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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날의 크리스마스

  • 작성자 속눈썹
  • 작성일 2010-08-29
  • 조회수 547

한 여름날의 크리스마스

 

건물 사이에 뉘엿뉘엿 걸려 있는 태양빛이 뒤늦은 열을 내뿜는다. 두껍게 퍼진 석양은 하늘뿐만 아니라 도시의 모든 공백을 황혼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 황혼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타일로 뒤덮인 백화점 앞에 내가 서 있다. 손에 들린 백화점 쇼핑백엔 선물이 들어있다. 당장 백화점으로 돌아가 환불을 요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남들이 보기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게 여겨질 정도로 의미 없는 선물이.
오늘은 금빛 리본이 둘러진 고급스러운 상자로 포장을 했다. 올해는, 성인이 된 윤이를 위한 장밋빛 향수와 시들지 않는 붉은 장미 스물 한 송이.
나는 오 년 전에 헤어진 친구를 기다리며 매해 그 친구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선물은 해가 갈수록 근사해져만 간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은 내 용돈으로 쓰기에도 모자라지만, 항상 돌아오는 여름 속 그 아이의 생일을 챙기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생화보다 더 생기 있게 빛나는 조화 장미와 조화가 담지 못한 장미향을 담은 향수는 학생인 내게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나는 조금 더 비싸고 조금 더 근사한 선물을 찾아 나설 것이다.

“누구 줄 건지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나중에 해줄게. 전해주게 되면.”
“그래, 알려줄 리가 없지. 다리 너무 아프다. 어디 들어가서 쉬게 커피나 한 잔 사줘.”

나의 동의가 있기도 전에 카페로 들어선 가희는 이미 주문을 마치고 돌아와 내게 영수증을 내민다.

“8번이야. 네가 가져올 거지?”
“뭐 이렇게 많이 시켰어? 여기서 밥 먹을 거야?”
“말해줘.”
“뭘?”
“누군지 말해줘. 내가 5년 동안이나 같이 선물 사러 같이 와줬으면 이젠 나도 알아도 된다고 생각해. 아니, 알아야 해. 누구 줄지도 모르는 선물 골라주는 거 너무 무의미해. 누군지 알아야 내년부터는 나도 어느 정도 의미를 갖고 널 따라다니든지 할 거 아니야.”
“뭐야, 의미 같은 거 네가 부여 할 필요 없어.”
“그게 5년 동안 꼬박꼬박 부려먹고서 할 소리냐?”
“부려먹은 거 아니야. 그때마다 내가 밥도 사줬잖아.”
“아무튼, 오늘은 들어야겠어. 고1때부터 지금까지 군소리 없이 따라다니긴 했는데, 솔직히 이게 너한테도 의미 있는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 나도 이제 너랑 친구 된지 오 년이나 됐는데 도대체 그 상대가 누군지 물어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잖아.”

가희가 나를 식당이 아닌 카페로 끌어들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카페에 왔다 하면 적어도 세 네 시간은 죽치고 앉아 이야기하는 게 우리의 일상, 적어도 주에 한 번은 오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러 오는 이유는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한 장소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가희는 오늘 나를 앞에 앉혀두고 내 이야기가 한 시간이 되든 한 나절이 되든 내 앞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들을 작정이었다.

“꼭 들어야겠어?”
“응, 얘기해줘.”
“이야기하기 힘든데.”
“그래도.”
“안 돼.”
“뭐야! 해줘!”
“싫어.”
“해 달라니까!”
“못 해.”
“해줘! 안 해 주면 이거 갖고 백화점 가서 환불해온다! 영수증 여기 들어있지?”

가희는 갑자기 쇼핑백을 확 낚아채갔다. 말을 해주지 않으면 정말 당장에라도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환불을 해 올 기세다. 아님, 그냥 가지고 집으로 가버리거나.

“야! 내놔! 그거 고르느라 얼마나 걸렸는데 무슨 환불이야!”
“시간이 아깝긴 하니? 난 시간도 아깝지만 돈도 아까워서 미치겠어, 정말! 아니 도대체 주지도 않을 선물을 왜 이렇게 비싼 걸 매년 사는 건데? 도대체 이 선물을 받는 사람은 누구길래 나타나지도 않고 이렇게 애를 태우냐고. 부모님 모르게 이런 것 사는 것도 한 두 번이야. 언제까지 침대 밑에 옷장 속에 숨겨두기만 할 건데? 이거 들어갈 자리나 있니?”
“있어.”
“좋겠다, 방 넓어서! 진짜 환불해 올 거야. 네가 다시 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아니, 그냥 내가 갖고 가버릴까?”
“아, 진짜 왜 이렇게 네 멋대로야!”
“너는 왜 그렇게 고집불통이야! 정말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너 이렇게 매년 비싼 선물 사서 모으는 거, 누구한테 주지도 않고 네가 쓰지도 않고 이렇게 공들인 선물 썩히기만 하는 거, 진짜 계속 해선 안 될 일이라고. 너도 그거 아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말도 못하고 나만 알고 있으라고 맨날 신신당부하는 거잖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면 왜 이야기를 못해! 제발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은주야. 지금 말 하면 너희 엄마한테 전화 드려서 네가 이렇게 저렇게 하고 있으니까 이야기 좀 같이 해보시라고 할 거야!”
“너 왜 그래, 오늘?”
“작정하고 나왔다, 이야기 들으려고! 그러니까 제발 말 좀 해줘. 지금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니라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오 년이야. 내가 의미 같은 거 부여할 필요 없다는 게 정말 말이나 되는 소리니? 그럼 나는 들러리야? 나도 네 친구야. 알아야 할 건 알아야겠어.”

가희는 물러설 줄을 몰랐다. 아무한테도, 쉽게 이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의 이야기였고, 이 선물을 전해주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러나 가희는 그런 나를 내내 다그쳐왔고,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이야기를 들으러 나왔단다.
사실 오늘 집을 나설 때부터 고민은 했었다. 오늘도 가희는 나에게 이 선물을 사는 이유를 물을 것이고, 오늘도 나는 뿌리칠 것이고. 하지만 그렇게 뿌리치기만 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수는 없는 일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가희를 만나고 선물을 골랐다. 어김없이 가희는 내게 이유를 물었고, 역시 그 압박의 강도는 작년과 비교할 수 없다.

“약속해.”
“얘기해줄 거야?”
“약속해, 우선.”
“뭔데?”
“엄마한테 전화하지 마.”
“하하, 뭐야, 알았어.”
“진짜지?”
“응, 약속해. 약속.”
“후우, 기다려. 커피 나오면. 커피 마시면서 해줄게.”
“진짜지? 진짜지? 나중에 딴소리하기만 해봐, 커피 다 마시고, 케이크 다 먹고, 이런 소리 하기만 해봐.”

그렇게 뜸을 들일만한 이야기이긴 해도, 커피를 마시면서, 케이크를 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내가 어떻게 될지, 그 이야기를 들은 가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도 눈에 훤하다. 곧 커피와 케이크가 나왔고, 벨이 울리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음식을 가져온 가희는 자신의 커피를 챙길 생각도 하지 않고 얼른 이야기를 하라며 재촉했다.

“커피 안 마셔?”
“들으면서 마실게. 신경 쓰지 마.”

내가 먼저 커피를 마셨다. 윤이와 헤어질 때만 해도, 이런 커피를 사먹고 이런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할 나이는 아니었는데.

“전학 오기 전에, 계속 같이 다니던 친구가 있어. 이름이 윤이야. 최윤. 나랑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였어.”
“이름 예쁘다. 외자 이름 좋아.”
“응, 나도 윤이 이름 좋아해. 아무튼, 우린 줄곧 같은 동네 살았고, 줄곧 같은 학교였어. 계속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항상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정말 서로 할 말 못 할 말 다 해가면서 지냈던 친구야. 죽마고우라는 표현이 맞을까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친한 친구야.”

가희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친한 친구라고 자부할 수 있는 친구 앞에서 과거의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그것도 ‘죽마고우’라는 표현까지 써 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미안했지만, 계속 식어가는 커피와 생기를 잃어가는 케이크조차 잊어버리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희를 보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였나, 계속 이야기했던 것 같아. 우리는 이런 학교에 다니지 말자고, 세상이 더럽다는 것만 일깨워주는 그런 학교엔, 남아있지 말자고. 우린 우리가 1회 졸업생인 신설 중학교에 다녔고, 신설이라서 그런지 준비된 게 하나도 없었어. 그 밑에서 배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사람들도 많았어. 안 그래도 그때 사춘기였는데, 내가 보고 배워야 할 어른들이 나한테 보여주는 모습들이 너무도 실망스럽다보니까 우리 둘 다 학교에 미친 듯이 싫증이 났던 거야. 정말 심했어. 너도 그래서 온 걸 테니까 잘 알겠지, 우리 생각.”“응, 나도 중학교 때부터 그랬어.”
“다들 그런 것 같아. 그래서 고등학교는 대안학교로 진학하려고 했었어. 이것저것 알아보고 정말 이 학교에 진학하려고 별 짓을 다했지. 그런데 우리 둘 다 부모님 반대가 너무 심해서 결국에 입학은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로 할 수밖에 없었어. 울고불고 떼를 써도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시기에, 나중에 전학이라도 가야겠다는 심정으로. 같은 학교로 배정을 받았고, 다른 반이었지만 전학 오기 전까지 변함없이 함께였어. 늘 이야기했었어, 우리 언제 전학 갈까.”
“근데 왜 너만 온 거야?”
“학교에 비리가 있었어. 어디나 있는 비리겠지만, 우리 학교는 그걸 재수 없게 들킨 거지. 사립이었는데, 실력 없는 교사들이 학교에 들어올 방법 중 하나가 이사장한테 돈 몇 천 만원 쥐어주는 거라는,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거야. 사실 우리로선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워낙 학교에 신물이 났던 터라 그냥 그게 사실일 거라고 믿는 게 우리 맘이 더 편했던 거지. 정말 죽기 살기로 부모님을 설득했어. 나는 돈으로 학교 들어온 선생들 밑에서 못 배우겠다, 제발 내 마음을 알아 달라.. 결국엔 허락하셨어, 우리 부모님은. 근데 윤이는, 알고 보니까 부모님 설득조차 하지 않았더라.”
“왜? 무서워서?”
“아니, 자기 마음이 변했다고 했어. 중학교 때는 윤이가 사춘기라 그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는데, 고등학교 와서 더 좋은 친구들 만나고, 그래도 중학교 때보다는 나은 선생님들 밑에서 공부하니까 이것도 그렇게 나쁜 것 같진 않다고. 그리고 지금 담임선생님만은 정말 좋은 선생님이라고, 교장이 어떻든, 이사장이 어떻든 자기 반 친구들, 담임선생님이 정말 좋아서, 사실은 가고 싶지 않아졌다고 했어.”
“그래서, 정말 너 혼자만 온 거야?”
“처음엔 같이 가자고 했지. 근데 설득하면 설득할수록, 이건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어. 지금 윤이의 마음이 이미 돌아섰고,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은 어쨌든 평범한 길도 아니고 쉬운 길도 아니니까. 한때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해서 지금의 내 생각까지 윤이에게 강요하는 건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냥 나만 오기로 했어. 그래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고, 내가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전학을 가는 거니까, 아무리 기숙사 생활을 한다고 해도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왜, 아직까지 못 만나고 있는 거야? 싸웠어?”
“차라리 싸웠다면 이러진 않지. 화해하면 되는 거야, 싸우면. 처음엔 윤이 부모님 반대 때문이었어. 내가 대안학교에 간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예전과 같은 시각으로 날 보시진 않았겠지. 연락을 못하게 하셨어. 보수적인 분들이셨거든. 윤이 번호가 바뀌었었어. 윤이는 바뀐 번호로 나한테 다시 연락을 했고, 그렇게 한 달 정도 연락을 하다가, 윤이가 나랑 계속 연락하고 있던 걸 부모님께 들켰고, 그 소식을 들은 나도 윤이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싫어서 당분간은 휴대폰으로 연락하지 않기로 했어. 그런데 그게.. 그게 지금까지 왔어.”

가희는 머뭇거리며 왜냐고 물었다. 왜냐고, 왜냐고. ‘왜’라는 질문밖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지.

“그땐 우리 미니홈피도 없었고, 블로그 이런 것도 하지 않았었어. 오직 전화가 연락수단의 전부였지. 서로 메신저도 안 했고. 전화를 안 하다 보니까 점점 멀어져가는 것만 같고, 그래서 한 달 만에 전화를 다시 했을 땐 번호가 다시 바뀌어 있었어. 집전화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이렇게 설명을 하는 내게도, 내 말이 변명으로만 들린다.

“갑자기 왜?”
“모르겠어. 사실 처음엔 집에도 몇 번 찾아가봤는데, 벨도 못 누르고 그냥 돌아왔었어. 무서웠어. 문이 열리면, 윤이가 아닌 윤이 부모님이 나와서 나를 몰아내실까봐, 아니, 윤이가 나와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봐. 무섭고 불안하고, 그리고 미안했어. 어쨌든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내 처지가, 조금만 참고 견디면 졸업인데, 그걸 못 참고 뛰쳐나온 내가, 우리가 함께 꿈꿨던 미래를 망가뜨린 내가.. 미안했어.”
“넌 그런 마음이 아니었잖아. 결코.. 배신하려고 한 건 아니잖아.”
“맞아, 나뿐만 아니라 우리 둘 다 서로 배신을 한 게 아니야. 그저 각자의 선택을 했을 뿐이야. 그런데 우리 주위의 상황이, 서로 연락도 할 수 없고 만나러 갈 수도 없는 그 상황들이.. 나를, 윤이를, 배신자로 내몰았어. 나랑 윤이는 아직도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인데, 만날 수 없다는 걸 빼면 예전과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윤이는 너랑 같은 생각이 아니라서 먼저 연락을 끊은 거라면서 나보고 현실을 쫓으래. 나는 지금 과거에 얽매여서 스쳐 지나가는 친구 하나 잊지 못하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거라면서. 그래서 이때까지 너한테 숨겼던 거야. 너한테만은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가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희 역시 내게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내가 아닌 사람은 내게 그런 말밖엔 할 말이 없을 거라고, 가희의 말을 듣기도 전에 내 마음이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다.
“근데, 정말 윤이가 너처럼 생각하고 있을지 말지는 너도 모르는 거잖아?”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 그리고, 만나지 못한다는 것 말고 변한 게 없다니, 그게 가장 큰 변화잖아. 만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너흰 지금 연락조차 못하고 있잖아. 그 세월이 5개월도 아니고 5년인데, 그렇게 네가 굳게 믿는다고 해서 윤이 마음이 네 생각처럼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어. 정말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지금 네 행동, 정말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가능한지 아닌지조차 확실치 않은데 상대방 마음이 어떤지는 생각도 안 하고 무작정 기다리는 건 정말 너를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걱정할 만한 일이야. 그걸 네 마음을 몰라준다고 속상해하거나 야속해하면 안 되는 거야.”
“그래, 네 말 다 일리가 있어. 나도 알아.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 이렇게 이해타산적이고 복잡한 세상에선 한 사람에 대한 한 마음을 지키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 알아. 그런데 있잖아. 윤이랑 나는, 현실 속에서 존재했던 사이이긴 하지만 현실을 판단하는 평범한 잣대로는 결코 정의내리기 힘든 사이였어.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그 힘든 시간 중 단 한 시간도 거짓이거나 위선이었던 순간은 없었어. 유년기, 사춘기를 모두 같이 보낸 친구야. 그만큼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서로에게 상처도 많이 줬지만 그랬다고 해서 윤이와 멀어졌다거나 그 아이와의 관계를 끊고 싶다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서로 다른 게 많았지만, 윤이와 나의 차이점은 나와 우리 엄마아빠와의 차이점보다 더 이해하기 쉬웠어. 다른 차이는 다 인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만은 이해하고 싶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린 꿈을 나눈 사이야. 윤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꿈은 이루어지는 거라고 여겼었어. 윤이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그 시절 속에서 만들어진 우리의 믿음을 믿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 이 믿음조차 네가 믿지 못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지만,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믿어. 그리고 그 믿음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견고한 거야.”
“……질투난다.”
“……미안.”
“뭐야, 네가 미안하다고 그러면 내가 뭐가 돼. 아예 본심이 아닌 건 아니지만, 그냥 한 번 해본 말인데.”
내가 우려했던 상처는 이미 가희에게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유치하고 사소한 감정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결코 가볍고 얕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지극히도 솔직한 가희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래, 아무튼. 다시 하던 얘기 하자. 그래, 윤이도 너와 같은 입장일 거라고 치자.”
‘치자’라는 말은 너무 슬프다. 괜히 선심 써서 사실이 아닌 걸 사실로 만들려는 말 같아.
“그렇다면, 왜 서로 5년 동안 찾지도 않고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 거야? 집을 알고 있잖아. 이사 안 갔다며. 같은 동네 살 거 아니야.”
“난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 한 게 뭔데? 솔직히 바뀐 전화번호 같은 거, 맘만 먹으면 알 수 있는 거 아냐?”
“나한테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어.”
“후우, 그런 말로 포장하지 마.”
“뭐?”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말이 아니야. 이런 말 들으려고 너 닦달한 거 아니야.”

오늘 가희는 유난히 공격적이다. 조금은 다정해도 될 텐데.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지금 내가 솔직하지 않은 걸까? 포장? 포장이라니, 내가 나를 포장하고 있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 우린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살고 있고, 서로의 집만 찾아가면 금방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왜 연락 먼저 안 했냐며 싸울 수도 있고, 이제 예전처럼 가깝게 지내자며 손을 내밀 수도 있다. 허나 그런 행동은 윤이도 나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나 윤이를 그리워하고 있으면서, 왜 나는 윤이를 찾아갈 수조차 없었던 걸까. 그리고 윤이도, 자신의 뜻대로 연락을 끊은 게 아니라면 어째서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걸까.

“솔직하게 말해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커피향이 다시 코끝을 맴돈다. 그만큼 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듣지 못하고 있었던 음악이 귓가에 머무른다. 그 커피향과 그 음악 소리도, 내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희의 표정도,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그저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만을 마시는 사람들의 표정도, 유리벽 너머에 흐르고 있는 더위도, 그 모든 것들이 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솔직한 대답 대신,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내 입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자니,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만 품어왔던 불안을 털어놓으려니, 아니, 나 자신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그 숨겨진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려니 방금까지만 해도 장황하게 떠들어대던 믿음조차도 그 견고함을 잃고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사실 내 믿음은 파란 파도가 다가오기 전까지만 존재하는 백사장 위의 맹세처럼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로운 것이라고, 그만큼 유치하고 순간적인 것이라고.

“은주야, 울어?”

눈물은 정말 순식간에 우리를 덮쳐온다. 꼭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내 감정은 절정이 되어 예상치 못했던 눈물을 터뜨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지속된다.
‘울어?’라는 물음보다 ‘은주야’라는 다정한 말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이런 순간에, 이렇게 아프고 잔인한 순간에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은주는 그 위에 기대어 목 놓아 울고만 싶어졌다. 은주는 울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이름을 그리도 다정하게 불러준 그 친구 앞에서 지난 5년 간 참고 또 참고 누르고 밀어냈던 슬픔을 모두 토해냈다. 견고하게 쌓아진 믿음이란 성은 사실은 모래로 이루어진 것, 그 모래성을 쓰러뜨리는 바람과 파도가 없을 때만 견고하게 존재하는 것, 더욱 슬픈 것은 그것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 가장 견고한 것이라는 것.
나는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손가락 사이로 눈물을 흘려보냈다. 내가 윤이에게 연락을 하지 못한 이유, 어쩌면 윤이가 내게 연락을 하지 못한 이유와도 같을 그 이유. 가시 돋친 믿음 위에 피어난 꽃은 스스로 시들지도 못한 채 그저 향기 없이 만개한 채로 자신에게 향기를 불어 넣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그 말을 꺼내야만 했다.

“윤이가 나 없이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 윤이와 나를 모두 알고 있는 친구들에게서도 윤이가 내 이야기를 했다는 그런 소린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었어. 그냥 나 같은 거 잊고 잘 지내는 것 같았어. 연락했는데 윤이가 나를 기억조차 못 한다면, 아니, 기억한다고 해도 그냥 예전에 같은 반이었던, 하루에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던 그런 남자 아이들 대하듯이 날 대한다면, 난 도무지 슬퍼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어.”

가희는 말없이 내 손에 휴지를 쥐어주었다. 끊임없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사실 울음 섞인 내 말을 가희가 모두 알아듣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말이 나오는 대로, 목소리가 망가지는 그대로 모든 말을 내뱉었다.

“나도 윤이 없이 5년 동안 잘 지냈어. 윤이 이야기.. 하는 거 정말 오랜만이야. 그동안 나 혼자만 속으로 생각했고 그저 과거의 기억만 떠올리면서, 그렇게 추억하기만 했어. 윤이 이야기 같은 거 하지 않고도 그동안 잘 살았어. 윤이도, 그래서 불안해할 지도 몰라. 그래서 연락을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런데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라서, 네 말대로 나 혼자서만 그런 거라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니까.. 5년 동안 나 혼자 그리워한 거라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모든 세월이, 내가 그동안 윤이를 위해서 해왔던 모든 행동이 모두 부질없는 게 되어 버릴까봐.. 나 결국 그게 두려워서, 그런 알량한 자존심으로 지난 세월을 살아왔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은 넘쳐났지만, 그 수많은 말뭉치들은 모두 먼지가 되어 눈물 속에 스며들고 허공에 던져지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휴지 속에 함께 구겨졌다.

“그게.. 다야?”

그래서, 그래서 남은 말들은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졌던 것이다.

“그게 다냐고. 그동안 연락하지 않은 이유. 그동안 네가 선물만 주구장창 사 모은 이유. 고작.. 그것뿐이냐고.”

여전히 눈물은 흐르고 있었고, 마음은 여전히 아프다. 그런데 나는 내 눈물을, 내 아픈 마음을 설명할 수 없었다.

“예전에, 책에서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너처럼 친구랑 떨어져 지낸 사람 이야기인데, 아마 더 오랜 시간이었던 것 같아. 나이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고. 그 중 한 사람은, 너처럼 상대방의 생일 때마다 해가 갈수록 더 화려해져만 가는 선물을 준비해놓고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 매번 만나자고 연락을 했지. 이 선물을 전해줘야 하니까, 만나자고. 하지만 그 친구는 한사코 반대했어. 네가 그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나와 나를 만난다면, 난 절대 널 만나지 않겠다고. 그렇게 그걸 거부하는 친구에게 선물을 소포로 부칠 수도 있었고 만날 때만큼은 그것들 쯤은 안 들고 가도 됐었을 텐데, 그 사람은 그걸 거부했어. 선물을 직접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만나지 않겠다. 그런 고집을 피웠어.”

슬프게도,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왜 그랬을까?”

지금 내 눈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을지, 가희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얼마나 불안할지.

“네가 선물을 사 모으는 걸 봤을 때부터 그 이야기가 자꾸 생각나서 맘이 불편했어. 네가 그런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거면 어쩌나, 말려야 되는 게 아닌가, 저걸 내버려둬도 될까. 그래서 매번 누군지, 왜 그런 선물을 사는지 이유를 물었던 거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눈물은 이제 그만 보이고 싶은데.

“네 그리움을 내세우기 위한 건.. 아니었니.”
“아니야…….”
“무조건 아니라고만 하지 마. 잘 생각해봐.”
“아니라고…….”
“은주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정말 아니야? 죄의식 같은 걸 심어주기 위한 건 진짜 아니었어?”

나의 견고한 성이 무너지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믿음, 이 믿음. 오 년 동안 쌓아온 믿음이라고 언제나 떠들어댔지만 온전하게 존재한 시간만 따진다면 사실 그 존재 자체에도 회의를 품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까, 윤이를 만나고 싶긴 한 거냐고 물었지. 아니, 사실 계속 오 년 전의 그 모습만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가도 나쁠 건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도, 그래서 우리 둘 중 한 사람의 믿음의 성역만이라도 지켜진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위로가 될 것 같았다. 훗날, 윤이가 나보다 먼저 죽게 된다면, 나는 윤이를 평생의 그리움으로 삼고서 죽을 때까지 나의 친구 윤이를 그리워하다 죽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죽기엔 너무도 젊다. 그러나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청춘 아닌 청춘을 살고 있다. 서로의 부재는 청춘을 청춘답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지 못해서 자꾸만 자꾸만 그리움만 키워가는 것이다. 그리움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리움의 순도가, 진실성이 자신 없다. 정말 오랫동안 지켜온 믿음인 데도 불구하고, 항상 그것만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모두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욕하며 돌을 던져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선물, 내 한 달 용돈을 탈탈 털어서 산 저 선물. 윤이를 만나면 널 생각하며 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항상 네 생각뿐이었다고 말하겠지. 그래, 저 선물을 사는 내내, 윤이 없는 윤이의 생일을 보내는 내내 윤이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란 건, 나의 선물을 받아들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윤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은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먼저 연락을 끊은 것에 대한 미안함, 이제껏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함, 지금껏 나 없이도 잘 살아온 것에 대한 미안함……. 윤이가 울길 바랐고, 그것이 감동의 눈물이든 사죄의 눈물이든 나는 그런 윤이를 안아주며 다정하게 달래주리라 다짐했다. 윤이가 어떤 의미로 눈물을 흘리든 상관없이, 나는 그것을 내가 원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것으로서 나의 그리움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백화점 직원이 정성스레 포장해준 저 선물처럼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치장될 것이라고 믿어왔다.

“은주야.”

이렇게 아프고 잔인한 순간에 누군가가 다정하게 불러주는 내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비극사가 된다.

“그런 거라면, 이제.. 그만 둬.”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고개를 세차게 젓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라는 말도, 고개를 젓는 행동도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제 그만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사실 나와 윤이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동성애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깊고 끈끈한 관계이다. 나도 모르게 윤이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조차도, 지속되지 못하고 멈춰있을 때는 이다지도 위선적이고 불안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지금, 나는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워서 이 순간을 견딜 수가 없다. 언제나 위선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관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쏜 것은 나였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이토록 긴 기다림을 묵묵히 잘 견뎌내고 있는 내가 대견했다. 그러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내게 그 화살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과녁의 중앙을 정확히 맞혔다. 박수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예상치 못한 펀치에 한 방 세게 얻어맞은 약하디 약한 믿음이 주저앉아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사람은, 결국엔 선물을 모두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헤어진 그때처럼 빈손으로 친구를 다시 만났어. 이제 더 이상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친구는 그 사람을 반갑게 만나줬고. 다시 좋은 친구가 됐어.”

내 옆자리에 놓인 선물을 바라봤다. 언제쯤 주인을 찾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이 선물의 주인을 만날 수나 있을까. 순간, 이 커피가 쓰디쓴 술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술을 제대로 마셔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지금과 같은 순간에 술이 있다면, 내가 만취 상태라면 나는 조금 덜 슬프고 덜 위태로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울지 마, 은주야. 네가 나랑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나랑 같이 살았던 사람에 대한 일이 아니면 잘 안 울어. 울려고 노력해야 겨우 거짓눈물이 나. 그러니까.. 한 달 키운 강아지와의 이별엔 울어도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엔 잘 울지 않아. 안 슬퍼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강아지보다 덜 소중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 눈물이 반응하는 상대가 딱 정해져있다는 거야. 드라마나 영화 보고선 잘만 우는데, 노래 듣다간 잘만 우는데, 그게 너무 이상해서 정말 몇 년 동안 계속 생각해봤는데, 나랑 같을 삶을 산 존재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 드라마나 영화는 감정이입이 되니까 내가 그 주인공이 돼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데 다른 사람은 너무도 현실적으로 내 앞에 존재하니까 감정이입 같은 거 쉽게 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가슴이 찢어질듯이 그 사람의 슬픔이 아파도 난 같이 울어주지를 못해. 그래서 지금 너에게도 사실은 많이 미안해. 어쨌든 그래서 단지 내 기준에서 보자면, 너한테 윤이라는 아이가 소중한 건 그냥 소중한 게 아닌 것 같아. 나에겐 함께 산 사람,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너에겐 윤이의 자리일 것 같아. 바로 너 자신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지금 네가 울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네 마음이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해. 너무 슬퍼하지 마.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표현이 너무 서툴렀던 너를 모두 이해할 수 있어. 윤이보다 더 짧은 시간을 너와 보낸 나도 널 이해하니까, 윤이도 분명 널 이해할 거야.”

동생과 싸워서 부모님께 혼났을 때, 내가 내 방에서 울고 있을 때 나 몰래 동생에게 다가가 그래도 네 누나만큼 좋은 누나가 없다며 동생을 다독여주시던 엄마, 내가 엄마랑 크게 다투고 있을 때, 딸도 다 힘들어서 그러는 거라며 내 편 들어주시던 아빠……. 나는 지금 그런 위로를 받은 기분이다. 가희의 말대로 가희가 나의 마음을 뭉개놓은 것일 수도 있지만 나를 모두 이해한다는 그 한 마디에 나는 윤이에게 내 어리석은 표현에 대한 용서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런 사람을 평생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리워하기만 하는 건 말도 안 돼. 이산가족도 아니고. 충분히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잖아.”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속에서, 나는 고백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나의 위선과 마주보고 또 눈물을 흘리고 그 위선을 용서 받고 다시 또 눈물을 흘렸다. 모두 윤이와 관련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윤이는 없었지만 지금은 윤이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서 더욱 큰 힘이 되어주는 내 친구는 나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못난 나를 질책하기도 하고 슬퍼하는 나를 다독여주기도 했다. 나는 이제 윤이 때문만이 아니라 가희 때문이기도 한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아니, 덕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희 덕분에 터져 나오는 눈물은 참으로 짜고 진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울었고 가희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을 지켰다. 우는 내내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윤이를 만나야 할지 말지는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이미 답은 있었다. 다만, 나의 허황된 믿음을 뒤돌아보는 데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마다 이 시간의 마지막에 남아있는 가희의 위로가 때로는 연고가 되어 염증을 가라앉혀주고 때로는 손수건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모래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다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성을 쌓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해는 도망가고 없었다. 곧 장마를 퍼부을 것만 같은 시커먼 하늘이 더위조차 삼켜버리고 있었다. 뒤늦게 흘러나온 ‘가자’라는 내 한 마디에, 가희는 웃으며 일어서 다 식어버린 커피와 케이크를 반납했다.

“왜 웃어?”
“네 목소리 너무 웃겨. 케이크 싸갈까?”
“싸줘?”
“안 싸주려나, 이런 데서는.”
“그냥 가자. 창피해.”
“이제서?”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걸.. 이제야 모든 게 부끄러웠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카페 안에서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울었던 걸까.

"어디로 갈 거야? 집?“
“응, 너도 들어가.”
“그래,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봐. 어떻게 해야 할지. 힘들면 전화해.”
“응, 고마워, 오늘.”
“내가 더 고마워. 솔직하게 말해줘서.”

지하철역에 다다른 후 가희와 나는 서로 반대편 플랫폼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가희가 타야 할 지하철이 먼저 도착하고, 가희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 인사에 답하는 순간, 내 팔에 매달려 있는 쇼핑백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 선물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집에 가면서도, 집에 가서도, 잠들기 전에도, 꿈속에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모든 행동에 생각이 수반되느라 평소보다 훨씬 굼뜨고 느린 내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결코 생각을 내려놓을 순 없었다. 선물을 펼쳐놓고 앉아 다시 또 생각할 때, 장미꽃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시들지 않을 테니,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다고. 다만, 내게 향기를 불어넣어주는 방법을 꼭 찾아달라고.

 

 

* * *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며칠 동안 집에만 있었다. 청소를 하고, 선물을 다시 열어보고, 생각을 하고, 다시 또 선물을 다시 열어보고 생각을 하고……. 그러면서 알게 된 건, 이 방 안엔 내가 윤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보다 윤이가 내게 준 선물이 훨씬 많다는 것. 내 방에 놓여 있는 물건들 중 선물인 것과 선물이 아닌 것은 거의 반반. 그 중 윤이가 준 것과 윤이가 준 것이 아닌 것은 반의 반 정도. 하지만 내가 윤이를 위해 준비한 이 선물들은, 비율 같은 걸 따지기엔 민망할 정도로 적었다. 물론 내가 윤이에게 준 선물들이 다른 곳에 있긴 하겠지만, 지금 내게 남아있는 것들만 살펴보자면 그랬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엔 내가 윤이에게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지, 내가 윤이에게 주려고 준비한 선물들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했다. 작디 작은 것, 내 방에서 가장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그것이 내겐 아주 오랜 고삐가 되고 무거운 짐이 되어 나의 발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것.
이젠 그 고삐를 풀고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방안 가득한 안개가 걷히고, 아무리 커튼을 걷어도 들어오지 않던 햇빛이 들어와 내 방에도 여름을 선물할 테니까. 언제나 나는 여름을 기다리며 여름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지만 정작 내 마음은 항상 여름을 받아들이질 못했다. 나 자신조차 그걸 몰라서, 몇 년 동안이나 그걸 모르고 살아와서 이제야 그 안개를 밀어내고 새로운 계절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리석고 모자랐다. 이제 나도 성인이니까, 이제 나도 어른이 되어야 하니까, 그런 어리석음과 모자람은 버려야 하니까.
나는 그런 나를 이 선물과 함께 떠나보내고 싶었다. 선물은 이미 선물이라는 의미를 잃었고, 선물만 덜렁 윤이의 앞에 놓였을 때 윤이가 느낄 감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바라고 준비한 선물이라고 해도 거짓이 아니니까. 윤이가 그런 감정으로 날 대하길 바라진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그걸 바라진 않는다.
매일 밤 일기 대신 편지를 썼다. 나의 위선이, 나의 모자람이 한 장 한 장 벗겨지길 바라면서, 나의 그리움이 진심이 되길 바라면서.

“엄마, 졸업앨범 어딨어?”
“네 졸업앨범? 그걸 왜 엄마한테 물어봐.”
“내 방에 없어서. 거실 책꽂이에 있나?”
“찾아봐라.”

나의 못난 얼굴만 가득한 졸업앨범이 너무 싫어서 내 방에서 빼서 다른 곳에 두었던 것만 생각이 나고 그 후로 졸업앨범의 행방을 알 수가 없던 차에, 거실 책꽂이, 그것도 책꽂이 꼭대기에 가로로 쌓여져 있는 가죽앨범을 찾아냈다. 까치발을 들어 졸업 앨범을 빼내자 먼지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져 발치에 쌓였다. 먼지는 참 많은 곳에 쌓여있구나……. 손으로 간단히 먼지를 털어낸 뒤 방으로 들어와 졸업앨범을 찬찬히 넘겨보았다. 한참동안 사진을 뒤적거리다가, 내가 이 졸업앨범을 다시 꺼내든 이유가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다행히 있었다. 간단히 메모를 했다. 변하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종이를 곱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활짝 걷힌 커튼 사이로 햇살이 맘껏 자신을 드리웠다. 덕분에 온기가 느껴지는 바닥을 밟으며 필요한 짐을 챙겨 집 앞 버스정류장으로 나섰다.
올려다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눈부신 하늘은 지금이 완연한 여름이라는 사실을 거리 곳곳에 새겨나가고 있다. 항상 학생들로 붐비던 정류장은 학생들이 방학을 한 이후로는 한창 붐빌 시간에도 한적하다. 홀로 교복을 입고 앉아 운동화에 생채기를 내는 건지 바닥에 생채기를 내고 싶은 건지 발끝을 자꾸 두드리는 남학생 한 명만이 이 시간에 이 동네에 남아있었다.
방학 때 학교에 가는 일, 나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겪어보지 못하는 게 더 힘든 일이고, 윤이 역시 다른 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방학을 보냈을 것이다. 윤이가 선택한 평범함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 윤이는 아마 나보다 더욱 더 성숙한 성인이 되어 성년의 날을 맞이하고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고통과 불안을 피해 도피해왔을 때, 그곳에 남아있는 희망과 꿈을 믿고 그대로 남기로 했던 윤이는 그러한 고통을 감수할 각오를 이미 마친 후였을 것이고 아마 그때부터 윤이는 나보다 더 많이 성장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윤이는 적어도 나처럼 치졸한 믿음은 키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오늘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니까 그런 윤이는 나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해줄 것이라고, 나를 용서해줄 것이라고.
몇날 며칠을 고민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이 무엇인지보다는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마무리가 무엇인지를. 이 길이 정말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길이 될지 혹은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 될지는 나도 윤이도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의 끝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시 돌아오는 길에 후회만은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 그 마음이 지금은 가장 절실하다.
오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는 한적한 도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곧 목적지에 도착했고, 버스가 멈춰선 곳은 큰 공원 앞이다. 여름밤이면 동네 공원에서 윤이가 키우던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기도 했고 윤이와 함께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매일밤 나와 호숫가 주변을 빙빙 돌며 걷기도 했었다. 아마 5년 동안 윤이는 변함없이 그 공원에서 강아지 산책을 시켰을 것이고, 나도 운동을 하고 싶은 날에는 어김없이 그 공원으로 나가 호숫가를 돌았다. 그러나 참 신기하게도 우리 둘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공원이 아닌 그 어디에서도, 서로를 우연히 만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늘도,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은 오늘도 내가 이곳에서 윤이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쓰이고 있는 그 공원을 떠나 공원 옆에 위치한 작은 우체국으로 향했다. 모든 짐들을 포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가장 큰 상자를 조립해 내가 가져온 물건들로 그 안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어제 쓴 편지를 올려놓은 후에 다시 상자를 포장했다. 가방 속에서 메모지를 꺼내 졸업앨범에서 찾았던 그 주소를 적고, 마지막으로 받는 이를 적었다. 너무도 적은 시간이 걸렸다. 이 모든 준비를 끝내는 데에…….
5년 동안 내 침대 밑과 옷장 속에서 숨어있던 선물들은 이제야 비로소 선물 같았다. ‘받는 이  최윤’이라는 날개를 달고 주인에게 날아갈 준비를 마친 지금, 선물은 비로소 자신의 처음 모습을 되찾았다. 깨끗하고 순수했던, 이 선물로 인해 생일이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그런 투명한 마음을, 이제야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번호표를 뽑고 얼마 남지 않은 내 순서를 기다렸다. 곧 딩동 소리가 나며 내 손에 들린 번호표와 일치하는 빨간색 번호가 기계에 떠올랐다. 낑낑대며 상자를 들고 가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무게가 꽤 나가네요.”
“네, 택배로 보내주세요.”
“일반 택배요?”
“네.”
“착불이에요?”
“아, 아뇨.”
“칠천사백 원입니다. 내일 도착할 예정이고요, 오늘 오후나 내일 아침부터 조회 가능하세요.”

택배 기본요금의 두 배를 훌쩍 넘는 가격이다. 이렇게 무거운 걸, 주인을 찾아주지도 않은 채 너무 오랫동안 갖고 있었구나.
상자는 순식간에 다른 택배 물품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한 장의 영수증뿐이다. 허탈감과 안도감이 마음속에 자욱한 흔적을 드리운다. 안개처럼, 햇살처럼.
부드럽게 열리는 자동문 너머엔 여전히 더위가 흐르고 있었다. 7월의 오후 거리는 따사롭다 못해 뜨거웠다. 햇빛이 반사된 휴대 전화 액정에 가희의 이름이 희미하게 보인다.

“여보세요. 아, 응. 지금 우체국 앞. 아니, 공원 옆. 아.. 선물, 부쳤어. 윤이한테. 하하, 잘 한 거야?”

기분 좋게 웃는 가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뜨거운 태양이 아로새긴 여름 역시, 참으로 오랜만에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속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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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18
벚꽃비

벚꽃비  “엄마 나갔다 올게.”“나간다고?”“응.”“진짜?”오늘? 오늘? 엄마가 오늘 나간다고?“진짜지, 그럼.”“정말?”“그렇다니까? 왜 그래?”말도 안 돼. “어딜?”“바람 좀 쐬러. 비와서 집이 눅눅해.”“밖은 더 그럴 텐데? 엄마 비 냄새 싫어하잖아. 그리고 비 또 올지도 모르는데 웬 바람이야.”“괜찮아, 오늘은.”“근데 그 옷은 뭐야?”“뭐가?”“뭐, 선보러 가?”“바람 쐬러 갈 때는 멋 부리지 말란 법 있니.” 그래도 그렇지. 분홍 투피스가 뭐야. “갔다 올게.”“어디 가는데? 응?”“그냥 요 앞에 나가. 바람 쐬러 간다니까.”“…….”“집 잘 보고 있어. 비오면 창문 닫고.”옷과 맞지 않는 까만 우산을 든 엄마는 그렇게 나가버렸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정장까지 차려 입고서 바람을 쐴 건 또 뭐람.난 집밖이 보이는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엄마가 보이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고 힘겨워하는 엄마가 보인다. “엄마!”내 큰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린 엄마는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대답을 하며 날 올려다본다.“진짜 바람 쐬러 가?!”“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갔다 올게, 빨리 들어가!”엄마는 먼저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간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엄마를 미행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냥 창문을 닫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오늘은 4월 12일. 그저께부터 여의도에서 벚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 엄마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나가버리지 않았다면 엄마와 함께 벚꽃 구경을 가고 싶었다. 비가 내려서 오늘은 조금 한적할 테니까. 물론, 엄마가 나가지 않을 게 뻔해서 나 혼자 갖고 있던 생각이지만.중학교 때부터 6년 동안 벚꽃 구경은 내겐 사치였다. 버스를 조금만 타고 가면 연분홍빛 벚꽃으로 물든 여의도를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은 여유를 부리기엔 너무 바쁜 기간이었다. 그 맘 때엔 언제나 새로운 학년의 첫 시험, 첫 중간고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게 있었다. 공부는 안 해도 시험 기간이니까 집에 붙어있기는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라고 해야 할까.그래서 스무 살이 되면 가장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벚꽃 구경이었다. 가장 마음 편하게 거닐고 싶은 거리 역시 여의도의 그 거리였다. 가로수 길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이 봄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항상 굴뚝같았다.봄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내가 엄마 뱃속에서 맞았을 첫봄이 항상 궁금했다. 엄마는 가끔 날 임신하셨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장 힘들고도 행복했던 시간이 그때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 약 두 달 전. 엄마의 볼록한 배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엄마를 안아주는 아빠와 함께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꽃비를 바라보았던 때 부를 대로 부른 남산만한 배는 엄마의 걸음조차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금방이라도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만 같은 가벼운 마음과 그에 비례하는 웃음은 꼭 그 하루가 10개월의 전부를 채울 정도로 엄마를 행복하게 했다고, 엄마는 항상

  • 속눈썹
  • 200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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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10-09-01 11:19:3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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