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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

  • 작성자 최재혁
  • 작성일 2013-06-09
  • 조회수 175

단조

남자는 가볍게 피아노 건반을 열어 두드렸다. 우중충한 멜로디가 공기를 뒤덮었다. 남자는 앉을 필요도 없다는 듯, 무릎도 굽히지 않고 가만 서서 음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남자는 연주를 멈추었다. 뚜껑을 닫고 곧바로 한숨을 쉬었다. 공기가 무거운 음역의 바닥에서 나래를 풀고 날았다. 숨을 쉬지 못해 죽음 턱까지 간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비닐팩을 꺼내 열었다. 초록색 캡슐 알약이었다. 물도 없이 그것을 삼켰다. 피아노 기둥에 손을 대어 기대 다시 숨을 골랐다. 입을 계속 벌리고 있어서인지 거친 나무바닥에 맑은 침이 몇 방울 떨어졌다. 남자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비닐팩을 주머니 안에 넣고 문을 열었다. 밖에는 긴 복도가 뻗어져 있었다. 하지만 쉬이 발을 밖으로 내어놓지는 못했다.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남자는 모든 것을 놓은 듯 웃었다.

「가 단조, 나 단조.」

말이 새었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머리통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몸을 몇 번이고 떨었다. 남자는 발작했다. 머리 부근에서 붉은 액체가, 새어 나무바닥에 번졌다. 복도에는 어느 발소리도 없었다. 피아노의 톱니바퀴가 무던히 돌아갔다. 혼자서.

 

-방 안에서

장조에서 단조로 그의 손 위에서 울리던 음파가 바뀐 것은, 그의 병 때문이었다. 기절증, 간질. 그렇다고 했다. 그는 그 이후로 악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언젠가 피아노 의자도 반동강을 내 태워버렸다.

방 안은 쓰레기들로 차 더러워졌고, 결국에는 흰색 피아노 혼자 덩그러니 자리잡아 바다 위의 등대처럼 보이게 되었다. 더 이상 쓰레기를 버릴만한 공간조차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악보를 정성스레 접었다. 종이비행기였다. 그는 쓰레기더미를 헤치고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고 비행기를 날렸다. 월광, 영웅, 바그너 3번, 비창... 하나하나가 모두 꽃잎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창문은 그럼에도 너무나 작았다. 그는 그렇게 종이들을 날리고 나자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눈치였다. 혹은 다시 든 현기증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는 캡슐을 삼켰다. 그는 피아노 옆 탁자에 아직 남은 흰 종이와 연필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오선지로 짐작되는 삐뚤빼뚤한 선 다섯 개를 그었다. 그 밑에도 그렇게 그었다. 그 후 음표를 새겼다. 검은 머리의 표식들이 춤을 추는 마냥 오선지 위에 자리잡았고, 뒤이어 쉼표들도 음표들처럼 오선지 위에 앉았다. 그는 선들의 앞쪽에다가 'b'를 숱하게 넣었다. 그는 이제부터 단조를 사랑하게 되었다. 제목을 썼다. 단조라고. 그는 단조라는 이름을 악보에 붙여넣었다.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 거울을 쳐다보았다. 수척하고 모자란 인간이 거울 속에 있었다. 남자는 이제부터 절대로 거울을 쳐다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항상 실패하는 금연과 비슷한 생각일지었다. 손에는 열쇠고리가 들려 있었다.

피아노 의자가 없기에 남자는 피아노 앞에 서서 연주했다. 건반을 두드리고, 다시 고쳤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악보 자체를 찢고 새로 그렸다. 정말로 우울한 음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수척해지고 모자라졌는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버튼을 눌렀고, 엘리베이터는 제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가 안에 타 있을 동안 엘리베이터는 딱 한 번 멈췄다. 문이 열렸다. 정장을 갖춰 입은 여자였다. 그 좁은 공간에서 길을 잃은 건 그 뿐이었다. 사무직 여성도, 승강기도 제 갈 길을 갔다. 여자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실직자신가요?

>피아니스트입니다.

>아, 네.

막 기절증 판정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한숨도 쉬지 못하고 왔다갔다했다. 그러다 문득 다시 현기증이 들었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알약을 삼켰다. 여자는 그 장면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흔히 뉴스에서 보던 약들. 그런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그냥 닫힘 버튼을 누른다. 문이 차갑게 닫힌다. 금속음이 끼릭,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여자는 다만 피아니스트와 남자 사이의 괴리감을 생각할 뿐이다.

 

-계단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담배를 쥐었다. 이것만 피고 끊어야지. 나는, 예술가다. 그 생각 뿐이었다.

남자는 예술인이고 싶어했다. 기절증 전에도, 그 후에도... 남자는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였다. 여자가 투덜거리며 그곳으로 왔다. 여자는 왜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냐고 말했다. 담배 연기를 맡고 여자는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헛기침을 했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려 밟았다. 그거, 좀 더러울 텐데. 집에 재떨이도 없나?

남자는 곧바로 담배를 주으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다만 아득한 한숨을 쉬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쪽은 담배 안 피나 봐요. 힘들 때 좋은데.

아, 저 사람 커피숍에서 봤었던 것 같아. 카푸치노를 시키고 앉아서 마냥 누굴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하이힐을 신은 발로 계단을 절뚝거리며 내려가면서 혼잣말을 했다. 남자의 말은 허공에 날아 그대로 흩어졌다. 남자는 다시 생각했다. 이제, 금연이라고.

-주차장에서

남자는 계속되는 현기증과 손떨림에 병원을 찾으려고 자동차 안에 탔다. 열쇠를 꽂는 손이 요동쳤다. 결국에는 시동조차 걸 수 없을만큼. 힘겹게 식은땀을 흘리며 시동을 거는데 성공하자 남자는 쓰러져 버렸다. 매연만이 조용히 뿜어나왔다. 의도치 못한 정적은 남자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성 싶었다. 주차장 구석 승용차가 멎어 있는 동안 여자는 주차장에 들어와 누군갈 만났다. 늙은이였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거의 민머리의 작은 노인. 여자는 노인에게 무언가를 받았다. 열쇠고리였다. 금박이 씌워져 있는 꽤나 비싸보이는 물건이었다. 노인이 차를 타고 떠나가자 여자는 비웃으며 열쇠고리를 바닥에 던졌다. 여자 역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남자의 발작이 끝나고, 남자는 식은땀이 채 식지 않은 상태로 자동차에서 내렸다. 심호흡을 할 모양이었다. 남자는 역시, 그 열쇠고리를 주웠다. 어떤 정해진 클리셰도 없었건만. 주머니 속에 열쇠고리를 넣고 남자는 병원으로 향했다. 부디, 주행 중에 발작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병원에서

>이건 발작증입니다. 심각한 간질이에요. 약을 드리죠. 낫지 않거든, 수술을 받으러 오세요.

>피아노를 치는데 영향이 있진 않겠죠?

>피아노는 금물이에요. 뇌에 자극을 주는 어떤 활동도 해선 안됩니다.

의사는 흰 가운을 만지작거리며 처방전을 써 주었다.

 

-길거리, 번화가, 카페에서. 피네fine. 다 카포, 피네.

카페는 남자의 소중한 공간이었다. 남자는 자동차를 몰고 거리를 떠돌았다. 덜덜 떨리는 손은 색색의 캡슐 알약을 삼켰고, 말라붙은 입은 상하로 움직였다. 손에서 약가루가 나렸다.

남자는 우회전을 해 가장 붐비는 공간으로 밀집되었다. 자동차보다 행인의 속도가 빨라졌다. 천천히, 두어 시간을 기다려 남자는 번화가를 빠져나와 조금 뒤처진 공간에 자리잡은 카페에 들어갔다. 젊은 점장이 웃으며 오선지를 내 주었다.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그냥 아무 커피나 한 잔...

>카푸치노로 타 드리죠. 그 악보 작업은 다 끝난 건가요? 듣기 좋던데.

>이제 피아노는 없어요.

남자는 웃었다. 점장이 커피를 내어 왔고 남자는 더 쓴 웃음을 지었다.

카페의 미닫이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남자의 슬픈 모습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은.

>돈, 어쩔 거냐구요. 내가 이렇게 매달 찾으러 와야 하나?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퍼졌다. 점장이 작게 외쳤다.

>모레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남자 주변에서의 상황의 간질이 시작되자마자 남자는 오만원권을 테이블에 남기고는 떠났다. 테이블에는 악보 한 마디가 있었다. 숱하게 새겨진 트레몰로에 덧붙여진 발작적인 반음올림. 남자는 문을 열었다.

 

몇 달이고, 지난 뒤에 남자는 웃었다. 그 때와 같은 쓴 웃음을. 남자는 자동차에 타고 있었고 카페는 그 카랑카랑한 여자, 담배를 그렇게나 싫어하던 여자와 노인이 둘러싸고 있었다.

>철거해야지.

노인이 외쳤다.

남자는 자동차를 그대로 몰고 들어갔다.

창문을 열었다.

“점장님!”

카페 문을 자동차로 들이박았다. 문 앞에는 여자와 노인이 있었다. 자동차는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안쪽까지 들어섰다. 카운터 안쪽까지, 남자는 엑셀을 밟았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남자는 자동차에서 내려 차체를 밀었다.

“완성된 악보의 이름은, 가난자의 몰락과 간질입니다.”

남자는 그대로 서서, 현기증을 아득히 느꼈다. 곧 남자는 쓰러졌다. 누군가가 남자를 데리고 가 버렸다.

 

 

남자는 가볍게 피아노 건반을 열어 두드렸다. 우중충한 멜로디가 공기를 뒤덮었다. 정신병원 안에서, 남자는 이제 어디서 얻었는지도 가물가물한 열쇠고리를 쳐다보며 악보를 그리고 피아노를 두들겼다. 남자는 쓴 웃음을 짓지 않았다. 뇌리에서 한 가닥씩 빠진 듯한 기억이 서글펐다.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비닐팩을 꺼내 열었다. 초록색 캡슐 알약이었다. 물도 없이 그것을 삼켰다. 피아노 기둥에 손을 대어 기대 다시 숨을 골랐다. 입을 계속 벌리고 있어서인지 거친 나무바닥에 맑은 침이 몇 방울 떨어졌다. 남자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비닐팩을 주머니 안에 넣고 문을 열었다. 밖에는 긴 복도가 뻗어져 있었다. 하지만 쉬이 발을 밖으로 내어놓지는 못했다.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남자는 모든 것을 놓은 듯 웃었다.

「가 단조, 나 단조.」

말이 새었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머리통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몸을 몇 번이고 떨었다. 남자는 발작했다. 머리 부근에서 붉은 액체가, 새어 나무바닥에 번졌다. 복도에는 어느 발소리도 없었다. 피아노의 톱니바퀴가 무던히 돌아갔다. 혼자서. 악보, 연주곡의 이름은 ‘피아니스트의 최후’. 시체를 치우던 의사가 지은 이름이었다.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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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재혁
  • 201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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