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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 작성자 꽁보리
  • 작성일 2013-08-04
  • 조회수 615

‘언니, 언니. 큰일 났어. 어떡하지? 아 어떡해.’

편지의 시작은 응석받이 여동생의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언니, 어떡해. 왕자님이 화나서 날 찾고 있어. 이야기가 어긋났다고.’

하지만 편지의 내용만큼은 여동생의 어쩔 줄 모르는 상황 그대로가 담겨있었다. 언니는 조금은, 아니 많이 우스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 * *

[테마 파크 신데렐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동화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 체험을 할 수 있는데요, 신데렐라의 결말 아시죠? 왕자님과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까지 체험해야만 퇴장 가능합니다. 본 테마 파크는 원작과는 조금 각색되어, 신데렐라는 무도회장에 간 첫 날에 유리구두가 벗겨진 채로 마법이 풀려버립니다. 주의하실 점은…….]

사건의 발단은 두 자매가 새로 생긴 테마파크를 찾은 것이었다. 동생 현정은 언니 현주의 손을 잡고 빙빙 휘두르며 애교를 떨었다. ‘언니! 나 신데렐라 해볼래. 응? 해볼래.’ ‘알았다, 알았어.’ 현주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테마파크로 입장했다. 현정은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입구 앞에 서서 발을 굴렀다. 현주는 동생의 애가 타들어가든 말든 안내원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었다. 현주는 개구쟁이와 같은 미소를 살짝 띠고는 현정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두 자매가 안내원의 지시대로 이행하자, 현정은 더러운 옷을 입고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언니?”

현정은 두리번거리며 현주를 찾았다.

“신데렐라! 얼른 청소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빨리 청소를 끝낸 후에 내 드레스 찾아오기로 했어, 안 했어!”

현정은 앙칼진 목소리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꽤나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심술궂은 표정 때문에 매력이 반감되는 아가씨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신데렐라의 언니구나.’

현정은 동화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현정은 속으로 신나서 짐짓 풀 죽은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들고 있던 걸레로 바닥을 재빠르게 문질렀다. 요정 할머니를 만나 곧 변신할 생각에 절로 콧소리가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신데렐라, 우린 무도회에 다녀올게.”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언니들과 새엄마를 현정은 속으로 실컷 되받아쳤다. 곧 아름다운 공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그들을 비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이 철컥하고 닫혔다. 슬슬 슬퍼하는 신데렐라가 될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동화에서는 아무도 나타날 사람이 없을 텐데.’

설마 요정 할머니인가, 난 슬퍼하지도 않았는데 아직. 현정은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잘 하고 있어? 겨우 찾았네. 신데렐라의 본명을 모르니 원.”

현주였다. 현정은 잔뜩 김이 샜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아 언니! 갑자기 왜 나타나고 그래! 한참 재밌었는데.”

“아, 그러셔?”

현주는 빈정거렸다. 현정은 문 앞에 서 있는 현주의 등을 떠밀었다.

“아 빨리 가. 난 곧 변신할거야. 언니 때문에 늦어지면 책임질 거야?”

“시끄럽고. 현정이 너 이거나 챙겨 둬.”

현주는 쪽지 한 장을 현정에게 내밀었다. 어느 집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야. 수신인에는 ‘에밀리’라고 적으면 돼. 그냥 엑스트라니까 편지해도 그다지 바뀌는 일은 없을 거야.”

“흥, 언니 가고 나면 나는 일사천리로 왕자님과 결혼할 텐데 편지할 틈이나 있을까.”

현주는 현정이 잘 볼 수 있도록 과장된 코웃음을 쳤다.

“너의 그 응석 때문에 왕자님이 싫증나면 동화의 결말이 못 나올 수도 있잖아. 그런 비상사태에 대비한 거지. 필요할 걸?”

현정은 ‘필요 없어!’하고 역정을 낸 후 현주를 쫓아냈다. 대문 밖으로 밀려난 현주는 ‘에밀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옷가게로 돌아갔다. 드레스 원단에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버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현주는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오늘 밤, 필요한 게 있어요. 아름다운 드레스와 장신구, 그리고…….”

 

현정의 말처럼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슬피 우는 신데렐라의 앞에 요정 할머니가 마법을 부렸고, 현정은 아름다운 신데렐라가 되어 왕자님과 춤을 추었다. 한편, 무도회장 한 편에는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얼굴을 가린 에밀리가 신데렐라를 곧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데렐라는 행복한 표정으로 춤을 추었다.

그리고 자정이 되었다.

“어머!”

잔잔한 음악소리와 웃음이 흐르던 무도회장에 신데렐라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녀는 드레스자락을 움켜쥔 채 쏜살같이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왕자님은 당황하여 뒤를 쫓았고, 에밀리 역시 은밀하게 따라 나왔다.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왕자님에게는 당황한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였겠지만, 에밀리는 속으로 가식적인 제 여동생을 비웃었다. 신데렐라는 그런 두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열심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거의 끝나가고, 이제 슬슬 유리구두가 벗겨질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잠시 계단에서 멈칫하더니 다시 밑으로 뛰어 내려가서 나무 그늘 밑에 숨어버렸다.

* * *

‘언니, 난 분명 유리 구두를 벗으려고 했거든? 근데 이게 안 벗겨지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유리 구두를 안 벗고 계단을 다 뛰어내려왔어. 그리고 마법이 풀렸고. 나한테는 유리 구두만 남아있었어. 동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니까, 난 나무 밑에 주저앉아서 얼른 유리 구두 한 짝을 벗었어. 그리고 얼른 계단에 구두를 던져 놓으려고 했는데, 이미 왕자님이 많이 내려와 있는 거야. 그래서 급한 마음에 구두를 세게 던졌다? 그런데……. 너무 세게 던졌나봐. 왕자님 옆을 스쳐지나가서 유리 구두가 와장창 깨졌어. 왕자님은 누구냐! 하고 화가 나서 소리쳤고, 절뚝거리면서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나머지 한 짝도 벗고 줄행랑을 쳤지. 근데 하도 급하게 도망치느라 그 나무 밑에 나머지 한 짝을 그대로 두고 왔어. 언니, 지금 왕자님이 나머지 유리 구두로 나를 찾고 있대. 어쩌지? 이상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어.’

현주는 편지를 마저 다 읽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 동생이 분명 이야기를 망쳐 놓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망쳐놓을 줄은 몰랐다. 현주는 직접 보고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유리 구두를 던져서 산산조각 낸 신데렐라라니. 하마터면 왕자님의 앞에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제 슬슬 클라이맥스.’

현주는 미소를 지었다.

* * *

‘일단 나머지 한 쪽의 유리 구두도 없애버리는 게 좋겠어. 얼른 버리도록 해.’

언니 현주로부터의 답장에 현정은 허겁지겁 나머지 유리 구두를 집 앞 화단에 묻었다. 겨우 한 살 터울의 언니인 현주는 늘 침착한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현정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현주뿐이었다. 어떻게든 현주가 해결해 줄 것이라 현정은 철석 같이 믿었다.

“왕자님 납시오!”

왕궁 병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고, 현정은 벌벌 떨었다. 몸에 묻어 있던 재를 얼굴에 최대한 문지르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어떡하지. 혹시 처형될지도 몰라.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유리 구두의 주인을 찾고 있소.”

집 안에서 전 날 밤에 들었던 왕자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겁을 잔뜩 먹은 현정은 창문을 넘어 도망치고 말았다.

 

“계세요?”

현정은 편지를 보냈던 주소로 힘껏 달렸다. 자신의 얼굴에 묻은 재를 보고 더럽다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안 쓰였다.

“에밀리 언니를 만나러 왔는데요.”

현정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현주를 찾았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온 현주는 덜덜 떨고 있는 현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니, 나 무서워. 정말 무서워.”

그 때였다. 옷가게의 문이 딸랑 거리고, 왕궁의 병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이 유리 구두의 주인이 있소?”

왕자님 역시 문 바깥에 서 있었다. 현주는 어깨를 곧게 펴고 밖으로 나갔다. 현정은 벌벌 떨며 현주의 뒤에 섰다. 현정은 왕자님의 목소리만 들어도 미칠 것 같았다. 전 날에는 그렇게 달콤하던 목소리였는데. 한참 현정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너무도 당당한 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그 유리 구두의 주인입니다, 왕자님.”

현주는 품 안에 감춰 두었던 나머지 유리 구두를 꺼내 들어 두 짝 모두 신었다. 현정은 순간 멍해졌다.

“당신이 어제 그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왕자님은 다정하게 현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주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다.

신데렐라, 재투성이 아가씨인 현정은 어안이 벙벙해 있을 뿐이었다.

 

신데렐라 테마 파크를 퇴장한 후에도 현정은 여전히 멍해 있었다. 현주는 그런 현정을 바라보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주는 안내원의 말을 회상했다.

‘신데렐라의 줄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신데렐라는 입장하신 손님 중 어느 분이 되셔도 상관없습니다. 신데렐라는 호칭이지, 이름이 아니니까요.’

그 의미심장한 한 마디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웠다. 늘 건방진 공주님이던 현정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있다니. 10년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간 것 같았다.

현주는 문득 에밀리의 옷장 깊숙이 감춰 둔 나머지 유리 구두 한 짝이 생각났다. 어떻게든 현정이 도망친 후 상황을 바꿔 보기 위해 준비한 유리 구두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 유리 구두는 한 짝으로 충분했다. 옷장 속에 내버려 두었는데, 현실로 가져와 기념으로 간직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현정이 도망친 뒤, 왕자는 씩씩거리며 나무 그늘로 다가갔다. 현정이 남겨두고 간 한 짝의 유리 구두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왕자의 뒤를 사뿐사뿐 따라온 현주가 입을 열었다.

“저…….”

화가 나 있던 왕자님은 다급해 보이는 여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현주, 아니 에밀리였다. 에밀리는 아까의 현정을 흉내 내며 말했다.

“혹시 제 동생을 보지 못하셨나요?"

“동생?”

에밀리는 당황한 것처럼 양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최대한 많이 움켜쥐었다. 환한 달빛에 하얀 맨발을 노출시켰다.

“아니, 왜 맨발인 것이오?”

왕자님의 물음에 에밀리는 슬픈 웃음을 지었다.

“실은, 제 동생이 장난이 심하여 제 유리 구두 두 짝을 모두 신고 바깥으로 달아났습니다. 혹시 보지 못하셨나요?”

왕자님은 딱한 표정으로 산산조각이 난 유리 파편을 가리켰다.

“동생이 철이 없어 걱정이겠소.”

“하지만 심성은 착한 아이랍니다. 그나저나 계단에 저리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걸로 보니 제 동생이 좋지 않은 일을 벌인 것 같네요.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왕자님은 동생의 철없는 행동을 용서하고 수습하는 다정한 언니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왕자님은 손수 에밀리를 데려가 새로운 구두를 맞춰주고, 함께 새벽까지 춤을 추었다. 에밀리는 자신의 그 어떤 것도 알리지 않고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왕자가 에밀리를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새 구두를 맞추느라 챙기지 못하고 간 유리 구두 한 짝 뿐이었다.

새로운 신데렐라 이야기의 탄생이었다.

꽁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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