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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위하여

  • 작성자 bastet
  • 작성일 2011-06-09
  • 조회수 354

 이곳은 서울 근교의 아파트들 중 하나였다.
 높이 솟은 건물이 우주선같은 은빛 광택을 내며, 먹지처럼 시커먼 밤하늘을 향해 그 특유의 미래적인 곡선으로 쭉 뻗어 있었다.

 그 인텔리전트 아파트는 완벽하게 자동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인공지능은 전혀 쓸모가 없었기에, 고층건물들이 으레 그러듯 바람에 미묘하게 흔들리며 명상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준 고급 지

능은 오로지 난방기구를 덥힐지 말지 판단하는 데만 쓰였으며 그럴 필요가 없는 지금은 그 뱃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그 역시 조용히 잠이 들어 있었다.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수백 개의 창문은 검게 눈을 감고

어떤 빛도 내보내지 않았다. 기계만이 누릴 수 있는 휴식을 취하면서.

 은색 빌딩의 뱃속은 수백 개로 나눠진 구획으로 되어 있었다. 각각 몇 호 라는 명패를 달았으고, 문 안

쪽은 어둠과 빈 공간으로 가득 채워져 있거나, 아니면 사람의 피곤한 육체가 훈온한 어둠 속에서 쥐죽

은 듯 조용히 뉘여져 있었다. 피곤한 숨결만이 움직이고 있는 그 어두운 방 안엔 가구도 몇 없었다. 침

대와 식탁과 냉장고와 시계 정도가 보편적이었다.

 시계는 알람이 새벽 여섯 시에 맞추어져 있었다. 시계바늘은 현재 5시 59분 56초를 가리키고 있다.

 새벽 6시 정각까지는 앞으로 3초, 앞으로 2초, 앞으로 1초, 0초.

 "따르르릉!"

 알람 시계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김씨의 빠른 손이 텁 시계를 움켜 잡았다. 순간 시계는 침묵했고, 김

씨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락함에 취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그 사이 더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찌푸린 얼굴로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깜깜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AM 06 시 : 05 분 : 00, 01, 02, 03……

 너무 많이 잤다!

 5분이나 더 잤단 말인가? 3시간 5분이나 퍼질러 자다니. 나란 놈이란! 이 게으른 놈! 이 멍청한 놈!

 김씨는 침대맡에 놓아둔 알약 더미를 물도 없이 꿀떡꿀떡 삼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자리 밖으로 뛰쳐

나왔다. 빨리 회사로 가야했다. 낭비하는 시간은 끝났다!

 "시간이 부족해! 시간이 부족해!"

 월요일은 김씨에게 있어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또 다른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인 화요일이 바로 다음날로, 연달아서 바쁜 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요일이 왜 바쁜가 하면,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인 일요일이 그 전전 날에 있어서 제대로 업무 처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도, 금요일도, 목요일도, 수요일도 같았다. 김씨에게 일주일은 항상 바빴다. 한달도 그랬고, 일년도 그랬다. 바쁘지 않은 날이래봐야 평년의 2월 29일 정도일까.

 그러나 바쁜 건 좋은 일이었다.

 바쁘다는 것은 일이 있다는 의미였고, 일이 있다는 의미는 노후에 쓸 돈을 충분히 벌어둘 수 있다는 말이었다. 현대의 인류는 백 살까지는 돈을 벌고 이백 살까지는 노후를 즐겼다. 바쁜 젊은 시절은 늙은 뒤 들어갈 '유토피아'의 수준을 보증해주는 것이었다.

 유토피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곳이 아닌가?

 '당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보장해드립니다.'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일 백 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젊은 시절의 조금 바쁜 삶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조금 바쁜 삶.

 하지만 이건 너무 바빴다!

 "하루에 한 시간만 더 있다면 좋을 텐데! 제기랄!"

 김씨가 허둥지둥 출근준비를 하며 내뱉었다. 그러나 이미 짜낼 수 있는 자투리 시간은 모두 짜낸 상태였다. 잠은 하루에 세 시간 잤고, 식사는 아까처럼 알약으로 대신했다. 샤워는 인체세척기 안에서 1분 내로 끝냈다. 여의치 않으면 왕왕 안 씻기도 했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온갖 도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항상 모자라기만 했다. 그래서 일 하는 시간을 늘려 더 시간을 줄여주는 물건을 사서 시간을 더 단축했다. 그래도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 김씨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모자라지는 만큼 작업량이 늘어난다는 것도 역시 불가해했다.

 '아아, 2000년대 사람들처럼 느긋한 삶을 살고 싶어! 비록 문명은 미개하고 평균수명은 짧았을지언정. 일을 많이 하진 않았잖아.'

 많은 사람들이 미래로 갈수록 인간이 하는 일은 줄어들게 되리라 생각했었지만, 현실은 약간 달랐다.
 과거 사람들의 생각대로 제조업이나 생산업에서 이제 인간이 할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서비스업의 업무량만큼은 미친듯이 증가했다.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은 돈을 썼고, 사람들이 쓰는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은 일을 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다시 벌기 위해 또 일을 했고, 또 일을 하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점은, 늙으면 일을 못 한다는 점이었다. 누구던 신체의 노화로 인해 돈을 쓰고 돈을 버는 순환고리에서 벗어난 순간 궁핍한 삶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또 늙으면 노화방지제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나가는 판이었다.

 그러니 젊을 때 최대한 일을 해둬야만 했다. 그래야만 모든 소비재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유토피아 지역의 거주권을 살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여가시간? 여가시간이라니! 현대의 엘리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건 미래의 가치를 모르는 멍청이들이나 가진 것이다. 지금 5분의 수면으로 여가시간을 가진 김씨는 죄책과 불안에 떨었다.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럽고 바보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한심하고 바보같은 인간이라

도 회사는 가야했다.

 김씨는 빠르게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밝은 형광등 아래 다들 한창 일에 열중이었다. 희디흰 타일과 투명한 전자기기로 가득찬 회사는 언제나 일하는 사람들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료들의 경쟁적인 열기가 느껴졌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김씨도 서둘러 자리로 가려는데, 눈길을 끄는 한 명이 있었다.

 동료 심씨였다.

 심씨는 무려 한 손에 뜨거운 커피를 들고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컴퓨터를 쓰고 있었다. 심지어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화면- 그러니까, '여가시간'에나 보일 법한, 우스갯거리가 잔뜩 떠오른 화면을 띄워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저렇게 여유가 넘쳐도 되는 건가? 몰상식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회사에서 저렇게 노닥거리고 있으면, 심씨의 인생이야 혼자 추락하던 말던 알 바 아니지만, 팀의 효율도 같이 추락할 게 아닌가? 젊을 때 1초 더 노력하면 늙어서 1분 더 편하게 산다는 말도 모른단 말인가?

 "심씨! 뭐하는 거야?"

 김씨는 화가 나 심씨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는 시간도 아깝지만, 1분을 투자해 업무의 효율을 증진시킨다면 그것도 나쁜 거래는 아니다. 물론, 1분이나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김씨는 속사포처럼 말을 뿜어냈다. 약 52초 간의 설교가 끝나자, 심씨가 그제야 김씨를 쳐다봤다.

 "끝났어?"

 가만히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던 심씨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물어왔다.

 "뭐?"

 김씨는 기가 막혀 더 말이 안 나왔다. 그냥, 부끄러움도 없는 이 파렴치한 남자를 포기하고 신성한 내 업무를 시작하는 게 훨씬 이득이리라. 저런 식으로 일하다가는 곧 짤려 낙오자가 될 게 뻔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돌아가려는 데, 심씨가 말해왔다.
 
 "너무 그러지마. 내가 1주일동안 몇 시간을 일하는지 알아?"

 1주일동안 얼마나 일을 하는지 아냐고?

 우스운 소리였다. 김씨는 하루에 수면 시간 3시간과 준비 및 출퇴근 시간 14분을 포함해 3시간 14분을 제외한 20시간 46분을 근무하고 있다. 일주일로 치면 145시간 22분 가량을 일하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김씨가 남들보다 성실하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비슷하게 일을 하고 있는 처지다. 130, 140시간씩 일하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네 마네 하는 건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심씨 자신만 힘들여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아마 과로로 돌아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심씨는 또박또박한 말씨로 자답했다.

 "165시간이야. 165시간. 네가 1주일에 하는 일보다 21시간 정도 더 많군. 난 너보다 거의 하루 더 일하는 셈이야."
 "뭐?"

 김씨는 충격받았다.

 충격에 뭐라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게 가능이나 한 소리인가? 자신보다 일을 그렇게나 많이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거짓말!

 "거기다가 난 하루에 30분의 여가시간도 갖고 있지."
 "말도 안 돼!"

 머릿속에서 알아먹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곧 김씨의 이성도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 돼."
 김씨는 두 의견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 돼!"

 그렇게 결론을 내리거나 말거나 심씨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요새 그 시간동안 게임을 하는데 벌써 랭킹도 찍었다고. 대단하지?"

 심씨는 그에게 모니터를 보여줬다. 무엇을 뜻하는 화면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김씨는 그냥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말도 안 돼." 심씨는 김씨의 멍청한 표정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후 내쉬고 말을 시작했다.

 "자네는 오늘도 3시간 동안이나 수면을 즐기시고, 왔다갔다 쓸모없는 시간을 소모해 약 4시간이나 그대로 갖다 버린 모양이지?"
 "..."

 3시간쯤이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김씨에겐 체감상 그게 그거였으니까. 쓸모없는 시간을 소비했다는 건 본질적으로 같았다.

 "거기다 그 얼마 없는 20시간 중에 또 몇 분은 내 여가를 방해하는데 쓰셨군. 그래놓고 어디가서 일한다고 나불댈 생각인가? 심지어 난 이제 자네 동료도 아니야. 내 헌신적인 근무량을 보고 감동받은 회사

측에서 날 승진시켜주는 덕분에, 오늘부터 난 자네 상사라고."

 김씨는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여부를 떠나 심씨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하나 너무 충격적이였

다. 게다가 만에 하나 저게 사실이라면, 김씨는 여태껏 자신이 깔봐왔던 존재들보다 하등 나을 거 없는 인간이 되버린다. 미래의 가치를 무시하고 현재의 안락함에 빠져 있는 멍청이들, 그중 한 명이 돼버리는 것이다.

 김씨는 다시 불안에 떨었다. 갑자기 무력감이 느껴지고 자신이 너무 작은 존재 같았다. 쓸모 없는 존재. 남들보다 3시간이나 더 노는 존재. 심씨가 매일 김씨보다 더 일했다던 3시간의 차이들이 무게가 되어 김씨의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아니었다. 시간의 차이만큼 키가 커진 심씨의 거대한 엉덩이가 자신을 깔고 앉은 느낌이었다. 숨이 막혔다. 김씨보다 훨씬 거대해진 심씨는 천천히 그 웃음기 띤 입을 열었다.

 "뭐 좋아. 일에 너무 열중해 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김씨는 현실로 돌아왔다. 심씨는 아직 자기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씨는 다 마신 친환경 커피용기를 재활용 쓰레기통에 가볍게 던져넣고 일어나 김씨와 마주했다.

 "자네는 매우 성실해. 다른 버러지들이 하루 4시간이나 잠에 낭비하는 데 비해 1시간이나 아끼고 있어."

 심씨는 웃으며 김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자네에게는 알려주지. 내가 어떻게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심씨는 김씨에게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신선했으며, 정말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뭐라고?! 말도 안 돼!"

 김씨가 놀라 말했지만 심씨는 시계를 보더니 딴청을 피웠다. 이제 아침 6시 30분이었다.

 "이런. 여가시간이 끝났군. 그럼 난 일로 돌아가도록 하겠네. 업무 끝나고 꼭 가보라고."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김씨도 일을 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흘끗 게시판을 보니 정말 심씨가 승진해있었다. 그가 말한 일이 모두 사실이란 뜻이리라! 원래대로라면 김씨가 됐어야 할 승진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 화가 나진 않았다. 일하는 내내 김씨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즐거워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매일 피곤에 패배해서 억지로 가는 것만 같았던 집에 가는 시간도 지금은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졌다.

 김씨는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지씨에게 감사를 표했다.
 말로는 할 수 없었다. 업무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시간은 착실히 갔다.

  새벽 2시 30분.

 놀랍게도 김씨는 벌써 회사에서 퇴근했다. 보통 때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맙고도 고마운 심씨 덕분에 반 시간이나 일찍 올 수 있었다. 부족한 업무량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자 그는 대답했다.
 
 "30분 정도야 내가 대신 해주지. 내일 여가시간 30분 대신 일을 더 하면 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에게 존경심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었다. 김씨는 나오는 길에 심씨에게 몇 번이고 꾸벅꾸벅 감사 인사를 했다. 아무튼 그 일은 그 일이다. 김씨에겐 지금부터 할 일이 더 중요했다. 회사를 나서자마자 김씨는 곧장 심씨가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포스 코퍼레이션..이 여기가 맞습니까?"

 잡아 놓은 예약 시간까진 충분히 남았지만, 1초라도 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훨씬 먼저 도착해버렸다. 시간을 칼처럼 지키는 현대의 엘리트 치곤 꽤나 낭비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안내자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아무런 위화감 없이 담당자에게 데려다주었다. 담당자가 웃으며 물었다.

 "김 로동씨 되십니까."
 "예. 맞습니다! 제가 바로 김 로동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담당자가 전자 서류와 예약 시간 등을 확인하려 이것저것 건드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자, 안 그래도 초조한 김씨는 답답한 마음에 화가 나려고 했다.

 '이 회사 제대로 된 건 맞는 건가? 어떻게 사전 준비를 안 해놓을 수가 있지?'

 담당자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분통이 터질 거 같던 김씨는 온갖 데로 시선을 돌리다가 벽면에 걸린 시계를 발견했다. 그는 그제야 십 분이나 빨리 왔단 사실을 알아챘다. 김씨는 깜짝 놀라 사과했다.

 "제가 아무래도 시간보다 너무 일찍 온 거 같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10분 가량의 시간에 그렇게 죄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여유'를 파는 회사니까요."

 담당자는 서류와 함께 간단한 설명서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저는 포스 코퍼레이션의 A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객님들의 잠을 대신 자드리고 있지요."

 그렇다.
 심씨가 알려준 것은 바쁜 사람들을 위해 대신 잠을 자주는 '전문 수면가 서비스'였다.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지씨는 한숨도 안자고 23시간 근무를 하며 1시간의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었겠지. 담당자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문 수면가는 요근래 뇌파 관련 연구로 만들어진 신생 직업입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재능있는 전문가들이 질적, 양적으로 우수한 숙면을 생산해서 고객님께 제공해드릴 겁니다."

 김씨는 장황할 것 같은 설명에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담당자 A는 그런 김씨의 눈치를 보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고객님들께서 바쁘신 건 저희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만, 대단히 새로운 분야의 서비스기 때문에 규정상 숙지하실 건 숙지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십 분이나 일찍 오셨지 않습니까? 편안히 들어주세요. 게다가 계약을 하시게 된다면, 앞으로 세네 시간씩 시간이 더 생기실 테니 조급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속 해도 되겠습니까?"
 "예. 부탁드립니다."

 그가 조금 여유를 가지라고 말하긴 했지만, 김씨는 담당자가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휴먼 두잉, 그러니까, 행위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되고 있죠. 행위하므로써 인간다워진다고.
 행위하는데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고로, 저희 서비스를 사용해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더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면, 보다 인간적인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건 그냥 캐치 프레이즈구요."

 담당자가 손가락으로 설명서에 나온 그림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생물의 뇌는 자는 시간에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할 뿐이죠. 저희 서비스는 이를 활용한 방법입니다. 전문 수면가와 고객님의 뇌파를 동조시켜 일정한 시간 동안 깨어 있음과 동시에 잠을 자는 효과를 낳는 것이지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가요?"
 "어린 시절에 배우기론 뇌파는 그냥 활동의 생산물이라던데."
 "어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죠. 다른 궁금하신 점은?"
 "부작용은 있습니까?"

 담당자 A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약 같은 겁니다, 김 로동씨. 오늘 아침에도 약을 드셨겠죠? 칼로리에그나 포만제, 아니면 베리타스 같은 약들이요. 이것들은 인체에 도움이 되는 성분들을 추출해 높은 효용을 주는 거죠.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엔 베리타스랑 잘 맞질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밤에 잠을 설치기도 하죠.
 그런 것처럼, 전문 수면 서비스도 누군가에겐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런 사람은 못 봤어요. 맞는다면 시간을 아낄 수 있고, 안 맞는다면 그냥 해약하시면 됩니다. 또다른 궁금하신 점은요?"
 "아니요, 없습니다. 이제 계약할 수 있는 건가요?"

 A는 즉시 서류를 띄워 이것저것 확인하기 시작했다.

 "우선, 고객님은 이번에 수면 서비스만 선택해주셨군요."
 "예. 그렇습니다."
 "한 달 써보시면 아마 더 많은 서비스를 신청하시게 될 겁니다. 저희는 다른 자극들도 판매하고 있거든요. 미각적 자극, 촉각적 자극, 아니면 예술 작품을 봤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들도요. 이런 서비스는 주로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여가를 보내고 싶으신 분들이 선택하십니다."

 담당자 A가 말을 하면서 김씨의 앞으로 문서를 띄웠다. 아직 빈 칸 투성이의 계약서였다.

 "수면은 하루에 몇 시간 정도 필요하십니까?"
 "예? 이전에는 하루 3시간 쯤 잤었는데요."
 "흠, 그러면 6시간 정도가 어떨까요?"
 "6시간이나!"

 김씨는 깜짝 놀라 말했다.

 "그렇게나 많이 자면 몸이 망가지지 않을까요?"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천히 줄여나가며 최적의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요."
 "흠…… 그렇다면야."

 김씨는 시간란에 6 을 적어 넣었다.

 "수십 년 전의 인간은 하루에 8시간도 잤다고 합니다."
 "허, 완전히 게으름에 찌든 것들이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들을 가볍게 비웃어준 뒤에 김씨는 서류를 마저 채워나갔다.
 
 "시간대는 언제가 좋으시겠습니까?"
 "음…… 10시에서 4시까지가 좋을 거 같은데요."
 "글쎄요, 그 시간대는 보통 많이들 선택하시는 시간대라 값이 비싼데. "
 "그렇습니까?"
 "예. 아무리 저희들이라도 한 명이 같은 시간동안 두 명의 잠을 제공해드릴 순 없으니까요. 최적의 동조율로 최고품질의 수면을 만들어야만 효과가 있거든요."

 김씨는 망설였다. 그가 내민 가격표에서 보이는 가격 차이는 꽤 컸다. 김씨의 평균 시급의 반에나 해당했다. 이렇게나 많이 잘 필요가 있을까? 김씨가 주저하고 있자, 담당자 A가 덧붙였다.

 "미래 투자적인 이득에 주목하세요. 저희가 제공하는 건 단순한 숫자와 만족이 아니라, 고객님께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합리적인 선택이죠."
 "음……."
 " 며칠만 조금 힘드실 뿐입니다. 적응하시면 오히려 득을 보셨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시면 나중에 바꾸셔도 되구요."

 그 말에 김씨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A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계약서를 받아들고 각종 주의사항과 이용에 대해 설명했다.
 계약은 30분을 조금 넘겨서야 끝이 났다.
 

 2.

 업무를 시작한 지 21일 째였다.

 담당자 A에게서 업무를 하달받은 전문 수면가 R씨는 정말 이 일이 이렇게 고될 줄 몰랐다. 잠을 자고 또 자도, 씹어먹은 사탕처럼 꽉 달라붙어 있는 피곤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인간들은 무슨 피곤 불감증이라도 걸려 있단 말인가? 몸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딱히 기술이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불면증이나, 수면에 영향을 줄 트라우마만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죠. 식당에서 서빙봇 대신 서 있는 것보다 시급도 더 나와요.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래도 과언이 아닙니다."

 담당자 A씨의 말이었다. 그건 악마의 술수였다.

 '그래, 그 말에 홀랑 속아 넘어간 내가 나빠.'

 하지만 실제로 그게 R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특별한 이유 없는 왼손 마비]는 장애였다. 즉, 직장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마비가 없었어도 이게 최선의 직업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R씨는 혼자 등에 파스를 붙였다. 오랫동안 잠을 자느라 허리 통증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목결림도 물론 심했다. 오십견이 아니라 이십견에 걸린 셈이다. 국소 이완제라도 주사하고 싶었으나 그럴 돈은 바이 없었다.

 오른손 하나로 힘겹게 싸구려 파스를 붙이고 있으려니 더 억울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그는 연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몇 마디 원망섞인 말만 남기고 떠나간 지 오래다.

 "나랑 잘때까지 일을 해야겠어? 나보다 일이 더 좋아?"
 "제발, 나라고 좋아서 잠잘때까지 일하는 게 아니라고."
 "더는 못 견뎌. 이제 끝이야!"

 잠을 자는 게 일이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상하게도 머리 속이 배짝배짝 마르는 느낌이 있다. 양질의 잠을 생산하기 위해 꿈 억제제를 사용하는 탓일지도 몰랐다.

 이런 증상을 호소해도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다. 다들 3시간 미만으로 잠을 자는데, 하루에 24시간동안 잠을 자는 사람의 증상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사실 R씨도 '잠을 너무 못 자서 피곤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서로 하는 일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알 필요도 없기 때문에.

 R씨는 하루 18시간 동안 세 명 분의 쾌면(쾌적한 수면) 상품을 제공했다. 세 명 분의 잠을 자자니, 항상 피곤해서 잠이 쏟아졌다. 그래도 그가 잠을 생산해내 남들의 시간을 아껴주면 남들이 그 시간으로 사회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것에 뿌듯해했다. 자신이 일종의 시간 변압기처럼 느껴졌다. 확실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R씨는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그는 휴식을 취할 수 없다.
 그의 휴식은 그가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재화를 받고 판매되는 상품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온전히 휴식을 소유할 수 없었다. 없게 되었다. 그가 그것을 깨달은 건 먼 미래의 이야기였고, 아직까지는- 또 먼 미래까지는 충분한 만족감 속에서 일을 했다.

 
 3.

 계약일로부터 한 달 뒤.

 김씨의 아침은 평온했다.

 처음에는 평소와 잠자던 시간대가 맞지 않아 괴로웠지만 어느정도 적응이 되자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내친김에 모든 서비스를 신청한 김씨의 생활은 윤택했다.

 지씨와 함께 하루 23시간을 근무하고 1시간을 여가로 사용했다.
 사내에서는 엘리트중의 엘리트라 불리며 인정받았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김씨는 이제 여가시간을 점점 줄여나갈 예정이였다.
 얼마 안 가 그는 24시간을 전부 근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시간을 일하겠지만, 공동 1등이라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행복 속에서 살 것이며, 그 행복은 100세 생일 전날 우연히 산소 부족으로 인해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었다.

 4.

 바로 그 날.

 그 날은 전문 수면가 R씨가 드디어 은퇴하는 날이었다. 일백 세를 맞아 마지막 출근을 한 그는 어느때보다 달뜬 모습이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왼손조차 사랑스러웠다. 그는 모든 걸 이겨냈다.

 R씨는 회사가 설립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일해왔다. 나이가 들면서, 업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노인성 불면증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회의 최대 이익을 위해 노력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그는,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유토피아]에 가게 된다.

 현대 여느 사람들처럼 그다지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도 충분히 감상에 젖었다. 그는 회사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추억을 회상하고 싶었다. 침을 흘리며 잔 일, 자다가 떨어진 일, 너무 오래 자서 근육이 마비됐던 일, 그리고…… 뭐가 있더라? R씨는 늙어서 그런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손으로 물건을 정리했다. 그가 반백년 넘게 써온 익숙한 수면 보조 도구들이 그의 가방 안에 쌓여 들어갔다. 그것들은 R씨의 보물이었다. R씨는 요즘 젊은 사원들이 호르몬제로 숙면을 생산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겼다. 숙면은 잘 관리된 수면 도구에서 나오는 법이다. 어쨌거나 이제 R씨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이제 끝이구나. 정든 회사여! 고된 일은 많았지만, 즐거운 일도 있었지. 회사의 성공과 그에 따른 여러 보상들…… 뭐, 대부분 나는 그다지 관련된 적 없었지만.

 R씨가 침대보를 마지막으로 쓸어보고 나가려는데, 담당자 Y씨가 들어왔다. R씨는 Y씨를 보며 A씨를 생각했다. 담당자 A씨는 오래전에 은퇴해서 유토피아에 있을 터였다. 곧 그를 만나 오랜만에 이야기도 나눠보고 옛 추억도 들춰볼 수 있겠지. A씨도 반갑게 맞아주리라.

 지금 여기 있는 담당자 Y씨는 무언가 쓰여진 흰 종이를 들고 R씨에게 다가왔다. 담당자를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터였다.

 저 종이는 무엇일까? 평생 회사를 위해 일해온 R씨에게 주는 공로상 같은 걸까? 그러면 겸허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 그러면 제발 받아주시라고 애원하겠지. 하지만 Y씨는 좀 냉정하니까 그냥 안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만 손해겠지? 그냥 공손히 받아야겠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담당자 Y씨가 종이를 꺼내 웃으며 R씨에게 말했다.

 "아, R씨. 드디어 당신 고객이 모두 떨어졌어요. 김씨라고, 회사원이었는데 어젯밤에 급사했다는군요. 빵을 먹다가 목에 걸려 죽은 모양이에요. 쯧! 죽는 건 한순간이라니까요. 하여튼, 이제 R씨는 고객이 더 없으니, 회사에서 나가주셨으면 해요. 이제 곧 일백 세가 되실 텐데 좀 쉬셔야죠."
 "안 그래도 오늘 나가는 길이요, Y씨."

 담당자 Y씨가 손에 든 건 김씨의 사망소식이었나보다. 수면가 R씨의 말에 Y씨는 그제서야 R씨가 짐을 다 챙겨 나가려고 하고 있었단 걸 알아챘다. Y씨는 살가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하, 그러셨어요? 좋아요. 어떻게 유토피아는 잘 자리 잡으셨습니까?"
 "뭐 들어갔으면 된거지. 플래티넘 유토피아나 골든 유토피아는 아니어도 실버 정도면 나한텐 족한 걸."
 "그런 것 같아요. 당신이 그리울 겁니다, R씨.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담당자 Y씨는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R씨도 짐을 챙겨들고 회사를 나왔다. 어쩐지 왼손이 무거웠다.

 5.

 유토피아 관리 공단은 총천연색의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바닥은 푸른 유리, 벽은 흰 유리에 태피스트리. 벌레 전구들이 날아다니며 샹들리에처럼 천장을 꾸몄다.

 문을 들어서자 공단 건물이 그를 기쁘게 맞이했다. 무지개 색으로 칠해진 자동 보도(moving walk)는 세 갈래였다. 들어가는 길, 나가는 길, 유토피아로 가는 길.
 보도 위에는 위로 얇은 모니터들이 매달려 있었고, 계속해서 유토피아의 영상을 틀어주었다. 영상과 함께 노래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는"

 음향장치에서 즐겁고 웅장한 팡파레가 흘러나왔다. R씨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렀다. 모든 노동의 보상을 알리는 전조였으며 그것은 행복의 전주였다.

 "이곳에서는 더 일할 필요도 없어요. 유토피아로 가요. 행복을 누려요. 진짜 행복, 진짜 행복……"

 R씨는 서둘러 유토피아행 자동 보도에 올랐다.
 자동 보도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른쪽에선 어린이들이 유토피아 80년 계약을 맺기 위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보도 위의 모니터에는 이런 문구가 화사하고 발랄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백 년의 행복을 보장받으세요. 팔십 년의 노동이 일백 년의 행복을 보장해줍니다. 미래를 위한 선택, 미래를 위한 투자."

 그 왼쪽 자동 보도에는 R씨가 있었다. 그의 위에 매달린 모니터들은 아름다운 유토피아의 정경을 그려내며 노인들의 결실을 축하하고 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사회를 위해 애쓴 자랑스런 국민님! 유토피아로 오세요. 유토피아로…"

 오른쪽에선 아이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들끼리 말했다.

 이제 저 할아버진 놀고 먹는 거야?
 응.

 R씨는 뿌듯했다. 그는 기쁨에 차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열심히 살면 이렇게 된단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큰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R씨도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어린이에게 오른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나눴다. 바깥 세상에도 손을 흔들었다. 웃음 가득한 이별이었다. 그는 다시 웃었다.

 자동 보도는 곧 끝이 났다. 커다란 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은으로 도금된 거대한 벽, 실버 유토피아의 벽. 고통의 세상과 행복의 세계를 가르는 차단의 벽. 그 아래 초라할 정도로 작은 문이 그가 가야할 목적지였다.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은 전자동화되있었다. 유토피아 출입증을 발급받기 위해선 단순히 신체 정보만 확인하면 됐다. 확인 절차는 문을 여는 순간, 센서가 자동으로 완료했다.

 문 안쪽은 크고 너른 방이었다. 왼편에 있는 장치가 R씨의 개인 정보와 유토피아 거주지 구매증을 뽑아냈다. 바로 반대편 벽에 크고 편안해보이는 탈것 하나가 놓여 있었다. 탈것은 스피커를 열고, 여자 목소리로 입력된 스크립트를 읊었다.

 "축하합니다, R씨. 남은 일은 제 위에 올라타시는 것 뿐입니다. 와석에 누우시면 곧 출발합니다."

 R씨는 탈것 위에 누웠다. 탈것의 덮개가 닫히고 향기로운 방향과 편안한 음악이 흘렀다. 어머니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눈을 붙이세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멀답니다. 잠시 눈을 붙이세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멀답니다. 잠시 눈을 붙이세요……"

 묘한 거부감이 일었다. 평생 일했는데, 다시 일을 하라는 거야? 하지만 목소리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또한 이제 잠은 노동이 아니다. 드디어 자연이 준 그 본래의 기능을 할 것이다. 휴식. 진정한 의미의 휴식. R씨는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평생 그래왔듯, 눈을 감았다.
 곧 눈꺼풀로는 가릴 수 없는 밝은 빛이 온 사방을 덮었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6.

 "아빠."
 "왜?"
 "이거 왼발을 절어."

 커다란 어린 아이의 얼굴. 아니, 어린 아이의 커다란 얼굴? 커다란 어린 아이의 커다란 얼굴. 그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왜 유토피아에 어린이가 있지?
 이번엔 커다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향수도 없이 살결에서 바로 퍼져나오는 부유한 풍요의 내음새. 그가 입을 열었다.

 "잘못 만들어진 거 같은데. 이런 건 유토피아에 있을 수가 없어."
 "어떡해?"
 "새로 만들어야지, 뭐. 거기 다시 넣어."

 커다란 남자의 커다란 손이 커다란 궤를 그리며 움직였다. 깡, 하고 금속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아이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빠는 게 보였다.  뭐지? 왜 유토피아에 어린아이가 있단 말인가? 아니,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가 없는 세상이 과연 유토피아일까? 그럼 여긴 유토피아가 맞는 걸까?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아니, 이게 무슨……

 "이리와. 버튼 누를 거야."

 커다란 목소리에 커다란 아이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위이잉, 하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팟, 하고 모든 분자의 결합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재구성 될 터였다. 사라져가는 유기물의 신체 안에서, 말단 세포 하나가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뭐란 말인가?

 7.

 아이는 귀여운 강아지를 품에 안았다. 짧은 털과 뜨거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질 터였다. 강아지는 부드러운 혀로 아이의 얼굴을 핥았다.

 "뭉무이."
 "그래. 좋으냐?"
 "뭉무이는 모로 만드는 고야?"
 "음... 그냥 바깥에서 오는 거야."
 "바깥엔 모가 인는데?"
 "물건. 거기엔 사람이 살지 않아. 우리가 필요하면 가져다 쓸 수 있어."
 "뭉무이도?"
 "그래. 멍멍이도."

 너르고 푸른 동산 위로 따사로운 햇빛이 풀밭을 적시고 있었다.

 아빠와 아이는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부드러운 미풍이 희고 고운 사람들의 볼을 스쳐지나갔다. 아이와 아빠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고기 강정을 노나 먹으며 갔다. 부스러기도 바람에 흩날렸다. 그 뒤로 강아지 한 마리가 고기 냄새에 어쩔 줄 몰라 방방 뛰며 뒤를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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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씨의 산책

오늘은 나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하루종일 앉아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꽁하니 있는 것이다. 나는 산책을 나가는 것이 어떠겠냐고 하였다. 나는 그닥 내키지 않아했다. 딱히 나가고 싶은 맘이 들지 않는다고 순한 말씨로 거절하였다. 나는 기분전환겸 해서 바깥을 걷자고 하였다. 밤공기가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아주 좋으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직접 내가 입을 옷도 골라주었다. 나는 그렇게 즐겁진 않은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의 몸은 보기좋게 말라있었다. 생각해보니 우린 어제부터 식사를 하지 않았다. 다량의 마실 것을 위장으로 흘려넣기는 하였다. 그건 오렌지나 포도 드링크 따위였는데, 우리는 그 주둥이에 흰 빨대를 꽂아넣고 그 즙액을 빨아 먹었다. 그것들의 칼로리는 아마 세 개 정도면 밥 한 공기와 맞먹었을 것이다. 포만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먹으며 오늘까지 버티었다. 나는 산책을 나가는 김에, 요깃거리로 빵이라도 사먹자고 하였다. 나는 그것에는 동의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밤이었지만 길가의 많은 가게 안에서 빛이 흘러나와 밝기는 충분했다. 나는 올해 들어 가장 얇은 옷을 입었지만 추운 감은 들지 않았다. 내 가장 좋은, 팔 만 원이나 하는 아주 좋은 옷... 비록 너무 많이 빨아 색은 좀 하얘졌어도. 이 비싼 옷은 내게 가장 적절한 온도를 주고 있는 듯했다. 나는 나와 같이 거리를 걸었다. 우리는 큰 길로 가는 쪽 빵집에 가기로 했다. 그곳은 맛있고 바삭거리는 빵을 파는 곳이다. 크고 긴 바게트도 이 천 오 백 원이고, 얼굴만한 초코쿠키는 천 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기 위하여 이 만 원을 들고 나왔다. 미지하고 무개한 하층민들이 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돈을, 우리는 이리 쉽게도 들고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춥지 않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했다. 밤공기는 아까 내가 말한대로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알맞았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 보도블럭을 걸었다.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시원하게 달렸다. 비록 우리는 차를 가지진 못했지만.. 차가 달리는 모습만 보아도 어느정도 시원한 느낌이 나긴 한다. 바닥은 어제 온 비로 아직 젖었고 간간이 물이 괴기도 했다. 슬리퍼에 물이 젖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됐다. 우리가 찾던 빵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고깃집이 있었다. 그 앞에는 역시 못 보던 치킨집이 있었다. 두 곳 모두 사람이 가득했고.. 기름지게 튀긴 치킨 냄새랑 숯불에 끓는 고기기름 냄새만 있었다. 빵 내음은 없었다. (밤이라 원래 있지도 않았겠지만) 우리는, 특히 나는 어이없어했다. 우리는 좀 더 걷기로 했다. 마침 앞에 파리 베이커리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것은 도로 건너편에 있었고 한 번도 안을 본 적이 없는 가게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항상 길이 좀 엇갈려서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나는 이김에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갔다. 안은 생각보다 허름하고 낡았다. 구석에는 터키석 색의 낡은 의자와 식탁이 놓여 있고..(참으로 오래된 빵집스럽게도..) 빵은 그렇게 종류가 다양하진 않아 보였고 대

  • bastet
  • 2011-04-28
다소 추상적인

카페의 평온한 기류를 헤집으며 그가 들어섰다. 그는 약간의 두리번거림도 없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일어서는 대신 그저 다정하게 웃어보였다. 그가 의자에 앉아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3시에 미팅이 있거든." 나는 시계를 바라봤다. 11시쯤이니 점심을 먹는 게 좋을 듯했다. "밥이라도 먹을까?" "아니. 괜찮아." 그는 그렇게 말하곤 지루하고 불안하다는 듯 그의 정장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는 참으로 좋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좋은 브랜드일 것이었다. 아르마니, 구찌, 루이비통같은.... 거기서 정장을 만드는지 안 만드는지도 모르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오래된 패딩 안에 낡은 천쪼가릴 꾸겨넣은데 불과했다. 아, 언제 이렇게까지 거리가 났지. 그래도 옛날엔 같은 교복을 있고 있었는데 말이야. 다 같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형색만은 같지 않았는가... "내가 귀찮은가봐." "사실 좀 그래." 아까부터 도저히 그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바라지도 않았으며 나는 어찌 해야할 바를 모르겠었다. 그는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그는 눈을 돌리고 나온 커피를 마셨다. 나는 그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손에 가볍게 쥔 커피잔이 그의 입가에 갖다대어져 그의 목근육이 꿈틀대는 걸 보았다.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입술에 커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그는 커피를 다 마셨다. 흰 손이 하얀 커피잔을 받침대에 올려 놓았다. "더 할 말 없으면 가봐도 될까?" 그가 말했다. 나는,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만 있어도 좋은데. 그는 아니란 말인가. 나는 무의미하게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옛날에는 널 좋아했는데." 내가 말하자 그는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날 쳐다보았다. "아마 그랬던 거 같군." 그러고 그는 카페 밖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 나섰다. 밖은 건조하고 추웠다. 그는 그의 좋은 차를 열었다. 나는 그의 등을 껴안았다. 옛날과 같은 냄새가 났다. 그는 나를 뿌리쳤다. 나의 억센 팔은 그의 가벼운 밀쳐냄에 힘없이 밀려 떨어졌다. 나는 그를 물리적으로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차를 타고 가버렸다. 슬픔이 무게감있게 내 심장 위에 올라 앉았다.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울음 나오지 아니하였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아 우는 법을 까먹은 것이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남의 이목을 끌지 않을 만한 조그만 비명을 질질 흘렸다. 비명이 방울져서 뚝뚝 떨어지는데 내 발걸음은 지구를 밀어내며 비탈길을 올라 집을 향했다.

  • bastet
  • 201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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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6-12 00:56:1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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