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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 작성자 오설탕
  • 작성일 2011-01-11
  • 조회수 258

윤지는 안경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력이 굉장히 나빴지만 외관상 우둔해 보인다고 생각해 안경을 쓰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렌즈를 착용했다. 그러나 최근 그마저도 분실해, 반 장님 꼴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책상에 안경이 놓여있었다.

 

빨간색이 선명한 예쁜 안경테, 번쩍거리는 안경알. 별다른 화려함이 없는, 단순한 외형의 안경이었지만 윤지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것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내달렸다. 윤지의 손은 이미 안경을 붙잡고 있었고, 접혀있는 안경다리를 펴자 안경의 음성이 귓가에 맴도는 듯 했다. 어서 나를 써! 안경이 말했다. 군중의 함성처럼 귓가에 둥둥 울리는 안경의 말에 그녀는 안경다리를 귀 뒤에 걸쳤다. 마치 원래 그녀의 안경이었던 양 딱 맞았다. 그리고 시야가 탁 트여, 아주 잘 보였다. 이럴 수가. 쉬는 시간에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보였다. 흐림도 잔상도 없었다. 안경을 쓰지 않는 궁극적인 이유인 외관 같은 것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와, 윤지 안경 예쁘다.”

“정말?”

“잘 어울린다, 야.”

 

안경이 주인을 찾아왔다는 망상에 휘말려, 친구들의 진심어린 칭찬에 휘말린 윤지는 기분 좋게 웃었다. 흘러내린 안경의 한쪽 끝을 올리니, 자신이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유능한 비서가 된 것 같았다. 수업을 듣는 태도도 확연히 좋아졌다. 꼿꼿이 편 허리, 부지런히 필기하는 손, 칠판을 응시하는 곧은 시선까지. 누가 보더라도 모범생 그 자체다. 수업이 끝나면서 선생님은,

“양윤지, 태도 아주 좋아졌구나.”하고 칭찬까지 남기셨다. 윤지의 기분은 태어난 이래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안경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안경을 썼을 텐데.

 

그러나 그 기분도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면서부터 급격히 저조해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며 의지를 굳힌 지 십분도 채 안 되어 그녀는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감독선생님의 불호령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이번에는 안경이 문제였다.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올리는 것이 너무 귀찮아진 것이다. 겨우 손을 움직여 안경을 눈가로 올리는 간단한 행동일 뿐인데도 ‘안경을 올리자’라고 생각하면 팔이 움직이질 않고 지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윤지는 책상 모서리에 얼굴을 대고 간신히 안경을 올렸다. 다시 흘러내릴 것 같다. 그녀는 안경잡이인 짝꿍에게서 안경닦이를 빌려, ‘안경을 닦자’라고 생각하며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닦고 난 후에는 책상 위에 놔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입김을 불어가며 안경을 정성껏 닦아낸 후에는 다시 안경이 쓰고 싶어진다. 안 쓰고는 못 배길 충동에 안경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것에 따라 안경을 쓰면 콧등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는 안경을 올리기가 귀찮아지는, 주체할 수 없는 행동의 반복에 윤지는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안경의 괴롭힘은 수면시간까지 이어졌다. 귀가 후 옷을 갈아입은 윤지는 하지 못한 공부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안경은 자꾸 흘러내렸고, 여전히 올릴래야 올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잠을 자려 하는데, 이제는 안경을 벗는 것이 귀찮아져 버렸다. 안돼, 그녀는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러나 몸은 이미 저절로 침대에 눕기 시작했고, 윤지는 안경을 쓴 채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윤지는 미간의 고통에 눈을 떴다. 안경받침이 코를 눌러 벌겋게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안경을 벗을 수가 없었다. 안경은 역시 쓸모없군, 윤지는 나지막히 욕지거리를 섞어 안경을 비난했다.

쉬는 토요일이지만 시험기간이다. 도서관에 가야한다. 집에 있으면 십중팔구 컴퓨터에 붙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 눈에 선했다. 윤지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모자를 눌러썼다.

 

이른 아침의 도서관은 사람이 적어서 걷는 것만으로도 소음이 되는 묵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윤지는 창가 근처에 앉아 가방을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그리고 책을 꺼내려 몸을 돌리려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허리에 석고를 발라둔 것 같았다. 왜. 그녀의 머릿속엔 ‘왜’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 몸을 제 멋대로 쓸 수 없다니,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든 일어나보려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몸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마치 콧등에 얹어져있는 안경이 몸을 아래로 눌러 내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의자에서 툭 떨어져 책상 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 것이다. 자세를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흡사 몸을 일으키는 행동이 귀찮은 것처럼 여겨졌다. 허리가 의자바닥에 닿고, 무릎이 꺾이고, 목이 의자 등받이에 걸렸음에도 윤지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이젠 안돼. 윤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의 몸은 책상 밑으로 흘러내려 사라져버렸다. 책상 위에는 빨간색이 예쁜 안경만이 남아있었다.

 

볓 분 후, 도서관 안은 사람들의 활기로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 사이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아, 예쁜 안경이네.”

빨간색이 선명한 예쁜 안경테, 번쩍거리는 안경알. 별다른 화려함이 없는, 단순한 외형의 안경에 홀린 목소리가.

오설탕
오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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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설탕
  • 201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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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꺄악---- 완전 맘에 들어요.. 호러물과 일반 소설의 중간..쯤 되는....>_< 물론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게 이런 소설의 특징이지만...ㅠ 그래도 자신의 문체로 독특함을 살린다면 확실하게!! 좋은 글을 쓰실 수 있을 거 같애요!!

    • 2011-02-07 13:36:3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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