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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차

  • 작성자 라일락심슨
  • 작성일 2010-10-21
  • 조회수 734

전자우편이 마이클에게서 날아온 건 기말시험기간에 껴 있던 주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시기고, 컴퓨터 따위를 건드리면 안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그 메일은 더더욱 건드리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였다.

바이러스나 폭탄메일, 게이 포르노가 링크된 메일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바이러스나 폭탄 메일이었다면 당분간 컴퓨터를 못 쓰는 걸로 끝났을 테고, 게이 포르노라면 웃으면서 창을 닫을 비위와 배짱이 있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호락호락한 장난질로 끝나는 우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E-mail Service Arrived from Michael(22:05:11 G.M.T.)

-Jackson, Dead.

잭슨이 죽어? 그야 뒷골목의 갱이라면 언제쯤 총 맞아 Dead gone by gun!(잭슨 자신의 표현이었다.)해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XX의 갱들 중 누가 총 맞아 죽었다는 건 지방 신문에도 실릴까 말까할 정도의 흔한 일이다. 더군다나 잭슨은 이미 5년 전부터 조직 내에서 신임을 받고 있었던 몸이었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중책을 맡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잭슨이? 백덩크를 여유롭게 성공시킬 수 있었던 꺽다리 잭슨, 경찰 앞에서도 비아냥거림을 멈추지 않았던 잭슨, 필요할 때는 배짱이 있었지만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때는 발을 뺄 줄 알았던 잭슨이? 그건 꽤나 이상한 일이다. 슬럼 3형제 중에서 가장 죽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고르라면 그건 잭슨이었다. 물론 그 때 가장 죽음과 가까이 있던 사람도 잭슨이었지만.

그리고, 나는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A라는 땅덩어리에 XX라는 지방이 있는데, 그저께까지만 해도 그곳에서 멀쩡히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었던 잭슨이 뒤통수에 총알을 박은 채 지금은 땅에 등을 기대고 누워있다? 그건 꽤나 심각한 일이다. 왜냐면 잭슨은 내 은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 속에 잠겨있던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는데, 그건 내가 앞으로 남은 시험 기간 동안 절대로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떠올린 즉시 가장 소중했던 사람 중 한 명의 죽음을 고작 이런 식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고, 그 혐오감과는 별개로 나는 시험을 망쳤다. 그리고 나의 자괴감과 혐오감과 우울함과는 별개로 나를 S대로 보낼 재목으로 보시던 담임선생님은 별로 살벌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위축되는 설교를 하셨다. 한 층 더 우울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말고사 기간이 끝나자마자 용돈을 털어서 방학식 날 출발하는 A행 왕복티켓을 샀다. 물론 잭슨의 장례식에 참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묘비에는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학식까지는 1주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한번 슬럼 3형제와의 추억을 정리해놓기로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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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에서 OO, CC를 들렸다가 다시 SS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배낭여행을 계획했을 때 난 무척 설렜다. 아마 중학생으로서 이 정도 규모의 여행을 혼자서 실행해보는 녀석은 나 말고 없을 테니까, 하는 유일의 자부심을 가진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공항에서부터 OO까지는 그 자부심을 유지한 채로 다닐 수 있었다. 아니, 아마 OO에서는 그 자부심이 최절정에 달해 있었을 거다. XX 한인회장과 직접 악수를 하고 사진까지 찍었으니까.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인사치레 가지고 내가 그렇게 들떴었나, 싶기도 하다. 여하튼 한인 타운에 사시던 고모네 가족과 1주일 동안 노닥거린 뒤 고모가 주선해주신 렌트 밴을 타고 CC로 떠났다.

OO 시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후에 슬럼이라고 불릴만한 분위기의 동네에서 잠시 밴에서 내렸다. 을씨년스럽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간판 불빛이 으스스하게 깜박거리는 편의점이었는데, 점원은 내가 들어 왔는지도 모른 채 좀 야한 제목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코카콜라와 적당한 감자 칩을 하나 사서 계산대로 향했다. 점원은 내가 계산대에 물건을 내밀자 점원은 화들짝 놀라면서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 빠르게 계산을 했다. 100달러 지폐의 거스름돈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내 손에 쥐어졌다.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감자 칩을 뜯고 입안에 넣었다. 이곳의 과자는 너무 비싸고, 짜고, 맛없다. Couch Potato라는 작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루 종일 이런 걸 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뭐 이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면서 밴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아뿔싸, 밴까지 돌아가는 길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Ch로 시작하는 거리 이름의 2번가 사거리 주차장에 세웠던 것 같은데. 내가 모퉁이를 몇 번 돌았지? 아무 생각 없이 근처의 편의점을 찾아 들어간 것이라 어떤 길로 얼마나 갔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번 길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하자 덜컥 겁이 났다. 사람이 아주 없는 길가도 아니었고, 여차하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항으로 물어볼 수도 있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패닉 상태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렇게 철면피가 아니었던 나는 난생 처음 만나는 -그것도 현지인인- 사람에게 길을 물어볼만한 배짱이 없었다. 그건 최후의 선택으로 미뤄두고 나름대로 길을 찾아보려고 애쓰던 중, 나는 ‘그나마 사람들이 다니던 거리’에서 ‘근방 10m에 사람이 있어도 50cm 이내로 접근하기 전까지는 알아볼 수 없는 거리’로 들어서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A의 밤거리에 관한 여러 가지 소문은 못 들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도 역시 그런 소문을 여러 번 들어봤고, 그런 소문이 여러 측면에서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아까의 편의점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 슬럼 어(語)라고 불릴만한 괴악한 영어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나는 잠깐 쫄았다가, 한층 더 위기감이 고조된 상태로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아니, 돌아서려고 했다.

“Hey, Brother. Why so hurry?"(이봐, 형제. 뭐 그리 급해?)

갑자기 뒤에서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마 건물 그림자에 숨어있었던 것 같다. 높은 곳에서 들려온 경쾌한 영어. 약간 조롱하는 듯한 느낌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굉장히 경쾌하다. 아마 저 목소리로 랩을 하면 굉장히 잘 팔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런 첫인상이 굉장히 짧은 순간 흘러갔고, 상황을 자각하게 되자 몸이 심장 안쪽으로 무너질 지경으로 위축되었다. 물론 겉으로 그것을 표현해보았지 비웃음거리 이상 되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런 징후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Ah, I just found myself lost here. Nothing to hurry, of course."(아니, 지금 막 길을 잃어버렸어. 물론 서두를 일은 없지.)

최대한 멀쩡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뜯길 돈은 뜯기는 것이니 비굴하게 행동하는 건 밑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Cool guy, hah? Why don't you walk around with me for a while? After that, I may tell you the way, you know."(이거 꽤 쿨하잖아? 나랑 잠깐 좀 걸을까? 길도 가르쳐 줄 수 있고 말이야.)

그 뒤로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좀 밝은 곳으로 나온 뒤에야 깨달았지만 그는 굉장히 키가 큰 백인이었고, 우리 뒤로는 흑인 2명이 바싹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대범한 척 행동했고, 그런 게 어느 정도 먹혔던지 그들도 나를 위압하려 들거나 그러진 않았다. 물론 나는 ‘잠깐 걷자’고 한 그의 의도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고, 100달러에서 콜라와 감자칩 값만큼 빠진 꽤 큰 돈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

그들은 그게 그들만의 수법이었는지 모르지만 꽤 친한 척을 해왔다. 덕분에 나는 꺽다리 백인의 이름이 잭슨이고 배꼽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목걸이를 한 흑인 쪽이 샤우튼, 나를 보고 있으면서도 잭나이프를 소름끼치게 홱홱 돌려대는 흑인이 마이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형제는(물론 친형제는 아니었겠지만 서로를 Brother라고 불러대니까.) 모두 나보다 2~3살 정도 나이가 많았고, 키도 컸기에 아무리 내가 대범한 척을 해도 내가 그들을 압도할 수 없다는 건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마 귀여워 보였을 나의 연기를 그냥 그렇게 받아줬다.

지금 생각하면 참 쪽팔리는 일이지만 ‘갱’이라는 그들의 겉모습에 속아서 선의와 순수함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나서 기뻤고 이건 이야기를 나눈 것에 대한 팁으로 생각해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그들의 손에 10달러씩을 쥐어줬다. 그들은 기뻐했고, 잭슨이 마이클과 샤우튼의 돈을 수금해버리긴 했지만 뭐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였다.

사거리 주차장의 밴까지 도착해서 잭슨이 나에게 말해준 일이 있다. 사실 내가 들어와 버렸던 밤거리는 툭하면 행인에게 총질을 하는 형제들이 있었단다. 맨 처음에 내가 들었던 슬럼 어(語)도 아마 그가 중얼거렸던 헛소리였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그렇게 대단한 녀석들은 아니고 그냥 고만고만한 갱에 들어가 있는 고만고만한 형제들이지만, 그래도 갱 조직이 뒤에 있다는 건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뜻이기에 사람하나 살리는 셈 치고 그쪽 손님을 가로챈 것이었다고. 겁을 줘서 미안하다고도 했다.

죽을 뻔 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무섭기도 했고, 오해했던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뭐랄까, 태평양 건너에서 이런 은인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했고, 아직 ‘세상은 살만한 것 같다’부터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까지 별별 생각과 감정이 부상했다 가라앉았다.

젊은 날의 혈기(?)였다고 해도 좋고, 조그마한 보은이라고 해도 좋다. 그들이 ‘그 미친놈들 주변에서 잠깐 몸을 피하고 있는 편이 좋을지도’라고 내뱉자마자 내 입에서는 생각보다도 빠른 말이 튀어나왔다.

"Comon, guys. I will give ya a ride to Las vegas. Short trip would be pertinent for a runaway, right?"(타라, 얘들아. 내가 CC까지 데려다주지. 도피에는 짧은 여행이 최고지, 안 그래?)

원래는 밴에서 한 숨 자고 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거 밤새 CC까지 달려도 상관없겠지. 운전사를 깨워서 가자고 했더니 여행 계획 변경이나 탑승 인원 추가에 대한 불만하나 표시하지 않고 시동을 건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그리고 좋은 운전수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모.

CC까지 가는 길에도 여러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마이클이 라디오 주파수를 괴악한 스테이션에 맞춰놔서 락도 아니고 랩도 아니고 발라드도 아닌 노이즈를 최대 볼륨으로 틀어놓고 사막을 횡단했다던지, 그러다가 왠지 모르게 경찰이 도로 한가운데서 제지를 했는데 잭슨이 그 앞에서 침을 뱉고 Big Brother(대형) 어쩌구 하면서 능청을 떤 것이라던지. CC에서는 그 쪽과 내가 행동을 따로 했기에 그 향락의 도시에서 그들이 뭘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밴에 돌아왔을 때 샤우튼이 뜬금없이 총각 파티를 얘기하는 모습에서 뭔가 벌어지긴 벌어졌구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해서 나는 그들과 만났고, 친해졌고, 헤어졌다. SS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에는 밴 운전수도 어차피 OO로 돌아가야 했기에 가는 김에 태워주라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아무래도 잭슨과 그 친구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간에 끌어들일 수 있는 친화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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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치고 나자 나는 이것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그들의 관계가 고작 a4지 3장 남짓밖에 되지 않았던가? 나는 한권의 책을 쓸 생각으로 워드프로세서를 켰는데 나온 분량은 기껏해야 학교 리포트 정도? 하긴, 1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수많은 사건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는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나에겐 충분히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시간이었지만.

공항에 도착하자 마이클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머리를 레게로 한데다가 정장을 빼입고 있어서 못 알아볼 뻔 했다. 나는 오 년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변한 것이 기껏해야 중학교 교복에서 고등학교 교복으로 갈아입은 것뿐인데 A의 마이클은 잭나이프와 체인 진에서 권총과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혹시 A에서의 시간은 한국보다 훨씬 빠르게 흐르는 것인가?

잭슨이 죽은 뒤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우리나라 식으로 따지자면 49재도 지나지 않은 셈이다. 물론 나는 마이클에게 그런 동양식 예절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고인에 대한 애도라던가 슬픔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반갑다는 인사 다음으로 마이클이 선택한 대화 토픽은 최근 개봉한 어떤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한 것이었다. 잭슨에 대한 추억을 같이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좀 당황했고, 흑인 특유의 제스처를 섞어가면서 극장에서 안보면 평생 후회한다, 영화 속 악역을 맡았던 배우가 영화를 찍고 난 뒤에 죽었는데, 문자 그대로 혼신을 다한 연기가 일품이었다, 뭐 이런 식으로 잭슨과 상관없는 얘기만 계속해서 꺼냈다.

혹시 슬픔을 잊으려고 억지로 그런 얘기를 꺼내면서 유쾌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마이클은 그냥 그 얘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느낌이었다. 히스 레저인가 버저인가 하는 배우의 죽음도 물론 슬픈 일이지만, 우리의 친구 잭슨이 죽었는데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건가?

마이클은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까지 가는 동안 계속 영화 얘기만 했다. 차에 도착하고 짐을 올려놓으면서 잠깐 대화의 휴지(休止)가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활용해서 대화의 방향을 바꿔보기로 했다. 차의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말을 꺼냈다.

“So, what was the reason that unknown sucker killed Jackson?"(그래서, 그 정체불명의 얼간이가 잭슨을 죽인 이유가 뭐야?)

보통 이럴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잠깐 흠칫하면서 대답을 늦추던데, 마이클은 시동을 걸면서 잘도 곧장 대답했다.

“Donno. Private thing."(몰라, 사적인 일이니까.)

무신경한 대답. 싸늘한 어조로 ‘저녁밥은 없다.’라고 말하는 고아원 불량 원장도 이보다는 더 감정을 실어서 말할 것이다. 그 뒤로도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모두 처음과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분명히 마이클은 한 마디로도 충분할 말을 열 마디로 늘이는 걸 즐기는 성격이었고, 영화 얘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그 성격을 증명하고 있었는데, 잭슨에 대한 얘기를 꺼내니까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것이다. 지금은 잭슨이 아닌 자신을 주목해달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잭슨에 대한 일을 캐묻는 것이 마이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아채긴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마이클의 기분보다는 잭슨이 먼저였다. 마이클의 싸늘한 분위기를 무시하면서 계속 잭슨에 관한 일을 물어본 결과, 나는 잭슨을 쏜 개새끼는 경찰에 잡혔고 이미 몇 번인가의 살인으로 현상까지 걸렸던 녀석이니까 아마 독극물 주사로 사형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OO 공항에서 잭슨의 무덤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이클은 자신이 잡아놓은 숙소에 짐부터 풀고 가자고 했지만, 나는 가능한 빨리 잭슨의 무덤을 보고 싶었다. 묘비에는 이름과 생몰년이 적혀있을 뿐이었고, ‘부모에겐 자랑스러운 아들이였으며...’ 등등의 미사여구는 전혀 없었다. 무덤 앞에서는 뭔가 격한 감정이 일줄 알았는데 서양식의 평평한 무덤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무덤을 파보기 전까지는 잭슨이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서서 ‘이 땅 밑에는 제 친구 잭슨이 묻혀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장송곡을 부르고 싶은 마음, 잭슨의 묘비를 뽑아들고 사형이 예정되었다는 그 미친놈의 감방에 들어가서 쥐포를 찍어내고 싶은 감정, 내 아들의 이름을 윤잭슨이라고 지어야겠다는 미친 생각.

그리고 그 생각과 감정들은 잭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여기에 오기까지, 2주가 조금 더 되는 시간 동안 10번 이상 두뇌와 가슴을 채운 적 있던 것 들이었다. 무덤을 찾은 건 분명히 뭔가를 위해서였는데, 막상 도착해서는 그 뭔가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 없었다. 더 오래 있어봐야 더 떠오를 추억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마이클의 인내심만 시험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냥 영전에 꽃만 놓고 가기로 했다.

차에 다시 돌아오자 마이클은 기다렸다는 듯이 낱말들을 입에 장전해서 기관포처럼 쏴댔다. 신상잡기에 대한 얘기가 몇 차례 오가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그냥 고모네 집에서 묵겠다고 말했지만 마이클은 자신이 숙소를 잡은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묵어달라고 했고, 결국 그렇게 얘기가 됐다.

숙소 앞에는 샤우튼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이클과 샤우튼도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샤우튼을 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 마이클이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5년 만에 본 샤우튼은 너무 초췌해보였다. 얼굴은 뼈와 가죽뿐이고 넥라인 아래로는 이중섭의 ‘소’를 연상케 하는 강조된 쇄골과 갈비뼈가 있었다. 왜 몸 상태가 그 모양이냐고 물어보니 샤우튼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콜라를 너무 많이 마셨다고 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챈 나는 더 이상을 묻지 않았고, 마이클은 웃으면서 짐을 차에서 내렸다. 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간소한 내용물이었기에 방 정리는 순식간에 끝났고, 마이클과 샤우튼은 푹 쉬라고 말하고는 서로 볼 일을 보러 갔다.

나도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과 갖가지 생각들로 피곤했기에 그냥 침대에 누워서 그대로 잤다. 중간에 9.11테러가 일어나고 코카인에 찌든 배트맨이 등장했던 것만 기억나는 괴팍한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햇빛이 창문을 넘어오지 못할 정도로 높이 떠 있었다. 인스턴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타이밍 좋게 마이클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오늘 무슨 계획이 있냐고 물어보기에 고모 댁에 깜짝 방문을 하려고 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 계획을 연기하라고 말하더니 영화 티켓을 쥐여준다. 어제 마이클이 그토록 극찬했던 슈퍼 영웅 영화다. 자기가 영화 한편 사겠단다. 이미 본 영화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시 봐도 돈이 아깝지 않을 명작이라고 하면서 나를 차로 밀어 넣었다.

뭐랄까, 추잡하다. 사람이 죽었고 한 때 형제라고 불렀던 사람인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영화를 보며 시시덕거리고 옛 친구 앞에서 ‘나 잘나간다.’라고 뻐기다니. 마이클은 분명 잭슨보다 덜 잘난 녀석이긴 했지만 귀여운 면도 있었고 순진했었다. 어제의 모습에서 좀 바뀌었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하룻밤을 보내고 이성이 좀 살아난 지금은 실감하겠다. 속물이 다 됐다.

그래도 이미 산 영화표를 내쳐버릴만큼 내가 터프한 녀석도 아니었기에, 그냥 영화는 보기로 했다. 자막이 없었기에 빠르게 말하는 몇몇 부분에서는 그냥 분위기로 때려맞춰 이해해야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이 영화가 명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만일 상황이 상황만 아니었었더라면 마이클에게 고맙다고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난 울었다.

사실 운 이유는 별 것 아니다.

영화가 너무 좋다. -> 잭슨은 죽었다. -> 잭슨이 이 영화를 보고 죽었을까? -> 못 봤겠지.

로 연결되는 생각들이 나의 눈물샘을 지긋이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울음이 터지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뇌의 한 영역은 울기 위한 생각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잭슨만 죽은 줄 알고 애도하려 A에 왔는데 아예 살아있는 놈이 없다. 그리고 한국의 고등학생인 나는……

“Why so serious, man?"(이 친구야, 갑자기 왜 이리 심각해?)

사람이 빠져나가고 있는 극장에서 정장을 입은 친구의 위로를 받으며 울고 있었다. 아마 나도 이미 미국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라일락심슨
라일락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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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프라이팬에 볶은 무언가를 찬그릇에 담았다. 뒤돌아 걸어온다. 찬그릇을 밥상 위에 올려놨다. 난 그녀가 한 번 더 가스레인지로 가길 간절히 빌었지만, 무심하게도 그녀는 그냥 맞은편에 앉는다. 식탁엔 흰 밥에 가지나물. 뭐, 그녀 자신도 나와 같이 식사하니 공평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손이 많이 가는 나물 요리를 올려놨으니 사랑이 식진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참치 캔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식탁보다야 그래도 손닿고 불닿은 나물 요리가 낫다.   “음, 가지네. 근데에, 가지 말이야, 요즘 식탁에 좀 자주 올라온다아. 그치?”   어떻게 하면 어린애 반찬 투정처럼 들리지 않게 말할 수 있을지 이틀간 깊게 고민한 끝에 입에 담은 말이었는데, 대실패다. 어쭙잖은 애교를 섞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결코 당신의 밥상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약간 비일상적인 식단에 의아해하고 있을 뿐임을 강조하기 위해 젓가락을 찬그릇으로 향했다. 보랏물 뚝뚝 떨어지는 가지, 식욕이 팍 꺾인다. 애써 입맛 도는 척하며 가지를 씹는데 관자놀이깨에 물음표가 하나 떠올랐다. 잠깐, 아까 내가 참치 캔이 이것보다 못하다고 했었나?   “가지가 싸서. 많이 사봤어. 앞으로도 한 1주일은 먹을 수 있을만치 있으니까 찬거리 걱정 안하고 살아도 돼, 자기야."   뭐, 뭐라고. 4일 연속 가지나물만을 먹었다. 이미 심신양면으로 피폐하다. 그런데 1주일을 더 멕이겠다고. 앞을 본다. 아내는 천진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래, 그녀에게 악의는 없을 것이다. 이건 압박이라기보다 일종의 문제제기다. 한 번쯤 생각해보라는, 상당히 우회적인 문제제기. 밥은 여차하면 밖에서도 먹을 수 있으니 내게 강요하고 싶었다면 보다 직접적인 수단을 썼겠지. 게다가 본인도 고통 분담을 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화를 내겠는가. 나는 식사의 기능성만을 간신히 만족시키는 끔찍한 밥상을 웃는 낯으로 비웠다.   “잘 먹었습니다.”   싱크대에 밥그릇과 수저를 놓고 돌아서는데, 아직 밥을 씹고 있는 아내의 표정이 망막에 잠깐 비쳤다. 다이아몬드를 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괸, 정적인 나의 석고. 슬프고 아름다웠다. 눈이 찌잉- 하고 울린다. 이걸 포기하란 말이지. 그래, 한 번쯤 생각해보자.   …   사실 봐놓은 적출소는 몇 군데 있었다. 출근길에 그 으리으리한 건물을 못 보고 지나가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아내의 품위 있는 문제제기 이전에도 몇 차례의 간접적이고 불쾌한 압박이 있었던 까닭이다. 젠장, 눈 위에 샘 하나 달고 사는 게 뭐 그리 별일이라고 사람을 괴롭히는지. 이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콩팥 떼어 파는 놈은 빵 들여보내 땅 파게 하고 누선 떼어 판 놈은 앞장서서 출셋길 파주는 세상. 그놈의 빌어먹을 적출소를 애써 못 본채 하고 액셀을 밟았다. 당연히, 신호등을 열 개도 채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적출소

  • 라일락심슨
  • 2010-02-18
이 인간이 밥을 먹어?

  우악스럽게 말하지 마세요. 좀 더 저를 소중히 대해 주세요. 방에 문 잠그고 들어가면 그냥 내버려 두세요. 동생이 저렇게 된 게 왜 저 때문입니까. 친구랑 밖에 있다고 하면 그냥 그런 줄 아세요. 당구장에 저 찾으러 오지 마세요. 밥 제때 안 주시는 건 괜찮은데 용돈은 좀 꼬박꼬박 챙겨주세요. 1시 넘어서도 집에 안 오면 외박하는 걸로 아세요. 제 친구 폰번은 알아서 뭐하시게요. 아버지 폰번은 아세요? 그건 저도 알아요, 걸었을 때 받는 번호 말입니다. 제 방은 지금 상태로 괜찮고 정리는 필요 없어요. 굳이 하시겠다면 제 방 청소는 한 달에 한 번만 하세요. 너무 구석구석 철저히 하지는 말고. 이상한 거 나오면 엄마도 어색해지잖아요? 안 그래요? 에이, 농담이죠. 그런데 이런 농담이 안 먹히면 나 어색해지잖아요!   농담이긴.   젠장. 페이지 눌어붙은 살색 책을 들여다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압니까? 난 살색 책이 그냥 사진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삼류 인생을 살고 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남자거든요. 같은 삼류지만 살색 책은 자기가 삼류라는 게 자랑스럽나봐.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와의 원 나이트’, ‘GIRL레의 끝없는 욕망’이라니.   사람 살려.   인터넷 세대가 이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민망한 일이지만(그렇다고 야동이 민망하지 않다는 건 아니란다 찌질이들아!), 그렇다고 해서 읽는 나까지 민망해지는 고루한 문구를 굳이 껴 넣으셔야 했습니까, 편집장.   그러고 보니 이런 잡지 편집장은 도대체 어떤 복 받은 사람이 하는 거냐! 제길, 나도 복 좀 먹자. 머리를 부여잡고 이력서의 초안을 구상해봅니다.   학력 : 고졸 혼인여부 : 학력을 참고하세요. 성경험 : 미스터리 경력 : 모 커뮤니티 야설 업로더 월간 랭킹 1위 지원동기 : 민망해서. 포부 : 사진 찍는 분이랑 찍히시는 분이랑 편집하시는 분은 참 잘하시는데, 글 넣으시는 분이 아마 없나 봅니다. 절 그 자리에 넣으시면 아마 세계 최초의 ‘다리 벌린 사진을 곁들인 하드보일드 본격야설’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구상 끝.   이제 이걸 깔끔하게 문서화하고 잘 나온 사진 붙이고 팩스로 편집부에 보내면…….   네, 훌륭하게 한 편의 개그가 완성됩니다. 푸하하하.   그리고 괜히 심각해져서 핸드폰 문자를 확인하지요. 모름지기 남자는 사생활과 비즈니스의 갭이 커야하는 법입니다. 핸드폰 문자 확인을 사생활이 아닌 비즈니스로 보는 시점에서 이미 상당히 글러먹은 듯도 합니다만, 지금 그걸 지적하면 난 박살나니까요.   도착한 문자가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요. 3년 내내 남고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누군가 달콤한 문자를 보내줄 리 만무하고, 마지막 1년엔 고3 교실 물을 흐리는 데 앞장섰으니 흐린 물에서 헤엄

  • 라일락심슨
  • 2010-01-23
행복한 왕자

신이 있거나 없는 이유를 제가 설명해드릴 수 없는 것처럼, 이 남자에게 일어난 일에도 어떻게 인과를 갖다 붙일 수가 없군요. 최대한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도록 하지요. 그러니까, 이 남자의 일대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인의 재롱둥이였고 그 부모의 희망이었던 이 남자는 금방 자라서 친구들의 조롱과 선생님의 무관심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인간의 생존방식’을 습득해버렸지요. 적당한 학력과 적당한 일자리를 찾은 이 남자는 적당히 눈높이를 낮춰 결혼에 골인하고 그럴듯한 결혼 생활을 지속하다가 아들을 하나 갖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아직 아버지가 된 적은 없는 사람인지라 그 남자가 받은 느낌을 완벽하기 옮기지는 못하겠군요. 여하튼 이 남자도 그의 아버지가 그를 희망으로 여겼듯 그 아들을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배신당했지요.  배신이라. 하긴, 그가 배신당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의 아들에게 ‘태어나게 해준’ 것 밖에 해준 일이 없었으니까요. 물론, 그의 그 ‘적당한 일자리’는 ‘적당한 수입’으로 그 아들에게 적당적당한 입을 것 먹을 것들을 제공하곤 했지요. 하지만 그의 아들이 생각하기엔 그것이 좀 부족했지요. 게다가 좀 유명하신 분들의 말을 빌리자면, ‘아들에게 아버지란 최초의 신격 대응물’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아버지로서의 그는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고 주말엔 잠을 자는 존재로밖에 비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들된 입장으로써는 아무래도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지요. 뭐 어쩌겠습니까, 그는 그런 남자였는걸요. 게다가 그 아들은 막 중학교에 들어간 참입니다. 그 대가리는 적당히 여물었으니 부모들은 아들에게 재롱 이상의 무엇을 기대하고, 아들은 그 기대가 부담스러워서 입을 다물게 되는 시기지요.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고함을 지르는 하극상 류의 반항은 아니었어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입을 다물었습니다.’. 때로는 그게 더 효과적이지요. 어쩌면 그 무관심이 그의 어렸을 적 트라우마를 건드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느꼈지요, 굴욕감을. 그리고 그 자식에게 굴욕감을 느꼈다는 게 굴욕적이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 감정을 배신감으로 포장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제가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잘 들으시지요.  루시퍼 : 너의 아들과 같은 부피의 금을 너에게 주겠다. 대신 너의 아들을 나에게 팔아라.  남자 : 팔겠소. 루시퍼 :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남자 : 딴말 안하겠소. 루시퍼 : 이것은 마왕의 계약, 절대 어길 수 없다. 1주일 뒤 너의 아들을 받으러 오겠다.  네, 이 부분입니다. 신도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에 악마가 있다니요. 아니,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면 충분히 악마가 있을법한 세상입니다만, 그렇다고 악마가 부른다고 짠! 하고 나타날만큼 편한 세상은 또 아니고요. 하긴, 어떻게 설

  • 라일락심슨
  • 200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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