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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 작성자 밤별물고기
  • 작성일 2015-11-07
  • 조회수 403

 

 

형법 제 252조. 사람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그를 살해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사람을 교사 또는 방조하여 자살하게 한 자도 전항의 형과 같다.

 

 

1.

 

나는 가끔씩 무너지고 싶지 않은 곳에서 무너져 내려.

 

네가 보고 싶어 너를 향한 연서를 쓴다. 몸 건강 잘 챙기고 있니. 나는 많이 아파. 아프단 얘기는 네가 읽지 못하리라는 걸 알기에 쓰는 거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어. 네가 날 신경 써 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네가 나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안해서.

 

네가 일종의 살인 청부업을 하고 있다는 건 한 번 들은 적이 있어. 그렇지만 너와 연락이 제대로 되는 애는 하나도 없었지. 있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널 아는 아이로부터 도움을 받지는 못했을 거야. 나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누구도 내 연락처를 갖고 있지 않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네가 하는 일이 뭔지 들은 이후부터 항상 널 만날 날을 기다려 왔어. 자살 기획이라니,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몰라. 규모는 모르지만 작은 사업 단체 정도는 되겠지. 혼자 하긴 벅찬 일이니까. 장기 매매 업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 같더라, 넌. 하지만 널 진짜로 만나게 된 건 인터넷의 자살 단체에 가입한 이후부터였어.

 

알려 주더라. 너 같은 애들이 있다고. 피해자의 승낙이 있어도 목숨과 관련된 건 불법이라서 연락처를 잘 뿌리진 않는다고 그랬어. 그래도 찾아보면 나온다고 하기에 열심히 찾았지. 역시나라고나 할까, 몇 시간 찾으니까 연락처 하나는 건질 수 있더라고. 그게 하필 네가 하는 곳인 줄은 그 땐 몰랐지.

 

절차에 대해선 네 비서인가로부터 충분히 들을 수 있었어. 선불 내고, 장기 매매에 동의하고, 암매장할 자리에 가서 기다리면 된다고 그랬지. 선택할 수 있는 게 꽤 많더라고. 알아서 자살한 뒤에 시체를 묻어 주기만 하는 서비스도 있고, 사용할 독약까지 제공받을 수도 있고. 관이라든지 뼈 담는 항아리 같은 것도 선택하게 해 주던 걸. 다 하기엔 비싸서 싼 걸로 골랐어. 부자도 아니거니와 남은 돈은 가족들한테 넘겨 줘야 해서.

 

우선 이메일로 준비를 시작했어. 몇몇 이메일은 몇 년 단위로 예약 메일 발송이 가능한 거 알아? 그런 식으로 사망 시각 위조를 시도했지.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니까 속이는 게 엄청 어렵진 않았어. 예약 메일 준비 시켜 놓고, 가족들한테는 돈을 왕창 보냈지. 나 잠깐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된다, 일종의 승진이다, 그래서 한국 돈 좀 보내 드리겠다, 하고.

 

부모님이 내게 쓴 돈이 어느 정도일까도 고려해서 보냈어.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분들이 갖고 있으셨을 돈만큼 보냈다고 하면 될까. 이럴 거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시진 않으셨어. 내가 돈 많이 모아 뒀는데 외국 나가게 되면 맡기겠다고 그랬거든. 쓰시라고. 집 한 채라도 장만하시라고. 내가 그건 한 번 늘 해 드리고 싶었다고.

 

거짓말은 아니니까.

 

몇 달 간 나 대신 거짓말 쳐 줄 사람도 하나 구했어. 여자로, 전화 목소리로 하면 비슷한 사람 구하는 건 어렵지 않더라. 돈 주고 대가로 내 전세금을 넘겼지. 돈이 그 사람 통장에 바로 들어가게. 그 사람 감시해 줄 사람도 사실 구하고 싶었는데, 그럴 돈은 없어서 찝찝하게 끝냈어.

 

직장은 전에 그만 뒀어. 역시 연락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괜찮을 거였고, 가족들이 직장에 연락할 일은 없을 거라고 봤어. 외국에 갔다는데 그 직장에 남아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너를 찾았어.

 

비소…말이야. 그거 시간차를 좀 두고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게 만드는 독이라 그러더라. 그걸 쓰기로 했어. 사실 본격적인 얘기를 하려고 너와 마주 앉았을 때 나는 이미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어. 방에 들어오면서 너를 본 순간 속으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알던 사람에게 내 시체를 묻어달라고 하는 건 모르는 사람에게 같은 걸 부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니까. 우리는 소소한 인사를 나눴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 살짝 아쉬웠지만 괜찮았어. 차라리 그게 나았으니까. 하지만 너는 결국 나를 기억했지. 기억하고는 나더러 왜 죽고 싶은 거냐고 물었어. 나는 네게 내 계획들을 얘기했어. 원래 얘기해야 하는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너희도 하는 일이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함부로 아무 사람 시체나 묻어 주진 않는다면서. 언제나 신고당할 수 있는 거니까. 장기 매매 계약은 원최 무효인 계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계약서 얘기를 했어. 죽고 나서 알아서 써도 된다고. 아예 해부학 실험실에 보내도 좋다고.

 

너는 잠시 말이 없더라.

 

"목걸이 예쁘네."

 

네가 말했어. 아는구나 싶더라. 살짝 떨리던 내 눈빛을 네가 눈치챘을까.

 

나는 가슴 위로 드리워진 목걸이를 들어 올렸어. 은 사슬에 두꺼운 옥가락지를 끼운 것처럼 생겼지만, 실은 쇠사슬에 유리인지 플라스틱인지를 엮은 것에 불과했지. 하지만 목걸이 자체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어. 전에 네가 그 비슷한 걸 보면서 그랬잖아. 그런 거 좋아한다고.

 

"이거 그냥 장난감 수준이야."

 

그리고 나는 그 직후에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약간 미소를 띤 얼굴로 나는 네게 말했어.

 

"내가 죽고 난 뒤엔 네가 가져도 돼."

 

사실, 나, 너를 꽤 좋아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내 첫사랑이 너였다는 사실도, 네가 내게 다가와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는 내게 언제나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너는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을까?

 

네 첫인상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아마 언제나처럼 다소 딱딱하고 다소 퉁퉁거리는 그런 애였겠지. 내게 그 정도보다 누군가가 딱히 특별하게 느껴질 일은 없었으니까. 그 땐 정말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어. 더 나아가 내게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 자체가 없다고 생각했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실제로도 그랬어.

 

너는 기묘한 느낌으로 밝은 애였어. 불나방이 불꽃에 이끌리듯 나는 네게로 이끌렸지. 네가 뭔가 해결책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내 착각이었겠지. 그냥 네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을 뿐인 것 같아. 그냥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거겠지. 다가와 주는 이유를 찾지를 못 하겠으니 아마 뭔가 특별한 애라서 그런 것일 거라고, 그렇게.

 

네가 시체 처리반 같은 일을 할 거라고 그 때는 상상도 못 했어.

 

나는 수많은 도전들을 했고 무수히 실패했어. 그냥 일어나는 법을 잊어버렸을 뿐이야. 포기한 거지. 충분히 망가졌으니 이제는 쉬어도 될 거라고 느꼈어. 그 어떤 인간 관계도 제대로 이어 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을 땐 솔직히 놀랐어.

 

"사람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바로 그 말. 그 말 말야. 무슨 의미로 그런 얘기를 했을까. 혹시 네가 내 선택으로 인해 뭔가 피해를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모르는 어떤 부분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사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냈다는 걸 이미 네 비서한테는 증명한 후였어. 그래서 더 이해가 되지 않았지. 네가 중얼거리듯이 던져 놓은 그 말.

 

가슴에 저릿한 느낌이 있어. 지금. 독이 심장까지 왔나 봐. 거의. 손이 곧 멈출 것 같아. 몸이 시려 와. 어질어질하고 자고 싶어. 나는 지금 산에 앉아 있어. 구석진 곳, 사람들이 적은 곳. 너는 조금 후에 와서 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게 도움을 주겠지? 이런 걸 부탁하게 된 걸 미안하게 생각해.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 자체가 어쨌거나 네게 조금이라도 트라우마가 될 것 같거든.

 

너는 나와 만난 날 네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에 대해 얘기했었지.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의 끝을 정리해 주는 거야."

 

스스로를 애써 설득해 보려고 하는 것 같았던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너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어. 나는 너를 사랑했고, 사랑하며, 영원히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지. 내 짝사랑, 나의 오래된 연인. 그리고 그 이유는, 내 끝이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해 둘게.

 

우리 둘 다 이게 범죄라는 건 알고 있었지, 그렇지? 그리고 그래서였을까? 너는 내게 하루 지나서 다시 만나자고 했어. 괜찮다면, 하고 네가 붙이던 말. 그 속에 있던 건 망설임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러겠다고 했어. 사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걱정이 되지 않았던 건 아니야. 어쩌면 그 다음 날 네가 경찰이나 기자를 데려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바보같지. 약속 장소는 커피숍이었고 너는 혼자 있었어.

 

예전부터 느꼈지만 너는 겉모습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 것 같더라. 그냥 나를 만나는 건데도 굳이 정장에, 머리도 정리하고, 최대한 잘생겨 보이려고 애를 쓴 것 같은 티가 났어. 눈빛은 어쩐지 피곤해 보였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 몰라 피곤해 보인다고 농담이라도 할까 하다 말았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 그럼 왜 죽고 싶은 거야?"

 

네 질문은 마치 우리가 하려는 일을 해외 여행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어. 너는 너 같은 사람을 찾아 올 만한 사람이라면 뭔가 있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사실은 빨리 끝내고 싶었어. 나는 지쳐 있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기억하는 데는 진절머리가 났거든. 그래도 마지막 절차라고 생각하고 노력해 보기로 했어.

 

네게 내 치부를 드러내는 일은, 설령 네가 그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픈 일이었지. 나는 처음부터 얘기했어. 혼자였잖아, 나. 괴롭힘 많이 받고. 애들이 둘러싸고 서서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에 관해 나를 비난할 때 나는 세상의 모든 죄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는 걸 배웠어. 누군가 넘어진 건 그 구역 청소 당번이 나여서 내 책임인 거고, 누군가의 연필이 부러진 건 내가 소리 나게 걸어서 그런 거고, 누가 물통을 엎은 것도 내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영향을 받았던 거라고.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걸 알면서도 증거가 없어 묵인해야 할 때, 다 들리게 욕을 하는 걸 들으면서 스스로를 깎아 내려갈 때, 물건이 사라지고 찢겨져 있는 걸 보면서 담담히 정리할 때, 조금씩 나는 나를 버렸는지도 몰라.

 

사실 집에서도 그렇게 잘 지내진 못했지. 자주 맞고 오고. 부모님은 나중에 이혼하셨지만 말야. 사실은 상업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어. 빨리 취직하고 싶어서.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일반계에 보낸 걸까? 너는 알려나, 불행은 불행을 끌어들여. 왕따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더 가난해지고 구제 받을 길은 보이지 않지.

 

너는 말이 많은 애가 아니었어. 내 얘기를 들어 줄 때도 너는 듣고만 있었지. 예전에도 내가 울고 싶어 멀리 가면 너는 따라오지 않았고 돌아오면 같이 집으로 갔어. 다른 남자애들이 나를 다 욕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 나잇대의 남자애들은 꽤 잔인한데 그 애들은 네게 나와 관련해 비난을 하지는 않았을까. 고마웠고 미안했어. 그게 그 때 내가 점차 너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유야.

 

취직, 하고 싶었는데. 오랫동안 힘들었어. 간신히 어디 들어가긴 했지. 오래 전부터 내 목표는 하나였어. 최대한 부모님께 내가 끼친 피해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장기를 팔고 급소를 쏴서 죽어 버리는 거. 끔찍하니? 나는 이 얘기는 하지 않았어. 하지만 들었다면 너도 이 계획이 끔찍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만 또 생각해 보면, 이미 내가 네게 자살 도움 의뢰를 하러 왔는데 무슨 상관이랴 싶기도 하다.

 

그리고 너는 네 애기를 잠깐 했어. 길지는 않고. 그다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지는 않다고 하면서. 비서까지 두고 양복 맞춘 놈 치고는 너 꽤 힘들게 지냈던데? 길지는 않았지만 느낌이 왔어. 이렇게 지내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지.

 

들으면서 나는 왜 너를 알고 지내던 지난 날들을 더 떠올리고 그랬나 몰라. 너와 엄청나게 친했던 건 아니었어. 하긴 내 기준으론 엄청 친했던 게 맞긴 했지. 네 기준으론 아니었겠지만. 일반적인 애들이 일반적인 친구를 대하듯 나는 네게 그렇게 굴었고, 너도 마찬가지였어. 한 가지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너 말곤 친구가 없었다는 바로 그 사실일 테야.

 

너는 다정한 애였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너는 별 말리는 말을 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친구의 죽음을 방관한다는 이유로 너를 비난했을까,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을까, 싶더라. 하지만 나는 그냥 고마웠어. 너무나도 고마웠어.

 

"응."

 

사실 후회라는 걸 죽은 사람이 할 이유가 무엇이니. 나는 종교인이 아니야. 내가 죽은 뒤에 내 영혼 같은 건 나오지 않을 거라고 봐. 그런 건 몸뚱이가 죽고 난 뒤에 사라지는 거야. 설령 진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처럼 무엇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봐.

 

"죽은 뒤가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죽으려고 하는 거야?"

"죽은 뒤가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누가 그래?"

 

천국은 없겠지만 현실에서의 고통은 사라지니까. 최소한 더 이상 아파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앞으로 살아갈 날에 고통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허용해야 한다고 그랬어. 데이비드 흄이라는 철학자가. 아마 나 같은 경우를 말한 건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말에 공감해. 자살이라는 건 용기가 있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야. 도망치는 거지. 죽으려는 사람들도 그건 잘 알아. 그냥 최대한 주변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해 볼 뿐이지.

 

영웅이 되고 싶어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싶다. 죽으면 주변 사람들이 후회할 거라는 생각 따위로 자살을 하려고 하는 겉멋 든 어린애는 많지 않아. 죽고 나면 남들이 후회하든 울어 주든 그게 무슨 소용이니. 본인은 죽어 버렸는데. 남들을 아프게 하려고 자살하는 게 아냐. 거꾸로지.

 

나는 짐이니까. 내가 그냥 자존감이 낮은 걸 수도 있어. 스스로가 스스로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당사자가 형편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하는 식의 얘기도 많이 들었어. 귀에도 안 들어와.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며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돌아오는 것처럼 당연한 진리인 것을.

 

누가 그러더라. 내가 죽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후회할 것 같냐고.

나는 대답하고 싶었어.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죽고 싶은 거라고.

 

목걸이, 네가 가져갈까.

나무에 걸어 놓은 것이 흔들린다. 이런 걸 가져도 된다고 말하다니 나도 꽤 나쁜 인간이지.

 

 

 

 

2.

 

너는 네가 내게 찾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모를 것이다.

 

사랑은 주관적인 것이다. 모두에게 추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에 빠진 채 바라본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워 보인다는 걸 너는 알까. 아니면 알면서도 내가 네게 품고 있는 감정들을 무시하고 있었던 걸까. 누군가가 널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너는 온 힘을 다해 부정했다.

 

우리가 대면하고 앉았을 때, 너는 나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노란 나비. 그 어떤 꽃에 앉아도 그 꽃보다 화사할 것 같은 차림새를 하고 너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뱉고 있었다. 나를 아프게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는 나를 알아봤을까. 아니면 내가 갑자기 반말을 하기에 그제야 알아챘던 걸까.

 

처음에는 너라는 걸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네 이름을 들었을 때 내가 알던 사람과 이름이 같다는 것만 느꼈을 뿐, 너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던 듯 하다. 네 모습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많이 자랐으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네가 울 것 같은 아이의 모습이었다면, 찾아온 네가 풍기는 것은 성숙한 여성의 느낌이었다.

 

"왜 죽으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드디어 네가 내게 온 이유를 말했을 때, 긴 침묵 끝에 나는 결국 물었다. 너는 조용히 대답했다. 슬픔도, 환희도, 절망도 찾을 수 없는 잔잔한 목소리로.

 

"이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

 

일시적인 우울증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의 절망은 하루나 이틀쯤 이어지는 슬럼프보다, 실연의 상처 따위보다 더 짙은 것이었다. 나는 너를 예전부터 알아 왔지만 너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네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네가 혼자서도 잘 사는 애라고 했다. 대충 던져 둬도 잡초처럼 살아나가고 아무리 상처를 줘도 끄떡없는, 철로 된 인형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네가 숨기고 있었던 네 속내는 모든 사람의 가슴과 같이 여렸던 모양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너의 결심은 상처 속으로 너무 깊게 뿌리를 내려 버린 듯 했다.

 

"가족들은?"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게 절차를 좀 밟았어."

"어떻게?"

"사람 하나를 고용할 준비를 하는 중이야."

 

너는 굉장히 오랫동안 이걸 계획해 온 사람처럼 말했다. 아마 그리고 실제로도 그게 사실이었을 것이다. 너는 담담했고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났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어릴 때부터 너는 외톨이었다. 그리고 너를 외톨이로 만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네가 외톨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홀로 있는다는 건 모두가 보기에 전염병 같은 거였다. 아이들은 너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너는 그래서 홀로 지내는 법을 배웠고, 아이들은 네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따로 돌아다닌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네들은 너를 비난했고 네가 특이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너는 점차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래.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를 앞에 두었던 그 순간보다 더 싫었던 적은 없었다.

 아픔은 떠나간 사람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이 겪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근거로 네게 죽지 말라고 해 봤자 너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남들의 죽음을 도와 주는 나 같은 인간이 그런 얘기를 해 봤자 설득력이 전혀 없을 테니까. 나는 어쩌다가 흘러 흘러 이따위 일을 하고 있게 된 것이었고 너도 어떻게 잘못 길을 들어 나와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 거였다. 그냥 운명의 장난이려니 하고 넘기려고 했다. 힘들었다. 돌을 삼키는 것처럼.
 너는 언제나 추억으로 남아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네가 실제보다 더 강하다고 제멋대로 착각을 했던 걸까.
 "그 목걸이는 어디서 난 거야?"
 "아, 이거."
 물었을 때 너는 목걸이 끈을 들어 보이며 힘없이 웃었다.
 "맞춰 봐."
 농담을 하는 게 좋을까, 싶었다.
 "그간 사이비 종교 주교라도 했어?"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너는 그러면서 뜸을 들였다. 어쩐지 무슨 말을 할 지 느껴지는 순간이었고, 그런 질문을, 그런 답을 들을 만한 말을 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네가 직접, 내게, 그게 네 죄의식과 과거 같은 것의 덩어리 따위라는, 뭔지도 모를 소리를 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너는 결국 그런 걸 말하지 않았다.
 마주앉아서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아주 조금은, 네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듯도 같다. 사실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속으로는 많이 무서워 하고 있다고 그랬다. 그렇게 들었었다. 그래서 누구든 자신을 잡아 줬으면 한다고, 네가 있어서 이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된다는 단 한 마디가 그 사람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고, 그런 얘기를 들었었다. 내게 찾아온 몇 없는 손님들에게도 너와 비슷한 상담을 하긴 했었다. 그러나 너와 얘기할 때처럼 필사적이지는 않았다.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이미 양심을 팔아 버린 놈이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단지, 경찰이라든가 취재원 같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한 방어막이었을 뿐이다. 거의.
 "그런데 이런 얘기 더 해 봐도 소용 없지 않아?"
 시킨 커피가 거의 식어 갈 즈음 네가 물었다. 멍청하게 어? 하는 식으로 되물었던 것 같다. 너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박또박 뱉어 냈다. 악의는 없었다는 걸 안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네가 그 말을 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뭐?"
 "비소는 이미 받았다고."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 죽고 싶다고 찾아올 줄 정말 몰랐느냐고 한다면, 그래, 정말 나는 그럴 줄 몰랐다. 주변인들에게 연락처를 준 적도 없는데 넌 기어코 찾아왔다. 찾아와서 너의 죽은 몸뚱이를 분쇄해 달라고 했다. 하고 싶지 않다고 대꾸하고 싶었다. 나가라고. 나는 너 같은 애가 죽는 걸 지켜보고만 있으려고 이런 일을 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나는 너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말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네가 나에게 거는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한심하지만. 아마 나는 앞으로 과연 이게 너를 위한 선택이었는지 끊임없이 회의하고 괴로워 할 것이다. 아마 널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너는 어떻게든 죽을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하고 있는 일 탓에 너를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신고한다고 해도 돌이킬 수 있는 단계도 아니었다. 네가 한 수많은 선택들로 보아, 아니, 네가 한 그 마지막 말만 들어도, 너는 너무 많이 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내 일 때문이었다. 남들에겐 다 그렇게 철면피처럼 뻔뻔하게 어떻게 죽으시겠어요, 하는 식으로 자살을 상품처럼 내밀고는 네게는 그러지 않는다는 게 불공평하다고 느꼈던 듯 싶다. 이런 것에 사실 공평하고 자시고가 뭐가 있겠냐만은, 아주 손톱만큼 남은 내 양심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합리화일까. 합리화가 맞는 것 같다.
 어쨌거나 그래서 네가 어차피 죽을 거라면 최대한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품에서 죽게 하고 싶다 하는 식의, 그 따위 한심한 감상 같은 거였을까. 모르겠다. 이젠 정말.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이런 걸 시작하게 된 건 장기 매매업자들과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이 계열에 발을 들이면서 뭔가 특별한 방법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돈이 필요했다. 사업이 망했고 더 이상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싶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빚을 지는 걸 많이 싫어했으니까.
 변명이라는 건 안다.
  "처음으로 찾아 온 손님이 가장 골치였어. 죽겠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했다가. 무서웠나 보지, 그래서 죽지 말라고 그랬어. 차라리 살라고.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더라. 이런 거 일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죽어야 돈을 받지 않느냐고. 그래서 돈도 좋지만, 죽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죽이는 건 자살 방조의 범위를 훨씬 넘어 버리는 거라고 얘기해 줬지."
 널 만나 그런 얘기를 나는 네게 왜 했을까. 너를 멈춰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한데 너는 그걸 들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의 모든 말들은 너의 결심만을 굳혔던 듯 하다. 네가 있기로 한 자리에 나는 너보다 먼저 가 보았다. 그림자가 창백한 한 나무 근처였다. 너는 아무렇게나 너를 분해해도 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사람 장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너를 만나고 왔을 때 전화가 왔다. 나는 받았다. 사채업자들이었다.
 "저기요, 형씨, 우리도 이렇게 질질 끄는 거 싫거든. 딱 한 번 더 갚으면 되잖아?"
 "이제 돈 들어옵니다."
 "언제?"
 "오늘 내일 중에요."
 "아, 뭐, 그렇다면. 처음에 튀었을 때 찾으면 조져 놓고 시멘트로 발라 버리려고 했어."
 웃음소리.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를 팔아 내 인생을 구제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미치도록 더러웠다.
 네가 왔을 때 네가 하고 온 목걸이가 눈앞을 어른거리는 듯 했다. 거기에 자꾸만 눈길이 갔었다. 이 일을 하는 게 나라는 걸 너는 역시 알았던 게 아닐까 싶어지게 한 물건이었다. 너는 내가 그런 목걸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그걸 하고 온 거였을까. 너는 그걸 가져도 된다고 했고, 죽은 뒤에,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언가가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쨍그랑.
 전에 시계를 떨어뜨린 적이 있다.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지만 겉보기에 깨진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시계는 영영 가지 않았고 분해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시계를 버렸었다.
 네 문제도 그런 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버리고 새로 사는 식. 그러나 사람의 삶과 죽음은 그렇게 쉽게 처리되는 것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네 시체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던 일이라고, 널 도와 주는 거라고 되지도 않는 자기 최면을 걸어야만 했다. 우리는 너보다 늦게 왔다. 네게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느꼈다. 비서는 산 아래까지 함께 왔다. 올라가려는 차에 비서가 말했다.
 "의뢰자 분이 추가금 주시고 가셨어요."
 "응?"
 "추가금으로 한 일 억 정도 주시고 가시면서 몇 가지 일을 맡기셨는데요."
 그러면서 읊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네가 사후 조치를 취할 때 고용했다던 사람이 내 비서였던 듯 했다. 일 억이라는 돈이 곧 죽을 네겐 애들 장난 같은 거였나 싶었다. 그리고 비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걸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 넣었을까 하면서 화도 끓어올랐다. 괜한 짓이었다. 우리가 이 일을 한 지 일 년이 넘었고 비서도 충분히 무감각해졌을 만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 일에 연루된 게 바로 '너'라는 걸 알았을 리가 없으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웃으면서 울어 버리고 싶었다. 나는 참았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 거란 사실을 알았다. 나는 산길을 향해 돌아섰다. 네가 죽어 있을 산.
 "다녀올게."
 언제나처럼 비서는 차에서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본격적인 책임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나는 삽을 들고 암매장을 하러 올라갔다. 네 주검은 꽃덤불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 자리를 골랐기 때문이었다. 왜 이 일의 마무리가 너여야만 했을까.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나는 땅을 파며 네 쪽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어쩔 수 없었다. 너는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너를 구덩이에 넣으려는데 손에 갈기갈기 찢긴 종이가 뭉쳐져 있는 게 보였다. 읽을까 하던 차에 나뭇가지에 걸린 채 흔들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잔뜩 꼬인 줄. 네 목걸이였다.
 죽은 사람의 물건. 네 물건. 갖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을 우선 끝냈다.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다소 흙이 엉망이긴 했지만 충분히 깊이 팠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였다. 이미 해질녘이었다. 나는 삽을 바닥에 꽂고 지팡이처럼 짚었다. 한숨이 나왔다. 끝까지 제대로 처리하려면 네 목걸이를 챙겨야 한다는 건 알았다. 나는 그 혐오스러운 것을 들어 내 목에 걸었다.
 내려오는 길에 어쩌면 그걸 버리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 하는 예감 비슷한 게 들었다. 결국엔 너의 생이, 너의 산산히 망가져 버린 정신이 내게 들러붙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상에서 너의 위치는 너의 억눌린 감정들과 섞여 있었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너의 지위는 언제나 그 곳, 나와 함께 있었던 그 학교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였다.
 "그 목걸이 뭐예요?"
 드디어 내려왔을 때 비서가 물었다. 나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결국 나는 너의 목걸이를 버리지 못했다. 뭐라고 했어야 좋았을까. 유품? 추억?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십자가요."
 일그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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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양

  이레가 그 기묘한 인형을 구한 것은 이레 나이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이레의 부모님은 아이가 소녀답게 자라는 편을 선호했다. 아이의 성격 자체도 그들의 바람에 딱 들어맞았다.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울기는 해도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법은 없었고, 웃어도 소리내어 웃지 않았다. 명절이면 가끔씩 보는 친척들은 아이가 순하다 했다. 조선 시대 규방에서 태어난 애 같다고 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레의 부모에게는 그것마저 칭찬으로 들리는 판이었으니까.   이레가 어렸을 때 가끔씩 사람들은 아이를 사흘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다가 이레가 이해하지 못하고 마주볼 때,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그들은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이레는 그럴 때마다 웃곤 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이레와 사흘 사이엔 4일이라는 간격이 있는데 그걸 모르면 어떡하냐고.   이레는 말을 빨리 배우는 편이었다.   다섯 살, 이레의 유치원에서는 각자의 태몽을 이야기하는 행사를 벌이겠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이 얘기하는 동안 이레는 최대한 가만히 있었다. 부모는 그 애에게 태몽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마침내 제 차례가 되자 이레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곁에 있는 애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너는 태몽이 없어?" "못 들어봤어." "엄마한테 물어 봐!" "응."   점심을 먹고 유치원이 끝나자 이레는 집으로 갔다. 아이는 조용한 편이었고, 버스에서도 큰 소리로 떠드는 법이 없었다. 이레의 어머니는 놀이터 근처에서 유치원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레가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내렸다. 소녀, 노란 유치원 가방과 때 타지 않은 새하얀 원피스.   "딸, 잘 지냈어?" "네."   웃음과 함께, 유치원 선생님 및 버스 기사 분과의 인사치레가 끝난 뒤 노란 버스는 멀어져 갔다. 매연 냄새가 얼굴로 풍기는 것을 느끼며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엄마. 내 태몽은 뭐예요?" "태몽?"   이레의 어머니가 되물었다. 마치 단어 자체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런 거 꼭 알아야 해?" "유치원에서." "유치원에서 뭐래."   화가 난 것 같았다.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몇 없는 지나가던 행인들이 그들 쪽을 흘끔거리면서 걸어갔다. 이레는 머뭇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엄마한테 물어보라는 말을 했었다. 그렇다면 다른 집에서는 이렇게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물론 그 애들이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거짓말이라는 건 금방 어색한 웃음으로 들통나기 마련인데. 그 꿈이라는 건 사실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레는 꼭 알아야 하냐고 되묻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신이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엄마를 화나게 만든 것 같았다. &nbsp

  • 밤별물고기
  • 2016-01-30
공감각

근래 들어 설화가 멍하니 있는 일이 잦아졌다. 비택이 그 여자애를 오 년쯤 전에 입양한 이래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 요란하다던 사춘기 때도 조용히 노래에만 빠져들었던 애였다. 열아홉이 되어 갑작스레 사춘기가 오나, 하며 비택은 웃었지만 사실 그는 속이 탔다. 그건 아버지로서 느끼는 불안감 이상의 것이었다. 비택은 서른 다섯 살 먹은 남자였고 작곡가였다. 그러나 그는 실상 채보자에 불과했다. 그의 모든 곡은 설화에게서 왔다. 비택은 손이 빨랐고 정확한 채보로 유명했으나 그의 초기 작곡들 중엔 좋은 평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는 그래서 더 자기 딸이 천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택은 배워서 피아노를 잘 쳤지만 설화는 음악을 한 번만 듣고도 가락을 피아노로 옮겼다. 그 애가 가만히 앉아 있다 치기 시작하는 음악을 들으면 경외스러울 정도였다. 비택의 수양딸 황이설화는 소경이었다. 귀는 경미한 난청 증세를 보였고 왼손은 아예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쉬이 짜증을 내는 법이 없었다. 제가 오른손잡이여서 다행이에요, 하면서 건조한 웃음소리를 낸 적도 있었다.   건조한, 그 단어는 설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설화를 정의할 때 쓸 만한 것이었다. 아이는 조용했다. 특히 바람이 부는 날이면 바람이 드는 테라스에서 거의 한 시간 남짓 앉아만 있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들은 애가 참하다고 했다. 딱 요조숙녀라고. 그러나 비택은 설화가 단순한 현모양처로 끝날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설화를 입양할 때 비택은 서른 살이었고 아내가 없었다. 법적으로 입양 자체는 한 부모 가정이라도 가능했다. 처음 설화가 있는 고아원에 갔을 때 그는 누군가를 입양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프로가 되고 싶은 아마추어였다. 피아노는 전부터 배웠지만 작곡에 손을 댄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나마 발표하려 했던 작품들도 혹평을 받거나 외면받은 상태였다. 크리스마스 무렵에 봉사 활동 연락이 왔다. 훈훈한 사연들을 전하는 이메일을 받아 오고 있었는데, 마침 거기에 뭔가 하나가 뜬 거였다. 재능기부라고 했다. 비택은 이름을 걸고 하는 재능 기부를 할 만큼 유명하지 못했다. 그는 메일을 찬찬히 읽었다. 경력자를 우대한다는 듯한 내용은 있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기부는 기부. 비택은 신청했다. 우울한 나날이었다. 작곡이 좋아 시작했지만 과연 계속해도 좋을까 하는 회의감도 일었다. 남들은 몰랐지만 사실 비택은 작곡을 피아노보다 더 오래 준비해 온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나름 능력이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그건, 역시 아이를 위한 거짓말들이었던 걸까. 마침내 봉사활동자로 선정되고 고아원을 찾아가면서 비택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하는 거다. 이번에 잘 된다면 조금 더 해 보고, 안 된다면 그만 멈추자. 물론 지난 경험으로 그는 아무리 자기가 그만두겠다고 생각해도 다시 시작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작은 무대에 섰다. 풍금을 닮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아래에 앉아 있는

  • 밤별물고기
  • 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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