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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scenario

  • 작성자 최재혁
  • 작성일 2013-10-27
  • 조회수 219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Scenario

 

 

인물 - 1과 작가, 절대자, 그리고 과거.

 

 

1 : (그는 들어오며 바나나껍질을 밟고 우당탕하였다! 소기의 ‘관객’들은 마음껏 웃어주어야한다.) 어이쿠……. 나는 위대한 자다!

(모든 관객들은 어리둥절해한다.)

1 : 나는 내 금고에 황금이 있다. 나는 내 뇌에 돈을 숨기는 자다. 나는 위대한 공무원이다! 장장 십구년간 벌레보다 못한 삶을 살아 한량들의 다리 사이로 기어다니며 이 위대한 왕좌에 우뚝 섰다. 이 훌륭한 나라에서 공무원보다 강한 이가 또 있을까. 의사? 의사라고? (좌우를 둘러본다.) 그런 자는 내 서류에 모두 이름이 적혀 있어! 모든 국민은 내 서류 아래에서 춤추고 있는 셈이지! 내가 서류에서 이름만 지우면 그들은 불법 체류자가 되는 거야.

(카메라는 장작이 불타고 있는 벽난로 위의 엽총을 클로즈 업 한다.)

1 : 내 발 아래에 있는 관객들아! 모두 일어서 나에게 절을 해! 모두 백원씩 걷어! 이제 국고 횡령만 하기엔 너무 늙었어……. 좀 있으면 난 ‘명예 퇴직’이라는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것을 해야 하지. 난 돈을 더 끌어모아야 해.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게 그것뿐인데! 늙은 놈들은 천 원씩 내고 어린 것들은 백원씩 줘. 어이! (구석에 서 있는 젊은 여자를 부른다.) 공무원도 아닌 것이 ‘기관’에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닌가? 넌 평생 허드렛일만 하다가 늙어서 자식에게조차 버림받고 죽어야 해! 빨리 돈 받아 와!

(여자는 무대를 내려가 관객들에게 돈을 작은 통에 받아 온다. 여자가 고개 숙인 채 졸고 있는 남자를 툭툭 치자 남자는 어리둥절하게 일어나 여자를 본다.)

1 : 뭐야? 너, 뭐야?

(그는 주머니를 급하게 뒤진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듯 한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그는 난입한 경찰들에게 끌려간다.)

1 : 기분나빠. 내 서류에서 이름을 지울 거야. 평생 감옥에서 썩어라.

(작은 통을 받은 1은 여자를 발로 걷어 차 내쫓고 돈을 센다.)

1 : 돈냄새는 어떤 향기보다 좋지. 어머니의 품……. 아니면 처음 가 본 환락가의 냄새,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어. (누가 물어보기라도 했다는 듯 급히 대답한다.) 우리 엄마? 난 충분히 ‘효도’하고 있어. 신경 꺼. 하나, 둘, 셋……. 전부 다 1999년식 동전이네. 이건…….

(1, 분개한다.)

1 : 어떤 개새끼가 은행놀이 동전을 넣은 거야!

(1, 직접 관객에게로 간다.)

1 : 너, 너, 너, 너? 너지? 너잖아? 너 이 새끼, 반반하게 생긴 사내놈이 여자 좀 후리고 다녔을 것 같은데? 그럼 딱 너네! 경찰!

(1이 지목한 이를 잡아간다.)

1 : 마지막으로 묻는다. 누구야? 5초 안에 입 안 꺼내면 다 없애버릴 거야.

(모든 조명이 꺼지고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한 줄기 빛이 선글라스를 낀 남자에게로 향한다. 아주 천천히 내려오는 빛에 남자는 선글라스를 치켜올린다.)

작가 : 나는, 글을 쓰오. 그래서 돈이 없지. 이 지역은, 작가에게는 돈을 주지 않으니까.

(관객석 중앙에서 벌떡 일어난 작가는 관객석 구석에 서 있는 1을 향해 걸어온다.)

작가 : 나는, 모든 창조의 아버지, 스티브 ‘퀸’이다!

(선글라스를 부러뜨린다.)

작가 : 내 인생이 곧 미저리이기 때문에 나는 이 죽은 땅으로 제 발로 기어 왔소.

1 : 넌, 누구냐? 내 서류에 네 이름이 없어!

작가 : 나는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내 이름을 파서 강물에 던져 버렸소. 작가에게 이름이 필요한가? 종이 단막극 몇 장과 시 한 편, 소설 몇 쪽만 남겨 두고 그것이 어린 아이들의 시험지에 나오나, 안 나오나만 보며 대문에 “아! 나는 배가 고프오. 식은 밥에 배추김치 한 쪽만 얹어 주시오.” 이렇게 울부짖으면 되지 않겠는가. 어쨌든 나는 이름이 없소.

1 : 불법이다!

작가 : (천천히 무대로 올라간다.) 음, 좋은 나무를 태우고 있군. 춥고 배고픈 대기에 한 줄기 따뜻한 바람이 불어 오는군. 이 곳은 정말로 좋은걸. 모두가 느끼겠지만 나는 이 공기를 마실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 객기를 부려서 미안하오! (다시 내려간다.)

(1이 무대 위로 올라간다. 작가는 무대 바로 아래에서 1과 눈을 마주친다.)

작가 : 오, 그대의 키는 참 크군. 공무원은 키가 원래 큰가 보군. 세 뼘이나 크니 내가 어찌 올려다보지 않을 수가 있겠소. 친히 올려다보아 드리리다.

1 : 돈을 내놔! 백 원, 1999년 제식 동전으로! 1998년도 안 되고 2000년도 안 된단 말이야. 정부가 가장 호황스러웠을 때 뽑은 부의 상징인 1999년 동전!

작가 :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소. 나는 1999년에 글을 쓰기 시작했거든. 나에게 있어 그 해는 어떤 부도 바랄 수 없었던 해였소. 비로소 그 이전의 시체와 같은 나를 토막토막 썰어 내버리고 나는 창조의 화신, 모두가 더러워 피하는 신이 되었소. 이른바 ‘창조 역병의 신’!

1 : 그러니까 너는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1999년을 부정한다는 것인가? 이름도 없는 것이 참으로 무정부스럽군. 사상이 어떻게 되지?

작가 : 만드는 자는 사상에 젖어 있을 수가 없소. 북쪽의 생각이던지, 남쪽의 생각이던지.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소. 사상에 젖은 창조자는 곧장 쓰레기장으로 들어가 버려야 하지.

1 : 그래……. 그럼 자네는 빨갱인가?

작가 : 나는 빨간 사람도 아니오. 시 한 편을 올려 놓고 제발 학생들이 그 시를 읽어 시험 치르기를 바라는 자요.

1 : (짜증이 난 듯 벽을 친다.) 이 봐. 시간이 칠 분이나 흘렀잖아. 시간을 벌어야 돈도 벌지. 돈을 못 내겠다면 무기징역을 살면 되는 일이고. 세금을 내는 것과 똑같은 일이야. 나에게 주는 돈은 세금과 똑같단 말야.

작가 : 저 아래에서 공무원이 되기 위해 이빨로 벽을 오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돈을 못 내겠소. 죽은 창조자의 글을 산 사람들이 가공해 문제를 내고 차후에 죽을 어린이들이 그 시험을 치르는 짓이 꼴 보기 싫고, 살아 있는 나는 생을 끝내고 싶단 거요. 도대체 소설, 방대한 소설 한 권이 육백 자도 안 되는 쪽만 잘라져 앞의 내용도 알지 못한 채 시식해 보라고 어린이에게 주는 것이 어디 있겠소. 그래 놓고는, (목소리를 변성기도 오지 않은 남자 아이로 바꾸고) “아, 나는 소설이 싫어! 알아처먹을 수 없는 개소리만 지껄이고 설쳐대는 새끼들! 표현은 오글거리고, 좆같아. 게임이나 하러 가자, 친구야.” (목소리를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오. 사실 내 뜻을 밝히자면, 나는 저런 악습을 끝내기 위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오. 저주스러운 삶, 내 자체가 흉물스러워서 나는 돈을 못 내겠소!

(작가는 발을 구른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 부순 선글라스 조각을 1에게로 내던진다.)

1 : 어딜……. 건방지게! (손에 박힌 파편을 빼내며) 넌 반역이야! 국가 전복 내란 예비 음모죄다! 통합과 진보를 어긴 진정한 쓰레기다! 경찰!

(경찰들이 작가의 양 팔을 잡는다.)

(소리가 드륵, 난다. 그 오랜 과거와 같이, 기계가 등장한다. 관객석의 뒤에서 굴욕적이게도 걸어온다. 관객들은 신과 그 너머의 전광판을 본다. 작가의 주민등록증. 주민등록증이 강 아래로 빠진다. 작가는 수첩에 빼곡히 글을 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내가 왔다!

(경찰들이 아무 표식도 없이 쓰러진다.)

1 : 뭐야?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내가 모든 일을 종결한다. 나는, 가장 위대한 극적 장치다.

작가 : 저 사람을, 죽여 주시오! 내 돈을 빼앗으려고 한 탐관오리란 말이오!

1 : 저 사람을, 죽이시오! 나는 위대한 공무원이므로 나를 죽일 순 없고 그 대신 저 사람을 죽이시오! 저 사람은 우리 나라를 뒤집으려고 한 반역자요!

작가 : 그대는 혹시 모든 죽은 창조자를 대변하여 세상을 고칠 수 있소? 예를 들어 아까 이야기한 것들…….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나는 아주 작은 일에만 관여할 수 있느니라.

1, 작가 : (서로를 가리키며) 그렇다면 저 사람을 죽여 주시오! 그러고 나서 이야기해 봅시다!

(신은 벽난로 옆의 총을 집어들고 쐈다. 1과 작가는 쓰러진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내가 알 게 뭐야. 세상이 너무 변해서 나는 쓸모도 없어졌는데. 그리스에선 내가 짱이었는데…….

(주절거림이 잦아들고 무대와 무대 아래에는 죽은 1과 작가만이 있다.)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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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천천히 땅 속으로 스며들고, 당신을 등 뒤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모래사장을 거닙니다. 나는 당신에게 내 나랠 떼어다가 줍니다. 나는 당신의 우울, 광기입니다. 믿기지 않는 것을 기꺼이 눈앞에 보여줍니다. 신뢰의 방벽을 당신의 그 깊은 마음속에 쌓습니다. 당신은 먼지가 물컵 속으로 침전하듯이, 심연 속으로 가라앉으려 합니다. 물방울이 켜켜이 눈가의 눈그늘에 달라붙습니다. 나는 당신을 앞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립니다. 티끌이 눈가에 묻어서는 아닙니다. 그냥, 슬픈 일이 그 여린 심장에 부닥친 것이겠죠, 아마도. 당신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나는 나만의 푸른 손수건으로 붉은 피를 스치듯 닦습니다. 나는 당신을 슬프게 껴안아 줄 거예요. 종이와 깃펜 곁에는 양피지로 얼기설기 엮여 있는 시편詩篇이 있습니다. 진짜 시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바람에 날아가고, 그곳에는 검은 잉크 먹물만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글자를 읽으며 당신은 다시 깃펜을 듭니다. 시를 엮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쉬운. 쉬우면서도 어려운. 복잡하고 단순한. 그런 것입니다. 나는 한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릿결을 쓰다듬습니다. 당신은 홀로 콧노래를 부르며 썩어 가는 나무판자 벽과 함께 생을 같이 합니다. 시편은 당신의 손으로 다시 정렬됩니다. 당신은, 그 업적을 애써 무시합니다. 검은 잉크로 쓰여진 시들은 결국 당신의 횃불로 활활 타오릅니다. 모든 인간들의 욕심과 생명이 담겨 있는 시는 그렇게, 당신에 의해 무너집니다. 당신을 껴안고 싶습니다. 나는 나래를 당신에게 주고, 눈물을 주고, 뛰고 있던 핏줄을 월계수 화환처럼 머리에 둘러 줍니다. 나는 천천히 땅 속으로 스며들고. 그 후 당신을 등 뒤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믿기지 않는 사랑을 기꺼이 눈앞에 보여줍니다. 당신은 사랑에 대해 씁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씁니다. 당신은 시편을 앞에 두고 깃펜을 잉크에 적십니다. 나는 땅 아래로,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당신 대신에. 당신은 다시 한 줄을 씁니다.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 최재혁
  • 201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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