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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토끼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5-08-06
  • 조회수 514

내가 ‘그것’을 처음 본 건 일주일 전이었다.

 

그건 날 따라다니지 않는다. 귀찮게 굴지도 않는다. 밥을 달라고 칭얼거리지도 않고, 놀아달라고 보채지도 않는다. 반 애들처럼 날 무시하지도 않았고 때리거나 비웃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아예 눈앞에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었다. 나도 그걸 알았다. 눈치가 아무리 없대도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을 세 차례만 목격하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챌 것이었다. 사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내 꿈을 가방처럼 열어서 내용물을 일일이 보여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시작은 몇 주 전 내 친구가 흘려 한 말이었다. 햇볕은 따가울 만큼 뜨거웠고 그 와중에도 체육선생은 야외수업을 고수했다. 몇몇 아이들은 이미 그늘에 자리를 잡고는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선생을 가만히 기다리다 머리카락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서야 황급히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반 애들이 우리를 힐끔 보더니 자기들끼리 와르르 웃었다. 우리는 그걸 애써 무시한 채로 바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루시드 드림이라고 알아?”

“루시드 드림?”

 

내가 되물었다.

 

“자각몽 말야.”

“아아, 들어는 봤는데 자세히는 몰라.”

 

그 애는 오컬트 쪽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애가 내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자기가 꾸는 꿈을 인지하는 거야. 거기선 네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어. 그러니까, 뭐든 만들어내고 없앨 수 있다는 말이야.”

 

그 애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힐끗 주위를 돌아보았다. 쟤네들 또 저런 얘기 해? 어우, 질리지도 않나. 반 애들의 눈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애들이 내비친 표정은 경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신이야. 야, 생각해 봐봐. 네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거기선 다 해낼 수 있다는 거야. 상상만 해도 좋지 않아?”

“야, 아서라. 그거 위험하지 않댔어?”

 

나는 다시 눈만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한 무리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애한테 그만 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 애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않았던 건지, 못 했던 건지.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곤 애꿎은 돌멩이만 차 댔다.

 

“아냐, 그거 안 위험해. 하나도 안 위험하댔어. 그리고 그거 알아? 난 그거 성공했어! 진짜 되더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외계인도 상상하면 네 앞에 그게 딱 떨어져. 그러면……,”

 

호루라기 소리가 그 애의 말을 흩트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호루라기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표하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지루하기도 했었고,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 애는 자기 말이 끊겨서 기분이 상당히 나쁜 눈치였다. 표정에 다 쓰여 있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그 애의 손을 잡아끌었다.

 

“야, 체육 왔다.”

“그러니까……,”

 

그 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다음 이야기는 체육 수행평가에 관한 거였다. 배구공을 지급하고는 선생은 그대로 교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할 사람만 하고 말 사람은 말아라 식이었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아 놓고선. 아마 땡볕에 서서 한 시간동안 있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거다. 숨을 깊게 토해낸 후 그 애에게 공을 던지는 순간 내 팔뚝으로 공 하나가 날아왔다.

 

“아, 미안.”

 

그 애들은 날 보고는 저들끼리 모여 깔깔댔다.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미안하단 건 미안하단 게 아니었고 차라리 다음 공의 예고편이었다. 어느새 반 애들은 나와 내 짝에게 공을 던져대고 있었다. 미안, 실수였어. 여러 개였던 공은 여기저기로 튕겨나갔다. 마침내 하나의 공만 남았고 아이들은 그걸 주고받았다. 나는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발등에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제 내려온 건지 선생이 새우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이게 뭐 하는 거니?”

“왕따 놀이요!”

 

얼핏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었다. 하나의 공과 만들어진 원, 그리고 원 안의 두 명의 사람. 누가 봐도 폭력의 현장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선생을 쳐다보려다가 공에 다시 어깨를 맞고 고개를 떨궜다. 아이들은 그걸 즐기고 있었다.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낄낄대는 광경은 치가 떨렸다. 그래봤자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놀이에 즐거워하는 십대 여학생들일 뿐이었다. 체육은 우릴 한참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다간 다시 교무실로 올라갔다.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대더니 삼삼오오 모여 반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여자애 하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속칭 노는 무리의 대장격이었다. 내가 고개를 들지 않자 그 애가 어깨를 세게 부딪치더니 웃음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오늘 왕따 놀이 재밌었어. 다음에 또 하자?”

 

그 애들도 까르르 웃으며 이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장에는 나와 그 애 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애도 말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시렸다. 배구공에 맞은 살갗보다 눈이 더 아파왔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살짝 내리자 창문 열린 교실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웠다. 목울대가 뻣뻣해졌다. 충동적으로 그 애들에게 똑같이 앙갚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딱딱해진 목소리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었다.

 

“야, 루시드 드림인지 뭔지. 그거 어떻게 꾼다고?”

“어…….”

 

그 애의 낯빛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앤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아,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좀 길고 이야기해준다고 해서 네가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집에 가서 인터넷에서 검색해 봐. 루시드 드림 꾸는 법이라고 치면 바로 나올 거야.”

 

그 애가 빠르게 이야기했다. 나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같이 학교로 들어갔다. 어쨌거나 수업은 들어야 했다. 수업과 종례 내내 내 머릿속에는 루시드 드림이라는 다섯 글자만 맴돌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글자들은 몸집을 불려 가뜩이나 좁은 머릿속을 꽉 채워버렸다. 반장의 역겨운 목소리가 잦아듬과 동시에 나는 인사를 하고 총알처럼 반에서 튀어나왔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검색창에 루시드 드림을 올렸다. 마음 한 귀퉁이에 자리하던 불안함은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는지 가슴이 자꾸 쿵쿵거렸다. 그건 어쩌면 흥분해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나는 몇 개의 인터넷 창을 끝까지 읽고는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자각몽을 꾸는 데 실패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자각몽을 꾼 건 루시드 드림에 대해서 검색해 본 지 세 밤이 지나서였다. 네 번째 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꿈을 기억한다고 되뇌며 잠이 들었고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뒤로 젖히자 중지손가락이 손등에 닿았다. 기괴한 장면에 입을 딱 벌리기도 잠시였다. 그건 자각몽이었고 나는 드디어 성공했다는 희열감에 달아올랐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반 애들을 떠올렸다. 신기하게도 하나하나의 얼굴이 모두 머리에 박혀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그 쪽으로 모았다. 눈앞에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아이들 하나하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른여섯 명의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비참했다. 이건 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서웠다. 가상의 아이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겁쟁이.”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나라면 그렇게 안 하겠어.”

 

같은 목소리가 빈 공간을 쟁쟁히 울렸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살폈다. 인기척은 없었다. 여기는 내 세상이었다.

 

“그래, 여긴 네 세상이야.”

 

말과 동시에 나는 맨 앞에 있는 단발머리 여학생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아이는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그걸 시발점으로 나는 그 서른여섯 명 모두를 지칠 때까지 때렸다. 요령이 없어 무작정 때리기만 했다. 이따금씩 발길질을 하기도도 했다. 그간 맞기만 했던 나는 방어만 할 줄 알았지 공격을 할 줄은 몰랐다.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다가 손발이 얼얼해져 감각이 없어질 때즈음 나는 발길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떴다. 시야에는 초록색 벽지가 발라진 천장이 보였고 거긴 내 방이었다.

 

나는 밤마다 자각몽을 꿨다. 며칠 하고 나니 굳이 꿈속에 있다는 걸 인지하지 않고도 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방법도 자연스레 터득했다. 나는 그 때마다 그 애들한테 내가 받은 걸 고스란히 돌려줬다. 욕설을 하기도 했고 물건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후련했다. 꼴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돌덩이 하나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떼어내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건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난 꿈의 주인이 되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 밤에 잠을 푹 자지 못하니 학교에서는 졸기 일쑤였다.

 

학교에서 눈을 떠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뿐이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까지 꺼져 있었다. 더럭 겁이 나서 급히 일어서자 종이 쳤고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수수 몰려왔다.

 

“어디 갔다 왔어?”

 

목소리가 쥐어짜졌다. 나는 속으로 젠장을 천 번쯤은 외쳤다. 손목에 노란 팔찌를 찬 애는 날 힐끗 보더니 얼굴을 잠깐 찌푸렸다. 그러나 그건 정말 한순간이었고, 그 애는 생글거리며 가혹한 말을 내뱉었다.

 

“이동수업이었잖아, 몰랐어?”

 

내 얼굴은 틀림없이 새파래졌을 거다. 그 애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으니까.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으며 재차 물었다.

 

“이동수업?”

“으응. 너 무단결과처리래.”

 

그 애는 확인사살까지 완벽히 하고는 도도하게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건 고의였다. 나는 사립고등학교를 준비하고 있고 웬만한 아이들은 모두 내가 그 고등학교를 지망하고 있다는 걸 안다. 선생님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 전체에 불러 준 고교 지망이 낳은 폐해였다. 무단 결과면 생기부에 기재되게 되고 1차 서류에서 깎일뿐더러 어찌해서 운 좋게 붙었다 해도 면접에서 변수가 되기 마련이다. 그걸 노렸던 게 틀림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역겨운 물이 넘어왔고 나는 헛구역질을 해 댔다.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집에 와서는 한바탕 토악질을 했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자각몽이었다. 그리고 충동이었다. 그 둘이 합쳐져 어느새 나는 칼을 들고 있었다. 아마 꿈이었기에 그렇게 행동이 가능했을 거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이었다. 나는 칼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술을 깨물고 칼을 내리 찌르려는 순간 내 앞에는 평생 보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그건’ 나타남과 동시에 날 저지했고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그건’ 그 날만 나타났던 게 아니었다. 내가 칼을 쥐고 있지 않았던 날에도 와서 내게 이것저것 말을 걸고 가곤 했다. 나는 항상 입을 다물었다.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자각몽에 자신의 힘으로 조종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사실이었다. 매일 밤 잠이 들면 자각몽이었든, 아니었든 그것이 모습을 내보였다.

 

그리고 오늘, ‘그것’이 또 나타났다.

 

그건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두 발로 서 있었다. 차려입은 하얀색 양복은 절대 구겨지지 않는다는 듯이 구김 하나 없었고 목 언저리에는 빨간 땡땡이 무늬의 나비넥타이가 멋들어지게 걸쳐져 있었다. 긴 귀는 단정히 뒤로 넘겨져 있었다. 그건 토끼였다.

 

토끼는 여느 때처럼 빨간 눈으로 날 빤히 응시했다. 나는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어이,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누가 몰라서 그럴까.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닌 거 알아.”

 

궁시렁대지도 않았는데 마음을 단박에 알아맞힌 건 이젠 신기할 일도 아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입을 봉했다.

 

“말을 좀 해 봐, 좀.”

“누구에요?”

 

날카로운 내 목소리가 토끼의 목소리를 잘랐다.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었다. 무슨 바람이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이제 이 토끼가 내 꿈에 나오는 것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계속 말하지 않고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사라지겠지 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결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토끼가 앞발로 머리를 긁적였다. 삼 초 정도 고민하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댔다.

 

“너.”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픽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꽤 귀여운 상이었으나 그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이 토끼가 더위를 먹었나.”

 

내가 비아냥거리자 토끼는 뒷발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나보다 더 미간을 찌푸렸다. 텅 하는 소리는 내가 마치 컨테이너 박스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마저 들게 했다. 토끼가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당근을 오독오독 씹어 먹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발음은 정확했다.

 

“더위도 안 먹었고, 내가 너인 것도 맞아. 뭐 넘겨듣고, 너도 나한테 하나 물어 봤으니까 나도 너한테 하나 물어 보자. 반 애들이 그렇게 싫었어?”

“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즉답을 넘기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질문이 다시 들어왔다.

 

“왜?”

 

나 못지않게 짧은 질문이었다.

 

“왜긴요. 그쪽은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잖아요?”

“때로는 모르는 것도 있는 법이야. 나라고 모든 걸 다 알겠어?”

 

토끼가 다시 제 머리를 앞발로 긁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높이가 맞았다. 그제야 나는 토끼가 내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지그시 토끼를 바라보자 토끼도 저만한 나무 하나를 만들어 거기에 기댔다. 토끼의 눈은 내 눈과 같은 짙은 갈색이었다.

 

“내가 굳이 알려 줘야 할 이유가 있나요?”

 

말이 사나웠다. 뱉어내는 말은 족족 사나웠다. 그건 날카로운 칼이었고 그게 무엇이었든 상대의 마음에 흠집을 낼 게 빤했다. 토끼는 헛웃음을 두 개의 앞니 사이로 새어냈다.

 

“이거, 꽤나 톡 쏘는 아가씨네. 아가씨, 나랑 말 하기 싫지?”

“보면 모르겠어요? 알면서 그런 소리 하는 거 질색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가지 않을 거야. 네가 꿈에 들어올 때마다 날 보게 될 거거든. 뭐, 그러니 이야기는 차차 나누도록 하고.”

 

뭐 이런 토끼가 다 있어?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잘 참아 오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말문이 막혔다. 토끼는 한 손가락을 들며 말을 이었다.

 

“아마 넌 날 건드리지 못할걸. 네가 다스릴 수 있는 것 중 유일한 반역자가 있다면 그건 나야.”

 

토끼가 알 수 없는 이야기,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내 눈에는 집의 천장이 들어왔다. 손은 이불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차마 소리를 내지르진 못하고 애꿎은 베게에 주먹질을 했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알아서 뭣해요.”

 

이 두 마디가 한동안 나와 토끼 사이에서 오고 간 대화의 전부였다. 나는 토끼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토끼는 구태여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귀찮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쯤 되면 첫날 날 그렇게 황당하게 만든 건 무엇이었는지, 혹시 내 망상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토끼는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했다. 때로는 티타임을 가졌다. 유럽식 홍차와 오밀조밀한 비스킷을 놓고 느긋하게 차를 즐겼다. 글을 쓸 때도 있었고, 책을 읽을 때도 있었다. 토끼는 몸치장을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옷을 입으면서 패션쇼를 벌였고 그 때마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내가 가장 놀랐었던 때는 주머니에서 엠피쓰리를 꺼내 이어폰을 그 큰 귀에 꽂을 때였다. 내가 한쪽 눈을 올리고 토끼를 쳐다보자 토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어폰 사이로는 한동안 듣지 못했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교시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 무섭게 수학이 나갔다. 다른 애들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자유를 만끽하려고 했을 때 담임이 앞문을 열었다. 아이들의 모든 행동이 멈췄다. 마치 동영상을 보다가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아이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담임은 교단 위로 올라서서 출석부로 교탁을 내리쳤다. 교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담임은 출석부에 백지 한 뭉텅이를 끼워두고 있었다. 담임 자신도 멋쩍었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을 시작했다.

 

“아아, 요즘 학교폭력 때문에 말이 많지? 뉴스에도 뜨고. 예방 차원에서,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백지 설문조사를 하기로 했다.”

“에이, 선생님 저희 학교폭력 조사 인터넷으로 했잖아요.”

“그건 익명 처리가 안 돼. 그래서 학교폭력을 목격했는데 안 쓰는 애들도 많고.”

 

아이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교실의 공기가 소란스러워지자 담임은 다시 출석부를 휘둘렀다.

 

“학교에서 하는 거니까 솔직하게 쓰고, 익명이니까. 응?”

 

담임은 나갔다. 나는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쓸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내 팔에 단발머리 아이의 팔이 스쳤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단발머리 아이는 뒤로 돌아 포니테일로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애랑 저들끼리 소곤대고 있었다. 신경 끄자. 나는 다시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차피 쓴다고 한다 하더라도 다른 애들의 옹호가 없으면 쓸모없었다. 한마디로 소용없는 짓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연필을 책상에 떨어뜨리곤 숨을 한껏 들이켰다. 배가 빵빵해졌다.

 

“야, 다 썼어?”

 

웃음기 가득한 반장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다 썼으면 걷는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맨 뒤 애들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자박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백지를 옆으로 밀어놓은 채로 누런 책상만 멍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걷는 아이가 날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라면 그러라지. 나는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일이 터진 건 오 교시였다. 오 교시는 담임 시간이었고 담임은 들어오지 않았다. 반장이 담임을 찾으러 갔다가 도리어 불린 건 나였다. 여교사 휴게실로 오라는 전언을 남기고 반장은 자리에 앉았다. 나를 쳐다보며 낄낄대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이름이 간간히 들려왔다. 이다래, 이다래 말야. 아 진짜? 이다래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문을 최대한 조용히 열고 조심스레 닫고는 반에서 튕겨나왔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넘을 때즈음에야 막혔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것 같았다.

 

가슴은 다시 막혔다. 담임은 날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종이들도 날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레이저 빔이 나올 기세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잖냐.”

 

담임이 추궁하듯이 낮게 으르렁댔다. 그는 교사의 면모를 끌어안고 있으려고 노력했으나 세상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의 가면은 이미 깨지기 시작했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제일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내 가면도 깨지려 하고 있었으나 나는 필사적으로 그걸 붙잡았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거였고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것이었다. 이것조차 하지 못하면 나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 십육 년을 살아오면서 제일 잘 배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를 숨기는 법이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삼켜버리고 싸늘한 표정으로 담임을 바라봤다.

 

“반 애들 다 널 썼어. 알아? 대여섯 빼고 전부. 삼분의 이야, 임마. 응? 얘기를 해야 뭘 해 주기라도 하지. 변명이라도 해 봐.”

 

담임이 내 앞으로 종이들을 디밀었다. 다래요. 이다래. 이다래가 막 애들한테 욕하고, 돈도 뺏어요. 삥뜯는다고 해야 하나? 이다래요. 담배도 피워요. 이다래가 제 교복 빌려가서 안 줘서 다시 샀어요. 이다래요. 이다래. 이다래. 이다래. 이다래. 이다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컥하고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잠깐, 아주 잠깐 담임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담임은 믿을 게 못 됐다. 애초에 이 사단을 벌인 것도 담임이었다. 학교 측에서 시켰다고 했대도 하지 않는 반도 많았다. 바로 옆반 애는 안 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야, 니가 공부만 잘 하면 다야? 전교권이면 다냐고. 공부 잘 한다고 애들 돈 뺏고. 어? 담배에다가 폭력까지? 야, 생 날라리였구만 이거?”

 

나를 지칭하는 말이 ‘이거’로 바뀌었다.

 

“안 했다니까요. 제가 왜 그런 걸 해요.”

 

내 목소리는 돌덩이에 억눌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문이 터지기 일보직전의 수벽이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뭐라고? 여기 증거가……”

“그게 다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담임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때마침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쳤고 담임과 나는 오래도록 마주보고 있었다. 담임이 마침내 지친 목소리로 마지막 숨을 토해냈다.

 

“가서 수업 준비해라.”

 

교실에 들어가자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 초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대다수의 아이들이 날 힐끔거리고 있었고 킥킥대고 있는 무리도 많았다. 이다래. 이다래. 나는 내 자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다래 아마 그걸걸?”

“아, 우리 아까 했던 그거?”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와 그 뒷자리에 자리하는 포니테일의 말소리가 귀에 선명히 꽂혔다. 나는 입술을 보이지 않게 깨물었다. 그 애들은 내가 자리로 돌아오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책상에 얼굴을 다시 한 번 박았다. 그리고 종례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혼란스러울 대로 혼란스러웠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평소와 같은 말을 느긋이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토끼가 우물댔다. 나는 홀린 듯이 토끼의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토끼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러면서도 토끼는 그 편안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오늘…….”

 

말해야 할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앞만 보는 담임부터 떼거지로 못살게 구는 아이들까지 모든 게 엉켜버렸다. 내가 그 때 이야기를 했으면 달라졌을까? 사실 학교폭력 가해자는 그 애들이고, 피해자는 나라고 울면서 얘기했으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혼자서 안 앓고 있어도 되잖아.”

 

토끼가 무심코 던진 말에 나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두 팔은 테이블 위에 늘어뜨린 채였다. 토끼는 갈색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학교폭력 가해자로 몰렸어요.”

 

토끼는 그제야 찻잔을 놓았다. 그러고는 더 말해 보라는 듯이 테이블로 몸을 기울였다. 몸을 기울이자 귀도 같이 기울여졌다.

 

“사실 내가 다 당하는데. 매일 무시당하고 뒷담까이는 건 난데. 조 없어서 남는 조 들어가면 또 걔네들끼리만 하는데.”

 

나는 바싹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적셨다.

 

“나랑 내 친구랑 같이 이야기하는 거 보고 이상한 애들이라면서 비아냥거리고. 자기들은 연예인 안 좋아하나? 그거랑 똑같은 건데. 배구 연습하랬더니 계속 맞추고 선생님 오니까 그럴싸하게 포장해요. 그 애들은 진짜 교묘해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여튼 그랬는데 오늘 백지테스튼지 뭔지를 했어요. 학교에서 시켰대요. 그 애들이 뭔가 막 수군대는 것 같더니 짜고 제 이름을 거기에 쓴 거예요.”

“결과적으론 네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몰렸고?”

 

토끼가 되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는 말씀드렸니?”

“아뇨, 말해봤자 뭐해요. 말해봤자 그건 네 망상이잖아, 라고 할 게 뻔하신데. 생각해 봐요, 이 작은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자기가 못 볼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거기에다가 그 애들이 하는 짓을 봐요. 티가 안 나잖아요. 말해봤자 아무 소용……”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토끼가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나는 기분 나쁜 티를 냈다. 토끼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도 꽤나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참 다람쥐 쳇바퀴 타는 것처럼 인생을 사는구나.”

 

의외의 말이었다. 나는 토끼를 빤히 바라봤다. 토끼는 나비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내 눈과 토끼의 눈이 마주쳤다.

 

“봐. 그 애들이 널 힘들게 해. 넌 그걸 꾹꾹 참고만 있어.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나? 그것도 아냐. 그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그것도 아니지. 그럼 넌 그걸 속으로 삭혀. 그리고 있는 동안 그 애들은 널 또 만만하게 봐. 그럼 또 괴롭히지, 넌 또 그걸 참지, 애들은 널 점점 만만하게 보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반박거리가 없었다. 내가 잠자코 있는 사이 토끼는 내 눈을 깊게 들여다봤다.

 

“벗어나고 싶지.”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증오하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토끼는 그런 날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깊게 내뱉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너, 날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너는 칼을 들고 있었고 반 애들 전체를 죽이려고 했었어. 그거 기억 나? 그렇게 그 애들을 싫어했잖아.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이제는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애들한테 뭐라 말하고 싶어?”

“……”

 

나는 억지로 숨을 틔워냈다.

 

“너희도 한 번 겪어 보라고.”

 

말 한 자를 할 때마다 가슴의 살을 베어내는 듯이 아파왔다. 목소리는 눈물이었다.

 

“너희도 내 처지가 되어 보라고. 니들도 나처럼 애들한테 둘러싸여서 배구공으로 맞아 보라고. 니들도 밥을 먹는데 수군거려서 체해보고, 꼭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었는데 방해 때문에 못 하게 되어 보라고.”

 

나는 이제 거의 절규하고 있었다.

 

“니들이 억울하게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어 보라고. 억울한 일 마음껏 당해 보라고. 그렇게 사람 이상한 애 만드는 게 좋으면 니들도 좀 그렇게 되어 보라고. 이동수업 할 때도 투명인간으로 살아 보고 니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상한 애, 괴짜, 공부만 잘하는데 사교성은 쓰레기인 애, 미친 애, 또라이, 병신, 개새끼취급당해 보라고. 그게 얼마나 엿 같은 일인지 알아보라고.”

 

감정이 격해졌다. 토끼는 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 비명을 토해 내고는 더 이상 말할 힘도 없었다. 그렇지만 더 말하고 싶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내 흐느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발 그만 하라고.”

“많이 힘들었지.”

 

토끼의 목소리가 날 감싸안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토끼의 따뜻한 몸이 내 몸에 닿았다. 체온이 느껴졌다. 폭신했다. 토끼의 품에 안겨 나는 목 놓아 울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막혔던 가슴이 점점 트이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눈물로 흐릿해진 눈을 가리고서 나는 토끼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을 내린 건 눈물이 멎고 한참 뒤였다.

 

나는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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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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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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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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