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기다리는 아이

  • 작성자 맑은빗방울
  • 작성일 2011-12-02
  • 조회수 358

 

01

정희는 항상 기다리는 아이였다.

청소 시간에는 자신이 청소당번도 아니면서 청소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가곤 했다. 또 누군가에게 절대로 먼저 말을 거는 법도 없었다.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보면 정희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의 뒤쪽에 서서 아무런 표정 없이, 웃고 떠들고 있는 아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곤 했다. 밥을 먹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노래를 부를 때도 그렇게 한결같이 무표정이었다. 이미 반 아이들에게서 너무 멀어져버린 정희.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항상 팔에 끼고 다니는 작은 곰 인형뿐이었다.


그렇게 언제나 혼자였던 정희를 뒤에서 바라보고 안타까워만 하던 나였다. 그러던 3월의 어느 날, 내가 정희를 도와줄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 날도 정희는 여느 때처럼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날 여자아이들은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 아이가 공기를 하다가 공기알이 정희가 서 있던 쪽으로 튀자, 정희는 재빨리 공기알을 주워 그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공기알을 받은 그 아이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누가 너보고 가져오랬어? 에이, 드러워.”

하며 공기알을 탈탈 터는 것이었다. 정희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선생님으로써 이 일을 마땅히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정의감에 불타올랐다.

“혜인이랑 정희, 앞으로 나와 봐.”

당당한 걸음으로 나오는 혜인이와 그를 뒤따라오는,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의 정희. 뭔가 잘못되었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선생님이 왜 나오라고 한 것 같니?”

혜인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고, 정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혜인아, 대답해봐.”

혜인이가 말없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번에는 정희에게 물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정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잘못했는데?”

정희의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혜인이는 여전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결국 참된 교육자의 명분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나는 애들 다 있는 곳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정말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뭘 잘했다고 그런 얼굴이야? 그런 행동이 정희한테 어떤 상처를 줄지는 생각 안 해봤어?”

혜인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희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새 반 아이들은 거의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고, 혜인이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잘못했어요. 정희야 미안해…….”


그렇게 나는 적당히 혜인이를 타이르고, 수업이 모두 끝난 후에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아있던 정희에게 다가갔다. 사실 혜인이를 혼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정희와의 상담이었다.

“정희야,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하고 가지 않을래?”

정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희를 자리에 앉히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희는 조금 특별한 습관이 있는 것 같던데, 그렇지?”

정희는 말없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왜 항상 기다리는 거야?”

나는 정희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희의 눈이 흔들렸다. 계속 나의 눈을 피하던 정희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더니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가만히 나를 노려보던 정희는,

“알아서 뭐하게요.”

라고 툭 쏘아붙이고는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가 버렸다. 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래, 아직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되지 않은 거야. 무언가 길고도 기고한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또 정희를 불렀다. 그 아이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것만 같아서였다.

영 못마땅한 표정의 정희가 내 앞으로 왔다. 나는 정희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우리 어제 했던 얘기 계속할까?”

정희가 입술을 앙 물고는 어제보다 더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아니, 선생님은,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너를 더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하기 힘든 거니?”

날카롭기만 하던 정희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의 진심이 통했기를 바랐다.

어느새 두 눈가가 촉촉해진 정희가 마침내 입을 뗐다.

“엄마가……. 엄마가 기다리라고 했어요.”

정희는 작게 한숨 소리를 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어렸을 때 엄마 아빠는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빠는 맨날 술만 먹고 엄마는 맨날 울기만 했단 말이에요. 그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평소처럼 엄마 아빠는 거실에서 싸우고 있었고 저는 제 방 침대에서 웅크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엄마가 더 서럽게 우는 거예요. 비명소리도 들리고. 저는 너무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서 엉엉 울었어요. 엄마가 너무 걱정됐지만 나가면 아빠가 저까지 때릴 까봐……. 저 참 이기적이죠? 그래도 전 항상 마음속으로는 엄마 편이었어요. 엄마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제 귀에 대고 ‘사랑해’라고 얘기해줬으니까요. 엄마만큼은 절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어요. 그런데 그 날 밤부터 엄마에게서 그 말을 들을 수 없게 됐어요. 그 날 오후 눈물범벅에 머리는 산발에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엄마가 짐을 싸고 있는 거예요. 저는 울면서 엄마한테 어디 가냐고, 나도 같이 가자고 떼를 썼어요. 그러자 엄마는 저를 와락 안으면서 “엄마가 미안해”라고 수백 번을 말했어요. 저는 엄마한테 가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죠. 하지만 엄마는 결국 여행 가방을 들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더군요. 저도 허둥지둥 아무것도 들지 않은 유치원 가방을 메고 엄마를 따라갔어요. 현관문 앞에서 엄마는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제 어깨를 붙잡고, “엄마는 지금 잠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서 그러는 거야. 잠깐만, 아주 잠깐 동안만 엄마 쉬고 올 테니까 정희는 여기서 기다려. 끝까지 기다려야 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제 손에 곰 인형을 쥐어줬어요. 이 인형 보면서 엄마 생각하라고. 그러고는 제 얼굴에 몇 번이나 입맞춤을 해줬어요. 그렇게 엄마는 마지막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남긴 채 현관문을 나섰죠. 너무너무 슬펐지만 엄마가 혼자 있고 싶다니까, 제가 따라갈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잠깐 쉬고 오겠다는 엄마의 말을 믿었어요. 그리고 엄마는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니까……. 그때부터 이런 습관이 생겼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 이렇게 착하게 기다리고 있는데도 엄마는 아직 오질 않네요. 하지만 언젠간 오겠죠? 그렇겠죠, 선생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행동이 정희한테 어떤 상처를 줄지는 생각 안 해봤어?’ 나는 혜인이보다 훨씬 더 큰 실수를 했다. 내가 부르르 떨며 혜인이에게 했던 그 말은 오히려 나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정희를 이상하게 생각해왔던 나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 그리고 연민의 눈물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혼자 이 가슴 아픈 고통을 겪었을 작은 아이를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정희야, 얘기하기 힘들었을 텐데,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선생님이 미안해.”

정희는 고개를 저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우윳빛이 된 정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는 이제 이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정희를 보내고 난 뒤, 나는 한참 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있었다.

수줍은 빛의 벚꽃들이 학교 운동장을 향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02

‘아 맞다, 회의!’

나는 그제야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분 넘게 늦었다. 나는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을 씻고, 서둘러 교무실로 달려갔다.

“아니,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신입이라는 걸 벌써 잊었나?”

학년부장 선생님의 날카로운 목소리. 식은땀이 났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담 좀 해 주느라고요.”

다행히 학년부장 선생님은 헛기침만 몇 번 하시고는 계속 회의를 진행하셨다. 그러나 회의 중에도 내 머릿속은 온통 정희 생각뿐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옆자리의 김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그 정희라는 애랑 상담한 거예요?”

나는 화들짝 놀랐다.

“예,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반 애들이 말하는 거 들으니까 7반에 정희라는 애가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그러더라고. 선생님도 참, 힘드시겠다.”

나는 또다시 속에서 참을 수 없는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이상하다니요, 정희 그런 아이 아니에요.”

그러자 김 선생님은 뿔테안경을 올려 쓰더니 한심하다는 듯이 웃었다.

“정 선생님이 처음이라서 잘 모르나본데, 앞으로 매년 담임 맡다보면 항상 반에 그런 애들이 있어. 나도 처음엔 마음 아팠는데, 오래 하다보면 그렇지도 않아. 선생님이 나선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골치만 아프거든.”

비웃음이 가득한 김 선생님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03

그렇게 이런 저런 일들로 1학기는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렸다. 어느새 첫 교사생활의 해도 절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개학 후 며칠 뒤 아침, 8시 30분이 되자 나는 여느 때처럼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엔 순한 양처럼 얌전하게 앉아있던 아이들이었건만, 웬일인지 아이들이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조용조용, 너희들 오늘 왜 그래?”

나는 선생님답게 손으로 칠판을 탁탁 치면서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러자 어떤 아이가 대답했다.

“선생님, 오늘 소연이 생일이에요.”

그때서야 나는 바닥에 잔뜩 떨어져 있는 폭죽과 얼굴에 생크림이 잔뜩 묻은 소연이를 발견했다. 반장 생일이라고 아이들이 케이크를 준비해 와서 축하해준 모양이었다. 놀라긴 했지만 아이들의 우정이 기특해서 그냥 웃어 넘겼다.

“너희들, 선생님 생일 때도 이렇게 축하해 줘야 된다.”

그러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소연이의 성대한 생일 파티는 끝이 났다.

그런데 몰려 있는 아이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혼자 책을 보고 있는 정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혹시 또 정희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지……. 마음이 무거웠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는 어김없이 끝까지 교실을 지키고 있던 정희에게 물었다.

“정희야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

정희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 아닌 웃음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살짝 열린 창문 밖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정희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오늘은 제 생일이기도 하거든요, 아무도 몰랐겠지만.”

정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정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배어있는 칼날 같은 외로움이 나의 가슴에도 번졌다. 내가 말했다.

“이제 정말 가을 같다. 이렇게 서늘한 바람이 부는 거 보니까. 얼마 전만 해도 푹푹 찌는 한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네……?”

“지금 선생님의 마음 상태는 딱 가을인 것 같거든. 그렇게 춥지도 않지만 그렇게 따뜻하지도 않은, 방금 막 뜨거운 여름이 지나간 초가을 말이야.”

나는 그러면서 교실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가을바람이 얼굴에 닿자,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 때도 이랬었지.

“네 마음에 겨울이 찾아올 때면, 기억해. 겨울 뒤에는 항상 봄이 오는 법이야.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다음에 오는 봄은 더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지지. 네 마음에도, 선생님의 마음에도 언젠가는 봄이 올 거라는 말이야.”

연습해둔 것도 아닌데 말이 술술 나왔다. 정희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어디선가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어. 눈과 얼음을 가장 먼저 뚫고 밀어 올리는 들꽃,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그 말에 정희는 해맑게 웃었다. 정희가 눈웃음을 친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이렇게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인데.

“이제 12시 정도 됐으니까, 네 생일 반 정도 남은 거지? 나머지 시간은 선생님이 책임질게! 따라 와.”

우리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교실을 나왔다. 정희도, 나도 무거웠던 마음을 가을바람에 실어 멀리멀리 보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04

“선생님, 저번엔 감사했습니다. 피자 진짜 진짜 맛있었어요.”

쉬는 시간 교무실을 찾아온 정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정희의 밝은 미소는 나까지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제 정희는 적어도 나에게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그 머리띠 하니까 더 예뻐 보이네.”

정희가 수줍게 웃었다. 사실 내가 어제 생일 선물로 사준 머리띠였다.

“어제 아버님은 생일 축하해주셨니?”

갑자기 정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차, 괜히 물어봤다. 생각하기 전에 말을 해버리는 버릇은 나의 고질병이었다.

“아빠는 어제 바쁘셨거든요.”

정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곰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럼 가봐.”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정희가 교무실 밖으로 나가자, 선생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수다를 퍼붓기 시작했다.

“정 선생님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얼마짜리 피자 사줬어? 머리띠는 또 뭐고?”

“그렇게 일일이 애들 생일 챙겨주다 보면 남아나는 돈이 없을걸.”

이제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시끌시끌한 선생님들 사이를 조용히 빠져나와 화장실로 갔다.

“하…….”

나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오늘은 우울한 날이다. 주섬주섬 코트 주머니 속에 넣어둔 그의 사진을 꺼냈다.


교무실 내 자리에 놓인 그와 나의 사진을 처음 본 선생님들은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어머 정 선생님 애인이야? 좋겠다.”

“언제 한 번 데리고 와 봐.”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 대신 슬픈 미소로 대신하곤 했었다.


사진 속에서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웃고 있다. 정희처럼,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 사진의 배경이 된 남이섬의 메타세콰이어 길이 우리가 함께 걸었던 마지막 장소가 될 줄은, 마냥 행복했던 그때는 몰랐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푸르른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울창한 숲길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은 원래 그곳의 일부였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그가 곁에 없는 난, 뭘 해도 부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이제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에는 이미 익숙해졌고, 지겨울 만큼 눈물도 많이 흘려왔으니까. 하지만 또다시 눈물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진 속 그의 얼굴이 내 눈물로 번졌다. 그가 떠난 지 정확히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벌써 일 년, 아니, 아직도 일 년밖에 안 됐다. 10년은 된 것처럼 아득한 기억인데.

수업종이 치자, 나는 재빨리 눈물을 닦고 교실로 갔다. 오늘은 마스카라를 안 하고 와서 다행이었다.


05

밖에선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원하게 내리는 소나기도 아니고 찔끔찔끔 기분만 나쁘게 내리는 습한 비였다.

그 날도 역시 아이들이 모두 교실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정희는,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아니, 단지 심각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은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새파래진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정희야?”

“애들이……. 애들이 제 인형을 마구 밟더니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어요.”

좀처럼 울지 않던 정희가 어깨를 들썩이며 큰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내 이것들을 그냥!’

“선생님이랑 같이 나가서 찾아보자.”

“쉬는 시간에 나가서 찾아봤는데 없어요. 잃어버렸다구요!”

결국 정희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그거 없으면 못 살아요. 이제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이제 나는 살 이유가 없어요.”

정희는 눈에 초점을 잃은 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학기 초의 아무 표정도 감정도 없던 그 아이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정희를 일으켜 세웠다.

“선생님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줄게. 만에 하나 못 찾으면 똑같은 인형으로 사줄게.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정희야. 응?”


나는 그 곰 인형을 짓밟고 밖으로 던져버렸다던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그 아이의 엄마는,

“그런 말 못 들었는데요. 그리고 뭐 중학생이나 된 애가 그까짓 인형 하나 갖고 난리예요?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또 뵙죠.”

라며 단숨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누군가에게는 그까짓 인형이 한 사람에게는 만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증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 아이의 엄마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간신히 정희를 진정시키고 집으로 보낸 다음, 나는 학교건물 밖으로 나가 빗속에서 젖는 줄도 모르고 곰 인형을 애타게 찾았다. 온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찾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인형은커녕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경비아저씨에게도 3층에서 떨어지는 인형 같은 거 못 봤느냐고 여쭤봤지만 헛수고였다.

‘이 녀석들, 얼마나 멀리 던진 거야. 아님 다른 사람이 가져갔을 수도 있지. 아, 어쨌든 더 이상은 힘들어서 못하겠다.’

나는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 교무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오늘은 업무가 별로 없었다.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젖었냐며 걱정스레 물어봤지만 나는 뭐 좀 사오느라 그랬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미쳤다고 생각할 테니까.

허둥지둥 업무를 끝내고 나서, 나는 코트 주머니에 있던 사진을 꺼내 다시 원래 자리였던 액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행히 사진은 젖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액자를 책상 위에 다시 갖다놓으려던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 손에 힘이 풀려 그대로 액자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액자는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액자 속의 다정한 우리의 모습도,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들을 보면서 나는 치울 생각도 않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무슨 일이냐며 화들짝 놀랐다. 멍하니 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며 유리 조각들을 치웠다. 사진만은 조심스레 주워 책장 사이에 껴놓았다. 쓰레받기에 쓸어 담은 유리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나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06

차에 올라탄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정희의 곰 인형이 사라졌고, 우중충한 날씨에다가, 애지중지하던 액자마저 깨져 버렸다. 무엇보다 정희는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더는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정희의 집으로 가야 했다, 꼭 가야할 것만 같았다. 나는 재빨리 교실로 올라가 학생 주소 목록을 찾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희의 주소를 메모한 뒤, 다시 차에 탔다.

‘설마 그 어린 아이가…….’

괜한 걱정이길 바랐다. 헛된 예감이길 바랐다. 그러나 자꾸 정희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건 왜일까.

신호등이 빨간불에 걸릴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설사 민폐가 된다 하여도, 꼭 가야만 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5분쯤 지났을까. 나는 정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무렇게나 주차를 해놓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꼭대기 층이었다.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렇게 혼자 주문을 외우던 도중, 16층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원래 현관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사람도 있으니까, 라며 나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나는 제발 아무 일 없길 바라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정희를 불렀다.

“정희야, 선생님 왔어. 전화도 없이 와서 미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정희야!”

다시 한 번 불렀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잠시 밖에 나간 거야.’

눈을 뜨기 무서웠다. 일 년 전 오늘과 똑같은 상황을 보게 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결국 눈을 뜨고 집안을 둘러보았다.

적당한 크기에 잘 정돈되어 있는 집, 그러나 어딘가 공허한 느낌을 감출 수 없어 보이는 집이었다.

거실에서 방 안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는 입을 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침대에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정희의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들이 쏟아져 있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나는 몸을 일으켜 정희가 잠들어 있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면제였다. 정희를 영원히 잠들게 만든 그것의 정체는 바로 수면제였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을 두 명씩이나 데려가 버린 그 혐오스러운 약. 주르륵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벌써 몇 번째 흘리는 눈물인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잠들어있는 정희. 마지막 길에는 엄마가 함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끝까지 이 아이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며 마지막 길을 걸어갔겠지. 항상 기다리는 아이였으니까. 역시 엄마라는 큰 빈자리는 나 같은 선생이 감히 메워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정희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그 위로, 일 년 전 이렇게 떠나보내야 했던 내 남자친구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어쩌면 이 둘은, 처음부터 같은 운명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의 벨소리였다. 나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않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그런데 그 벨소리는 좀처럼 그치지를 않았다. 어지간히 길게 기다리는 전화였다.

‘혹시……?’

뭔가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전화벨은 멈췄다. 그리고 전화기에서 음성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희야, 왜 전화 안 받니. 엄마야, 엄마. 정희야, 사랑하는 내 딸, 너무 보고 싶었어. 그 동안 기다려줘서 너무 고맙고 미안해. 정희야……. 이 못난 엄마를 용서해주렴. 그래도 언젠가 꼭 돌아온다는 약속 지킨 거야. 엄마가 정말 미안해……. 지금 정희 집으로 가고 있어. 그럼 이따 보자, 정희야. 엄마가 정말 정말 사랑하고, 미안해…….”






맑은빗방울
맑은빗방울

추천 콘텐츠

겨울꽃

* 창밖을 보니 눈이 많이 와. 이런 날 아무 약속 없이 집에만 있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하얗게 쌓이는 눈은 집에서 멀리 볼 때만 예쁘고 사랑스러운 법이니까. 밖에 나가서 직접 만나보려 하면 춥고 미끄럽기만 하고, 전혀 낭만적이지도 않지. 거리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봐. 꼭 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우리 둘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한 것 같지? 어느 날 네가 내 어깨를 잡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었지. 도저히 날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약한 마음으로 흔들리는 네 눈을 나는 놓치지 않았었어. 그 날은 우리가 2년 동안 만나는 동안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언성을 높인 날이었어. 도대체 내가 왜 그랬는지, 이제 알려주려 해. 그리고 이제, 널 떠나려고 해. 지금 너와 나에게 필요한 건, 창밖을 보는 나와 창밖에 내리는 눈 사이의 거리, 그래, 딱 그 정도의 거리가 필요한 거야. 서로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 거리. *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해. 나는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애가 아니었는데. 때때로 불행은 더 큰 행복을 불러온다는 생각을 한 시절이 있었어. 그러나 마찬가지로 행복은 더 큰 불행을 불러온다는 것을 이제는 알지. 얼굴도 성격도 성적도 평범하기 짝이 없던, 동그란 안경에 비쩍 마른 이과 여고생이었지. 학교생활도 참 지루하기 그지없었어. 하루하루 달력 날짜만 바뀌어 있을 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른 게 하나도 없었거든. 그렇다고 그런 일상에 불만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데 매주 반복되는 수업 시간표 속에서, 딴 과목은 몰라도 생물은 참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 막연히 나중에 커서 생물 선생이나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지. 자기를 끊임없이 복제하는 DNA라니, 게다가 반드시 대칭 구조로 존재하는 그 아름다움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게 똑똑한 시스템이 내 안에 존재한다니. 내 몸이 살아 움직인다는 게 처음으로 참 대견하게 느껴졌었지. 하지만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DNA 복제 시스템에도 문제는 있었어. 너도 알다시피, 끝부분의 핵산이 복제되지 못해 유전정보가 날아가 버린다는 것. 하지만 우리 몸은 유전정보가 들어있지 않은 짧은 길이의 사슬인 텔로미어를 DNA 양 끝에 붙임으로써 정보의 손실을 예방한다고, 생물 선생은 덧붙여 이야기해줬었어. 참 똑똑하지 뭐야. 꼭 비엔나소시지처럼 생긴 게, 우리의 수명을 결정한다는 게 참 신기했지. 텔로미어가 짧아질수록, 우리는 늙어간다는 거고, 그런 텔로미어의 길이를 조절하는 텔로머라아제는 우리 몸에서 세포분열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난세포나 조혈세포에서만 활성화되어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텔로머라아제가 활성화되어있는 세포는 불행하게도 난세포나 조혈세포뿐만이 아니었지. 암세포 역시 텔로머라아제가 활성화되어있어서, 텔로미어의 길이가 줄어들지 않고 무제한으로 증식한다는 거였어.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 무.제.한.으.로.증.식.한.다. 금방이라도 수십억, 수백억 개의 징그러운 암세포들이 내 몸을 덮치는 상상. 생물 수업시간에 그런 무서운

  • 맑은빗방울
  • 2014-01-05
젖어도 괜찮아

1 건물을 나와 밖으로 향했다. 오전부터 지금까지 건물 안에 있느라 보지는 못했지만, 눈부시게 맑은 하늘이다. 오랜 업무시간에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도 정류장에 오는 아무 버스나 잡아타서, 비어 있는 아무 자리에나 앉아, mp3에서 흘러나오는 아무 음악이나 들으며 아무 의미 없이 집에 도착하게 되겠지. 평범한 나날들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날, 딱 그날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결코 평범한 날은 아니었다. 도무지 평범할 수가 없는 날이었다. 생각하면 얼굴뿐만이 아니라 뇌 속까지 부끄럽게 달아올랐다. 무척 넓은데다가 쉴 새 없이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전시장, 그 엄청난 소음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칸막이 뒤쪽에 쪼그려 앉아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도 없이 질질 짜고 있는 여자애의 모습이란. 그리고 같이 일하는 여자애에게 아이스커피 한 잔을 건네는, 아주 작은 호의를 베풀려다 안 보는 게 나았을 법한 꼴을 봐버린 남자애. 하지만 고맙게도, 아니 고마워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남자애는 너무도 태평한 표정으로 커피를 건네 왔다. “우리 부스 도와주시는 선생님이 사오신건데, 많이 남아서.”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얼굴로 커피를 받아들자, 할 일을 마친 남자애는 유유히 사라졌고. 그랬기에 순간 내 얼굴 상태가 괜찮은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곧바로 휴대폰 거울에 비춰본 내 얼굴은, 뭐랄까, 도저히 태평한 얼굴로 그냥 커피만 주고 갈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배려, 라고 불러야하나.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행동은. 2 여름방학 하루 전날, 담임은 열 명 남짓한 애들을 교무실로 불러오게 했었다. 담임이 부른 아이들의 공통점은 나뿐만 아니라 불려온 아이들과 불려오지 않은 아이들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성적으로 봤을 때 상위권에 속하는 아이들이었다. 왜 방학 전날까지 오라 가라 지랄이야, 거칠게 불평하는 애들도 있었다. 웅성웅성하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이번 여름방학에는 무슨 드라마를 다운받아 볼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공기가 바뀌자, 애들은 모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갖다 대고 무언가 하고 있던 담임이 화들짝 놀라며, 우리를 보며 급조한 미소를 지었다. “어 그래 왔구나, 너희들. 잘 왔다.” 담임은 일렬로 얼음처럼 서 있는 우리를 왼쪽부터 쭉 훑어보고는 말했다. “어 그래그래, 다 왔네. 너희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신경써주고 있는지는 알지?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위해 또 준비한 게 있어. 뭔지 궁금하지? 뭐일 것 같아 영수?(영수는 우리 반 일등이다.) 그래그래, 너희들은 상상도 못했겠지. 분명 좋아할 거야. 자 이제 내일이면 여름방학 시작이지? 물론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하느라 바쁠 건 알지만, 알다시피 대학가는 데에는 봉사활동도 중요해. 너희들은 입학사정관제도 준비해야할 아이들이잖니. 그래그래, 그래서 선생님이 너희들을 위해 끝내주는 봉사활동을 신청해 놨다. 요 근처 국제전시장 알지? 거기서 내일부터 전국과학축전이 열리는데, 외국

  • 맑은빗방울
  • 2013-12-15
매점

고등학생이 되어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학교 안에 매점이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땐 아무리 배가 고파도 4교시가 끝날 때까지 힘겹게 견디면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면, 이제는 지갑 속에 동전 몇 개나 지폐 한 장만 있으면 언제든지 배를 채울 수 있다. 또 미술 시간 준비물을 안 가져왔을 때, 슬쩍 가서 도화지 한 장을 사 올 수도 있다. 점심 메뉴가 맘에 안 들 때는 친구들과 함께 컵라면 하나를 사서 훌훌 불어 먹을 수도 있다. 매점이라는 장소를 처음 가 봤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우스갯소리로 ‘우리 학교 매점엔 껌 빼고 다 판다’는 말을 했었는데, 정말 그런 것만 같았다. 과자, 아이스크림, 컵라면 같은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양말에 노트에 슬리퍼에, 심지어 수학의 정석까지. 정말 없는 게 없었다. 매 쉬는 시간마다 들러서 먹을 것을 고르는 재미, 친구에게 돌아가면서 얻어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직 매점에 드나든 경력이 몇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3년 후 고등학교 생활을 돌이켜보면 매점에서의 추억이 많이 쌓여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녀석에게 매점 가서 탱크보이를 사달라고 졸랐다. 숙제를 보여줬으니까 이 정도 사주는 건 당연하지, 하고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응큼한 핑계일 뿐이라는 건 녀석도 눈치 챘을 거다. 져 주는 척 웃으면서 나에게 꿀밤을 먹이던 그 녀석. 아프지도 않고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냥, 녀석의 그 실없는 웃음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녀석은 먼저 나를 앞질러 갔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폼이 우스웠다. 나도 짧은 다리로 동동거리며 녀석을 쫓아갔다. 매점으로 가는 길, 5월이 왔다는 걸 티내고 싶어 죽겠다는 듯 교정의 벚꽃은 만발해 있었다. 흩날리는 새하얀 벚꽃 잎이 눈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했다. 화사한 벚꽃 잎은 푸른 하늘에 떠다니며 구름과 한 몸이 되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옆을 보니 녀석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닮았다. 녀석은 저 눈부신 벚꽃을 닮았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매점에 다 와버렸다. 자랑스럽게 유리벽에 걸려있는 아이스크림 봉지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탱크보이를 가리켰다. “난 저거.” “저게 제일 비싼 건데, 꼭 먹어야 되냐?” “응, 난 하얀색이 좋거든.” “아이스크림을 색깔 보고 먹는 애가 어딨냐.” 녀석은 투덜대면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아줌마 여기 탱크보이 하나, 빠삐코 하나 주세요. 시커먼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는 남자아이와 새하얀 배 맛 아이스크림을 먹는 여자아이는 꽤 잘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했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나는 혼자 좋아서 헤벌쭉했다. 녀석은 아무 걱정도 없이 아이스크림만 쪽쪽 빨고 있었다. 녀석은 말을 툭툭 내뱉으면서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명 우린 나란히 걷고 있었다. 녀석의 발이 한 발짝 앞으로 나가는 순간마다 내 발도 한

  • 맑은빗방울
  • 2012-12-16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