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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구두의 숲

  • 작성자 Hicky
  • 작성일 2010-03-08
  • 조회수 402


아빠가 초저녁부터 끙끙 앓는 소리를 합니다.

허리가 안 좋은 아빠가 대충 아무 바닥에나 쓰러져 엎드리자, 나는 아빠의 허리 위에 따뜻한 손을 올려놓고 오른쪽으로 살살 문지르며 돌립니다. 에구구, 조금만 살살하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아빠가 아파합니다. 그래서 힘을 좀 빼고 왼쪽으로 돌립니다. 물량이 좀 많은 게 아니니 원… 아빠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해봤자 별반 위로가 되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빠는 구두장이입니다. 작은 구둣방을 하고 있으면서 틈틈이 수제화를 만들어 팔곤 했는데, 입소문이 꽤 있는 편이어서 알음알음으로 귀족들까지 아빠에게 맞춤제작 구두를 많이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궁전에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왕비님께서 친히 구두코의 가운데 박을 보석까지 세공해서 내려 주셨다나요? 오렌지 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설레서 저는 아빠가 그 구두를 다 만들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다른 구두들이 사흘 정도의 시간을 요한다면, 왕비님의 구두는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그 화려한 자태를 갖추었지요. 나는 그 구두를 궁전으로 가져가는 길목에 몰래 신어보았습니다. 역시, 좋은 건 좋은 거더군요. 가죽이 해진 나의 신발과는 차원이 달라요. 신어 보면서도 바닥에 흙먼지나 묻는 건 아닌지, 내 지문이라도 묻지는 않는지 노심초사하게 되더라고요. 조심조심 벗은 다음에 바닥을 몇 번이고 털어내고 닦아내고 내 치마 앞자락에 닦고 문지르고… 이제 좀 신어 본 티가 가셨네, 싶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그 구두를 상자에 넣고 뚜껑을 덮어서 가져갔지요. 궁전의 문지기 병사가 상당히 인상이 더러운데, 그날따라 더 무섭더라고요.

아, 왕비님은 정말로 아름다우셨어요. 이름도 아름다우십니다. 신데렐라라고, 아십니까?

맞습니다. 전설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그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시지요. 저는 그 왕비님의 귀하신 얼굴을 감히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원래는 왕비님을 담당하는 시종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맞지만, 그 날은 왕비님께서 저를 직접 부르셨습니다. 그 구두장이의 딸인가? 들여보내게. 어쩜, 목소리도 이렇게 고우실 수가! 유리구슬 한 자루를 쏟아 부은 듯한 목소리가 아니겠어요? 금을 녹여 발라놓은 것처럼 빛나는 머릿결에다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선을 타고 흐르는 곡선을 휘감는 연분홍빛 드레스. 나는 남들이 잘 쓰는 ‘눈이 부시다’라는 관용구가 바로 이런 데에 쓰이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실크 스타킹을 신으신 왕비님께서 구두를 신어 보시더니 아주 흡족한 얼굴로 정말 좋은 구두로구나, 하고 칭찬해주셨습니다. 나는 이 곱디고운 목소리로 내려주시는 칭찬을 아빠가 직접 들었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지 않았을까도 상상해보았습니다. 내가 그럴 것 같았으니까요.

왕비님의 방을 지나 복도를 뚜벅뚜벅 걷던 나는 손잡이에만 장미문양이 나선으로 새겨진 방문을 발견했습니다. 그 방은 아주 중요한 방이에요. 보통은 병사들이 앞에서 지키고 있는데 웬일로 사람이 없지 싶던 나는 문을 열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만, 꾸욱 참았지요. 그 방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궁전 내의 사람이라면 아무도 모를 이가 없었고, 저는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유리구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몰라요. 다만 유리가 투명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유리구두도 신으면 발가락이 꼬무락대는 것까지 보일 정도로 투명할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지요.

장미문양 손잡이가 달린 방에 고이 모셔진 유리구두는 사실 저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에요. 그 유리구두는 바로 우리 조부께서 당시에 왕비님께 도움을 준 요정님께 납품한 것이거든요.

요정들이 마법을 부려 물건들을 만들어낸다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요정들이 ‘요정 협회’에서 논의된 사안의 주인공들을 도와주러 갈 때 마법으로 뿅, 하고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물건들은 협회 사무실의 진열장과 옷장, 잡동사니 상자 등에서 소환한 것이죠. 유리구두도 마찬가지였고요.

당시에 왕비님께 무도회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준 요정님이 구두를 소환할 때, 마침 우리 조부의 유리구두 차례가 되었던 겁니다. 조부께서 그 유리구두를 만드는 기간만 한 달이 넘었고, 한 달 동안 친한 대장장이의 대장간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여 머리를 맞대고 유리와 크리스털을 녹였다, 굳혔다를 반복하며 조각장식까지 끝냈다고 하니 얼마나 아름다울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네요. 그러나 유리로 만들어진 구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요. 네, 깨질 염려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요정님은 왕비님께 구두를 신기기 전에 깨져 흐트러지지 않는 마법을 걸어두었습니다. 다행히도 왕비님이 구두를 신을 때 굽이나 코가 깨지지 않았지요. 구두는 왕비님께 끼워 맞춘 듯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왕비님은 임금님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슬하에 다섯 왕자를 두셨지요. 왕비님의 결혼 이야기는 처음부터 속속들이 빼곡한 이야기로 전설처럼 전해져오다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사람들은 왕비님을 동경했고, 신데렐라 재단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곧 ‘신데렐라 경연’이 개최되었습니다. 신데렐라 경연에서의 승자는 경연이 개최된 그 해에 열여덟이 된 왕자님과의 결혼을 보장받았고, 유리구두를 차례로 넘겨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1회 신데렐라 경연의 우승자가 맨 처음으로 유리구두를 받고, 그 뒤로 쭉 물려주는 식으로요. 심사위원은 왕비님께 도움을 주었던 요정님이 원로 요정 및 전 요정 협회장의 자격으로 참석하고, 그 해의 왕자님과 왕비님, 임금님, 분야 별 전문가들이 참석하지요.

그러나 경연에 대한 소수 귀족들의 반대 여론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왕비님이 귀족 집안의 여식으로 임금님과 결혼한 것이 아닌데 왕비님의 뒷배경이 볼품없기 짝이 없는데 무엇이 그렇게 자랑스러워 대회까지 여냐는 데서 꼬투리가 잡혔던 것이지요. 게다가 왕비들끼리 친목을 다지면서 서로 정보도 주고받는 이른 바 ‘화왕모(<화려한 왕비들의 모임>의 줄임)’에서도 같은 이유로 왕비님은 소외되었습니다. 그래도 경연은 계속 되었지요.

유리구두에 대한 열광어린 반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유리구두의 외형은 기본이고, 요정의 마법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었으며, 신데렐라의 자리를 거머쥔 영광의 산물이자 왕실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그 거대한 타이틀을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여자라면 누구나 유리구두의 주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신데렐라 경연에 맞추어 여자들을 교육하고 여러 가지 팁을 알려주는 ‘신데렐라 아카데미’라는 것도 생겨났는데, 아카데미의 원장은 경연의 해가 오면 노상 바빴습니다. 우선 그 해 열여덟이 되는 왕자의 이상형 동향을 파악하는 데서부터 경연 대비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왕실에 맞는 인사법이나 옷 갖춤, 화장법 같은 기본예절과 춤, 노래, 그림 감상 등의 교양 수업, 그리고 왕실의 역사와 신데렐라의 덕목 등의 이론 수업도 잊지 않습니다. 신데렐라 아카데미는 요정 학교의 초․중급반과 친선 교류를 해서 가끔 초급 요정들이 실습 겸 원생들을 도와주기 위해 찾아오기도 합니다. 아카데미는 귀족반과 서민반으로 나뉘어져 있지요. 원래는 귀족의 자식만 취급하기로 했는데 서민들의 반발이 거세어서 하는 수 없이 서민반도 개설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래도 조금 더 자세한 교육에 대한 특권은 귀족반에 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잘 아는 것은, 내 친구인 이자벨라가 아카데미 서민반 원생이기 때문이에요. 음, 올해가 셋째 왕자님이 열여덟이 되는 해이니, 제 4회 경연이겠군요. 왜 4회째 경연이냐구요? 제 2회 경연, 그러니까 둘째 왕자님이 심사에 참여했던 해에 왕자님의 이상형이 알려졌는데, 민망하게도 ‘가슴 큰’ 여자였답니다. 그래서 가슴이 눌러 붙은 마냥 작은 여자들은 옷 안에 조금 덜 익은 복숭아를 집어넣기도 했대요. 복숭아를 집어넣은 여자 중 한 여자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경연 때, 알레르기 때문에 얼굴부터 귓불까지 새빨개진 그 여자를 보고는 왕자님이 정말 순수하구나, 게다가 몸매까지! 경탄을 해서 그 여자가 결국 우승의 자리까지 왕자님 덕으로 오를 수 있었다네요. 근데 두 사람이 결혼하고 첫날밤을 치르는데 침대에 누운 여자의 한 쪽 가슴에서 복숭아가 떼구르르 굴러 떨어진 겁니다. 당황한 왕자님은 나머지 가슴도 쿡쿡 눌러보았는데 말랑하고 폭신한 느낌이 아니라 딱딱하고 견고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지자마자 화가 나서 그 여자를 패대기치고 이틀 뒤에 긴급 경연 비슷하게 제 3회 경연을 열었다나, 뭐라나.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를 이자벨라와 나누는데 나는 자꾸 킬킬, 하는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왔어요. 한편으로는 여자를 패대기칠 것까지는 없지 않나하는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구요.


 


 

아빠의 구두가 워낙 유명한지라, 아카데미 원생들은 아빠에게 구두 제작을 많이 맡겨요. 귀족반의 구두는 신경을 많이 써야합니다. 가죽 선정부터가 힘들지요. 그럴 때면 아빠는 나를 옆에 앉혀놓고 어떤 가죽이 좋겠니? 색깔은 어떤 게 좋겠니? 굽은 얇은 게 예쁘겠지? 등등을 두서없이 묻곤 하는데 나는 솔직히 귀족들의 취향을 잘 모르겠어서 글쎄, 하고 대답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대답해주고 이것저것 조언해주곤 하는데 결과가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서민반 애들은 구두를 별로 주문하지 않아요. 왜 그런 걸까, 하고 이자벨라에게 물었더니 우리 반 애들은 구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잖아, 그래서 드레스 선택에 조금 더 집중하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드레스 길이가 길면 구두는 저절로 감춰질 것이니까요. 그렇구나, 하고 대답하는 내 입이 쌉싸름했습니다.

이자벨라의 드레스를 함께 고르는 일은 정말이지 유쾌합니다. 이자벨라는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녀에게 빨간색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입술이 되게 빨갛거든요. 장신구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눈에 띌 거라고 생각해서 나는 빨간 드레스를 몇 번이고 들어올리며 그녀의 어깨에 가져다 댑니다. 그래도 그녀는 보라색 드레스를 고집해요. 하기야, 내가 입을 것도 아닌데 박박 우겨봤자 소용없죠. 그녀가 처음에 고른 보라색 드레스를 주인에게로 가져갑니다. 아, 드레스는 대여가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무조건 이 가게에선 물건을 사야한다네요. 보라색 드레스는 가지고 있는 예산에서 좀 빠듯한가봐요. 그녀는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로 그 드레스를 놓았습니다. 나는 재빨리 주인에게 내가 고른 빨간 드레스의 가격을 물었는데 그래도 좀 낫더군요.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빨간 드레스를 샀습니다. 값을 치르는 동안 나는 드레스 소매 쪽에 코를 묻고 부비적댑니다. 어? 조금 콤콤한 냄새가 나는군요.

나는 그녀의 팔에 걸쳐진 드레스를 보며 부러운 눈길을 보냅니다. 나도 뭐 아빠에게 좀 졸라대면 드레스를 살 수야 있겠지만 그 드레스를 내가 어디가서 입나요! 우물가에서 빨래하면서 입겠습니까? 아니면 남자친구라도 있어 예쁜 모습 보여주려고 입겠습니까. 드레스도 예뻤지만 그 드레스를 입을 동기에 나는 더욱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멋진 왕자님의 옆자리에 앉을지도 모르는 아가씨의 드레스라니. 꼬우면 너도 가면 될 거 아니냐구요? 그게 말이 쉽지. 이자벨라나 나나 똑같은 서민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거기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경계 같은 것이 있어요. 나처럼 구두장이의 딸이라거나 아니면 우유 짜는 여자의 딸이라거나 그런 사람들은 서민이라도 서민 취급을 받지 못하죠. 왜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냥 그렇다고 하네요. ‘그’ 서민들은 ‘그’ 서민들끼리 친구를 먹는다던데, 그런데서 이자벨라는 얼마나 착한 친구 인가요! 나는 그녀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이죠. 한편으로는 고마운 친구이구요.

그 친구를 위해, 혹시나 신데렐라의 자리에 앉을 지도 모르는 그 친구를 위해 나는 무언가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아빠가 구두장이이니 남은 건 그녀를 위한 구두를 마련해주는 것인데 아빠에게 몇 번이고 사정하고 애원하고 그 친구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를 설명해주어도 아빠는 물량이 많다, 라는 말로만 일관하시니. 나는 공연히 아빠에게 성질을 부렸습니다. 나는 그 착한 친구에게 그 무엇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미안해,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갑자기 뭐가 미안하니? 기집애두. 그녀는 조목한 입술을 살짝 가리며 웃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니, 그녀가 신데렐라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해달라고 소리 죽여 기도해주기로 했습니다. 조금 더 간절하게.


 


 

광장의 아침은 산뜻합니다.

나는 어제도 가죽의 본을 대고 만들고 자르느라 잠도 자지 못한 아빠를 위해 소시지를 몇 조각 구워 접시에 얹어두고 레몬 두 조각을 잘라 접시의 귀퉁이에 올려놓습니다. 아빠가 워낙 자리에 진득이 앉아 있는 직업인데다가 물 한 잔 마시고 나면 그 순간에 작업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주 볼멘소리를 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아빠, 신 걸 먹으면 침이 잘 고이잖아요, 라고 했더니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그 이후로 레몬을 즐겨 찾게 되었어요. 레몬이 다 떨어진 차에 내가 다시 몰래 사왔지요. 몇 개. 그 레몬을 보면 그래도 내가 아빠를 생각하고 있으며 미안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리겠지요?

맑은 공기가 창문으로 스며들기에 나는 창문을 활짝 열다가 아예 집 밖으로 나갑니다. 어느 집에서 호밀 빵을 굽는 냄새가 나네요. 갓 짠 우유와 함께 씹어 먹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광장의 한가운데로 나는 나가봅니다. 피리를 부는 소년도 있고, 신발 끈을 매는 청년도 있고, 젖은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처녀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지그시 바라봅니다. 행복해보여요. 나는 웃으며 한 발짝 내딛습니다. 어이쿠, 개똥을 밟았네요. 물컥한 느낌이 신경 쓰여 신발 바닥을 애써 문지릅니다.

저 멀리서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일정한 박자로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이마에 손을 대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봅니다. 아, 마차로군요. 말들이 힘차게 발굽 구르는 소리를 내며 광장의 중앙으로 다가오기 시작해요. 금빛 테두리의 마차인데 햇살을 받아 반짝입니다. 어수선하게 서 있던 사람들은 길을 터주고, 나도 길을 터주며 마차를 바라봅니다. 마차 안에는 리본을 머리에 단 예쁜 아가씨들이 네 명 타 있네요.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마차를 보며 손을 흔듭니다. 저 마차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싶더니, 아카데미 원생들이었어요. 그녀들도 저런 마차가 아닌 호박마차를 타고 싶겠지요, 아마도.

경연이 이틀 남았습니다. 정말 궁금해요. 궁전에 가 본 적은 있지만 무도회는 본 적이 없거든요. 무도회에서 춤을 출 아가씨들은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나는지, 귀족 부인들은 얼마나 예쁜 부채를 들고 나타나 얼굴을 가릴지, 왕자님은 얼마나 잘생기셨을지, 어떤 춤을 추는지 등등. 나는 그런 꿈도 꿔봅니다. 내가 왕비님의 옷을 입고 임금님과 함께 춤을 추는 꿈이요. 현악기의 보드라운 선율에 맞추어 큼지막한 손 위에 내 손이 포개지고, 어설프지만 아름다운 춤의 스텝을 밟는 거예요. 빙그르르, 돌면 조금 어지럽지요. 한참 춤을 추고 있다가 악기 소리가 멈추면 나는 눈을 뜹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쥐들이 천장에 싸놓은 쥐똥.

이자벨라는 정신이 없대요. 이번 해의 왕자님은 왈츠를 좋아 하신다는데 아카데미에서 다른 춤 스텝을 연습시키고 있었다나. 서민반 애들은 다 그렇다고 얘기해 줍니다. 그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발을 요리조리로 옮기며 허공에 누군가를 안는 시늉을 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약간 화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귀족반 애들은 봄의 왈츠 테마를 듣고 있던데. 나는 그런 왈츠 테마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맙니다.

아빠는 드디어 물량을 다 소화했습니다. 마지막 자주색 구두를 끝으로 아빠는 좀 쉴 수 있게 된 거지요. 요정 협회에서 다시 주문서가 밀려왔지만, 경연 기간이 코앞이었으므로 좀 농땡이를 피워도 된다고 하면서 수염을 잘랐어요. 와, 턱을 겨우 덮을 만했던 수염이 벌써 턱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니까요. 아빠의 무성한 검은 수염 저 깊숙이 하얀 수염 한 가닥이 숨어있었는데, 뽑아주어야 할지 그냥 둬야할지. 그냥 두기엔 마음이 좀 무거웠거든요.

밤에 우리 집 앞으로 작은 말울음 소리가 들립니다.

안 떠지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어느 저택의 집사가 구두를 들고 있어요. 나는 인사를 합니다. 집사 노인의 뒤로 그 구두의 주인도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우리 구둣방에서 구두를 주문했던 아가씨군요. 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해줍니다. 물론 그 아가씨는 별로 내키는 기색이 아니지만요.

그 아가씨는 아빠를 깨워 구두코가 벗겨진 것 같다, 굽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바닥부분이 갈라지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아빠를 닦달해댔습니다. 아빠는 공구와 가죽, 천 등을 펼쳐놓고 꼼꼼이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아, 참. 잘 자고 있는데 이러고 있어요.

아빠가 망치 비슷한 공구를 가지고 구두를 거꾸로 세워 굽을 탕탕 치고 가죽을 슥슥 쓸어보고 바닥을 확인하다가 머리를 갸우뚱합니다. 설마요, 아빠의 구두에 하자가 있다니. 나는 여태까지 아빠가 만든 구두에 하자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디자인이 조금 마음에 안 들어서 고쳐달라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집사는 세워놓은 마차 앞에서 말을 쓰다듬고 있고, 아가씨는 내가 어디선가 가져온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신고 온 구두 굽으로 바닥을 내리치고 있습니다.

아빠가 뒤통수를 긁적긁적합니다. 무슨 문제 있는 거예요? 아가씨가 물었고 아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어요. 굽 뒷부분이 제대로 박히질 않았어요. 지금 고치자면 고칠 수 있지만 연결 부자재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최소한 경연 날이나 되어야 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아가씨. 그럼 어떡해요! 카랑카랑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고요한 우리 집을 뒤흔듭니다. 아빠는 잠시 생각하다 말합니다. 아가씨, 그냥 걸을 때는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지장은 없을 겁니다만, 혹시나 모르니까 경연 날에 제 딸애를 데려가시는 게 어떨까요? 오후쯤엔 부자재를 구할 수 있을 것 같고, 딸애가 마침 기본적인 건 다룰 줄 아니까 공구를 들려 보내겠습니다. 제가 또 마침 그 날 다른 주문이 밀려서 제 친구 놈 대장간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있을 것 같거든요. 장광설을 마친 아빠의 얼굴을 갈매기 눈썹으로 바라보던 아가씨는, 한숨을 폭 쉬고는 알았다고 합니다. 다른 구두를 신고 가도 될 걸 굳이 아빠의 구두를 고집하는 걸 보면 아빠의 구두가 예쁘긴 예쁜가 봐요. 아가씨가 새침하게 마차에 올라타고, 집사 노인이 구두를 거두어 갑니다. 마차가 저 멀리 사라지고, 다시 고요하고 푸른 밤의 공기가 집을 가득 메웁니다. 아빠, 이제 자요. 나는 이불을 덮습니다. 울 뻔한 걸 간신히 참으면서. 그 아가씨의 굽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붙어있었던 걸 내가 모를 줄 알고요?


 


 

경연 날. 나는 결국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잠이 안 왔어요.

새벽까지 나는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어떤 사람들과 만나게 될까, 혹시나 내게도 마법같은 일이 일어나는 걸지도 몰라,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거든요. 내 눈 밑에는 새카만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습니다.

아빠는 아직도 자고 있습니다. 나는 내 옷들을 뒤적거립니다. 드레스라고 할만한 옷은 없습니다. 때가 안 탄 옷도 거의 없고. 그나마 좀 괜찮은 게 한 쪽 소매가 약간 뜯겨나간 옷 하나네요. 원래 샛노란 색이었는데 색이 좀 바래서 연갈색 비스무리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다른 옷에 비하면 합격점입니다.

나는 늦게 일어난 아빠에게 내가 챙겨야 할 공구와 부자재를 가방에 담아달라고 합니다. 반지같이 둥근 공구부터 내 손바닥만한 것까지. 잘 다룰 줄은 모르지만 어깨너머로 본 것이 있으니 흉내는 좀 낼 수 있겠죠. 나는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습니다. 그럴 동안 아빠는 가방을 마저 다 꾸립니다. 무겁지 않을까? 아빠가 한 마디 합니다. 무겁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말합니다.

나는 몹시 흥분되어 있습니다. 마차를 타고 갈 거거든요. 마차가 우리 집 앞으로 올 거랍니다. 나는 밝은 광장의 중앙을 바라보면서, 집 사이사이에 낀 골목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보게 될 멋진 광경에 대해 상상합니다. 나에겐 별 거 아니겠지만 즐거울 겁니다. 마차가 왔습니다. 마차 안에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던 아가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봅니다. 나는 소매를 애써 감추며 인사를 합니다. 아가씨가 내가 밉다는 눈짓을 흘끗, 해보입니다. 밉기도 할 거예요. 내가 그 마차에 함께 올라탈 거니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마차에 올라탑니다. 내가 구두만 아니었으면 너 같은 건, 하다가 입을 고만 다무는 아가씨의 입술도 오늘은 병아리처럼 귀엽기 그지없군요.

마차로 가는데 궁전으로 가는 시간은 곱절로 느껴집니다. 그새 옆으로 마차가 세 대쯤 더 달라붙어 길을 함께합니다. 어머, 저 거렁뱅인 누구니? 오른쪽 마차에 탄 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입을 가리며 말합니다. 나와 같이 마차를 탄 아가씨는 대답을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봅니다. 나는 바닥만 보는 척하며 밖을 쳐다봅니다. 우와, 마차가 더 붙었어요.

궁전에 도착합니다. 경연 시간이 아직 남았는데도 사람들이 복작복작합니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걸 가까스로 참고 따라 들어갑니다. 성문은 정말로 크군요. 동화 속 거인이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병사들은 깃털장식을 한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인상 더러운 문지기 병사도 끼어 있네요. 신경 좀 썼나부지?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아가씨가 내 길을 막습니다. 저, 구두를 봐 드리려면 계속 제가 곁에 있어야 하구, 뒷말을 하려는데 아가씨가 말합니다. 내가 무도회장 안에 있다가 구두가 이상하다 싶으면 복도로 나올 테니 너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그 때 와서 고쳐주면 돼, 라구요. 이 아가씨, 성깔이 있네요. 궁전 안에 들어오게 된 걸로 나는 만족하기로 하고 무도회장이 열리는 연회장 바깥 복도에서 나는 서성입니다. 그러고 보니 연회장 바깥 복도에 유리구두의 방이 있네요. 역시, 보통 행사가 아니다보니 오늘은 병사들이 창을 하나씩 들고 서 있습니다. 내가 앞에서 기웃거리니까 넌 뭐야, 하고 한 병사가 뇌까렸고 나는 실실 웃으며 구두장인데요,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더 이상의 물음은 없네요.

와글와글, 무도회의 즐거움을 자랑이라도 하듯 사람들이 담소 나누는 소리는 정신 사납게 들려옵니다. 나는 연회장 문에 귀를 바싹 갖다대고 무슨 소리라도 들으려 하지만, 온갖 소리들이 어지러이 맞물려서 도대체 뭔 소리가 뭔 소린질 알아먹을 수가 없네요. 나는 그냥 포기하고 복도나 거닐기로 합니다. 복도도 연회장만큼은 아니라도 충분히 넓거든요. 복도에 걸린 그림 액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놓인 꽃병과 방들의 문은 어떤 모양인지를 살펴봅니다. 갑자기 연회장이 조용해지고, 박수소리가 쏟아집니다. 이제 시작하나봐요.

한 사람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축하 인사라도 건네는 모양이네요. 이어서 다시 박수가 터지고, 어느 순간에는 휘파람 소리와 여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집니다. 왕자님이 등장하는 순서였나 봅니다. 나는 왕자님의 얼굴이 보고 싶어 문을 살짝 열고 그 틈으로 지켜봅니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질 않아요. 근데 갑자기 문이 확 열립니다. 다름 아닌 이자벨라가 복도로 나오지 뭐예요? 나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 묻습니다. 지금 경연 시작하지 않았어? 시작했는데 아직 시시한 순서들이라 잠깐 찬 공기 좀 쐬려고. 그녀는 내가 골라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정말 예뻐, 이자벨라! 내가 다 반할 것 같아. 나는 한껏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녀는 빙글 돌며 고맙다고 합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녀가 들어가 보아야겠다고 해서 얘기는 거기서 끝납니다. 이자벨라, 잘해! 나는 두 손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입니다. 그녀는 잘 할 거예요.

유리구두의 방 앞에 서 있고 싶지만 병사들의 눈치가 보여서 서 있지도 못하겠어요. 내가 들어갈 도 아니고, 단지 서 있고 싶을 뿐인데 그 사람들은 앞에만 지나다녀도 뭐라고 하니 무서워서 어디 쳐다보기라도 하겠어요. 어깨에 둘러멘 가방을 손에 쥐고 나는 연신 복도만 왔다리갔다리 합니다.

연회장 문 하나가 덜컹 열려요. 무슨 일이지 하고 보니 환기가 안 되어 문 하나 정도는 열어놓는 거라네요. 심심한 건 덜하겠어요. 적어도 경연을 지켜볼 수는 있으니.

첫 경연 심사는 춤인데, 남자 파트너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 파트너들이 춤을 심사하거든요. 음악이 잔잔하게 흐릅니다. 세 조로 여자들이 나뉘고, 첫 조가 들어와 파트너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맞댑니다. 우아한 턴을 선보이는 여자들의 머리칼이 아름답게 원을 그립니다. 한 여자가 머리핀이 빠졌는지 춤을 중단하고 핀을 찾습니다. 핀이 비싼 건가봐요. 심사를 내팽개치고 핀을 먼저 찾는 걸 보니.

첫 조가 춤을 끝마치고 잠깐의 쉬는 시간이 주어져서 심사가 끝난 여자들은 제각기 자기의 성적을 자기가 매겨보고, 심사를 기다리는 여자들은 초조한 얼굴로 스텝을 이리저리 꼽니다. 얼굴을 빼꼼 내밀고 안을 바라보니 그 다음 조가 이자벨라가 속한 조인가봐요. 그리고 나와 동행한 아가씨는 첫 조였나봅니다. 근데 울고 있네요. 분명 구두 때문에 우는 건 아닐 거예요.

두 번째 조가 파트너들을 맞이하고, 음악은 다시 시작됩니다. 나는 눈을 감고 바뀐 음악을 들으며 나도 어느 남자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는 상상을 합니다. 그런데,

“악! 살려주세요!”

외마디 비명이 날카롭게 울려 퍼집니다. 부드러운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 비명소리에 나는 놀라 연회장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중간에 누군가를 세워두고 둥글게 원을 만들어놓았어요. 웅성웅성한 사람들의 소리 너머로 비명은 다시 들려왔습니다. 나는 몰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나 같은 거렁뱅이가 들어왔는지는 전혀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웅성웅성하며 원 중앙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원의 중앙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시끄러! 닥쳐!”

“사, 살려주세요! 저는 아무런 자, 잘못이…”

세, 세상에, 그 비명의 주인공은 이자벨라였습니다. 이자벨라의 목에 어떤 남자가 단도를 겨누고 있습니다. 얼굴은 눈에만 구멍이 뚫린 작고 검은 자루를 쓰고 있고, 남자의 곁에서 이자벨라가, 발발 떨고 있어요.

“나, 나는…”

“이 궁전에 있는 제일 귀한 물건이 뭔지는 다들 알지?”

남자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을 헤치고 병사들이 다가와 창을 겨누었지요. 남자는 더욱 손에 힘을 주어 이자벨라의 목을 겨누었습니다. 그녀의 목이 바르르, 떨었습니다. 그녀가 더 큰 비명을 질렀습니다.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요!

“유리구두를 내놔. 유리구두를 내놓는다면 순순히 이 여자는 풀어주지. 헤치지도 않고.”

남자는 유리구두를 요구합니다. 다행입니다. 누구한테 원한이 있어 복수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유리구두만 건네주면 다 해결될 일이니까요. 나는 누군가가 유리구두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곧 구두는 올 것이고, 그럼 이자벨라는 풀려나게 되겠지요.

“유리구두를 가져 와! 빨랑! 이 여자 생목숨 죽이고 싶어? 어?”

“저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유리구두의 방은 연회장 복도에만 나가면 보이는데, 방을 잘 못 찾았던 걸까요? 아니면 병사들이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을 못해서 애를 먹이는 걸까요? 하여간 궁전 사람들도 별 수 없군요.

“유리구두를 가져오면 경연을 더 이상 할 수 없잖아요. 게다가 왕실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없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유리구두는 쉽게 줄 수 없는 물건이에요.”

사람들 중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벌 떼처럼 일어나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내느라 연회장이 엉망이 되고, 이자벨라를 겨누고 있던 남자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칼을 사람들에게 휘두를 것처럼 위협적인 행동을 해보였습니다. 병사들이 주춤주춤했고, 사람들은 아직도 유리구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 뒤에 있던 여자들이 소곤소곤합니다. 유리구두를 가지고 싶어 왔는데 그게 없으면 어떡해? 괜히 헛수고한 거잖아. 맞아, 맞아. 나는 도무지 어떤 게 진짜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자벨라의 머리카락이 다 뜯겨나갈 듯이 휘둘립니다. 아, 안돼!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복도를 마구 뛰어다닙니다. 유리구두의 방이 어디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윽고 유리구두의 방 앞에 도착합니다. 병사들이 서 있습니다. 저기요, 유리구두를 꺼내야 해요, 사람이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이러다 사람 하나 죽어요! 병사들은 귓등으로 들은 척도 안합니다. 내 말을 잘 못 들은 거 아니었을까, 나는 한 병사의 어깨를 흔들며 말합니다. 이보세요, 내 친구가 죽을 거예요! 유리구두를 꺼내줘요! 병사는 내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떼어냅니다. 유리구두는 아주 귀한 물건이야. 감히 괴한 따위의 손에 쥐어줄 수 없는 물건이라구. 아저씨! 나는 화가 폭발합니다. 그러나 유리구두의 방은 결국 열리지 않습니다.

나는 연회장으로 들어가려다, 복도에서 달음박질을 칩니다. 그리고 성문으로, 성문으로 달려갑니다. 애초에 나 같은 애가 궁전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요. 나 같은 애가 궁전에 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지도 몰라요. 그냥 응원만 조용히 해 줄걸, 궁전에 와보고 싶어 하지 말걸. 나는 내 머리를 마구 칩니다. 이자벨라의 비명소리가 이명처럼 웅웅거립니다.

광장의 밤은 산뜻합니다.

나는 광장의 어둠에 휩싸여 한걸음에 내달린 먼 길과 그 끝, 궁전을 바라봅니다. 식은땀이 흐릅니다. 궁전이 더욱 짙은 어둠이 휩싸여있습니다. 나는 깊은 숲을 빠져나온 느낌을 받습니다. 마치 수많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지만 도리어 너무 빽빽하고 답답하게 둘러쳐있어 숨조차 쉬기 힘든, 그런 숲. 나는 다시 숲 같은 궁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밤공기를 들어 마시는 머릿속이 아득해져옵니다. 나는 내가 아주 어릴 적 돌아가셔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조부의 표정을 상상해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창조물이 저렇게도 짙은 숲을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해보셨을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 여담.

 

안녕하세용 ㅎㅎ. 소설로는 두 번째 도전이군요!

사실 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제 꿈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와 비슷한 꿈을 꿨거든요.

그 때 저는 신데렐라 경연에서 한 여자 분을 도와드리고 있었는데, 그 여자 분이 왕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더군요. 결국 왕자와 여자 분은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시고...

저는 뭐 했냐구요? 도와드리고 우와! 해 드리고 꿈에서 깼죠, 뭐.

이 꿈도 꽤 오래 전에 꿨는데 그냥 날리기엔 좀 아쉬운 감이 있어서 ㅎㅎ.

그래서 써 보았습니다. 항상 글틴이든 어느 공모전이든 글을 투고하고 나면 내 글을 누가

읽었을까, 라는 기대와 내 글이 너무 형편없어서 대충 훑고 마는 건 아닐까, 라는 조바심과

그래도 난 열심히 썼잖아, 라는 자부심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끼게 되는데요(다중이?).

언제나 글을 쓸 때는 설레고, 안 써질 때는 짜증나고, 다 쓰고나면 걱정 투성이입니다.

다들 그런... 거죠? 저만 그런 게 아닐... 거예요 ㅎㅎㅎ..... 아닐 거야...

이제 3월인데 저는 벌써 내년 캠프가 기다려진답니다. 글티너 여러분을 보고 싶어요.

이 쯤에서 물러가겠습니다.

 

뱀다리. 제 바로 밑의 소설 제목이 '신데렐라'라서 흠칫한 거 아세요? 어유, 이 소설 올리지 말까 생각했다가 올려보는 거예요. 요즘 글틴 이야기글의 대세는 동화 꼬집기인가봐요.

 

Hicky
Hi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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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섬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 곳에… 까만 사포 밤하늘 밑에선 굵은 파도가 이따금씩 너울거리다 사그라들었고, 파도가 자잘히 부서지는 어느 면에는 흙빛과 이끼 빛이 맞물려 섞인 바위가 있었다. 바위 위에는 야자수랄지, 나무 한 그루가 두꺼운 나무껍질이 둘러싸인 줄기 위로 가지를 드리워 넓적한 잎을 활개치고 있었다. 옅은 주홍빛이 아롱거리는 둥그런 열매도 매달려 있었다. 엄마의 입 속에서는 계속 바다의 물결이 부서지고 있었다. 엄마가 헉헉거렸다. 파도가 일순간에 멈췄다. 그것은 다시 그림으로 돌아왔다. 팔락이는 사포 한 장의 그림으로.     와글와글, 소란스러운 소리가 쏟아지는 텔레비전 앞에는 스케치북이 널브러져 있었다. 스케치북의 주변에는 크레파스와 색연필, 사인펜 따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고 떨어져 나온 사인펜 뚜껑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엄마가 뚜껑을 주웠다. 그림이라면 정말 발로 끼적여 놓은 듯한 나는 스케치북을 일찌감치 던져두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들의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리듬을 탔다. 그리고 내 옆에는 사포를 앞에 두고 엎드려 크레파스를 조막손에 쥔 그녀가 있었다. 선이는 이쁘게도 그림을 그리는구나. 엄마의 목소리가 마술사의 흰 비둘기처럼 팔랑거리며 그녀의 귀와 내 귀로 날아 들어왔다. 배시시 웃으며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바다에는 우두커니 섬이 떠 있었고 섬 위에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섬을 찍고 바다로 되돌아가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그녀는 이종사촌 언니였다. 항상 자주 놀러 왔었다. 거의 우리 집에 산다 싶을 정도로 놀러 왔었다. 그리고 올 때마다 그림을 몇 장씩 그려놓고 가고는 했다. 엄마는 그 그림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비닐 파일에다 끼워 보관했다. 정작 내가 드물게 받아오는 상장들은 쓰레받기로 쓰면서도 그녀의 그림들은 그 무엇 하나도 쓰레받기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선이는 참 이뻐. 볼 때마다 얼마나 이쁜지 몰라. 볼살도 이쁘고, 머리도 귀엽게 묶고, 요 조그만 손으로 그림도 잘 그리고. 이모는 선이를 볼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 엄마는 늘 상 그 말을 주렁주렁 달고 살았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얼굴을 조금 붉히며 쑥스러운 듯 고개를 그림에다 떨구고 그림을 그렸다. 그 후에 완성된 그림은 언제나 칭송을 받았다. 내가 옆에 떡하니 있음에도 엄마는 굳이 그녀를 치켜세웠다. 고리타분한 레퍼토리는 때마다 계속 되었다. 그녀의 외모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성품이 얼마나 착한지,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읊었다. 그걸 듣고 있는 나는 굉장히 지루했다. 지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코끝이 싸아해졌다. 엄마, 난 주워왔어? 글쎄다, 호호. 어릴 때부터 은연중에 자라 온 내 핏줄, 내 가족에 대한 의심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그녀를 입에 올릴 때마다 나는 끊임없이 내 친모와 친부는 누구이며, 그렇다면 굳이 내가 이 집에 머무르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흔히 어른들이 하는 짓궂은 장난이 있잖은가. 넌 다리에서 주워왔

  • Hicky
  • 2010-04-08
시간의 춤

      1. 사과파이 사건   소년은 그 일을 ‘사과파이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 날도 누구 하나 흘낏 봐주지 않는 집에서 짤랑거리는 동전 몇 개를 쟁여 넣고 집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집을 나서면 왼쪽에서 두 번째 전봇대 쯔음 거리에 자리한 골목에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가 잡다한 불량 식품들을 벌여놓고 꼬마들의 코 묻은 돈을 수금해 가곤 했다. 소년은 눈깔사탕과 양파 맛 과자 하나씩을 집어 들고 노파에게 동전 두어 개를 건넨 후, 골목을 빠져나왔다. 골목의 끝에서 펼쳐지는 큰길의 빨간 보도블록마다 작은 발을 맞추어보며 볼이 미어터지도록 눈깔사탕을 쪽쪽 빨아댔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거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 추운 겨울의 허공에 흩뿌려지는 사람들의 하얀 입김, 앞을 향해있는 사람들의 시선, 외줄타기를 하듯 경로이탈이 없는 사람들의 발길. 버스 정류장 곁에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실리콘 냄새가 풀풀 나는 약국이, 약국 옆에는 배가 통통히 부른 남자가 제빵사로 있는 빵집이 있었다. 빵집 앞 진열대에 진열 된 케이크들이 번지르르하게 윤기를 내며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케이크 옆에는 크루아상이랄지, 파이랄지, 바게트 같은 빵들이 줄줄이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소년은 입 안에 굴러다니는 사탕이 저 빵 맛이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잠시 젖어있었다. 소년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즈음에 한 남자가 지나간 것이었다. 정갈한 와이셔츠 차림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직각의 서류가방을 오른손에 꼭 쥐고 네 박자에 맞추어 걸음과 함께 흔들고 있었다. 서류가방은 이제 막 빵집 앞을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빵집에서 고수한 냄새가 흘흘 풍겨 나왔다. 서류가방은 왼손 팔목에 달라붙듯 채워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보도블록을 밟았다. 그 때 서류가방의 얼굴이 갑자기 설탕시럽에 가득 재워진 사과 조각들로 뒤범벅이 된 것이다! 아, 이런, 개 같은! 서류가방이 쌍으로 들어가는 모음 자음을 박격포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몇 번을 두리번두리번 하던 서류가방은 끝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누군가를 찾지 못한 모양으로 식식대며 구둣발로 땅을 꿍꿍 내려치고 있었다. 소년이 갸웃거렸다. 서류가방이 오늘 운수 참 더럽다는 표정으로 가던 길을 가려 할 때, 또 하나의 사과파이가 서류가방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소년은 서류가방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서류가방의 곁에 서 있던 어떤 남자가 잠시 킬킬거린 것을 본 탓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엷게 웃더니 서류가방의 발밑으로 떨어진 무언가를 발로 짓이겨버렸다. 금속으로 만들어 진 것인지 뭔지는 몰라도 땅에 뭉그러지며 깔그락깔그락 소리를 냈다. 남자는 꼭 춤을 추는 모양으로 팔랑팔랑거리며 유유히 서류가방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소년이 그가 밟아버린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모서리가 짜부라지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버린 그것은 ‘7:30’이라는 숫자였다. 괜

  • Hicky
  • 201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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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합니다. !!

    • 2010-03-18 23: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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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글을 쓸 때면 설레고, 안 써질 때는 '나는 역시 안 되는 거야'하면서 손을 놓고, 다 쓰고 나면 읽으면서 자부심을 느끼곤 하지만, 막상 투고하고 나면 '남들에게는 정말 재미있을 까.'하면서 조바심을 내곤 하죠.

    • 2010-03-18 23: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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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쭈쭈/연재는 아닙니다. 원래 이야기글 게시판에서 연재글은 심사하지 않기도 하고요. 이 뒤를 이을 자신도 없네요 ㅎㅎ.

    • 2010-03-13 21: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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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연재죠 ??? ㅠㅠ 다음편 기대할게요 ㅎㅎ

    • 2010-03-12 23: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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