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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르라미가 운다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4-12-06
  • 조회수 328

김이 4년 11개월 일찍 돌아와 버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식들이 짐정리를 하러 집에 한데 모인 때, 철제 대문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누구세요? 마당으로 나간 셋째 며느리가 그녀의 모습을 보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비명소리에 나온 다른 사람들도 퍽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건 놀라움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자랑이었던 풍성한 머리는 사자 갈기가 되어 있었고 곰국 물처럼 뽀얗던 얼굴은 땟국에 절어 있었다. 입고 갔던 분홍색 털 스웨터는 해지고 뜯겨 짐승의 몸피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늘진 동상처럼 서 있던 김은 혓바닥을 살짝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바른 후 천천히 말했다. 목이 마르구나. 충격에 빠져 있던 자식 내외들이 그제야 부리나케 몸을 움직였다.

첫째 며느리가 컵 가득 물을 담아 김에게로 가져왔다. 둘째 며느리는 집 안으로 들어가 이삿짐을 나르며 생긴 발자국들을 닦았다. 첫째와 둘째는 대문 밖 트럭에 실은 의자를 도로 꺼내와 김을 앉혔다. 셋째는 주저앉아 있는 아내를 일으켰다.

김이 바깥에 있은 지 십 분이 지났다. 둘째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신호를 받은 둘째 며느리는 땀을 흘렸다. 발자국은 어떻게 수습이 됐는데, 가구를 옮기며 파인 장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김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현관문 너머로 당황한 첫째와 첫째 며느리, 둘째의 얼굴이 보였다. 둘째 며느리가 좀 전의 셋째처럼 화들짝 놀랐다. 김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온 첫째 며느리가 얼른 보일러를 틀고 어머니에게 일렀다. 물이 분사되는 소리가 나고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모두들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셋째 며느리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가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장판이 파인 부분을 더듬으며 둘째 며느리가 말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다. 둘째 며느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 사실은, 하며 이 사태에 대해서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말해주길 원했다. 그녀는 떨고 있는 셋째 며느리의 얼굴을 노려봤다.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셋째 며느리의 불안이 그녀에게도 전이되는 듯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버티다 결국 눈을 내리깔았다. 셋째가 조용히 일어나 아내를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화장실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쏴아. 첫째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아까 하던 일 계속 하자고. 얘기는 진정된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고.”

모두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지금 모여 있어봤자 아무런 대책도 나오지 않으리란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온기인지. 샤워기에서 나오는 세찬 물줄기에 숨쉬기가 힘든데도 도리어 얼굴을 더 드밀었다. 숨을 참지 못할 만큼이 되어서 고개를 돌렸을 땐 깜짝 놀랐다.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이 걸레 빤 물처럼 까맸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 김이 서려 간신히 윤곽만 확인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수증기가 천장 언저리까지 차올라 넘실대고 있었다. 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습한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폐를 가득 채우는 게 느껴졌다. 단숨에 숨을 내뱉고 수도꼭지를 다시 틀려는 데 손이 멈칫했다. 손끝에서 땟국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김은 몸을 조금 움츠렸다. 물이 튀지 않도록 약간만 수도꼭지를 틀었다.

“어머님. 수건이랑 입으실 옷들 문 앞에 놔뒀어요. 저희는 큰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 천천히 씻으세요.”

첫째 며느리의 목소리였다. 오늘이 며칠인지 잠깐 생각해보다 그만두었다. 며칠 같은 건 더 이상 김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몸 구석구석을 비누로 훑고 사용한 비누는 곧장 쓰레기통에다 던졌다. 뭉툭한 소리와 함께 비누가 쓰레기통 바닥으로 떨어졌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아직 시한폭탄은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꼬로록. 하수도 주변에 만들어진 소용돌이가 소리를 내며 물을 빨아들였다.

큰 방 안에서 김의 자식 내외들은 일렬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죽 훑곤 경대가 올려 져 있는 문간 앞에 앉았다. 머리를 빗을 때마다 뚝뚝 소리가 났다. 끊기고 뽑힌 머리카락이 빗살 틈에 수북이 걸려나왔다. 김은 그걸 앉은자리 옆에 모았다. 금세 그곳에 머리카락이 소복하게 쌓였다. 흰 머리가 많이 섞여 있어서 검은 색보단 회색에 가까웠다.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식 내외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수십 번의 눈짓이 오간 끝에 첫째가 말꼬를 트기로 했다. 첫째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뱉고 입을 열었다.

“저기, 어머니.”

“막내며느리는 고개 좀 들어라. 누가 보면 초상이라도 난 줄 알겠다.”

셋째 며느리가 잽싸게 고개를 들었다. 김의 흰 머리카락만큼이나 얼굴이 하얬다. 첫째는 도로 입을 닫고 코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빗질을 끝낸 김이 몸을 돌리자 모두들 고개를 더 숙였다. 김의 눈엔 그들의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일 늦게 들인 셋째 며느리만도 십년 가까이 본 사이였다. 하지만 세 며느리 중에서 어느 누구의 정수리도 그녀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일단은 다들 내일 다시 찾아오든가 해라. 피곤하구나.”

그들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잰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철커덩, 하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김은 방의 불을 끄고 그대로 방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처음으로 본 정수리. ‘정수리’가 아니라 ‘처음’이란 단어에 김은 당혹스러워 했다. 한때는 며느리들의 모든 것을 안다고 믿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처음’을 겪어야 며느리들에 대해서 다 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며느리들이 남과 별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됐다. 방 안의 가구도, 천장의 형광등도, 누런 빛깔의 장판도 어느 것 하나도 김이 완벽하게 알고 있는 건 없었다. 차츰 암순응이 찾아왔다. 돌아오니 모든 게 낯설어져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자식 내외를 다시 만나게 되면 말하려고 종이 위에 글씨를 눌러쓰듯 꾹꾹 새겨놓은 말이 있었는데 아무리 신경을 집중해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도 분명히 기억이 났었는데. 기억을 새겨놓은 종이가 물에 젖어버린 것만 같았다. 김은 모로 몸을 돌리고 웅크렸다. 아무런 말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한 날이었고 그녀에겐 다른 무엇보다 잠이 필요했다.

 

현관문을 나선 김의 자식 내외는 차를 타고 집을 벗어나 근처 음식점에서 다시 모였다. 테이블 두 개를 붙여 앉고 삼겹살 4인분을 주문했다. 먼저 나온 물수건으로 저마다 손을 닦고 있을 때 둘째 며느리가 격하게 물을 들이켜고 탁 소리 나게 물 컵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확실히 버린…… 내려 준 건 맞아요?”

종업원이 밑반찬을 들고 와서 테이블에 하나씩 놓았다. 꽤 큰 목소리였으므로 종업원도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얘기를 더 엿듣기 위해서 조금 밍그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첫째가 종업원을 도와 접시를 테이블에 놓았다. 안 도와주셔도 괜찮은데, 하고 종업원이 말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리를 지킬 이유가 없어진 종업원이 떠나고, 둘째 며느리가 자신을 쏘아보는 걸 느낀 그는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둘째 며느리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댐건설로 수몰된 산골짜기의 작은 마을 김의 고향이었다. 그녀의 살이 아직 아래로 처지지 않고 탄력을 유지하던 시절, 김은 이따금 자식들에게 자신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릴 때 이야기만 좀 들었을 뿐 보기는커녕 근처 산에도 간 적이 없어서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째가 돌연 그녀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 산에 살던 사람이 몇 십 년 째 산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숲도 구경하지 못했단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이렇게 또 다들 시간되는 날이 언제 있겠어요. 매 주말마다 자식들이 모두 내려와 그녀를 설득해도 김은 주저했다. 사실 그녀를 당혹시키고 머뭇거리게 하는 건 여행이 아니라 자식들의 갑작스런 효도였다. 최근 두어 달 간에 김은 열 벌 가량의 새 옷을 받았고 제철과일이란 건 죄다 먹어보았으며 하나뿐이던 보험도 네댓 개나 더 들었다. 그런 효도가 기분이 나쁠 건 없었다. 효도란 게 자동차 변속기도 아니고 꼭 점층적으로 늘어야 할 이유도 없잖은가.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효도에 마냥 좋아할 것도 없었다. 머뭇거리는 것은 그저 감, 고드름처럼 조약돌처럼 오랜 시간 세상을 살며 자연스레 얻게 된 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함께 가기로 약속을 하고 며칠 뒤 첫째가 그녀를 태우러 집으로 왔다. 모이기로 한 장소는 산 중턱에 위치한 조용한 별장이었는데, 셋째의 친구가 제공해준 장소라고 했다. 살던 동네의 정경이 점점 멀어지고,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서야 산 입구로 들어섰다. 그녀는 첫째에게 허락을 받고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매서운 소리를 내면서 차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뜨기가 힘들어서 김은 손가락 두 개가 드나들 정도의 공간만 남겨두고 창을 올렸다. 그 좁은 틈새로 그녀는 바깥의 숲을 봤다. 한나절이 돼서야 겨우 고개를 내밀던 해, 여름이면 골짜기 전체에 울리던 매미들의 합창, 이따금씩 비집고 들어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골짜기를 빠져나가던 서늘한 바람. 댐 건설 소식이 들려올 즈음엔 열 가구 남짓의 사람이 모여 있는 마을이어서 철거작업도 하지 않고 곧장 댐을 지어 물을 채웠었다. 그녀는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반이 융기돼 수면 위로 솟아오른 마을을 상상했다.

어머니 더우세요? 첫째가 창문을 모두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땀 한 방울이 삐질 흘렀다. 그녀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에어컨을 더 세게 틀지 물어오는 첫째에게 대신 매미얘기를 했다.

“쇄애 하고 우는 건 말매민데, 한 여름에 운단다. 가을이 오면 걔들은 죽고 대신 쓰르라미가 울지. 쓰르라미가 단풍보다 먼저 가을을 알려주는 거란다.”

첫째는 대수롭다는 듯 힘없이 웃었다. 차창을 모두 닫았는데도 쇄애 매미소리가 들렸다.

산을 오르던 차가 멈췄다. 약속장소까지 쉬지 않고 가기엔 김의 몸이 견디질 못했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도 열어봤지만 토기가 진정되질 않았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차에서 내린 김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첫째는 난처해하지 않았다. 이럴 줄 예상하고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김을 데리고 나섰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약속한 시간까진 아직 한 시간 가량이 남아있었다. 이제 슬슬 행동을 시작할 때였다.

자동차 뒷범퍼에 걸터앉아 있는 김을 불렀다. 그녀에게 아까 절벽 아래로 핀 꽃밭을 보았는지 물었다. 못 보셨으면 보러 가실래요? 정차해놓은 자동차 때문에 김이 난처해했지만, 이곳은 원래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라며 김의 손을 잡아끌었다. 끌려오다시피 하던 김이 이내 체념하고 직접 걷겠다고 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절벽 비탈을 타고 피어 있는 노란 꽃밭이 두 사람의 눈으로 들어왔다. 첫째야, 내가 얘들을 왜 못 봤을까. 길 가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구경하는 김의 뒷모습을 그는 소리 없이 응시했다. 어깨가 없고 키가 작은 그녀의 몸은 자그만 공 같았다.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첫째의 머릿속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차라리, 그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는 발목에 힘을 줬다. 조금만 힘을 풀면 달려가 그녀를 발로 밀쳐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첫째야. 그는 나쁜 짓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꽃이냐?

그가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는 다시 뜸을 들였다. 김은 뒷말이 이어질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제가 금방 차에서 휴대폰 갖고 올 테니까. 꼼짝 말고 여기 계셔야 돼요.

그길로 그는 차에 올라타 엑셀을 밟았다. 먹을 만큼 나이를 먹었기에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다행히 그는 차를 타다 중간 중간 쉬어야 할 만큼은 늙지 않았다.

제시간에 맞춰 그는 약속장소인 둘째네 동네 파출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 가보니 둘째가 신고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로 다급하게 뛰어갔다. 떨리는 목소리로 둘째가 형님, 하고 소리쳤다. 둘째의 동공이 목소리처럼 흔들렸다. 가출선고를 시작하고 실종신고, 사망선고 까지는 자그마치 5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에 경찰들이 김만을 추적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세차게 둘째의 뺨을 후렸다. 파출소 안에 철썩, 하는 소리가 퍼졌다. 눈을 부릅뜬 채 다시 한 번 둘째의 뺨을 치려는 순간 경찰관들이 그를 붙잡았다. 그때부턴 팔을 휘두르며 욕지거리를 시작했다. 강하게 나가야 해요. 그이가 의심 사는 행동을 한다 싶으면 도련님께서 처리를 해주셔야 한다는 거죠. 일전의 모의에서 둘째의 아내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두 형님들이 파출소에서 연극을 하는 동안에 셋째는 집에서 전단지를 만들었다. 10년 전 김의 사진을 붙이고, 그 아래 쓸데없는 글자들을 빽빽이 채우고 사례금을 그 사이에 교묘히 숨겨 넣었다. 사례금은 밖으로 빼놔, 이래선 너무 티가 나잖아. 밤에 찾아온 둘째의 말대로 셋째는 사례금을 제일 밑으로 뺐다. 다음 날부터 실종 장소로 해놓은 둘째의 집 근처에서 그들은 전단지를 돌렸다.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이려다 말고 셋째는 먼저 붙어 있는 다른 전단지를 봤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보리, 5살, 치와와. 사례금 많이많이 드릴게요. 보리야 빨리 돌아와.

셋째는 전날 밤 아내가 잠결에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기분이 나빠져 붙어 있는 전단지를 떼어 내 갖고 있던 전단지와 함께 구겨서 근처 쓰레기봉투 쪽으로 던졌다. 그녀의 아내는 소극적이어서 제 주장을 잘 말하지 못했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반대라도 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을 텐데, 하고 셋째는 생각했다.

 

든든히 배를 채운 그들은 김에게 사정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데 동의를 봤다. 장소를 모색하는 동안에는 첫째의 집 지하실에서 모시기로 했다. 셋째 며느리는 내일부터 일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일찍 남편을 잃고도 힘든 내색 않고 억척같이 그들을 키워낸 그녀였다. 그들은 그녀에게 일말의 모성애가 남아있기를 기도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김은 눈을 떴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둘째와 며느리가 와있었다. 둘째 며느리가 거실 한 복판에 놓여 있는 밥상에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어머님 일어나셨어요? 다른 도련님네는 좀 있다 오실 거예요. 기다리고 계시면 저희가 식사 차려놓을게요.”

잠시 뒤 첫째 네와 셋째가 집에 도착했다. 셋째 며느리는 몸이 좋지 않아서 함께 오지 못했다고 셋째가 말했다. 그들도 식사 준비를 도왔다. 둘째가 구수한 된장찌개를 밥상 복판에 놓았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거실 가득 퍼졌다. 김은 숟가락을 들어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떴다. 둘째 며느리의 된장찌개 맛은 개량기로 잰 것처럼 언제나 똑같았다. 그간의 일이 꿈인 양 김과 가족들은 화목한 식사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마치고는 거실에 모여 커피를 마셨다. 둘째 며느리가 커피 여섯 잔을 쟁반에 담아 왔다. 종이컵인 한 잔은 김의 것이다. 믹스커피는 종이컵에 탰을 때 가장 맛있다고 입버릇처럼 그녀는 말했었다. 각자의 커피를 손에든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모두들 커피를 홀짝이며 괜찮다는 말만 연신 해댔다. 그러던 중 문득 김이 일어나더니 방에서 외출복을 입고 나왔다. 첫째가 김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자 그녀는 미용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미용실은 나중에 가도 되지 않느냐고 첫째가 말하려고 했지만, 김이 그보다 먼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도어벨 소리와 함께 미용실 주인이 그를 반겼다. 이른 시간이라 미용실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그녀를 의자에 앉힌 주인은 파마? 염색? 하고 묻는다. 김은 주인에게 머리를 펼 순 없겠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던 주인이 고개를 든다. 거울에 비친 김의 얼굴을 본다. 펼 순 있는데……. 이곳 동네로 미용실을 옮기고 파마나 염색이 아닌 다른 주문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다시 분무기로 김의 머리카락에 물을 뿌렸다. 어쨌든 고객이 원하는 바였으므로.

 

신발 밑장으로 느껴지는 포장도로의 감촉이 김은 생경했다. 그녀가 일주일동안 산속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도 마찬가지였다.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 기억이 있다. 지칠 대로 지친 김의 몸은 산속에서의 기억들을 모조리 버렸다.

그녀는 시가지 쪽을 향해 걸었다. A컴퓨터, A분식, A가구……. 낯선 지명에 길찾기를 포기하고 택시를 타기로 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꼬깃꼬깃해진 지폐가 얼마큼 그녀의 손에 만져졌다. 예닐곱의 택시가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치고 마침내 한 택시가 그녀 앞에 섰다. 보조석 문을 열자 기사가 뒤에 타라며 도로 문을 닫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여기가 어디요.

택시기사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여기가 어디요, 하고 물었다. 택시기사가 고개를 돌려서 김을 쳐다봤다. 그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려, 이 노망난 할망구야.

택시에서 쫓겨난 뒤로 김은 무작정 걸었다. 그 사이 땅거미가 졌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두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들어왔지만 거기서도 바람은 불었다. 쓰르르 쓰르르. 멀리서 쓰르라미가 울었다. 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건물에 잘려나가 반듯해진 하늘이 조금 높아졌음을 실감했다. 조금 전에 봤던 파출소가 떠올랐다. 파출소에 가면 어떻게든 일이 풀릴 텐데,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파출소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 년. 파출소로 들어가려고 발을 뗀 순간 오래 전 아로새긴 단어가 퍼뜩 그녀의 머리를 스쳤고, 그녀는 그길로 파출소를 등졌다.

 

“어머니 오셨…….”

대문 열리는 소리에 쏜살같이 달려 나간 둘째 며느리는 김의 모습을 보곤 하마터면 셋째 며느리처럼 풀썩 주저앉을 뻔했다. 당황한 표정을 지우려고 애를 쓰느라 입꼬리와 눈가가 움찔거렸다. 김이 그녀를 지나가자 샴푸냄새가 둘째며느리의 코 주변을 찰싹찰싹 때리며 콧속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김의 모습에 멈칫했다. 뭔가 말할 시간도 없이 김이 잽싸게 큰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방금 내가 본 게 무엇인가, 첫째가 생각했다. 아내가 없는 게 다행이라고 셋째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 머리를 보았던 게 첫째의 딸이 중학생이던 때였다. 단정한 게 참 이쁘네,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손녀는 말로만 감사합니다, 했다. 그날 내내 손녀딸은 제 머리카락을 못살게 베베 꼬았다. 김은 눈썹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조금 집어서 들어 올렸다 놓았다. 찰랑, 머리카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김은 장롱 깊숙한 곳에서 선글라스와 모피코트가 들어 있는 상자를 꺼냈다. 수년 전 칠순잔치에서 선물로 받은 물건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경대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흐릿한 눈인데. 봉사가 된 것 같았다. 지팡이도 챙겨야 할까.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얼른 옷을 벗고 그 위에 선글라스를 포개 놓았다. 어머니, 들어가도 될까요? 둘째 며느리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한 순간도 김을 가만히 놔두질 못해 안달이 난 듯했다.

첫째는 둘째 며느리의 말을 듣고는 그럴 만도 하겠구나, 싶었다. 그 나이에 한 달 동안 고생을 했으니. 그럼 요양원엘 보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둘째 며느리는 지난 한 달 동안 김을 찾는 척 연기하느라 든 비용이 아깝지도 않으냐고 했다. 오늘 같이 밥 드실 때도 별 말 없으셨잖아요. 틀림없이 저희 사정을 이해해주실거예요. 물론 치매면 더 수월할 테고.

어머니, 하고 운을 뗐는데 김의 뒤편 경대 아래 모피코트와 선글라스가 첫째의 눈에 들어왔다. 진품과 유사한 걸 찾느라 진땀을 뺐던 선물들이었다. 저리도 가지런히 보관할 줄 알았으면 물려준다손 치더라도 진품을 살 걸 그랬다. 저희들,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큰애야.

그의 고개가 자라처럼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선글라스와 코트, 단발머리를 보며 확신했던 생각이 빗나가자 머리가 하얘졌다. 그는 자신이 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단 걸 인정해야 했다. 한 달 전에 그는 김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노란 꽃 말이다. 결국에 이름이 뭐였냐.

네? 김의 머릿속이 노래졌다. 그때 왜 같이 봤던, 하고 김이 재차 묻지만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둘째 며느리가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복화술로 속삭였다. 말려들지 말아요. 김의 얼굴을 살폈다. 중학생 같은 머리스타일이 자꾸만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도와주십쇼. 세 마디만 하면 되는데 입이 달싹거리기만 하고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때 별안간 셋째가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둘째 며느리가 제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보지만 남편은 제 눈동자도 제어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둘째 며느리는 제 입으로 무엇 하나도 말하지 못했다. 세 사람 모두 오줌 마려운 아이처럼 자꾸만 엉덩이를 뭉그적댔다.

오늘은 그만 가봐라.

 

언젠가 자는 척 방으로 들어가 자식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적이 있었다. 두꺼운 방문을 뚫고 들어오느라 많이 뭉개진 대화들 틈에서 몇 가지 선명한 단어를 건져 종이에 썼다. 풀칠, 성적, 주식……. 자식들이 가고 그날 밤 김은 퍼즐을 맞추듯 아침에 쓴 단어들을 배열해 문장을 만들었다. 첫째는 요즘 사업이 잘 되지 않았다. 셋째네 막내아들은 이번 학기에 성적이 좋지 않아 장학금을 못 받을지도 몰랐다. 둘째네가 사놓은 주식은 연일 주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괜찮지 않았다.

어느덧 마지막 단어 하나가 남았다. 그런데 도통 이 단어가 무얼 의미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오 년. 머릿속에 자리를 찾지 못하고 굴러다니는 퍼즐 한 조각이 생겼다.

이제 그녀는 어느 정도 그 단어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녀만 없으면 모든 건 괜찮아질 것이다.

 

오후 네 시, 그녀가 선글라스를 낀다. 선글라스를 낀 그녀는 이제 눈부실 햇살에도 눈을 찌푸리지 않을 것이다. 모피코트를 걸치고, 하나 있는 단화를 신발장에서 빼내어 신는다.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마당으로 나온다. 개 한 마리 키우지 않고 꽃 한 포기 심지 않아 휑뎅그렁하다. 대문을 향해 걸어가는 김의 걸음걸이는 퍽 우아하다. 대문 아래에 죽은 매미가 발라당 누워 있다.

대문은 아무리 살살 열어도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경찰은 보이지 않는다. 걷는 내내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앞머리를 자꾸만 헝클어 놓는다. 김은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가린다. 얼마쯤 걷다보니 그동안 이 단화를 빼내어 신지 않았던 이유가 떠올랐다. 볼이 넓은 그녀의 발에 비해 단화는 볼이 좁았다. 좀 더 걸으니 슈퍼가 보였다. 슈퍼 앞 평상에서 신발을 벗고 다리를 주물렀다. 일어나 고개를 오른쪽으로 튼 순간 그녀의 눈앞에 노랗게 물든 들판이 보인다.

김이 떠났다.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들이 근처 식당으로 피신해 삼겹살을 구우며 새로운 전략을 짜는 동안,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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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 45분 즈음

 초기 인물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눈빛이다. 카메라가 영혼을 앗아간다는 미신이 만연했기 때문에, 그 즈음의 일반인 모델은 하나같이 강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눈을 통해 왕래하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의 구멍을 메웠다. 신념, 공포, 분노, 혹은 순수한 동경 따위로. 그런 의미에서 K의 눈은 낡아빠진 싸구려에 가까웠다. 아직 과학이 진리를 대신하기 전, 미신이 미신으로 불리지 않던 시대를 살아가는 듯, K의 눈은 기묘한 생명으로 불탔다. 그녀는 분명 이성보다 심장을 우선하리라. 촬영자로 하여금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눈이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삼각대를 세웠다. 카메라의 노출값과 함께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갑한 교복 넥타이를 연신 긁어대며, K의 알몸에게 렌즈를 겨눴다. 석고상처럼 바스라지는 신체, 그 위로 수놓아진 푸른색 멍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응시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녀가 진심 아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시퍼런 눈을 치켜뜬채 나를 바라보는 것도.  K와 나는 방과후 빈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양 팔에 아로 새겨진 멍자국이 염증처럼 부풀어오르는 탓에, 종일 묶어뒀던 팔토시를 막 벗어던진 참이었다. 나는 선생과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서 불어터진 흉터를 말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처가 덧나고 함부로 엉겨붙기 때문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거, 얻어 맞은거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채 호흡을 삼키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적막이 감도는 교실에서 K의 시선을 눈치챈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뿐 차마 할 말을 고르지 못 했다. 담홍색 저녁 노을을 받은 하얀 피부가 꼭 석고상처럼 눈부시다. 교실 뒷문에서 꼿꼿이 펼쳐진 척추가 아름답다. 따위의 사고를 반추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K가 먼저 입을 열기까지,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어.”  다만 그런 대치상황을 넘어 날아온 K의 한마디는 너무나도 뜻밖의 물건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노라 고백했다. 죄값을 치르는 건 두렵기 때문에 내일 자살을 할 것이라며, 초연한 어투로 속삭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해를 필요로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새 다가와 내가 반사적으로 움켜쥔 DSLR을 검지로 쓸어올렸다. 슬쩍, 미소지었다.   나에게 처음 카메라를 건네주던 날, 아버지는 말했다. 사람의 눈동자도 카메라처럼 풍경을 담아둘 수 있다고. 잠깐 빛을 응시한 다음 눈을 감으면 눈꺼풀 속에 그 잔향이, 불꽃이, 똑똑히 보이잖아. 이게 바로 그 증거야. 보호안경 너머로 용접 불꽃을 튀기며 그는 곧잘 떠들었다. 삭으로 뜬 달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무렵의 나를 사진으로 이끈 매력적인 미소였다. 꼭 지금처럼, 체념 한방울 섞이지 않은 강인한 미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양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K는 꼭 술을 마시지 않은 아버지처럼 따뜻했다.  “그러니까 내 영정사진을 찍어줘. 너, 사진 찍는거지?”  그날부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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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2
보이지 않는

 남자는 늑대였다. 손바닥만한 핏덩이로 태어난 그에게는 입술 대신 주둥이가 있었다. 남자의 어미는 탯줄도 채 자르지 않고 그 모습을 긴밀히 살폈다. 길게 뻗은 주둥이, 옹골찬 회색 눈동자, 전신을 덮은 이중 모피, 남자에게 인간 다운 신체 부위는 온전히 돋아난 다섯 손가락이 전부였다. 그 꼴이 영락없이 괴물이었기에, 남자는 버려졌다.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바야흐로 이단 심판관이 악마와 마녀를 때려잡던 시기였다. 가축이 죽고, 곡식이 마르는 건 전부 악마의 소행이라고, 교회는 말했다. 달리 탓할 대상이 없어,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숲속에서 홀몸으로 지내는 여성은 화형, 기형아를 출산한 일가는 몸이 찢어졌다. 단, 귀족은 예외였다. 그들은 단두대 아래서 목이 잘렸다.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남자는 부모가 기요틴 아래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열일곱이 되는 나이에 몰래 성을 빠져나와 무법지를 거닐었다. 힘들지는 않았다. 남자는 금방 자랐다. 성을 빠져나왔을 때, 그의 신장은 이미 2m 가까이 되었다. 단단하게 솟은 송곳니는 돌을 부술 만큼 강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버려진 저택에 둥지를 틀었다.  "저곳에는 용이 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몸을 붙인 폐 저택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용이 몸을 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이제 30년 가까이 삶을 영위한 남자는 더는 아무것도 먹고 마실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호수를 핥았다. 자기 직전, 저택 주류 창고에 남아있는 위스키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걸로 족했다. 덩치는 점점 커져,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 하지만 남자는 늑대였다. 괴물이었지만, 용은 아니었다. 폐허에 버려진 정장을 손질하여 입고, 혀를 굴릴 때, 보다 고풍스러운 단어를 벼렸다. 마을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황금을 탐하지 않았다. 다섯 손가락 달린 괴물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누구보다 인간성을 갖춘 영혼이, 기사가 그의 심장을 꿰뚫어주길 바랐다. 남자는 괴물이었다. 괴물은 인간에게 죽어야 했다.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남자는 결론 내렸다.  폐허는 나름대로 지낼 만했다. 가구에 남아있는 문양으로 추측해 볼 때, 몰락 귀족의 저택인 것 같았다. 정장, 거대한 거울, 마찬가지로 거대한 시계.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모두 폐허에 남았다. 남자는 그들을 입었다. 버려진 것들을 입었다. 편안했다. 몸을 옥죄는 정장 안에서 남자는 편안할 수 있었다. 시계의 먼지를 털고 기름칠을 했다. 거울 역시 관리하긴 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닦아도 비치지 않았으니까. 본인 만큼은 절대로.  남자는 저택의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처음 그 앞에 섰을 때 깨친 사실이었다. 세상을 담은 조각은, 남자를 제외한 모두를 비췄다. 이따금 비를 피해 들어오는 올빼미, 토끼, 여우를 비췄다. 잘 정돈된 정장을 비췄다. 출처 모를 와인과 위스키 역시 그곳에 담겼건만,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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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꽃비

할머니는 소녀의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쭉 이어진 벚나무의 행렬에 양 뺨을 살짝 붉혔다. 여든에 가까워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지만 초봄의 내음 앞에서 그녀는 소녀가 되었다. 두 눈을 활짝 열고서 가만가만 떨어지는 꽃비를 응시했다. 노인답지 않은 풍부한 생기가 그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엄마는 종종 ‘어머니가 너무 늙으셔서 그래’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늙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놓쳐온 과거를 향해서. “너희 아빠랑 요양원 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오늘만 할머니랑 둘이 있어.” 그 말과 함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삼이 된 너를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슬픔이나 연민 대신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최근 들어 엄마와 아빠는 자주 그런 한숨을 토했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처럼, 응, 그래, 괜찮아. 짧은 세 마디로 둘을 배웅했다. 부모님의 한숨을 닮아 무거운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돌려, 거실 탁자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머리도, 눈도, 뇌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노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째서 우리의 몸은 이렇게 쪼그라들고 마는 걸까요.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나는 창문에 기댄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렸다. 거슬거슬한 촉감이 검지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감겼다. 젊음이 빠져나간 노인의 육체였다. 내 검지 손가락의 촉감이, 세월을 뚫고 올라온 그녀의 주름이, 그 사실을 열성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뇌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스스로가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이 점점 깎여나가는 것도 모두 당연한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건 당연하다고 잘난 듯이 말하는 주제에, 어째서 기어코 어제를 돌아보는 걸까.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제,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담임이 내뱉은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 때가 참 좋을 때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린 지금은 그저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저녁 열 한시에 독서실을 빠져나오는 일상은 빈말로라도 그리워할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맨 앞자리에서 담임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그는 그때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 꽃이 그렇게 좋아요?” 나는 그리 묻고서, 잠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가 마무리되면 벚꽃도 지겠지. 문득 그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햇빛 아래서 벚꽃을 볼 일이 없는 탓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을 나와 해가 떨어지고서 돌아오는 나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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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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