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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

  • 작성자 윤영
  • 작성일 2011-04-16
  • 조회수 91

“야 지금 내 말 듣냐?”

머리라는 동굴 속에서 천장에 아슬아슬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중력에 지고 떨어져 톡톡 물 표면과 만나는 앙증스런 소리를 낸다. 톡 톡. 머리에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물방울이 떨어진 바로 그 지점. 머리 위 정확히 정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간 느낌이다. 이 부분부터 소용돌이처럼 통증이 퍼진다.

내 모습이 잠깐 떠오른다. 눈높이에서 시선을 30내리깐 채로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뒤로 후진하는 땅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눈. 눈동자는 어딘지 반짝이는 검은색이 아니라 담담한 검은색이다.

장르가 코메디인 영화를 귀마개 끼고 보는 느낌.

“야, 오늘 윤리한테 맞은 거 잊어버려! 나처럼 단순하게 잊어라! 진짜.”

“ ··· ”

‘톡 톡’ 앙증맞은 소리가 얄밉다. 연약한 정수리로 치밀하게 파고드는 이 귀여운 물방울이 토 나올 정도로 싫다.

“야, 또 내 말 무시 하냐? 저번에 알았다며. 옆에 사람 있을 때 혼자 생각하는 지 짓 안하겠다며, 진짜. 내가 저번엔 바로 화 풀었는데 이번엔 그냥 안 푼다.”

“뭐가?”

“뭐가? 뭐가? 아 즐거운 하교 길에 이게 뭐냐..네 친구 배찬수가 화났다고···.”

아, 회색 아스팔트 땅이 빙글빙글 돌면서 멍한 나를 비웃는다. 뒷목이 찌릿찌릿하다.

“하...... 미안한데, 여기 팔 좀 잡아주라.”

“네가 그런다고 화 풀 거 같냐?”

수학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산 속 수련회장까지 1km남기고 산 중간에서, 못의 표면처럼 빙글빙글 깎아놓은 도로 길을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앞좌석 뒤에 붙어있는 토 나오는 손잡이를 손으로 꾹 잡고 식은 땀 흘리며 버스 바닥에만 꼭 눈을 고정시켜 놓은 기분이다.

“머리 아파.”

“뭐야. 너 진짜 아픈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집까지 오늘 내에 못 갈 것 같다. 이제는 짜릿한 통증이 뒷목을 타고 올라와 눈이 찌릿하다.

“어떻게 된 거야 진짜. 걷는 거 멈춰봐. 너 쓰러질 거 같애.. 근데 오늘 집에 빨리 가야 되 는데. 6시까지 고사모 모임 가야 되는데 진짜. 어쩌냐. 폰 줘봐. 니네 엄마한테 전화하게.”

찬수가 비좁은 내 교복 오른쪽 주머니에 두툼한 두 손가락을 넣고 목표물을 집어서 겨우 빼낸다. 핸드폰이 사라진 빈자리가 아프다.

“어 왔다냐. 30분만 갔다온다이.”

저 30분이 사실은 2시간 반 정도겠지.

“엄마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잘 보고 있어이. 근디 니 몸 아픈디 괜한 거 맡기는 거 아닌가 모르것네. 암튼 여기서 고기에 대하여 생각 좀 하고 있어봐. 네가 마음을 다잡아야 할 거 아니여.”

엄마의 구릿빛 이마에 인내천의 작대기 세 개가 아주잠깐 새겨진다. 마음을 다잡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문득 살 껍질이 벗겨진 돼지가 피터 팬 속 악당 후크선장의 갈고리처럼 생긴 차갑고 냉정한 물건에 꽂혀있는 데에 시선이 간다. 멍하니 본다. 아니 ‘멍하니’라면 눈뿐만 아니라 생각도 고정시키는 거겠지. 나는 지금 생각은 움직이고 있으니까 ‘멍하니’는 아니다. 그 때 문 위에 걸려있던 금색 종에서 띠링 소리가 난다. 문은 이미 열렸고 이제 이 공간에 어떤 기다란 물체가 들어 올 거다. lay laid laid. 생각 그만

“오셨어? 뭐 사시려구.”

툭툭 말을 내뱉는 엄마의 말투. 말투와 다르게 엄마의 얼굴은 태양의 총애를 받는 해바라기처럼 환하겠지. ‘어느 정육점에 갈까’ 고심하다가 끝내 우리 정육점으로 발길을 옮기는 손님. 엄마는 환한 미소로 답하고 있지만, 말투로 보아 저 환한 건 가식이다. 어쩌면 해바라기는 다른 곳을 비출 수도 있었던 태양에게 속으론 못마땅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내색을 보이면 왕 같은 존재의 심기를 건드려 다시는 빛을 받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니 어린 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양을 바라보는 걸 수도 있다. 못마땅한 마음을 속으로만 삭히면서. 그렇게 하얗고 보드라웠던 뿌리는 오랫동안 도시공기에 노출되어 있었던 종이처럼 거무스름한 주황빛으로 변해가고, 질기기는 양 끝을 잡아당겨 봐도 좀처럼 안 끊어질 듯 해지고. 또 그렇게 징그럽게······.

“아야, 난 간다.”

엄마 눈을 못 마주치겠다.

“저기요 안창살 100g에 얼마에요?”

“저기 뒤에 거울 옆에 가격표 붙어있어요.”

성인여자다. 양 관자놀이 쪽으로 눈으로 눈 끝이 치켜 올라가 있다. 그 뿐에 회색 파스텔 톤 가루가 퍼져있는 것이 어딘가······. 저 화장이 유행인가? 남들은 저걸 멋지다, 세련되다 하겠지. 내가 보기엔 그냥 징그럽다.

“고기를 왜 사가세요?”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아씨, 정육점에서 고기를 파는 평범한 고3남학생으로서 절대 평범하지 않은 질문이다. 이 사람이 뭐라 대답할까. 제발 그냥 ‘고기를 먹으려고 사가요’ 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아······.”

역시나. 언짢은 표정. 이상한 게 막상 언짢은 표정을 지으니까, 소심하게 ‘아 생뚱맞은 질문이네요. 죄송합니다.’라고 하기 보다는 ‘뭐 이런 질문 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눈으로 봐.’라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회색가루여자가 턱을 목 쪽으로 끌어당겨 꼬라보는 눈을 만든 다음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가게를 나간다.

나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저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어떨까. 물과 기름 같은 대화가 되는 건가? 나는 밑에 눌려있는 물, 저 여자는 가볍게 둥둥 떠 있는 기름. 근데 왜 가벼운 기름이 위에 있는 거지? 문득 기름이, 별 생각 없이 맘 편하게 사회에 순응하는 부정부패 정치인들 같이 얄밉다. 물은 왜 투명하면서도 밑에 깔려 있는 건데 왜?

띠리리리리 띨릴리. 얄미운 핸드폰이 울린다. 2년 약정이 끝난 지도 1년이 넘은 것을 귀에 딱 대고 배터리 부분에 손바닥을 붙여 딱 내린다.

“야 진짜 머야. 니 컬러링 바꾸라고.”]

찬수다. ‘바꾸라고’에서 ‘고’를 살짝 길게 발음하는 게 뭔가 얄밉다. 이놈은 어제 집에 가는 길에 머리 아파서 주저앉아 쓰러진 친구도 팽개치고 고사모인가, 고기 먹으러나 가지 않았던가. 설마 나한테 고기 먹었단 거 자랑하려고 전화한 건가? 저번에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야 또 니 지금 생각 중이냐? 진짜? “

“아니야.”

아 아까 정치인들 부정부패 하는 거 얄밉다고 했던 게 찔린다.

“아님 말고, 히히. 그런데 벨소리 좀 바꿔. 역시 양철수야. 저번에 뉴에이지 음악인거 그거 바꾸랬더니 이번엔 클래식이냐? 니가 40대 아줌마냐? 너 촌스러워 진짜. 좀 바꿔봐. 소녀시대 훗 몰라 훗? 그런 거. 히히.”

“훗?”

“어 소녀시대 훗. 이제 빅뱅가고 중 고딩들 다 그거 해. 요즘 중 고딩중에 컬러링이 클래식인 애는 전국에서 너 한명일거다, 진짜. 암튼 특이종이야, 너.

요즘 중 고딩들이 컬러링으로 소녀시대 노래를 하던 빅뱅 노래를 하던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내가 서글서글한 클래식이 좋다는데. 아 그래. 쟤는 원래 저러니까 가볍게 넘기자. lay laid laid,

“내가 그 이상한 한 명 하지 뭐. 근데 전화한 용건이 뭐야.”

“어제 길에서 쓰러졌잖아, 너. 괜찮냐?”

“안 그래도 니가 나 길에 냅두고 가서 정떨어지려고 했다. 그것도 고기 먹으러 가고······.

그것 때문에 전화한거냐. 그래도 짜식, 미안하긴 했나보네. 어제 겨우겨우 엄마랑 병원가서 약 받고 왔어. 약 먹고 오늘 일어나보니까 머리도 개운하고, 이제 괜찮아.”

“괜히 엄청 걱정했다. 히히. 근데 의사가 너 왜 쓰러졌대냐?”

“의료보험증 여깃슈.”

“네. 확인되셨습니다. 환자분이 1993년생 양철수님 맞으십니까?”

“아야. 니가 93년생이 맞다냐?”

평소에 엄마가 아들이 몇 반인지도 몰랐던 거, 생일을 그냥 지나쳤던 거. 나 나름대로 이해하고 살았는데, 이건 엄마가 아들한테 정말 무관심한 거다. 찬수 말대로 진짜. 마지못해 ‘네.’라고 대답을 했다.

매일 표정을 펴지 않고 사는 엄마가 시종일관 환한 미소를 띠고 있는 간호사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힘들게 3층 내과 실 앞에 가서 의자에 살짝, 그리고 엉덩이에 힘을 빼면서 앉는다. 움직일 때 마다 작은 은색공이 뇌의 주름사이를 굴러내려 갔다가 요리로 쑥 갔다가 하는 느낌이다. 아까 버스에 있을 때는 컴퓨터 핀볼 게임처럼 그 공이 순식간에 뇌 표면을 쳤다가 저기를 쳤다가 하는 것 같았다.

“니 병원비 아깝게 쓰리 갑자기 이런 병이 왜 온거여? 니 혹시 고기 안 먹어서 이런 거 아니여?”

보통 때라면 저 말에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가뜩이나 이렇게 아프고 또 아까 카운터에서

엄마가 내 생년도 오르고 있었던 것도 알았고. 저 말은 엄마가 좀 너무했다는 서러운 생각이 든다.

“엄마, 아까 제 생년 모르신건 너무해요.”

“아니, 뭐. 바쁘게 살다 보믄 그를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른다냐.”

“아무리 바쁘셔도 아들 생년을 잊어먹으세요? 너무해요.”

이상하다. 말을 하니까 머리가 안 아프다. 말로 풀리는 거 보면 스트레스 때문에 이런 건가?

“야야. 서울에서 나 같은 늙은 여자로 살다보면 원래 정신이 없는 거여.”

정신이야 고3수험생이 제일 없는 거 아닌가. 하긴 난 실업계 생이니까. 수험생이란 말은 인문계 애들한테나 어울리는 말이겠지.

“니 나이 때는 나도 처녀였으니께 세상 돌아가는 천지도 모르고 누가 돈 준다고만 하면 죽을 동 말 동으로 일했지. 근디······.”

새삼스럽게 주변으로 주의가 환기되자 여지가 사람들 많은 병원 복도라는 것이 확 느껴진다. 엄마는 의자에 앉아 두 손에 힘을 푼 채 한 곳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여기서 엄마가 자기 얘기하는 걸 듣게 되다니······.

“처음에는 돈을 주다가 점점 안 주는 거여. 그 땐, 너네 말로 뭐라 한다냐. 아,소심해서 속으로만 끙하고 있었지. 그러다 다니던 공장에서 짤렸으. 짤린 이유가 뭔지 안다냐. 왼손잡이라고. 그 글씨를 오른손으로 한다는 건가 뭔가. 아니... 글 쓰는 게 오른손인지 왼손인지가 뭔 상관이다냐. 다른 애들이 관리인 안 볼 때는 쉬엄쉬엄 때도 나는 꽤 열심히 했어. 이젠 내가 그 때 왜 짤렸었는지 알거 같어.”

다시 그 핀 볼이 작동했다. 의사선생님 보면 머리가 어떻게 아프다고 해야 하지? ‘저희 가게 문 앞의 금색 종이 제 머리 안에서 띵띵 해요!’(?)

“암튼 세상은 남들 할 때 나도 하고 안할 때 나도 안해야 하는 거여. 홀로 나만 다르면 손해 보는 거지. 그 때 이후로 억세게 오른손잡이로 고쳤 잖냐. 그 당시 짤리고 나서, 집에서 신문지에 오른손으로 연필을 물집 날 정도로 잡고 분해서 눈물 흘리면서 얼마나 글씨를 써댔는지.. 넌 모를 거여. 너 고기 안 먹는 것도 고쳐. 남들은 다 고기 먹고 싶어서 안달인디 너는 그게 뭐시다냐? 니 이름도 옛날에 다 남들 하는 이름으로 지으려다, 제일 흔한 이름이 국어교과서에 있을 거 같아서 니 아부지랑 국어교과서에서 이름 찾다가 거기에서도 가장 많이 나도 이름이 철수라서 철수가 된그라고.”

이건 전에 들은 적 있다. 초등학교 때는 꼭 개명하고 싶었는데······.

“백에 칠십이 오른손이면 나도 오른손이어야 하는 거다. 알겄냐. 니도 머 세상을 살다보면 알게 될 거니까 지금까지 이런 말 안했다마는.. 암튼 그래라. 남들 하는 대로 맞춰 사는 방식이 괜한 말 안 듣고 손해 안보는 거여.”

“엄마, 근데 이런 얘기 처음이네요.”

“양철수님”

안에서 깨끗한 분홍 옷을 입은 간호사가 나와 양철수라는 이름을 부른다. 왠지 사과를 매일 아무렇지 않게 먹다가 어느 날 그 상큼한 맛을 새삼스레 깨닫는 것처럼 새롭다.

새하얀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선생님이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 머리가 어떻게 아프냐고 해서 어떻게 아픈 건지 설명해드렸다. 그 후 진찰을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게 흔히 채식주의자들한테 많이 나타나는데요. 약 드시고 점차 고기를 드시다보면 빨리 나으실 수 있는 겁니다. 동맥경화증입니다.”

진짜 걱정돼서 전화 한 건가.

찬수가 채근하듯이 다시 묻는다.

“야 왜 그런 거래? 빈혈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랬던 거래. 왜 그런 게 중요해?”

“당연하지. 그게 왜 그렇게 된 건지를 알고 그 요인을 고쳐야 하니까.”

복잡한 나답지 않은 질문. 단순한 찬수답지 않은 대답. 어딘지 방금은 우리 둘이 바뀐 것 같다. 찬수가 갑자기 화난 투로 얘기한다.

“아오, 기술 진짜. 수업시간에 창 밖에 좀 봤다고 너를 그렇게 때리니까 이렇게 되지. 내가 니 대신 기술, 폭력 죄로 신고해버리든지 했야겠네, 진짜. 그래. 그럼 좀 쉬어.”

“고마워. 끊을게.”

니 말대로라면, 내가...고기를 먹어야 하는 거니.

윤영
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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