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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고 20년

  • 작성자 우하
  • 작성일 2009-10-29
  • 조회수 126

졸업하고 20년



20년 전, 그날의 아주 자그마한 약속.

―20년 뒤야. 잊으면 안 돼! 그때 꼭 꿈을 이뤄서…



오랜만에 집안 청소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 창문을 모두 열고나서 창고며, 책장이며, 온갖 곳의 물건들을 꺼내다가 거실 바닥에 늘여 놓았더니 발 딛을 틈도 없다. 짧은 생각 끝에 물건들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자 그제야 앉을 자리가 생겼다. 어제 밤늦게 편의점에서 주워 온 박스의 반대편을 테이프로 봉하곤 버릴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언젠가 집안을 샅샅이 뒤져가며 찾던 물건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때 좀 더 찾아 봤으면 좋았을 것을 끈기 없이 죄다 다시 사들인 탓에 같은 물건만 여러 개다. 그나마도 먼지며, 습기가 차서 하릴없이 버려야 하는 물건들뿐이었기에 박스에 넣을 때면 어김없이 한숨이 나왔다.

본래 많은 책을 읽기 보다는 몇 권의 책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를 좋아하는 까닭에 책장에서 나온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책 사이사이 종이를 껴 넣는 버릇 때문에 그것들을 골라내는 작업이 여간 까다로웠다. 모두 ‘여기라면 잃어버리지 않겠지’,하는 바보 같은 발상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마저도 어느 책에 껴 넣었는지 잊어버리기 일쑤였으므로 책을 훑는 족족 발견되는 누런 종이들에 내 자신이 한심해 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건네준 명함에서부터 중요한 서류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난 체육시간 끝나고 바로 하는 수업이 제일 괴롭더라 ㅜ,ㅜ

  맞아, 무지 피곤해! 난 체육들은 날마다 존다니까?

  ㅋㅋ나도나도!! 암튼, 빨리 집에 가고 싶다~!!               」


급기야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주고받던 쪽지까지 발견하고 나자 스스로 우스워져서 나도 모르게 웃고야 말았다. 하지만 정작 쪽지를 주고받던 상대가 떠오르지 않아, 잠시 뒤엔 꺼림칙해졌다.

그리고 내가 누렇게 바랜 종이를 발견한 것은 물건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뭐? 그래서, 너 정말로 가볼 생각은 아니겠지?”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 일이 그렇게 생 뚱 맞는 소리였나 싶어서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다.

“왜, 불만 있어?”

턱을 괴고 뚱한 소리로 답하자, 단숨에 내 양 볼을 잡아다 당긴 진희가 제 정신이냐며 덤벼 온다.

“당연하지, 이것아! 벌써 20년도 더된 일이라며. 나 같았으면 벌써 잊어버리고도 남았을 거라고. 게다가, 뭐? 조퇴까지 하고 가? 얼마 전에 연장휴가까지 다녀온 사람이 누군데, 네가 아주 목 날아가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나는 곧 진희의 말에 발끈한 큰소리로 대꾸했다. 걱정되어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쉬이 수긍해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나와 있으면 어떡해? 걔가 너무 불쌍하잖아!”

“네가 그 ‘불쌍한’사람이 될 거란 생각은 안 해 본거야?”

“그건 아니지만…….”

내게 남아있는 학창시절 친구는 단한명도 없다. 초등학생 때는 잦은 전학 때문에 친구들이 생길 리 만무했을 뿐더러 중학생 때 친구들과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모두와 연락이 끊어졌다. 유일한 낙이었던 고등학교 친구들마저도 멍청할 정도로 센 내 자존심의 문제로 팽개질한지 오래였다. 그때쯤 되자 인간관계에 이골이 나버린 나는 급기야 대학교시절을 아웃사이더로 지내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뒤늦게 인간관계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고 사귄 사람들은 전부 같은 회사 동료들뿐이다. 그래서인지 시기 좋게 찾아낸 롤링페이퍼가 나에게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몰라! 아무튼 갈 거니까, 그리 알아!”



오래된 롤링페이퍼를 발견 한 건 바로 3일전 이야기였다. 조금이라도 롤링페이퍼를 늦거나 빨리 찾았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기묘한 인연을 곱씹으며 낯익은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이 다 깨져서 울퉁불퉁하던 오르막길에는 새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고, 휑했던 운동장에는 작은 강당이 세워져있다. 학생 수에 비해 터너무니없이 좁았던 급식소는 한창 확장공사 중인지 출입금지 표지판을 내걸고 있었다. 이곳도 변해가는구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변함으로 인한 설렘과 아쉬움 사이에서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20년 전에도, 오늘도, 변함없이 서있는 학교의 본 건물을 보는 순간 그런 감정들도 눈 녹듯 사라졌다. 친구들과 정답게 담소를 나누던 학교정원 안의 벤치. 점심시간,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둥 살 둥 달리던 복도. 학교 창문가에서 내다보던 하늘……. 곳곳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향수에 사로잡혀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한번 골았다.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학교 건물을 눈에 담고 있던 나는 운동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회사의 오전 업무가 끝나자마자 곧장 조퇴를 하고 왔지만 시계바늘은 이미 약속시간을 훨씬 넘긴 뒤였다. 그럼에도 진희의 말마따나 20년 전에 한 약속을 누가 기억할까 싶어 움직임은 느긋했다. 만일 20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온 사람이 있을지언정 여기까지 온 그 결단력 때문에서라도 쉽게 돌아갈 것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굳이 누가 나와 주기 보다는 오랜만에 모교를 보고 오잔 생각이 더 강하기도 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을 줄이야…….

“너… 유란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긴 생머리를 보기 좋게 묶은 여성이 허리를 굽힌 채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아마도 먼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 온 모양이었다.

“너 맞구나! 난 약속 시간이 넘어도 아무도 오지 않아서 모두 바쁘나 보다 하고 있었어. 그런데 창문 밖을 내다보니까 네가 보이지 뭐야. 정신을 차려보니까 내가 정신없이 휴우… 뛰고 있었다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제대로 말을 끝맺은 상대가 반가움을 표했다. 이때 즈음이면 상대방의 이름이라도 불러줘야 할 것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낭패다. 진즉 졸업앨범이라도 찾아다 보는 것을 실수 한 것이다.

“나 기억 안 나? 선화잖아, 선화!”



선화는 인스턴트커피를 건네주며 자리를 권했다. 다시 학교에 발을 들어 놓을 때는 내가 결혼을 한 후, 내 자식들이 입학 할 때 즈음이나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런 기회로 학교 교무실 안까지 행차하니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유란이, 너 하나도 안변했다. 어릴 때 윤곽이 남아있어서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름이 튀어 나왔어.”

단정한 차림새의 선화는 줄 곧 웃는 얼굴이었다.

“나야 말로 놀랐어. 네가 선생님이 되 있을 줄은 몰랐거든. 게다가 배정받은 곳이 모교라니, 정말 놀랠 노자야.”

내 말에 선화는 눈웃음을 한번 짓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약속대로 변호사는 되지 못했어. 그래서 물론 내 준비물도 못 챙겼지.”

선화는 예전부터 무척 꼼꼼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정이 많아서 어떤 고민이든 간에 끈기 있게 들어주곤 했다. 당시 롤링페이퍼에 자신의 장래희망을 적던 선화는 당당하게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었다.

“아니야, 지금도 충분히 잘 어울리는 걸. 너답다고나 할까. 그리고 약속을 못 지킨 건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학교 인원수가 적은데다가 고만고만한 애들이 몰려있는 학교였다. 그래서 내신 따기가 무척 힘들었다. 결국 여러 차례 고민한 끝에 고2여름방학 이후로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했다. 가, 다 군에 넣었던 대학이 떨어지고 마지막에 붙은 학교는 안전 빵으로 적어두었던 이름 없는 지방대였다. 집안 형편상 편입이나 재수는 생각 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높은 곳을 향해 발을 내딛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존심에 심한 타격을 받은 나는 두 번 다시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어줍게 뒷머리를 긁적이자 선화는 다 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하지만 이루지 못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이런 절망감을 선화 또한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른 세 사람의 소식은 모르고?”

어색해진 분위기도 바꿔볼 겸 말을 꺼내자 선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진이가 전학가고 나랑 진이랑 둘이 한동안 연락을 했었어. 지금은 끊어졌지만, 그때 유일하게 휴대폰이 있었던 건 우리 둘 뿐이었으니까.”

선화는 자신의 지갑에서 낯익은 종이를 꺼냈다. 4번을 곱게 접은 롤링페이퍼였다. 선화는 종이 뒷면에 큼지막하게 적힌 20년 전의 약속을 보여주었다.

“진이 준비물이 자기가 연주하는 음악회 티켓이었지?”

선화는 손가락으로 진이가 써내려갔던 그의 장래희망을 가리켰다. 서툴지만 단정한 글씨체였다. 그리고 나는 곧 그가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음을 직감했다. 그 또한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아쉽게도 되지 못했어. 그 녀석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좋았잖아. 그 때문에 주변에서 많이 반대를 했다나봐. 예고를 가려고 했지만 부모님과의 충돌이 세서 결국 못 갔대. 외고도, 과학고도, 접수가 모두 끝난 상태이고해서 주변에 평범한 인문계학교로 진학. 지금은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들었어. 물론 이것도 다른 사람들을 거쳐 들은 거라 정확하지 않지만 말이야.”

선화가 혼자서 우리들의 소식을 알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했단 사실에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보면 선화는 나를 봤을 때 약속을 ‘잊었나보다’가 아니라 ‘바쁜가보다’라고 말했었다.

“그랬구나….”

진이는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여러 가지를 했지만,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건 피아노뿐이라며 무척 소중히 여겼다. 쉬는 시간마다 음악실로 뛰어가 피아노를 연습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가끔 장난삼아 ‘네 머리는 인류를 위해서 써야 돼!’라고 말 할 때면 ‘그래도 피아노가 더 좋아’라며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곤 했다. 실력도 좋아서 콩쿠르에 나갈 적엔 꼭 상을 하나씩 타오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진이가 피아노에 쏟았던 열정을 알기에 그 사실이 무척 서글프게 들렸다. 결국 모두 그렇게 꿈과는 어긋나는 길을 걷게 되는 걸까. 주변의 잣대와 기준에 억지로 자신을 끼어 맞추고는, 그렇게 달라지는 걸까.

“나, 수능을 망쳐서 내신으로 교대에 갔어. 소문난 꼴통학교였으니까 주변 학교보다 내신받기가 수월했거든. 나 같은 경우엔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뿐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죽도 밥도 안 됐을거야. 그리고 나니까, 능력이 없어도 문제지만,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 한다는 게 더 슬픈 일 같단 생각이 들더라.”

선화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모금마셨다. 식어서 미지근하다.

“그리고 아쉽게도 시호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도 몰라.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아름이와 기적적으로 만나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지. 우연히 우리 학교 이름을 인터넷에 쳐보니까 아름이 블로거가 나왔거든.”

시호는 네 사람과 여러모로 트러블이 많은 사람이었다. 모두 힘들게 잡은 약속시간에 혼자 내빼기 일쑤였을 뿐더러 자기중심적인 성격 탓에 누구도 마음을 트고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다섯이 흩어질 적에 가장 먼저 우리를 잊는 사람은 시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일까. 이미 예상했던 일을 확인 받는 기분이었기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 하지만 아름이의 소식은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아름이 말이야. 약속을 지켜줬어.”

새 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롤링페이퍼를 한 적이 있었다. A4크기의 색지에다가 쓰는 것이었는데, 모두 간략하게 한마디씩 적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뒷면은 거의 백지 상태였다. 그것이 허하다고 생각한 진이는 타임캡슐을 떠올리곤 그와 유사하게 졸업한지 20년 뒤인 오늘 만나는 것은 어떻겠냐고 우리들에게 제안을 해왔다. 어리둥절하면서도 낭만적인 약속에 전원 찬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래희망을 쓰자는 둥, 그에 따른 준비물을 가져오는 것은 어떻겠냐는 둥 참 말이 많았다. 각자 그럴싸한 꿈도 있었고, 이룰만한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장래희망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아름이에게 선생님이 제격일거란 말을 꺼낸 것은 바로 우리였다.

“사실 자기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우리들 덕분이라며 고마워했어. 그때 그 말을 듣고 롤링페이퍼에 직접 ‘선생님’이란 직업을 적은 후로 무의식중에 선생님이 돼야겠단 의무감이 솟았다나봐. 그게 아니었다면 자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상상도 안 간다며 웃었어.”

“그게… 정말이야?”

선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있었구나. 꿈을 이룬 사람이. 끝까지 우리들의 약속을 지켜냈던 사람이. 모두의 꿈과 기대했던 미래가 부서지고, 무너져버려도 끝까지 올곧은 길을 걸어준 사람이 있었어.

“그리고, 이거. 아름이가 보낸 준비물이야. ‘현재 가르치고 있는 반 아이들의 전체사진’. 아쉽게 학교 수업이 있어서 오지 못할 것 같다며 무척 아쉬워했어.”

가슴이 설렜다. 언제든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어 주던 선화. 어질고 모든 일에 꾸준하던 아름이와, 줄곧 하나의 꿈을 좇아 달리던 진이. 그리고 털털하고 장난끼 많은 시호까지. 오래전 묻어두었던 소중한 나의 친구들과 잊고 살았던 여러 소중한 인연들…. 나는 곧 한명 한명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느꼈던 여러 감정의 교차점이 ‘그리움’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과거를 쫓아 여기에 오기까지, 분명 평범하지 않은 인연의 끈이 서로를 잡아끌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리라.

가슴 한 컨이 쩌릿해져 온다. 선화와 서로 진하게 지어진 미소를 나누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맑은 하늘, 함께 꿈을 나누던 그때 그날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20년 뒤야. 잊으면 안 돼! 그때 모두 함께 꿈을 이뤄서, 끝까지 해냈노라고, 크게 한 번 웃어 보는 거야!

우하
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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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하
  • 200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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