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구두

  • 작성자 저을새
  • 작성일 2019-02-21
  • 조회수 427

#1

나를 상담해주셨던 상담사분이 그랬다.

상담이라는 것은 내담자가 신었던 구두를 신고

직접 걸어보는 것이라고,

 

그게 얼마나 불편한지에 대해 그 입장이 되어 느끼고 함께 걷고

그리고 상담이 끝났을 때 미련없이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공감은 그런 것이라고,

 

나는 그녀에게 그 구두가 다 낡아지고 헤져서

그러다 넘어지면 상처는 어쩔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주시했다.

 

 

#2

나는 그녀가 부디 넘어지지 않기를 절실히 기도하며

그녀가 원하는대로 순순히 구두를 벗어 건네주었다.

꿈틀, 눈썹이 뒤틀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정말 아팠겠구나,

그녀는 내가 준 구두를 신고서 사정없이 비틀거렸다.

내 구두는 정말 낡고 헤진 것임이 틀림없어지고 말았다.

 

 

#3

그녀는 내가 찾아올 때마다 한결같이 내 구두를 신어보려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신어봐놓고 뭘 자꾸 신어보냐 으름장을 놓았고

고집을 부려 구두를 신은 그녀는 그때처럼 중심을 잡지 못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내 구두를 조심히 벗어야만 했다.

내 소중하지 못한 구두를 그녀가 언제나 탐내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의 아킬레스건이 걱정돼 미칠 것 같았다.

 

 

#4

하필 그녀가 없었을 적에 험한길을 만나 그녀가 아껴준

내 낡아빠진 구두가 충격을 받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두려웠던 나는 일방적으로 상담을 끝내고자 했다.

 

구두가 완전히 부서졌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새 구두를 샀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젠 걸어도 걸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걱정말라고,

 

그녀는 다행이라며 웃었고 새 구두를 자랑하러 와달라고 했다.

나는 매몰차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상담사는 아쉬운 듯 오지않을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금이 간 액정 사이에 남아있는 그녀의 이름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발가락 마디 깊숙한 곳에서

통증이 차올라 머리 끝에서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5

나를, 또 그녀를 반강제로 춤추게 하던 원흉이 사라졌는데

눈물만 나는 것은 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국

까마득한 슬픔이 나를 집어삼킴에 꼼짝없이 당하기로 했다.

 

아픔을 줄여주고 몽롱한 기쁨을 선사하는 작은 사탕들은

이참에 그녀를 만날 기회들과 함께 저 어디로 던져버렸다.

내겐 사탕도 없고 그녀도 없고 낡고 헤진 구두조차도 없었다.

 

그냥, 사랑받고 싶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것 뿐이었는데,

누군가가 있다던 하나님은 날 너무나 미워하는 것 같았다.

내겐 그를 믿을 힘마저도..

 

그래, 그냥 이렇게 나도 없어져 버리길.

 

 

#6

그녀도 분명 한 때는 헤진 신발을 신고 걸어야만 했을 것이다.

한참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일어서 걸어가는 다른이를 보니

그 또한 굉장히 낡아빠져 닳은 운동화를 신고 걸어간다.

 

낡은 신발이 부끄러워 밑을 쳐다보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호호 입김까지 불어가며 반질반질하게 구두를 닦는 이까지,

정신을 차리니 세상엔 굉장히 많은 종류의 신들이 있었다.

 

 

#7

나는 왜 그녀가 아픈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불안한 자아를

구두에 빗대는 것인지 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냥 내가 우습게 걸어다니는 것을 구두 탓으로 돌려준 것이다.

 

나를 위해 깃발처럼 정처없이 휘날렸던 그녀를 떠올렸다.

다 헤진 슬리퍼를 신고도 잘만 걸어다니는 사람 앞에서

웬 반짝거리는 유리구두를 신은 여자가 풀썩 넘어져버린다.

 

 

#8

멍하니 서있는 나에게 낡은 운동화를 신은 남자가 다가와

무어라 말하더니 무엇인가를 건네주었다.

내 부서진 구두의 한 조각이었다. 한쪽 끝이 아주 날카로웠다.

 

나는 숨을 삼키며 그대로 손바닥을 오므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내었다. 남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새로운 신발을 함께 찾아주겠다며 기꺼이 등을 내주었다.

 

나는 혼자서 걸을 수 있었지만 그의 등에 업히길 택했다.

따뜻한 타인의 체온은 참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가

한 두걸음 쯤 걸었을 때, 나는 그만 아이처럼 쏟아지듯 울었다.

 

 

#9

남자는 우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나는 그 눈빛에서 단숨에 그녀를 찾고 놀라 눈을 훤히 떴다.

그는 대신에 구두 말고 다른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자에게 줄 것이 없다고 말했다. 구두도, 무엇도 없다고.

남자는 말했다. 내가 찾아줄테니 업혀 있기만 하라고,

고개가 절로 주억거렸다. 내겐 그의 등이 절실했다.

 

나는 이대로 그가 짊어지는 짐이 되기를 모른 체 하기로 했다.

 

 

#10

아마도 그의 머리카락에서 났던 샴푸 냄새는 색깔로 표현하면

초록색과 연두색의 중간 쯤이다. 풀내음처럼 잔잔한 울림은

그의 등에 얌전히 업혀있던 나에게 신선한 자극 그 자체였다.

 

나는 오랫동안 그에게 기대어 따스함을 만끽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가끔은 주제넘게 더 편한 자세로 고쳐앉았다.

그가 땀을 흘리며 휘청거린대도 우리는 하나였다.

 

 

#11

그가 아파보이기 시작한 건 그때 쯤이었을 것 같다.

나는 평소처럼 그의 왼쪽 어깨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고,

전해지는 평소같지 않게 뜨거운 그의 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디 아파요? 내가 물었다.

전혀요.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남자가 나로 인해 아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12

남자는 내가 그의 등 뒤에서 흘리는 눈물을 고스란히 받았다.

기약없이, 정처없이 나를 업고 떠돌아다녔던 그가 대견했고

축축해지는 등에도 정신없이 구두를 찾는데에 열중한 남자를

 

곧 안되어 놓아주어야 할 것임에

이 개떡같은 운명에 또 한 번 놀아졌단 것에,

아, 뭐 이젠 딱히 분개하고 노여워할 힘도 나지 않았다.

 

 

#13

아니 하나님, 좀요. 왜 나를 죽이지 않으세요

내가 죽은 눈을 하게 만들고는

왜 나를 이렇게 살려만 두세요,

 

하나님은 무례한 내 질문에 대답이 없었다.

당연하지, 하나님은 인간의 괴로움이 낳은 망상이니까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그렇게 나를 위로해주었다.

 

 

#14

나는 그의 가쁜 숨결과 젖은 머릿결을 어루만져주었다.

땀을 닦아주고 손으로 부채질도 해 보았다.

그는 어느새 걸음을 멈춘 채로 더 미동이 없었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날 업고서 걸어가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내려야만 했다,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나는 그의 품 속에서 그렇게나 행복해 놓고서

남자의 마지막 작별인사에 응답하지 않았다.

인사하는 순간 잡아둔 그의 온기가 다 날아갈까봐서,

 

 

#15

나는 내 망할 구두찌꺼기의 날선 끝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니 뭉게구름은 둥글다.

지구도 둥글고 내 얼굴도 둥글다.

 

나는 이 둥그런 것들을 전부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극심한 충동에 사로잡혀 온몸을 둥글게 말아올렸다.

세모로, 네모로, 안되겠으면 하트로라도 조각내고 싶었다.

 

 

#16

하나님 제발, 제발 제발요.

때론 부르짖고 원망할 상대가 있음에

굉장한 감격을 느꼈다. 그는 어차피 대답하지 않는다.

 

신은 무슨 구두를 신을까, 혹시 귀신처럼 발이 없나

나는 나를 완벽하게 만드는 내 영원한 숙적편에 서서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상상력에 감탄했다. 신은 신발이 많아야만 했다.

 

70억개의 신발을 신고 각자 앞에 나타나야 하는 그를 떠올렸다.

아, 나는 가상의 존재와 처음으로 이어진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다급할 때 외치는 그도 남자의 등에 기대고만 싶었던 나만큼이나 선택권이 없었다.

 

 

#17

신발없이 걷는 것은 처음엔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자갈길을 만나기라도 하면 최악이였고 비가오면 발톱사이에

진흙이 끼는 것을 막을 방도가 도무지 없었다.

 

그러나 낡은 구두를 신고 어기적 거렸던 지난 날에 비해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사방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하물며 신발이 축축해지는 일도, 구두때문에 삐끗거릴 일도

 

과연 맨발의 청춘이 아닌가,

 

 

#18

나에겐 구두도, 상담사도, 사탕도, 남자도, 신도 없게 되었으나

아무것도 없다는 건 무엇이라도 생길 것임을 시사했다.

가다가 가다가 누군가 나에게 발이 예쁘다는 말을 던졌다.

 

나는 그의 낡은 정장구두 뿐만 아니라 올곧은 자세까지를 칭찬해 주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게 진짜 사탕을 주었다.

그가 준 사탕은 먹어도 몽롱해지지 않았으나 분명한 기쁨을 선사했다.

 

슬픔을 잠재우는 것보다 기쁨을 일깨우는 것이 더 행복하다,

나는 잊고 있었던 간질거리는 감정을 되찾았다.

이 기쁨을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19

인간관계라는 것은 본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며

또한 나는 그러한 진리를 부서진 구두 조각에서 발견했다.

뾰족한 끝의 반댓머리가 완만한 두개의 언덕을 이루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언젠가 누가 내게 보여주었던 눈을 하고서

구두조각이 부서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한 순간 조각에 그늘이 졌다.

 

 

#20

변색한 조각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오랜만이에요, 내가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나와 내 구두조각을 가둔 그의 그림자가 이따금씩 들썩거릴 뿐이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의 딱 벌어진 어깨가

힘없이 축 쳐져 있는 것에 나는 어쩐지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무릎에 힘을 줘 일어서니 그의 그림자로부터 쉽게 벗어나졌다.

 

적나라하게 닿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 인상을 찡그렸다.

코 끝이 찡한게 재채기라도 하려고 그러는 건가 했지만

재채기는 나오지 않고 웬 엄한 것만 흘러 볼을 타고 흩어졌다.

 

나는 순간 간직해온 이 구두 조각이 어떤 모양인지 깨달았다.

#fin.

저을새
저을새

추천 콘텐츠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선형

    안녕하세요, 저을새 님. 반갑습니다. 재밌는 형식의 소설이네요. "구두"라는 상징적 소재를 중심으로 다소 추상적인 에피소드가 벌어지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곳곳에 펼쳐진 시적 문장과 씬(#) 사이의 긴장감 때문에 매혹되면서 읽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구두에 붙들린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구두를 벗어나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곳곳에 신(구두)와 신(神)에 대한 사유를 발생시키는 언어유희 또한 재밌네요. "나"는 구두 조각으로부터 헤어나게 되었을까요? 조금은 자신의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되었을까요? 이 소설은 충분한 답을 내놓지는 않지만 그 과정을 여러 은유적인 문장으로 끈질기게 사유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주제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골격은 긴장감 있게 서술되었지만 소설의 다른 제반 요소들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어요. "그"와 "상담사"라는 인물의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발생시켜 보시면, 또 나의 고통의 계기를 구체적인 에피소드에서 길어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 소설이 현실 공간에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어요. 다음 소설 기대할게요.

    • 2019-03-10 15:50:20
    선형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