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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리 견생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5-03-20
  • 조회수 560

 

<비인리 견생>

 

짱깨다, 짱깨가 나타났다.

 

우웅우웅대며 아무에게나 와락 달려들어 사정없이 물어뜯는 광경은 가히 잔혹하고도 참담하여라. 팔이며 다리는 물론이요 언제는 한 번 머리를 콱 물려 숨을 내뿜는 고래마냥 피를 철철 솟구쳐내던 그이는 생사조차 모른다. 발을 턱, 구르면 어이구, 뒤로 물러나고 이빨을 드러내기라도 할라치면 쏜살같이 각자 저들 집으로 후닥닥 숨어들어가기 바쁘다.

 

본디 중국에서 혈통이 이어졌다 함은 조고마한 패니키즈나 후덕한 차우차우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요놈은 온통 시커먼 검댕일 덮어쓴 무려 세퍼드이지라. 중국 놈이라 짱깨, 짱깨 이리 불러대던 것이 그대로 남아버릇 해 제 이름이 짱깬 줄 아는 이 개를 마을에서 재깍 쫓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연 마을 이장의 애완견 아닌 애완견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심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알맞을 듯하였다. 심지어는 마을 이장마저 짱깨 그 미친개의 바이러슨지 뭔지에 감염이 된 건지 크르릉거리는 것은 약과요 그것도 모자라 침을 질질 흘려댄다. 아니다, 감염 따위의 하잘것없는 것이 아니라 천성이 그러한지도.

 

ㅡ 어이구 이장님, 밤새 잘 주무셨어유?

ㅡ …….

 

고개만 건방지게 까딱하고는 짜리몽땅한 다리로 뒤뚱뒤뚱 걸어가 버리는 것이 다반사다. 심지어 마을의 어르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깍듯이 인사해도 반응은 매한가지니,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해서 저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어린놈이, 며 쯧쯧 혀를 찰 만도 하건만 이상케도 불평소리는 들리는 법이 없다.

 

ㅡ 새댁, 어이구 새대액. 허유 눈 좀 떠 보소. 긍게 누누히 말했잖어, 입조심 좀 하랑게. 그리 동네방네 입소문 쫘악 깔리게 해댔스며는 누가 무사하겠어유.

 

의성댁이 57번지 새댁을 붙들고 양 볼을 두어 번 짜악짜악 소리 나도록 쳐대더니만 추욱 널브러진 몸을 낑낑대며 날랐다. 새댁이라 불린 여인의 목덜미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깊게 패인 자국이 적나라하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가 하니, 허연 뼈에 시뻘건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육안으로도 훤히 보인다. 마치 고기를 쓱썩 잘라내 놓은 것 마냥 살덩이는 어디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면 저 멀리서 짱깨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이리 어슬렁 저리 어슬렁댄다.

 

ㅡ 떼엑, 여가 지금 어디라고 정신 사납게 어슬렁대는 겨? 퍼뜩 저리 비키라, 퍼뜩!

 

어이구야, 여기 초상 또 나겄어. 탄식 소리도 들리질 않는지 비인리에 몸담은 지 한 달 남짓 된 의성댁은 패기도 좋아라, 짱깨 고 셰퍼드에게 삿대질까지 해 가며 내쫓는다. 한숨 소리가 여기서 한 번 저기서 한 번 제 몸을 불렸지만 의성댁에게는 닿지 않는 크기였다. 제가 아무리 위협을 해 대도 짱깨가 도망갈 기미조차 보이질 않자 여자는 새댁의 둥근 머리통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덩이를 집어 든다. 그리곤 피칠갑이 되어 원 색을 가늠하지 못할 고 돌을 기어이 짱깨 고 밉상의 두를 겨눠 냅다 던진다.

 

따악. 누구의 피인지 모를 선혈이 흩뿌려졌다. 짱깨는 으릉대더니만 의성댁을 제 노오란 눈으로 뚫어지게 노려본다. 흡사 장군감에 기개가 넘치는 의성댁의 오싹한 눈빛에 짱깨는 꼬리를 내리고 등을 돌려 깨갱깽 달아난다. 기가 눌린 것이리라. 의성댁과 정신을 놓은 새댁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은 그 신음이 복수의 피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랬기에 그들은 제각기 저들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피가 다시 흩뿌려졌다. 해가 어스름해졌다, 없어졌다, 다시 얼굴을 내밀 때즈음에는 새댁이 있어야 할 고 자리에 새댁은 어딜 가고 진득하니 피가 끈끈해진 채로 의성댁이 허연 눈을 뒤집어 까고는 부들대고 있다. 바람이 매서워 손이 타의로 흔들대는 것이 하여금 아직 죽지 않았다, 그리 절규하고 있는 것 마냥 처절하다. 의성댁의 목덜미는 거짐 뼈만 남은 가운데 군데군데가 불그스름해 기이했고 보는 사람마다 눈살을 움푹 찌푸린다. 뼈에도 아작난 자욱이 남아 있다. 그러나 가까이 가려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 사실은 또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이장은 이상하게 슈퍼에 몸을 들이지 않는다. 근처에도 오질 않는다. 그것의 뒤만 줄기차게 좇는 심복 짱깨도 마찬가지였다. 햇살 슈퍼는 덕분에 인산인해였다. 분명 본업을 다하러 오는 자들은 얼마 없는데 항상 복작복작한 것은 햇살 슈퍼가 비인리의 유일한 안전구역이요, 그린벨트였기에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제법 가게 구실을 갖추고 있었으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짱깨의 무차별·무통보 습격에서 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문을 닫는 것은 상상 불가능한 일이다. 뜻하지 않게 이십사 시간 영업을 하게 된 기덕네만 좋게 되었다.

 

ㅡ 그러니 왜 그…… 이장, 님은 여기 안 온다유? 본 적이 없네, 어째.

ㅡ 저야 여기 온 지 일 주일도 안 되었으니 모르죠, 무슨 개? 깨? 밖에는.

 

햇살 슈퍼 안쪽 평상에 딱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제 안방마냥 다리를 벅벅 긁어대는 것은 왁살시럽기로 소문이 자자한 고창댁이었다. 고창댁은 와삭, 하드를 베어 우물거리고는 부채를 펄럭대며 혀를 기일게 빼물고 볼멘소리를 찍찍 해댔다. 머리를 단정히 뒤로 넘긴 슬아 엄마는 여남은 살 남짓 된 제 딸의 기다란 머리칼을 총총 땋아 내리면서 대꾸했다. 서울서 내려온 지 삼사일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이 유독 하얗다. 누굴 닮았는지 만만찮게 왈가닥인 슬아가 단박에 이마를 확 찌푸렸다.

 

ㅡ 엄마, 아파!

ㅡ 으이구, 조금만 있어 봐. 너 이렇게 안 하면 다 풀러먹고 오잖어. 전 동네에서도, 그 전전 동네에서도 맨날 그랬지 않았어? 그렇다고 니가 머리를 잘 빨기를 해? 허구한 날 머리 벅벅 감기 싫으면 좀 참어.

 

슬아의 투덜거림에도 슬아 엄마는 머리를 꽉꽉 잡아당겼다. 단단한 동아줄이라도 땋을 기세였다. 기어이 머리에 머리끈을 동여매고는 되었다, 며 제 딸아이의 머리통을 북가죽 두드리듯 가벼이 쳤다. 돌아오는 불만을 고스란히 무시하고는 입을 다시 여는 것은 제 성격에 두말할 것 없었으리라. 슬아가 입을 비죽거리는 것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ㅡ 아차, 그러고 보니 이장님 방송하는 것도 못 들어 본 것 같아요.

 

고창댁은 마지막 한 입 남은 하드 바를 쓱 제 입에 털어 넣고 가시가 빽빽이 박힌 말을 툭 내뱉었다. 그 와중에도 단어 선택이 적절한 것은 요 마을 터주대감이자 소식통으로서 제 몫을 거뜬히 해 내는 능력 덕이었으리라.

 

ㅡ 그 개자……, 아니 그 양반 원체 그렇잖어, 말 오질라게 못하는 겨. 할 줄 아는 건 멍멍 개소리 짖어대는 것밖엔 없구. 오늘 집 비웠다는디 언제나 다시 돌아오려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창댁은 다 먹은 하드 바 나무막대를 쪽 소리나게 빨고는 구석진 파랑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농구하는 것마냥 던져 넣었다. 터텅. 쓰레기통 외곽을 치고 튕겨 나온 막대에 에잉, 앓는 소리를 내곤 가뜩이나 욱신거리는 제 허리를 어렵사리 굽혔다. 손톱이 짧아 납작한 막대와 한참이나 틱틱대며 씨름하다간 그것을 간신히 손 안에 쥐어 잡곤 다시 에잉, 앓는 소리와 함께 쓰레기통에 신경질적으로 박아 넣었다.

 

ㅡ 그니까 조심혀, 슬아네도. 말 잘못 했다간 모가지 날라가는 거 금방이여, 멍멍 개소리는 덤으로 혀서.

 

제 딸아이와의 실갱이와 고창댁의 말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온통 혼란스러워 있는 슬아 엄마의 등을 툭툭 치곤 곧 고창댁은 휘적휘적 슈퍼 문을 밀곤 비죽 열린 틈새로 빠져나갔다. 고창댁이 연방 앓는 소리를 달고 다닌다 해도 비인리의 여기저기 잡다한 소식통이었다. 마을의 실상에 관해서는 아주 빠삭하다 정평이 난 여자였으니 귀담아 듣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슬아네는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어 소문마저 웽웽거리다 스리슬쩍 지나가 버리는 터였다. 가뜩이나 물정에 어두운 슬아 엄마는 불과 열몇 시간 전에 의성댁이 명을 다했다는 것마저 주워듣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는 슬아네가 마을 한구석에 처박혔다는 것도 한몫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서는 다시 말을 꺼내기 꺼려하는 것 또한 제법이었기에 퍼질 구멍은 없었다. 한 마을 안의 일을 멀쩡한 여자마저 모르는데 밖으로 새어나갈 일이 있겠냐는 거다.

 

슬아 엄마는 앞에 앉아 투덜거리는 딸아이의 땋은 머리 사이로 삐죽삐죽 못나게 튀어나온 잔머리들을 뒤로 넘겨주고는 슬아를 내보냈다. 물끄러미 작아져 가는 어린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다가 조심해라ㅡ, 며 마구 뜀박질해 시야에서 사라지는 뒷모습에 노파심 가득한 한 마디를 크게 내질렀다. 애석하게도 슬아의 귀는 그것을 잡아채질 못했다.

 

고창댁의 설거지소리는 유달리 요란했다. 과부라는 명목에 걸맞지 않게 설거지거리는 늘 쌓여 있었고,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오지랖은 부산스러운 발걸음이 대변했다. 덜그럭덜그럭 챙그렁 쨍 덜그덕,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드는 마찰음에 컹, 모든 소리를 상쇄시키며 개 짖는 소리가 제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고창댁은 그 검은 미친개 소리가 제 손이라도 물은 것 마냥 손을 재깍 멈추었다. 확연히 줄어든 데시벨에 개 울음소린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고창댁이 십여 년 가까이 피 보는 일 없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조상님께 제를 몇 번이나 드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제 어미의 어미의 어미 때부터 내려온 약삭빠른 눈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비인리에선 관례 아닌 관례인 신고식이란 것이 있었는데, 아무리 잽싼 정어리라도 미친개의 손아귀를 벗어나진 못하였다.

 

간밤만 해도 그러했다. 아무런 경험 없는 57번지 새댁이 봉변을 당한 것은 신고식으로 그렇다 쳐도, 유독 짱깨를 만만히 여겼던 의성댁의 목숨줄 또한 잡아채 비틀어 버리지 않았는가. 일주일을 신고 기간인 셈 치면 이제 터 잡은 지 한 달이 어언 넘어가는 의성 댁은 운이 무지하게 나빴을 것이리라. 새댁 또한 이 주일이라면 첫 신고식치고는 많이 늦은 것이었다. 고 광경을 태연히 지켜보는 듯한 고창댁은 이장과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알짱대다 제게 이득인 파에 덥석 붙었다. 붙은 것도 아닌 것이, 샤바샤바 하며 비위만 재주껏 맞추면 이후는 일사천리, 순탄한 것이었다.

 

대부분은 당연스럽게도 이장이 훨 우세했으나 간간히 제 안에서 이는 짱깨에 대한 바득거림이 커져 갈 즈음에는 주민들과 짱깨니 이장이니, 비밀스럽게 호박씨를 까며 잦아들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고창댁이 화병으로는 죽지 않는 까닭이었다. 이장 그리고 그것의 애완견이라는 짱깨 개자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다분히 애를 쓰는 것은 물론이요, 비인리 사람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역시 분주히 제 입이며 발을 놀려댔다.

 

이러니 오지랖 넓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다 입지는 나날이 좁아지고만 있었다. 이장은 몰라도 짱깨가 절 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요 근래 들어 이장도 수상한 눈초리를 내비치곤 했다.

 

ㅡ 글두 그렇게 안했으믄 지금즈음 고 개자식들 밥이 되었을 거여, 아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제 입안에서만 굴려대는 소리였다.

 

ㅡ 그려, 내가 뭘 알긴 조금 많이 아는 게 아니지. 어떻게든 꼬투릴 잡으련가 본디…….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으리라. 저들의 정보가 드러나는 것을.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야만을 넘어선 짐승 그 자체의 그들이 택한 방법은 단 하나이리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으리라.

 

ㅡ 근디 나두 눈치는 있거등, 그리 호락호락하게 목숨을 내주진 않을 것인디.

 

어쩌면 가장 대담한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은 고창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이장은 밖으로 휘적 나다니곤 했는데 한 번 집을 비우면 백이면 백 일주일씩이나 훌쩍 넘기고도 돌아오질 않는 것이었다. 그 사이 마을이 어찌 돌아가는가 하니 건장하기 그지없는 상수아빠 덕이어라. 아무리 이장이 나가는 날이 한 달에 한 번이 될 지 일 년에 한 번이 될지는 몰랐다 하더라도 상수아빠가 없었더라면 어찌어찌 운영되지조차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면 이 상수아빠라는 자가 곧 착하거나 싹싹하다라 한다면 그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장이 나갔다 해서 숨통이 완전히 트인 것은 또 아니었다. 제 심복 짱깨는 집에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 셰퍼드가 말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바람에 이장, 이장 거렸다간 자칫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미친개에 물릴지도 몰랐다. 운이 나쁘면 허연 천에 싸여 강제로 추방당할 것이었다. 물론 숨통은 끊어진 채로.

 

이장만큼은 아니었지만 만만찮게 마을 사람들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역시 상수아빠였다, 이장이나 짱깨에 기죽지 않고 제 의견을 강경히 피력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실은 그 우락부락한 근육만 봐도 단박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짱깨를 쥐어 패는 그깟 것은 일도 아니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풀어두면 필시 제 세력에 위협이 되리라 여겨졌던 것이었는지 제가 조심스레 쳐 둔 그물망에 걸려든 것은 이장에겐 한숨 놓을 일이었으리라. 달디단 권력욕에 취해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아졌을 뿐이었지 제 몸 하나 너끈히 건사할 재주는 되었다. 그런들 뭣하랴, 어쨌거나 이장의 왼팔로 할 짓 다 해 먹고 안 할 짓도 따라 하고 무지막지한 욕심주머니를 꽉꽉 채우다 못해 이겨 넣으려 용을 쓰는데. 눈 안 보이고 귀 안 들리는 것쯤은 제가 가져간 그것들에 비하면 눈에도 안 보일 만치였으니.

 

제아무리 건장한 사내라 해도 당장 돈깨나 굴러들어오는 것을 차 버리는 사람이 진정 미친놈이리라.

 

고창댁이 제 재주껏 눈치봐가며 생을 연명했다면 상수아빠 고놈은 당당히 나다니며 픽픽 웃음을 뱉어냈다. 여느 사람이었다면 목이 물리고도 남았을 거리들도 상수아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장 그리고 짱깨 어느 쪽도 상수아빠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마 저들 비위를 살설 맞춰 주었던 것도 한몫 했으리라.

 

꽤나 괘씸했으나 이이마저 없어지면 첫째로는 마을이 와해될 것이요 둘째로는 온 주민들이 이장과 검둥개의 수중에 접쳐져 휘둘릴 것이 빤했기에 아무도 반발하질 못했던 것이었다. 안내방송이나 투표 따위의 이장의 업무범위는 고스란히 상수아빠에게 위임되었다. 가능했던 것은 역시 상수아빠가 설설 기어대며 이장의 심기에 꼭 맞게 대처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주민방송·투표·문제해결·민원접수·중대사 결정은 고스란히 상수아빠의 시계에 맞추어졌다.

 

실질 권력자인 제가 할 일은 이장 내지 짱깨의 비위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제 이익을 챙기는 것뿐이었다. 시시콜콜한 일거리들은 잔뜩 제 아들에게 떠맡겼다.

 

그러니 제 아들인 상수도 또래 동무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깨가 으쓱해져 하늘을 찌를 법한 코를 한껏 추켜세우고는 하늘 높은 줄도, 세상 넓은 줄도 모르고 뻗대며 제 새가슴을 주욱 내밀던 것이었다. 간혹 달갑지 않게 보는 이는 있었다. 실은 그러한 눈길이 없는 것이 더욱 이상할 법했다. 그러나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우락부락한 남자엔 당해 낼 재간이 없었기에 속으로만 욕지거리를 실컷 내뱉는 것이었다.

 

일전 제 분들을 참지 못하고 열댓 명의 남녀 아이들이 우르르 상수에게 덤벼든 적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명연한 상수의 잘못이었다. 그 용감무쌍한, 다시 말하면 무모했던 그들은 와락 덤비자마자 추풍낙엽 스러지듯 와르르 엎어졌다. 그들은 가히 정의로웠으나, 오합지졸,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일개 졸병들이 잘 갈린 칼을 서늘히 옆에 차고 저들을 한참 위에서 깔보는 장군을 이길 가능성이란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아직까지도 소문이 돌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까닭일지도 몰랐다.

 

해서 상수아빠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고창댁은 불만이 퍽이나 많은 것이었다. 한낱 개자식이 으르렁대며 제 성에 차지 않으면 재깍 물어뜯어 놓는 것에서부터 요 작은 마을이 개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그것을 생각하다 보면 제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이었다. 며칠이고 앓는 소리로 끙끙거리다 내린 결론은 셰퍼드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장은 내동 쉬이 나서질 않았으니 그의 심복, 것도 오른팔만 제거하면 회생이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고민해 왔던 저만의 분쟁거리였고 수도 없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고심하였으나 결론은 단 하나였다. 짱깨, 고 검둥이의 숨통을 끊어 버리자. 헌데 어떻게?

 

ㅡ 돌루 머리를 콱 찍어 내리면 되지 않을까유,

 

햇살 슈퍼에 빼곡히 모여 앉은 사람들은 흡사 검은 개미들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햇살 슈퍼 평상이 더욱이 비좁게 느껴지는 가운데 운을 띄운 것은 계산대 책걸상에 팔을 떡하니 얹어놓곤 나름 진중히 고민하던 기덕네였다.

 

ㅡ 고것이 세면 얼마나 세다고야, 설마 돌덩어리 고 딱딱한 것에 머리뼈를 받구두 멀쩡하겄어유?

ㅡ 아녀, 그 전에 우리가 물려죽을거여. 고거 얼마나 빠른지 눈으로 못 봐서 그러는 겨?

 

상수 아빠를 제외한 나머지 비인리 사람들을 은밀히 불러놓은 장본인인 고창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기덕네가,

 

ㅡ 아무리 그려두 우리는 적어봤자 여섯 내지 여덟인디유,

 

하자 그 말허리를 끊고서는,

 

ㅡ 만만히 볼 게 아니란 건 기덕네가 젤루 잘 알지 않어? 그렇잖어, 전번에도 심기 거슬렸다간 팔 한 번 물어뜯겼잖여.

 

기염을 조용히 토해 내는 것이었다. 아직도 목 부근에 붕대를 칭칭 두르고 있는 새댁의 얼굴이 창백했다. 기덕네의 팔에 감겨 있는 흰 것을 힐끗 곁눈질했다.

 

ㅡ 아니 글쎄, 전번엔 제 몸뚱아리 몇 배도 훨 넘어가는 늑대 피떡을 만들어 패대기쳐놨잖여. 종전 눈밭에 나뒹굴던 늑대 사체 세 구 말여. 고게 짱……, 아니 그것이 그리 한 거잖여.

 

짱깨라는 발음을 채 하지도 않고는 서둘러 말을 바꾼다. 된통 혼쭐이 난, 그러니까 신고식을 치룬 인간들뿐만 아닌 다른 생물들이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익숙해져야만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직 슬아 엄마만 새댁이며 기덕네에 걱정의 눈빛을 침묵으로 대신했다. 허나 그것도 한순간뿐이었다.

 

ㅡ 흐유, 글고 보니 며칠 전이었나, 의성댁도 고 손에 죽어났닸지요. 고창댁이 봤다고 하지 않았어유?

 

라며 미간을 좁히며 우체국 청년이 끼어들자, 고창댁은 별 일 아니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슬아 엄마의 얼굴이 돌 마냥 딱딱해졌다. 흡사 못 들을 것을 들어 버린 양,

 

ㅡ 무슨 소리에요, 그게?

ㅡ 으응, 슬아네는 요번에 서울서 내려와서 잘 모르는가 벼. 아니, 근디 그거 슬아엄마 온 다음에 죽은 거였는디 누가 말 안 해줬나? 우리 비인리에선 초상나는 건 일두 아녀. 것도 개시키가 물어죽잉게 나라에선 뭐라구도 못하구.

ㅡ 그게 비단 그것 때문이겄어?

 

고창댁이 말을 잘랐다. 아무리 그래도 마을 안에서 살인사건이라 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것도 우발적인 사고가 아닌 명백한 의도적 사건인데, 소문이 일체 퍼지지 않은 것은 실로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음을 읽었는지 고창댁은,

 

ㅡ 알잖어, 이장이 요 코딱지만한 나라 안에선 세도가긴 세도가란 겨. 한 마을 봉쇄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

ㅡ 저번에 도망쳤던 12번지 아주머니도 결국엔 죽었다쥬?

 

당시 폐쇄된 마을에서의 탈출을 감행한 것은 12번지 아줌마였다. 한창 마을에서 떠나야 한다는 의견이 치솟을 때였다. 짱깨와 이장의 횡포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누가 목숨의 위협을 받는 자리에서 더 살고 싶어 하겠냐는 거다. 해서 용감한 12번지 아줌마가 느지막한 밤 달빛을 등불 삼아 조심조심 마을을 빠져나가던 고 순간 짱깨가 나타나 앞을 막아서곤 크르릉 댔던 거다. 그리곤 악, 비명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뜯겨진 목에선 선혈이 뿜어나갔다.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그 시절 젊었던 고창댁은 새어나가려는 소리를 틀어막으며 황급히 어두운 밤길을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뛰쳐갔다. 그리곤 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것을 온통 게워냈던 것이었다.

 

그 이후 경비라고 할 것도 없는 짱깨의 감시망은 더욱 삼엄해졌고,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송곳니가 하얀 살결에 그대로 박혔다. 그렇게 해서 마을 절반을 죽여내고서야 짱깨는 보름 만에 진정했다. 비인리에 유독 빈집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들어오는 발자국은 있는데, 나가는 발자국은 개 발자국 이외에는 없다. 들어오는 사람들이 비인리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죽음으로서.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슬아 엄마를 딱하다는 듯 츳츳, 누군가가 혀를 차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으리라. 차라리 듣질 않았길 빌었으리라.

 

ㅡ 우린 젊을 때부터 예 있었잖어, 못 볼 꼴 다 보고 와서 이젠 감흥두 없어 야, 그냥 그런갑다 하구 넘어가지.

ㅡ 하루걸러 하루 꼴로 초상나는 때도 있었는디. 이 정도면 많이 좋아진 거여.

 

즉슨 언제 죽을지 모르는 소리란 것이었다. 이리 이야기하는 것도 어쩌면 몇 다리 건너 귀에 들어가기만 하면 목덜미를 물어뜯기는 것은 두말할 것 없었으리라. 한 마을이 모조리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컹컹, 개 짖어대는 소리가 환청마냥 아른거리는 듯했다.

 

ㅡ 그, 그러면 얼른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고 요상한 짱깨놈을 처리할 손 싶었다면 이장이 없는 이때가 제격이리라. 더 이상 늦춰서도 안 되었다. 이장이 집을 비운 지 일 주일이 거짐 다 되어 간다. 짱깨를 가만 놓아둔다면 제 목숨은 둘째 치고 딸아이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어찌나 허둥댔으면 상수아빠가 슬그머니 문틈을 비집고 평상에 털썩, 앉아 버리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였을지. 일제히 얼굴을 찌푸린 고창댁이며 기덕네의 심상찮은 기류에 슬아 엄마는 제 입을 주춤 멈추었다. 그제야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상수아빠였다.

 

ㅡ 아이고, 상수아빠, 마침 잘 왔어요. 가까이 와 봐요. 지금 짱깨란…….

ㅡ 상수아빠는 왜 또 왔디, 일도 바쁜 양반이?

 

고창댁의 퉁명스러운 타박이 슬아 엄마의 입을 황급히 막았다. 상수아빠의 추악한 면모를 이제 막 들어온 슬아 엄마가 알지 못해 벌어진 사단이었다. 허나 때는 이미 늦었다. 짱깨란 단어는 상수 아빠의 귀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일순간 상수 아빠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것을 감춰두곤 예의 그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제 딴에는 만만하다 여겨지는 슬아 엄마에게 몸을 바싹 붙었다.

 

ㅡ 에이, 타박이 심하십니더. 저도 무슨 일인지 좀 듣쥬.

 

내색은 못하고 제 애꿎은 이마만 팍 구겨대고 있는 것이었다. 상수아빠의 말 한마디에 죽어났던 사람 또한 두어 명이나 되었다. 제 손을 더럽히진 않았으나 실상 짱깨에게 지시를 내렸으니 그러했다. 눈길이 곱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아둔한 슬아 엄마는, 알 거 없어, 라 손을 내젓는 고창댁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간 문제인 고 입을 성급히 여는 것이었다.

 

ㅡ 상수아빠도 같이 하면 되겠네요. 남자 한 명 더 있으면 좋죠, 뭐. 힘도 셀 것 같은데요.

 

눈치가 없는 것일까. 고창댁이나 기덕네가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저 혼자 흥분해서는 제 말만 쏟아내는 것이었다.

 

ㅡ 짱깨라는 개가 이장 심복이라면서요, 게다가 사람을 막 죽이고 다닌다면서요. 상수아빠네 아들이나 우리네 딸이나 짱깨에게 물려죽을 거라면 그렇게 될 거잖아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수밖에는 없잖아요, 예?

 

상수아빠가 피식거리는 것도 보질 못한 채로 제 이야기만 수없이 끌어낸다. 평소 조용하던 슬아엄마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광경이다.

 

ㅡ 그러니까 짱깨 그 개, 죽이는 것만이 방법이에요.

 

결연한 눈빛이었다. 상수아빠에게 평소 쏟아지는 눈빛들과는 사뭇 다른 그 눈빛이었다. 상수아빠는 제게 날아드는 기덕네와 고창댁이며 우체부 청년에 경찰모를 푹 눌러쓴 남자의 못마땅한 시선들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 여간 따가운 것이 아니었다.

 

ㅡ 왜들 그렇게 보십니까, 저두 사람이긴 사람이라구유. 뭐, 그렇죠. 짱깨 고놈, 솔직히 맘에 안 들던 참인데 마침 잘 되었네유.

 

이젠 저 슬아 엄만 조금 괴롭겠구먼. 어쩌면 조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어, 생각하며 질끈 감았던 고창댁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기덕네의 입도 떡 벌어졌다.

 

ㅡ 참말이여? 아니, 어쩐 일이래? 옛날이라면 재깍 짱깨 불러내서 명줄 끊어 놓구두 남았을 텐디…….

ㅡ 요즘은 짱깨 그 자식이 좀 컸다구 지 말을 안 듣더라구유. 툭하면 반항하구 지 자리까지 넘보는 것 같기에, 또 무고한 희생은 없애야 할 것두 아니에요.

 

남이사. 중얼거림은 슬아엄마의 들뜬 목소리에 묻혔다.

 

ㅡ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ㅡ 짱깨 고 자식은 유난히 달리기도 빠르구, 해서 아마 마을 사람들이 다 덤벼도 힘들거에유. 나두 겨우겨우 이길 듯 말 듯 한디유. 유일하게 우리가 시도해 볼 만 한 방책은……,

 

슬아엄마의 귀에 제 입을 가까이 하더니 소곤거리길 한참이었다. 슬아엄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슬아엄마는 고창댁에게, 고창댁은 또 기덕네에게, 곧 기덕네는 우체국 청년에게, 우체국 청년은 57번지 새댁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57번지 새댁이 경찰모 순경에게 속닥댔다. 전구불이 들어오는 것 마냥 연이어 얼굴빛이 밝아졌다.

 

ㅡ 그렇게 하믄 되겄네, 역시 아는 사람이 있으니 다르구먼.

 

옳다구나, 손뼉을 짝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고창댁이었다. 슬아엄마도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 한 사람 표정이 어두운 것은 전 순경뿐이었다. 항상 낡아빠진 경찰모를 새것마냥 반들반들 닦아놓고선 자랑스럽다는 듯 제 머리에 얹고 다니는 유별난 사람이었다. 전씨 순경이자 전前 순경. 짱깨가 순경직을 파탄내 버렸기에 무직이었건만 제 유일한 자부심이라며 고개를 푹 숙이기 마련이었다. 순경이었던 그것과는 또 다르게 걱정이 넘쳐났다. 경찰이 모두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ㅡ 괜찮을까유?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짱깨에유, 이장이라구유.

 

그러나 이 걱정거리는 괜한 것으로 치부되어 이내 인식 속에서 까맣게 잊힌 지 오래였다.

 

ㅡ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혀. 좋네, 좋아.

 

흥분으로 한껏 고양된 고창댁의 한 마디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이 마을에서의 억압된 폭정에서 해방될 날이 머지않았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리라.

 

비인리 사람들 중 잠을 제대로 이룬 사람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면 상수아빠뿐일 것이었다. 어스름 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결연한 분위기를 사사로이 망쳐두는 것은 단연 상수아빠였다. 새벽 다섯 시 반까지 집결하라는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오 분이 지난 지금에서야 슬리퍼를 찍찍 끌면서 하품과 함께 눈을 비비고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창댁이, 지금이 상수아빠한텐 다섯 시 반인갑지? 라 눈총을 주자 상수아빠는, 내가 아이디어 낸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쥬, 도리어 능글맞게 웃어넘겨 버리는 것이었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이 얄궂었다.

 

ㅡ 휘유, 여섯 시 거짐 다 되었네유. 시작하쥬?

 

상수아빠의 목소리를 신호탄으로 비인리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고창댁과 슬아엄마를 비롯한 여자들은 길목길목에 숨어들었다. 하나는 헌옷수거함 뒤에, 몇은 모퉁이에, 그리고 몇은 쓰레기통 뒤에. 손에는 제각기 작은 주머니 하나씩을 달랑거리는 채였다. 상수아빠는 으슥한 골목길에 몸을 숨겼고, 기덕네는 저어 멀리 파수꾼이 망루에 서 있는 것처럼 놋쇠 징을 덜렁거리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전 순경은 사냥용 엽총을 손에 꽉 쥐었다.

 

비인리 전체는 적막에 휩싸였다.

혹시 위험할까 한 집에 저들끼리 있으라 했던 아이들 셋조차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리라.

 

적막을 깬 것은 아무도 없는 썰렁한 길가에 두 다리를 박을 기세로 딱 버티고 선 우체부 청년의 기차 화통 목소리 이전에 금속성의 징소리였다. 지잉. 기덕네였다.

 

공기를 타고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왔다. 아마 온 마을에 퍼졌을 것이다. 네 발을 총총대며 귀를 쭈뼛 세우고 코를 킁킁대는 셰퍼드. 짱깨다. 짱깨가 나타났다.

 

ㅡ 짱깨 이 빌어먹을 개자식아! 니는 사람보다 못하면서 뭘 그리 잘났다고 뽐내고 다니냐, 여름 되면 확 개장수한테 잡혀가서 보신탕이나 되어 버려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적막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우스운 말이었지만 아무도 웃질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넓은 길에 부옌 흙먼지를 주렁주렁 달고선 검은 점 하나가 나타났다. 적어도 일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었을 터였는데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바람 따위는 무시하고 내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짱깨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우체부 청년에게 박혔다. 그 살기등등한 눈빛을 마주본 것은 아마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일순간 쫘악 돋았고,

꽉 쥔 손에는 땀이 축축이 차기 시작했고,

허옇게 질려버린 손은 이내 지진 나듯 덜덜 떨려왔다.

 

넌 죽었어.

 

광기가 칭칭 감긴 검은 온몸이 이리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짱깨의 검은 털에 대조되어 이글거리는 노오란 눈동자는 증오에 가득 휩싸여 있었고 제 욕을 제대로 알아들은 귀는 빳빳이 경직되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한낱 개 따위가 아니리라. 셰퍼드도 아니리라. 악마를 본 사람들만이 단언할 수 있으리라.

 

지금 이성을 잃고 겁에 질린 시골 청년에게 돌진하는 거 검은 물체야말로 진정한 악마라는 것을.

그것은 이미 악독한 개는 물론이요 악마를 넘어, 사탄이었다.

 

오백 미터, 사백 미터, 이백 미터.

 

지치지도 않는지 달리면 달릴수록 날래지는 검은 셰퍼드를 마주하고 침착하게 한 손을 들어 올린 것은 고창댁이었다. 굉장히 차분했다. 심장이 터질 듯 공포에 사로잡혀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머리는 얼음이 가득한 바구니를 연달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손이 올라가자마자 여자들 네댓 명의 손에 들린 주머니의 벌린 입에서 구슬들이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지금 온 관심을 청년에게 쏟아 붓고 있는 저 개는 이따위 작은 변화를 눈치채내지 못할 것이었다. 설사 눈치 챘다 하더라도 그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리라. 작은 구슬 몇 십 개가 짱깨를 노려보듯 흙바닥을 굴렀다.

 

콰당탕 쿵탕.

 

고창댁의 설거지 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고 어마어마한 검은 덩치가 나뒹굴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 저 스스로마저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자는 것이 상수아빠의 의견이었다. 역반동. 상수아빠가 꾀어낸 묘책이었다.

 

ㅡ 어이, 전 순경!

 

이젠 곧 전 순경이 들고 있는 엽총이 불을 뿜을 것이다. 총구의 주둥이는 검고 건장한 셰퍼드를 향하리라. 그의 머리통을 향해 놓고 곧 날려버리리라. 당황한 폭군의 끔찍했던 노란 눈길도 이젠 더는 볼 수 없으리라.

 

검은 셰퍼드가 일어나려 바르작댔다. 동글동글하고 미끌미끌거리는 구슬 몇 개를 자꾸만 헛밟고는 허우적댔다.

 

마지막 발악이다. 그래, 마음껏 발버둥 쳐 보아라. 너의 목숨은 곧 거두어질 것이다. 네가 했던 것 마냥 너 또한 새빨간 선혈로 뒤덮여 처참히 생을 마감할 것이다. 네게 죽어나갔던 몇 십 원혼들이 널 곧 마중 나올 것이다. 재회를 마음껏 즐겨보아라.

 

자, 그러니 어서 총을 쏘아라. 누군가의 억눌린 부르짖음이 애달프게 허공에 울렸다. 쥐 죽은 듯 조용했으나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ㅡ 자아, 어서! 방아쇠를 당기라구! 어이!

 

폭약은 터지지 않았다. 엽총 소리는 들리질 않았다. 일제히 제게 시선이 몰린 전 순경은 어찌할지 모르며 벌벌 떨고만 있었다. 엽총 자체가 불발일 리는 없었다. 어제만 해도 기덕네가 그것을 멀쩡히 들고선 꿩 두 마리를 잡아왔더랬다. 손에 쥔 엽총이 덜그럭덜그럭 울어댔다. 그저 셰퍼드의 그 기에 눌려 아무런 움직임조차 내지 못하는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 버린 것이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도 못하는 채로 그저 제 몸의 진동이 이끄는 대로 덜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낭패다.

 

모든 비인리 사람들의 머릿속에 불현듯 든 생각이리라. 셰퍼드는 어느새 일어났는지 시골 청년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씩씩대는 콧김 소리가 얼어붙은 공기 사이로 침투했다. 뜨거운 숨소리는 공기 사이에서 거칠게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제게 뜸 들이는 것 따위는 없었다. 곧바로 아우우, 포효를 한 번 하고는 야수의 본모습 그대로 우체부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청년 또한 순경과 같이 얼어붙었는지 꼼짝도 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짱깨는 전 순경이 숨어들어 덜덜거리고 있는 골목길엔 눈길도 주지 않고서는 사람 다리 두께의 건실한 네 다리로 흙바닥을 차내며 눈이 희뜩해져 날다시피 했다.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몇 초만 있으면 저 날카롭게 빛나는 명검 부럽지 않은 송곳니가 제 목덜미를 기어코 파고들 것이었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낼 것이었다.

 

죽겠구나.

 

다른 게 아니라 짱깨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흰자위만 온통 보이는 눈깔을 희번덕대며 침이 휘날리든 말든 개의치 않으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발걸음 한 번에 명줄 한 뼘이 줄어들었다.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목숨에 청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 초, 이 초, 삼 초. 몇 십 미터 밖에서 코앞까지 다가오는 데 고작 삼초였다. 고창댁의 표정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새댁과 슬아 엄마는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제 무릎 사이에 처박았다. 급히 총을 다시 쥐었으나 전 순경, 이미 늦었어.

 

짱깨가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선혈이 공허한 하늘에 흩뿌려졌다.

허공에 새빨갛고 끈끈한 기분 나쁜 액체가 흐드러졌다.

 

ㅡ 으아악!

 

여자들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끔찍한 참상에서 솟아나오는 소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저들마나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은 채로 목청만 돋우던 것이었다. 높은 절규만 내뱉었던 것이었다. 마지막 남았던 기 센 여자 고창댁마저 눈을 돌렸다. 속내는 더 참담했다. 이젠 우리 모두, 죽었다. 짱깨의 피에 절은 송곳니가 차례차례 저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곰마냥 웅크리고 있어도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크르릉 소리는 귓전에 다가오질 않는 것이었다.

 

한참 만에 고창댁이 샛눈을 살며시 뜨고 보니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부들대고 있는 짱깨였다. 것도 네 다리로 꼿꼿이 서서가 아닌 흙바닥에 철퍽 나동그라진 채였다. 눈을 들어 보면 상수 아빠가 제 옆에 버려진 쇠파이프를 바투 쥐며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있었다. 회색 쇠파이프는 끈끈한 붉은 페인트가 채 마르지 않은 것 마냥 화염 같은 액체를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었다.

 

상수아빠의 무신경한 눈이 짱깨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연민도 동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한때 한 배를 탔던 짱깨로서는 퍽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크게 놀라 상수아빠, 외치며 길목에서 속속 기어 나오는 여자들도 눈이 휘둥그레지긴 마찬가지였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다리가 풀려 흙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우체부 청년 또한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들갑을 떠는 동네 사람들을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제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인지 왕왕 물으려 달려들었지만 시도일 뿐이었다. 제 바람과는 다르게 겨우 까딱할 수야 있는 몸에 제가 더 당황해서는 온 힘을 다해 제 딴에는 힘껏 바둥거리는 것이었다. 힘만 빠질 터인 것을 모르는 것일까.

 

ㅡ 허이구, 뉘라고 명줄도 길구만.

 

그래 봤자 새된 움찔거림일 뿐이다. 둥글게 모여선 얼굴들이 노오란 눈동자에 비치었다. 장정 서넛에게 두려움은 찾아 볼 수조차 없었고 여자들 몇몇만 쭈뼛대었지만 그것도 곧 온데간데없는지 여태껏 가까이 오지 않았던 그녀들마저 깔보듯 저를 조롱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덜덜대던 전 순경까지도 절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희대의 수모요, 수치였다.

 

ㅡ 그래도 시름은 덜었네요. 상수아빠, 고마워요.

 

검정 셰퍼드를 앞에 두고 잠시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는가 싶더니 슬아 엄마가 꺼낸 말에 다들 한 마디씩 한다.

 

ㅡ 이번엔 상수아빠 덕이 컸네, 어유 고마워, 아니었으면 저 청년만이겄어? 우리도 꼼짝없이 발매여 죽었을 거여.

 

우체국 청년은 그때까지도 얼떨떨해 조금씩 꺼져 가는 노란 눈동자의 빛을 멍하니 내려다보고만 있다.

 

ㅡ 전 순경도 많이 놀랐겠어유, 뭐 총이라도 불발 난 거유?

 

헐레벌떡 놋쇠 징을 부여잡고 이제야 달려온 기덕네가 무릎에 두 손을 얹은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물어왔다.

 

ㅡ 아뉴, 지가 무서워서 못 한 거여유.

 

전 순경은 이젠 무서울 게 없다는 표정에서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대며 헛웃음을 뱉어냈다. 제게 돌아오는 눈총이 따갑다. 상수아빠가 없었더라면 이 동네가 뒤집어지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전적으로 전 순경의 책임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ㅡ 어유, 너무 타박하지 말아요. 어쨌거나 다친 이 없으니 된 거지요. 전 순경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ㅡ 슬아 엄마 말이 맞어, 이젠 우리 죽을 일은 없응게 마음 푹 놓구 다녀도 될 거여.

 

그래도 전 순경을 감싸주는 것은 마음 여린 슬아 엄마였다. 오랜만에 고창댁이 맞장구를 쳤다. 저마다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랬기에 짱깨 그것에 측은한 눈길을 내비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한 쌍의 익숙한 눈에 묘한 조소가 담겨있었을 뿐이었다.

 

시뻘건 선혈로 온통 뒤덮여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워져 가는 불경한 사체를 치우려 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컹컹, 컹, 컹, 아르르, 커겅, 컹.

 

소름끼치는 개 짖는 소리가 온 마을을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밖으로 발걸음을 했다. 저마다 다른 이유였다. 그러나 저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또 다른 비극을 마주한 발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슬아 엄마의 낯빛이 백짓장보다 더 하얗게 변했다. 찢어지는 새된 비명 소리도 슬아 엄마를 막는 주민들의 손길에는 배겨 낼 수 없었다.

 

ㅡ 좀 놔 봐요! 짱깨고 뭐고 죽지 않았냐구요! 그런데 왜 저게 저기에……. 저기 있냐구요! 말 좀 해 줘요, 나 지금 헛것 보고 있는 거 맞죠?

 

바락바락 악을 써대며 제게로 달려드려는 슬아 엄마와 그를 저지하는 마을 사람들을 그것은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진땀을 흘리는 비인리 사람들과 악다구니를 쓰며 아연실색이 되어 오열하는 여인, 그리고 제 앞에 내동댕이쳐져 그대로 내버려진 검은 셰퍼드의 사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에 물고 있던 무언가를 으적, 거세게 깨물었다.

 

비통으로 가득 찬 슬아 엄마의 눈에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팔짱을 끼고 모든 상황을 무덤덤하게 지켜보던 상수아빠였다.

 

권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장 편에 붙어 모조리 다 밀고했으리라. 해서 저 개를, 짱깨와 매우 흡사한 저 개를 상수아빠 편에 붙었으리라. 지난날 짱깨를 내려다보던 상수아빠의 눈빛이 마을 사람들에게 향했다. 아마 슬아 엄마의 눈도 검은 셰퍼드가 채 감지 못했던 노오란 눈동자가 숨기지 못했던 감정들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을 터였다.

 

간밤 짱깨를 해치웠다는 승리감에 한껏 도취된다가 날이 마침 날이라고, 비번인 덕에 간만에 단잠을 잔 우체부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츄리닝을 대충 걸친 채로 휘적휘적 나오다 짱깨와 똑 닮은 개와 눈이 마주치고는 크게 놀란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것의 입에 물려 있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ㅡ 어이구 이장님, 언제 돌아오셨…….

 

하다 이내 선명해진 시야에 말문이 막혀 슬아엄마마냥 하얗게 질리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장이라 불린 사람, 아니 개가 드러내고 있는 이빨들에는 언제부터 살점을 씹어댔는지 뻘겋게 핏물이 들어 있었고, 갈기갈기 찢기고 물어뜯어놓아 이젠 목덜미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일전 목이었던 기다란 부분은 경동맥을 관통하며 작은 어린아이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숨길을 단번에 끊어 버린 송곳니가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 아침에 놀러 나간다고 했던 슬아였다.

 

그것의 노란 눈은 살기로 번뜩였다. 짱깨보다 훨씬 더 노랬다. 한없이 가라앉아 있는 눈빛은 누가 보더라도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었다. 장정보다 훨 큰 몸뚱아리로 짓이기고, 억센 발로 거듭 밟음은 물론이요 찢어 버린 여린 피부에서 흘러넘치는 새빨간 피는 이장의 네 다리를 온통 적시고도 남아 이장의 입이며 발에서 뚝뚝 늘어지는데 여간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잃은 여인은 그 자리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버거웠다. 아이를 빼앗아 간 남자는 제 의도대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착잡하게 달라붙는 마음을 조소로 바꾸어내며 털썩 주저앉는 초라한 여인에게 시선을 머물렀다. 비인리 사람들 역시 두려움이 깃든 측은한 눈빛을 각자 보냈다. 그 중에서도 애 딸린 57번지 새댁이 가장 떨고 있었다.

 

물고 있던 어린아이의 사체인지 그냥 고깃덩이인지 모를 핏덩이를 퉤, 뱉어내고는 짓이기며 섬뜩한 눈총을 보내는 채로 이장이 자리를 뜨는 것을 신호탄으로 비인非人리 사람들은 제각각 뿔뿔이 흩어졌다. 온통 피로 축축이 젖어버린 자리에는 정신이 반쯤 나가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선 어기적어기적 시체를 서럽게 끌어안는 어머니만 남았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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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 2018-11-30
플루토 카니발

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라.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라,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라,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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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2015-03-25 16:14:4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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