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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 작성자 질리지않아
  • 작성일 2011-12-31
  • 조회수 666

아파트를 나가면 바로 보이는. 분리수거함 앞에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겨울에 보면 눈이 쌓여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케 하는.

쓰레기봉투들.

하얗게 잘 포장된. 꼭 크리스마스 날 산타할아버지가 건네줄 선물처럼. 하지만 가까이 가면 눈을 돌리게 되고 코를 틀어막게 되는. 그런 것들이 심장 한구석에 피라미드처럼 쌓이면 나는 설거지를 하게 된다. 그래, 분명히 그러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수도꼭지를 위로 올리고 물이 나오면 아버지가 때를 밀기 전에 탕에 들어가 몸을 불리는 것처럼 접시들을 대야에 담아놓으면 되는 것이다. 몇 분 후에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접시를 하나 들어 그것의 원형도 찾아볼 수 없게 거품만 잔뜩 묻히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수도꼭지를 위로 올려 그것의 원형을 찾도록 빡빡 거품을 씻겨주면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목욕하는 것처럼 똑같이.

“쨍그랑!”

하지만 오늘은 매일 밤 오는 쓰레기청소부가 분리수거함 앞을 그냥 지나쳤는지. 혹은 그것들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착각해선지. 마음 한구석 속 쓰레기가 그대로다. 검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거품이 가득 찬 밥공기 안에 거품이 붉게 터진다. 누군가를 향한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이틀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심장 속에서 붉게 터져 오른다. 아프다. 심하게.

4. 항상 나의 성적에 붙는 숫자.

“한성아. 너 성적 좀 올려야 하지 않겠니?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전교 4등·········.높은 등수이긴 하지만············.”

“알아요. 선생님·········.”

“이번이 마지막 시험인 거 알지?”

“예.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가 봐.”

선생님의 부름에 끌려가듯이 간 교무실에서 나왔을 땐 놀이공원에 고장 나서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는 기분을 느낀다. 조명은 무슨 일인지 다 소등되어 있다. 유일하게 빛나는 곳은 내가 남아서 공부할 교실이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간신히 한 손으로 창가에 기대서 걷는다. 터벌터벌. 걸음은 내가 옮기는 것이 아니다. 옮겨지는 것이다.

“이봐! 유씨! 무슨 일이야?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아?”

창명이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얹는다. 나보다 등수 높은 자식········. 혼곤한 정신이 맑게 트인다.

“어··········.아냐. 괜찮아.”

“마지막 보충수업 들으러 가야지.”

“응.”

녀석이 나보다 먼저 교실로 들어간다. 내 손목시계가 오후 11시를 가리킨다. 최상위권 학생들만 들을 수 있는 야간 특별 수업. 전교 1등에서 5등만 들을 수 있는 정말 심화한 수업이다. 물론 이곳은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사립고니 수업비는 엄청나다. 그러니 돈 낭비 안 하려면, 부모님께 미안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면, 정신 제대로 챙기고 수업 들어야 한다. 확실히 회전목마의 여운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손으로 이마를 때려본다. 이마가 빨갛게 변한다.

“여기서 뭐 해! 선생님 들어오셨다.”

“어······.”

정한이도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교실로 들어간다. 내 등수 바로 밑에 있는 자식·········. 교실로 발을 들이민다. 어느 교실보다 휑한 교실. 교실에는 칠판이 있고, 교탁이 있고, 그리고 책상이 달랑 다섯 개다. 왼쪽 창가부터 차례대로 자신의 순위에 맞게 앉는다. 난 4. 중앙쯤에 있는 내 자리는 창가 쪽에 있지 않아 찬바람이 들어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문쪽에 치우쳐 있지 않아 문을 여닫아야 하는 귀찮음을 피할 수 있는 명당이다. 난 그 명당에 앉는다.

“자! 집중! 오늘은 전에 예고한 대로 비문학 지문을 풀도록 하겠다! 이번 건 만만치 않으니 잘 듣도록!”

모두가 수업에 집중한다. 그러나 50분의 수업시간 동안 다 집중하지 못한다. 5등이 날 노려보는 느낌도 받고, 내가 은연중에 3등부터 1등까지 흘끗흘끗 보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내가 이 명당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도록 한다. 마음속에 누군가가 자꾸 내 머리를 치며 따라오는 자들을 보라고 혹은 앞서 있는 자들을 보라고 지시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 수업 끝! 인제 그만 귀가하도록!”

3만 원짜리 수업이 50분 만에 정확히 끝났다. 1등은 도서관을 갈 것이고, 2등도 도서관을 갈 것이고, 3등도········· 그래,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난 그들과 달리 체육관을 간다.

“가자!”

창명이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래도 이놈이 이 그룹 중에서는 가장 친하다고 볼 수 있는 놈이다. 물론 전에는 친분이 없었지만 이 수업을 듣게 되면서부터 약간씩 친분이 쌓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보충 수업이 끝나고 이 자식의 도서관 가는 길과 나의 체육관 가는 길이 같아서 더 그랬는지도.

어두운 복도를 한 칸 한 칸씩 내려가다 보면 마치 지옥을 갈 때도 이럴까 생각한다. 죽고 난 후에 염라대왕 앞에서 나의 죄를 측정하고 내가 지옥에 가야만 한다고 선고가 난 후에 지옥으로 향할 때, 그 복도도 이렇게 어두울까 생각한다. 그래, 차라리 지옥으로 향하는 그 길이 나은 걸지도.

“오늘따라 더 암울해 보인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쨔식! 괜히 축 처지고 있어.”

창명이 지옥 길이 싫은지 빠르게 교문을 나간다. 그러나 나는 터벌터벌 교문을 향해 나아간다. 순간 튀어나오는 차량. 공기를 찢는 브레이크 소리. 힘없이 쓰러지는 창명. 브레이크 소리보다 더 사나운 우리 담임선생님 비명. 아스팔트에 흥건한 피. 걸음을 뗄 수 없게 된 나.

이크 애크 이크 애크 이크 애크 이크·········.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풀잎들처럼. 뜨거운 햇볕에 못 이겨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추위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흩날리는 눈발처럼. 몸에 힘을 빼고 자유롭게.

“유한성! 제대로 못 하나! 공격할 틈이 너무 많이 보여! 어디다 정신을 두는 거야!”

그러나 자유롭지 못하다. 온몸에 피를 잔뜩 묻히고 쓰러져 있던 그가 내 등에 업혀 있는 느낌이다. 관장님이 안다리를 걸어오신다. 택견을 배우러 왔건만 관장님은 씨름 기술을 자주 이용하신다. 앞으로 제대로 넘어졌다.

“꼴좋다! 빨리 집에 가봐!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온몸에 무언가 돋아나는 느낌이다. 알레르기처럼 가려움이 온몸을 감싼다. 손톱으로 벅벅 긁고 싶어진다. 1학년 때부터 쭉 전교 4등이란 자리를 발전시키지 못한 내가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한다. 가서 올리지 못할 등수를 올리려고 애써야 한다.

집에 왔다. 역시 엄마는 역정 낸다.

“또 체육관 갔다 왔어! 시험이 코앞인데!”

“스트레스받는 일 있어서!”

엄마의 말은 되도록 빨리 끊는 게 최우선이다. 길게 들어봤자 1년 전부터 들어 온 이야기를 또 할 것이니까. 수시, 정시, 입학사정관, 나의 비전, 어쩌고저쩌고·········. 말 끊는 데 가장 효과적인 행동은 욕실로 도망치는 것이다. 내가 학교 끝나고 체육관에 가서 땀을 미칠 듯이 빼는 것은 목욕과 함께 날려버리면 하루의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의 잔소리도.

목욕은 참 쉽다. 수도꼭지를 위로 올리고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기다린다. 물이 어느 정도 차면 들어가 하루 동안 쌓인 노고를 풀어준다. 어느 정도 하루의 노고가 풀리면 욕제에서 나와 타월에 거품을 잔뜩 내서 나도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로 몸 전체에 거품 칠해준다. 그다음엔 당연히 수도꼭지를 다시 위로 올려 흐르는 물에 나의 본연의 모습을 찾도록 거품을 씻어주면 된다.

시험도 이렇게 쉬웠으면·········. 욕실을 나와 옷을 입고 방에 들어가면 일단 책상 위에 책을 펴놓는다. 하지만 공부는 목욕처럼 쉽지 않다.

“아들! 이거 먹고 해!”

쉽지 않은 일은 더욱 쉽지 않게 만드는 건 내가 아니다. 엄마다. 아빠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 주변 사람들이다.

“뭐야········. 밤중에········.”

“우리 아들 대견하니까. 이번엔 좀 오르겠지?”

지겹다. 그들이 갖는 나에 대한 기대가 내가 나에게 갖는 기대보다 크다는 진실이.

“노력하고 있어·········.”

요즈음 더더욱 공부가 싫어진다. 의무감이 나를 짓누르지만, 불안함이 나의 옆구리를 찌르지만, 주위에 시선이 가슴을 파고들지만, 정작 나의 열정은 시무룩하다. 이게 모두 계속해서 나의 성적 앞에 붙는 똑같은 숫자 때문일 것이다.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 담임선생님은 창명이가 중환자가 되어 며칠은 못 나올 거라 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시험이 코앞인데 중환자가 되었다는 것은 결국엔 시험을 못 치른단 얘기이다. 즉 나의 순위가 손쉽게 한 단계가 올라간 상황이다. 입을 다물고 있던 열정이 슬슬 입을 벌린다. 어제만 해도 죽어 있던 내 눈빛이 살아남을 느낀다. 수업이 여느 때보다 더 잘 들린다. 2등도 추월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자! 수업 끝입니다. 이제 점심시간이죠? 급식 먹고 오세요!”

모두가 왁자지껄해지는 점심시간. 역시 창명이 얘기가 빠지면 섭섭하다.

“근데 그 녀석 시험 못 봐서 어떡해?”

“시험 못 보면 점수는 중간고사에 칠십 퍼센트랬나?”

“근데 사정 있으면 다르지 않아?”

“아냐. 맞아. 어떤 이유에서든지 시험 당일 날 보지 못하면 그 전 시험에 칠십 퍼센트!”

이러한 얘기들이 밥을 먹는 와중에 오간다. 칠십 퍼센트던 아니던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나의 순위가 처음으로 변동할 수 있다는 것.

점심시간이 끝나고 식후 오는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각자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나로 말하자면 그냥 복도를 걷는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지 않게 정확한 걸음으로 터덕터덕 걸어나간다.

“예·······. 어머니········.”

그러다 미술실 주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왠지 담임선생님 목소리인 것 같아 걸음을 멈췄다.

“예·········. 사고는 잘 처리했습니다. 예··········. 티 안 나게 잘했습니다.”

순간 굳어버리는 내 모든 신경.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두 눈을 질끔 감는 걸로 막는다.

“예········. 통장에 입금 확인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심장이 19년 동안 드러내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쿵쾅꿍꽝! 꿍꽝쿵쾅! 내 심장 소리가 선생님에게도 들릴까 봐 겁이 날 정도로 크게 뛴다.

끼익-

미술실 문이 열린다. 굳어 있던 말초신경이 흐물흐물해지며 왼쪽 눈에서 눈물이 약간 빠져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위에 있는 마포를 잡고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한성이 청소하니?”

“예········.”

선생님께서 밝게 웃으며 유유히 내게서 멀어진다. 두렵다. 저 웃는 얼굴 아래 도대체 몇 개의 얼굴이 있는 것일까.

다음 수업시간에 나는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담임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수업에 집중할 때면 내 뇌리 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수업이 끝날쯤에 결심했다. 모든 걸 선생님에게 말하기로. 내 발은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교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입은 굳게 다물어져 버렸다.

‘그래. 선생님 덕분에 등수 하나 올라간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모든 걸 지워버리기로 했다. 점심시간 때 들은 그 모든 것을.

저녁 9시. Best 5 첫 교시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 하필 그 많은 선생 중 담임 시간이다.

“자! 한성이 어머님께서 너희에게 늦은 저녁이라고 빵과 우유를 돌리셨다. 든든하게 배 채워라!”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가 또 나서서 말썽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웃으며 빵과 우유를 하나씩 가져가는 모습을 보니 뭔가 뿌듯하다. 모두 빵을 야금야금 먹는다. 그러나 저녁에 우유는 부담스러운지 모두 각자 가방에 넣어둔다.

1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 2등이 내게로 왔다. 2등········오석환, 내성적이고 무뚝뚝한 녀석.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돌아가셔 할아버지 손에 컸다고 한다. 그는 농업과 어업을 함께 경영하셨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또한 그는 어릴 때 무슨 책을 그리도 많이 읽었는지 모르는 작가도 없고 상식도 없다. 그런데 그는 시골에서 왔다는 자기 자신만의 열등감 때문인지 이 사립 고등학교 와서 사귄 친구가 없다 한다. “네········나는 빚지고 못사는 사람인지라·······. 매점 가자. 내가 빵 사줄게.”

그런 소심한 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워낙 과묵하다고 소문난 아이라 나는 약간 당황했다.

“나?”

“응. 그럼 나한테 빵 준 애가 너 말고 누구인 노?”

“그래·········그럼.”

남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이번 기회로 이 녀석은 어떤 녀석인지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떠도는 소문 말고.

우린 사이좋게 매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말대로 내게 빵을 하나 사주었다. 매점에서 파는 흔한 피자 빵, 그날 따라 특별한 맛이 났다. 역시 그는 과묵했다. 빵을 먹는 내내 내게 한마디도 안 했다. 결국 어색함을 못 견디고 내가 대화를 유도했다.

“너도 2등 지키려면 힘들겠다.”

“공부는 누구나 힘든기라.”

그는 묻는 말에는 대답을 매우 잘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물어보지는 못하는 성격이었다.

“보통 몇 시까지 공부하니?”

“새벽 2시? 그 이상은 못하겠더라!”

그는 과묵하지 않았다. 다만 질문하는 것을 많이 해보지 않은 약간은 소심한 남자였다.

“올라가자. 수업 시작하겠다.”

“그래.”

두 번째 보충이 시작됐다. 2등은 방금 먹었던 빵에 목이 막혔던지 가방에서 우유를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나도 그를 따라 가방에서 우유를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그러나 그때 수학선생님께서 들어오신다. 성격이 이상하기론 우리 학교에서 1등인 선생님이다.

“누가 우유 마시래! 밤에 키 크려고!”

매일 이상한 유머를 구상하시며 옷은 상의와 하의 색깔을 맞춰 입고 학교에 오토바이까지 타고 오시는 진짜 이상한 선생님이다.

“빨리빨리 마셔! 너흰 그래도 성장판 닫혀서 키 안 커!”

우유를 다 마신 그가 내 쪽을 본다. 나도 우유를 다 마셨다. 그가 미소를 짓는다. 그의 웃는 얼굴은 처음이다. 나도 그를 향해 웃어준다. 왠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드디어 보충 3교시. 수업이 끝나고 이제는 그와 하교해야 할 듯하다. 내가 그를 질문 잘하는 남자로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리 선생님께서 한국지도는 이제 지겹다며 하소연을 한다. 공부하는 우리보다 더 지겨운지 따져보고 싶다.

“자!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무리할까요? 약 5분 남았는데·······.”

“예!”

모두가 일어나 짐을 싼다. 교장선생님께 걸리면 지리 선생님 목숨은 저승나라로 갈 것이기 때문에 지리 선생님은 창가 쪽을 주시한다. 교장선생님께서 분침에 마법이라도 걸어놨는지 어느 때보다 느리게 간다. 그때였다. 분침이 간신히 54분에 도착했을 때, 끝나기 1분 전에, 석환이 쓰러졌다. 그리고 바닥에 연신 오바이트를 해댔다. 그의 두 눈동자는 두려운 것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려 있다.

심하게 터졌던 상념들이 사라지며 완료하지 못했던 설거지를 끝낸다. 검지에 반창고를 붙였다. 깨진 접시는 엄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처리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속 쓰레기봉투들은 처리하지 못했다. 책상에 영어책 한 권 펴고 의자에 앉는다. 그래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다. 그 자식········.

정보윤, 우리 학교 1등. 각종 경시대회에 상을 휩쓸고 돌아다니는 놈.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어머니는 교육부 차장이다.

돈으로 학교선생님을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학교에 어디 있을까. 돈으로만은 부족할 것이다.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스토리다. 거기다 정보윤은 나와 석환이가 보충수업 2교시 끝나고 매점에 있을 때 혼자 교실에 남아 있었다. 충분히 석환이 우유에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이 커진다.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 눈을 찌른다. 눈이 본능적으로 책으로 향한다.

“아들! 공부해?”

엄마다.

“이제야 오셨어요?”

“응.”

엄마가 무슨 일인지 내 방에 들어오지 않고 바로 부엌일을 시작한다. 보통 집에 들어오면 내 어깨부터 주무르며 시험에 대한 부담을 주는 엄마이건만·······. 나는 왠지 엄마가 이상해 보여 부엌으로 나가 보았다. 그러나 엄마는 이상하지 않았다. 엄마는 전과 다르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쌀 씻는 데 열중하고 있다.

“너 오늘도 설거지했구나?”

“어? 응······.”

“접시도 깼고?”

“어·······.”

“으이구! 공부나 하라니까!”

또한 엄마는 전과 다르지 않게 내가 설거지를 했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엄마가 검은 봉투에 챙겨온 물건들이 이상했다. 우표, 편지지, 그리고 편지봉투. 모두 우리 가족이 쓰지 않는 것들이었다.

“엄마! 이건 왜 가져왔어?”

“이놈 보게·········. 네 시험 끝나는 날이 할머니 생신이잖아!”

“아········맞다.”

시험 끝나는 날이 할머니 생신이셨다. 시험기간 때문에 그리고 다른 더 큰 이유 때문에 정작 소중한 것이 기억에서 날아가 버렸다.

“빨리 가서 공부나 해. 시험 기간 얼마 안 남았잖아.”

“어·······.”

정신 제대로 챙겨야겠다. 2등이 어쨌건 3등이 어쨌건·········. 혹시 이놈의 1등이 4등까지 병원으로 보내진 않겠지. 염려는 되지만 지금은 염려 따위를 할 때가 아니다. 시험공부를 할 때다. 죽기 살기로.

아침이 됐다. 집을 나왔다. 그러자마자 참새 여러 마리가 시끄럽게 짖어댔다.

“1등이 널 치면 어떡해! 네가 먼저 쳐! 네가 먼저!”

참새는 그렇게 나에게 계속 짖어댔다. 내가 학교에 가는 동안 계속. 나는 결국 슈퍼에서 음료수를 샀고 약국에서 변비약을 샀다. 그리고 그 두 개를 조화롭게 섞어주었다. 1등의 장이 원활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나의 걸음은 녀석의 교실에 다다랐다. 그리고 나의 손은 두려움 없이 녀석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이걸 왜·······.”

보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순간 움찔했지만 말은 더듬지 않았다.

“같은 보충 반이잖아. 그리고 넌 1등이고·······. 앞으로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려고.”

“어·······그래.”

보윤이랑은 친하지 않았지만 보윤이가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보윤이는 남들처럼 잘 웃고, 잘 슬퍼하고, 잘 화내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녀석의 부모도 2등과 3등을 처리했으니까. 하지만 불안했다. 내가 범인인 걸 들킬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난 매 쉬는 시간마다 녀석의 반을 가서 녀석을 확인했다. 확인할 때마다 녀석은 밝은 얼굴로 웃고 있다.

점심시간. 아이들이 복도에서 시끄러워지는 걸 동물적 감각으로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역시 그곳에선 보윤이가 쓰러져있었다. 피를 토한 채. 설마······설마·······내가 준 걸 먹고? 나는 곧바로 녀석의 반에 들어가 녀석의 가방을 열었다. 아직 마시지 않은 음료수가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도 모르게 뱉어졌지만 나의 머릿속 수많은 생각은 미궁에 빠져버렸다. 선생님께서 복도로 온다. 이미 아이들은 병원에 전화했다.

모든 문제를 놓기로 했다. 내 생각의 끈에 매달려 있는 모든 것을 놓기로 했다. 그래, 그 녀석들은 진짜 사고를 당한 것이다. 3등은 진짜 담임선생님의 실수로 중환자실을 가게 되었고, 2등은 원인 모를 이유로 갑작스레 쓰러졌고, 1등은 원래부터 아팠지만 신기하게 오늘 그 병이 터진 것이다. 알고 보니 보윤은 선천적으로 폐렴을 앓아온 환자였다. 그래, 그런 것이다. 이건 모두 운명이다. 하나님이 내가 1등이 되라고 만들어 놓으신 계획이다. 이럴 때 내가 공부해야 한다. 열심히 그리고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이제는 내가 이 학교에 1등이 되는 것이다.

끄적끄적. 어느 때보다 공부가 잘된다. 굳이 암기하지 않아도 시험내용들이 말초신경을 흥분시킨다. 이전에 엄마가 사주었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풀지 않았던 문제집이 막히지 않게 술술 풀린다. 시험을 잘 볼 수 있다. 전교 1등이 될 수 있다. 아니, 될 것이다.

시험 첫째 날, 영어시험. 역시 1등, 2등, 3등이 없다. 시험문제가 어느 시험 때보다 잘 풀린다. 검은색 컴퓨터 사인펜은 OMR 답안지에 그어질 때마다 나에게 확신을 주듯 말을 한다.

‘네가 1등 할 거야!’

시험 둘째 날, 시험 셋째 날, 시험 넷째 날, 그리고 오늘 시험 마지막 날까지 실수는 없었다. 어느 때보다 나는 완벽했다.

시험 마지막 날이면 우리 학교에는 전통적으로 학교 전광판에 전교 1등의 이름이 뜬다. 그리고 그 이름은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24시간 번쩍이게 된다. 나는 급한 마음으로 달려가 학교 운동장에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박정한

내 이름이 아니다. 눈부시게 번쩍이는 글씨는 내 이름이 아니다. 전교 5등이었던 박정한. 순간 심장이 미칠 듯이 뛴다. 어지럽다. 마치 어릴 때 신이 나게 쳤던 팽이처럼 누군가 나를 어지럽게 하려고 마구 쳐대는 것 같다. 토할 것 같다. 팽이를 치는 아이가 지치면 팽이도 지쳐서 쓰러지듯 나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땐 나의 왼팔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과로입니다. 아이가 많이 피로했나 봐요. 내일 당장 학교 가는 건 좀 무리고요. 내일모레 퇴원하도록 하세요.”

“예.”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아빠는 내가 본 얼굴 중 가장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엄마·······.”

“그래·······. 우리 아들······.”

“나 1등 못 했어········.”

“괜찮아. 괜찮아.”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성적 얘기가 나오고 있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하지만 오늘, 엄마는 평소에 엄마가 아니고 아빠도 평소에 아빠가 아니다. 평소에 아들 성적만 나오면 급히 달려오시던 그 두 분이 아니다. 오늘만큼은 두 분이 진짜 엄마 아빠 같다.

 의사의 진술대로 나는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나는 학교에 갈 수 있는 몸이 됐다. 병실에서 몸조리를 하는 하루 동안 그래도 친구라고 반 아이들이 몇 명 왔었다. 그리고 오는 놈마다 나의 전교 등수가 2등이 된 것을 축하했다. 그래, 만족하자. 나는 웃어버렸다. 그리고 5등에 대한 의심을 풀기로 했다. 근거 없는 의심을 시작하면 또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기에 내 머리만 아프다.

오늘 나는 학교에 간다. 그래도 홀가분하다. 모든 것이 끝났기에. 시험도 그리고 그 일들도.

저녁 9시. Best 5가 모이는 시간. 나는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는다. 원래 자리가 아니라 그런지 약간은 불편하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신다. 하필 첫 시간이 담임이라니·······.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들어왔네.”

선생님의 시선이 3등, 4등, 5등으로 향한다. 씁쓸함이 기도를 막아 숨을 쉬기 어렵다. 들숨····날숨·····들숨····날숨······. 규칙적인 호흡으로 간신히 기도를 막은 씁쓸함을 내뱉어낸다.

“자! 그럼 수업 시작하겠다.”

(똑똑똑!)

마치 나의 심정과 비슷하게 선생님의 수업을 멈추게 하고 싶은 어떤 이가 Best5 수업 관의 문을 두드린다.

“누구시죠?”

선생님께서 당황하며 문을 열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교장선생님께서 선생님들에게 Best5 수업 관은 열지 말라며 학기 초마다 주의를 시키기 때문이다.

“김한진 선생님! 그리고 박정한 학생! 경찰에서 왔습니다. 지금 당장 서로 가셔야 합니다.”

문을 연 건 두 명의 형사다. 길거리에서 봤으면 건달이라고 슬그머니 피했을 정도에 외모를 가진 남자들이다. 그들 중 한 명은 선생님에게 쇠고랑을 채웠고 미란다의 원칙을 읊었다. 정한이는 순순히 자기 발로 교실을 나갔다. 어느 때보다 교실이 어둡다.

시간이 약 20분이 흘렀을 때 다른 선생님께서 Best5 수업 관에 대신 들어오셨다. 그리고 한 명의 학생이 그 선생님을 따라 졸졸 교실에 들어왔다.

“한성아! 네가 창가 쪽으로 붙어야겠다.”

내 귀는 또렷이 그 선생님 목소리를 들었지만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다. 내가 창가 쪽으로 간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정한이가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 같구나.”

1등······. 그렇게도 바라던 등수가 이리도 쉽게 이루어진다니 믿기지 않는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한성아! 뭐해! 빨리 움직여! 수업해야지!”

“예······.”

발걸음이 침착하게 1등 자리로 향한다. 투벅투벅. 그래, 그런 것이다. 노력한 사람에게는 그만큼 성과가 오는 것이다. 욕심이 과하면 그만큼 벌을 받는 것이다. 정한이는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이다. 정한이와 정한이 부모님은 1등을 너무 원했던 나머지 선생님을 사들여 3등을 중환자실에 보낸 것이다. 그리고 정한이는 2등이 먹은 그 우유에 그 누구도 모르게 무언가를 꾸몄을 것이다. 또한 1등에게는 폐렴에 안 좋은 무언가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은 다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열심히만 해왔던 나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엉덩이가 침착하게 1등 자리에 앉는다. 중앙에서 항상 바라보기만 했던 이 좌석········. 선생님께서 앞에서 자꾸 떠들지만 들리지 않는다. 기쁨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매우 좋다. 매우·········.

“유한성!”

선생님의 고함이 심장을 찌른다. 선생님의 얼굴이 짜증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나는 기쁘다.

“왜 이리 멍청히 있어! 너희 담임 쌤 자리 가서 문제집이나 가져와!”

“예······.”

자리에서 벗어나긴 싫지만 발은 어느 때보나 신 나 있다. 엄청난 기쁨은 발산되기만을 기다리며 온몸에 저릿저릿하게 퍼져 있다. 나는 복도에 나와서 폴짝폴짝 뛰며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껏 저릿저릿한 것들을 푼다. 그러다 보니 벌써 교무실이다. 너무 흥분 되어있는 가슴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교무실에 들어간다. 무슨 일인지 교무실엔 아무도 없다. 그래도 이 시간이면 선생님 3명 정도는 남아 있을 시간인데·······시험 끝났다고 선생님들마저 풀어졌나 보다.

바로 담임선생님 자리에 가서 가져오라고 시키신 책을 찾아본다. 그러나 책은커녕 담임선생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경찰들이 다 가져갔나?’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너무 깨끗하다. 그래서 서랍도 열어본다. 첫 번째 서랍, 아무것도 없다. 두 번째 서랍, 아무것도 없다. 세 번째 서랍, 안 열린다. 열쇠로 잠가 놓았나 보다. 본능적으로 손이 의자에 걸어 놓은 선생님의 외투 주머니로 간다. 달그락. 역시 있다. 열쇠를 집어 재빨리 세 번째 서랍을 연다. 드르르륵.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서랍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다. 그리고 서랍은 연 순간 나도 서랍처럼 신음을 뱉을 뻔했다. 편지지. 어디선가 많이 본. 분명히 시험 보기 전 엄마가 사왔던. 할머니에게 편지 쓰려고 구해왔다던. 손이 부들부들 떤다. 설마·······설마········. 편지지를 간신히 들어 올려 글자를 확인한다. 나의 글씨체와 닮은 글씨체. 무언가가 심장 안에 알싸하게 퍼진다. 저릿저릿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약속한 금액은 가족들에게 지급될 겁니다. 선생님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행복하겠네요. 선생님·······참 존경받아 마땅하십니다. 선생님의 치밀한 계획으로 하나도 수틀리지 않고 진행되었네요. 저희 아들도 기뻐할 거예요. 그럼······이만 줄입니다. 한성이 엄마 강예원 드림.

선생님의 심부름에 갈 수밖에 없었던 교무실에서 나왔을 땐 놀이공원에 고장 나서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는 기분을 느낀다. 조명은 무슨 일인지 다 소등되어 있다. 유일하게 빛나는 곳은 내가 남아서 공부할 교실이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간신히 한 손으로 창가에 기대서 걷는다. 터벌터벌. 걸음은 내가 옮기는 것이 아니다. 옮겨지는 것이다.

다행히 쓰러지지 않고 교실에 도착했다. 심부름을 시키신 선생님은 제대로 화나 있다.

“야! 유한성! 너 왜 이제 와! 책은?”

“못 찾았어요. 죄송합니다.”

비틀비틀. 혼돈에 빠져 책상에 그대로 엎어진다. 잠이라도 들고 싶다. 차라리 현실이 아니었으면······. 그러나 잠에도 들 수 없게 찬바람이 몰아쳐 온다. 춥다. 내일은 얼마나 더 추울까. 눈을 감아본다. 눈을 뜨면 왠지 내가 사라지게 한 녀석들이 날 찾아올까 두렵다. 내일은 얼마나 더 두려울까········. 눈물이 문제집에 투둑투둑 떨어진다.

“어머······한성이 우니?”

선생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 귀에 어른거린다. 차라리 아예 들을 수 없었더라면········. 왠지 녀석들이 꿈에서도 쫓아와 내 귀에 속삭일 거 같다.

내일도·······모레도·········녀석들은 날 쫓아다닐 거다. 창문을 닫아도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처럼 내 온몸을 감싸며 춥게.

질리지않아
질리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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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라거스

사월이면 네가 온다고 했는데. 이삭 끝이 단단해지고 가장 향긋한 봉오리 향내가 날 때. 분명히 약속했는데. 네가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닌데. 약속대로라면 세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손톱을 자꾸 뜯게 돼. 냉장고를 열고 멍하니 아스파라거스만 바라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딱딱하게 서 있는 초록색 기둥을.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보관해두라 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돼. 사월 안에 오지 않을 거면. 살짝 데친 후에 랩에 둘둘 싸서 냉동보관 하라고 했으면 좋잖아. 진작 그랬으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데. 네가 오면 오랜만이야 하고 냉동고에서 랩에 싼 아스파라거스를 꺼냈을 텐데. 조리하기 어려운 식재료야. 아스라파거스는. 내가 필러로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벗기려 할 때마다 너는 내 손을 멈추게 했잖아. 그렇게 다루는 거 아니라고. 끝과 봉우리가 가장 맛있는 거니까 아래쪽 반 정도만 필러로 껍질을 벗기고 밑동에서 일 센티미터는 잘라내고 껍질을 벗기는 거라고. 사실 이 말이 이해가 안 돼. 나는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몽땅 벗겨 그 속을 알고 싶은데. 조리시간에 따라 씹히는 느낌도 다르고 맛도 다른 게 아스파라거스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의 부재가 느껴질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했어. 너는 나를 잠시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에 올려둔 거라고. 네가 씹히는 게 하나도 없는 무른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싶은 거라고.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했어.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바로, 나는 아스파라거스를 데치고, 랩에 싸서 냉동고에 넣어야 했어. “잠시 시간을 갖자. 4월 안에 돌아올게.” 다시는 녹지 않게, 최악에 온도로 꽁꽁 얼렸어야 했어. 꺼내면 다시 녹을 수 있으니까, 냉동고는 못 열게 자물쇠로 잠가 놓았어야 했어. 근데 나는 바보같이 네 말을 믿어버린 거야. 돌아올 거라는 네 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넣어둔 아스파라거스가 흔들려. 냉장고 안에 바람이 부나? 눈이 시큰거려. 냉기를 너무 쇘나?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정성스레 하루에 한 번 물을 갈아줬는데. 네 봉우리가 단단해지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가만히 앉아 이것만 보는데도. 째깍째깍 너무 잘 가. 조금만 있으면 5월이네. 그럼 너는 약속을 안 지킨 거고. 너를 나를 진짜 배신한 거네. 5월이면 나도 아스파라거스를 버릴래. 아스파라거스는 4월이 가장 맛있으니까. 너 없이 필러를 사용하는 것도, 오일을 두르고 팬에 올리는 것도, 자신 없으니까. 하루에 한 번 물 갈아주기 싫으니까. 싱싱하게 기다리기 싫으니까. 나도 잔인하게 시들어 버린 후에 새롭게 피어나고 싶으니까. 생장점 순 끝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 좋다고, 네가 한 번 경고했던 내용이 이제야 생각나네. 플라스틱 통을 꺼내 초록색 기둥을 살펴보니 생장점 순이 벌어져 있어. 아, 그래서 네가 나를 떠난 거네. 아·······. 너를 사랑하는 동안 생

  • 질리지않아
  • 2012-09-28
설원 속 자동차 한 대

하얀 무덤. 모두가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아니,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곳에 들어가겠다고 유난을 떨며 도전을 해도 결과는 ‘실종’이란 두 글자만 남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 유난을 떨며 도전을 하겠다는 사람이 어느 순간 되어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황금! 그 설원 속 어느 동굴에는 황금이 있다는 지질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장이 언론과 TV에 처음 전파됐을 때 그곳을 향한 도전의식을 품지 않은 국민은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일단 이 같은 국민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에 정부가 사전답사를 하고 여행허가를 내릴지 혹은 금지할지 정하겠다는 거였다. 당연히 몇몇은 반대했다. 여행을 가는 것은 국민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사람, 정부가 황금을 노린다고 질책하는 반대파들이 목소리를 크게 냈다. 하지만 찬성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찬성파는 위험지역을 가기 전 정부가 확인하는 건 필수라고 목소리를 크게 냈다. 결국 정부는 소규모의 탐험 조직을 그곳에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실종’이었다. 그 이후 정부는 몇 차례 더 그곳에 군인이나 이름이 알려진 탐험대를 보냈지만 결말은 항상 같았다. 그 이후 그곳은 속세에 의해 ‘하얀 무덤’이라 칭해졌다. 엄청나게 의외이지만 정부는 그곳을 여행 안전 지역으로 분류하고 여행을 허락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정부의 여행 허락은 일반 사람의 마음속에 ‘황금주의’의 불꽃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실종’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일어났다. ‘유난을 떨며 도전하겠다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었다. 한 달에 실종자가 10명 안이면 적은 것이었다. 나도 어느 순간 ‘유난을 떨며 도전하겠다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나오는 실종자 중의 한 명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회색빛으로 멍든 하늘, 지겹지도 않은지 끊임없이 내리는 눈, 그리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덮인 땅과 극한의 추위. 그 모든 게 그곳에 있다. ‘무덤’이라 할 만하다. 난 지금 이런 고통을 삼 일째 버티고 있다. 삼 일 전, 나는 자동차 지붕 위에 얹혀져 있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단지, 난 사흘 전 황금을 찾다 길을 잃었고 추위의 고통을 버티다 못해 쓰러진 것뿐이었다. 그런데 일어난 장소는 자동차 지붕 위였다. 물론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설원 위에 이 자동차는 왜 정차된 것일까. 나는 왜 쓰러져있었던 장소에서 눈을 안 뜨고 이런 자동차 지붕 위에 얹혀 있게 된 걸까. 내 짐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질문들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살아남는 것! 물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황금이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곳은 황금을 탐낼 곳이 되지 못한다. 속세가 '무덤'이라 칭한 이유가 있었다. 사흘 동안은 그럭저럭 살

  • 질리지않아
  • 2011-11-06
손님

거울은 잘못됐다. 내 모습이 비치지 않는 걸 보면 분명히 거울은 잘못됐다. 거울을 만져본다. 이건 분명히 거울이다. 그렇담 어찌 된 일인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정녕 내 모습이란 말인가. 그럴 리 없다. 거울에 비친 건 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집구석에 화분을 놓으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곰팡이가 푸르게 눈 밑에 피어 있었고, 양 볼은 누구에게 얻어맞은 듯 쏙 들어가 있으며, 머리카락은 오래된 미역처럼 머리 위에 얹어져 있고, 종이를 구기듯 얼굴을 구겼는지 얼굴에 주름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정녕 이십 대 후반에 남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는다. 이건 내가 아니다. 나일 리 없다. 거울이 잘 못 됐다. 잘못된 거울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선반에 숨겨둔 망치로 거울을 깬다. 거울이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바닥으로 제각기 흩어진다. 화장실을 나왔다. 준비동작 없이 화장실 바닥에 드러눕는다. 바닥이 내 온몸에 기운을 흡수한다. 더는 움직이기 싫다. (똑똑!)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 올 사람은 없었다. 이곳이 아파트라면 ‘다른 집 찾아온 사람이 잘못 두드린 거겠지’ 하며 문을 열어야 하는 책임을 방관하겠지만, 이곳은 반지하이다. 이 건물에 존재하는 방은 내가 사는 이곳뿐이다. 책임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 나는 누워있는 채로 퉁명스럽게 문을 향해 질문한다. “누구세요?” “나야! 나!” 나야! 라고 말하면 누군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짐작도 안 간다. “나야! 라고 말하면 누가 알아! 이름을 말해! 이름을!” 나는 더욱 퉁명스럽게 문을 향해 소리친다. 그러나 효력은 없다. “나라니까! 나! 나야!” 화가 심장으로부터 들끓어 올라온다. 대꾸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숨죽이고 있으면 밖에 있는 사람이 자기 풀에 죽어 떠날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원인 모를 책임감이 이미 일을 크게 만들어 놓았다. “제발 문 좀 열어줘! 우리 할 말 있잖아!” 순간 그의 ‘우리 할 말 있잖아’라는 말이 심장에 와서 콕 박히다.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 낯익은 목소리 떨림, 그리고 느껴지는 설렘.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지만, 문은 열렸고 문을 열어달라는 사람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냈다. 하얀 얼굴, 큰 눈, 꽉 차 있는 볼살, 큰 덩치, 긴 다리, 긴 팔, 붉은 입술, 높은 코, 큰 키, 당당한 얼굴, 짙은 눈썹, 화려한 정장 차림, 그리고 뚜렷이 보이는 보조개, 그 모든 게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는 기억의 안갯속에서 희미하게만 존재하고 드러나지 않는다. 불편하다. “누구시죠?” “짜식! 날 기억 못 하다니! 실망인데? 일단 들어가자!” 그가 우리 집으로 들어선다. 어디선가 맡아 본 냄새, 들어본 음성, 하지만 그것도 안개에 싸여 답답하다. 어쨌든

  • 질리지않아
  • 201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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