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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디론가 자꾸 날 잃어가고

  • 작성자 분홍사슴
  • 작성일 2011-07-12
  • 조회수 539

   

 Q. 어제는 할머니께서 노인정 관광이 있다구 곱게 차려입으시고는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서시더라구요. 그러더니 세 시간쯤 있다가 집에 전화가 왔어요. 경찰서라구, 거기 혹시 김명인씨 가족 되시냐구. 얼른 뛰어갔더니 할머니가 제 손을 꼭 잡고 그러시더라구요. 아가야, 나 치맨갑다. 워떡해야 쓸까잉. 그러더니 오늘 아침에도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으시더라구요. 할머니, 어디 가시게요? 했더니 아야, 오늘 노인정 꽃구경이 있어부러서 할매가 나가봐야겄다. 그래서 할머니, 꽃구경은 어제였어요. 어제 할머니 노인정 가시다가 길 잃어버리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하니까 눈을 끔뻑끔뻑 하시더니 그랬냐아? 하시더라구요. 할머니한테 치매가 찾아온 건가요? 그리고 이정도면 증세가 심각한 건가요?
 
  물음표 뒤로 커서가 깜빡거렸다.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봤다. 읽으면서 마음이 몇 번이나 덜컥 멎었다. 치매라니. 할머니에게, 치매라니. 마우스를 ‘등록’ 위로 가져갔다. 올릴까? 질문을 올린다는 것이 겁이 났다. 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것 같았다.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젠 어쩔 수가 없다. 현실을, 인정해야한다. 예. 질문이 올라갔다. 그러나 답변을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질문을 등록하고 난 후,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할머니께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여섯시 내 고향. 텔레비전 속의 리포터는 힘찬 목소리로 노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마찰음이 섞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 오늘이 며칠이에요? 으응? 가만있어봐. 오늘 사월 십구일 아니냐? 왜? 오늘 무슨 날이냐? 아니요. 날은 무슨요. 와. 저기는 어디예요? 마을이 되게 예쁘네.
  그러나 오늘은 사월 이십삼일이다.
 
  요즘 바빠? 통 문자를 못하네. 연락 좀 하자, 우리.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영화라도 한편 보러 갈래?
 
  엄지손가락이 전송버튼 위에서 멈칫거렸다. 보내야하나? 요즘 들어 우리가 점점 멀어져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종류의 예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지곤 했다. 우리의 유통기한이 다 되어버린 걸까? 어쩌면 새로운 이별을 준비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전송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닫았다. 답장을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답장이 오지도 않았다. 기분이 좀 더 우울해졌다.
 
  할머니, 진지 드세요. 꽃게탕을 좀 끓였어요. 시장에서 다리가 두어 개 잘려나간 녀석들을 싼값에 샀다. 이런 게가 아니라면 절대 꽃게를 먹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에게 배워온 삶의 방식이다. 어이구야, 게가 참 맛나구나, 야. 웬일로 꽃게탕을 다 끓였다니? 그나저나, 너 오늘 왜 일 안 나갔니? 할머니도 참, 오늘 다 저물어 가는데 그걸 지금 물어보세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그래? 그럼 푹 쉬야지. 할머니 때문에요, 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밥상을 물리자마자 주무시기 시작하셨다. 설거지를 하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제기랄, 뭐가 잘 안 풀리는 느낌이다. 이럴 때면 나도 기댈 벽이 있었으면 한다. 나 말고 할머니를 모실 사람이라든가 뭉칫돈 백만 원씩 용돈으로 주는 부자 부모라던가. 그러나 내가 기댈 벽은 세상에 없다.
  핸드폰을 열어 통화기록을 살펴봤다. 혹시 내가 모르는 새에 너에게 연락이 오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통화기록은 깨끗했다. 우리가 한발 더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문자를 다시 보낼까 하다가 핸드폰을 닫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쩌면 이게 이별통보의 또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별통보일 것이다. 조금 의외이긴 했다. 너는 언제나 쿨했는데, 이건 전혀 쿨한 방식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너를 잘못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가 무너져 내린 것이라면, 그게 하필 오늘이라면. 나는 지금, 벽이 필요하다. 제기랄, 집에 가서 할머니라도 봬야겠다. 마음이 성급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발이, 걸려, 넘어져버렸다.
 
  넘어진 눈앞엔 동전이 하나 보였다. 흙먼지에 반쯤 파묻혀있는 모습이었다. 오백 원짜리 동전. 동전을 손에 꼭 쥐고 일어났다. 제기랄, 오늘은 정말 최악의 날이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눈물방울이 조금씩 피어났다.
  할머니. 할머니? 그러나 오늘따라 할머니께서 깊이 잠들어계신다. 기분이 좀 더 울적해졌다. 상실. 어쩌면 오늘은 인생에 몇 안 되는 날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상실의 날. 할머니도, 우리도 모두 상실을 겪은 날. 처음 상실을 배운 것은 고등학교 삼학년 십일월 오일이었다. 십일월 오일 = 외할아버지의 기일.
  외할아버지께서는 살아생전 나의 자그마한 세계를 이루는 가장 큰 기둥들 중 하나이셨다. 그렇기에 더욱 더, 나는 슬픔을 꾸역꾸역 집어삼켜야만했다. 첫 상실 이후, 나는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모든 것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책, 공책, 가방, 책상, 의자, 지우개, 교실, 학교, 집, 침대, 옷, 옥상, 깊숙이 숨겨뒀던 담배 한 갑, 어머니, 아버지, 친구들, 할머니, 그리고, 나. = 내게 속한 모든 것들. 그렇게 나는, 슬픔과 두려움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내 이름을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고 사랑한다는 말도 없었다. 곧이어 아버지도 질세라 집을 나갔다. 할머니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러나 아버지역시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없었다. 아직 어머니, 아버지에게 쓴 내 이름이 지워지기 전이었다.
  사실, 어쩌면, 그렇기에 지금 너의 상실이 ‘무지무지하게’ 괴롭지는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양적인 상실보다 질적인 상실을 괴롭게 겪었기 때문에, 면역이 되어버린 지도 모른다. 너의 상실이 덜 괴로운 지금 같은 상황을 어머니, 아버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대차대조표) ‘if’와 ‘하지만’
 
  if.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면
 
  1. 너와의 이별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지금, 내가 느낄 상실감과 비참함은 수십 배로 늘어날 것이다.
 
  2. 할머니를 나 혼자 모셔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3. 할머니의 기억의 상실을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지금이 조금은 덜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떠나가 버렸다.
 
  1. 너의 이별통보가 생각처럼 지독히 괴롭지는 않다.
 
  2. 할머니를 나 혼자 모셔야 한다.
 
  3. 할머니의 기억의 상실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금, 온 몸이 떨리도록 두렵다.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두고서도 ‘if’와 ‘하지만’ 중 무엇이 더 나은 상황인지를 알 수가 없다. 왜 나를 버려서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지.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의 기억과 네가 조금 원망스러워졌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여전히 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혼자 모셔야 하며 나 말고는 할머니와 함께 있을 사람이 없어 월급 구십삼만 원짜리 직장을 그만두게 생겼고, 무엇보다, 너에게 버림받은 채로 버티고 있다.
  문득 아까 동전을 주웠다는 것이 생각났다. 오백 원짜리 동전. 구십삼만 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하고, 통장잔고를 탈탈 털어봐야 이백만 원이 조금 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오백 원도 생활에 도움이 된다. 그나마 오늘 일어난 가장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이내 현실이 눈에 밟혔다. 오백 원짜리 동전은 자꾸 나를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 사실 너의 암묵적인 이별통보가 별로 힘들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나는 왕가위의 영화들을 보면서 이별연습을 완벽하게 마쳤다. 이별 후에 힘들어하는 법도, 너를 스쳐지나가는 법도 모두 배웠다. 오백 원짜리 동전이 나를 공허하게 만드는 것은, 너의 빈자리를 메우기엔 오백 원짜리 동전이 너무 작아서가 아니다. 오백 원이 생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십칠 분 이십사 초 후면 아침 여섯시가 된다. 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오백 원어치 사서 콩나물국을 끓이고 싶어졌다. 고춧가루를 잔뜩 뿌려서 매콤하게. 국물에 밥을 말아 입에 넣으면 허, 뜨거, 할 만큼 뜨끈하게. 그래서 우물우물 씹을 때마다 눈물이 새어나오게. 딱 그만큼 맵고 뜨거운 콩나물국을 끓이고 싶어졌다. 점퍼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사월 이십사일 새벽의 공기는 아직 찼다. 시장 채소가게에 들어가 잠이 덜 깬 할머니에게 오백 원을 쥐어드렸다. 콩나물 좀 주세요.
  어이구, 웬 총각이 이런 시장엘 다 왔댜. 콩나물? 잉, 오늘 새벽에 막 가져온 놈이여. 오백 원어치? 채소가게 할머니는 비닐봉투에 콩나물을 덥석덥석 담아 내미셨다. 잉, 내가 손이 쪼매 커서 그려. 그냥 가져가. 예, 할머니.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자꾸 우리 할머니와 모 습이 겹쳐져보였다. 이깟 콩나물이 뭐라고 새벽부터 장사를 하시는지. 콩나물국을 더 맵게 끓여야겠다.
 
  할머니, 일어나세요. 아침진지 드셔야죠. 콩나물국을 끓이고 할머니를 불렀다. 곤히 주무시던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셨다. 워매, 꿈이였구마잉. 나쁜 꿈 꾸셨어요? 잉. 꿈은 꿈이니께 밥이나 먹자. 할머니와 밥상 앞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콩나물국은 눈시울이 얼얼하게 맵고 뜨거웠다. 아가야, 꿈에서 느이 어매 아배가 홀랑 도망가는 꿈을 다 꿨지 뭐시다냐. 근디 느이 어매 아배는 꼭두새벽부터 워딜 나가서 여태껏 안 들어온다냐. 후딱 집으로 들어와서 밥을 먹어야지. 할머니이.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한 숟갈 더 뿌렸다. 그리고는 한입 크게 떠먹었다. 눈물이 돌 정도로 매웠다. 그래서 한 숟갈을 더 뿌렸다. 이번에는 눈물이 펑, 펑 쏟아졌다. 어매, 야가 갑자기 왜 운다냐. 그니께 뭔 놈의 고춧가루를 그렇게 뿌려대냐, 잉. 할머니. 할머니이. 콩나물국이 너무 맵다.
 
  위-잉.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고, 발신인은 놀랍게도, 너였다. 마음이 덜컥 가라앉았다. 기대와 두려움이 반쯤 섞인 마음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 연락 부탁드립니다.
  마음 한 귀퉁이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연락을, 부탁드린다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저 너에게 전화를 걸고 받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네 번, 일곱 번, 열세 번, 열아홉 번. 열아홉 번이 울릴 때까지 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하게, 너는 부탁한 연락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네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려 핸드폰을 열었다. 메시지 작성 메뉴에 들어가 작성 화면을 열었다. 그러자 무슨 일인지가 이내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너는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려 메시지 작성 화면을 띄워두고 있다가 실수로 전송버튼을 눌러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기본문구인 ‘연락 부탁드립니다.’가 전송된 것이리라. 너는 대체 어떤 메시지를 보내려 한 것일까. 잠깐 동안 조그마한 기대심이 일었다. 그러나 너는 실수로 부탁한 연락을 거부해버렸다. 어쩌면 너는 다신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네가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우리는 이제
  “연락 부탁드립니다. = 더 이상 연락하지 마세요.”
  라는 공식으로 정리가 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내리막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너를
  잡아야
  하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잡지않
  기로 했다. -노자
  에 따르면 불행과 괴
  로움은 인위에서 비롯되
  는 것이고, 잡는다는 것은
  곧 인위인 것이다. 그렇기 때
  문에 내리막에 발을 먼저 들여
  놓은 너를 뒤에서 바라보는 것밖
  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너는 물
  처럼 그침도, 끊김도 없이 끝없이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나는, 너를 지켜봐야만 한다.
 
  아늑하다는 말은 두렵다. 아늑함은 변함이라는 암묵적인 전제 하에 성립하는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를 찾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나는 어른이고, 금액이야 어찌됐든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오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것과 어머니, 아버지가 집을 나간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먼저 찾아 나선 사람은 아버지였다. 스무 살 생일이 갓 지나고였다.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걱정한다던가 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나중에 나갔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사실, 어머니가 어디에 계실지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아버지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형제가 있는 것도, 누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친구도 없었다. 세달 동안 일산, 광양, 포항, 대구, 부산, 목포 따위의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지만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도, 아버지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꼭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결국 아버지를 포기하고 외갓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실 외갓집이라고 해봐야 이모네 집이었다. 대전 한적한 변두리에, 여섯시 내 고향에 나올 것 같이 생긴 마을이었다. 이모네 집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도저히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마주치게 될까봐, 그게 이유였다. 결국 이모네 대문이 잘 보이는 골목길에 숨어서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다.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왜 난 어머니를 찾으러 와 놓구선 들어가질 못할까. 그런데 진짜 어머니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집에 가자고 해야 할까. 담배를 네 개비 째 피우고 있을 무렵, 대문을 열고 한 여자가 나왔다. 어머니였다. 어머니. 어,어,머니. 어머,니. 엄마. 어엄마. 눈물이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러나 입술과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외갓집은 아득해져버렸다. ‘아늑’에 ‘-’ 하나를 더 붙이는 것만큼 쉽고 단순하게, 아늑함은 아득함으로 바뀌었다. 결국,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늑함이, 끔찍하게, 싫다.
 
  할머니. 병원에 같이 가실래요? 야아, 나가 병원에 뭣땀시 간다냐. 늙으매 원래 온몸이 쑤셔뿌리고 그런 것잉께, 신경쓰지는 말어. 그래두요. 할머니 연세도 있고 그러신데 건강검진 한번 받으러 가요. 워매, 야가 돈이 어디있다고 이런댜. 걱정하지 말라니께. 느이 할매 건강혀. 에이, 할머니. 손자가 효도하는 거다, 생각하시구 병원에 같이 가요. 차마, 치매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할머니, 내일 병원에 같이 가는 걸루 해요. 아시겠죠? 허어, 안 가도 된당께 자꾸 그러네. 그려, 그럼. 그렇게 혀. 근디 형국아. 느이 어매 아배는 당최 볼 수가 없다잉.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잠깐 여행 다녀오신다구 며칠 전에 출발하셨잖아요. 그새 잊어버리셨어요? 그랬냐아? 그리고 할머니, 저는 형국이가 아니라 정헌이잖아요. 윤정헌. 손자 이름도 잊어버리셨어요? 워매, 그랬냐아? 미안해서 우짤까잉. 괜찮아요, 할머니.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세상에 할머니 손자밖에 없잖아요. 할머니 손자밖에.
 
  긴급이형, 나와. 긴급이형은 화물차를 몰았다. 형이 긴급이형인 이유는 형의 화물차에 있다. 형은 늘 차에다 ‘긴급수송’이라는 말을 붙이고 다녔다. 겨우 상추쪼가리나 싣고 다니면서 긴급은 무슨 놈의 긴급이냐고 핀잔을 줘도 형은 늘 긴급했다. 그래야 뭔가 있어 보이고, 차들도 가끔 피해준다는 이유였다. 나는 늘, 긴급한 형이 안쓰러웠다. 왜? 왜는 무슨 왜야. 술이나 한잔 긴급하게 마시자구. 술? 좋지. 삼양마트 앞으로 가면 되지? 삼십분만 기다려. 정확히 이십칠 분 십삼 초 만에 형은 긴급하게 나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요즘 힘드냐? 술을 다 마시자고 하게. 잘 됐어. 나도 요즘 힘들다. 소주 두병과 과자 몇 봉지를 펼쳐놓으며 형이 말했다. 형은 요즘에 어떻게 살어? 뭘, 사는 거야 다 똑같지. 애들도 다 잘 크고. 차는? 계속 긴급하게 몰아? 차? 차, 팔려구. 아니, 왜? 그냥. 요즘엔 기름 값이 더 나온다. 차 몰아봐야 손해야. 그렇다고 차를 팔게? 조금만 버티면 경기도 좋아지겠지. 글쎄다. 별루 좋아질 것 같지두 않고. 자꾸 파업하자는 사람들도 많어. 차 팔면? 형수님이랑 애들은? 글쎄다. 어떻게든 되겠지.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냐? 대출 조금 받아서 치킨 체인점이나 열까 생각중이다. 에이, 형. 그건 뭐 쉬운 일이게? 그래도. 나도 언제까지나 긴급하게 살 수는 없잖아. 그러다 쫄딱 말아먹으면? 차도 없고 남은 건 대출금일 텐데. 그땐 집 내놓고 부모님한테 신세 좀 져야지. 그으래. 너는 좀 어떠냐? 나? 나도, 뭐, 똑같지. 할머니는 건강하시구? 어? 응. 형, 나 헤어졌어. 여자 친구랑? 어. 새끼, 그래서 불렀구나. 그냥, 이것저것 힘들기도 하구. 마음이 아프냐? 뭐, 그저 그래. 생각했던 것만큼 아프지는 않아. 새끼야, 거짓말하지 마. 너 지금 되게 초췌해보여. 그래서 잡아는 봤어? 아니, 못 잡겠어. 걔는 이미 마음 떠났는데 뭐. 더 힘들기만 할 것 같어. ……. 술이나 받아라.
  긴급이형은 말없이 술을 계속 마셨다. 삶의 무게가 무거워보였다. 사실은 할머니가 치매라고, 그래서 병원비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형은 형의 현실이 긴급했다. 정헌아. 비틀즈 노래 중에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라는 노래가 있다. 존 레논이 만든 노랜데, 가사 중에 이런 말이 나와.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그 어떤 것도 나의 세계를 바꿔놓을 순 없다고. 존 레논이 이혼과 재혼으로 한참 현실이 버거울 때 만든 노래라고 하더라. 정헌아.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세계를 바꿔놓을 순 없는 거다. 알겠니? 아무리 세상이 등을 돌리고 서있기가 힘들어도 우리는 멀쩡할 거다. 견뎌낼 거라구. 힘내자, 우리. 그래, 형. 힘내자. 힘내자, 우리. 하루가 또 지나갔다.
 
  형이 너를 잡아는 봤냐고 물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너를 왜 붙잡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너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차마 잡을 수 없었다. 너 이전에 만난 여자도, 잡지 못했다. 나는 늘 돌아서는 사람들의 등 뒤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떠나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가 늘 궁금했다. 내가 불쾌해져서일 수도 있고, 내가 괴로움의 원인, 혹은 불행의 원인일 수도 있는 상실에 대해서 도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설령 그들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었다.
 
  김명인 할머니 보호자 분? 들어오세요. 진찰실엔 의사와 할머니,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자 분 되시죠? 예. 이게 할머니 MRI 뇌사진입니다. 사진을 저희가 좀 보니까, 여기 보이시죠? 지금 여기 혈관이 꽉 막혀있습니다. 뇌혈관이요? 예. 뇌경색입니다. 조금 더 심해지면 뇌졸중으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온 몸의 힘이 빠졌다. 옆에 있는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손이 움찔거렸다. 누구의 손인지 따뜻했다. 간호사의 손이었다. 그럼 혹시 할머니가 치매가 오신 것 같은데, 그것 때문인가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구요. 아무래도 연세도 있으시다 보니까. 그럼 수술해야 하나요? 글쎄요, 일단 약을 좀 써보구요, 그래도 나아지는 기미가 없으면 수술을 해야겠지요. 간호사의 손을 더욱 힘껏 쥐었다. 미안해요. 잠깐만 잡고 있을게요. 할머니가 유난히 창백해보였다. 미안해요. 몸에 힘이 빠져서. 진찰실이 점점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아니, 정헌씨. 우리 직원 세 명밖에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면 어떻게 해? 요즘 회사 사정 어려운거 다 알잖아. 죄송해요, 사장님. 사정이 좀 있어서. 사정? 회사를 그만 둘만큼 급한 사정이야? 예. 할머니가 좀 편찮으셔서. 할머니? 아니, 할머니 모실 사람이 정헌씨밖에 없어? 예. 죄송합니다. 어떻게, 새 직원 뽑고 인수인계할 때까지만 있어주면 안될까? 죄송해요. 하루하루가 급한 일이라. 사실, 치매가 오셨거든요. 제 이름도 잊어버리시고 어제 있었던 일도 잊어버리시고 그러시거든요. 어휴. 하늘은 왜 힘든 사람들만 골라서 더 힘들게 하는지. 어쩔 수가 없네. 그래서 책상은 오늘 바로 정리할거야? 예.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가만있어봐. 이따 가기 전에 한번 들렀다 가. 예. 지나치게 쉽게 회사 생활이 끝났다. 개인물건을 정리하고 컴퓨터에 담긴 개인자료를 모두 지웠다. 내 일부분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제 정말, 내 세계엔 할머니밖에 없다.
  사장님,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이거 받지. 퇴직금이야. 많이는 못 넣었어. 요즘 회사 힘든 거 알잖아. 그래도 한 가족처럼 지냈는데 아쉽고 섭섭하네. 나중에 개인적으로 꼭 만나자고. 할머니 잘 보살펴드리고. 치매엔 고스톱이 좋대. 예, 감사합니다. 나중에 연락할게요.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라고. 힘내고.
  일금 오십만 원 정. 봉투엔 오십만 원이 들어있었다. 어제 든 병원비와 약값보다 조금 모자랐다. 퇴직금이 겨우 오십이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회사도 나만큼 힘들었다.
 
 
  할무어요할할눈세니요일기가셨리세요가면발적리빨  탕일문주기좀니아어히없요뷸모
  머세나할머머좀요여거구할쓰어좀요예어음위해좀리  탕굽좀세요요저보요의으일런실
  니요보머니니떠할보기죠머러요와빨여디아치서와좀  탕니열요빨할희시완식시단스게
  주일세니이이보머세일여니지빨주리기냐씨추빨요요  일다어여리머알겠전이네엠로요
 
 
  그렇게 오월 이십오일 아침,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급성 뇌졸중이셨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하루 종일 뽀로로를 보셨다. 뽀로로 비디오는 할머니를 흐뭇하게 만드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할머니께서는 한 회가 끝날 때마다 야이, 근디 쟈 이름이 뭐시다냐. 참말로 쪼막만하고 이쁘게도 생겼다잉. 하고 물어보셨다. 내 이름은 기억하시지도, 묻지도 않으셨다. 어머니, 아버지를 찾지도 않으셨다. 할머니는 그저 뽀로로의 이름이 궁금하실 뿐이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통장잔고 이백만 원과 사채 빚 백오십만 원을 썼다. 겨우 한 달 사이에 삼백오십이 쭉쭉 빠져나갔다. 합리주의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할머니는 생산적인 활동이라곤 전혀 없는, 철저히 소비적인 사람이셨고, 사회의 극소수층이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 할머니셨다. 삼백오십이든 칠백이든 할머니는 나의 세계의 전부인 할머니셨다.
 
  새벽 네 시 이십이 분. 할머니의 장례식장은 고요하다. 낮에 동네할머니들 몇 분이 들렀다 가시고 그만둔 회사 사장과 직원들이 다녀갔다. 긴급이형과 친구들 몇 명도 찾아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쩌면 할머니가 세상을 잊어가는 만큼 세상도 할머니를 잊은 지도 모른다. 가족도 상주인 손자 하나밖에 없고, 조문객도 없는 낯선 장례식에 음식준비를 해주는 아주머니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러다간 빚내서 장례식 치르겠다며 구석에서 수군대곤 했다. 그러나 애써 모른척했다. 그들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결국 아주머니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장례식장을 혼자 지키고 있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때가 자꾸 떠올랐다. 그땐, 이렇지 않았다. 그땐 어머니, 아버지도 있었고 세상도 외할아버지를 잊지 않았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도 없고 그래서 조문객도 없고 세상도 할머니를 잊은 할머니의 장례식과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사이에 놓인 이질감이 부풀어 올랐다. 어머니, 아버지의 부재가 몸서리치게 차갑게 느껴졌다. 스물 두 살의 젊은이가 견뎌내기에도 조금 힘겨운 느낌이다. 왜 우릴 떠나서 할머니의 장례식장을 텅 비게 하는지.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만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서운함이 느껴졌다.
 
  위-잉.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고, 발신인은 놀랍게도, 너였다. 너는 이번에도 실수로 연락을 부탁한 것인지. 핸드폰을 열었다.
  - 진짜 할머니 돌아가셨어? 세상에,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
  눈물이 솟기 시작했다. 이제 실감이 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구나. 네가 온다는 말을 하는 지금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이구나.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과 네가 여길 찾아온다는 것 사이에서 서툴게 서성대는 나는, 슬픔과 약간의 기쁨 중에 무엇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지금 기쁨을 느껴도 되는 것인지, 할머니께 죄송스러웠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올려다봤다. 할머니이. 눈물이 돌았다. 그리고 조금씩,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네가 온 걸까. 눈을 조금 떴다. 그러나 절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남자였다. 아직 너는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굴까. 절을 하는 뒷모습이 무척이나 애처로워보였다. 게다가, 남자는, 울고 있었다.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펑, 펑 울고 있었다. 저 남자는 누굴까. 남자는 천천히 절을 두 번 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분홍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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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urn.

 그는 다소 피곤한 몸짓으로 옷을 벗었다. 텁텁하게 말라붙은 그의 몸에서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 회색빛을 띈 털들이 그의 몸 이곳저곳에 듬성 돋아나있었다. 그리고 깊게 패인 주름들. 멀리서 보면 그는 꼭 코끼리, 같았다. 왜소하고 자그맣게 죽어가고 있는 회색 코끼리.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십칠 번 옷장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옷장 열쇠를 손목에 말아 감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열쇠는 찰랑찰랑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너무 맑아 서러운 소리였다. 그는 소리와 함께 욕탕 문을 열었다. 언제나 같은 불편한 침묵이 수증기 틈새에 배어들어있었다. 십삼 년 째. 그가 이 목욕탕을 다닌 지난 십삼 년 동안 이곳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래된 침묵도, 돌바닥 가득 낀 물때도, 정체불명의 물질들이 부유하는 탕도, 이년쯤 된 예능프로그램을 하루 종일 뱉어내는 텔레비전도. 달라진 것은 그 뿐인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끔찍한 기분들. 그러자 이곳의 모든 것들이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온탕의 물이 너무 미지근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열탕의 물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눅눅한 공기가 그의 목을 졸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둘러 몸을 씻고 욕탕을 나왔다. 수건으로 회색빛 털이 돋은 겨드랑이를 닦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는 거의 구역질을 느꼈다. 거울 속에는 늙수그레한 코끼리 한 마리가 서있었다. 유난히 주름이 깊은 코끼리였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십칠 번 옷장의 문을 열었다. 열쇠는 끊임없이 찰랑거렸다. 그는 서둘러 옷을 입고 목욕탕을 나섰다. 카운터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안녕히 가시라고 텁텁한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인사조차도 그에게는 불쾌하고 불편했다. 문을 거칠게 열고 무기력하게 걷기 시작했다. 어디인지 모를 그 어딘가를 향해서. 하늘엔 유난히 채도가 낮은 구름들이 서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서있었다. 그는 차 위에 올랐다. sm5. 그는 이제 서른아홉이지만 서른아홉에 어울리는 차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매장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차를 사버렸다. 딜러가 시키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자신의 경제 사정으론 조금 벅찬 감이 있었지만 그냥 그 차를 샀다.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리곤 특별하달 것 없는 애정을 실어 차를 대했다. 일주일에 한번 세차, 딜러의 권유로 차 구매와 함께 들었던 자동차보험. 그는 그의 차역시도 자신을 특별하달 것 없는 애정으로 대하고 있다고 느꼈다. 큰 무리 없이 움직였고 큰 사고 역시도 내지 않았다. 툭, 투둑. 하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저 앞의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그는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금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낡은 국숫집이 있는 내리막.    무슨 하늘이 이렇게 구질구질해.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고는 라디오를 틀었다. 99.2㎒. 라디오에선 보청기광고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만 보이는 남자성우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보청기광고를 흘

  • 분홍사슴
  • 2011-12-02
슬프지만 비선형적인 관계(들).

[그림 설명. <그림자의 법칙>.        원 : 자신의 시야.        a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머리 그림자.    b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몸통 그림자.    c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다리 그림자.        a' = 자신에게 보이는 머리 그림자.    b' = 자신에게 보이는 몸통 그림자.    c' = 자신에게 보이는 다리 그림자.]    [<그림자의 법칙> 설명.        원 : 자신의 시야.        a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머리 그림자.    b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몸통 그림자.    c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다리 그림자.        a' = 자신에게 보이는 머리 그림자.    b' = 자신에게 보이는 몸통 그림자.    c' = 자신에게 보이는 다리 그림자.]     유난히 불안정한 날이다. 대기도, 기분도, 그리고 세상도. 모든 건 불안정해서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하지만 예보가 없어서 언제 무너져 내릴지는 알 수가 없다. 우산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우산이, 있는 어딘가로. 그리고 우산이 내게 왔다.    물리적인 것들은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공학도, 화학도, 기상학도 모두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들을 공부하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니까.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세상을 이루는 것들이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왜곡하기로 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조금 멍청한 축에 속하기 때문에 왜곡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림자는 자신의 망막에 맺히는 상과 타인이 바라보는 상이 다르다. 나는 그걸 '그림자의 법칙'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그게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림자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본모습 역시도 내게 보이는 것과 타인이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물리적인 것들과 공학, 화학, 기상학 같은 것들을 왜곡하고 외면하기로 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나는 사회적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자의 법칙'부터 왜곡해야 했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을 왜곡했고, 이젠 지금처럼 손만 뻗어도 어딘가에서 우산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멍청한 축에 속하기 때

  • 분홍사슴
  • 2011-10-18
서울, 2010년 겨울

 유난히 비가 잘박잘박 내리는 밤이었다. 가게에는 오늘따라 사람이 없었고, 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울한 일이나 괴로운 일을 겪은 사람이 아니라면, 비오는 밤에는 누구도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빗소리는 오래된 와인처럼 점점 진해져갔고, 그만큼 우울의 농도역시 진해져갔다. 가게에는 우리 셋만 남아 각자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안녕하십니까. 거, 가게도 다 끝나 가는데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저기 앉아있는 형씨까지 셋이서 가게 문 닫을 때까지 마시자구요.”  라는 그의 말과 함께  “아아. 반갑습니다. 앉으세요. 저기요, 형씨도 여기 와서 앉아요. 혼자서만 마시지 말고 셋이서 같이 마십시다. 이모. 여기 소주 두병하구 낙지볶음 하나 주세요.”  라며 셋이 합석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한참 얘기가 오가던 이혼문제로 속이 불편했고, 그들은 이런 밤에나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괴로움을 떠안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나는 ‘서울, 1964년 겨울’의 서적외판원 같은 심정으로 그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와 ‘안’이 되어주길 바랬다.  “자.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김경운이라고 합니다. 서른일곱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정우진입니다. 서른셋 이구요.”  “반갑습니다. 유광선입니다. 서른둘입니다.”  처음 합석을 권유한 이부터 악수를 청했다. 둘 다 나보다 한참 어렸다. 이것 참, 정말 김승옥의 소설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 웃음이 조금 나왔다.  “다들 어떻게 오늘 같은 밤 여기서 혼자 앉아있게 됐습니까?”        1. 정우진  그는 너를 죽였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동정하거나 연민할 생각이 없다. 기억하는가. 너와 그의 사이를. 너와 그의 사이에는 거리가 수십 개쯤은 끼었었다. 하지만 너와 그는 남남인 것은 아니었다. 너는, 그를, 죽일 만큼 괴롭혔다.    “지난 22일, 충남 논산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용의자 한 씨는 박 씨를 21일 저녁 11시경에 목 졸라 죽인 것으로 밝혀져……. 한 씨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폭력적인 아버지……. 박 씨는 학창시절 학업에 충실하고 운동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학생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특히 박 씨는 모 기업의 중역임이 밝혀짐에 따라 이번 살인사건의 여파가 더욱 클 것으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자꾸 띄엄띄엄 들렸다. 채널을 돌려봐도 모두 너와 그

  • 분홍사슴
  • 201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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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실험정신, 도전정신이 멋진 편린 님의 글!

    • 2011-09-22 21:49:1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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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네요

    • 2011-07-16 22: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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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은 Luis Beltran 作 입니다. * 이 글의 제목은 이장혁 씨의 '성에'라는 곡 중 일부입니다.

    • 2011-07-12 01:55: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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