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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작성자 에포
  • 작성일 2011-01-02
  • 조회수 362

[단편] 시인
 
  1. 매치광이
 
  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그 때문에 가난해도 웃음 지으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부는 행복했었습니다. 시인은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나날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세계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시인을 배신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지요. 아내의 육체는 차가운 고깃덩이가 되어 땅속에 안치되었습니다. 시인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땅을 파려 했지만, 그의 시도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인해 번번이 좌절됐어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세계에게 매수당한 겁니까?'
  세계는 시인을 고립시켜 갔고 시인은 점점 피폐해져 갔지요. 그는 더이상 시를 노래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를 시인이라 부르지 않았어요. 그를 불러야 할 상황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를 언급할 때엔 '매치광이'라고 불렀습니다.
  매치광이는 어느 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없다면 나도 없다. 비익조는 홀로 날 수 없다.'
  매치광이는 평소에는 독약이지만 괴로울 때는 약이라 회자되는 알코올을 잔뜩 들이켰습니다. 투약하고 있는 매치광이 주변을 세계가 돕니다. 돌고 돌고 계속해서 돌았어요. 매치광이는 이놈이 또 말썽이구나, 생각했어요. 핑핑 도는 세계에 매치광이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거뭇하게 침잠된 세계 속에서 매치광이는 걸쭉하게 욕설을 나열했습니다. 더이상 시인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매치광이는 '같은'이 많이 들어간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개 같은, 소 같은, 말 같은, 뭐 같은……. 하지만, 세계는 반응하지 않았어요.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죠. 매치광이는 제풀에 지쳐 방향성 없는 욕설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매치광이는 그 울음이 누구의 것인지 짐작해보려 했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얼굴은 아내의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에게 붙잡힌 아내가 그곳에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세계? 그렇습니다. 세계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매치광이의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계가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치광이는 그것을 고민하다가 술의 영원한 친구인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였구요.
  다음 날, 매치광이는 술의 또 다른 두 친구, 두통과 망각과 함께 의식의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매치광이는 자신이 죽을 정도로 술을 마셨음에도 죽지 않았다는 데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본래 술은 죽음보다는 두통을 선물하는 마약이니까요. 술이 깰 때까지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중천을 달리고 있을 때쯤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을 사람들은 매치광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들 중 그 누구도 매치광이가 여행을 떠났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구요. 매치광이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별난 사람이 있고, 별난 매치광이도 있을 거에요. 별난 매치광이는 여행길에 올랐답니다.
 
  2. 사내
 
  매치광이는 정자에 앉아 숨을 돌렸습니다. 그는 세계가 앗아간 아내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말하곤 했었지요.
  '언젠가 세계를 보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아내는 세계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겁니다. 매치광이가 여행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매치광이는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옆에 드러누워 자는 사내를 발견했습니다. 사내는 잠꼬대를 했습니다.
  "자네는 누군가."
  보통사람 같았으면 무시했을 그 말에 매치광이는 대답했습니다. 매치광이니까요.
  "사람들은 저를 매치광이라 부릅니다."
  당연하게도 사내에게서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한 매치광이는 이어서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왜 주무시고 계신가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내가 그 말에 대답한 것입니다.
  "나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어."
  잠꼬대였기에 말이 더듬더듬 들렸습니다. 일반인이라면 답답해했을 정도였지만, 매치광이는 참을성이 있었습니다. 매치광이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신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한참 후에 사내가 잠꼬대를 했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깨어남'이라네. 깨어나는 법을 잃어버려서 잠을 자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어."
  사내는 마치 악몽을 꾸듯이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그의 잠꼬대는 계속되었습니다.
  "새벽과 아침을 가지고 있는 도깨비가 그것을 가져갔네."
  매치광이는 도꺠비에게 부탁해보겠노라고 말한 뒤 일어났습니다. 그는 동쪽의 계곡으로 터벅터벅 발을 옮겼습니다. 매치광이의 발걸음입니다.
 
  3. 도깨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즈음 매치광이는 발을 멈추었습니다. 깜짝 놀란 개구리가 첨벙 소리를 내며 침잠했습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계곡이었습니다. 매치광이는 한 손을 이마에 얹어 따가운 햇빛을 막았습니다. 그는 소리높여 "도깨비 님! 도깨비 님!" 하고 불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왜 나를 찾는 거야?"
  매치광이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하나, 그 계곡엔 매치광이 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매치광이는 두리번거리며 말했어요.
  "도깨비 님? 어디 계시나요."
  곧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난 여기 있어. 넌 누구야?'
  "사람들은 저를 매치광이라 부릅니다."
  "날 찾는 이유가 뭐야?"
  매치광이는 도깨비의 모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정자에서 잠을 자는 사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 그 아저씨 말이야? 알겠어. 깨어남은 얼마든지 돌려줄 수 있어. 그렇지만, 대신에 내 부탁도 들어줘야 해."
  매치광이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모습을 잃어버렸어. 내 '모습'을 찾아주기 전까진 깨어남도 돌려줄 수 없어."
  매치광이는 모습을 어떻게 찾느냐고 질문하려 했지만, 도깨비는 이미 사라진 후였습니다. 생각해보니 해가 하늘의 가운데에 떠 있었습니다. 새벽과 아침을 가지고 있는 도꺠비는 새벽과 아침을 따라가야 합니다. 지금은 점심입니다.
 
  4. 화가
 
  매치광이는 어떤 마을의 어귀를 걷고 있었어요. 식당의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로라면 이 근처에 화가가 있을 겁니다. 곧 매치광이는 허름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정말로 사람이 사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낡았답니다. 지금이라도 지쳐 쓰러질듯한 문을 밀고 매치광이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매치광이는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망설임 없이 발을 놀렸습니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촛불 하나만이 빛나는 방에 들어선 매치광이는 벅벅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벅벅.
  "누구요?"
  벅벅거리는 소리에 집중하던 매치광이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됐소. 그보다 어인 일이요?"
  매치광이는 잠을 자는 사내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모습이 보이지 않는 도깨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벅벅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도깨비의 몸을 그려주었으면 합니다."
  잠시 뚝, 하고 벅벅거림이 멈추었다가 재개되었습니다.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초 몇 개에 불을 더 붙였습니다. 그러자 방안이 꽤 밝아졌습니다. 매치광이는, 의자에 앉아서 도화지를 긁고 있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남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화가가 맞소. 물론 도깨비도 그려줄 수 있소. 하지만, 내겐 붓이 없단 말이오!"
  화가는 도화지를 주욱 찢었습니다. 매치광이는 그제야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언젠가 그는 다른 화가의 집으로 갈 일이 있었어요. 지독한 기름 냄새를 아직도 기억해요. 그런데 이 화가의 집엔 그런 냄새가 없었어요. 왜냐구요? 화가에겐 붓이 없으니 그림도 못 그리기 때문이죠.
  화가가 말했습니다.
  "그냥 붓은 안 돼. 살아 있는 걸 그리려면 좀 더 특별한 붓이 필요해. 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렸단 말이오!"
  매치광이는 그 특별한 붓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설인의 털로 다듬은 붓이오. 털 한 움큼이면 충분할 텐데."
  매치광이는 자신이 가져다주겠노라 대답했습니다. 매치광이가 집을 나서려는 순간, 화가가 툭 던지듯 물었습니다.
  "이름이 뭐요?"
  매치광이도 툭 던지듯 대답했지요.
  "사람들은 저를 매치광이라 부른답니다."
 
  5. 설인
 
  매치광이는 눈이 오지 않는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파릇파릇 돋은 새싹들이 길을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치광이는 그곳이 설원임을 의심치 않았어요. 매치광이니까요. 매치광이는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설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걷고 걷고 또 걷고…파르르!
  무언가 떨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매치광이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용의 콧구멍처럼 생긴 동굴에서 또 파르르 하고 소리가 들렸습니다. 매치광이가 동굴에 가까이 다가서자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가오지 마!"
  매치광이는 멈추었어요.
  "넌 누구야. 용건만 말해."
  용건만 말하라는 건지 정체도 같이 밝히라는 건지.
  "사람들은 저를 매치광이라 부릅니다. 혹시 이 근처에 설인을 보지 못하셨는지요?"
  파르르!
  매치광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뭔가가 떨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서, 설인은 왜 찾아? 여긴 설원이 아니야! 설인은 설원이 아니면 살 수 없어. 마, 맞아. 그래서 설인은 죽은 거야. 난 죽은 거라고!"
  목소리는 자신이 설인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했고, 매치광이는 그걸 못 알아채는 실수를 했습니다. 매치광이는 그렇습니까, 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근데 설인은 왜 찾아?"
  매치광이는 다시 발길을 돌렸습니다.
  "부탁드릴 것이 있거든요."
  "무슨 부탁?"
  매치광이는 깨어남을 잃은 사내, 모습을 잃은 도깨비, 붓을 잃은 화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설인에게 털 한 움큼을 얻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매치광이가 다시 발길을 돌리자고 생각했을 즈음, 동굴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파르르 하는 소리가 아니라 쿵쿵거리는 소리였습니다. 매치광이는 그것이 발소리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윽고 거대한 물체가 나타났습니다. 거대한 물체가 동굴의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난 설인이야. 그렇지만 털을 줄 수 없어. 왜냐고?"
  설인에게는 털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빌어먹게 나쁜 날씨가 날 벌거숭이로 만들었거든! 억울하냐? 그럼 이곳을 설원으로 만들어 보던가!"
  그리고 파르르! 하고 몸을 부풀렸다가 원래대로 만든 뒤 힘없이 동굴로 돌아섰습니다. 매치광이는 그 등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뒤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매치광이의 눈에는 설인이 비치지 않았습니다. 몸을 움찔거리는 그 거대한 등을 말이지요.
 
  6. 여왕
 
  매치광이는 곧장 근처에 있는 마을에 찾아갔어요. 마을 사람들은 행동하는 것이 어색해 보였어요. 아마도 추웠던 날씨가 갑작스레 풀리자 적응할 수 없던 거겠죠. 하지만, 매치광이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매치광이니까요. 매치광이는 마을 중심에 있는 신전을 찾았습니다. 곧 제사장이 나와 그를 반겼지요.
  자초지종을 들은 제사장은 계절의 여왕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제사장의 몸에 여왕의 영이 빙의되었어요.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저를 매치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대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매치광이는 깨어남을 잃은 사내, 모습을 잃은 도깨비, 붓 잃은 화가, 설원을 잃은 설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여왕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싶더니 한숨을 쉬고 말했습니다.
  "나도 그대를 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네만, 달빛을 비추는 거울이 사라져버리는 통에 겨울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되었네."
  "어떻게 해야 거울을 찾을 수 있을까요?"
  "거울은 찾을 수 없을 것이네. 하나, 다른 방법이 있지. 거울을 만드는 거야."
  "그 재료는 무엇인가요?"
  "인어의 비늘이네."
  매치광이는 몸을 돌려 신전을 나왔어요.
 
  7. 인어
 
  인어의 비늘은 사실상 구할 수 없었어요. 인어가 사는 곳이 깊은 심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매치광이는 무작정 인어를 찾아다녔습니다.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해묵은 말 때문이 아니라, 매치광이니까요. 과연, 매치광이는 인어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해변의 바위에 앉아 있는 인어는 우울해 보였습니다. 매치광이가 다가가 말을 걸었어요.
  "무슨 일이신가요."
  "전… 인어에요. 친구들과 놀러 나왔다가 바다폭풍에 휩싸여서 이곳까지 떠내려왔어요. 그런데…흑. 헤엄을 잃었어요."
  인어는 기어코 울기 시작했습니다. 흑. 흑. 흑. 매치광이는 인어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습니다.
  "제가 헤엄을 찾아 드릴게요. 대신 비늘 하나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인어는 울고 있던 얼굴에 의아함을 덧칠하며 매치광이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누군데요?"
  "사람들은 저를 매치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서 매치광이는 깨어남을 잃은 사내, 모습을 잃은 도깨비, 붓을 잃은 화가, 설원을 잃은 설인, 거울을 잃은 여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할 말을 마친 매치광이는 그대로 바다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인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뭐 하는 거에요?"
  매치광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용왕을 뵈러갑니다."
  발목에 닿던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매치광이의 머리까지 집어삼켰습니다.
  세계는 매치광이를 빼앗았습니다.
 
  8. 용왕
 
  매치광이는 죽었습니다. 거대한 바다가 그의 목을 졸라맸습니다. 아무리 매치광이라도 살 가능성은 0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치광이는 눈을 떴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눈으로 본 그곳이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기 때문이죠. 매치광이의 눈에 띈 것은 황금으로 된 바닥, 벽, 기둥… 창문의 물고기. 그렇습니다! 매치광이는 지금 용궁에 와 있는 겁니다. 매치광이는 용왕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하지만, 수시간이 지나도 기나긴 복도 외에 볼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매치광이는 지쳤기 때문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용왕을 불렀습니다.
  "용왕 님! 용왕 님!"
  매치광이는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매치광이의 주변 풍경은 뒤틀려 있었습니다. 높은 계단, 어좌, 그리고 그 옆에 침대가 보였습니다. 어좌에는 용왕이 앉아 있었고 침대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습니다. 매치광이가 얼이 빠진 채로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용왕이 말을 건넸습니다.
  "그대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가?"
  "사람들은 저를 매치광이라 부릅니다. 제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매치광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용왕은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대의 부탁은 잘 알았다. 인어의 헤엄을 줄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그 전에 이 아이의 병을 낫게 하라."
  용왕이 가리킨 곳은 침대였습니다, 여인이 누워있는.
  매치광이가 웅얼거렸습니다.
  "……어떻게?"
 
  9.□□
 
  그는 인어에게 말했습니다. "헤엄입니다." 인어는 자신의 몸에 비늘을 때서 그에게 건네 준 뒤 바다에 풍덩 하고 빠졌습니다. 그대로 돌아갔구나, 하고 생각한 그는 마을을 향해 발길을 돌리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인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습니다. "감사해요! 매치광이 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는 여왕에게 말했습니다. "인어의 비늘입니다." 여왕은 비늘을 받고는 살포시 웃었습니다. "이제 이곳의 날씨는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는 마주 웃으며 말했습니다. "앞으론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리하지. 감사를 표하네, 매치광이." "아닙니다. 저는"
 
  동굴 앞에서 설인은 거친 콧김을 뿜어냈습니다. 설인의 몸엔 털이 잔뜩 나 있어 원래의 체형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설인은 거칠게 웃으며 털을 건넸습니다. "고마워, 매치광이." 그는 추운 듯이 떨며 답했습니다. "아니오, 저는"
 
  화가는 순식간에 그림을 휘갈기고는 그에게 넘겼습니다. "이 그림을 찢으면 도깨비에게 달라붙어 몸이 될 것이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감사하네, 매치광이." 그는 그림을 품속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가가 일러준 대로 그림을 찢었습니다. 그러자 그림은 산산조각이 나서 퍼졌다가 다시 모여들어 한 형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새벽과 아침을 가지고 있는 도깨비입니다. 도깨비는 쾌활히 웃었습니다. "땡큐, 매치광." "아닙니다. 저는"
 
  그는 정자를 발견하곤 힘차게 뛰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사내가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사내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깨어날 시간입니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내는 두리번거리다가 그가 있음을 눈치채고 고마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매치광이 씨, 고맙소.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지……" "하하하, 괜찮습니다. 그보다 저는"
 
  그는 용궁에서 있던 일을 되새기며 발이 움직이는 곳을 향해 걸었습니다.
 
  "……어떻게?"
  용왕은 심드렁하게 말했습니다.
  "시를 들려주게."
  매치광이는 당황했습니다. 용궁에 시인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매치광이를 보다 못한 용왕이 말했어요.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저를 보고……"
  용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습니다.
  "타인이 자넬 어떻게 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대는 그대가 누군지 가장 잘 알고 있네. 단지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지. 다시 한번 묻지, 그대는 누구인가?"
  매치광이는 떨었습니다. 분명히 자신은 매치광이인데 매치광이가 아니라니? 혼란스러워하는 매치광이에게 용왕이 힌트를 주었어요. "그대의 여정을 시로 표현해 보아라." 매치광이는 숨을 가다듬고 노래하기 시작했죠. 단아한 음색.
  매치광이는 용궁에 있습니다. 헤엄을 잃어버린 인어를 위해.
  매치광이는 해변에 있습니다. 거울을 잃어버린 여왕을 위해.
  매치광이는 신전에 있습니다. 설원을 잃어버린 설인을 위해.
  매치광이는 설원에 있습니다. 붓을 잃어버린 화가를 위해.
  매치광이는 화가의 집에 있습니다. 모습을 잃어버린 도깨비를 위해.
  매치광이는 새벽에 있습니다. 깨어남을 잃어버린 사내를 위해.
  매치광이는 여행을 합니다. 소중한 것들은 잃어버린 사람들.
  사람들은 그를 매치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시인."
  시인의 뺨을 타고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집니다. 그가 바로 시인입니다. 창백했던 침대 여인의 얼굴빛이 고운 살구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용왕은 그것을 지켜보며 말했습니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그는 깨어남을 얻은 사내와 헤어진 뒤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한 마을이 나왔습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발걸음입니다. 곧 그는 한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를 보고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그가 대답하려 합니다. "저는" 여인은 그가 말을 맺기도 전에 그를 알아보고 그에게 달려들어 꼭 껴안았습니다. 그도 이제 그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입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그의 행복한 집입니다.

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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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포
  • 2011-04-03
공백

  어떤 책이 있다. 그 책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언제, 또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기껏해야 그 책에 대해 알려진 바는 발견된 곳이 지방의 한 도서관이라는 사실 뿐이다. 만일 어떤 시인이 그 책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 책을 '도서관이 꾸는 꿈'이라 정의할지도 모르겠다.  그 책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수험생 A다. A는 도서관의 열람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본관에 들어섰다.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인 A가 그 많은, 한가해 보이는 책 사이에서 그 책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A는 제목도, 대출용 바코드도 붙어 있지 않은 그 새까만 책에 눈길을 빼앗겼다. A는 마법에라도 홀린 듯이 그 책을 가지고 열람실로 돌아왔다. A는 책을 펼쳤다. 그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고, A는 실망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망할 새도 없이 책은 A를 집어삼켜 먹어버렸다. 책은 A를 소화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책은 B에게 주어졌다. B는 봄을 맞아 대청소를 하고 있던 주부였다. 곳곳에 쌓여 있는 물건을 정리하던 도중 그 책을 발견한 것이다. B는 그 책을 펼쳐 보았다. 분명히 최초로 발견되었을 때엔 백지였던 페이지에, 몇 자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B는 매혹이라도 된 듯 그 짧은 글귀를 읽어내려갔다. 분량이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B는 그 글을 전부 읽었고, 무언가 깨달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깨달을 새도 없이 책은 B를 뜯어 먹어버렸다.  C와 D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연인이다. 둘은 심령현상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중에는 괴담 같은 서브컬쳐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책에 대한 괴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괴담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래된 도서관의 수많은 책장의 위에서부터 넷째 줄을 유심히 살펴보면 도서관 소유가 아닌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을 전부 읽게 되면 잡아먹히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 둘이 도서관에 온 이유가 그 때문인 것은 아니었으나, 퍼뜩 든 생각에 괴담을 실행키로 했다. 한 권, 두 권… 그리고 괴담 속의 그 책을 찾아낸 C는 기쁜 비명을 질렀다. C와 D는 잠깐 호들갑을 떨었고 기어코 사서에게 주의를 받았다. C와 D는 공원을 찾았다. 그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D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C는 근처 벤치에 앉았다. 심심해진 C는 D가 오기 전에 책을 읽을 심산으로 그 검정을 펼쳐들었다. 첫 줄을 읽은 순간 C는 몸이 굳었다. C는 생각했다. 사람 먹는 책의 괴담에서 책의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무서운 이야기가 적혀 있으려니 했었다. 하나, 책에 쓰여있는 글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C는 굳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눈은 계속해서 글씨를 읽어내려갔다. 글을 조금이라도 읽으면 끝까지 읽게 된다. 그것이 괴담의 내용이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C는 괴담의 전체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고, 책은

  • 에포
  • 2011-01-01
광대

  광대   "모든 것을 위한 하나보다 하나를 위한 하나가 더 값지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연인은 영웅보다 위대하다." ─한 이야기꾼의 말.   「도시」는 지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곳에 세워졌다. 그도 그럴 게 도시라는 것이 인구이동과 물자유통이 원활한 곳에 지어지기 마련이잖는가? 그러나 그 「도시」는 해안에 면해있는데다 하나밖에 없는 육로는 산맥이다. 그리고 그 산맥이란 것이 보릿고개처럼 험난하여 보릿산맥이라 불리므로 도시의 유입·출자들은 일반적으로 해양교통을 이용한다. 이처럼 고립된 지형임에도 마을이 세워지고 도시로 부흥하게 된 까닭은 한 표류자가 발견한 금 더미 덕분이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 금광은 고갈되었지만, 여전히 각종 광물을 캘 수 있고, 또 그럴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비대해진 도시가 이른 시일 내로 해체될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을 반증하기라도 하듯이 도시의 인구는 근 일 년간 꾸준히 증가했다. 바로 안정성 때문이다.  현 북부에서 일어난 내륙전쟁의 여파를 받지 않는 도시 중 하나다. 물자출입이 많아 약탈대상이 되어야 함은 자명하나, 보릿산맥을 대규모 병력으로 넘으려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일부 모험심이 강한 여행자들도 강행을 꺼린다는 것이 중론이고, 실종된 이도 몇이나 되는 것 같다. 그런 험난한 산맥을 한 소년과 소녀가 기어가고 있었다.  나이보다 조숙한 얼굴과 큰 키를 가진 소년의 이름은 몰로라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소녀의 이름은 넬이다. 몰로는 왼팔이 없고 넬은 한쪽 눈이 멀었다. 둘 다 전쟁터에서 생긴 상처다.   '도시로 가!'  몰로의 어머니는 불길 속에서 다가오는 아들을 향해 외쳤다. 「도시」로 가라고. 그곳은 안전할 거라고. 몰로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화난 채로 고개를 돌렸고 곧 어머니의 비명이 들렸다. 아버지는 강제징병 되어 제멋대로 죽었으니, 이제 몰로는 말 그대로 전쟁고아가 되었다. 몰로는 쉴 새 없이 달렸다. 울음소리, 절망에 찬 외침, 피가 흩어지는 소리, 화약 냄새, 그것을 지우는 피 냄새, 옅게 맡아지는 자신의 토사물 냄새…… 어느새인가 몰로는 마을 산 어귀에 있었다. 곁에는 자신의 소꿉친구가 있었다. 넬이 있었다. 넬 '밖에' 없었다. 넬은 울고 있었다. 몰로도 간만에 울음을 지었다.  둘은 도시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직 침략받지 않은 이웃마을에서 지도와 나침반을 얻었다. 몰로는 팔의 절단면을 소독했고, 넬은 눈을 포함하여 머리를 붕대로 감았다.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했지만,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둘은 동정심에 호소하여 약간의 식량과 물을 얻고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몇 번의 밤을 넘어 「도시」가 근처에 있을 지역까지 도달했다. 배를 타야 했다. 그러나 뱃삯으로 줄 화폐나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그 둘은 아무도 하지 않을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 둘은 보릿산맥을 넘고 있었다. 몰로는 넬에게, 넬은 몰로에게 의지하면서.&nb

  • 에포
  • 201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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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우와 이런 동화같은 얘기 좋아요 ㅜ 재밋게 읽엇어요

    • 2011-01-14 17:59: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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