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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관계학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0-02-06
  • 조회수 576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지현이가 조금 더 예쁘게 보였다는 거?

 내가 기분이 좋은가보다 했다. 기분이 좋으면 뭐든 좋아 보이잖아. 그리고 ‘친한 친구 예쁘게 보이기 효과’가 오늘따라 조금 더 강하게 작용하는 걸 수도 있고.


 “우리 사겨볼래?”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냥 지금처럼 친구같이. 뭐 싫어도 어색해지지 말고 지금처럼 지내자.”

 “누가 고백하나보다.”

 같이 올라가던 친구가 킥킥댔다.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어쩌다가, 하필이면.

 “..어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고백을 들어야 하는 건지.

 “그러자.”

 나의 다른 가장 친한 친구에게 고백하는 것을.

 어째서인지 가슴이 찌르르 울린다. 어처구니없게도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천천히 밝아졌다.

 “야, 뭐해? 방해하면 안 되지. 내려가자.”

 친구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꿈처럼 멀게 들려왔다.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억지로 발을 움직여 소리 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지현이의 고백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김현승은 내 소꿉친구이다. 부모님들끼리 친하고 서로 나이도 같아서 어렸을 적엔 자주 놀러가 놀았었다. 그 땐 둘 다 낯가림이 별로 없어서 남자 여자끼리여도 제법 친하게 어울렸는데, 초등학교 이후로는 서로 마주쳐도 인사도 거의 하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부모님끼리의 교류가 적어진 탓도 있었고 서로 다른 중학교에 들어간 탓도 있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지현이와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는데, 운 좋게도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같은 반이 되면서 우정을 계속 이어왔다. 나는 원래 친구를 많이 사귀지 않아 몇 안 되는 우정을 깊게 유지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예쁘장한데다 성격이 서글서글해서 친구가 많은 지현이 나와의 관계를 깊게 여겨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내가 김현승과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된 것을 안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방학이 막 끝난 8월 말, 지현이와 함께 매점에 갔다가 우연히 시끄럽게 투닥거리고 있는 남자애들 무리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어?”

 “이혜원?”

 내가 생각해도 웃길 만큼 높은 목소리가 나왔고, 김현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가볍게 인사하고 사라지기도 민망해져서 우리는 간단히 안부를 묻고 서로 반을 알고 헤어졌다.

 “누구야?”

 “그냥 옛날 소꿉친구.”

 김현승과 헤어진 직후에 나는 지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마 김현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 그 땐 그랬다. 그저 옛날 소꿉친구였다.

 그 정도의 만남인 줄만 알았는데, 그 이후로 김현승이 내 반을 자주 찾아오면서 ‘옛날 소꿉친구’였던 김현승은 ‘친한 남자 친구’가 되었다. 정말 김현승은 툭하면 우리 반을 찾아왔다. 이혜원, 수학책 좀. 이혜원, 프린트 좀. 이혜원, 샤프 좀. 하도 찾아와 대서 나 말고 빌릴 사람 없냐, 왕따냐며 농담을 했더니 너 보고 싶어서 온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없을 때 찾아온 적도 많은지 어느새 김현승은 지현이와도 제법 친해져 있었다. 김현승은 가끔 집에 갈 때 우리와 합류하기도 했다. 오히려 지현이와 김현승 둘이 연합해서 나를 공격하기도 할 정도로 우리 셋은 누가 먼저 친구였고 할 것 없이 서로 친해져버렸다. 불과 몇 달 만에.

 그렇게 새로 시작된 관계에 대해 나는 대단히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도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인 ‘친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평소에는 짝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셋이 다니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 관계에서는 지현이와 나는 여자끼리라는 연결고리로, 나와 김현승은 소꿉친구라는 연결고리로 내가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지현이와 김현승, 둘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나를 빼놓고 둘이 어울릴 순 없었다. 내가 그 둘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방과 후엔 지현이와 함께 집에 가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현아 나 먼저 갈게.”

 “어? 왜?”

 “나 어디 갈 데 있어서...”

 “왜 같이 가! 어딘데 멀어?”

 오늘따라 지현이의 다정함이 가슴 아프다.

 “아니... 도서관.”

 “뭐야~ 그것도 같이 못 가 줄까봐. 같이 가자.”

 왜 그러는 거야? 다른 애들처럼 왜 적당히 알아듣지 못해. 혼자 가. 혼자 가고 싶지 않아서야? 아니면 나와 같이 가고 싶어서야? 왜? 단순한 우정?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꼭 붙어 다니려 노력하는 것은 친한 친구끼리의 당연한 우정의 표시다. 단순한 우정이라니? 그게 아니면?

 이상해.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졌다. 혼란스럽다.


 엉터리로 둘러댄 덕분에 정말로 도서관에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 집과 반대방향으로 십 분이나 걸어야 하는 도서관에 가는 중이다. 지현이는 가는 내내 들뜬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나 역시 나대로 복잡한 기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걷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지현이었다.

 “나 현승이한테 고백했어.”

 왠지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어.. 진짜?”

 “응. 놀랐지. 내가 현승이 좋아하는 거 티 안 났어?”

 “어어.. 몰랐어.”

 “뭐야, 베프라는 게 그것도 몰랐단 말야?”

 “...미안.”

 “뭐야~ 왜케 시무룩해 미안해지게. 야, 현승이도 사실 나 좋아했대. 나 진짜 놀랐어. 그냥 호감정도로도 만족했거든.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두 사람이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거 정말 신기하지 않아? 정말 기적 같아. 나 이런 거 처음이거든...”

 지현이는 도서관에 들어서자 목소리를 낮췄다. ‘처음이거든...’ 하는 목소리가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수줍은 목소리 같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지현이는 푹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 보니 입술에 립글로스도 바르고 파우더도 살짝 한 것 같았다. 고백한다고 신경 썼구나. 언제부터였을까. 김현승을 좋아한 건. 그리고 현승이 지현을 좋아한 건.

 지현이의 옆모습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 감정에 솔직한 얼굴이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도 붉은 티가 나지 않는 뻔뻔한 철면피 면상인데. 저 얼굴을 식히고 싶다. 어째서 지현이 현승을 좋아하는 것에 화가 나는 걸까. 나는 손을 가져다 지현이의 볼에 댔다.

 “어?”

 지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 좀 식혀 멍청아. 아주 좋아 죽겠다고 온 세상 사람들한테 알려라. 그렇게 좋냐?”

 지현이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어.”

 다시, 가슴이 찌르르 울린다. 이번에도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김현승은 오전시간동안 단 한 번도 우리 반에 찾아오지 않았다. 지현이는 쉬는 시간마다 계속 출입문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엎드렸는데,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지현이가 현승을 의식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현에게 다가갔다.

 “야.”

 “어?”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지현이가 놀란 듯 목소리를 냈다.

 “교과서 빌리러 같이 가자.”

 “어어..”

 어쩐지 실망한 것 같은 표정. 나는 또다시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지현이와 함께 반을 나왔다.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해서 걸었다.

 “몇 반 가?”

 “왜?”

 “아니 그냥.”

 “응.”

 나는 지현이가 현승의 반으로 가는지를 묻고 싶은 것임을 눈치 챘지만 의식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 반 복도로 들어서자 지현이가 갑자기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다.

 “왜 갑자기. 빌리고 같이 가 오래 안 걸려.”

 “아니 급해서. 먼저 가.”

 넌 정말 거짓말 못할 녀석이다. 빨개진 얼굴은 어떻게 할 건데.

 “야, 김현승한테 안 가. 그냥 따라와.”

 슬슬 도망가려던 지현이가 멈칫했다. 속을 들켜서 화가 난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짐짓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게 무슨 상관이야. 화장실 급하다니까.”

 하고는 재빨리 위층으로 도망쳐버렸다.

 아주 거절당했으면 큰일 날 뻔 했어 그래. 나는 혀를 쯧쯧 차며 현승의 반으로 갔다. 사실 김현승 말고는 남자애들 중에 빌릴만한 친한 녀석은 없었다.

 “어라 웬일이냐?”

 김현승이 정말 웬일이냐는 표정을 지어서 나는 엄청나게 무안해졌다. 이럴 땐 철면피 면상이 조금 고맙기도 하다.

 “영어 좀.”

 “니 친구들한테 빌리지 여기까지 왔냐.”

 “너 보고 싶어서.”

 옆에 있던 친구들이 오오오, 환성을 보냈다. 김현승이 뭐야, 하면서 피식 웃었다. 책을 가질러가는 현승에게 한 명이 누구냐? 라고 물었다.

 “소꿉친구.”

 “소꿉친구가 보고 싶다고 책 빌리러 남자 반까지 찾아 오냐? 애인 아냐?”

 “아냐 병신아. 내가 미쳤다고.”

 김현승은 책을 대충 던져주고 그런 말을 한 친구와 한판 레슬링을 벌였다. 내가 인사를 했지만 못 들은 것 같았다. 무안한 기분에 그냥 가려는데 현승이 야, 이혜원, 하고 불렀다.

 “임지현 같이 안 왔냐?”

 “어~ 어.”

 같이 왔지만 도망갔지.

 “그러냐. 잘 가라.”

 교실 문이 닫혔다. 문턱에 굴러다니던 체육복 하나가 문에 끼어 구겨졌다. 나는 둘의 반응이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로 드는 이 씁쓸한 기분이 뭘까 생각했다.


 방과 후에 김현승이 우리 반에 찾아왔다.

 “같이 가자.”

 “어.”

 지현은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싸고 있었다. 내가 가방을 느리게 싸자 가방을 다 싸고도 서랍을 들쑤시고 사물함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현승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김현승은 그런 지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임지현 하는 짓 봐라.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아, 근데 나 오늘 갈 데 있는데.”

 “어? 어딜?”

 지현이에게서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도서관.”

 “같이 가.”

 “야, 난 도서관 가면 집 멀어.”

 김현승이 툴툴거렸다.

 “그럼 나 혼자 갈게. 둘이 가.”

 “왜, 같이 가.”

 빨개진 지현이의 얼굴을 보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데이트 할 기회를 대놓고 만들어주는데도 바보같이. 나 간다!”

 당황한 지현이의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반을 나왔다. 뒤에서 김현승이 따지듯이, 야, 너 말했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여섯 살 꼬맹이들 연애하는 걸 보는 기분이 들어 크크크 짓궂게 웃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며칠 동안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함께 하교하기를 피했다. 처음에 지현이는 완강히 거부하며 나를 붙잡으려 노력하더니, 조금 지나니 아예 포기한 듯 먼저 잘 가라며 인사를 해주었다. 혼자 하교하면서부터 mp3 충전 주기가 짧아졌다. 하지만 쓸쓸하진 않았다. 혼자 mp3를 들으며 조용히 가는 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풋풋한 연애 초기인 그 녀석들의 데이트거리를 마련해주는 데에 엄마 같은 기분을 느끼며 뿌듯하기도 했다. 둘이 같잖게 수줍은 척 하며 집에 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피식피식 웃다가 이상한 시선을 받기도 했다.

 

 어느 새 기말고사 시즌이 되었다. 그 동안 임지현 김현승 커플은 제법 아이들 사이에 알려졌다. 지현도 현승도 그런 걸 숨기는 성격도 아니었고, 김현승이 뺀질나게 반에 들락거리며지현이에게 이것저것 잔소리하거나 먹을 걸 갖다 줬기 때문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이제 김현승의 얼굴을 익혀서 현승이 나타나기만 하면 자동으로 지현이를 불렀다. 나와 그보다 더 오래 어울렸을 때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확실히 인기인과 그렇지 않은 아이는 달랐다. 임지현과 김현승 커플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지만, 이혜원 임지현 김현승 콤비를 기억하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나는 예전의 자리를 찾는 데 약간 고생을 했다. 지현이와 김현승과 함께 다니면서 다른 친구들에게 조금 소홀했기 때문이다. 지현이는 셋이 함께 다니면서도 자기와 함께 노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전혀 문제없이 지냈는데. 아마도 나는 우리의 관계를 너무 좋아했던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과의 우정보다 더 우선시하고 싶을 만큼.

 함께 다니는 친구들과 있으면서 둥둥 뜬 것 같은 기분을 한동안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나는 더 오바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럴수록 집에 돌아오는 길의 허탈한 기분은 매일 나를 우울하게 했다.

 기말고사 일주일 전의 방과 후, 나는 지현에게 도서관에 가자고 했다. 사실 원래는 이주일 전부터 같이 공부를 했었고, 지현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었다. 기다려도 지현이 먼저 말하지 않자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아...”

 지현이가 머뭇거렸다.

 “미안해 혜원아... 나, 현승이랑 같이 공부하고 있거든...”

 “아 그래..?”

 “진짜 미안.”

 지현이가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놀렸다.

 “첨엔 멍석 깔아줘도 제대로 못하더니 이젠 아주 모든 사람한테 닭살을 전파하시겠어.”

 “뭐라고?”

 “시험공부 같이하는 커플 치고 성적 제대로 나오는 놈 없다더라.”

 “너 저주하는 거냐, 지금?”

 “아니 보통 그렇다고. 누가 너희가 그렇댔나.”

 툭탁툭탁. 가벼운 몸싸움을 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공허해졌다. 굳어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나는 고개를 저편으로 돌렸다.

 “간다.”

 “잘 가.”

 교실 문을 나서자 당연하다는 듯 김현승이 우리 반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현승이 손을 들어보이자 나는 어깨를 손으로 툭 치고 지나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mp3를 켜니 배터리가 없었다. 어제 밤에 깜빡하고 충전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mp3까지 듣지 못하니 공허한 기분이 심화되어 점점 멍한 상태가 되어간다. 멍한 상태로 걷다 보니 보폭이 작아져 걸음이 느려졌다. 천천히 발을 옮기면서, 나는 처음에 지현이의 고백을 엿들었을 때 어째서 가슴이 찌르르 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그때, 우리들의 관계가 달라질 줄을 미리 알았던 것이다. 한 때 둘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던 나는 알콩달콩한 커플을 방해하는 천덕꾸러기 친구가 되었다. 관계의 이미지를 판단하는 것은 누가 서로를 먼저 알아왔고와는 상관없다. 관계의 깊이 정도에 따른 것이다. 그 둘의 관계의 깊이는 여자끼리의 의리와 우정이나 소꿉친구로서의 관계의 깊이에는 댈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지현이는 여전히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김현승 역시 가장 가까운 남자인 친구이자 소꿉친구이다. 달라진 것은 지현과 현승 사이의 관계뿐이다.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공허한 기분이 드는 걸까.

 15분 거리를 30분 동안 걸어 집에 도착했다. 따뜻한 집에 들어서자 추웠던 몸이 나른해졌다. 이불속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며 나는 그 답을 찾았다.

 나는, 그 관계에서 우위에 서고 싶은 것이다. 내가 지현에게 바랬던 것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높은 가치를 두고 가장 깊은 우정을 베푸는 것이었다. 현승에게도 역시 ‘여자’인 친구 중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겨주길 바랬다. 나에겐 그 두 명이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그들은 나만을 가장 친한 친구로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 이기적이다. 나는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말고사를 어떻게 본지도 모르게 마쳤다. 결과는 보나마나 엉망일 것이다. 기말고사 동안 지현과 현승은 계속 도서관에 함께 다니는 듯 했다. 아무리 공부하는 커플 잘 되는 법 없대도 저렇게 기분 좋은 상태로 공부하면 나 같은 상태보다는 성적이 잘 나올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더욱 우울해졌다.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 날은 소풍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씩이나 되어서 소풍으로 가는 것이 고작 선유도라니. 하지만 아이들은 사복차림으로 남자애들을 만날 것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같은 학교에서 맨날 보는 남자애들이 사복차림으로 본다고 갑자기 너희한테 반할 것 같냐. 그렇게 빈정대고 싶었지만 들뜬 아이들의 기분에 초치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기말고사 마지막 날, 모든 시험이 끝나고 지현이 내 자리로 왔다.

 “선유도 가서 같이 다니자.”

 “어? 왜?”

 “왜라니~. 요즘 우리 같이 안 다녔잖아. 현승이랑 셋이서, 어때?”

 지현이는 너무나 착하다. 그리고 맑다. 우리가 아직도 셋이 함께하던 그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우리는 달라졌다.

 “아냐. 둘이 다녀.”

 “뭐야, 섭하게 혼자 빼기야?”

 “나 요즘 내 친구들하고 같이 안다녀서 서운해 하거든.”

 “나 현승이랑 둘이 붙이려고 요새는 계속 다른 친구들하고만 놀았잖아.”

 “...그냥 친구들하고 있을게. 그게 편할 것 같아서 그래.”

 “그래..?”

 지현이는 조금 얼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지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미안하지만 이제는 지현이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변했다.


 여느 때처럼 mp3를 들으며 집에 가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거칠게 떠밀었다.

 “아 씨.”

 “야, 소리를 얼마나 크게 하고 듣길래 이렇게 크게 불러도 못 듣냐?”

 “어, 김현승.”

 현승은 꽤 멀리서부터 뛰어온 듯 한참동안이나 숨을 몰아쉬었다. 지현이는 보이지 않았다.

 “지현이는?”

 “내가 맨날 임지현하고만 다니는 줄 알아.”

 “맞잖아.”

 “어... 그렇긴 하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현이는.”

 “어디 갈 데 있어서 나 혼자 왔어.”

 어디 갈 데가 있다라... 자리를 만들 때 쓰는 술수의 냄새가 났다. 그 예상이 맞다면 김현승이 여기까지 쫓아온 건 분명 뭔가 할 말이 있어서겠지.

 아니나 다를까 숨을 고르자마자 김현승은 입을 열었다.

 “야, 왜 너 선유도에서 우리랑 같이 안다녀?”

 “아아, 지현이가 뭐라 했냐.”

 “너 요즘 우리 피한다고 지현이가 얼마나 섭섭해하는 줄 알아? 이게 다 나 때문이라면서 나 구박한단 말야. 제발 나 구하는 셈 치고 같이 다녀주라.”

 웃음이 나와야하는데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현승이 나와 함께 다니자고 부탁하는 건 지현이 그러기 바래서일 뿐이다. 지현이 나와 함께 다니려는 이유는 그간의 우정에 대한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나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챙겨지는 약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싫어.”

 “야아~.”

 “미안해. 나 너희랑 어울리면서 내 친구들이 좀 섭섭해했어. 그 친구들 신경써줘야 할 것 같아.”

 “그런 건 평소에 네가 잘 했어야지. 나는 내 친구들이랑 잘만 지냈는데. 제발 이번 한 번만...”

 “그래!!”

 나는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현승이 화들짝 몸을 떨어뜨렸다. 나는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했다.

 “나는 너희들처럼 성격이 좋지 않아서 친구들 섭섭하지 않게 너희들과도 잘 지낼 수가 없어. 그런데도 나는 너희하고만 어울렸어. 너희가 좋았으니까.”

 현승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현이가 짓는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던가. 그 표정을 보자 나는 더욱 울컥했다.

 “난 이제 너희 사이에 껴서 불편한 기분만 들어. 내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 울컥,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현승을 두고 뛰어가 버렸다. 김현승은 나를 부르지도 쫓아오지도 않았다.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현승을 생각하니 화가 나면서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선유도에 가는 날 나는 반에서 지현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자 반 쪽에 갔다 온 지현이는 계속 내 쪽을 힐끗거리며 갸웃거렸다. 현승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지현이가 같이 앉자고 하기 전에 내 친구들과 버스에 앉았다. 버스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같이 다닐 친구들과 함께 있는 편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지현이는 나를 잠깐동안 쳐다보더니, 자신의 친구와 함께 앉았다.

 지정된 견학장소를 둘러보고 두시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주변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자리에 앉아 계속 얘기를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나는 앉아서 얘기를 듣고 있었다. 지현과 현승과 함께 다녔다면 이렇게 있지 않았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파왔다. 이제는 가정으로만 쓸 수 있는 과거의 얘기였다.

 “야, 저기 좀 봐.”

 갑자기 친구들이 킥킥대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곳을 바라보니 천천히 걸어 다니며 얘기를 나누는 김현승과 지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 옆의 가상의 모습을 하나 더 그려보았다. 지현이, 나, 김현승. 저렇게 조용하고 얌전하게 걸어 다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어떤 친구들 부럽지 않은 우정을 과시하며 시끄럽게 떠들고 치고 박겠지. 나는 심장이 옥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야, 쟤네들 따라가 볼래?”

 “그럴까?”

 “야.. 우리 여기 앉아있자.”

 “왜~ 너 아까 걸어 다니고 싶다며.”

 “나... 속이 좀 안 좋아...”

 “괜찮아, 혜원아?”

 친구들 중에서 나와 가장 사이가 가까운 한 친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가 혜원이랑 같이 있을게. 너희는 갔다 와.”

 “오케이~. 혜원아 속 괜찮아지면 바로 따라와야 돼!”

 친구들은 내게 걱정스러운 말을 한 마디씩 남기며 지현과 현승을 따라 사라졌다.

 “많이 안 좋아?”

 친구가 등을 두드려줬다. 등을 툭툭 두드리자, 우습게도 눈에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나는 당황했다. 울 정도는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혜원아, 울지마~. 많이 아파?”

 친구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그만 친구를 붙잡고 펑펑 울고 말았다.


 선유도에 다녀온 이후로 지현이와 김현승은 내게 서먹서먹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지현이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김현승은 복도에서 보아도 인사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나는 집에 갈 때 인사도 없이 반을 빠져나왔고, 지현이도 잘 가란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태도를 바꿨으니 잘못이 있다면 오히려 내게 있겠지만 나는 그 애들의 달라진 태도가 내심 섭섭했다.

 ‘이혜원, 이중적인 짓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생각하며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 했지만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현, 현승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되면서 나는 본래의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학교를 가는 토요일, 방과 후 우리는 교복 차림으로 우루루 근처 대형문고로 몰려갔다. 다른 친구들은 팬시를 보러 갔고, 나는 팬시엔 관심이 없어 소설 쪽을 뒤적이며 조용히 책이나 읽을까 했지만 자꾸 옆에서 친구가 말을 걸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 아이도 역시 팬시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책을 읽겠다고 하니 엄청나게 갈등하다 결국 나와 함께 남았다. 친구를 혼자 두면 안 된다는 쓸데없는 의리심이 발동한 것 같지만 이렇게 귀찮게 굴 것이라면 혼자 두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예쁘지.”

 친구가 손에 쏙 들어 올만한 작은 크기의 책 하나를 들어보였다.

 “명언집이네. 이게 왜 소설 코너에 있지?”

 “이거 살라고 아까 저쪽에서 들고 왔어. 나 명언 보는 거 좋아하거든.”

 “그래.”

 명언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멋있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갖기 마련이니까. 사람들은 명언을 보면서 스스로가 계몽되는 느낌을 받고, 자신이 의식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 중에 진실로 한 가지라도 가슴에 품는 사람은 백에 한 명도 없다.

 “나는 이 말 좋아해.”

 “어떤 말?”

 “우정이란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때? 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명언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지어낸 그럴듯한 말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멋있네.”

 “그치?”

 나는 다시 소설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문득,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봤는데, 그 말 잘못된 거 같애.”

 “어? 뭐?”

 “우정이란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게 왜?”

 “우정의 정의는 친구 사이의 정이잖아. 그런데 정이란 건 사랑의 개념인데, 어떻게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겠어?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겠지만 그건 상대를 필요로 한다는 전제 하에서야.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만 되고 싶다는 게 우정이라면 봉사의 개념과 뭐가 달라.”

 “그런가?”

 “상대방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상대방이 자신으로 해서 즐거움, 편안함 같은 긍정적인 반응을 갖길 원하는 건데, 우리는 그런 걸 보면서 우리 역시 즐거움, 보람 같은 긍정적인 반응을 갖게 되잖아. 결국 상대방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거야. 상대방을 우회적으로 필요로 하는 거지.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꼬였달까.”

 “음... 그럼 바꿀까? 우정이란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둬. 그게 더 그럴듯하잖아.”

 그랬다. 내가 예전에 지현과 현승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자기 만족감. 그것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의 감정을 깨닫고 나니 나의 현재 감정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 그들이 나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내가 그들이 필요하다.

 친구가 옆에서, 근데 그거 어차피 고칠 순 없어, 명언이잖아, 라고 뒤늦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감정을 깨달은 건 너무 늦은 뒤였다. 엎질러진 물은 휴지로 흡수해서 다시 담을 순 있어도 그 양과 질이 다르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물을 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빨리 준비를 했다. 교실에 들어서면 지현에게 안녕, 인사를 해야겠다. 나는 지현이의 무표정한 얼굴, 짜증난 얼굴, 어색해하는 얼굴을 차례로 상상하며 인사를 연습했다.

 부엌으로 와 보니 식탁에 미역국이 차려져 있었다.

 “생일 축하해 딸.”

 “어? 오늘 내 생일이예요?”

 “얘는.”

 나는 핸드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맞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 친구들하고 약속 없어?”

 나는 순간적으로 지현과 현승을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선물이나 줄지 의문스럽다.

 “없어.”

 “그럼 학교 끝나면 일찍 들어와. 너 좋아하는 초밥 먹으러 가자.”

 “응. 고마워요.”

 나는 문득 생일 축하 문자를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친구들이야 내가 생일을 알려주지 않아서 모른다 쳐도 지현과 현승은 알고 있는데.

 “잘 먹었습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먹은 것이 얹혔는지 속이 더부룩하다.


 교실 문을 열자 아이들이 문가를 돌아본다. 그 중에는 지현도 있었는데, 지현이는 고개를 돌리려다 내가 안녕, 하니 당황한 표정으로 어, 안녕, 했다. 내가 자리에 가서 앉자 내 쪽을 힐끔거리던 지현이가 내 자리로 왔다.

 “생일 축하해.”

 “아! 고마워.”

 “현승이도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달래.”

 그런 말은 없었을 것이다. 했다면 직접 와서 했겠지. 생일빵이라도 한 대 먹이면서.

 지현이는 작은 상자를 주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지현이의 선물을 풀어보았다. 목걸이었다. 언젠가 둘이 함께 들린 액세서리 가게의 상표가 달려 있었다. 내가 그 가게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을 기억해둔 모양이었다. 지금처럼 어색한 관계인데도 나를 생각해서 이런 선물을 골랐다고 생각하니, 아직은 그래도 완전히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임지현!”

 교실 뒷문이 쾅 하고 거칠게 열렸다. 반 전체가 뒷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현승이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왜.”

 지현이는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눈은 현승을 쏘아보고 있었다.

 “나와.”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나와!”

 반 전체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동요하지 않은 건 지현이 뿐이었다.

 “지현아, 괜찮아?”

 “괜찮아.”

 지현이는 친구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교실을 나갔다. 교실은 순간 해동되어 다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친구들이 현승과 지현에 대해 떠드는 것이 보였지만 같이 떠들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자리에 엎드렸다.

 한참 뒤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교실이 조용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현이 자기자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현의 표정은 침착해 보였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지현의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지현아, 무슨 일이야? 라고 끊임없이 물어댔다.

 “아무 것도 아니야.”

 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엎드렸다. 그러자 지현아, 울어? 하는 여자애들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안 울어. 피곤해서 그래.”

 지현이 약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자 여자애들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고 저희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교실도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래도 그 아이들은 지현이 진상을 말해줄 것이라 기대하는지(여자애들에겐 우정의 표시로 고민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쉬는 시간마다 자리에 엎드리는 지현에게 계속 말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현이는 그 모든 것을 냉담하게 끊어내고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하루 종일 주변의 공기를 다운시키던 지현은 집에 갈 때야 내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같이 가자.”

 “어어.”

 나는 지현의 친구들의 호기심어린 눈빛을 받으며 교실을 나왔다. 하지만 지현은 집에 가는 내내 땅만 보며 걸었다. 아무 말도 없이 멀뚱멀뚱 걸으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옛날에는 아무 말 없이도 편했었는데. 이 어색함은 지현의 기분 탓도 있지만 달라진 관계의 탓도 어느 정도 있었다.

 지현은 갈림길에 도착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집 좀 잠깐 들렸다 가라.”

 “나 오늘 집에 일찍 가봐야 되는데...”

 “할 얘기 있어서 그래.”

 지현이 무거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어. 엄마. 미안한데 나 오늘 일찍 못 갈 것 같아요. 미안, 갑자기 그렇게 됐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미안 미안. 내일 먹으러 가요. 응, 미안해요.

 통화를 하는 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현은 통화가 끝나자 주스 한 컵을 건넸다.

 “고마워.”

 우리는 한참동안 말없이 주스를 마셨다. 내가 아껴마신다고 천천히 마셨는데도, 내가 주스를 다 마셨을 땐 지현은 여전히 절반이 넘게 남아있는 컵을 들고 있었다.

 “나 현승이랑 헤어졌어.”

 “어?”

 나는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을 만큼 놀랐는데, 정작 본인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지현이는 다시 잔을 기울여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도 모를 만큼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너 때문이야.”

 “뭐?”

 딩동.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지현은 방에 있어, 라는 말을 남기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 때문이라니? 나는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달칵. 지현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구야? 하고 묻자 지현이 엄마라고 대답했다.

 “인사해야 하는 거 아냐? 친구 왔다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지현이 방문을 닫고 가로막았다.

 “됐어. 하더라도 이따 해. 아직 얘기 안 끝났잖아.”

 나는 지현의 얼굴을 보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현의 얼굴이 전에 없이 단호했기 때문이다.

 “너 우리 사귄 이후부터 왜 우리 피했어.”

 지현이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적 없어.”

 젠장, 목소리가 덜덜 떨려나왔다.

 “그랬잖아.”

 “아니야.”

 “거짓말 마.”

 내가 생각해봐도 어처구니없는 발뺌이다.

 “...어. 그랬어.”

 “왜?”

 “......”

 왜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김현승에게 울며 했던 말들을 다시 해줘야 하는 건가? 다행히도 지현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 너 때문에 계속 싸웠었어. 나는 우리가 사귀는 것 때문에 너와 사이가 멀어질 줄은 몰랐으니까. 현승이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힘들었어.”

 “......”

 “그래서 내가 현승이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걔 때문에 너랑 멀어지는 거 싫다고. 화 많이 내더라. 결국엔 걔도 질렸는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

 “......”

 “혜원아, 그니까...”

 지현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나는 지현이를 꼭 안아주었다. 지현이를 달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내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미안.”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그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현이가 황급히 몸을 빼고 눈물을 닦았다. 나도 서둘러 눈을 비비는데, 지현이가 갑자기 문을 열었다.

 펑!

 “서프라이즈!”

 어이없게도 문 밖에 서 있는 건 폭죽을 든 김현승이었다. 내가 폭죽소리에 놀라 얼빠진 얼굴이 되자 지현이 킬킬 웃기 시작했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감동 신파 우정 드라마!”

 지현과 김현승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뭐야, 이거.

 “뭐야, 이혜원 울었냐? 우와, 저 이혜원이 울었어!”

 “야 나도 울었어. 큭큭큭, 눈물 한 방울 짜내기 어찌나 어려운지.”

 “야......”

 상황 파악이 되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피식피식 입을 비집고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너 이 새끼들 다 죽었어!”

 너네 오늘 아주 제삿날인 줄 알아라.


 “아까 학교에서 센 척 하는데 존나 쪽팔리더라. 내가 소리 지르고도 내가 놀랐다니까.”

 “나는 아까 교실 들어와서 울어야 되는데 울음이 안 나오는 거야~ 크크큭. 그래서 괜히 울음 참는 척 기분 안 좋은 척 엎드려 있었잖아. 그래도 그럭저럭 먹힌 것 같애. 애들 쫄아서 오늘 하루 종일 나한테 말도 못 걸고.”

 거실은 어느새 제법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풍선과 리본을 매 놓은 게 전부였지만. 저거 풍선 크기 다른 거 봐라. 김현승 센스 하고는.

 그들의 설명에 따라 사건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이혜원이라면 그냥 깜짝 파티 정도는 그 장소로 데려가는 순간 눈치 챌 텐데. 그나저나 이혜원 요즘 좀 이상하잖아. 어떻게 하지? 골탕 먹이면 화나서 살아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하지? 이건 어때? 속닥속닥. 오~ 좋은데? 콜? 콜!

 이 병신 머저리 같은 녀석들.

 “아 맞다. 나 아까 연극할 때 진짜였던 것도 있다.”

 “뭐?”

 “김현승이 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던 거. 이 새끼 진짜 너 신경 쓰지 말라고 그랬어.”

 “아, 난 또 이혜원이 소심하게 그런 거 갖다가 혼자 찌질대고 있을 줄 몰랐으니까 그랬지.”

 “뭐 임마?”

 “아 그만 좀 해~ 케익 꺼냈는데 먼지 날리게.”

 “야, 그러니까, 이혜원.”

 “뭐?”

 “우리가 사귄다고 둘 사이에 낀 기분입네 하면서 혼자서 찌질대지 말란 말야. 우린 한 번도 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우리 둘이 사귀기 이전에 우리 셋은 친구잖아.”

 눈을 들어보니 김현승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지현 역시 마찬가지의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감동을 먹어줘야 되겠지만 나는 그런 진지모드의 두 사람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 시도 때도 없는 고질병.

 “야, 그럼 너네 진짜 연극했을 때처럼 할 거야?”

 “뭘?”

 “내가 너네 어색해하고 막 빼고 그러면 둘이 헤어질 거냐고.”

 지현과 현승은 예상했던 반응과 다르게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머뭇거렸다. 어라, 나 감동해줘야 하는 건가? 나는 짓궂은 표정을 조금 지웠다. 그러나 곧 둘은 마주보더니 씩 웃었다.

 “미쳤냐? 그럼 니 버릴 거야.”

 “이번에도 버리려다 하도 찌질해서 한 번 구제해 준 줄 알아.”

 그럼 그렇지. 양쪽에 꿀밤세례를 내렸다. 몸을 뒤틀며 쏟아지는 주먹을 피하던 현승이 선물을 내밀었다. 포장도 안 한 채 훤히 보이는 맨 비닐에 담긴 그대로 주는 게 이 녀석다웠다.

 “웬 핸드폰 고리?”

 “짠!”

 김현승이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내 손에 든 것과 같은 똑같은 핸드폰 고리였다. 가운데 줄이 그어진 초록색 하트 하나.

 “으엉? 왜 내가 니랑 똑같은 핸드폰 고리를 해? 으아 싫어! 안 해!”

 “병신아, 이거 봐.”

 지현이가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거기에도 역시 같은 하트모양의 핸드폰 고리가 달려 있었다.

 “세 잎 클로버 꽃말이 행복이잖아. 그래서 서로 한 잎씩 나눠 가진 거야. 우리 셋이 모이지 않으면 행복이 있을 수 없다, 뭐 그런 느낌으로.”

 “임지~...”

 “응?”

 “너 연애하더니 존나 느글느글해졌어. 나 오글거려.”

 “뭐라고?”

 나는 퍽퍽 얻어맞는 동안에도 하하하, 크게 웃었다.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듯, 그들도 나를 필요로 했다. 나의 얼토당토 않는 자격지심 정도로는 나를 버릴 수 없을 만큼.

 나는 지금 새롭게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나는 정말 행운아다.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일까.

 “빨리 케익 먹자.”

 “야, 배고픈데 생일축하 생략하고 케익 그냥 먹음 안 되냐?”

 “뭐 이 자식아?”

 “자 자 빨리 불 끄자~.”

 지현이가 킬킬거리자 현승이 킬킬거리며 불을 껐다.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으니 웃음소리가 닮았다. 나도 킬킬거렸다. 나의 웃음소리도 그들과 닮았다.

 치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초가 하나씩 밝혀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이혜원, 생일 축하합니다~ 우우!”

 배고파 죽겠는지 성의 없이 빨리빨리 부른 노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후우! 있는 힘껏 열일곱 개의 초를 불었다. 주위가 순식간에 깜깜해졌다.

 “우와, 다 껐어!”

 “이혜원 힘 하나는.”

 “시끄러. 빨리 불이나 켜. 배고프다며.”

 “어, 소원 안 빌어?”

 “뭔 소원.”

 “촛불 한 번에 다 끄면 소원 이루어진대잖아.”

 “애도 아니고 그런 걸 믿냐.”

 “남들은 못 꺼서 못 비는 소원을... 에휴 재미없는 이혜원.”

 “뭐?”

 “아~닙니다~.”

 현승은 느릿느릿 스위치 쪽으로 걸어가 불을 켰다.

 하지만 사실, 나는 현승이 불을 켜기 전에 초스피드로 소원을 빌었다. 두 번이나.

 하느님, 이 애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세요.

-

공모전에 내려고 써놓았는데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기엔 스스로 아직 실력이 미진한 것 같아서요.

대신 초록불 선생님의 냉철한 평가를 기다리겠습니다.^^

ps.초록불 선생님, 제 닉네임은 '인커스'가 아니라 '인키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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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 45분 즈음

 초기 인물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눈빛이다. 카메라가 영혼을 앗아간다는 미신이 만연했기 때문에, 그 즈음의 일반인 모델은 하나같이 강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눈을 통해 왕래하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의 구멍을 메웠다. 신념, 공포, 분노, 혹은 순수한 동경 따위로. 그런 의미에서 K의 눈은 낡아빠진 싸구려에 가까웠다. 아직 과학이 진리를 대신하기 전, 미신이 미신으로 불리지 않던 시대를 살아가는 듯, K의 눈은 기묘한 생명으로 불탔다. 그녀는 분명 이성보다 심장을 우선하리라. 촬영자로 하여금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눈이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삼각대를 세웠다. 카메라의 노출값과 함께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갑한 교복 넥타이를 연신 긁어대며, K의 알몸에게 렌즈를 겨눴다. 석고상처럼 바스라지는 신체, 그 위로 수놓아진 푸른색 멍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응시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녀가 진심 아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시퍼런 눈을 치켜뜬채 나를 바라보는 것도.  K와 나는 방과후 빈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양 팔에 아로 새겨진 멍자국이 염증처럼 부풀어오르는 탓에, 종일 묶어뒀던 팔토시를 막 벗어던진 참이었다. 나는 선생과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서 불어터진 흉터를 말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처가 덧나고 함부로 엉겨붙기 때문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거, 얻어 맞은거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채 호흡을 삼키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적막이 감도는 교실에서 K의 시선을 눈치챈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뿐 차마 할 말을 고르지 못 했다. 담홍색 저녁 노을을 받은 하얀 피부가 꼭 석고상처럼 눈부시다. 교실 뒷문에서 꼿꼿이 펼쳐진 척추가 아름답다. 따위의 사고를 반추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K가 먼저 입을 열기까지,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어.”  다만 그런 대치상황을 넘어 날아온 K의 한마디는 너무나도 뜻밖의 물건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노라 고백했다. 죄값을 치르는 건 두렵기 때문에 내일 자살을 할 것이라며, 초연한 어투로 속삭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해를 필요로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새 다가와 내가 반사적으로 움켜쥔 DSLR을 검지로 쓸어올렸다. 슬쩍, 미소지었다.   나에게 처음 카메라를 건네주던 날, 아버지는 말했다. 사람의 눈동자도 카메라처럼 풍경을 담아둘 수 있다고. 잠깐 빛을 응시한 다음 눈을 감으면 눈꺼풀 속에 그 잔향이, 불꽃이, 똑똑히 보이잖아. 이게 바로 그 증거야. 보호안경 너머로 용접 불꽃을 튀기며 그는 곧잘 떠들었다. 삭으로 뜬 달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무렵의 나를 사진으로 이끈 매력적인 미소였다. 꼭 지금처럼, 체념 한방울 섞이지 않은 강인한 미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양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K는 꼭 술을 마시지 않은 아버지처럼 따뜻했다.  “그러니까 내 영정사진을 찍어줘. 너, 사진 찍는거지?”  그날부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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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2
보이지 않는

 남자는 늑대였다. 손바닥만한 핏덩이로 태어난 그에게는 입술 대신 주둥이가 있었다. 남자의 어미는 탯줄도 채 자르지 않고 그 모습을 긴밀히 살폈다. 길게 뻗은 주둥이, 옹골찬 회색 눈동자, 전신을 덮은 이중 모피, 남자에게 인간 다운 신체 부위는 온전히 돋아난 다섯 손가락이 전부였다. 그 꼴이 영락없이 괴물이었기에, 남자는 버려졌다.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바야흐로 이단 심판관이 악마와 마녀를 때려잡던 시기였다. 가축이 죽고, 곡식이 마르는 건 전부 악마의 소행이라고, 교회는 말했다. 달리 탓할 대상이 없어,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숲속에서 홀몸으로 지내는 여성은 화형, 기형아를 출산한 일가는 몸이 찢어졌다. 단, 귀족은 예외였다. 그들은 단두대 아래서 목이 잘렸다.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남자는 부모가 기요틴 아래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열일곱이 되는 나이에 몰래 성을 빠져나와 무법지를 거닐었다. 힘들지는 않았다. 남자는 금방 자랐다. 성을 빠져나왔을 때, 그의 신장은 이미 2m 가까이 되었다. 단단하게 솟은 송곳니는 돌을 부술 만큼 강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버려진 저택에 둥지를 틀었다.  "저곳에는 용이 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몸을 붙인 폐 저택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용이 몸을 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이제 30년 가까이 삶을 영위한 남자는 더는 아무것도 먹고 마실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호수를 핥았다. 자기 직전, 저택 주류 창고에 남아있는 위스키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걸로 족했다. 덩치는 점점 커져,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 하지만 남자는 늑대였다. 괴물이었지만, 용은 아니었다. 폐허에 버려진 정장을 손질하여 입고, 혀를 굴릴 때, 보다 고풍스러운 단어를 벼렸다. 마을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황금을 탐하지 않았다. 다섯 손가락 달린 괴물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누구보다 인간성을 갖춘 영혼이, 기사가 그의 심장을 꿰뚫어주길 바랐다. 남자는 괴물이었다. 괴물은 인간에게 죽어야 했다.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남자는 결론 내렸다.  폐허는 나름대로 지낼 만했다. 가구에 남아있는 문양으로 추측해 볼 때, 몰락 귀족의 저택인 것 같았다. 정장, 거대한 거울, 마찬가지로 거대한 시계.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모두 폐허에 남았다. 남자는 그들을 입었다. 버려진 것들을 입었다. 편안했다. 몸을 옥죄는 정장 안에서 남자는 편안할 수 있었다. 시계의 먼지를 털고 기름칠을 했다. 거울 역시 관리하긴 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닦아도 비치지 않았으니까. 본인 만큼은 절대로.  남자는 저택의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처음 그 앞에 섰을 때 깨친 사실이었다. 세상을 담은 조각은, 남자를 제외한 모두를 비췄다. 이따금 비를 피해 들어오는 올빼미, 토끼, 여우를 비췄다. 잘 정돈된 정장을 비췄다. 출처 모를 와인과 위스키 역시 그곳에 담겼건만,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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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꽃비

할머니는 소녀의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쭉 이어진 벚나무의 행렬에 양 뺨을 살짝 붉혔다. 여든에 가까워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지만 초봄의 내음 앞에서 그녀는 소녀가 되었다. 두 눈을 활짝 열고서 가만가만 떨어지는 꽃비를 응시했다. 노인답지 않은 풍부한 생기가 그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엄마는 종종 ‘어머니가 너무 늙으셔서 그래’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늙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놓쳐온 과거를 향해서. “너희 아빠랑 요양원 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오늘만 할머니랑 둘이 있어.” 그 말과 함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삼이 된 너를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슬픔이나 연민 대신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최근 들어 엄마와 아빠는 자주 그런 한숨을 토했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처럼, 응, 그래, 괜찮아. 짧은 세 마디로 둘을 배웅했다. 부모님의 한숨을 닮아 무거운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돌려, 거실 탁자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머리도, 눈도, 뇌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노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째서 우리의 몸은 이렇게 쪼그라들고 마는 걸까요.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나는 창문에 기댄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렸다. 거슬거슬한 촉감이 검지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감겼다. 젊음이 빠져나간 노인의 육체였다. 내 검지 손가락의 촉감이, 세월을 뚫고 올라온 그녀의 주름이, 그 사실을 열성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뇌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스스로가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이 점점 깎여나가는 것도 모두 당연한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건 당연하다고 잘난 듯이 말하는 주제에, 어째서 기어코 어제를 돌아보는 걸까.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제,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담임이 내뱉은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 때가 참 좋을 때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린 지금은 그저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저녁 열 한시에 독서실을 빠져나오는 일상은 빈말로라도 그리워할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맨 앞자리에서 담임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그는 그때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 꽃이 그렇게 좋아요?” 나는 그리 묻고서, 잠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가 마무리되면 벚꽃도 지겠지. 문득 그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햇빛 아래서 벚꽃을 볼 일이 없는 탓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을 나와 해가 떨어지고서 돌아오는 나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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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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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생각엔 이미 서술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청소년들의 성장소설인데 독백이 너무 많으면 사건전개가 너무 느리고 지루해질 것 같아서요. 좋은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소설을 쓸땐 꼭 참고할게요.^^

    • 2010-02-08 00:25:4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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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로 사건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마이너스입니다. 비록 독백일지라도 서술의 비중을 높여보는것은 어떨까요?

    • 2010-02-06 22:37:3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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