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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꿈

  • 작성자 와일드녹턴
  • 작성일 2010-09-21
  • 조회수 229

 

 

 

개꿈

 

 

 

 

 

「힘들 거요, 젊은이.」

 

 

 어떻게 들으면 상당한 걱정과 호의를 내포한 충고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내 손을 붙들고 이죽거리는 점쟁이 노파에게서 쌀알 한 톨 만큼의 호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신통하다는 노파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했기에, 얼떨결에 되물었다.

 

 

「예? 뭐가… 말입니까?」

「지금 가슴속에 고이고이 모셔놓고 푹 삭이고 있는 것 말이오. 힘들 거요. 포기하는 게 좋을 거요.」

 나는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내가 가슴속에 고이고이 모셔놓고 푹 삭이고 있는 그것이란 무엇일까. 한참의 생각 끝에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신통하대서 찾아왔는데, 역시나 짜고치는 고스돕이구나.

 간혹 그런 일 있잖은가. 길가는 어먼 사람 붙잡은 어느 말쑥하게 생긴 여자가 갑작스레 '당신, 요즘따라 어깨가 무겁지 않은가요! 당신 어깨에 귀신이 붙어 있어요!'라고 외친다거나 하는. 성격별 별자리나 오늘의 운세 또한 그렇다. 애매모호한 말들로 잔뜩 이말저말을 함축해놓은 그 말은 어떤 상황에서든 들어맞는다. 그리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것 뿐이다.

 그러했기에, 나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그 노파에게서 잡힌 손을 뺐다.

「그런 거 없는데요.」

「아냐, 있어. 분명히 있어! 기억해봐!」

「없다니까요.」

 역시 이런 건 믿을 게 못 된다. 결혼운을 보러 찾아왔건만 쓰잘데기 없는 소리만 잔뜩 듣고 말았다. 이미 내버린 복채가 아까웠지만,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거기에 플러스로 시간은 금, 시간은 돈. 금과 돈을 각각의 단위로 30이나 날린 셈이다. 입맛이 썼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노파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사람이 고생하는구먼. 성격이 강하질 못해서 확 저질러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대범한 구석도 없어서 그걸 놔버리지도 못 하누나. 쯧쯧.」

 …그래, 나 소심하고 쪼잔하다. 나는 그 중얼거림이 자신을 무시한 노파의 자그만 복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본인이 그런 게 없다는데 자기가 어쩔거야. 괜히 심사가 비틀어져선, 문을 쾅 닫고 나와버렸다.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얼마 전 금연하면서부터 달고다니기 시작한 츄파츕스를 입에 물었다. 입술로 막대를 휘휘 돌리며 하늘을 바라보니, 잔뜩 일그러진 심정과는 상반되게 저녁의 일몰이 참도 유쾌하게 밝은 것이었다.

#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새삼 내가 쪼잔하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까짓 점쟁이 노파의 말 따위는 말끔히 무시ㅡ해야할ㅡ해도 될 것일진대, 자꾸만 그 나즈막한 중얼거림과 킬킬거림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은 어찌 된 까닭인가.

「…이 빌어먹을 노망난 늙은이. 내 머릿속에 똥을 심어놨어.」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분변으로 표현해야 할 만큼 더럽다거나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은 아마도ㅡ짜증나는 상사에 대하여 더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동료들과 함께 상사에 대한 추잡한 욕설을 나누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아니, 잠깐. 상사? 상사라고?

 무언가 생각날 듯 말 듯, 아리까리한 게 꼭 도깨비 성 한복판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ㅡ어느 곳에서든 왼쪽으로 세 번만 돌면 화장실로 떨어지고 계단을 아래로 한 칸 위로 세 칸을 올라가면 어느새 식당에 도착해 있다는 수수께끼의 성ㅡ.

 침대에 벌렁 누운 채로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이십 대 후반의 청년ㅡ물론 나다ㅡ은 점쟁이 노파의 말과 상사를 연관지어 생각하다가, 상사와 분변을 연관지어 생각하다가, 분변과 도깨비를 연관지어 생각했다. 즉, 졸았다. 어쨌든 그건 잠이 오기에 딱 적당한 생각이었으니까.

#

 날개달린 자명종이 길게 울었다. 잉잉잉잉잉. 우유에 취해 잠들었기에 나는 숙취에 절어 있었다. 좀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자명종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자명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눈을 떠 보니 자명종은 삼단변신을 통해 태권브이로 변신해 있었다. 그리고는 아연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나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옛날 옛날 옛적에 배추도사 무도사 살았는데….

 추억의 애니 주제가가 흥겹게 울리며 태권브이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 방이 도깨비의 성 한복판으로 변해버렸다. 태권브이의 뒤에서는 갑자기 튀어나온 빨강머리 앤과 빨강머리 인어공주가 나와서 손을 맞붙잡고 아무래도 춤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몸짓을 감행했다. 나는 인어공주의 꼬리지느러미에서 아무래도 다리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부속지가 툭 튀어나와 흥겹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드디어 내가 미친 것인가보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친구에게 너 미쳤냐? 하고 물었을 때의 친구의 답을 떠올렸다.

 '맞아. 꽤 도움돼. 재미도 있고. 너도 한 번 미쳐봐. 헤어나오지 못한다.'

 왜 그 말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조차 없었기에 나는 그냥 그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로 한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툭 쳤다. 뒤를 돌아보니 사람좋게 생긴 도깨비가 나를 향해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나는 누구시죠? 하고 묻는 대신 헤이 와쳡 베이비! 하고 외쳤고, 도깨비는 내 기대에 부응하듯 예압 베이베 라고 외치는 대신, 요술봉같이 생긴 방망이를 들고 빙글빙글 돌며 모종의 행위를 시도했다.

 그건 아무래도 변신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좋고 인상좋아보이는 도깨비의 얼굴과 큼직한 덩치가 흉측하게 일그러지더니, 어느 순간 상사로 변했다. 그건 상당히 이미지화된 모습이었던 것 같다. 눈에서 일렁이는 건 눈빛이 아닌 불이었고, 코에서 뿜어져나오는 콧김은 푸른 화염이었으며 이마에는 커다란 쌍뿔이 나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도깨비의 성은 우리 회사 사무실로 바뀌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상사를 바라보자, 상사는 서류뭉치로 내 머리를 두들기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건 양파 핥는 날개가 아니라 쉰 사랑 표효하는 부침개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화? 밥줄이 걸린 문제다. 부당한 대우? 참아야 하느니.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과장님께서도 틀리셨어요. 그건 쉰 사랑 표효하는 부침개가 아니라 행복은 사랑하는 칠레무침입니…」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나는 고개를 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평범한 범인의 범주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문득 슬퍼졌다. 나는 상사에게 살해욕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면 최소한 저 면상에 주먹 한 대만이라도 갈겨주고 싶었다. 갑자기 점쟁이 노파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젊은 사람이 고생하는구먼. 성격이 강하질 못해서 확 저질러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대범한 구석도 없어서 그걸 놔버리지도 못 하누나. 쯧쯧….'

 이것이었나. 나는 폭언을 쏟아내는 상사를 뜻밖에도 평온한 심정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따져보자면, 이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명종이 갑자기 태권브이로 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도 안 되는 상황 전개.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서 불그락푸르락하고 있는 이미지화ㅡ추화된 상사의 모습까지. 결론을 도출하자면, 이건 꿈이다. 살인을 저질러도 윤간을 저질러도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짓을 저질러도 깨고 나면 좀 찝찝할 뿐인 개꿈.

 '예, 할머니. 그래요, 나 소심하고 쪼잔합니다. 근데 꿈속에서까지 그거 못할 정도로 맹탕은 아니라구요.'

 물론 아무리 꿈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담큰 인간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 다른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조잘대는 상사의 얼굴을 향해 삐딱하게 고개를 틀어 보였다. 눈에 힘을 팍 주고, 다리는 꼬고, 상체는 뒤로 젖힌다. 그 자세로 코를 조금 후비고, 삐뚜름한 시선은 덤이다.

「야.」

「…뭐, 야?! 니 지금 나한테 야라고 했냐!」

「어, 그랬어. 그랬는데, 어쩔건데? 정답이 행복은 사랑하는 칠레무침이라고. 근데 왜 자꾸 쉰 사랑 표효하는 부침개라고 우기는데. 확 눈깔을 젓가락으로 후벼줄까보다!」

 조금 과격한 언사에 상사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모종의 가학적 쾌감마저 느껴졌다. 아아. 아마 그 점쟁이 노파가 말했던 게 이거였나보다. 진즉 떠올리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난 그저 억울했던 것이다. 쌩뚱맞게도ㅡ정말 쌩뚱맞게도 나의 불만이란 즉 이 거대한 사회의 문제점과도 통함이었다.

 언제나 '절대적 기준'이란 힘있는 자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기 마련이고, '상대적 기준'은 그 힘있는 자들이 되려 아웅다웅하는 틈바구니에서 쑥 생성된다. 수많은 '나'는 그 기준 사이에 끼여 압축 프레스에 눌린 것 마냥 찌부러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나'들은 힘있는 자들의 경계에서 한참 멀어져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바꿀 힘이 그 '나'들에겐 없고, 힘있는 자들은 언제나처럼 '나'들을 향해 조소하는 것이다. 싫어도 참고 화나도 누를 수 밖에 없다. 욱하는 심정에 나는 더 크게 소리쳤다.

「월급 까 봐, 이 자식아, 아니 나 여기서 잘라봐! 그래봤자 틀린 건 틀린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멋대로 옳고 그름의 잣대를 당신 멋대로 정하지 마! 아니, 잠깐만. 왜 내가 꿈 꾸다가 갑자기 이런 헛소릴 하는 거지? 악!」

「…뭐야, 이 자식?」

 세상은 힘있는 자들의 것이고, 사실 세상이 더 잘 굴러가려면 지금까지 반복되어왔던 것이 계속되는 것이 좋다는 건 알고 있다. 닳고 닳아 잔뜩 마모된 바퀴가 더 맨질맨질하니 더욱 잘 굴러가는 법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나에겐 바퀴를 갈아끼울 능력 또한 없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 엿같은 바퀴를 갈아끼우고 싶다 이거야. 어쩌지? 그래서 내가 지금 당신한테 이렇게 따져보는 거지. 그게 내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물론 꿈에서 깨고 현실로 나가면 죽었다 깨도 못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꿈이잖아? 아하하하하하!」

「헛소리 집어치워라!」

「뭐, 뭐, 뭐, 뭐! 메롱 약오르지 까꿍….」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졸도했나보다. 그런데 꿈 속에서 졸도가 가능할까?

#

 자명종 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아? 아.」

 꿈속에서 그 날개달린 자명종처럼 태권브이로 변신할까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자명종은 작은 망치로 제 금속 괴를 땡땡땡땡 때려대며 나의 기상을 촉구하고 있었다. 나는 육두문자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바로 일어났음에도 이불이 그립고 눈이 감긴다. 그리고 간밤의 꿈이 그립다.

 문득 생각해보았다. 오늘 회사에 가서도 상사한테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을까?

 물론 절대 불가능한 시도였기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쓰게 웃었다. 꿈과 현실은 언제나 서로 반목하는 법이고, 그 둘 사이의 골은 지옥의 무저갱만큼이나 깊을 것이었다. 그리고 허무한 이상을 표출할 길 없어 시선을 돌리는 젊은이의 심정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가, 졸도할 것 같은 기분에 잠겨들었다.

「…어제 대체 자명종을 몇 시로 맞춰놓은 거야! 제에에길!」

#

 또다시 퇴근길이 찾아왔다. 오늘 하루 역시 상사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지겹게 듣고, 지겹게 참았으며 지겹게 일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겹게 퇴근하는 중이다. 토스트 하나를 입에 문 채로 입에 들어온 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어제 걸었던 거리를 똑같이 걷고 있던 중, 누군가 뒤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소매치기인가? 대상으로 노려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강도? 설마 스토커!

 오만가지 상상이 이어지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아 뒤를 확인했지만 그 주인공은 무엇도 아닌 어제의 그 점쟁이 노파였다. 의외라는 듯 눈을 끔뻑이는 나를 향해 노파는 삐뚜름히 웃어보였다. 노파는 이리 묻는 듯 했다.

 '그래, 어제야말로 삭인 것을 좀 풀었는가?'

 '꿈에서야 풀었죠. 근데 현실에선 못 풀었죠. 오늘도 욕 바가지로 먹고도 한 마디도 못했는 걸요.'

 '원래 그런 것이네. 꿈과 현실은 언제나 극과 극에 서 있는 법이지. 그래도 꿈에서라도 푼 것이 다행이잖는가? 그나저나, 꿈에서 풀었다고 했지? 꿈도 참 뭐같은 개꿈을 꿨구만. 앞으로 잠자리가 뒤숭숭할테니 조심해. 킬킬킬.'

 '예, 조심하겠습니다! 하하하.'

 노파를 향해 마주 웃어주는 그 행동이, 어색하게 느껴져 뒷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어쩌면 현실에서도 그렇게 응수해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수치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나는 그저 웃었다. 아주 편하게 웃었다. 

 내 곁으로 수많은 인파가 지나갈 때 까지, 나는 점쟁이 노파와 함께 마주보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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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ㅅ=. 내가 보기엔 엄청 재미 있는 글 같네요. ㅎ. 물론 중간에 개드립치듯 들어간 사회드립이 좀 무난하게 섞이지 못했다는 사실만 빼고요. ㅎ. 잘 읽고갑니다...

    • 2010-09-21 16:21:5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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