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송이는 잠자코 기다렸고, 키보드 소리가 잠잠해지자 이윽고 정은은 입을 열었다.
“시작하세요.”
마찬가지로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게 보고입니까?”
정은은 모니터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저, 그게…….”
송이가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회로가 잘못된 듯 보입니다만, 제 말이 맞습니까?”
여전히 정은은 송이를 쳐다보지 않았고, 송이는 침을 삼켰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김나래의 기억 회로를 가까스로 복원했고, 덕분에 그의 집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은은 안경을 치켜 올리고 송이를 보았다. 송이는 긴장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민금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우리는 돌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고 끝났습니다.”
송이는 평정을 되찾아 말했다. 보고를 들은 정은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기억 회로를 복원했다면, 지금쯤 만신창이가 되어 있겠군요.”
“자기 스스로 파괴한 기억이라 복원하기가 만만치 않았기에, 약간의 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회로의 수명이 다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구의 속도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송이의 말을 들은 정은은 턱을 괴었다. 생각을 할 때 취하는 그녀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자신과 같은 모델을 구하기 위해 기억 회로도 파괴 한다니……. 로봇 치고는 제법 그럴 듯 해. 잘만 하면 소돔 사람들 모두 영구 심장으로 교체해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어.’
“머즈를 산 기록이 있었습니다.”
송이의 눈은 흔들림 없이 정은은 얼굴에 꽂혀 있다.
“우리 연구소에서 개발해 낸 C-1287 모델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전파를 잡아 두었습니다.”
송이의 말에 정은은 얼굴이 밝아지더니, 턱을 괸 손을 마우스로 옮겼다. 아까와는 달리 작은 창이 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송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민금란이 롯에 있습니다. 인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잡아 오세요.”
“네.”
송이는 작게 대답하고 롯으로 향했고, 정은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는 투명했고 유리 건너편 아래에는 연구원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연구원들은 자신의 자리에 있다가 유리 기둥 앞에 섰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에 다가오는 동선을 반복하고 있었다. 유리 기둥은 직경 4M 정도로 솟아 있었고, 내부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물 안에는 금란이 그토록 찾던 그의 형이 눈을 감고 죽은 듯 떠 있다.
‘이제 민금란만 데려오게 된다면, 2년을 끌어온 연구를 끝낼 수 있겠지. 초창기모델을 지구로 보낸 것은 잘한 처신이었지만, 김나래가 자기 발로 연구소로 들어왔을 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건 실수였어. 그 때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다른 연구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녀는 유리 기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김나래가 민금란을 떼어 놓으려 한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가 기억 회로까지 파괴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해. 로봇은, 그렇게 자신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남에게 필사적이지 않거든. 단순히 같이 만들어진 모델이어 설까? 아니, 그건 아니야. 송이도 같은 모델이 몇 있어. 하지만 저렇게까지 애틋하지는 않아. 이건 분명히 특별한 무엇이 있어. 뭘까, 그게 대체?’
정은은 궁리하다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자신에게 물었다.
‘사랑?’
그녀는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말도 안 되지. 로봇인 걸. 로봇은 그런 감정 따위 가질 수가 없어. 로봇이니까. 로봇은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아.’
정은은 시선을 유리 기둥에서 거두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나저나, 빨리 민금란이 잡혀 왔으면 좋겠군.”
그녀가 중얼거렸다.

 

14.
책을 꺼내 보던 유진은 갑작스레 늘어나는 사람들이 연구소 병력이란 걸 눈치 챘다. 그는 경계하며 금란에게 다가갔다.
“지금 들어오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저 쪽 문으로 나가세요. 정면으로 달리다 보면 아까 우리가 지나쳤던 광장이 보일 거고, 거기서 부터는 저희 집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소곤거리며 빠르게 말했다. 금란은 유진의 말투에서 심각함을 깨달았다.
“예은 씨는요?”
“먼저 피해요. 찾아서 데리고 갈 테니까.”
금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봅시다.”
유진은 행운을 빈다는 식으로 금란의 어깨를 쳤다.

 

15.
금란은 초조하게 입술을 뜯었다. 도서관에서부터 달려온 그는 안정을 갖추고 예은과 유진을 기다렸지만 둘은 쉽사리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금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에 문을 열려 했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유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멍한 표정이었다. 금란은 유진을 반갑게 맞이하다가 예은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진의 어깨를 잡았다.
“예은 씨는요?”
유진은 멍하니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들었다.
“같이 안 왔어요?”
금란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잡혀 갔어.”
유진은 물을 마시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금란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누가요?!”
금란이 소리쳤다. 유진은 소리친 금란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물병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대체 뭐야?!”
신경질적인 유진의 말투에 금란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괜찮아요?”
간신히 유진에게 질문한 금란은 유진의 기분을 살피다가 의자를 끌고 와 유진의 앞에 놓았다.
“자세히 말해보세요. 일이 어떻게 된 거에요?”
차분해진 금란의 말에 유진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표정과 행동, 말투로 보아서 심각한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소돔의 연구소 군인들이 예은을 데려갔어.”
그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말했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군인?”
금란은 무릎을 굳히고 유진의 어깨를 감쌌다.
“연구소에는 박사의 직속 군대가 있어. 소돔을 세운 사람이 있는 곳이니 그 크기 또한 엄청나지.”
유진은 고개를 들어 금란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찾아야 해.”
유진의 절박한 목소리에 금란은 속에서 울컥, 하고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찾아야만 해. 걔가 어떤 앤데……. 모르모트를 구하겠다고 얼마나 노력했던 앤데, 여기서 끝날 순 없어.”
안쓰러운 유진의 모습에 금란은 그를 꼭 안아 토닥거려 주었다.
예은이 사라졌다. 금란에게 그것은 심적으로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녀를 구하러 가는 일이 어떤 것보다도 시급했다.

 


16.
송이는 묶인 예은을 정은 앞에 데려다 놓았다. 정은은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예은의 앞에 다가갔지만, 이내 그 표정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민금란이 아니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송이는 움찔거렸다.
“민금란이 남자란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이건 뭐야?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여자란 걸 너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내가 네게 눈을 안달아 줬어?!”
송이는 정은에게 소리 질렀다.
“젠장 할. 이래서 로봇들은 안 된다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은은 예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은은 경멸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정은은 흥미롭다는 듯 눈빛에 맞대응 했다. 그러다가 이내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의자에 앉기 위해 몸을 돌렸다.
“죽여.”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자, 송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고갯짓을 본 군인 둘은 예은의 팔을 잡고 끌었다. 송이는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 잠깐 멈춰 서곤 책상에서 골몰히 생각하고 있는 정은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는 이내 문이 닫히기 전에 방을 빠져 나갔다.

 


17.
금란과 유진은 연구소 잠입에 성공했다. 금란이 혹시 모르게 필요할 물건들을 가방에 담아 메었기 때문에 문은 유진이 열 수 밖에 없었다. 철통같은 경비를 뚫을 수 있었던 건 유진의 해킹 실력 덕분이었다.
“대단하네요.”
“말 편하게 해, 꼬박꼬박 존대 붙이는 거 서로 의지하기도 힘들게 만들어.”
유진의 말에 금란은 피식 웃었다.
“어? 형 말이 우스워?”
유진은 복도의 기둥 뒤에 숨어 동태를 살폈다. 금란은 자연스럽게 형이란 칭호를 사용하는 유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
“고맙단 인사는 예은이 구한 다음에나 해라. 얜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유진의 투덜거림이 있고 난 직후였다.
“이거 놔, 젠장!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예은의 목소리에 유진과 금란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유진은 팔에 찬 전투용 글러브를 들이대며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 나갔다. 금란은 그런 유진의 뒤를 이었다.
“놔!”
유진이 글러브를 군인 앞에 겨눴다. 유진과 금란의 얼굴을 본 예은의 표송이 환하게 밝아진다. 군인 둘이 멈칫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틈을 타 예은은 팔로 자신의 오른쪽 팔을 붙들고 있던 군인의 얼굴을 치고 빠져나왔다.
그 때에……!

 


18.
 탕! …… 그녀가 풀썩 하고 쓰러졌다.

 


19.
금란은 괴성을 지르며 글러브를 쏘아 댔다. 탕, 탕, 탕, 탕! 유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예은을 안았다. 그녀의 등에서는 피가 멈추질 않고 있었다. 금란은 헉헉대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예은이 유진의 품에 안겨 있다. 금란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 버렸다. 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예은을 보았다. 피 묻은 손으로 예은의 이마에 놓인 앞머리를 쓸어내린다. 떨리는 손은 멈출 줄 몰랐다. 예은의 가쁜 숨소리가 새근거림으로 바뀔 때까지 셋 모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몹시 들썩 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말을 잇기가 힘겨운지 입술을 깨문 유진의 얼굴을 예은은 아래에서 바라보았다. 예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뭐가… 미안, 하다고 그래…….”
그녀는 쿨럭 거렸다. 입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예은의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예은은 갑작스런 벅차오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자신이 소돔에 있고 평생을 함께하던 소담과 은정이 곁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몸을 떨었다. 무서워지고 있는 것이다. 예은의 눈에서 자조 섞인 눈물이 흘렀다.
 ‘영원히 소담 이와 은정 이를 보지 못하게 되어 버렸네. 평생을 약속해 왔는데……. 함께하겠다고. 어떤 식으로든. 잘못된 게 아닐까? 친구들의 약속을 저버리고 마는 거야, 나는.’
인간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헤어짐 덕분에 만나고 만남 때문에 헤어진다.
“소담…아, …은정아.”
예은이 쿨럭 거리며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금란의 눈은 토끼마냥 빨갛다.

“오빠, 꼭….”
예은이 말을 잇기가 힘든지 헉헉대었다.
“꼭…, 홀드를….”
유진이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금란…씨, 미안…해요. 모르모트에…”
피가 흘러내린다.
“데려…가 주지, 못해서…”
예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 앞 에서 소담과 은정이 소리 내며 웃고 있었다. 예은은 손을 뻗었다.
“모두들…”
예은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고마웠어요.”
그녀의 고개가 떨어진다.

 


20.
“씨발!”
유진은 욕지거리를 뱉어 냈다. 도저히 분을 참아낼 수 없다는 표정과 말투에 금란은 울음을 그쳤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금란은 가까스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럴 때가 아냐, 총 소리를 들은 군인들이 몰려 올 거야. 형. 빨리, 일어나. 형.”
유진은 눈물을 삼키며 일어섰다. 금란이 앞장서 뛰었고 유진이 뒤따랐다. 유진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뛰었다.
“형!”
금란이 소리쳤다. 유진은 깜짝 놀라 금란을 보았으나 그는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금란은 복도 끝 유리 아래로 보이는 유리 기둥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형! 형!”
금란은 주먹으로 유리를 쳐대며 형을 불렀다. 애타는 그의 목소리에 유진은 주위를 경계했다.
“금란아, 소리 낮춰!”
“형!”
“소리 낮추라니까!”
“우리 형이 저기 있어! 드디어 찾았다고!”
“민금란! 제발 입 다물어! 들키겠어!”

아니나 다를까, 소란스러운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생각했다. 생각. 생각. 그는 금란의 가방을 열어 폭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침착하게 버튼을 누른 그는 금란과 잠시 떨어져 유리를 향해 힘차게 던졌다. 콰쾅 하며 벽은 폭발했고 둘은 연기가 자욱한 틈에 밑으로 뛰어 내렸다. 유진은 콜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금란! 괜찮아?”
연기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유진은 손을 휘저으며 금란을 찾았다. 연기가 사라져 앞이 보일 때 쯤 폭탄 하나를 손에 쥐고 유리 기둥으로 뛰어 들어가는 금란이 모습이 유진의 눈에 포착되었다.

 


21.
연구소에 비상 경보음이 울렸다. 셋은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도저히 못 뛰겠다며 유진은 바닥에 주저앉았고 금란과 나래 또한 바닥에 앉았다. 금란은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며 나래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형, 형 맞아? 형 맞지?”
나래는 대답대신 웃어 보였다. 오랜 시간 물속에 갇혀 있어 서인지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은 거야?”
금란은 숨을 몰아쉬며 울먹거렸다. 유진은 호흡하는 와중에도 글러브로 앞을 겨누며 경계태세를 풀지 않았다.
“형. 지구로 가자.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돼. 그럼 우리 지구로 돌아갈 수 있어.”
금란이 눈물을 흘리자 나래는 손을 들어 금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금란은 웃으며 나래를 껴안았다.
“형…….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감격스러운 형제의 만남이었다. 그 때, 유진의 몸이 풀썩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금란은 떨리는 입술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군인들이 전투용 글러브를 들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포획했습니다.”
송이의 무감각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가시처럼 박혔다.

 


22.
“드디어!”
정은이 기쁨에 겨운 듯 깔깔 대었다.
“감격스러운 형제의 상봉입니다.”
정은의 앞엔 무릎 굽혀진 금란과 나래, 유진이 있었다.
“아까 잘못 잡아온 여자도 이 녀석들과 한 패입니다.”
“죽였습니까?”
“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릎을 굽혀 금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내가 만든 얼굴 그대로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내 동생에게 그딴 말 하지 마!”
나래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정은을 바라보았다. 금란은 형의 목소리에 심장이 뛸 듯 기뻤다. 정은은 그런 나래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더욱 더 깔깔거리며 웃어대다가 갑자기 뚝하고 웃음을 멈췄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금란의 턱을 들어 보였다.
“내가 하나하나 다 설명해줘? 왜 네 형이 소돔으로 왔는지, 어째서 이런 몰골로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건지.”
“닥쳐! 그 더러운 입 좀 다물어!”
나래가 울부짖듯이 소리 질렀다. 정은은 송이를 바라보았고 송이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군인 한 명이 나래의 몸을 발로 차고 바닥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정은이 말을 이었다.
“왜 네게 부모가 없는지. 어째서, 너와 네 형의 성이 같지 않은 건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금란은 치를 떨었다. 정은은 웃으며 포복당한 나래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군인은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나래는 켁켁 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송이는 무릎을 굽힌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에 눈썹 밑까지 오는 뱅 헤어. 짙은 다크 서클에 담긴 눈으로 그녀는 나래의 눈을 응시했다.
“널 이 곳에 있게 해 준 사람이 누굴까?”
나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널 만들어준 사람에게 이렇게 못되게 굴면 안 되지. 내가 너와 저 녀석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거야? 정녕?”
금란은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형을 만들었고, 아니. 나도 만들었고. 저 여자는 형과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린 부모가 없던 거야. 우린 영구심장이 있고.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금란은 박사라 불리는 여자가 증오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꺼져. 난, 만들어, 달란, 말, 한 적, 없어.”
나래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끊어 말했다. 정은은 뭐, 좋아. 라고 웃으며 일어나더니 발로 그의 얼굴을 갈겼다.
“형!”
금란이 소리 질렀다. 쓰러진 나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그는 정은에게 눈길을 돌렸다.
“형 건드리지 마! 너,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명심해!”
“그 형에 그 동생이네.”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정은은 금란의 말을 곱씹어보곤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2년 만에 만난 형이 다시 사라지는 건 너도 싫지?! 네 형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비아냥거리는 정은의 목소리에 금란은 잠시 주춤했다.

“…씨발. 네가 조예은 죽였지.”
낮게 깔린 유진의 목소리에 정은은 코웃음을 쳤다.
“이건 또 뭐야?”
유진의 주위를 뱅뱅 돌던 정은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아아, 알겠네. 5918. 맞지? 이야, 심장 달아 준지 꽤 됐는데도 멀쩡하게 살아있네. 역시 내 연구 실력은 녹슬지 않았나봐?”
“찌질 하게 말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병신아.”
유진의 욕에 정은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내 군대는 명령에 죽고 사는 놈들이야. 대답해줄까? 잘못은 명령을 내린 사람에게 있지. 그걸 따른 애들은 무죄. 뭐, 굳이 법정에 서야한다면 복종한 죄가 성립되려나.”
“그러니까, 네가 조예은 죽인 거 맞지?”
“조예은이 누군지 내가 알게 뭐야? 내 명령에 죽고 사는 놈들이 몇인데!”
신경질적인 정은의 대답에 유진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정은은 다시 금란과 나래에게 다가갔다.
“둘 다 감격스럽겠다. 형이란 놈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제 발로 심장을 바치러 오고. 동생이란 놈은 형이 보고 싶어서 제 발로.”
정은이 생글거리며 웃었다.
“죽으러 오고.”
정은이 송이를 보며 말했다.
“모두 내보내.”
송이는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군인들은 소리 없이 경례를 취하고 은색 문을 지나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방에는 정은과 금란, 나래, 유진, 그리고 송이가 있다.
“난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
금란의 큰 소리에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금란아! 들을 필요 없어!”
“아니, 형. 난 들을래.”
“형이 말하는 거 안 들려?! 듣지 마!”
“형은 내가 가지 말라는 소릴 얼마나 무시한 줄 알아?!”
정은이 손짓하자 송이는 자그마한 공을 나래의 입 안에 집어넣었다. 나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제끼리 싸우면 안 되지. 자, 민금란. 내가 말해주지.”
금란이 정은을 바라보았다.
“너와 너의 형은 내가 만들었어. 내가 만든, 영구 심장을 처음으로 단 초창기 모델 로봇이지. 난 너희 둘을 지구로 보냈어. 왠지… 소돔에서 살게 하긴 싫었거든. 김나래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습득한 후 지구에 보냈지만, 넌 그렇지 않았어. 순전히 어린 애였지. 이유는 간단해. 로봇이 키운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가 궁금했거든. 그런데, 기대 이상이야. 아주 훌륭하게 성장했군. 아니, 진화했다고 봐야 하나.”
정은은 쿡쿡 웃다가 웃음을 그쳤다.
“심장건전지, 그게 문제더군. 내가 만든 소돔이 이 정도 문제로 쇠퇴하는 건 볼 수 없었어. 이대로 끝날 순 없었어! 그 때 나의 이 천재적인 머릿속으로 생각이 핑. 하고 지나 간 거지.”
“지랄하고 있네.”
유진의 말에 정은이 인상을 찌푸리자, 송이는 나래 입에 넣었던 공을 유진의 입에도 쑤셔 넣었다.
“영구 심장! 너와 네 형이 가지고 있던 그것! 그것만 있으면 다시 소돔이 부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어. 하지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할수록 초창기의 영구 심장이 필요하더군.”
금란은 자신의 왼쪽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난 네 형에게 말했지. 소돔으로 오라고. 너의 고향으로. 너를 만들어 준 나에게 복종하라고.”
정은은 나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였을까? 왜 복종하지 않았을까? 난 아직도 의문점을 품어.”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금란의 눈을 쳐다보았다. 나래와 똑같은 눈이었다.
“그건 너 때문이야. 널 혼자 두고 소돔에 올 수 없었던 거지.”
“어째서? 함께 올 수 도 있었잖아?!”
“멍청하긴. 함께 온다고? 영구 심장을 필요로 하는 곳에?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을 내가 너무 우회적으로 말했나?”
금란은 입을 다물었다.
“강제적으로라도 복종하게 만든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자 그제서 야 소돔으로 왔어. 너 없이. 혼자서. 기억 회로도 싹 지우고 말이야. 그 고통스러운 행동을! 단지, 널 위해서!”
정은은 말을 마치자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23.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송이의 입에서 아무 감정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배를 잡고 웃던 정은은 기분이 상했는지 아니꼬운 표정으로 송이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송이의 머리를 밀었다.
“내가 명령하기 전에는 입 다물라고 했지?”
송이는 정면을 바라보며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영구 심장에 대한 연구가 끝나면 새로운 로봇을 만들어야겠어. 구형 로봇은 아무래도 안 되겠단 말이야.”
송이의 글러브가 정은의 심장 부근에 맞춰졌다.
“…안 돼!”
금란이 소리쳤다.

탕! ……

 


24.
기계음이 들렸다. 변한다. 금란은 멍하니 자신의 앞에 선 그것을 바라다보았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내가 찾으려던 건 이게 아니야. 기계음은 공기의 파장을 만들어 냈고 강하게 그의 뺨을 쳤다. 그것이 말한다.
"넌 영원히 순수했으면 좋겠어."
순수. 금란은 조심스레 중얼거려본다.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머리가 지끈 거린다. 희미해.
"순수 하단 건, 정말 아름다운 거니까."
그것의 눈이 검어지고 있었다. 눈동자가 커지고 커지더니 모든 여백을 잡아먹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도 없고, 초점도 없다. 입이 움직이고 있다.
"이리로 와."
손을 내민다. 팔랑팔랑, 파란 나비가 날고 있다.
환상? 꿈? 그것도 아니면?
"그러니까, 이리로 와."
무엇이 먼저 무너져 버릴까? 나? 아니면,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나의 공간? 우주의 사막은 바람 한 점 없었고 금란은 그게 슬펐다. 바람이 불면, 사라질 수 있을까. 그를 볼 수 있게 될까. 그것의 눈썹이 꿈틀댔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이쪽으로 와. 역한 빨강으로. 그 곳은 어둠뿐이야. 어둠과 흰. 그리고 그것의 경계."
끼릭끼릭 거리는 단어들이 금란의 귀에 박혔다. 귀가 간지러웠다. 믿어야 하는 걸까? 금란의 앞에 있는 '그것'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목을 움직였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눈은 검정 구슬을 박아놓은 듯이 반짝거렸고 반사된 반짝임은 금란의 왼쪽가슴 위에 있었다.

죽어 버려.

번뜩. 눈이 뜨인다.

 


25.
“누…눈 떴다! 와 봐요, 금란이 눈 떴어요!”
금란은 침대에 누워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형?”
금란은 조심스레 형을 불러보았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형을. 애타게 찾았던 형의 모습을.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거렸다.

…형?


26.
와아, 최신형 머즈네요?!
멋져요?
네! 이거 신제품이라 잘 팔지도 않던데.
선물로 받은 거예요.
이건 출시 된지 반년도 안 되었을 텐데…?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제 생일날 배달되었어요.
형이 선물해 준 거네요!
하하, 저도 그래서 형이 살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형을 찾을 거예요. 고맙다고 말해야죠.
멋지다. 형제애. 참, 제 머즈 보실래요? 친구가 선물해 준건데, 구형이지만 꽤 쓸 만하답니다.
흐음,
뭘 그렇게 빤히 바라다봐요? 구형인데.
……바꿀래요?
네?
아니, 그 쪽은 홀드 찾으면 모르모트로 돌아갈 테고 나는 형을 찾으면 지구로 돌아가잖아요. 기념으로 교환해요.
깔깔, 아직 소돔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요?
뭐, 어때요. 우리는 찾고 말테니까 지금 바꾸든 그 때에 바꾸든 상관없잖아요?
되게 낙관적이네, 음… 좋아요!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에요?
그럼요. 그런데 친구가 선물해 준건데 그렇게 막 바꿔도 돼요?
친구가 더 좋아할 걸요. 그 친구, 은정이에요.
하하, 정말 더 좋아할 지도 모르겠네. 그 친구 얼굴 자세히 다시 보게 모르모트에 초대해 줄래요?
깔깔, 그래요! 모든 걸 찾게 되면 파티해요, 파티!

 


27.
그러니까. 언제나 끝은 이랬다. 내가 기억하는 끝은 늘 저러했고 덕분에 저것은 어느새 내 말 습관이 되어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치즈를 좋아했다. 그렇게 기억하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다. 치즈를 잘게 찢어서 먹을 때의 순간은 어릴 적 내게 있어 최고의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잘린 치즈의 단면은 아름다울 만큼 매끄러웠다. 그러니까, 마치 미끄럼틀 같았다. 그래서 내가 치즈를 좋아했던 것 같다. 왜 과거형이냐, 하고 묻는다면 사실 좀 복잡했다. 복잡한 게 아닌데 그렇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없는 거라서 복잡하다고 했던 것 같다. 어릴 적의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추락이었다. 나는 그 단어를 처음 들었다. 형에게 되물었던 것 같다. 추락? 형은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끄럼틀에서 떨어졌잖니. 많이 다친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러고는 형의 부드러운 손이 볼에서 머리로 옮겨갔다. 형이 머리를 헝클이고 서재로 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추락.
어릴 적 나는 추락했었다. 나는 그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아주 맘에 들었다. 심심할 때마다 추락이라는 단어를 쓰곤 했었고 그것이 꽤나 멋있다고 생각했다. 추락이라는 단어를 얻은 대신에 난 치즈를 잃었다. 잃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일부러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이것이 연상기억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른이 되고 난 후였다. 그러니까, 추락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치즈를 잃었다.

 

28.
“울 지마. 형은 널 사랑했어.”
“어떻게 알아요! 형도 죽었고, 엄마라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죽어 버렸어! 난 이제 누굴 믿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박사님은, 네 형을 사랑했으니까.”
“엄…마? 엄마가 형을 사랑한 게 무슨 상관이에요?”
“엄마가 형만을 사랑하고 넌 미워했겠어? 엄마는 형과 너를 사랑했고, 형은 엄마와 형을 사랑했지. 순환하고 있는 거야.”
“사랑?”
“그래. 사랑.”
“사랑한 것이 맞아요?”
“그래.”
“…모성, 애에요?”
“모성애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사랑했으니까. 모양이 다르거나, 깊이가 다르다 해도 결국은 사랑이니까. 중요한 건 사라지지 않았어.”

 

 

29.
“난.”
금란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을 잃었어. 난 그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촉촉하게 젖어있는 눈을 보던 유진이 말했다.
“많이 좋아했나봐.”
금란이 피식 웃었다.
“많이 좋아했다기보다,”
상처 받은 둘은 상처 받은 이야기를 상처 받지 않았다는 듯, 털어놓고 있다.
“형 밖에 없었지.”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보던 유진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금란이 계속해 말을 이었다.
“형은,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었어. 늘, 웃고. 늘, 웃고. 그래서 난, 형이 행복한 줄 알고 있었어.”

 


30.
죽…어요?
…네.
…거짓말 하는 거죠?
어? 이 머즈. 내가 준 건데, 왜 당신이 가지고 있어?
그만해, 은정아. 저기요. 지금 농담하는 거 맞죠?
웃기고 있네. 어디서 장난을 쳐. 가요. 예은인 어디다 버려놓고 온 거에요? 내가 이 사람 이럴 줄 알았어.
예은이… 좀, 데려다 줘요. 왜 당신 혼자 온 거야…. 내 친구 어디다 버려놓고 당신 혼자 온 거야….
아, 박소담, 울지 마. 이 자식이 지금 장난치는 거라니까?
왜, 당신만 이렇게 와서…
걔가 쉽게 죽을 애야? 그만 울자, 예은이가 보면 화내겠다. 응?

 

 

31.
“갈 거야?”
“가야지.”
“…응.”
“형, 형 덕분에 되게 행복했어.”
“뭘….”
“아냐, 정말이야.”
“고맙다. 그나저나, 네 형, 더 살 수 있었을 지도 몰랐는데….”
“…….”
“에이, 괜한 소리 했다. 나중에 꼭 소돔에 와. 변화 되어 있을 거야. 송이, 그 사람. 꽤 많은 걸 준비해 놨더라.”
“응. 꼭 올게. 꼭…”
“꼭.”

 


32.
「소돔의 연구소가 폭파되었습니다.」

 


33.
로미오와 줄리엣이 열정적으로 사랑한 이유가 뭔지 알아? 허용되지 않는 사랑이었으니까.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거. 잘 알잖아, 모두들.
이건 달라. 이건 된다. 안 된다 하는 문제가 아니야. 옳은 건지 옳지 않은 건지를 판단하는 것조차 옳은 건지 옳지 않은 건지 모르는 거야. 처음부터 다 모순인 걸.

 


34.
숨이 막혀. 목에 메여오고 눈이 뜨거워져 옴이 느껴져. 생선가시마냥 한 감정들은 목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는 삼켜지지도, 내뱉어지지도 않아. 너의 죽음? 엿이나 먹으라고 해. 내가 살아 있는 한 볼 수 있어.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어.
친하게 지내자.
그게 내 첫 번째 말이었잖아. 네가 죽고, 내가 네 모든 걸 태워버린 지금까지 섞인 우리의 많고 많은 말들 중에 처음이었잖아. 넌 그 때도 웃었어. 난 네가 나도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라고 말해줬으면 했었는데 또 아니었어. 그래도 괜찮았어. 나, 그 때 네가 친하게 지내자고 해 줘서 정말 기분 좋았다. 네가 그렇게 말해줬잖아. 네 말이 내 귓가에 울렸어. 난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 난 우리의 첫 번째 그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고 기억해. 그래, 모든 것이 기억이야. 기억 속의 우리는 웃고 있고 행복해 하지만 그걸 기억하고 있는 내 옆엔 아무것도 없어. 웃고 있는 너도 없고, 행복해 하고 있는 나도 없어. 네가 죽던 날 나도 죽었어. 다신 살아나지 않을 거야. 네가 보고 싶어.
제발 일어나.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잖아. 내가 울고, 울고, 또 울고 있잖아.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일어나. 일어나서 내 눈물 좀 닦아줘. 네 모습이 생각나지 않아. 네 얼굴도, 네 목소리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널 보여줘. 나도 데려가줘. 영원히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35.
안녕.

 

 

 

 

 

 

 

 


 

뒹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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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뒹굴이
  • 200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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