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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희망곡

  • 작성자 몽포르
  • 작성일 2010-12-05
  • 조회수 204

우리에겐 세 가지의 화두가 던져졌다. 섹스 담배 게임.

1) 섹스

짝짓기의 철이다. 갓 수능을 치룬 어린 수컷들은 그동안 여러 환경적인 제약 때문에 모니터 속의 금발 머리를 치렁하게 늘어뜨린 여자의 나체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었던 백일몽을 마침내 현실로 끄집어내려한다. 지겹게 반복되던 수음은 그들의 성욕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자신의 손바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자극제를 갈망하게 만들었고 그것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꿈꾸게 했다. A는 그런 부류의 수컷들 중의 하나이다.

A는 이미 오래 전에 총각딱지를 땠던 선구자들이 늘어놓는 음탕한 이야기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볼링 핀처럼 쉽게 넘어뜨릴 수 있고 애무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자신의 성기가 손바닥과의 씨름에서 해방되는 순간 귓전에서 들려오는 아리아의 선율에 관한 시적인 비유와 같은 잡담들을 새겨들으며 그 막연한 환상을 무럭무럭 키우게 된다.

그러나 열매는 쉬이 맺지 않는다. A와 그의 친구들은 92년생이라는 나이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술집과 모텔 언저리를 서성대지만 선구자들의 조언처럼 여자들은 결코 볼링 핀이 아니다. 진한 스킨십을 벌칙으로 정하고 소주병의 마개에 달라붙은 꽁지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시덥잖은 게임을 해봐도 막상 파장 분위기에 다다르면 모두가 언제 취했냐는 듯이 꽁무니를 뺀다.

A는 멀어져가는 택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히 담배를 피워문다. 그리고 여자들과 진한 스킨십을 나누는 동안 다시금 마음속에 환하게 밝혀진 성욕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와

수음을 한다. 이번에 모니터 속에선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린 한국여자가 질펀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잠시 후, 눈가에 한층 더 깊은 그림자가 패인 듯한 A는 휴지로 바닥을 훔치며 생각한다.

그런데 수능 성적표는 언제 나온담.

2) 담배

B는 방안에서 빈둥거리다가 문득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

“담배 한 개피로 시간의 길이를 잴 수 있다.”

그것은 할 일없는 인간이 할 일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속에서 나온 실없는 망상이 아니라, 뜻밖에도 굉장히 과학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는 명제라는 생각을 한다. B는 즉각 그 명제를 실험으로 증명하기 위해 서랍장 속에 숨겨둔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창문가로 다가가 불을 붙인다. 그리곤 곧장 핸드폰의 타이머를 맞춘다.

담배를 다 피우는데 정확히 2분 14초가 걸렸다. 뒤이어 B는 담배갑을 뒤적여 한 개피를 더 끄집어내 자로 필터 부분에서 끝까지의 길이를 재본다. 대략 3.5센티미터 정도. 언제나 담배를 필터 가까이까지 피우는 B의 습관을 고려할 때, 담배를 피우는 2분 14초 동안 대략 3.5센티미터 정도의 담뱃재가 타들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귀납하면 3분 14초는 결국 3.5센티미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욕조 속에 몸을 파묻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유레카!’를 외쳤다던 그리스의 철학자가 아르키메데스였던가 아리스토텔레스였던가. B는 한참동안 그 헷갈리는 이름에 대해서 고민해보지만 별 소득이 없다. 하여튼 간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지금의 심정이 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B는 놀라운 발견으로 들뜬 가슴을 쓸어내린다. 유레카!

잠시 후, B는 차분해진 마음으로 자신의 발견이 어떤 식으로 현실에서 응용될 수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만약 내가 비행기 추락으로 한 무인도에 떨어지게 됐다고 치자. 언제나 그런 류의 영화에서 그렇듯이 핸드폰은 바닷물 속에 빠져서 못 쓰게 됐고 역시나 마찬가지 이유로 시계도 멈춰버렸다. 그러므로 도무지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나무막대기를 햇빛에 비추어 그림자의 길이와 방향으로 시간을 쟀다고 하지만, B는 이과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써먹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하나다. 담배 한 개피로 시간의 길이를 재는 것. 자신의 발견을 수학자들이 공식화시킨다면 센티미터 당 몇 분이 흘렀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만 보자. 그런데 담배랑 라이터도 물에 빠졌을 텐데 쓸 수 있으려나? B는 예기지 못한 데서 맞닥뜨린 난관에 머리를 싸매다가 마침내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단, 담배랑 라이터는 방수여야 한다.

3)게임

A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깬 A는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어 든다. 불빛으로 번들거리는 액정을 확인해보니 B의 번호다.

“야, 한 가지만 물어보자.”

핸드폰을 귀에 가져가자마자 녀석의 상기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건너온다. 피곤하다. 어젯밤 너무 달렸다.

“넌 방수되는 담배랑 라이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병신 새끼야, 아침부터 뭔 개소리야. 끊어.”

철컥. A는 핸드폰을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친다. 그리고는 이불을 턱 끝까지 밀어올리고 다시 잠을 청하려 애쓴다. 그런데 닫힌 눈꺼풀 사이에 엉겨 붙은 눈곱이 영 신경 쓰인다. 갈증으로 목이 탄다. 머릿속이 환풍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덜커덕거린다. 꾸르륵. 누군가가 뒤늦게 해독을 하느라 헐떡이는 간을 움켜쥐고 펌프질을 한다.

잠에서 깨는 게 아니었어. 마취되어있던 고통들이 몸을 뒤틀며 A를 덮쳐온다.

눈을 비비며 부엌을 가로질러가 정수기에서 물을 한잔 따라 마신 A는 식탁에 비스듬히 걸터앉는다. 몸에 수분이 공급되니 조금은 숨통이 트인 듯한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하루는 또 뭐하지.

그것에 대해서 떠올리니 문득 머릿속이 어두컴컴해진다. 그 때 갑자기 바지춤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A는 주머니 속을 뒤적여 핸드폰을 집어 든다. 또 B다. 어지간히 할 짓 없는 놈이다. 나처럼.

“여보세요.”

“야, 끊지 말고 들어. 유레카 한 게, 아르키메데스냐 아리스토텔레스냐?”

문과생인 A는 잠깐 동안 윤리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두서없이 떠올리다가 대답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래? 아, 다행이다. 생각이 안 나서 얼마나 꺼림직 했는데. 그건 그렇고 너 지금 뭐하냐? 집에서 괜히 뺑이치지 말고 같이 피시방이나 가자.”

철컥. 별 수 없다. 가야지, 피시방.

그렇게 욕조 속에서 몸을 일으키고 유레카를 외친 그리스인의 이름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굳게 믿고 있는 A와 B는 피시방으로 간다. 가는 중이다.

4)결론

그래서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몽포르
몽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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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포르
  • 201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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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포르
  • 201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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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흐흐흐 잘 읽히는 것 같아요. 주변 사물에 대한 발상들이 신선하네요

    • 2010-12-21 19:35:2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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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역시 블랙피에로님 좋은 결과 있을거에요 전공이 뭔지 내심 궁금함 짧은 소품이지만 님만의 뚜렷한 시각 조탁 능력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가독성 그리고, 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진정성 올만에 {시학} 이나 읽어야겠다. 사족 3분 14초 오타 아닌데 어슬픈 지적 원~주~율~ 히히히 웃기다 글 잘 쓰는 분이 수학에 논리까지 아 샘난다.

    • 2010-12-06 20:45:2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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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으악ㅋㅋㅋ 재밌게 읽었습니다. 방수되는 라이터와 담배를 어떻게 생각하냐-에서 대폭소. 수능 끝나면 이렇게들 사나요..부럽다. 아 그리고 담배랑 2분 14초에서 오타 하나 있어요. 3분 14초.

    • 2010-12-06 01:08: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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