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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 작성자 시진
  • 작성일 2009-07-09
  • 조회수 124

 

 

"자, 일렬로 선다."

우렁찬 목소리다. 또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학생주임. 매일매일 견원지간처럼 나와 싸우는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꾸중을 듣고, 그는 언제나 기고만장해서 나를 향해 큰소리로 무언가를 연설하듯 외친다. 그게 무엇인지는, 사실 신경써본적 조차 없다. 관심밖이었다 그런 설교는.

 

1번부터 차례대로 맞고 있다. 몇대인지는 각각 다르지만, 반 아이들은 다들 자신이 어느 강도로 맞을지를 안다. 학생주임이라 그런지, 아니면 단순한 새디스트기질이 있어 이런 이상한 핑게를 대는건지 그는 아이들의 머리카락길이를 보고 강도를 조절한다. 예를들어 가진이처럼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착하며 말그대로 모범생 티를 팍팍 내는 아이들은 살살 맞고, 나처럼 머리가 길고 매일 교내봉사, 사회봉사를 하느라 바쁘면 세게 때린다. 절대 불변의 법칙이며, 공평하지 못한 방법이다.

 

한번은, 이 방법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큰소리로 외치며 나의 의견을 말한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옆으로 찢어진 눈을 더 길게 찢으며 한마디, 아니 한 단어를 말했다.

 

"반항?"

 

반 아이들도 웃고있었고, 그도 약간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나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느낌에 웃을 마음도 들지 않았고, 의견을 말해도 반항이라고만 아는 바보같은 어른의 모습이 짜증 났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늘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만 본다. 나쁜 아이들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조금만 뭐라 말하면 훈육이 아닌 폭력을 쓰는 주제에 우리들을 보고 버릇이 없다느니 예의를 버렸다느니 하는 핑계만을 늘어 놓는다. 옳지 않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텐데.

 

 

조금 지나자 나의 차례가 되었다. 학생주임은 내 머리와 옷차림을 한번 들여다 본다. 정말로 재수없게, 나를 탐색하듯이. 정확히 말하자면 맹수가 먹이를 분석하듯이 그렇게.

 

"머리 길다!"

 

앞에 앉은 멍청한 녀석이 장난 스럽게 말했다. 의자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가, 그 소리에 울컥해서 뒤를 보고 외쳤다. '안길거든!' 뒤를 돌아보니 나와 꽤 친한 훈석이였다. 눈치없기는. 짜증이 치민다. 남이 맞는게 그렇게 좋은건지. 그러거나 말거나 신윤한, 학생주임이자 체육선생인 그는 나를 어느 강도로 때릴지 이미 정하기라도 한듯, 빨리 돌라고 말한다.

 

약 약 약 강 약 약 강 약 강 강 강 강

 

처음에는 음? 별거 아니네. 라고 생각했던 생각과 무색하게, 네번째에서는 모두에게 들릴만큼 퍽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꽤 버티고 있자 나중에는 아예 다 세게 때린다. 더이상 견딜수 없었다. 왠만큼 아프면 참을수 있겠지만. 앞에 가진이가 살살 맞는것을 봐서 그런걸까. 더 서럽다. 결국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아이들주변을 돌았다. 아이들은 뭔가 싶은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단 아이들 뿐 아니라 신윤한까지도.

 

"가위 좀 줘봐! 머리 자르게"

 

아이들이 또 킬킬거리며 웃는다. 장난처럼 들린걸까. 하긴, 사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말을 했다면 장난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을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아니었다. 진심이었고, 정말로 가위를 줄 아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런 내 진심을 읽은건지 유민이가 가방에서 가위를 꺼내 나에게 건네 주었다.

 

아이들이 웅성거린다. 그 소리가 뻔히 들린다. 진짠가? 진짜 자르려는 거야? 이제는 아무도 웃는 녀석들이 없었다.

 

거울에 다가섰다. 자르기 싫어. 온몸의 세포들이 외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픈것이 좋은것은 아니었다. 가위를 든 손이 떨린다. 그냥 장난이었다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너무 많은 길을 와버렸다.

 

"어쩔수 없어."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하고는, 싹뚝하고 짤라버렸다. 그야말로 싹뚝이었다. 눈물이 나온다. 머리가 긴게 무슨잘못이길래? 하여튼 이세상에서 제일 싫다 신윤한. 내가 어른이 되면 찾아가서 똑같이 복수해주리라.

 

"이거 그림으로 그려도 되겠다! 좋은소재."

 

만화가지망생인 주현이의 외침에 아이들 모두 푸하하 거리며 웃는다. 그 탓에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고 그대로 인 나 역시 실소를 터뜨렸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는 데. 나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리다가, 다시 맞으러 앞으로 나갔다. 맞기싫지만, 어쩔수 없었다.

신윤한도 꽤 멋적었는지 그다음에는 살살때린다. 그리고 내가 들어가자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하듯 아이들에게 말한다.

 

"머리 안잘랐어."
"되게 많이 잘랐어요!"

 

아이들이 변명하는 신윤한에게 말도안됀다는듯이 외쳤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외침이었다. 나로 인한 잠깐의 소동이 다 끝나자, 아주 순조롭게 다른 사람들이 맞기 시작했다. 왜 때리는거지? 머리때문에? 아니면 점수 때문에? 다 옳지 않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짜증나는 하루다.

 

 

체육 다음은 영어였다. 영어도 그다지 좋아하는 과목은 아니라서 서연이와 같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짜증나 죽겠어!! 아악! 망할 신윤한!"

 

발을 쾅쾅거려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화가 더 쌓이는 느낌이다. 정말 짜증난다. 제멋대로의 교사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대로 생각한다. 다가가려고 해도 비아냥 거리고, 의견을 말하거나 솔직하게 있으면 반항이라 한다.

어떻길바래? 얌전하게 아무리 화를 내도 가만히 있는건 억울하다. 같은 인격체에 그저 나이만 다를 뿐인데 너무 많은 차별을 받고있다. 모든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될수는 없는데, 교사들은 학생들이 모두 자신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듯, 맨날 설교에 설교다. 나의 말은 들을려고도 하지 않는다.

 

퉁명스러운거, 짜증이 차올라 나오는 욕까지는 잘못했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아무짓도 안했는데 다른애가 나를 짚어서 불공평하다고 나까지 벌점을 받게하거나 그런건 인정못한다. 절대 할수 없다. 권력남용인거다.

 

거울로 잘린 뒷머리를 바라보았다. 꽁지가 살짝 튀어나와 꽤 마음에 들었던 머리인데 지금은 별로다. 밍숭맹숭하고 깔끔하지 못하다. 다시 가위를 들고 다듬어 볼까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더 짧아지는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화장실에서 나오니 신윤한이 보인다. 서연이는 아직 화장실에 있다. 나는 학생주임인 신윤한을 째려보았다. 그도 아까 일이 생각난듯 멈칫거리더니, 주변이 조용한걸 깨닫고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면 다에요? 그럼 범죄자는 왜있어요?"

 

내가 까칠하게 말했다. 아직 사과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교사의 사과는 처음들어봐서 당황한것도 그에 한몫했지만. 신윤한은 잠시 망설이더니 나에게 무언가를 건네 주었다. 붙임머리였다.

 

"학교에서 쓰면 벌점에 빼앗겠다. 그렇지만 밖에서라면……."

 

신윤한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듯 말을 흐린다. 병주고 약주는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지만 이 호의마저 거절하면 머리를 좀더 다듬느라고 더 짧아질듯 해서 그의 선물을 빼앗듯 가져갔다. 그리고는 또 한번 신윤한을 째려보고는 후다닥 어학실로 뛰어가 버렸다.

 

어쩌면, 모든 교사가 자신의 행동을 학생의 탓으로 떠넘기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엄청 싫어하던 녀석이 알고 보니 착한녀석일때가 많았다. 사람들 많을때는 낯을 가리는 양 얼굴이 굳어지다가 몇명만 있을때는 분위기 메이커였던 녀석이다. 혹시 신윤한도 그런종류는 아닐까. 아니, 어쩌면 모든 교사가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붙임머리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시진
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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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
  • 201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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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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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
  • 200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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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맛킹// 저의 현재 학교 선생님이자, 전학교 선생님을 모티브로 따왔다죠. 어딜가나 이런선생님 한분은 있는거 같아요.

    • 2009-07-14 19: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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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이 강건마네요

    • 2009-07-14 16: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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