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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아내

  • 작성자 배와귤은맛있다
  • 작성일 2010-05-28
  • 조회수 847

<두번째 아내>

밤이 깊어질수록 나의 사랑도 깊어질 줄 알았다. 상사에게 연거푸 고개 숙여 겨우 빠져나온 회식 자리보다 아내와 함께 누운 침대가 편할 거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유난히 일찍 들어온 지친 몸을 가진 남편이 힘겹게 옷을 벗어던지는 모습을, 아내는 그날따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밤의 색이 짙어질수록 사랑의 색도 짙어졌다. 박스 속에 담긴 채 버려진 개 마냥 침대 위에 홀로 웅크리고 누워있는 나를, 뒤늦게 침대 속으로 들어온 아내가 벌거벗은 채 불렀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 아내를 안았다.

침대가 낮은 소리로 신음했다. 아내도 덩달아 신음했다. 나는 묵묵히 침대 전체를 움직여 아내의 안으로 눌러 넣었다. 침대의 신음 사이사이 아내의 신음이 촘촘히 박혔고, 규칙적으로 배열된 신음들이 벽과 천장과 형광등과 책장과 창문과 방문과 바닥과 옷장과 벗어놓은 옷가지들과 침대보와 심지어 나의 콧구멍 속에까지 찐득하게 눌러 붙었다. 찰싹 달라붙은 신음에게 짭조름한 땀이 느껴진다.

아내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내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아내의 입술이 나의 얼굴을 꾹꾹 누를 때마다, 나의 표정이 섬뜩하게 떠올랐다.

놀랍게도, 아아, 나는,

“아아!”

아내가 마지막 신음을 내뱉고 바들바들 떨며 나의 온몸을 으스러뜨릴 듯 껴안았다. 온몸이 감전된 듯 파르르 떠는 모습이 날개 한 쪽이 뜯긴 잠자리 같다. 나는 날개 두 쪽 모두 뜯긴 잠자리처럼 축 늘어진 채 아내에게서 빠져 나왔다.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나와 아내는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연보라색 장미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저 장미들 아래에서, 나는 부끄러움과 거리낌 없이 거침없이 너무도 뻔뻔스럽게 아내를 안았다. 알 수 없는 수치심에 나는 조용히 아내를 등지고 누워야만 했다. 등 뒤에서 아내도 등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나는, 무표정이었다. 아무런 감흥 없이 여흥 없이 여운도 없이, 불이 꺼진 무대 위에서 멍청하게 누운 두 명의 배우가 사랑을 했다. 아니, 서로 사랑하고 있다 믿었다. 눈꺼풀이 깜빡이는 소리마저 성낭 물보라처럼 일을 것 같은 이곳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 피곤한 눈꺼풀을 감는 것이 두려워, 침대 옆 책상 위에 의미 없이 놓여 먼지만 쌓여가는 지구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지구본에, 듬성듬성 그려져 있는 이름 모를 누런 사막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아내가, 사막인 양 수분이 전부 빠져나간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거대한 사막을 등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나는 바짝바짝 말라갔다. 숯덩이처럼 바짝 마른 내게 더 이상 시야는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등을 보려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바짝 마른 시야 속엔 오직 어둡고 누렇고, 바짝 마른 사막만이 보였다. 그녀의 등짝이라 여겨지는 곳에 두 개의 사구가 나란히 동쪽으로 쓸려가고 있었다.

거대한 사막을 품은 등짝 속엔 더 이상 내 아내는 없다. 낯선 여자가 들어있다. 내가 아닌 남자와 사랑할 낯선 여자가, 두 개의 콧구멍으로 내가 아닌 남자의 체취를 들이마시는 낯선 여자가, 한 개의 입으로 내가 아닌 남자와 시시덕거리고 혀를 섞고 있는 낯선 여자가, 사막 위에 서서 서서히 모래로 변모해간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아, 나는 무표정이다. 어떤 감정의 실오라기 하나도 내 마음엔 닿지 않았다.

낯선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도 낯선 여자를 따라 낯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낯선 방에 널브러진 낯익은 나의 옷을 걸쳐 입고 낯선 현관문을 열어 낯선 집에서 빠져 나왔다. 낯선 집 앞에 낯익은 거리에 서서 낯선 집의 낯선 창문을 바라보자, 낯선 창가에 낯선 여자가 서서 낯익은 옷을 입은 낡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선 여자는 금세 낯선 커튼을 쳐 사라졌고, 낯익은 승용차 안으로 들어간 낡은 나는 낯익은 도로를 따라 낯선 집에게서 도망쳤다.

낯선 여자와 이혼을 했다. 몇 개월 동안 이루어진 것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처리했다. 회식 자리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번 나갔다.

낯선 여자와 이혼을 했다. 낯선 여자와 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나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소문은 다리가 짧은지 초반부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중반부가 되자 소문은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후반부에선 다리가 짧은 만큼 땅을 딛는 횟수가 많아서인지 속도가 대단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이혼을 떠들었다. 하지만 딱히 은밀하게 간직하고 싶은 비밀도 아니었으니 무슨 일이 있겠거니 신경 쓰지 않았다.

헌데 저번 주 회식 때, 갑자기 불두덩 주변을 근질거리게 하는 말을 들었다.

“선배, 이혼 하셨다믄서요—?”

몸을 배배 꼬는 것처럼 혀도 배배 꼬였는지 목소리도 발음도 꼬여있었지만, 이상하게 나를 배배 꼬는 말이었다. 맥주잔을 들고 풀린 눈동자로 비틀거리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후배의 얼굴이 벌겋다. 다가오는 그녀는, 평소의 경계가 풀릴 정도로 취한 암사슴이다. 취기가 잔뜩 올라 나무마저 요염하게 춤을 추는 거대한 숲을 등지고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는, 먹음직스럽게 살이 오른 암사슴이다. 내 속에 수사자가 옷소매로 입가를 쓰읍 훔친다. 침을 질질 흘리고 불두덩을 벅벅 긁는 수사자가 다가오는 암사슴의 어깨를 둘러 잡는다.

암사슴이 도망가지 않는다. 수사자의 성기가 빳빳하다. 천천히 입을 열어 비틀거리는 암사자의 목덜미에 갖다 댄다. 작은 교성이 흘러나온다. 수사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감춰져 있던 손톱이 드러나 번쩍이고 송곳니는 암사슴의 목덜미 속으로 깊게 파고든다. 거대하고 취기 오른 숲에 그 둘 뿐이었다. 우리뿐이었다.

후배는 하얗고 늘씬한 등을 훤히 드러낸 채 엎드려 잠을 자고 있다. 나는 그 옆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촘촘한 격자무늬가 금방이라도 비처럼 쏟아질 것 같아 한 쪽 눈만 뜨고 있었다. 수사자는 가르랑 이며 잠이 들었는데 나는 정신이 또렷하다.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갔다.

거실은 방보다 인테리어나 장식이나 각별히 신경 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후배는 이런 분야로 나가고 싶다 했었던 것 같다.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봐도 대학 시절 그녀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녀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대학교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추억이 없는 것이다.

냉장고 안에 캔 맥주 4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 잔 더 하면 잠이 올까 싶어 한 개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캔을 따서 한 모금 쭈욱 들이켰다. 온몸에 힘을 빼자 몸이 소파 속으로 물컹이며 들어간다. 개미지옥에 빠지면, 늪에 빠지면, 죽음은 이렇게 느리고 느리게 다가오는 것이다.

손을 뻗어 리모컨으로 TV를 켜자 흰색 노이즈가 뜬다. 급류하는 노이즈의 강이 TV 화면 가득 떠오른다. 갈증이 일어 맥주를 마셨다. 자동차의 바퀴가 너무 빨리 돌면 천천히 역회전 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노이즈의 강도 너무 빨리 흘러 천천히 역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빈 기억과 추억도 역류한다.

순간 올라온 구토감에 얼른 변기로 달려갔다. 화장실의 전등을 켤 여유도 없이, 속에서 간헐적으로 부풀었다 가라앉는 구토를 온몸으로 억제하며, 간신히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구토가 터져 나온다. 내용물을 알아볼 수가 없지만 시큼한 역겨움이 코와 입을 찌른다. 눈앞이 핑핑 도는데, 두 번째가 터져 나왔다. 왼손으로 겨우 변기의 물을 내렸다. 빙그르르 돌면서 내려가는 구토를 보며, 세 번째를 쏟았다.

수사자가 잠에서 깨어나 등진 사막을 뒤돌아보았다. 거대하고 취기가 잔뜩 오른 푸른 숲은 더 이상 없다. 사막은 어느새 수사자를 뒤덮고, 수사자는 비틀거리다 바짝 말라 옆으로 풀썩 쓰러진다. 건포도처럼 말라버린 혀가 숨을 쉬기 위해 할딱거리지만, 순식간에 모래 속으로 묻혀 버렸다.

눈을 뜨니 후배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화장실에 쓰러져 있기에…….”

걱정스러운 눈빛의 암사슴이 내 볼을 자신의 앞발굽으로 쓸어준다. 수사자는 가르랑 이며 암사슴을 끌어당겨 안았다. 수사자는 지독하게 외로움을 타는 동물이다. 그래서 숲을 품은 암사슴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암사슴이라면, 사막으로 떠오르는 낯선 여자를 잊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날 밤, 꿈에 사막이 나타났다.

아니, 낯선 여자였다. 낯선 여자는 여전히 사구 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하게 메마른 표정으로.

수사자는 더 이상 사막에게 잠식 되지 않는다. 수사자의 뒤에는 서대하고 싱싱한 숲이 군림하고 있다.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수사자는, 유유히 숲속으로 들어갔다. 암사슴의 교성이 들려왔다. 사막 위에 선 낯선 여자는 어느 새 모래 기둥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정작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나는 후배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나와 후배 사이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우리는 어느 새 약혼을 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사랑은 깊고 거짓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나의 사랑도 깊어질 줄 알았다. 후배를 아내로 맞이하는 전날 밤까지, 나는 매일 꿈속에서 사막을 만났다. 낯선 여자는 매일 밤 메마른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두 번째 아내는 내게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냐고 물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 잠을 설쳤다 했다. 두 번째 아내도 자기도 결혼식이 걱정되어 잠을 설쳤다 했다. 사실 잠을 설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피곤한 이유는 오히려 너무 깊게 잠들어 계속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누런 모래들. 알알이 흩어지는 낯선 여자. 누런 사구. 너무나도 선명하게 누런 사막.

밤의 색이 짙어질수록 사랑의 색도 짙어졌다. 먼저 샤워를 하고 침대에 앉아 독서를 했다. 두 번째 아내는 아주 오랫동안 목욕을 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하품을 했다. 두 번째 하는 결혼은 신선하지 않았고 지루했고 피곤했다. 뭐든지 여러 번 하다보면 처음 같지 못하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결혼식 때엔 긴장을 했었나, 눈물을 보였었나, 어떤 표정을 지었었나, 첫 번째 아내는 어떻게 생겼었나, 생각하는데 두 번째 아내가 나타났다. 나는 그만 들고 있던 책을 놓치고 말았고 책이 바닥에 닿기 전, 두 번째 아내가 수건 한 장만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수줍게 웃는 것을 보았다. 두 번째 아내가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하지만 나는 피곤해서 얼른 자고 싶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는 나의 태도를 오해했는지, 두 번째 아내는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 속에서 나를 안았다.

수사자가 그르렁 거리며 성을 냈다. 그러자 암사슴은 주춤하더니 뒤로 물러섰고, 수사자는 성난 표정으로 뒤돌아 누워 두 눈을 감았다. 암사슴은 이불을 덮고 똑바로 누워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침대가 낮은 소리로 신음했다. 두 번째 아내도 덩달아 신음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보았고, 뒤돌아 누운 두 번째 아내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단 걸 알았다. 두 번째 아내는 울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 아내가,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절 사랑하세요?”

암사슴은 축축한 안개가 잔뜩 낀 숲에 누워 있었다. 수사자는 암사슴에게 다가가다 말고 얼굴을 찡그리며 뒤돌았다. 수사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솔직히 대답했다.

“아니.”

두 번째 아내가 우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침대의 신음도 잦아갔다. 숲이 점차 메말라갔다. 그때 나타났다, 누런 모래가.

“왜 저랑 결혼했어요?”

암사슴이 메마른 질문을 던졌다.

수사자는 메마른 대답을 했다.

“넌 사막을 잊게 해줄 것 같았어.”

그 대답에 두 번째 아내가 순식간에 모래로 뒤덮여 갔다. 수사자는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었고, 나는 그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푸르고 싱싱하던 숲이 금세 메말라 사막으로 변했다. 누런 모래가 흩날리고 사구가 쌓여갔다. 모래 기둥처럼 변한 두 번째 아내가 모래로 변한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나도 두 번째 아내를 따라 일어섰다. 나의 옆에서 수사자가 그르렁 거리자, 모래 바람이 일었다. 수사자는 메마르게 짖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모래로 사라졌다. 나와 두 번째 아내만 사막 위에 덩그러니 남았다.

두 번째 아내가 천천히 뒤돌았다. 두 번째 아내는 암사슴의 두개골 뼈를 들고 있었다. 두개골 뼈는 매우 부드러워 보였고, 때가 전혀 묻지 않은 흰색이었다. 나의 수사자는 뼈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두 번째 아내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하게 메마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두 번째 아내의 뒤에 낯선 여자가 나타났다. 거대한 사막이 된 두 여자는, 더 이상 나의 아내가 아니었다. 두 명의 낯선 여자는 점차 하나로 합쳐졌고, 나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모래가 어찌나 거칠게 날리는지 뺨에 모래로 긁힌 상처가 하나 둘 씩 생기기 시작했다. 낯선 여자는 거대한 사막이었다. 그리고 난 뺨을 맞았다, 사막에게.

아아, 나는 무표정이다. 정신을 차리니 사막 한 가운데 서있는 내가 보인다. 낯선 여자는 사막 위에 누워 있다. 낯선 여자는 발끝부터 모래로 변모해간다. 사라진다. 나의 수사자처럼 죽어버렸다. 암사슴처럼 앙상하게 뼈만 남아버렸다.

아아, 나는 무표정이다. 사막 한 가운데에 나만 남았다. 낯선 여자는 사라지고 나만 남았다.

그녀는, 사막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사막이 아니었다. 아아, 나는, 무표정이었고, 첫 번째 아내와 두 번째 아내는 모래로, 나는 모래로 변모하지 않았고, 그저 무표정이었고, 나는…….

내가 아내를 모래로 만들었다.

그래. 내 앞에서 우는 두 번째 아내는 사막이 아니었다.

내가, 무표정이었고, 사막이었다.

사막이었다, 내가.

내가 사막이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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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02
아버지의 소리

아버지의 소리     2년 전부터 날 깨우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핸드폰 알람이었다. 어기적거리면서도 학교를 가기 위해선 일어나야만 한다. 이미 담임에겐 지각 대장으로 찍혔지만, 매일 같은 잔소리를 듣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이불 밖으로 나온 몸이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화장실로 걸어간다. 집안엔 터벅거리는 나의 발자국 소리 뿐 오싹할 정도로 조용했다. 머리를 다 감고 나서 찬물이 몸에 떨어질까 차마 머리를 들지 못했다. 투두둑, 머리에서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크단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가 무언가를 연상시켜 난 서둘러 나왔다. 머리를 말리면서 한손으론 숟갈과 그릇, 어젯밤에 사온 시리얼과 우유를 식탁으로 옮겼다.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켜려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가 수신료를 내지 않았단 게 생각나 도로 내려놓았다. 덜덜 떨리는 요란스런 드라이기를 끄니 대기가 착 가라 앉았다. 식탁에 있는 세 개의 의자 중 가운데에 앉는다.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 둘이서 이곳에 누군가 있었다고 소리치려 했지만 육중한 추억이 그들의 입을 눌렀다. 그릇을 끌어 앞에 두었다. 그릇이 달랑 하나 있기엔 이 식탁은 내게 너무 넓었다. 어제 사온 눅눅한 시리얼 상자와 촉촉이 젖어있는 우유는 어리둥절해서 빈자리를 곁눈질 한다. 나는 그들이 더 이상 다른 생각하지 못하도록 양손에 잡아 내 앞으로 끌었다. 먼저 시리얼을 그릇에 담았다. 손톱 같은 시리얼들이 낱낱으로 쏟아졌다. 그런 시리얼들을 그릇은 묵묵히 담았고, 그 모습에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2년 전 그날...... 촤르르륵, 시리얼들이 쏟아지는 소리인지 트럼프 카드가 이손에서 저손으로 움직이는 소리인지 생각이 흐려졌다. 그 와중에 시리얼들이 어찌나 천방지축으로 날뛰는지 몇 개가 그릇 밖으로 튀어 올랐다. 투두둑, 식탁 위로 떨어지는 시리얼들이 장판 위로 떨어지는 피의 소리를 머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시리얼을 그만 부었다. 누런 시리얼이 가득 쌓인 그릇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우유를 부었다. 보골 보골 피어오른 흰 거품들을 숟갈을 휘저어 터뜨렸다. 거품 안에는 시리얼들의 비명이 담겨 있었을까. 우웅 하는 냉장고 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나도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시리얼을 숟갈로 퍼 올렸다. 투두둑. 숟갈에 채 담겨지지 않은 우유들이 그릇으로 도로 떨어졌다. 방울방울이 떨어지면서 ‘그날’의 소리가 났다. 니, 그르케 하다간 굼방 뽀록난데이. 아버지가 왼뺨을 씰룩이며 웃었다. 식탁 왼쪽에 앉은 아버지의 앞엔 트럼프 카드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투박하고 굵은 손엔 마른 피가 잔뜩 묻어있는 트럼프 더미가 쥐어져 있다. 그 피는 아버지의 배에 꽂혀있는 칼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 배엔 여전히 칼이 꽂혀 있었지만 피는 멎어 있었고 흘렸던 피는 모두 굳어 있었다. 아버지께선 2년 전에 돌아가셨다. 나는 시리얼을 먹으며 옆자리에 앉은 아버지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2년 전부터 보이는 아버지

  • 배와귤은맛있다
  • 2010-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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