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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릇한 취미

  • 작성자 꽁보리
  • 작성일 2013-06-16
  • 조회수 189

취미 란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나 자신이 취업준비생의 신분인 만큼 자기PR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꾸, 취미 란을 솔직하게 기재하고 싶다는 욕망이 커져갔다.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 손가락 사이에서 돌아가는 볼펜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끝내 볼펜이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툭 떨어지자 나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써? 말아? 써? 말아?

결국 내가 내린 결정은 ‘말아’였다. 난 취미 란에 ‘독서’라고 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잔뜩 늘어놓았다. 자기소개서와 다른 종이들을 책상 한 쪽으로 대충 밀어놓고, 종잇장들에 파묻혀 있던 탁상시계를 들어올렸다. 17시 45분. 오늘은 좀 촉박하다.

오늘 같은 날은 예외지만, 난 늘 5시 정도에 모든 공식적인 일과가 끝난다.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5시 30분이었고,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20분이 걸린다. 그럼 난 5시 50분에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싱크대 앞에 서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하는 게 맞다.

하지만 약 한 달 전부터 6시 5분에 들어온 나는 엄마에게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수업이 조금씩 더 늘어나서 15분 더 늦게 오게 되었어, 짜증나게.”

평소 나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 오금이 저리는 순간이었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과제였다. 나만의 취미생활을 위한.

한 달 전, 처음 도서관에서 그들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난 그 때, 꽂혀있는 책을 손끝으로 훑으며 무의미하게 책장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5시 45분, 어차피 바깥보다는 안이 낫다는 생각으로 폐관 시간인 6시까지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 서 있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빠져나가고, 테이블에는 대여섯 명 밖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유독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교복을 얌전하게 차려입은 한 커플이었다. 불그스름한 혈색의 얼굴을 한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 아이. 가무잡잡한 피부에 안경을 쓴 지적인 인상의 남자아이. 남자 아이는 여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매일 수도, 그냥 친구나 선배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들이 커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두 아이는 내 눈길을 사로잡았고, 함께인 것이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소곤소곤 남자 아이가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다정히 속삭이고, 여자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끄덕거리는데 그 광경이 나를 빠져들게 했다. 이유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그 후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도서관에 간다. 5시 45분에.

오후 5시 45분을 생각하며 하루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다행히 그 커플은 단 하루도 날 실망시키지 않고 거기에 있었고, 난 도서관 휴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 5시 45분에 꼬박꼬박 도서관에 갔다. 딱 45분이 되면, 난 그들을 처음 발견했던 책장 사이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 그들을 지긋이 응시한 채 15분을 보낸다. 그 무렵부터 테이블에 빈자리가 많아지기 때문에 그 책장에서 그 커플을 볼 수 있는 시간으로는 알맞았다. 몇 주일을 그렇게 그들을 지켜보는 재미로 살다 보니, 내 욕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하루 중 15분이 아닌 더 많은 시간동안 그들을 볼 수는 없을까, 하고. 5시 45분이 아니라 좀 더 일찍 가면 되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건 내키지 않았다. 결국 난 내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지난주, 난 아침나절 내내 고민했다. 내 취미 생활도 얼마나 이상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갈등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이렇게 빠져든 것도 놀라운데 더 큰 욕망에 휩싸이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외출하기 직전, 결국 나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뛰어들어와 디지털 카메라를 가방에 쑤셔넣었다.

난 한 주 동안 그랬던 것처럼 손에 든 그 사진을 보면서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언제나처럼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은 즐겁다. 게다가 오늘은 자기소개서 취미 란에 ‘독서’라고 쓰고 난 후라서 인지 기분이 묘했다. 한 학생 커플을 보기 위해 도서관에 가지만, 결국 도서관에 가는 건 독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난 애써 ‘같은 거야.’하고 말도 안 되는 최면을 걸었다.

5시 50분. 오늘은 여태와는 다르게 5분이나 낭비했다. 난 얼른 그곳으로 향했다. 늘 기대 있던 책장에 기대자, 들떴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가뜩이나 사람도 별로 없이 휑한 테이블인데, 여자 아이의 옆자리도 텅 빈 채였다.

불그스름한 혈색은 여전했지만, 여자 아이의 생기발랄한 눈동자는 공허했다. 나 또한 그 눈동자를 한 채 멍하니 10분을 보냈다. 폐관한다는 사서의 외침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렸다. 여자 아이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건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난 그 아이를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그 아이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난 그 뒤를 따라갔다.

여자 아이는 그늘이 져 있는 벤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여자 아이는, 이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지켜보던 나는, 전에 그들이 커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떠한 상황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여자 아이만큼이나 나도 남자 아이에게 배신감이 치밀었다.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도 여자 아이는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 아까부터 주머니에 넣어둔 그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이 커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내 성격과는 맞지 않는 충동으로 갈등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랬듯 난 또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여자 아이 앞에 가서 섰다.

“아, 안녕.”

여자 아이가 울다 말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 때문에 가슴이 아려왔다.

“저기, 이거.”

그리고 난 계속 만지작거리던 그 사진을 내밀었다. 조금은 닳고, 구겨진 사진이지만 한 달 전보다 아름다움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내, 내가 사진과 대학생인데. 전에 찍었던 거야. 너한테 줄게.”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며 난 그 아이에게 내 손때가 묻은 보물을 건넸다. 그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받아들였다. 채 울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듣는 소곤거림이 아닌, 처음으로 듣는 여자 아이의 목소리였다. 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고 여자 아이의 시야를 벗어났다.

너희는 정말 아름다웠어. 고마워.

난 여자 아이의 시야를 벗어났을 뿐, 여전히 여자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한참이나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내가 건넨 사진을 부여잡고 쉴 새 없이 흐느꼈다. 내가 돌아갈까하고 생각하던 그 때, 그 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소매로 눈을 벅벅 문지르고, 그 사진을 곱게 접어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린 채 자리를 떴다. 나 역시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떴다.

집에 도착하고, 디지털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운 그 커플에게 한 번 미소를 보내주고, 그들을 지웠다. 내 기억 속에서 본래보다 더 찬란해 질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여자 아이가 쓰레기통에 묻어버린 추억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난, 다시는 5시 45분에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여자 아이도 그럴 것이다. 이번에도 난 확신할 수 있다.

꽁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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