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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현실

  • 작성자 창지자
  • 작성일 2010-11-17
  • 조회수 240

숨 가쁘게 그를 뒤쫓는다. 무엇인가가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려 한다. 하지만 그는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쫓는 자들을 피한다. 지금 그가 달리고 있는 곳은 컴컴한 어둠만이 드리운 골목이다. 단 하나의 빛도 허용하지 않는 곳에서 그는 알 수 없는 존재를 피해 도망 다닌다.
 왜? 왜 그를 쫓는 것일까?
 왜? 나를 쫓는 것일까? 왜? 나를 뒤쫓는가?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주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던 그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신경 쓰지 않던 그에게,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다가오는 이 현실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가면현실(假面現實)
                                       -persona reality

 태균은 도망치다가 모퉁이가 나오자 재빨리 달려가 모퉁이 뒤로 숨어 벽에 바짝 붙었다. 그는 자신을 쫓는 무언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 앞에서, 도망치기에 급급한 이 상황에서 진정하고 안정을 취하기란 무리였다. 그래서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태균은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아서도 빠르게, 그것도 조용히 어떤 기척도 발산하지 않은 채 태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다가오자 숨이 멎을 듯 했다. 그러면서 제발, 제발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길…, 내 고동소리를 듣지 않아 주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그리고 어느 새 그것은 태균의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모든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살 수 있을까? 날 본 것일까? 등등해서 여러 생각이 태균의 머리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태균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유유히 이동했다. 그리고 그것이 태균에게서 저만치 멀어졌을 때, 그는 이제 살았다면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휴~ 조마조마 했네. 축하해. 그 녀석한테서 용케도 살았구나?”

 그 말에 태균은 잠시 심장이 멎는 듯 했다. 그러자 그 목소리의 주인은 웃으며 태균을 비웃었다.

 “내가 ‘살았구나.’ 라고 했는데도 그런 표정을 짓다니. 너 바보구나.”
 그리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개가 향한 곳은 담벼락 위였다. 한 소년이 구름에 가려져 세어 나오는 달빛을 조명삼아 조소를 지으며 담벼락 위에 앉아 있었다. 태균은 놀라 다시 벽에 바짝 붙었다. 그러자 소년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웃긴 짓만 골라한다니까. 하긴 담벼락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니까. 놀랄만한 것도 당연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보고 놀라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담벼락에서 태균 앞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균은 자신에게 내미는 소년의 손을 잡아야 할지 망설였다.
 태균이 손을 잡는 것을 망설이자, 소년이 고개를 약간 까딱하고서는 짜증을 내듯 말했다.

 “내 손 안 잡아?”
 “저, 왜 내가 네 손을 잡아야 하는 거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묻는 그에게 태균이 물었다. 소년은 그 말이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하고 웃고는 “너도 나랑 똑같으니까. 그래서 우린 같은 동료니까.” 라고 말했다.
 동료?!
 소년의 말에 태균의 눈이 커졌다. 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동료라니…
 태균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이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도 알지 못했고, 애초에 그는 그를 처음 보았다. 태균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생각하며 소년에게 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네 동료라니!”

 소년은 진지하게 묻는 물음에 웃으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말 그대로 동료라는 소리지. 그럼 무슨 말이겠어?”

  그런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태균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러자 소년은 태균의 반응이 예상했던 반응이었는지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뭐, 내가 널 동료라고 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만, 아무렴 어때 오늘 그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걸. 이렇게 오늘 널 만났으니까. 그리고 그런 이유는 차차 알아 가면 되니까. 살아가면서, 사는 동안에 말이야. 굳이 지금 그걸 알 필요 따윈 없잖아.
 그리고 넌 오늘 날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게 될 거야. 반드시 분명히 말이지.”

 그러고는 소년은 등을 돌리고 태균의 앞에서 사라졌다. 유유히 천천히, 좀 전 그에게 말을 붙였던 때처럼 소리 없이.
 태균은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방에 내려놓은 뒤, 침대에 누워 그의 말을 생각했다. 자신을 동료라고 부르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 그리고 대체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까? 그리고 그 애는 대체 누구일까 라고.
 하지만 소년의 정체와 그가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알 턱이 없었다. 태균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악했다.

 “정말이지 도통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똑바로 누우며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태균은  무언가에 쫓기느라 피곤했는지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꿈을 꿨는데, 그 꿈에서 소년과 다시 마주했다.
 태균은 무언가에 쫓기던 골목길에 서 있었다. 골목길은 그때처럼 어둡지 않아서 주위의 사물을 잘 분간 할 수 있었는데, 그런 그곳에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뒷머리 칼이 조금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태균은 그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자 소년은 태균이 다가오는 만큼 멀어졌다.
 그는 소리를 크게 내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태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태균에게 들리지 않았고, 태균은 큰 소리로 소년에게

 “뭐라고? 안 들려!”
 라고 말하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애썼다. 하지만 이내 태균의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가려졌다. 그리고 놀라 일어난 순간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밖은 아직 어두웠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그는 방금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 숨을 쉬며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불을 끈 뒤 다시 누웠다.
 이번에는 스스로의 의지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태균은 하품을 찍찍해대며 학교로 향했다. 어제 자다 깨서 그런지 잠은  아직 가시지 않아있었다.
 그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며 몸이 앞으로 밀려졌다. 뒤를 돌아보자 태균의 절친한 친구인 준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안녕? 그런데 너, 오늘은 왜 그리 기운이 없어 보이냐.”

 그는 그렇게 말하는 준호에게 답하려는 순간 그의 어깨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 무언가는 검은색으로 형체가 없는 연기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준호의 어깨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태균을 바라보았다.
 태균은 놀라 뒷걸음 질 치며 손가락을 피며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 너… 네 어깨에 말야….”

 태균이 그렇게 말하자 준호는 자신의 어깨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태균에게 “아무것도 없는데?” 라고 말했다. 태균은 자신의 눈이 이상해진 것이라 믿고 눈을 비볐지만, 여전히 준호의 어깨 위에 검은 무언가가 있었다. 태균은 준호에게 다시 말했다.

 “너 어깨에 이상한 연기 같은 게 계속 있어.”
 “뭐? 방금 어깨를 봤는데도 아무것도 없는데? 너 잠을 못자서 허깨비가 보이는 거 아냐?”
 “아냐, 네 어깨에 분명 있다니까.”
 그렇게 분명하게 말했지만, 준호는 웃으면서, 너 피곤한가 보다 얼른 학교에 가서 자자라 말했다. 하지만 허깨비는 아니었다. 분명히 그의 눈에 여전히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허깨비가 아니었다. 그러나 준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허깨비일 수도 있었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내가 피곤해서 이상한 게 보이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준호의 말대로 발걸음을 빨리해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학교로 향하는 길에 본 사람들의 어깨에, 준호의 어깨 위에 있는 검은 그것과 똑같은 게 있는 것이 보였다. 태균은 다시 눈을 비벼보았지만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어깨들 위에 있었다.
 학교로 향하면서 태균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지 못하고 눈을 움직였다. 그리고 검은 것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검은 그것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이 느껴지자 온 몸에 긴장감이 돌면서 몸이 뜨거워졌다. 태균은 몸을 뜨겁게 달구는 긴장감을 앉은 채 학교 운동장에 당도했다. 그리고 운동장에서 교실까지 가는 길에 몸을 달구는 긴장감은 한 층 더 뜨거워졌고 현기증도 일었다. 그렇게 교실에 도착한 그는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주위의 검은 것들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언제 그때처럼 자신을 덮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해?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몸도 떨고 있고.”

 칠판을 보고 있던 짝 민지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 태균을 보고 물었다. 그러자 태균은 그녀를 돌아보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종이 침과 동시에 정신이 희미해지더니, 이내 의자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수업이 반이나 끝난 점심시간이었다.


 그가 깨어나서 처음 본 사람은 양호실의 양호선생님이었다. 양호선생님이 깨어난 태균에게 다가와 이마를 만져보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네, 괜찮아요. 약간 어지러운 것만 빼면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양호선생님을 바라보던 태균은 그녀의 어깨위에 검은 그것이 없는 걸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좀 전까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현기증이 다시 났다. 양호선생님이 현기증을 보이는 태균을 보며 말했다.

 “정말 너 괜찮은 거니?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정말,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 그럼 오늘은 조퇴하는 게 낫겠다. 담임선생님께는 내가 말 할 테니까.”

 태균에게 그렇게 말하는 양호선생님께 태균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태균이 양호실 출입문 앞에 섰을 때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그곳에 어젯밤 보았던 소년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소년을 본 태균은 적잖이 놀라 입이 저절로 벌려졌다.
 소년도 놀란 태균을 보고 놀랐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 이 학교 다니는 거야?”
 “그럼 너도?”

 그렇게 말하며 한참이나 얼음처럼 가만히 서 있던 양호선생님이 가만히 서 있던 태균에게 다가가다가 소년을 발견하고 불렀다. 그러자 소년은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태균을 지나쳐갔다.
 잠시 후, 태균은 양호실에서 나오는 소년을 붙잡고 물었다.

 “이 학교 다녔던 거야?”
 “그래, 그런 너도 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니, 이거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렇잖아? 보자, 이걸 뭐라더라. 아, 그래 운명이라고 했지. 우리 둘이 운명적으로 만난 게 아닐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그에게 태균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그의 장난 같은 말에 짜증을 내며 말했다.

 “장난 같지도 않은 말은 집어 쳐. 그나저나 대체 내가 봤던 건 뭐야? 그리고 동료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언어 이해 능력이 떨어지는 가 봐. 말 그대로 동료라는 말이지. 그리고 그것들의 정체? 나도 몰라.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나도 궁금하다고!
 나 빼고는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았다고. 아무도 말이야. 그 누구도 그것들을 보지 못했어. 되려 나만 이상한 놈이 되었다고. 그리고 어제 집 근처에서 달을 보고 있었는데, 널 보았지. 쫓기는 널 말야.”
 장난기 가득하던 말투에서 조금씩 그런 느낌이 사라지더니, 이내 목소리에서는 진지함만이 묻어나왔다. 그의 말을 듣던 태균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말했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던 준호가 생각났다. 그는 소년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둘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아무 말 없이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균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세상에 없어. 그냥 환각일 뿐이야.”
 “그럼 어제 겪은 그건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사실대로 말해봐. 쫓기던 거 어제뿐만이 아니지?”

 소년의 말은 태균이 잊고 있던, 아니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분명 그의 말처럼 그것에게 쫓기던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 있었던 건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태균은 마음속의 눈을 찔끔 감으며 말했다.

 “아니, 분명 어제가 처음이었어.”
 그러자 소년은 잠시 태균을 유심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렇구나.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야. 나도 너처럼 쫓긴 적이 많거든. 아마 또 널 쫓을 거야.
 그나저나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게 된 김에 우리 통성명이라도 하자. 난 2학년의 지민구라고 해. 넌?”
 “이태균. 똑같은 2학년이고.”
 “이거 정말 운명이라고 해도 되겠다. 똑같은 2학년이라니, 그리고 그 이름 좋네.”
 “고, 고마워.”
 “그럼 난 이만 가봐야겠다. 또 보자.”

 그렇게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헤어졌다. 그리고 태균은 곧바로 교실로 돌아와 가방을 싼 뒤 학교를 빠져나왔다. 학교를 나서 집으로 향하는 동안 태균은 주위의 풍경들을 보았다. 주위는 전과 같이 변함이 없었다. 사람들 어깨에는 검은 그것들이 보이지도 않았고, 자신이 그것에게 쫓길 필요도 없는, 스스로들에게 상관없는 일이 벌어져도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세상 그대로였다. 그는 어제와 오늘 아침에 보았던 것들이 모두 꿈만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민구를 만난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를 생각하면 할수록 꿈이라는 느낌을 현실이라는 느낌이 밀어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왜 지금은 검은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혹시 그 아이도 나도 정신이 이상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아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며,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생각하게 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오던 숨이 막힐 정도의 차가운 느낌의 네모난 방. 그래서 이미 미쳐버린 사람조차도 더 미쳐버리게 만드는 그 방에, 상상하기도 싫지만, 그곳에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눈을 감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그 생각만 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달리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부딪쳤다. 부딪치고 부딪쳐서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사과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뒤에도 그 생각은 떨쳐지지 않았고, 왜 일찍 돌아왔느냐는 말에 대충 몸이 안 좋아서 돌아왔다고 했고, 점심과 저녁을 먹으라는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방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꿈쩍 하지 않았다.

 “태균아, 밥 방 앞에 놔 둘 테니까. 먹어!”

 방 밖에서 엄마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태균은 침대에 멍하니 누워 어제와 오늘 낮에 민구가 한 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날 왜 쫓는 거고, 난 언제 그것들을 보았던 거고, 나는 정말 미쳐있는 것일까? 아니면 꿈을 꿨던 것일까?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같은 녀석에게 쫓기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의문점들을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정리되지 않고 오히려 미궁으로 더 빠져들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고는 베개에 머리를 내리찍으며 신음을 냈다. 자신에게 닥쳐온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일련의 현상들이 부디 꿈이기를, 잊어지기를 바라면서, 머리를 베게에 내리찍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스스로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들은 잊기 어렵고, 꿈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태균은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는 한참동안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뭔가가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태균은 베개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기분 탓일 거야. 기분 탓.”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태균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을 추슬러봤지만, 꺼림직 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 꺼림직 한 마음을 간직한 채 학교로 향한 그는, 학교 수업 내내 어제 밤 자신이 느꼈던 기분을 생각하느라 수업에 통 집중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의 친한 친구들이 말을 걸더라도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교를 하는 시간에 민구를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민구는 그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혹시 어제 밤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어?”
 
 그 말에 태균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런 표정을 짓는 태균을 본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라 확신했다.

 “그랬구나. 어제 나도 그런 기분을 느꼈거든. 그러니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그게 기분 탓인가 했지. 하지만 혹시 라는 게 있으니까. 그래서 널 보면 물어보려 했는데, 역시였네.”

 그러고는 민구는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위험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 해줘. 여기 내 휴대전화 번호야.”

 그렇게 말하며 민구는 자신의 휴대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고, 태균도 그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건넸다. 둘은 서로의 번호로 전화를 걸고 다시 마주보았다.

 “꼭 전화해야 해. 어제 느꼈던 게 기분 탓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것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어.
 내가 전에 말했지? 우린 동료라고 말야. 그러니까. 동료는 서로를 도와야 해.”

 태균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우려면 도와야지. 
 “그럼 난 이만 가 볼 게. 꼭 전화해라.”
 “저, 잠시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민구를 태균이 불러 세웠다.

 “뭔데 그래?”

 그렇게 묻자 태균은 어젯밤 생각했던 것 중 일부를 말로 내뱉어 물었다.

 “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미친 건 아니겠지? 그, 그럴 수도 있잖아. 아니면 꿈이던가.”

 그러자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어? 우리가 마주하고 있고 다 보았는걸.”
 “그, 그렇겠지?”
 “그래, 그렇지…”

 둘 사이에 긴 침묵이 잠시 동안 찾아왔다. 그리고 서먹서먹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종이 야자를 위한 예비 종이 울리자, 먼저 민구가 야자를 해야 한다며 자리를 떠났다. 이윽고 태균도 그가 떠나자 야자를 하기 위해 교실로 돌아갔다.
 야자시간 동안 그는 영어책을 펼치고 영어단어를 외웠다. 그러면서 반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고, 잠시 동안 검은 것에 대한 걱정을 잊었다. 그런데 그러던 도중 진로에 대한 고민이 아이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도 역시 대한민국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그 문제에 정말 민감했다.

 “정말, 너 대학 어디로 갈 거야?”

 태균의 친구 중 한 녀석이 물었다. 그러자 다른 한 녀석이 그 말에 대답을 하며 태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태균은 잠시 깊게 고민을 했다. 그런 그때 준호가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이 녀석 사실 중학교 1학년 때쯤이었던가? 전국청소년문예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녀석이라고. 그래서 중학교 때 친구들이 이 녀석은 작가나 기자가 될 거라고 하더라니까. 그런데 요즘은 글을 안 쓰는데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대화를 나누고 있던 반 녀석들의 시선이 모두 태균에게로 쏠렸다. 태균은 그런 그들의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그런 때가 있었구나라고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를 떠올린 순간, 어젯밤 느꼈던 그 꺼림직 한 느낌이 느껴졌고 머리가 어지러워 졌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어지러운 상황에서 주위를 보았다. 설마?! 설마! 그것들이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
 그 생각은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반 아이들의 어깨 위로 검은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굳은 표정의 태균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검은 것들을 보고 넋이 완전히 나가 있었다. 그는 속으로 계속 꿈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더욱 더 느낌은 현실처럼 다가왔고 현실은 그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정도로 창백하게 변했다. 창백하게 변한 그를 바라보던 아이들은 그런 얼굴을 보고 놀라 태균의 어깨에 손을 언지며 괜찮냐고 물었다. 그 순간 그들의 걱정이 도움이 됐는지 태균의 숨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고, 그의 눈에 보이던 검은 그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완전히 정상을 되찾았을 땐 교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시선들을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좀 열이 있어서 그래. 요즘 꽤 쌀쌀하잖아. 그래서 감기에 걸렸나봐. 에취~”

 태균의 그런 태도에 친구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본론으로 돌아간 대화에서 태균은 대화에 끼지 못했다. 아니, 끼지 못 했다기보다는 대화에 끼긴 끼되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했다. 자신을 땀 흘리게 한 검은 것들의 출연으로.
 그는 좀 전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꿈에 대해 물었을 때 나타났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꿈이랑 그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 거지?’

 그렇게 깊이 생각하던 중 민구가 떠올랐고, 야자가 모두 끝나는 대로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으로선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야자시간은 흘러갔고, 어느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종이치자 태균은 가방을 챙겨 교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교문 앞에서 민구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자동차가 하나 둘 학교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민구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러자 그는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 학교에서 이야기 할 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새 3학년 교실과 교무실을 제외한 나머지 교실들의 불이 다 꺼지고 교문을 지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을 때, 태균의 눈에 한 인영이 어둠속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태균은 그 인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인영이 누구인지 살펴보려는데, 인영이 그를 먼저 보았는지 먼저 태균에게 말을 걸었다.

 “너,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인영의 목소리는 민구의 것이었다. 태균은 민구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니, 뭐 좀 상의 할 게 있었어.”
 “상의?”

  민구는 그 말에 태균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걸으면서 설명하겠다면서 일단 학교를 나서 학교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학교 근처 공원으로 향하며 태균은 야자 때 일어났던 일을 그에게 설명했다. 그는 태균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공원에 다다르자 태균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그게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된 이유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뭐 때문에?”
 “그거야 모르지. 어쩌면 우리가 남들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왜 있잖아, 만화 같은데서 나오는 것처럼.”

 태균의 대꾸에 민구는 장난스럽게 답했지만, 태균도 내심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만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일뿐,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런 것이라면, 너무 가혹한 일이지 않은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애써 보려 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가했다. 자신들이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드러나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 우리가 미친 것일 수도 있잖아.”

 민구는 그 말에 좀 전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숨기고는 태균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데 뭐가 미쳤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좀 전에도 말했지만, 걱정 마. 우린 미친 게 아니니까. 다만, 다를 뿐인 거야. 내가 다르고 네가 다른 것처럼.”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말하는 민구를 보며 태균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전환 시켰다.

 “그때 꿈 얘기 했을 때 나타났다고 했지? 그런데 무슨 꿈 얘기였어?”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저 진로에 대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민구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실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뭐? 설마…”
 태균은 그의 말에 당황했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했다. 그러나 민구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실눈을 더 가늘게 뜬 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는 수 없이 태균은 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얘기를 들은 민구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한 얼굴을 지었다. 그러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태균은 그의 표정을 보며 무슨 생각이 떠올랐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지 궁금했다.
 마침내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네 말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 녀석들은 우리가 좌절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게 아닐까? 나도 그런 적이 있었거든. 생각해보면 그때 부터였을지도 몰라. 내가 그것을 보게 된 때가 말야.”

 태균은 민구의 말을 들으며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자 그는 그가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쩌면 그것을 볼 수 있게 만든 공통된 이유일지도 모르는 것을.

 “나는 학교에서 적응을 잘 못했어. 주위에 친구가 거의 없었거든. 아니, 아니지. 친구가 있긴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게 우정으로 까지 발전하진 않았지만.
 사실이 그래, 학교에서 적응을 못한다는 게 어디 한 부류에 속하지 못한다는 거니까. 그러니 나는 우정이라는 걸 진정으로 가져보지 못했어. 게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친구들이 떠나가기 까지 했으니까.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주위에 적이 생기기도 하고, 뭘 할 때도 혼자해서 그게 편해지기도 하고 말이지. 그래서 나는 두 번이나 학교를 옮겼어. 중학교 때 한 번,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또 한 번….”
 그렇게 말하던 민구는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잇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아마 그때였을 거야, 내가 그것을 본때가.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내 주위에서 사라진 그 때쯤에.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쯤에 내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아. 겉으로는 어느 때와 비슷했지만, 속은 아주 시커메 가지고 어떤 일이든지 의혹이 없었어. 그래서 멍청하게 살았던 것 같아.
 그리고 그런 나에게 녀석들이 보이기 시작한 거지.”

 그는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태균에게 말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말했어도 민구의 몸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보였다.
 태균은 그것을 보며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그가 이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민구가 자신의 말을 끝내고 태균에게 물었다. 
 “혹시 너도 나처럼 그런 거 있어?”
 “뭐?”
 “너한테도 나처럼 말 못하는 게 있냐고.”
 민구가 짜증을 내듯 되물었다.

  “그, 그게…, 사, 사실은 나도 있었어. 내 꿈 얘기.”

 태균은 더듬거리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네 생각대로라면, 아마 내가 그것들을 보게 된 이유가 내 꿈 때문일지도 몰라. 중학교 때 내가 전국문예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말 했지? 그때가 1학년 때였을 것 같아.
 그때, 그 이후에 문제가 있었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어. 날의 일이었어. 나는 그것 때문에 글 쓰는 걸 포기하게 되었지. 중학교 1학년 때 그걸 받았을 거야.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글보다는 공부에 많은 시간을 쓰게 되고, 급기야 아예 글을 쓰지 않게 되었어. 그런데 그런 생활을 하게 되던 중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정말 큰 대회 하나 있으니 나가 보지 않을래?” 라고 권유를 하더라고. 하지만 그게 실수였던 것 같아. 그 대회에서 내가 낸 작품이 표절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지. 정말 웃긴 일도 다 있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태균은 얼굴을 찡그리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때를 떠올리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난 따져보았지만 결국은 표절이라는 판정은 뒤집어지지 않았지. 그때 내가 대회에 나갈 때마다 마주치던 녀석이 찾아와서는 ‘너 같은 게 그럼 그렇지.’ 라는 눈빛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어. 자신은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들과 유명한 사람들에게서 글 과외를 받는다라고. 몇 달 동안 안 보이던데, 혹시 자신이 없어서 나오지 않은 거냐고 하면서 말이야.
 난 그때 글 쓰는 걸 포기하고 싶었어. 그리고 글 쓰는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고 싶었지. 하지만 현실은 달랐어. 난 나였으니까.”

 태균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먹을 세게 쥐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결국 난 글 쓰는 걸 포기하기로 맘먹었지. 그렇게 그런 생각을 며칠 동안 하던 중에 검은 녀석을 보게 된 거야.
 난 처음에 그걸 보고 무서워서 도망을 쳤지만 계속 따라왔고, 몇 달에 한 번씩 그게 날 쫓아왔어. 그렇게 계속 내 주위를 맴돌았지. 하지만 차츰 글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자 그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어느 순간 내 기억에서 그것들이 사라지게 되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근에, 그러니까 요 며칠 사이에 그것들이 다시 보이게 된 거야.”

  그렇게 말하는 동안 태균은 옛날을 떠올렸다. 그러자 몸이 뭔지 모를 감정 때문에 떨렸다. 검은 것을 보게 된 그때와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한 그때, 그리고 자신이, 자신이 아니고 싶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를 떠올리자 말이다.
 민구는 그의 말을 듣고 몸을 떠는 태균을 보면서 자신도 자신이 아니었으면 했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몸을 떨며 민구를 바라보았다. 민구
  그런데 그 순간 주위가 싸해지기 시작하더니, 공원의 불은 그대로인데도 주위가 어두워져 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알 수 없는 느낌이 덮쳐오기까지 했다. 그러자 둘은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붙는 듯 했고, 직감적으로 그것이 검은 것들이 나타났을 때 느꼈던 느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것들이 그들 근처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눈으로 주위를 살피자 어둠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런, 역시였나 보네.”

 민구가 그것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들이 그것들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일단 검은 것들에게서 멀리 벗어나기로 했다. 그러나 주위는 어두컴컴해서 공원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궁리를 하고 있을 쯤에도 그것들은 서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망할! 정말 그때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있지도 않았을 텐데…”

 궁리했지만 딱히 방법이 나지 않자 태균이 큰소리로 외쳤고, 그의 외침은 공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 외침과 동시에 좀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검은 것들이 태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에 그들은 놀라 뒷걸음질 치며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곧이어 또 하나의 검은 것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자 내달리던 그들은 급정거를 하듯 멈춰 섰다. 이제는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앞과 뒤를 검은 것들이 막고 있었고, 주위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순간에 그들은 죽음과 대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들은 정말로 죽음과 대면을 하고 있었다. 둘의 눈에는 과거의 환영이 스쳐지나갔다.
 그때 어디선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쟤들 좀 봐. 저기서 뭐하는 거지?”
 “그러게 말야. 정신이 이상한 가봐.”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에게 전했고, 그 다른 목소리는 전해준 목소리의 말에 맞장구치며 웃었다. 웃음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쥐었다. 자신들은 이상한 게 아니다. 그저 다를 뿐이다.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를 참다못한 민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린 이상한 게 아냐!”

 그의 외침과 동시에 주위는 한 순간에 조용해졌다.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태균과 민구는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둠에 휩싸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주위는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태균과 민구는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주위가 완전히 밝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그것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한 후, 그들은 곧바로 공원 정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것들이 그들을 따라잡았다. 태균과 민구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며 소리쳤다.

 “더 이상 우리를 따라오지 마!”

 그러자 그들을 따라잡던 검은 것들의 속도가 느려졌고, 어느새 그들과의 거리가 크게 벌어져있었다. 그렇게 공원 정문을 지났을 때 뒤를 돌아보자 더 이상 쫓아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쫓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쫓는 속도가 느려져 있었다. 그것들은 태균과 민구를 아주 느릿느릿하게 마치 거북이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들은 잠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것들이 언제 다시 그런 속도로 쫓아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였다. 속도가 느려진 검은 것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영문을 몰라 의아해 했다. 그러나 좋은 일이었다. 그것들이 쫓아오지 않는 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을까. 그렇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직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서 있던 검은 것들에게서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 검었던 것이 순식간에 사람과 비슷한 형상으로 변하며 검은 연기뿐이던 전과는 달리 실체를 가진 모습으로 변했다. 태균과 민구는 그것을 보며 입을 떡 하니 벌리고는 생각했다. 저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그 검은 형상들이 실체를 가지면서 변한 모습이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모습으로 똑같이 변한 검은 그것들이 이번에는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을 불렀다.

 “어이 거기 둘! 이리로 와보시지?!"
 그 목소리에 태균과 민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모습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똑같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그들, 검은 그것들이 둘 가까이로 다가왔다.
 “정말이지 가까이 오라는데도 안 오네. 뭐, 어찌됐든 간에 너희들과 우리가 가까이에 있으니까 상관은 없으려나?”

 그것들 중 민구의 모습을 한 것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태균의 모습을 한 것이 그 말을 받아 이어 말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단도직입적으로 우린 너희에게 너희들의 삶을 우리에게 줬으면 해.”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하던 그들은 뒤통수를 쇠로 된 야구방망이로 얻어맞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둘은 그것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태균과 민구의 모습을 한 그것들은 고개를 흔들며 쯧쯧 혀를 찼다.

 “정말이지, 말기를 못 알아듣는 거야? 너희의 삶을 원한다고. 너희도 너희가 아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우리가 너희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고. 안 그러냐?”

 민구의 모습을 한 그것이 옆에 있던 것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물음에 태균의 모습을 한 그것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우린 그 때문에 너희를 쫓았어. 하지만 왜 우리를 거부하는 거지? 우린 너희야. 너희 속에 있는 또 다른 너희라고. 그래서 우리가 나타난 거야. 우린 너희가 되고 싶거든. 너희도 너희 자신이고 싶진 않잖아.”

 태균의 모습을 한 그것의 말에 둘은 예전을 떠올렸다. 자신들이 이것들을 볼 수 있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는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그들은 자신이 자신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막상 그렇게 말하니 뭐라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것들의 말대로 최근 혹은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미,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아.”

 태균이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자 그들 중 태균의 모습을 한 녀석이 반문했다.

 “싫다고?”
 “그래, 싫어!”

 그 말을 들은 둘은 작게 “할 수 없군.” 이라 말하며 주먹을 쥐며 태균과 민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선포 이렇게 선포했다.

 “힘으로라도 우린 너희가 되겠다!”

 그러고는 그것들은 순식간에 태균과 민구의 복부를 올려쳤다. 그리고 다리를 넘어뜨리면서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냉정하게 발로 마구 밟아댔다. 그런 뒤 그것들은 다시 한 번 제안했다. 그래도 안 되겠냐고 말이다. 그러자 태균과 민구는 서로의 몸을 부축하며 일어나서 항변했다.

 “그래도 싫어!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 데.”
 “그래, 우린 싫어.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런 뒤 그들은 그것들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서로가 뒤엉켜 싸웠다. 그렇게 싸우는 동안 옆에서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태균과 민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둘과 검은 그것들은 서로의 급소를 때리고 때리면서 서서히 지쳐갔다. 그리고 그렇게 기나긴 싸움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주 깊고 깊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지쳐가던 그들은 헐떡이며 서로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하지? 그만 사라져! 우리를 이대로 놔둬!”

 태균은 목으로 모든 힘을 집중 시키며 외쳤다. 그러자 그의 모습을 한 그것도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나 서로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모든 힘을 짜내 달려들었다. 태균과 민구는 자신들이 가장 약한 부위에 주먹질과 발질을 했고, 그것을 알고 있는 그것들도 역시 똑같이 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태균과 민구의 주먹질과 발질이 먼저 먹혀들었다.
 그것들은 태균과 민구의 공격에 맞은 부위를 손으로 잡으며 뒤로 넘어졌다. 마침내 길고 긴 싸움이 끝난 것이었다.
 그렇게 긴 싸움이 끝나자 태균과 민구의 몸에서 힘이 풀리더니,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몸이 늘어졌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서로를 쳐다본 뒤 큰소리로 동네가 떠나가라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그때 그들을 향해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민구의 모습을 한 그것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도 둘처럼 힘이 빠진 듯 해보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태균과 민구, 그 둘을 저주하듯 비웃었다.
 태균과 민구가 그 목소리를 따라 돌아보았을 땐 그들은 이미 서서히 모습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그들의 형체는 모래가 날려가듯 흩어져갔다.

 “이겼다고 좋아하지 마. 우린 너희 속에 있으니까. 너희가 또 자신이 아니고 싶을 때면 우린 너희의 앞에 나타날 거야. 우린 그런 존재들이니까. 절대 죽지 않는 불사신 같은 그런 존재.
 기대 되지 않아? 우리를 또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그리고 그때에는 너희의 친구들에게 있는 우리도 또 보게 되겠지. 크흐흑 정말 좋은 일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그것들은 한 줌의 모래처럼 바람에 날려 완전히 흩어져버렸다. 태균과 민구는 그들의 말을 곱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또다시 그들에게 쫓기는 일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균과 민구는 어쩌면 정말 힘들 일이 닥친다면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간만은 그런 걱정 없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가 온다면 이번처럼 잘 해내면 된다.
 그들은 그렇게 마음먹으며 힘 풀린 몸을 애써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잠들고 고요만이 남은 시간에 민구가 태균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만 돌아갈까 동료?”
 “그래, 돌아가자. 우린 동료니까.”

                                                                -끝-
 

창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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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2-22
너를 기다리면서

너를 기다리며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1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대피소 밖에는 검은 먹구름들이 파란하늘을 가리고 굵은 비들을 쏟아 부었다. 창문은 굵은 빗줄기에 부딪혀 흔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습기,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덜덜 떨었다. 이 악몽이 언제쯤 끝날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악몽은 꽤 오래갈 것 같았다. 내 오랜 친구가 이 악몽을 끝내기 위해서 이 안전한 대피소에서 위험한 저 밖으로 나갔는데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꽤 많은 목숨을 구했다. 혼자서, 18살의 나이로 군대조차도 못할 일을 혼자서 해냈다. 마치 만화속의 마법소녀나 슈퍼우먼처럼 말이다. 그런데 믿기지 않겠지만 그 친구는 정말로 그런 존재였다. 그 친구는 나와 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였다. 동성의 친구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 그래서 어릴 적에는 자주 서로의 집에서 잠을 자기까지 했었던 적까지 있었다. 그런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아니, 내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아니었다. 얼마 전 그 친구가 내게 자신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은 낌새가 있는 것 같아서 그 친구에게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머뭇거리면서 내게 답하기를 주저했다. 내가 대체 무엇이냐고 계속 되묻자, 하는 수 없다는 듯 그 친구는 내게 자신이 숨긴 것을 털어놓으며, 털어놓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친구의 고백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고백의 내용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그 친구에 대해서 웬만한 것은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친구가 밝힌 비밀은 이랬다. 최근 1년 사이 내가 사는 도시에서 괴생물들에 의한 기이한 테러들이 일어났는데, 그 테러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뉴스에서 보았던 그 테러를 해결한 사람은 우리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그 소녀가 한 복장이 마치 만화 속의 캐릭터가 입는 복장이었다. 마법소녀. 그때 소녀가 입었던 옷은 마법소녀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 분홍색의 조금 짧은 치마와 그 속의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누군가 보기에는 코스프레처럼 보이겠지만 코스프레는 아니었다. 만일 그것이 코스프레였다면 금방 옷이 찢어졌을 것이었다. 코스프레 소재는 아주 싼 면직물을 가지고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스컴에서는 그 소녀의 정체를 가지고 꽤 많은 논쟁이 일었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였다니 놀라 노자였다. 어쨌든 그렇게 자신의 비밀을 밝힌 그 친구에게 나는 농담하지 마라면서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거듭 그 친구는 내게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내게 자신의 파트너라면서 말하는 족제비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그 족제비는 그 친구가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내게 설명했는데, 그 이유도 헉 소리가 나올만한 어이없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랬다. 자신은 정령이고, 세계를 무

  • 창지자
  • 201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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