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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 카니발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8-06-30
  • 조회수 1,163

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부장이 눈치 까고 밀어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인사과에 서류 넘어갔다니까. 사무실에서 종종 마시던 뉴욕 브랙퍼스트의 초콜릿 향이 강하게 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라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곤 자기 몫의 밀크티를 투명한 컵에 부었다. 밀크티가 찰랑이며 채워졌다. 라가 꼭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가늘게 흘겼다.

 

유리에 뜨거운 거 부으면 안 돼.

유리 아닌데.

아니야?

언니가 보내준 거라 잘은 모르는데 아닐걸. 소포로 유리 보내면 깨지잖아.

그렇긴 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보고서야 라는 작은 싱크대에 주전자를 놓고 돌아왔다. 흘끔 보아도 싱크에는 남은 공간이 많지 않았다. 딱 한 명이 머물 법한 부엌, 책상, 선반. 침대도 없어 여길 집으로 삼기에는 다소 부족할 것 같았다.

 

일 얘기나 마저 해 봐. 얼마나 진행됐는데?

 

라는 내가 모으고 있는 자료들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어떨 때는 시계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반짝거리는 눈으로 설명을 듣곤 했다. 나는 반쯤 마신 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

 

 

*

 

 

카론의 불그레한 뺨을 쓸어주며 배웅할 때까지도 내색하지 않았으나 사실 시계를 주문한 언니의 요청을 몇 주째 미룬 채였다. 이렇게 내팽개쳐 두다가는 다음 소포에 생사를 확인하는 글이라도 적혀 있을 판이었다.

며칠이나 손대지 않았던 수납장 위의 손목시계를 가져와 작업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서랍을 열면 아무렇게나 방치된 것 같은, 그러나 원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편지들이 무수했다.

가장 최근에 만졌던 편지 봉투를 더듬어 찾았다. 봉투에서 분리된 편지를 펼쳤다.

 

이번에는 라,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조금만 시계에 담아줘. 조각이나 장식, 디자인 같은 건 상관없으니까. 사람들이 네 시계를 매우 좋아하는데, 정작 시계공이 나타나지 않으니 궁금한가 봐. 그러니까 이번 테마는 너로 하자. 이건 내 부탁이기도 해.

 

언니는 내가 어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을 피해 이 숲에 들어온 후부터 매일같이 생필품이 떨어졌다 싶을 때쯤이면 내 상반신만한 박스를 소포로 보냈다. 아주 꼼꼼하고 세밀하게 포장된 안에는 늘 아이스팩이 들어 있어 음식들이 단 한 번도 상한 적이 없었다. 포장재 위에는 언제나 정성스럽게 실링왁스를 찍어내어 밀봉된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만년필로 쓰인 편지는 언제나 디어 라, 로 시작했다.

어쩌면 언니는 내가 실링왁스를 좋아하는 걸 기억할지도 몰랐다. 왁스가 녹으면서 내는 목소리가 그렇게 행복하다는 걸 들어본 적 없을 언니는 모를 텐데도.

 

시계의 조각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나를 테마로 한 작업은 처음이었다. 물방울과 별이 불규칙적으로 수놓아진 베젤과 케이스를 세공할 때 안료는 유난히 금세 말랐었지. 다이얼에서는 명왕성이 일정한 궤도를 두고 회전했다. 내가 무얼 넣어야 할지는 나도 몰라, 언니. 내게는 여기 있는 모든 게 전부 소중한걸.

그래도 무엇인가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내 시계가 비싸게 팔린다는 이유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였으니까. 나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언니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일일 테였다. 그리고 나는 언니한테 빚을 지고 있으니까.

 

탄,

응?

 

카론이 있는 내내 내게 장난을 걸었던 탄이 불쑥 커지며 대답했다. 불꽃을 튀기며 벽난로 안에서 즐거웠다는 듯 깔깔 웃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통나무를 갉아먹었다.

 

내일 밤 호수에 가자.

호수? 왜, 재료 떨어졌어?

탄은 자신이 먹는 통나무에서 재가 떨어지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다가 가운데 부분을 태워버려 나무를 둘로 동강낸 뒤 한입에 먹어 삼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나무도 얻어다 준다고 약속하면.

그래.

소나무로.

걔네는 까다로운데.

아니면 안 가. 춥단 말이야.

불이 추운 걸 어떻게 느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지 그래?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탄을 바라보자 탄은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최대한 작게 만들고선 혀를 길게 빼물었다. 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태가 얄미웠다.

추워.

알았어, 알았으니까. 준비해.

 

 

*

 

 

나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전에는 사보 외주를 하고 오후에는 라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밤에는 부장에게 성희롱 및 성추행을 당한 사람들의 사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여사원들이었고, 보복이 무서워 주위에 알리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고발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부장이 나를 이 숲속으로 파견 보내고 나서 가장 별일은 라를 만난 것이었다. 말이 이 숲 위쪽에 지어지는 댐 건설에 대해서 낱낱이 파헤쳐 오라는 것이었지, 한 달을 넘어가면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조용히 하라는 협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라는 내가 프린트해 온 피해 사례들을 차근차근 읽고 있었다. 원래 오던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덧붙여 말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문을 열고 함께 햇살이 잘 들어오는 자리를 찾아 앉는 것 외에는.

나는 라의 옆에 앉아서 몇 번이나 검토하고 윤문했던 사례들을 다시 떠올렸다. 이내 머릿속에 담고 있기도 싫어 지워내면 고양이를 닮은 라의 얼굴만 시야에 가득 담긴다.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이며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따위는 분명 눈이 가는 외모다. 오두막이나 숲에는 별반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마저 심길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함께 붙어 책을 읽거나 사진첩을 넘겨보는 일은 잦았으나 이렇게 라를 빤히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라가 사례를 읽는 만큼 꼼꼼하게 라의 얼굴을 읽었다.

 

길게 나부끼는 속눈썹, 사나워 보이지만 사실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 깊은 눈매와 명왕성을 닮은 눈동자, 붉은 기는 찾아볼 수 없는 낯에서 유일하게 불그레하게 혈색이 도는 입술, 광대를 덮어내고 허리까지 이질적으로 떨어지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카론.

 

라의 코랄 색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급하게 눈을 서류로 내렸다.

 

너는 왜 굳이 이걸 폭로하려고 해?

응?

 

라는 서류를 내렸다. 종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라를 응시했다. 라도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가만히 있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거 아냐. 너도 이렇게 불이익 받는 일 없었을 거고.

 

나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라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서류는 이미 라의 손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나는 다소 흐트러진 서류를 그러모아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나는 이런 게 너무 싫어, 라. 권력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건 항상 힘이 약한 사람들이잖아. 나만 아프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게 해결되는 일도 아니고.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평소라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라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라의 눈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라의 옆으로 긴 눈이 동그랗게 변하면 나는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왜, 라. 그래도 그래서 나를 만났잖아.

그걸로는 성에 안 차? 라에게 물으면 그제서야 라는 내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쓸며 그러네, 하고 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왜, 그럴 수도 있지. 숲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내가 물어오면 라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다가도 애매한 대답만 내놓았다.

 

재미없어.

나는 뒤로 얼굴을 거두었다. 라가 답하기도 전에 나는 서류를 챙겼다. 라는 내 손끝만 멍하게 바라봤다. 나는 라의 낯빛을 힐끔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미없으니까, 다음에 내 글이나 봐 줘.

글?

소설.

 

나는 부러 지나가는 어조로 말을 던졌다.

 

출판사에서 댐 조사만 하지 말고, 단편이라도 써 오래. 나 밉보였나 봐. 일을 또 주시네.

다 썼어?

얼추 어제 마감했어. 고치는 게 더 일이라곤 하더라. 너랑 같이 다녔던 들판이며 숲속 깊숙한 공간들이 배경 묘사하는 데 꽤 도움이 되었거든.

 

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의 표정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기쁜 걸까, 슬픈 걸까, 아니면 라도 라의 감정을 모를까. 어쩌면 라를 이해하는 건 부장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몇 가지의 가설을 정리하다가 재빨리 생각을 지웠다.

 

 

*

 

 

라,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이거 내가 쓴 거 아니야. 언니가 보낸 거라고.

언니의 주문서를 낭독하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던 호수가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바위를 딛고 서서 호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물을 날카롭게 일렁이는 낯은 분명 무언가 불편하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왜, 나는 다시 물었다. 너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호수가 대답했다.

누구, 카론?

카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호수가 심하게 요동쳤다. 어린아이들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동요하기라도 한 듯 호수 주위에 만발해 있는 분홍색 꽃들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어?

라, 너, 우리에게 쏟을 관심을 그 여자애한테 다 주고 있잖아.

 

우리가 다 봤어.

우리가 다 봤어.

우리가 다 봤어.

 

목소리들이 한데 합쳐져 울렸다. 머리가 아팠다. 탄이 자리한 초롱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탄만 조용한 게 분명했다.

카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적은 없었으나, 숲과 숲, 그리고 숲과 숲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문이 여기까지 퍼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움직일 수도 없는 저 애들에게는 이 소식이 논쟁하기 좋은 사건이었을 테였다. 여전히 목소리들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초롱이 점점 따뜻해지다가 뜨거워지다가 갑작스럽게 온도를 내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구름처럼 몸을 부풀려 커져만 갔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만!

그만해. 알겠어.

내가 사랑을 잘못 알았나 봐.

 

심호흡을 했다. 떼를 지어 소리치던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그 중 같은 어조의 목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등등하던 공기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떨리는 느릅나무의 호흡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라, 너는 우리를 사랑하지.

 

한밤중의 별을 닮은 목소리가 물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랑하지. 위압적인 곰 같은 목소리가 물었다. 사랑하지. 연어가 물 밖으로 튀어오르는 밤의 목소리가 물었다. 사랑하지. 사랑하지, 사랑하지, 사랑하지.

 

그래, 사랑해.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하겠어.

 

호수는 확답을 얻어내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 견고함에 힘을 실어 주는 건 주위의 모든 목소리들이었다. 조용히, 나직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답을 달라고 입을 모아 요구하면 내가 버틸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우리는 그만큼 너무 오래 보았고, 서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았으며, 서로를 단번에 무너뜨릴 열쇠 하나씩은 쥐고 있었다. 내가 숲 위에 건설된 댐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호수는 나를 재촉하며 물과 물 사이에 입을 열듯 틈을 만들어내었다.

 

누구를 사랑해서 사람을 분해해 보겠어, 그렇지, 라. 우리의 꽃을 꺾어버렸던 날, 네가 내 안으로 밀어버렸던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대답해 봐. 너는 그 애를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호수가 더 요동치면 저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거름망을 거치지도 않고 내 귀로 꽂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 날에는 늘 악몽을 꿨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호수와, 꽃과, 나무와, 새들과, 숲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는 것. 그건 유년의 나와 내 엄마가 늘 꿈꿔 왔던 것이었으나 막상 꿈속에서 마주하면 입을 닫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만 같아 공포스러웠다.

눈을 굴리다가 탄이 든 초롱을 더 꽉 쥐었다. 탄을 내려다볼 시간도 없었다. 나는 애써 에둘렀다. 최대한 의연하게 말을 굴렸다.

 

죽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결국 이 숲 말고 다른 만들어진 것의 일부가 된다는 건데.

 

호수는 여전히 일렁였다. 무섭지는 않았다. 가족보다 더 많은 세월을 함께한 친구다. 불만족스럽다는 듯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면서 자신들끼리 웅성거리는 모양새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말했잖아, 내가 사랑하는 건 너희밖에 없다고.

 

그제야 흔들리던 동세들이 잠잠해졌다. 호수는 그렇지, 하고 흡족하게 몸을 떨었다. 물의 파편들이 호수 위로 튀어나왔다가 잠잠하게 들어갔다. 호수에서 빛이 나는 건 늘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가 볼게.

왜 벌써. 뭐 가지러 온 거 아니었어?

 

그제야 탄이 소나무를 열심히 주장했다는 게 떠올랐다. 평소라면 이 시점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왜 자신의 나무를 챙겨가지 않느냐고 불퉁댔겠지만, 탄은 오늘 유난히 조용했다. 초롱을 들어 작아진 탄을 확인했다. 탄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맞긴 한데, 오늘 너희 기분 안 좋은 거 같아서.

됐어, 주문서 들어 보니까 아무거나 골라 넣어도 될 거 같던데. 네 언니한테 필요한 거 조심히 가져가. 우리는 널 사랑하잖아.

 

 

*

 

 

오늘의 라는 무언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몇 번이고 불러도 대답하는 속도가 느렸다. 나는 라를 부르다가 끝내는 라의 손목을 쥐었다.

 

라.

 

라는 반짝 놀라더니 내 눈을 마주하고서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 왔잖아. 내가 말을 한 글자씩 띄어 강세를 주고서야 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하지 못하는 라는 숲에 머무르는 한 달 동안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내 손에는 라에게 보여 줄 원고 뭉치가 들려 있었다.

 

소설 가지고 왔는데, 오늘 줘도 네가 읽을지나 모르겠어.

 

그렇게 멍해서는. 웃음을 흘리듯 뱉으며 라에게 소설을 건넸다. 한때는 글을 쓰고 싶어 하던 시절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써 오라고 했다던 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연락이 오지 않았어도 나는 아마도 소설을 썼을 것이다. 남의 글을 눈 빠지게 보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 이 정도로 주어지는 건 입사 이래로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단지 라의 눈에 비친 소설의 세계가 어떨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소설을 받아들었다. 내 손에서 빠져나간 원고의 무게감이 어쩐지 과하다고 생각했다. 라는 지난번 피해 사례들을 읽었던 것처럼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철해진 표지를 넘겨 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라가 읽는 방식은 읽는다기보다는 눈에 박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어느 하나도 기억에서 놓치지 않을 거라는 듯이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시계 작업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애당초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분량이 많지는 않았다. 한 달간 꾸준히 조금씩 쓰다 보니 오십 장 정도의 소설이 완성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라가 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제 보아도 눈은 깊었다. 라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으나 이내 잦아들었다. 나는 라의 곁으로 엉덩이를 밀어 다가가 몸을 붙였다. 등을 벽에 기대자 피곤이 쏟아졌다. 라에게 더 나은 소설을 보여주고 싶어 밤새 글을 고친 탓이었다.

 

라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라가 집중하던 원고 뭉치는 표지가 맨 앞으로 하여 가지런히 정리되어 라의 손에 얌전히 쥐여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라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내가 라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라는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가져다 대었다.

 

졸려?

……응.

 

내 목에서 나온 목소리는 완전히 잠에 취해 잠겨 있었다. 몇 시간이나 잤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건 그저 라의 집에 시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겼다.

 

그럼 기대고 눈 감고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머리카락이 라의 등이며 몸에 닿아 간지러울 게 뻔했으나 라는 몸을 빼지 않았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따뜻했다. 집안이 따뜻했는지, 라의 몸이 따뜻했는지, 어느 쪽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트라우마에 갇혀서 나아가기를 무서워하는 P도, P에게 자신을 무너지지 않는 낙원으로 삼으라는 S도. 서로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도, 예뻤어. 슬펐고.

 

나는 으응, 하고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불가역적인 힘이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라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흐릿해졌다. 라의 목소리가 동굴에 들어간 것처럼 웅웅 울리다가 빠르게 멀어졌다. 마치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이.

 

그리고, 닮았다고 생각해.

 

 

*

 

 

라.

탄이 오래 잠잠하더니 카론이 돌아가자 기어코 말을 꺼냈다. 호수에 다녀온 후 처음 듣는 탄의 목소리였다. 탄은 제 불꽃을 일렁이며 벽난로의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왜 내 이름은 탄이야?

나는 벽난로 앞으로 걸어가 맨바닥에 앉았다. 탄이 데워 두었는지 따뜻했다. 탄의 눈이 데룩데룩 구르다가 내 시선과 맞물렸다. 손가락을 꿈틀거리다가 결국엔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너, 나한테 처음 말 걸었었잖아.

태어날 때부터 우리 말소리 들렸었다며.

떠드는 거 듣고 있는 거랑 얼굴 들이밀고 이야기하는 거랑은 다르지.

아무튼.

내 인생의 오점. 오발탄. 그래서 탄.

야.

 

탄의 어이없다는 눈은 아무것도 모를 때 네가 싫어졌다는 장난을 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얼굴 근육을 팽팽하게 당겨 웃었다. 왜, 싫어? 탄의 표정은 가볍게 무시한 채 나는 다리를 쭉 폈다.

 

그 때는 어렸잖아. 너랑 영영 헤어질 뻔도 했었고.

불행했어?

아마 엄마는 불행했을걸.

너는?

어렸다니까. 학교 들어갔을 때도 거기가 병원인지 몰랐고. 그 때 너 나 안 보여서 울었다며? 스스로 꺼뜨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없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대신 네가 여기로 데려와 줬잖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탄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내가 병동에 다녀온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탄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럴 때면 도리어 내가 탄을 응시했다. 그 조금의 적막도 참지 못하고 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네 이름은 하필이면 왜 라야.

몰라, 지금 시비 걸어, 탄?

툭 뱉어낸 말이 너무 퉁명스러울까 잠시 곁눈질을 했다. 작업실 벽면을 빼곡히 채운 기어들은 맞물려 금방이라도 절그럭거릴 것 같았다.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탄은 내 낯빛을 스치듯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쟤네 자.

탄이 껴안고 있던 통나무를 넘어 내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이제 알려 줄 때도 됐잖아. 얼굴을 그을릴 듯 그을리지 않는 열기는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골려볼까 싶었다. 탄의 얼굴 가까이 손바닥을 펼쳐두었다. 탄이 몸을 흐물하게 녹였다가 다른 쪽으로 치솟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오늘따라 이름에 집착을 해.

네가 직접 이름 붙여 준 여자애 때문에. 너 다른 애들한텐 이름….

 

나는 벽난로 옆에 잘라 둔 장작을 쥐어 당겼다. 팔뚝만한 목재를 탄의 머리에 두고 꾹 눌렀다. 말을 잘린 탄은 눈을 이리저리 찌푸리다가 금세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통나무를 껴안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탄, 카론 이야기라면 그만해. 나는 그 애를 사랑하지 않아. 알잖아.

너는 카론이 어떤 별인 줄 알잖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탄이 말을 가로챘다.

 

그럼 왜 걔 이름은 카론이야?

 

탄은 다 타고 난 재같이 굴었다. 꾸역꾸역 붙여 준 이름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나는 그게 전쟁이 나기 전의 밤이라서 잠잠한지, 혹은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라서 잠잠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너 정말 기억 안 나?

탄은 답답하다는 듯 몸 전체를 펄떡여 불똥을 튀겼다. 잔뜩 일그러진 불꽃의 모양이 내 앞까지 밀려왔다 거두어졌다. 그건 언니의 편지였고, 언젠가 물었던 내 이름의 이유였고,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시계가 그런 모양을 갖추고 있는 이유였으니 잊었을 리 없었다.

명왕성과 위성. 어쩌면 붙인 이름이 나를 흔들었는지도 몰랐고, 처음 봤을 때부터 흔들려 이름을 그렇게 붙였는지도 모른다.

 

사랑해.

 

사, 랑, 해. 아주 천천히 공기를 혀 양옆으로 새어냈다가, 입천장을 스쳐낸 후, 입매를 옆으로 늘려본다. 사랑한다는 발음은 꼭 위태로우면서도 그토록 안정적이지. 혼자라면 금세 쓰러질 것 같으면서 손을 맞잡고 뒤로 누우면 무너지지 않는 것. 손 안에 쥐기에는 이질적이면서 목덜미 뒤에서 숨을 거둬가는 것.

그러나 동시에 둘 다에게 아픔만 안겨주고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 것.

 

아니, 난 안 사랑해.

숨을 들이켰다. 다 부질없어.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탄.

 

 

*

 

 

라가 말했던 마지막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닮은 것 같다고 이야기한 다음의 부드러운 낱말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라의 집에서 그렇게 자고 왔으니 밤에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오는 길은 꽤 어두컴컴했고, 눈까지 내려 라가 바래다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길을 잃을 뻔했다. 초롱을 들고 보폭을 맞추어 걷는 게 분명한 라에게 나는 자꾸만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라는 웃으며 초롱을 흔들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들은 게 다야, 카론. 내 이름 두 자를 유난히 부드럽게 발음할 뿐이었다. 나 듣던 도중에 잤다니까? 아무리 라를 흔들어도 라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원고를 다시 꺼냈다. 그걸 읽는다면 어쩌면 라가 했던 말을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몇 번이나 꾹꾹 눈에 눌러담았는지 원고의 끝부분이 살짝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라가 원고를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라가 집중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원고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단어들이 듬성듬성 빠진 빈칸들이 눈에 잡혔다. 나는 빠르게 원고를 넘겼다. 마치 원래 그렇게 프린트된 듯, 정갈한 활자들 속에 단어들만 쏙쏙 빠져 있었다. 빈칸 채워넣기라도 하라는 것 같았다. 열 번도 더 고치고 읽은 이야기였다. 아마 이 정도는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 턱을 괴었다. 이 자리에 들어갈 단어가 같은 건 자명했다. 소설을 쓸 때 단어에 비중을 두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네           까지도 볼 수 있어, P.

네가         을 믿지 않는다면 내가 네        이 될게.

무서워? 왜? P,         은 잊지 않는다는 서약과도 같은 거야. 우리는 너무 오래          을 잊고 살았잖아.

 

밖의 눈이 점차 쌓이고 있었다. 나는 단어 생각을 하다가, 라가 잘 들어갔을까 하고 염려하다가, 다시 단어 생각을 하다가, 라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추론하다가, 다시 단어 생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라가 그나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눈임에 안도했다. 또다시 샌 생각에 내 머리를 믿는 건 그만두었다. 대신 나보다 나은 저장 장치를 신뢰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본 파일을 보면 정확한 단어를 알 수 있을 테였다.

 

노트북이 부팅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금속제의 낡은 노트북에 무심코 손목을 대었다가 튕겨오르듯 팔을 빠르게 거두었다. 이제 바꿀 때가 되었는지, 아래에서 정전기가 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어 본 원고 파일에도 누가 고의로 지워 둔 것 같이 그 부분만 지워져 있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써도 다른 생각으로 빠지기 일쑤였고, 미완된 상태로는 글을 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단어를 채워 넣어야 했다. 한 번의 퇴고가 더 추가된 셈이다.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팬 소리가, 내가 듣지 못했던 라의 마지막 말처럼 희미하게 잦아들었다.

 

*

 

 

탄.

응.

카론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뭐가.

 

탄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탄을 바라보았다. 나와 탄 사이에는 틈이 없었다. 벽난로에 가까이 붙었다. 탄은 빨리 말해보라는 듯이 몸을 크게 부풀렸다가 바람을 빼 원래 상태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원했던 소나무를 아작아작 씹어 먹으면서.

 

대표로 나서는 것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그게 왜.

카론은 변화라는 게 두렵지 않은가 봐.

안 무섭겠어?

 

탄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쪽 눈을 감아내듯 찌푸리고 나를 쏘아보았다. 혀를 찰 때마다 불꽃이 위로 튀었다. 탄은 소나무를 꿀꺽 삼키고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변화는 두려워. 나도 너 사라졌을 때 무서웠다고 말했잖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이 보였어.

힘들어도 그냥 하는 거지. 마냥 과거에 매몰되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눈을 감았다. 카론의 자신감 넘치던 표정에 결여된 게 두려움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탄은 한숨을 내쉬고 소나무 가지 하나를 더 가져와 짓씹었다.

 

걔한테는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거야. 적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는 거고. 그걸 감당할 만큼의 용기가 있는 거고, 이 바보야.

 

없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더 가지고 있는 거라고. 탄은 말을 쏟아내고서는 벽난로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그래 봤자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탄이 나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때 보내는 신호였다.

과거에 매몰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지. 정확하게 어림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으나 탄의 날선 말이 나를 향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시간이 지나도 내겐 바뀐 게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믿어 왔으니까.

 

탄.

또 왜.

 

탄이 입을 비죽이며 구석에서 웅얼웅얼 대답했다. 짤막하게 대답하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입술을 열어 공기를 끊듯 흘려냈다. 이건 평생 내가 담지 않을 이야기일 줄로만 알았는데.

 

만약 내가, 너한테. 시계 속에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갈 거야?

누구한테 줄 건데.

…….

이젠 날 아예 멀리 보내시겠다?

탄.

나 보기 싫어? 이제 질렸어?

 

그런 게 아닌 걸 알잖아, 탄. 그러나 내가 눈을 들었을 때 보인 탄의 표정은 목소리와는 달리 장난기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탄에게 손가락 하나를 펴 찌르는 시늉을 했다. 탄은 내 손을 먹다 만 나무로 밀어냈다.

 

그래, 무릎 꿇고 들어가 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볼게.

탄.

대신 조건이 있어.

 

탄은 내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네가 훔친 그 단어하고 같이 담아줘.

뭐?

모를 줄 알았어? 그러니까 하필이면 왜 그런 단어를 훔쳤어.

 

그 여자애 소설에서. 탄한테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잘못 생각한 거야. 나는 너조차도 간파했잖아. 네 감정조차도. 탄은 그렇게 말해놓고서 히죽 웃었다.

 

 

*

 

 

내가 라의 작업실에 처음 방문한 이후로, 라의 집보다 작업실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라는 작은 공간을 좋아했고, 나는 불필요한 공간을 반기지 않는 편이었기에 우리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체결된 계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라는 집에 있다가 내가 오면 그제야 나갈 채비를 하고 함께 작업실로 걸었다. 둘도 버티지 못할 만큼 협소한 공간은 아니었다.

별다른 일은 없다. 늘 그랬듯 라는 밀크티를 타고, 나는 주전자를 만지려는 라를 저지하고, 라는 불을 노려보고, 유리컵으로 위장한 컵에 밀크티를 붓고, 그 후에는 책상을 밀어 둔 작은 공간에서 어깨 한쪽을 공유하며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다. 다만 그것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네가 들을 수 없는 걸 내가 들을 수 있다면 어떨 거 같아?

 

라는 종종 이런 물음을 해 오곤 했다.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을 땐 죽음이 푸른색이라고 주장했었다. 순리대로 흘러가는 삶의 일부일 뿐이고, 내가 지금 숲에 소속되어 있다면 죽음 이후에는 다른 범위에 소속되는 것뿐이라고. 아프지도 두렵지도 않을 것이라고. 내가 분해되어서 다른 조각들과 연결되면, 나는 결국 다시 그들의 일부가 되겠지. 그게 다야.

 

그럼, 나는 너를 통해서 그 이야기들을 듣겠지.

두렵지 않아?

뭐가 두려워?

 

반문했다. 내가 두려운 건 그런 게 아니야, 라. 이야기는 끝끝내 내 목울대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냥, 다. 내가 듣는 게 환청이라는 거잖아. 나는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 온 라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나쁜 환청이었으면 네가 나를 여기까지 끌어들였을 리가 없잖아.

라는 눈을 감았다. 나른한 눈 아래 자리한 입술이 붉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라의 목을 쥐고 입술을 맞물렸다. 밀크 티 맛이 났다. 라는 내 몸을 끌어안았다. 라의 손이 내 짧은 머리카락을 헤집는 게 선명했다. 라의 목에서 박동이 불규칙하게 느껴졌다. 틈새로 라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카론, 씻을래? 지금.

같이.

응.

 

우리는 벌거벗은 채 서로의 등을 맞대고 앉았다. 물에 젖은 맨살의 온기는 조금 시큼하고 그보다 더 부드러웠다. 라는 내 손을 자기 쪽으로 느리게 당겨 깍지를 꼈다.

 

카론.

응.

기분이 어때?

 

나는 혹시나 목 깊숙한 곳에서부터 매연이라도 새어나올까 봐 앙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라의 나른한 목소리는 어항 속에 머리를 넣고 말을 한 것처럼 축축하게 울렸다. 라는 계속해서 내 손마디를 더듬었다. 시트러스 같아. 끝이 다소 늘어지는 라의 목소리가 잦아들기 전에 내가 말을 이었다.

피치. 라가 금세 답했다.

라일락.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왠지 그러면 라가 거품처럼 터질 것만 같았다. 대신 라의 뒷통수에 목덜미를 뉘였다. 부드럽고 따끈했다. 있잖아, 라. 네 목소리는 라일락을 닮았잖아. 이름도 라일락에서 따 온 거야?

라는 느슨하게 말했다. 손가락 사이를 누르던 온기가 떨어져나갔다.

카론, 방금은 내가 말한 게 아니야.

 

 

*

 

 

작업실 이 층에 있는 다락으로 카론을 먼저 보냈다. 금세 씻고 나와 축축한 길고 숱 많은 머리는 수건으로 아무리 잘 말려도 함께 자는 데는 불편할 것이었다. 카론의 짧은 머리가 조금은 부러웠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간밤 청소한 이후로 눈이 내리지 않아 깔끔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라.

 

벽난로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작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던 나는 몸을 돌려 탄 쪽을 향했다. 탄은 여느 때처럼 굵은 통나무 하나를 끌어안았다. 위층에 카론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뭐가.

 

탄은 입을 열다가 꾹 다물었다. 그러곤 이내 몸을 온 바닥에 늘어뜨려 푹 퍼졌다. 이럴 때면 평범한 벽난로의 불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다 떨어져 가는 소나무 가지를 탄에게 넘겨주었다. 탄은 나무를 받아먹으며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나 언제 시계에 넣어 줄 건데.

기대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였네.

 

탄은 발끈하다가도 금세 축 쳐졌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나는 탄에게 더 바싹 다가갔다. 탄이 끌어안고 있는 통나무를 들어올리고 일부러 농담을 던졌다.

 

나중에. 왜, 빨리 가고 싶어?

 

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불꽃이 튀어 통나무가 타들어갔다. 나는 한 번 웃어보였다. 네 뜻에 따를게. 속삭였다. 통나무를 벽난로에 내려놓았다.

탄은 일렁이다가 통나무 아래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탄에게 머무른 시선은 이내 거두어졌다. 자고 올게. 벽에 붙은 사다리 앞에 선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고 입을 뻐끔거렸다. 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은 다락방의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 올라오는 건 날이 맑은 날뿐이었기 때문에 한쪽에 가지런히 개어진 이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불을 넓게 폈다. 카론은 이불 위로 올라앉아 내가 움직이는 곳마다 시선을 옮겼다. 다락방을 덮고 있는 비스듬한 지붕의 블라인드를 올렸다. 구름 하나 끼지 않은 깨끗한 하늘이 펼쳐졌다. 바다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달이 보였고 촘촘히 박힌 별들이 쏟아졌다. 불을 끄면 더 반짝이는 항성들이었다.

 

카론.

 

누워 은하수가 가로지르는 밤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잠들지 않았는지 금세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숨을 뱉었다.

 

예쁘지.

응. 카니발 같아.

카니발?

마지막 축제. 단식 기간 전에 마지막으로 즐기는 기간이라서 화려하게 파티를 해. 카니발을, 닮았어.

 

카론은 입술을 닫았다. 드문드문 울리는 말소리가 자꾸만 귓가에서 나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는 겨울의 대삼각형이 카론의 말마따나 마지막인 것처럼 빛났고, 축축한 샴푸 냄새는 곁에서 맴돌았으며, 카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왜 하필 마지막일까.

이 평화는 영영 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순간의 평화는 불화로 번지지 않겠지. 지금의 광경이 망상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지금 바로 앞에 펼쳐진 광경만으로도 충분히 몽롱했다.

 

카론, 자?

아니.

왜 안 자.

그냥.

 

담담한 어조와는 달리 카론은 몸을 뒤척였다. 마치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불안한 아가들이 자꾸만 한 군데에 있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카론의 손을 더듬어 꾹 쥐었다. 무슨 일인데, 카론.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려 카론을 보았다. 카론은 여전히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는 채 입술을 물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카론의 입술을 매만졌다. 카론은 그제야 입술을 물던 이에 힘을 풀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라, 나 이제 떠나야 해.

 

 

*

 

 

언제?

다음 주 중으로.

카론.

나도 알아. 갑작스러운 거. 미안해.

…….

라.

카론,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마지막 말을 내뱉는 라의 목소리가 언뜻 잠겨 있는 것도 같아서, 나는 차마 라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저 그래, 하고 마찬가지로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을 뿐이다. 몇 번이나 연습을 했는데도 목소리가 떨리는 건 고쳐지지 않았다.

 

라는 여느 때처럼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나를 기다렸다. 달이 뜬 늦은 밤이었고, 장소가 문 앞이라는 것만 빼면 달라진 점은 없었다. 라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익숙하게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신발 밑에 풀들이 밟혔다. 처음 만났을 때 꽃을 꺾었다가 혼났던 일이 눈에 선명했다. 이 숲에서는 그게 누구든 내 명령을 따라야 해. 늙은 나뭇잎도 허락을 받고 떨어지고, 호수도 제멋대로 더러워지고 싶을 땐 급하게 나를 불러. 카론, 숲을 침범했으면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지.

 

시간은 빠르고, 언젠간 헤어질 걸 알고 있었다. 인연은 원래 스쳐 지나가는 거니까. 한 시기의 지대한 숨을 차지했더라도 그건 결국 한 시기밖에 되지 않으니까. 생을 하나의 긴 띠로 본다면 겨우 하나의 선분밖에 긋지 못하니까.

라의 손을 잡으면 늘 온기가 머물렀다. 조금 더 오래 머무르는 것도 같았다. 내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 온기는 살아 있을까. 나는 내내 내 손을 그러쥔 라의 손만 뚫어져라 보며 라의 걸음을 따랐다.

 

카론.

 

라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는 호수가 머물렀다. 한밤중이었는데도 그 주변은 이상하게 환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호수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몇백 마리의 반딧불이가 한 번에 꽁짓불을 켠 것 같이 어른거렸다. 라는 내 손을 쥐고 가자는 듯이 눈짓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로 가까이 갈수록 어린아이들이 환청처럼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연인들이 잠자기 전 이불을 덮고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정도의 데시벨로. 그게 마지막 인사라는 듯이 아주 정성스럽고 작게, 듣지 못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들리기를 원하는 정도의.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나무들은 저마다의 가지를 흔들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언뜻 보기에는 평화로웠으나 갑자기 가지를 부러뜨려 나를 덮칠 것만 같은 섬뜩함 또한 때때로 목덜미를 스쳐지나갔다. 분홍색 계열의 꽃이 많았다. 호수의 빛과 더불어 아주 얇은 꽃잎들은, 마치 색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호수로, 들어가 보고 싶어.

 

내가 넋을 놓고 호수를 바라보는 동안, 라는 나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그건 꼭 명왕성 같았다. 탁하지도 밝지도 않은. 라는 말없이 풀밭 한가운데에 앉았다. 라를 따라 앉으면 라는 나를 망연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도 몰랐다.

라는 내 손을 잡아끌더니 만발한 분홍 꽃 중 하나를 꺾었다. 잠시간 라의 미간이 움츠러들었다 금세 퍼졌다. 손끝부터 온기가 퍼졌다. 라는 자신의 무릎에 내 손목을 얹어 두고 꽃을 약지손가락에 묶었다. 축축한 꽃의 줄기가 손가락을 감싸는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라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이름 모를 분홍색 꽃을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꽃이 시들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기억해 달라는 라의 부탁 같기도 했다.

 

 

*

 

 

갈 거야?

 

라가 한참이나 망설이다 물었다.

 

가야지.

 

나는 자꾸 애먼 소리를 흘려내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라는 말이 없었다. 다만 마른 팔을 뻗어 내 손목을 쥐었다. 몇 번이고 고쳐 쥐는 손가락이 유난히 차갑고 아팠다. 분명 맞잡은 손인데, 시계의 철골이 손목을 죄는 것처럼 서늘했다. 라는 자신의 주머니를 오래 뒤적거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멈춰 보려는 것처럼.

 

라는 작고 어둡고 검푸른 손목시계를 손바닥에 놓아두고 뒤로 물러섰다. 나는 불안정하게 회전하면서 붉은 빛을 깜빡이는 시계 다이얼의 행성을 응시했다.

그건 단순한 심장 같기도 했고, 이름 모를 마음 같기도 했고, 치열한 속죄 같기도 했고, 눈을 감았다 뜨면 만발한 연보라색 등나무꽃 덩굴 같기도 했고, 세상의 모두가 사라지고 오로지 둘만 남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자꾸만 윙윙거리며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고, 라의 코랄빛 입술 같기도 했고, 또 작업실에 몸담고 일렁이는 불꽃 같기도 했고……,

 

안녕.

 

라가 뱉어낸 마지막 어절이 라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부드러워서 가장 잔인한, 라. 한참이나 침묵은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서로의 눈이 이미 너무 깊이 닮고 닳아 서로를 만질 수가 없었다. 한 명이라도 손을 뻗으면 얇은 얼음판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이라는 명료한 사실을 알았다.

 

그래.

 

우리는 잘 가라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위로에 불과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라의 명왕성을 닮은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라의 까만 눈은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치밀 만큼이나 혼탁하게 흔들렸다.

내 눈에는 뭐가 담겨 있어, 라? 나는 천천히 고래처럼 가라앉는 네 눈동자를 하염없이 응시하기만 하다가, 하마터면 수류탄 파편 같은 물음을 던질 뻔했어.

 

손목시계를 왼쪽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와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구분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건 라, 네가 말했듯 아주 어렵고도 고결한 일이었지. 기차 시간표를 떠올린 나는 곧 캐리어를 잡아당겼다. 기차역까지는 이 숲에서 나가 택시를 타도 삼십 분이 족히 걸렸다.

 

 

*

 

 

기차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이 기차를 타는 건 숲에서 나온 지 몇 주일 만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작가 취재를 위함이었다. 나는 내가 교정한 보라색 표지의 책을 만지작거렸다.

그 동안 부장은 자리를 옮겼고, 내 노트북은 기어이 고장이 났다. 외장 메모리에도, 클라우드에도 저장해 두지 않은 탓에 소설의 독자는 라 하나로 끝이 났다.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출판되는 건 내 글이 아니라 절제할 줄 아는 작가들의 글이었으니까.

 

종종 라의 생각이 났다. 늘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에서 행성이 회전할 때마다였다. 괜찮다는 듯이 붉은 빛을 깜빡이던 행성이 어제부터 미약하게 불규칙적으로 밝아지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다만 붉은빛이 유독 초라하고 미약할 뿐이다. 약이 다 되었나 싶어 나사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라의 연락처도 받아 놓지 않아 결국엔 그 숲에 다시 한 번 가 봐야 할 빌미가 생긴 셈이었다.

 

진동이 울렸다. 전 부장에게서 메시지가 온 참이었다. 상태바에 뜬 오늘의 뉴스 헤드라인은 댐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행성의 빛이 완전히 꺼진 것도 순간이었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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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 2018-11-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유서의 밤

유서의 밤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자꾸만 혜진의 생각이 났다. 그 애의 때 탄 교복 셔츠, 밑단이 조금 뜯어진 치마, 거듭 비어져 나오던 그림자, 그걸 필사적으로 가리려던 얇은 손가락 마디까지. 나는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았다. 그 애처럼 얇진 않을 것이다. 자잘한 상처들조차 없다. 지금쯤 상처들은 더 커졌을까. 많이 다쳤을까. 아니면….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상처가 닮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걸 없다는 걸 알면서,   부럽다. 어? 너희 부모님은… 유서를 쓰던 혜진은 말을 늘이는 걸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볼펜 딸깍이는 소리도 멈추었다. 그 애의 구겨진 교복 틈으로 오래된 풋사과의 색깔이 보였다. 이따금씩 혜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우리 반에서 혜진을 둘러싼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가십거리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다시 등교한 혜진의 뺨에 나 있는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나는 잠시 혜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교복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쓰고 있던 유서 한귀퉁이를 구겼다가 다시 폈다. 거기서 더 진전될 리가 없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물처럼 출렁였다. 자꾸만 그 애의 갸날픈 몸이 팔레트같이 보였다. 그 애가 힘주어 깨문 입술은 빨간색 물감이 상한 것 같았다.   아주 폭력적인 생각인 것을 알고 있다. 그 애한테도, 나한테도. 그렇지만 그 애보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진의 아빠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손목을 잡아끌었다. 혜진의 앙다문 입술이 그리고 있던 수평이 일그러지는 걸 봤다. 몇 번이나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목에 힘을 주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결국 그 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더디게 나아가는 몸을 재촉했다. 가로등의 전기가 금세 나갈 것만 같이 보였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따라 그림자가 함께 깜빡거렸다. 위태로움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늘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앞만 보기 시작했다. 소리가 자꾸만 귀 안에서 메아리쳤다. 너희 부모님은…. 그 애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적막을 싫어했다. 목소리가 파묻히는 걸 두려워했으며 작은 소음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다른 점이라면 혜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어둡고,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밝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양가 없는 생각들. 전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 나도.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만 살고 싶지? 어. 우리 같이 죽자. 어? 언젠간 외국으로 떠서 안락사 같이 하자고. 그거 비싸잖아. 그러게. …. 그럼 그냥 같이 뛰어내리자. 언제? 스무 살 되기 전에. 그래놓고 안 죽을 거잖아. 유서 오백 장 되는 날 그 때 죽자. 그래. 같이 죽자. 그

  • 윤별
  •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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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재

    * "왁스가 녹으면서 내는 목소리가" - "왁스가 녹으며 내는 소리가" * "라가 그나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눈임에 안도했다." - "라가 그나마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눈임에 안도했다." * 윤별님 반갑습니다. 요즘은 시를 열심히 쓰시는 것 같더군요. 오랜 만에 소설을 올려주셨네요.^^ 숲의 모든 것들의 말과 불인 탄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주인공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떠오르기도 하고 북유럽 신화들이 두서없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문장은 여전히 탄탄하고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는 솜씨 또한 나무랄 곳이 없습니다. 이 작품에는 라와 카론, 두 명의 화자가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이유는 발화하는 두 명의 인물이 너무 비슷해서 누가 카론이고 누가 라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요. 마치 혀 끝에 맴도는 이름처럼 말하려는 뭔가를 자꾸 삼키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조심스러운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도 시와 소설을 동시에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늘 경계하는 부분이기도 하거든요. 이 작품은 긴 시 같아요.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흩어지면서 새로운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가 호출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는 분명 감성의 영역이지만 소설은 조금 달라요. 소설을 쓰는 '나'는 언제나 냉정함과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해요. 그러니까 소설은 이성의 영역에 더 깊이 닿아 있어야 하는 거죠. 누구나 재미있어하고 납득할 수 있거나 낯선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작가는 언제나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소설보다 시의 영역에 가까워 보여요. 카론이 왜 직장내 성추행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지, 언니의 편지로부터 시작되는 라의 내력 같은 것들이 시작되는가 싶다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말거든요. 소설을 쓸 때는 인물을 분명하고 만들고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지를 고민한 다음,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정리하고 나서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쓰기 전의 과정부터가 시와 다른 거죠.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고삼이라 힘드실 텐데, 고생하셨어요. 늘 화이팅 하시길.^^

    • 2018-07-01 23:46:34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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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선생님, 정말 오랜만에 뵈어요! 늘 좋은 평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준비기간이 길었고, 분명 인물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 놓고, 처음과 끝을 정해 두고 썼는데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는 새 감정적이 되었나 봐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이후에 보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인물의 감정과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의 감정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특히 이런 일인칭 소설 같은 경우에는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일인칭으로 전개되다 보니 인물의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야 하는지(감정이 부딪히고 섞이면서 서사가 진행되는 소설이라면 더더욱),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마음을 내비치지 않아야 하는지가 헷갈려요. 어느 정도가 감정이 적절하게 들어갔는지를요. 전작인 여결의 경우에는 여결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감정을 타자적으로 보면서 건조하게 쓸 수 있었지만, 이런 소설에는 어떻게 도입해야 할지 난감해요. 카론이 성추행 자료들을 모으는 것이나, 라의 과서사의 경우에는 짜여 있지만 소설을 가로지르는 중심의 특성상 현재에 집중을 해야 과거에 머무르는 라가 미래를 보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카론에게 이끌리는 게 더 부각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단편(이라고 생각하고 썼지만 초고를 마치고 보니 원고지 분량이 넘어서 슬펐던)의 경우에는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은 더 고려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라와 카론의 각자 살아온 길이 그들의 감정을 구축하고 그게 둘 사이의 다름을 만들어내고 그 다름이 둘의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걸 보면, 그리고 둘의 전체 서사를 간단하게 정리한 설정집이 이 소설의 분량을 몇 배나 넘는 걸 보면 애당초 단편으로 쓸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차라리 분량을 신경쓰지 말아야 할까도 싶고요. 아, 그리고 선생님께서 월평으로 남겨주셨듯 체력이 중요하다는 게 피부로 느껴져요. 오타도 못 잡고 불안정한 연결새들이 조금 체력을 회복하고 나서야 보이네요. 6월에 굳이 내려고 했던 건 사실 구상하고 나서 계속 이 친구들에게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고민했는데, 꿈에 얘네 둘이 나와서 언제 쓸 거냐고 잔소리를 (...) 들었거든요. 완성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간만에 소설 쓰는 거 정말 즐거웠어요. 더 좋은 작품으로 언젠가 퇴고해서 들고오겠습니다.

      • 2018-07-02 13:59:02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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