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발작

  • 작성자 은고
  • 작성일 2012-10-24
  • 조회수 396

 

 

교실에는 항상 참새들과, 독수리들과, 침묵하는 부엉이들이 있다. 대다수의 참새들은 그들의 성격에 맞게 떠드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참새들은 그 작은 부리로 누군가를 쪼는 것이 즐겁다. 독수리들은 참새들이 도를 지나칠 때마다 큰 날개를 펄럭였다. 위협적으로 흔들리는 검은 깃털에 참새는 어깨를 움츠린다. 침묵하는 부엉이들은 고개를 올리는 법이 없다. 어느 날이다. 참새들의 부리가 흔치 않게 하나로 모아졌다. 함 염이라는 기묘한 소년이 2학년 8반에 등장한 아침 9시 이후부터이다. 체구가 작았다. 갈색보단 옅은, 하도 빨아 색이 빠진 듯한 사탕같은 색을 한 머리카락이다. 일부러 꼬아놓은 듯 잔뜩 부풀려지고 휘어진,나무덩쿨 같은 그 아래에 눈이 있었다. 이질적이다. 이름은 함 염이다. 선생님의 짧은 소개가 끝난다. 함-염. 두 입술이 부딪히며 탄생하는 소리. 부싯돌과 같이 마주친 두 눈이 우울하다. 입술이 터트리는 생기가 무색하다.

 

 

함 염은 또래 소년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를 감싼 덩쿨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무덩쿨은 자꾸만 자라 소년의 주위를 감싼다. 덩쿨에 가시는 없었으나 뚫고 갈 이가 없다. 덩쿨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함 염을 찔렀다. 덩쿨은 찔릴 수 록 헤졌다. 함 염이 쳐놓은 경계는 그리 견고하지 않았다. 덩쿨조각을 문 것은 독수리들이었다. 그들은 큰 날개를 흔들며 소년을 안았다. 함 염은 독수리의 가슴팍 안에서 자랐다. 참새들은 두려워했다. 함 염이 가지고 있는 덩쿨과, 눈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의 침묵을.

 

 

"시발, 지랄은."

 

 

급식소를 돌아 있는 창고 문 앞은 독수리들의 둥지였다. 그들은 포식한 후면 늘 그 곳에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간혹 사냥꾼들이 그들을 몰아붙였지만, 그 뿐이다. 참새들은 연기를 잘 참을 수 있는 작은 콧구멍을 가지고 있었다. 함 염의 두 눈이 하늘을 담는다. 옆에서 담뱃재를 떨구던 이영석이 욕지거릴 벹는다. 이숙연 고 년, 씨발, 살도 안 보여줄 거면서, 지랄씹년. 어차피 걸렌데 걍 먹어. 뭘 그러냐? 오용운이 대답했다. 그의 서늘한 눈이 바닥에 쓸린다. 길을 지나며 짹짹거리던 참새들이 입을 다문다. 오용운의 입술이 성급히 담배를 삼켜 핀다. 함 염은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 썅년이 애타게 하는 맛은 있어. 좋아. 씨팔, 하루만 더 참는다. 오용운이 함 염의 옆에 쭈그려앉았다. 고릴라 같은 손이 머릴 잔뜩 헤집는다. 금방 산발이 되었다. 필래? 오용운이 다정히 물었다. 답지 않은 말투였다. 함 염에게 유독 오용운은 친절히 굴었다. 185cm가 넘는 거구에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다. 가끔 그가 흔치 않게 입술을 벌려 웃을 때면 살짝 뒤틀어진 앞니가 보였다.

 

 

"아니."

"학교 째고 노래방 갈까."

"싫어."

"어디 가고 싶은데."

"아무데도."

 

 

오용운이 담배를 비볐다. 갑작스런 마찰에 콘크리트 바닥이 새까맣게 운다. 부서진 재가 눈물처럼 고였다. 이영석이 기지개를 핀다. 아아 씨발~~! 참새들의 어깨가 더욱 더 움츠려진다. 멀리서 농구공 튕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좆같아! 이영석의 고질병이었다. 그는 늘 담배를 핀 후면 그 말을 했다. 함 염이 일어선다. 오용운이 고갤 올려 보았다. 그럼 우리 집 갈래? 오용운은, 끈질긴 남자였다.

이영석. 오용운. 찰리박. 함 염에게 둥지를 제공해주는 독수리들의 이름이다. 찰리박의 본명은 모른다. 어느 외국야동을 본 후, 그는 제 이름을 버리고 찰리박이 되었다. 돌연 그는 제 이름에 걸맞게 지나가는 계집애들의 엉덩이와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오우, 찰리박! 그가 그럴 때, 이영석이 신음처럼 토하던 말이었다. 그들은 15살이면서 20살이기도 했고, 30살에서, 어떤 날에는 50대가 되었다. 그들에게 나이란 누군가 억지로 쥐어준 숫자에 불과했다. 오용운은 특히 더 그랬다. 그는 종잡을 수 없다. 함 염을 처음 본 순간 그는 웃었다. 살짝 비틀린 앞니 사이로 자일리톨 냄새가 났다. 함 염은 웃지 않았다. 찰리박은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저 놈, 고추에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웃을 기운도 없는거야. 야동의 대가다운 저속한 말이었다. 이제 와서 함 염은 그의 빨간 머리카락밖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닭벼슬처럼 붉고 거칠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찰리박의 가방엔 교과서 대신 헤어왁스와 도색잡지가 자리했다. 그것이 지독히도 어울리는 놈이였다.

 

 

"내가 너네 집을 왜 가?"

"갈 데 있니?"

 

 

참새들이 휩쓸리고 지나간 교실. 노을만이 멍청히 구석에 남았다. 함 염은 책상에 앉아있었고, 오용운은 반쯤 열린 앞문 사이로 몸을 껴넣고 있다. 우리집 영석이도 안 가. 노을의 등을 타고 오용운의 말이 흘렀다. 찰리박도 온 적 없어. 띠리띠리띠리링. 그러니까, 가자 우리집. 학교 종소리에 오용운의 말이 발자국처럼 눌렸다. 함 염이 기침을 터트렸다. 안 가. 너네집. 녹색의 눈이 말한다. 종소리가 끝나고, 뒷문이 닫혔다. 노을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교실에 오용운만이 남아 덩쿨조각이 남아있는 책상을 보았다.

 

 

"학교생활은 어때?"

"그럭저럭."

"그래.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서 나중에는 집에 데리고 오기도 해. 응?"

 

 

은수저가 식탁에 부딪힌다. 엘리아나가 일어서자 향수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함 염은 젓가락을 몇 번 집다가 그녀를 올려보았다. 엄마. 핸드폰이 울린다. 그녀 것이었다. 응? 샤넬백을 뒤지느라 등을 진 모습이 함 염의 두 눈 가득 찬다. 어, 지금 나갈게. 어디야? 잠깐만. 엘리아나의 눈이 향한다. 핸드폰 너머로 남자가 무어라 말한다. 함 염이 젓가락을 집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빨간 입술이 웃는다. 함 염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녀가 하이힐을 챙겨신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정적이다. 젓가락이 힘을 잃고 쓰러진다. 바닥 위로. 

 

4교시가 시작되기 전 쉬는 시간이었다. 찰리박이 빵을 사들고 왔다. 이야기는 한창 진행중이다.

 

 

"그래서, 동관이형이 뭐 어쩄다고?"

"초코빵 사왔냐?"

"어. 동관이형이 뭐 어쩄는데. 가기로 했어?"

"가야지. 친한 애들만 부른거래."

"언제부터 동관이형이랑 그렇게 친했냐?"
"새끼. 니보단 친해."

 

 

이영석이 초코빵 봉지를 뜯으며 대꾸했다. 찰리박이 부엉이의 의자에 걸터앉는다. 최동관은 이영석이 초등학생 때부터 어울려놀던 3살 더 많은 형으로 늘 일관된 반삭머리를 유지했다. 성격도 꽤 털털하고 뒷끝이 없어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부잣집의 아들이며 알고 있는 여자애들이 많다는 것이다. 찰리박이 최동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동관이 형은 쥐고 있는 젖탱이만 해도 몇 개야, 시부랄. 음료수를 벌컥 들이마시며 찰리박이 말한다. 발까지 동동 굴린다. 염이 너도 가는거야. 이영석이 초코빵을 반쯤 먹었을 때 말했다. 함 염은 책상 위에 엎드려 눈만 깜박인다. 햇살 좋은 창가에 녹색 눈이 시리게 빛났다. 오용운이 함 염에게 먹던 치즈롤을 내민다. 함 염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거부한 빵은 찰리박의 입 속으로 처박혔다. 이렇게 맛난 것을! 어깰 떨며 오바한다. 내일 저녁에 간다. 이영석이 도장을 찍듯 말했다. 함 염이 눈을 뜬다. 어디 가는건데? 그의 물음에 호들갑을 떨던 찰리박이 중얼거린다. 얼씨구, 이거 또 정신 반쯤 내보냈었구만? 병신.

 

 

눈을 감으면 꿈이 찾아오지 않는다. 파동을 일으키는 건 멈춰진 시계초침. 쨰깍째깍. 함 염은 의식을 잃어갈 떄면 늘 그 소리를 들었다. 가로등이 깨지는 소리, 강렬히 퍼지는 초콜렛의 냄새. 시끄러운 경찰차 사이렌, 이끼 낀 조약돌과도 같던 목소리. 안토니오, 안토니오? 눈을 뜰 때면, 함 염은 늘 이불을 손에 말아쥐고 있는 자신을 혐오했다. 그것은 찬찬히 흘러가는 흑백영화필름이었다. 중간 중간 빛이 바랬지만 그 기록만은 선연한. 변기를 잡고 헛구역질을 해야했다. 가끔 신물이 울컥 올라와 쏟아낼 때도 있다. 소리도 없이 눈물이 덜어진다. 덜어진 눈물들은 함 염의 입술을 먹고, 눈을 먹고, 이윽고 얼굴 전체를 덮어버렸다. 아무도 없는 집은 시체거죽을 뒤집어씌운 것 같이 차갑다. 창백했다. 안토니오. 시체가죽이 함 염을 쓰다듬는다. 안토니오.

 

 

 

"안녕하세요."

"어, 오랜만이다. 앉아 앉아."
"동관이형, 저도 왔어요!"

"넌 필요 없는데. 걍 집에 가라."

"에이 형~~!"

 

 

술집 안은 복작거리고 있다. 천장에 달린 램프등이 흔들린다. 문이 열릴 때마다 그랬다. 넉살좋게 최동관의 옆구리에 붙은 찰리박이 아양을 떤다. 함 염은 문 밖에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쭈그려앉아있다. 오용운이 그 앞을 끈질기게 버텼다. 들어가자. 오용운이 다섯번째로 건네는 말이다. 함 염은 작게 기침했다. 오용운이 마주 주저앉는다. 어디 아프니? 손이 이마를 덮어오길래, 쳐버린다. 함 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돌아온다. 오용운이 쳐진 손을 물끄러미 본다. 함 염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선이 모인다. 함 염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수십개의 눈알, 낯선 체취, 알콜의 떠돔. 비틀거리며 구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쟤는 누구냐? 먼저 물은 건 최동관이었다. 아, 전학 왔는데. 제 친구에요, 형. 이영석이 대꾸했다. 새끼가 싸가지 없이 인사도 안하네. 최동관이 술병을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굳었다. 그 때 문이 열렸다. 앙증맞게 매달린 종이 따닥거린다.

 

 

 

"뭐야. 왜 이렇게 분위기 험악해?"

 

 

 

빨간 우산을 들고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우산통에 아무렇게나 쑤셔넣는다. 최동관이 살갑게 소리친다. 석구 왔냐! 함 염의 눈이 향한다. 어지럽다. 부리부리하게 치켜떠진 눈. 날카롭고, 매섭다. 함 염이 고갤 푹 수그러트렸다. 배가 아팠다. 임마, 나중에 가서 사과드려. 저 형이 뒷끝이 없는 대신 한번 찍히면 얄짤없어. 옆에 다가온 찰리박이 수군덕거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조명에 비쳐 오렌지빛으로 화려히 터지고 있다. 석구야, 왜 이렇게 늦었냐. 오랜만이다, 요새 뭐하냐… …. 함 염이 떠들썩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식은땀이 주륵 난다.

 

아침에, 엘리아나는, 침대에 없었다. 새벽 2시에도, 5시 30분에도. 함 염은 변기를 붙잡고 토하다 거기까지 기어갔다. 마르코.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찾아서. 마르코, 안토니오. 내 아이. 엄마야. 달빛이 가득 차오르던 창문. 울부짖던 여자. 식도를 넘어오던 칼같은 초콜렛. 누군가 어깨를 짓눌렀다. 함 염은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쓰러져 흐느낀다. 안토니오. 여자의 숨결이 귓가에 와닿았다. 시체가 살아움직인다. 생기를 가진다. 나는 죽어가는데. 마르코. 엘리아나는 그 곳에 없었다. 아침해가 뜰 때까지 그랬고, 함 염이 교복을 입을 때까지 그랬다. 아무것도 아니야. 젓가락은, 어디로 떨어졌던걸까.

 

 

 

"우웨엑!"

 

 

가로등을 피해 함 염이 벽을 마주보고 있다. 벌컥벌컥 요동치는 뱃속에서 울음이 토해진다. 위장이 흘리는 건 위장액이다. 벽을 붙잡고 있는 손이 시퍼렇다. 밤이 손의 주름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함 염이 헐떡인다. 공기를 들이마신 목구멍이 아프다. 살짝 열린 주점 사이로 찰리박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 조금 더 기다려…만날 수 없잖아 느낌이 중요해… …. 휘파람 소리. 박수소리. 어린 놈이 뭘 그리 힘들게 사냐? 그리고, 말소리였다.

함 염이 고갤 쳐든다. 빨가안 담뱃불이 눈을 부릅뜬 채 타오르고 있다. 담뱃불만큼이나 진한 우산을 들고 왔던 남자. 그가 담뱃재를 바닥에 떨군다.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술도 안 먹은게. 강석구의 눈은 펴지지도, 찡그려지지도, 접히지도 않는다. 담배를 빨아들일 때마다 훔푹 파인 볼에 연기가 고인다. 독수리. 멍하니 보던 함 염이 말했다. 뭐? 강석구의 눈썹이 미미히 찡그려진다. 거대한, 독수리. 날개를 쉽게 펼쳐 위협하지도 폼을 재지도 않는다. 그러나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참새 따위야 꿀꺽 삼키고도 남는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삼켜진다면 좋을텐데. 뱃속이 울렁인다. 우웩! 함 염이 다시 쏟아낸 건 투명한 액체들의 연속이었다.

 

 

 

남자를 다시 만난 건 일주일, 혹은 삼주 뒤였다. 함 염은 가련한 양처럼 골목길에 있었고, 독수리는 못되는 까마귀가 함 염을 가로막았다. 돈 내놔 씨발놈아. 그랬나. 그랬을 것이다. 함 염은 정신이 없었다. 간간히 찾아오는 복통에, 그리고 사람들의 냄새에. 강석구는 지나가던 행인이었다. 옆구리에 달린 여자가 이뻤던가.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강석구는 몇 마디 했고, 까마귀들은 독수리의 강림에 꽁지 빠져라 도망갔다. 석구야, 아는 얘야? 독수리의 여친이 물었다. 강석구는 말없이 함 염을 보다가 돌아섰다. 흐린 녹색의 눈이 뒤를 쫓는다. 무언가 말하려 했던 것 같은데.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엉덩이가 씰룩인다. 빨간색. 그는 빨간색을 더럽게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불행히도, 그것은 별로 좋은 색이 아니었다. 함 염에게는.

 

 

 

"부모님 모셔오랬잖아."

"............"

"진짜 말 지랄같이 들을래?"

 

 

 

 

종이 울렸지만 함 염은 교실로 돌아가지 못한다. 녹색이 낀 두 눈이 책상 위에 고정되어 있다. 흰 뺨에 사선으로 거즈가 매달려 감겼다. 배불뚝이 학주가 한숨을 쉬었다. 탁. 소리나게 내려놓은 종이엔 큼지막히 '반성문'이라 써져있다. 그러나 그 밑으론 백지다. 전학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래. 학주가 말했다. 함 염의 입술이 고집스레 다물린다. 이영석이가, 응, 얼마나 질 나쁜 놈인지 알고 어울리는거야? 무릎뼈가 아프다. 발버둥을 치던 아이에게 얻어맞은 곳이었다. 두 눈이 시퍼렇게 붓고, 쌍코피가 터져선, 종국엔 팔이 꺾여 엉엉 울며 소리쳤다. 어차피 너도 똑같은 새끼야!… …. 함 염의 몸은 선생님에 의해 거칠게 일으켜졌다. 뺨을 한 대 맞은 것 같다. 두 대였나. 눈 앞이 가물가물하다. 왜 때렸지. 그래. 욕을 했었다. 뭐라고 했었지?

 

 

"내가 니네 어머니한테 연락 드릴거야. 내일 학교에 모시고와."

"..........."

"그리고 씨발. 반성문 써오랬더니 누가 이 글씨 하나만 떡하니 써오랬어?!"

"..........."
"함 염. 선생님이 진짜 부탁한다. 너 아직 열다섯이야 임마. 벌써부터 이렇게 살래?"

 

 

 

교무실을 나오자 복도는 숨을 참고 있었다. 귀가 가려울 정도의 적막감. 숨 쉴 때마다 배가 아프다. 걷어차인 곳은 무릎뿐이 아니었다. 누군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함 염은 누가 보고 싶은건지 모른다. 그냥 누군가가 보고 싶었다. 화장실에 이용운이 있었다. 함 염은 그를 지나쳐 세면대로 간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틀어진다. 찬물이다. 함 염은 그대로 얼굴에 끼얹는다. 입가가, 뺨이,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용운이 입술을 깨문다.

미안하다. 수도꼭지가 잠긴다. 물을 벹어내는 얼굴로 이용운을 돌아보았다. 미안하다. 우직한 입술이 말했다.함 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씨발놈, 개새끼… …. 울부짖던 아이. 사과하는 이용운. 왜?

 

 

"많이 아프냐?"

 

 

이영석이 묻는다. 핸드폰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연신 울린다. 함 염도 그를 보고 있지 않다. 책상에 난 결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길래 학교에서 왜 건들여. 나가서 패지. 쯧, 찰리박이 거들었다. 불곰이 뭐래? 함 염이 대답했다. 엄마 모시고 오래. 이영석과 찰리박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나간다. 야 이거 봐봐. 신기록 세웠다. 이영석이 화면을 내밀어보인다. 찰리박이 그의 뒷통수를 세게 때렸다. 씨발! 이영석의 욕설로 순식간에 교실이 조용해진다. 오용운이랑 화해했냐? 핸드폰을 넣은 이영석이 물었다. 함 염은 뺨을 누르고 있었다. 거즈가 금새 새빨갛게 물든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찰리박과 이영석은 알았다. 그래. 이영석이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찰리박이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함 염은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남자를 다시 만난 건 롯데리아 안에서였다. 함 염은 메뉴판만 10분이 넘게 보고 있다. 얼굴에 잔뜩 달고 있는 상처가 흉흉하다. 알바생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뒤에 줄 서있던 사람들이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다. 함 염의 두 눈은 메뉴판에서 떠날 줄 모른다. 그것과 원수라도 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야, 작작하지? 함 염의 어깨 위에 손이 올려진다. 빨간 가디건. 부리부리한 눈매. 그건, 강석구였다. 함 염은 그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짓눌러버릴 것 같은 흉흉함, 약간의 낯설음과 익숙함. 함 염이 고갤 돌려 주문했다. 양념감자. 매운 맛으로.

 

 

 

"얼굴 꼬라지가 왜 그러냐?"

"..............."

 

 

 

강석구가 햄버거를 으적 먹는다. 대충 풀어헤쳐 입은 교복이 잘 어울렸다. 함 염은 말이 없다. 양념이 되다 만 감자가 끌려나와 입 안으로 사라졌다. 입가에 흉하게 얹혀진 딱지가 움찔거린다. 새로 갈은 거즈에선 소독약 냄새가 풍겼다. 강석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다. 독수리의 뾰족한 부리에 햄버거가 너덜너덜해진다. 콜라잔에 얼음 굴러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강석구가 물었던 빨대 끝이 금새 헤져있다. 함 염은 그 사이에 고작 감자 3개만 먹었을 뿐이다. 강석구가 손을 뻗는다. 빼앗은 감자봉투를 품에 안고 으적거린다. 함 염은 아무 말 없다. 강석구가 감자를 한꺼번에 서너개 처넣으며 말했다.

 

 

"이름."

"........"

"너 이름이 뭐냐고."

 

 

 

한 달하고도, 서너 달이 지난 후의 물음이었다.

 

 

함 염? 그 또라이? 강석구의 친구 이동욱이 말했다. 그래, 걔 눈 존나 초록색인 얘 말하는거잖아. 눈이 초록색이야? 이쁘겠다! 이동욱의 여친 강소라가 거든다. 왠 또라이? 강석구의 눈이 미세히 찡그려졌다. 이동욱이 감자칩을 집어들어 강소라의 입에 먹여주었다. 그 새끼 꽤 유명해. 생긴건 이쁘장한데 멘탈이 없어서. 전에 잠깐 봤는데 정신이 나간 것 같더라. 강소라가 입술을 오물거린다. 이동욱이 이뻐 죽는 시늉을 해보였다. 까르륵, 분홍 립스틱이 잘 칠해진 입술에서 새소리가 나온다. 그래? 강석구가 책상 위에 올려둔 다리를 까닥였다. 이동욱이 강소라의 뺨에 뽀뽀를 막 하다 그제야 물었다. 그런데. 걔는 갑자기 왜? 강석구가 시선을 돌린다. 창 밖에서 왠 나뭇잎 하나가 바닥을 뒹굴고 있다. 환한 초록색의, 찢어진 나뭇잎. 그냥. 강석구가 대답한다.걘 좀 뭔가 위태로워보여서. 나뭇잎이 자동차의 바퀴에 짓이겨져 사라졌다. 아 씨발, 춥네. 이동욱이 일어나 창문을 닫는다. 강석구의 시선은 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숙연 먹었다고 안 먹었다고."

"먹었지 썅년아. 내가 그걸 아직까지 참았겠냐?"

"씹...떡칠 때 어땠냐?"

"아 조용히 해. 집중 안되잖아."

 

 

컴퓨터 화면에 가득 띄워진 건 살색이다. 젖가슴이 흔들리고, 여자의 신음소리가 점점 더 높아진다. 바지춤을 내려 성기를 쓰다듬는 손길들이 우악스럽고, 찰리박이 내벹는 숨은 벅찼다. 씨발, 씨발, 존나 씨발 개꼴려. 이영석은 화면만 보고 있다. 질척이는 소리가 강해진다. 함 염은 이영석의 침대에 길게 누워있다. 얕은 잠에 몸을 뉘었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시선이 옭아맨다. 안토니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선이다. 함 염은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 컴퓨터 화면만이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다. 이용운이 그 원 안에 있었다. 이용운의 성기가 우뚝 솟아있다.함 염의 눈과 이용운의 눈이 마주친다. 빨갛게 불타오르는 눈. 엎드려있는 함 염의 목덜미, 등, 엉덩이의 굴곡을 따라 눈이 내려간다. 이용운이 숨을 내쉬었다. 성기를 올려 잡는 손이 느긋했다. 함 염은 이용운을 빤히 바라본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여자의 신음이 째질 듯 올라갔다.

함 ㅡ 염. 그 날 교실에서도 그랬다. 철컹이는 책상. 거뭇하게 드러난 엉덩이. 밑에 억눌려 신음만 토하는 작은 몸. 부딪히던 허벅지. 오고 가던 검붉은 성기. 함 ㅡ염. 이용운이 벹어내던 단 두 개의 음. 문 틈새로 마주친,그 날의. 개새끼, 어차피 너도 똑같은 새끼야.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애처로운 얼굴. 이용운에게 박힐 때도, 울지 않고 버티던 얼굴이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제법 선생님들의 이쁨을 받던 아이가, 그에게 깔려, 엉덩이를 내주면서, 책상을 흔들어놓았다. 함 ㅡ 염. 그 이름은 아이의 것이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야, 야. 미쳤냐? 갑자기 왜 그래?"

 

 

베게가 떨어진다. 이용운이 힘없이 딸려 일어선다. 성기를 부여잡던 손이 떼어진다. 함 염이 흉흉한 눈으로 이용운의 목을 조른다. 찰리박이 일어났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의자가 넘어진다. 찰리박의 성기가 사타구니 사이에서 흔들렸다. 화면은 급박하게 흘러간다. 여자가 마구 소릴 내지른다.

 

 

"죽여버린다."

 

 

함 염이 말했다. 이용운의 검은 두 눈이 말없다. 힘겹게 졸라지던 멱살이 놓이고, 함 염이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야, 너희 왜 그래! 이영석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기어코 이용운의 볼룩한 성기가 하얀 기침을 토해낸다. 이용운이 웃는다. 얼굴을 가리고 허탈히 웃는다. 화면 속 여자의 몸 위에, 이용운 것과 같은 정액이 뿌려지면서 끝났다. 방 안이 어둠에 잠긴다.

 

 

 

시멘트 냄새가 지독하던 페공장이었다. 마르코와 카티아는 그 곳에 있었다. 쉬이, 괜찮지? 조금만 참자. 카티아는 속삭였다. 두 개의 몸이 꽉 끼던 캐비넷. 밖에서 울려퍼지던 비명소리. 잠깐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야. 마르코의 두 눈이 똑바로 떠진다. 고리가 고장난 문이었다. 검지손가락만큼 열렸던 캐비넷 문사이로, 그들이 있었다. 발가벗고, 모닥불에 춤을 추는 그들이 있었다. 쉿, 마르코. 착하지? 카티아가 속삭인다. 마르코의 몸이 떨린다. 마르코, 잠깐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착하지?

 

 

 

"강석구. 쟤 걔 아니냐? 초록눈."

 

 

시끄러운 전자음소리가 울리는 오락실 안. 마지막 농구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간다. 강석구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뒤돌았다. 이동욱의 손가락 끝이 인형뽑기 기계를 가리켰다. 함 염이었다. 기계 안의 조명이 함 염의 얼굴을 창백히 만들고 있다. 강석구가 그의 뒤로 다가갔다. 여기서 뭐하냐? 강석구가 묻는다. 함 염이 조용히 무언가를 가리켰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새인형이다. 물감이 흐릿히 지워진 눈동자. 조명이 들어간 눈은, 잎파리의 줄기가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강석구가 동전을 넣는다. 삐삐삑. 경쾌한 음악과 함께 기계가 조작된다. 능숙한 솜시로 강석구가 인형을 집는다. 개찰구로 새인형이 무난히 통과되고, 음악이 끝났다. 너 가져. 강석구가 인형을 빼내 함 염의 품에 안겼다. 집에 얼른 들어가라, 늦었다. 10시가 넘은 시곗바늘을 가리키며 말한다. 강석구가 뒤돌아서 걸어간다. 함 염도 그를 따라 쫓았다. 뭐야, 강석구. 이동욱이 어이없단 듯 말했다.

함 염은 인형을 손에 쥐고 강석구를 따랐다. 말도 없이, 특별한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니었다. 강석구가 펀치기계에 주먹을 날릴 때도, 오토바이게임을 할 때도. 이따금씩 강소라가 중얼거렸다. 쟤, 진짜 미친거 아니야?

강석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락하는 내내 요란을 떨었던 건 이동욱이다.

 

 

 

"나 이제 집에 갈거야."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 강석구가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함 염은 강석구의 집 문을 보았다. 강석구는 함 염이 쫓아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이동욱만이 저거, 미친새끼. 하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둘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강석구의 걸음이 느려지면, 함 염도 느리게 걸었다. 그림자 놀이를 하는 듯, 함 염은 강석구의 뒷통수만을 보았다. 강석구가 대문을 똑똑 두드리는 시늉을 한다. 함 염이 입술을 열었다. 재워줘.  단 한마디의 말이 공기처럼 휘돈다. 강석구의 까만 눈이 함 염을, 함 염의 녹색 눈이 강석구를 마주친다. 여기서 자. 강석구가 내준 것은 작은 쪽방이다. 들고온 이불과 베게를 바닥에 내린다. 함 염은 구석에 바짝 붙어 웅크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되면 일찍 가라. 강석구의 서늘한 말이 방 안을 꿰뚫는다. 작은 몸뚱이는 미동도 없다. 문이 닫힌다.

강석구가 잠에서 깬 것은 어떤 작은 소리 때문이었다. 끅끅거리는 듯한, 구멍의 소리. 씨발.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강석구가 방을 나갔다. 화장실의 노란 불빛이 바닥에 사선을 긋고 있다. 반쯤 열린 문을 열어제끼자, 변기를 붙잡고 있는 함 염이 있었다. 강석구는 순간 소름이 돋아 말을 하지 못한다. 함 염의 손가락 끝마다 죄다 피투성이다. 변기가 크레피스를 묻힌 것처럼 빨감의 연속이었다. 함 염이 꺽꺽대다 못해 목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처넣는다. 미친 새꺄! 강석구가 거칠게 함 염의 팔을 잡는다. 돌려세워진다. 함 염의 입가 근처가 온통 붉다. 함 염의 두 눈에 초점이 없다. 찢어진 나뭇잎, 굴러가던 자동차바퀴. 강석구에게 붙잡힌 몸뚱이가 축 늘어진다. 야, 임마. 정신차려! 강석구가 가볍게 뺨을 친다. 몸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킨다.

 

 

 

카티아. 안토니오. 이용운. 씨발새끼, 너도 똑같아… …. 함 염의 귓가를 웅웅 울린다. 헉헉거리는 신음소리. 핏줄이 돋아 고갤 처들던 소년의 성기. 좆같아, 이영석의 말버릇. 찰리박의 낄낄거리는 웃음. 염아, 누군가의 목소리. 경찰차 사이렌 소리. 시끄럽다. 토기를 느낀다. 충동적으로 함 염이 손톱을 입에 물었다. 비릿했다.

함 염! 강석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함 염의 두 눈이 번쩍 뜨인다. 몸을 흔들며 그에게서 벗어나 변기를 쥔다. 우웩! 목구멍에서 나오는 건 투명한 물 뿐이었다. 시발, 병원 가야하나? 강석구가 중얼거린다. 함 염이 고갤 쳐들었다. 강석구의 어깰 붙잡고 고갤 젓는다. 두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안 돼, 안 돼, 가지마. 안 돼, 가면 안 돼. 주문과 같은 말이음이었다. 엘리아나가, 엘리아나가… …. 뭐라고? 강석구의 눈썹이 치켜올라간다. 엘리아나가 알면 안 돼. 함 염의 입술이 소리없는 말을 토했다.

 

그녀가 알면 안 돼.

 

 

어느정도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치료가 되었고, 눈에 띄는 발작증세도 없습니다. 이제 집에서 어느정도 유의사항에 따라주시고 평범하게 생활을 지속해주시면… …. 의사의 말에 엘리아나가 눈에 띄게 웃었다. 마르코, 마르코. 웃음 지으며 입을 맞춰준다. 발작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옷으로 바꿔입고 나타났을 뿐이다. 엘리아나는 더 아름다워졌다. 남자들도 병원에 더 이상 들리지 않아도 될 엘리아나를 사랑해주었다. 남자들이 그녀를 사랑해준만큼, 엘리아나도 마르코를 사랑했다.

 

 

"씨발, 알았어. 알았어. 병원 안 갈게. 울지마...응? 울지마라, 좀."

 

 

함 염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부빈다. 이상한 남자. 함 염은 울지 않았다. 함 염은 우는 방법을 지워버렸다. 함 염 대신 우는 것은 손톱이다. 손톱이 피를 흘리며 울었다. 함 염은 강석구의 품에 더 파고든다. 낯선 냄새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커다랗고, 무서운 독수리. 나를 한 입에 삼켜다오. 눈 앞이 까무룩해진다. 안토니오. 그 목소리 위에, 남자의 어름이 겹쳐졌다. 울지마, 울지마.

손톱 끝이, 그 말이, 남자의 체취가,어둠이, 눈물나게 시려웠다.

 

 

아침이다. 화장실의 노란 빛이 햇빛에 삭혀진다. 강석구는 눈을 떴다. 바닥에 엎어져 잠든 몸이 뻐지근하다. 품 속이 싸늘했다. 집 안은 조용하다. 강석구의 졸린 눈이 마루바닥에 진 핏방울을 따라간다. 한 방울, 때론 세 방울.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그것들은 현관에 끊겨있다. 저거, 지워질까. 강석구가 눈을 감았다. 지워져야할텐데.

은고
은고

추천 콘텐츠

향유고래

  그 벽화는 일주일 전부터 뼈대를 드러냈다. 태어나는 과정과는 반대로, 그림의 탄생은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뼈가 잡히고 그 위에 살이 덧씌워지고 음영이 드리워지고 나서야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거대한 향유고래였다. 응당 바다에 있어야할 고래는 찌그러지고 더럽혀진 벽에 떠있었다. 그리고 그건 무척 이상한 괴리감을 낳았다.     향유고래   「관심 있어?」 데이먼의 말에 책을 덮었다. 'Gift' 의 영문자는 다른 책들 속에서 사라진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참았다. 웬일로 가게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비도 안 오는데 그랬다. 골목길의 막다른 길을 단단히 막아세운 벽은 두 달 전부터 나타났다. 그건 집의 일부를 밀면서 생겨난 벽이라 했다. 나는 이 곳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재개발을 다시 시작하는 곳 때문에 길이 약간씩 바뀌는 듯 했다. 가시로 뒤덮인 철조망보다야 훨씬 낫다고 생각한 건 나 뿐이었는지 벽에는 사람들의 반발로 가득한 문구들로 생채기 나기 시작했다. 욕부터 동정을 구하는 말까지 다양했다. 동물그림이 나타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이 고래라는 것을 알기까지 삼 일하고도 두 시간이 꼬박 걸렸다. 난 처음에 죽은 시체의 부패과정을 그리는 줄만 알았다. 뼈만 남아있는 그건 약간의 오싹함마저 불러일으켰다. 배경만 푸르렀다면, 바다 바닥에서 죽은 분위기까지 연출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화가가 그리고자 했던 건 죽은 동물이 아니었다. 「누가 부탁한건가?」 「설마. 이 촌에 그렇게 돈이 넘쳐나는 녀석은 없다구.」 「그럼 뭐하러 물감을 낭비하는거야?」 「어찌 됐든 나야 좋지. 인간혐오감을 일으키는 문구들을 보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데이먼의 가게에서 그 벽은 똑바로 보였다. 가게의 벽 한 면이 온통 유리창이여서 더욱 그랬다. 고상한 서점에는 어울리지 않게 더럽혀진 벽은 그의 심기를 적잖게 건드렸던건지, 벽화가 나타난 이후에 그는 그것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그것이 향유고래라고 말했다. 그러곤 웬 책 하나를 뽑아 내게 주었다. 선물이라고 했다. 과연 그 정도의 얄팍한 친분이 우리 사이에 있었나는 생각치 않고 고맙게 받았다. '동물의 다양성' 이란 지루한 제목이었다. 향유고래에 대한 설명은 23페이지에 있었다. 나는 그 비대한 몸뚱어리를 보다가 책을 덮었다.  내가 관심있는 건 고래 같은 게 아니었다.   「비가 오는 날엔 집에 일찍 들어가.」 「이런 날은 집에 들어가기 싫은 법이에요. 왜, 그런거 있잖아. 우울한 감성이 충만히 차오를 때….」 「내 말은 당신 발 밑에 내 돈이 있단거야.」 「이런.」   그 남자는 찌그러진 쓰레기통에 앉아있었다. 남자가 발을 치웠다. 돈을 주워주진 않았다. 나는 진흙으로 범벅된 지폐를 집어 털었다. 들고 있는 우산 때문에 오른쪽 팔의 움직임이 불편했다. 남자는 금세 내게 신경을 끊고 벽을 보았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으레 이 곳에 나타나 벽화를 보곤 했다. 데이먼은 날씨 좋은 날에도

  • 은고
  • 2013-12-18
여성의 힘

립스틱이 또 부러졌다. 벌써 세 개째였다. 그는 바르던 것을 멈추었다. 거울 안에 비친 모습이 황폐하다.부러진 립스틱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다. 그는 그것을 주워 파우치 안에 넣었다. 그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그는 화장품 매장에서 일했다. 딱히 화장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름도 꼬부라져있는 그것들이 한 공간에 가득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아이섀도우·비비크림·블러셔·마스카라·주름방지크림·미백전용크림·녹초 마스크팩·거품퐁퐁클렌징폼·아이라이너 펜슬……. 손님이 들어온다. 그가 걸레질을 멈추곤 돌아보았다. 어서오세요. 여성 손님은 앳되보였다. 지나치게 짧은 미니스커트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다.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도, 그 안에 갖춰입은 검은색 브래지어도 엉망이다. 그는 웃음을 띠우며 다가갔다.   "뭐 찾으세요 손님?" "아뇨…그냥. 비비크림 좀 보려고." "요새는 비비보다 CC크림이 더 잘나가요. 고객님 피부가 쿨톤이니까 1호 쓰시는 게 적당하실 것 같은데." "쿨톤이요?" "피부가 하얗고 붉은 끼가 도는 걸 쿨톤이라고 그래요." "아 네."   여성은 고개를 주억거린다. 말간 눈동자가 매장 안에 자리 붙힐데를 찾지 못하고 헤메였다. 하얀 조명 아래에 화장품 종류만 오십개가 넘는다. 여성은 끝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CC크림 하나를 집어든다. 용량이 150g 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무척이나 가볍다. 그러나 달고 있는 브랜드만으로도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는 끼고 있는 녀석이었다.     "피부는 중성이세요 건성이세요? 아니면 복합성?" "여름철에는 피지가 많고 겨울에는 건조해요." "복합성이네요. 요새는 CC크림도 피부타입에 맞춰서 세분화됐거든요. 고객님께 잘 맞는 건 이거에요. 가격대는 다른 것보다 조금 쎄지만 유명 여자연예인이 광고도 했었고, 자외선차단 기능이 완벽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유지 시간만 14시간이 넘어서 틈틈히 고칠 필요도 없죠. 한번만 얇게 이렇게 퍼발라도…봐봐요. 약간씩 광이 돌죠? 이게 저희 매장에서 제일 잘 나가는 제품이에요. 원래는 재고 찾기 어려운데 손님이 오늘 운이 좋으시네요."     손등에 퍼발린 부분을 보던 여성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걸로 주세요. 카운터로 옮기는 걸음이 힘겨워보인다. 그녀는 5cm가 넘는 힐을 신고 있었다. 그는 푹푹 패이는 자국을 따라 걸어 카운터에 도착했다. 긴 여정이었다. 여성은 백을 뒤져 지갑을 꺼낸다. 그는 가방의 브랜드를 잘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가죽 냄새가 코 밑가지 퍼졌다. 여성은 아마 대학생 새내기일 것이다. 가방과 같은 브랜드사의 지갑을 꺼내드는 여성을 보고 그는 확신했다. 여성은 거스름돈과 함께 화장품을 챙겼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투명한 옷 너머의 살갗이 낑겨 움직인다. 브래지어끈이 너무 짧았다. 그는 여성이 나가자 혀를 쯧 찼다. 걸레를 들어 여성이 남기고 간 거대한 언덕 자국들을 지운다. 단단했다.   그의 파우치

  • 은고
  • 2013-09-01
기도하소서

1.    자년.  아니, 자현.  자 - 현.  그래. 그게 내 이름이야.  제대로 된 딱 한 번의 발음 이후로, 조지는 더 이상 나를 자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2.    삼촌의 집은 로체스터에 있었다. 로체스터 내에서도 촌에 속하는 마을이었다.  여름이 되면 포도 냄새가 집 앞 울타리에 무성히 자랐다. 이따금 화장실에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도 포도내가 올라왔다. 누군가 벹어놓은 포도 껍질을 밟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삼촌은 근처 포도농장에서 일했고, 나는 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9월 학기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위에 같이 놀 아이들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거나 삼촌을 보러 포도농장에 가는 일 따  위밖엔 있지 않았다. 동네를 돌아다녀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로체스터에 온 지 일주  일이 조금 넘어서였다. 9월 날씨는 지독하게 덥다. 가볍게 입고 나갔음에도 몇 분 되  지 않아 얼굴과 등에 땀이 번들거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내팽개쳐진 포도 껍질은 이미  앙상하게 뒤틀려져서, 개미밥도 되지 못했다. 나는 살인적인 더위에 지쳐있었다.  동네를 탐험하고자 했던 의지는 신고 있던 샌들의 끈이 끊어졌을 때 함께 끊어졌다.  신발도 엉망이고, 씻고 나온 몸도 엉망인 채로 나무 밑에 널부러져 있는 내게 불쑥  물통 하나가 내밀어졌다. 투명한 통 안 물에는 얼음까지 둥둥 띄워져 있다.  그리고 그 손 너머엔 흑인 아이가 있었다.    "Are you thirsty?"  "...."  "here."    아이는 뚜껑까지 따서 내 입 근처로 가져다주었다. 시큼한 레몬향이 맡아졌다.  레몬에이드 같았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마시지 않자, 아이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주머니를 뒤졌다. 손바닥에 걸려 나온 건 빨대다. 아이가 히죽 웃으며  그걸 통에 꽂았다. 피부보다 더 흰 이였다.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어 막 그것을 받아  마시려는 때에, 물통은 내 앞에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대신 나는 아이의 꿀렁이는  목울대를 보아야만 했다. 캬아. 맛있는 감탄사까지 벹으며 통을 깨끗이 비운 아이는  나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뒤돌아 보드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신나게 굴러가는 바퀴를  보면서 나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미국 또라이도 별 거 없구나.    그게 나와 조지의 첫만남이었다.        3.      조지는 나와 10분 거리에 있는 집에 살았다. 거의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처럼 생긴  주택에, 지나치게 뚱뚱한 개 한마리와 지나치게 마른 어머니, 그리고 적당히 살이  오른 조지가 함께 살았다. 조지네 집 앞에는 울타리 대신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조지네 집 어디에나 존재했다. 심지어 조지가 들고 다니는 가방  에도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조지는 그것을 정말로 끔찍히 여겼다.  조지의 어머니는 지독한 신자였다. 밤마다 우리집까지 그녀가 부르는 찬송가가 들렸  다. 그리고 그 찬송가는 로체스터 동네를 한 바퀴 쭉 돌아, 그 곳에 사는 모든

  • 은고
  • 2013-08-06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