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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바다 안에서

  • 작성자 멜론소다
  • 작성일 2019-05-13
  • 조회수 468

커다랗고 커다란 공간, 짠 물이 쉴새없이 모래사장으로 밀려와 부서지고, 그 물에 짓눌려 힘겨운 숨을 내쉬는. 아주 작은 바다 안에서 윤은 꿈을 꾸고 있었다. 몸을 옭아오는 부드러운 파도를 머리 끝까지 덮은 채.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멎는 순간이면 윤은 파도였던 것을 걷어내고, 자신의 옆에서 깊은 잠을 자는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바다였던 공간은 어느새 침대로 바뀌고 몸을 짓누르던 파도도 얇은 이불이 되어 다리 쪽에서 뒹굴고 있었다. 윤은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 이제 아침이야. 웅얼거리는 잠꼬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은 소년을 거세게 흔들었다. 마침내 소년이 졸린 눈을 한 채 몸을 일으키면. 윤은 현아, 라며 소년의 이름을 거친 목소리로 불렀다. 아직 바다에 짓눌린 것 같아. 혀 끝에 맴도는 짠 물을 삼키며 윤은 말했다.

바다? 머그잔에 찬 물을 부으며 현은 물었다. 그래, 바다. 윤의 건조한 목소리가 공기에 부딪혔다. 현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끼익 소리를 내었다. 윤이 바다에 대해 언급한 건 오늘로 일주일 째. 본래 윤과 현은 바다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바다는 그저 앨범에 몇 장 끼어있는 사진들 중, 예쁜 배경으로 기억되는 몇 개의 장소일 뿐이었다. 그런 윤이 바다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건 일주일 전부터로, 늘 꿈에서 깨어날 때면 바다에 대해 말을 늘어놓았다.

"파도가 일렁이며 모래사장에 부딪히면 하얀 물보라가 일어나면서 부서져."

"꿈에서, 아니면 현실로?"

"몰라."

꿈을 꾸는 듯이 몽롱한 말투로 점점 변해가며. 윤은 답지 않게 탁자에 엎드리며 손가락으로 툭툭 탁자 위를 두드렸다. 눈만 뜨면 사라지는 상상처럼 윤의 바다도 꿈에서 깨어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익숙한 짠 냄새도, 부서지는 하얀 파도도, 전부 익숙한데 어디서 보았는지 모를 풍경이었다.

"특이한 건 침대에서 자야만 그 꿈을 꿔."

"그럼 소파에서 잘래?"

"됐어, 악몽도 아니고."

바다, 무한한 공간 속에 파묻히는 꿈은 분명 악몽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윤은 바닷속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볼 때면 어쩐지 아련하고도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꿈에서 깨어나도 계속 바닷물에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라. 어찌보면 악몽이었지만 윤은 그 사실을 부정했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악몽이 아니라 믿고 있는 듯 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아, 윤은 작은 탄식을 흘리며 눈을 떴다. 하늘과 바다가 구분 되지 않을 정도로 푸른 세상 속에서. 윤은 천천히 어딘가에 잠겨가고 있었다. 청량한 파도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늘에 잠기는 건지 바다에 잠기는 건지도 모른 채. 그저 입 속에 맴도는 짠 맛으로 바다라는 걸 짐작할 뿐이었다. 분명 바닷속에 잠겨있는데도 눈 앞에 펼쳐진 모래사장을, 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파도가 하얗게 일렁이다, 모래를 휩쓸다가 부딪혀 부서졌다. 윤의 입가에서도 파도가 작게 일렁일 때. 그제야 윤은 자신이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도가 밀려와, 불분명한 발음이 파도에 휩쓸렸다. 멍한 시선 속에서 불쑥 손 하나가 나와 윤의 손목을 잡았다. 미지근한, 결코 따뜻하다고 할 수 없는 온기가 전해졌다. 현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와 엇비슷하게 들려왔지만 윤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련하고 그리운 기분에 파묻혀, 조금 더 머무르고 싶어서 파도를 손에 쥐었지만. 가느다랗게 눈을 뜨면,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과 함께 시선 끝에서 자신의 손이 이불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너 내 이름 부르고 있던 건 아냐?"

"내가?"

개소리야, 라며 윤은 기지개를 하듯 팔을 쭉 뻗었다. 손가락이 꺾이며 뚝 하는 소리를 내었다. 현은 여전히 졸음에 젖은 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나 이름을 불렀는지 몰라. 파도가, 파도가 온다며 그렇게 말했어. 여전히 파도같은 이불에 휘감긴 채 윤은 정말? 이라며 한번 더 되물었다.

"거짓말 안 해."

"전과가 있잖아, 너."

"그건 그렇고, 바다 갈래?"

바다? 윤은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파도가 일렁이듯. 예쁘게 웃은 현은 대답 없이 윤의 손목을 잡았다. 미지근한 온기에 윤은 멍하니 그 손에 이끌렸다.

바다는 고요했다. 여름이라기에는 아직 쌀쌀한 밤이었던지라, 바닷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이 한산했다. 추워? 현의 목소리에 윤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얇은 가디건이 바람에 흔들렸다. 윤은 이끌리듯 부서지는 파도에 다가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달빛에 반짝거리며, 남색으로 작게 일렁이고 있었다.

"꿈이랑 완전 달라."

"실망했어?"

"별로."

여전히 윤의 시선은 파도를 쫓고 있었다. 예쁘게 일렁이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끝을. 현은 뒤에서 윤을 감싸안으며 물었다. 파도는, 어떤 느낌이야? 윤은 꿈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르겠어. 환상적인 느낌보다는, 그저 꿈처럼 그립고 아련했다. 그 점만 빼면 전부 다 달랐다. 그래도 윤은 여전히 파도를 바라보았다.

"현아."

"왜?"

"내가 네 이름 불렀다고 했지, 파도가 온다며."

바다에 간 적 있어? 라고 윤은 물었다. 바닷물에 삼켜진 듯 녹아내린 발음에, 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전에 바다에 갔다가, 어떤 애 하나가 튜브에 바람 빠지는 걸 봤거든. 그때 내가 걔를 구해줬었어."

"언제? 어떻게 구해줬는데?"

"중학교 1학년? 급한대로 내 튜브 줬어, 난 구명조끼 갖고 있었으니까."

바닷바람이 물결을 간질였다. 달빛이 멍하니 부서지는 파도를 비추었다. 어느새 자신의 손 끝을 건드리는 미지근한 온기를 움켜잡으며. 윤은 작게 현의 이름을 불렀다.

 

또 꿈이구나, 라고 생각한 것은 시야 속에 펼쳐진 푸른 색 탓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저번 꿈에서 이어지는지. 작은 손이 자신을 잡고 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혀에 맴도는 맛이 짰다. 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미지근한 온기에 이끌려 천천히 바다 밖으로 이끌렸다. 선연한 붉은 빛이 수면 밖으로 나온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저 멀리, 새하얗게 빛나는 모래사장 위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윤은 미소지었다.

"바다, 좋아해?"

바람에 실려 익숙하지만 어딘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손목을 잡았던 온기는 사라져있었다. 대신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서있는 두 남자아이가. 한 명은 구명조끼를 입고, 한 명은 바람 빠진 튜브를 걸친 채 천진난만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게 보였다. 윤은 어딘가 익숙한 그 풍경에 눈살을 찌푸리며 둘에게로 다가갔다. 아이들은 주변은 보이지 않고 자신들만 존재한다는 듯. 물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것도 모른 채 예쁘게 웃고 있었다.

"바다는 별로 안 좋아해, 파도는 좋아하지만. 아무튼 구해줘서 고마워."

"아 맞다. 그래서 너 이름이 뭐야? 나는……."

파도소리가 둘의 말을 묻어버렸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시야가 먹혀가며. 윤은 또다시, 거대한 공간에 잠겨드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꿈에서 깨어났다는 걸 느꼈을 때는 방 안이 밝아져 있었다. 몸을 감싸안는 파도, 이불을 떨쳐내며 윤은 무의식적으로 옆을 더듬었다. 조금 꺼진 침대 시트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윤은 몸을 일으켜 현을 불렀다. 건조한 공기에 느릿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언제 일어났어?"

"방금. 지금 몇시야?"

"9시, 오늘 어차피 일요일이잖아."

알고 있어, 괜히 손가락을 꺾어 소리를 내며 윤은 중얼거리듯 답했다. 현은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갑작스런 환한 빛에 윤은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오늘도 그 꿈 꿨어? 바다 나오는 꿈."

"꿨는데, 기억은 잘 안 나."

깨어났을 때만 해도 선명했던 꿈은 어느새 녹아 없어져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어렴풋이 미지근한 온기를 느꼈던 것을 기억하며 윤은 느리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잡았던 그 어린 손처럼, 현의 손목을 약하게 잡았다.

"너랑 나랑 몸 온도가 비슷한가, 별로 안 따뜻해."

"왜, 꿈에서 내가 나왔어?"

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귀에서 파도소리가 메아리친 탓도 있었고, 현의 목소리가 앳된 누군가의 목소리와 겹쳐 들린 탓도 있었다.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윤은 입을 열었다.

"이제 이곳이 내 바다인가봐."

부드러운 이불에, 파도에 몸을 맡기고. 누구도 기억 못하는 그 옛날처럼 바닷속에서 미지근한 온기를 움켜잡고. 윤은 현의 시선을 마주본 채 작게 말했다, 우리의 바다가 이곳에 있어. 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윤을 내려보았다. 윤은 여전히 꿈에 녹은 듯한 눈빛으로 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현은 살짝 미소짓곤 윤의 말을 받았다. 그래, 이곳은 우리의 바다야. 아주 작고 커다란, 우리만의 바다…….

 

윤은 현의 가슴에 가만히 고개를 파묻었다. 감은 눈 사이로 파도가 일렁였다. 윤은 커다란 바닷속에 잠들어있었다. 현아, 하고 윤은 나지막히 이름을 불렀다. 현은 말 없이 윤의 손목을 잡았다.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가슴에 부딪혔다. 윤아. 겨우 불린 제 이름에 윤은 눈을 떴다. 현은 윤을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여긴 우리뿐이야, 넌 여기 있어, 나도 여기 있어. 몸을 휘감은 이불이 크게 일렁였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 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래 이곳은 바다야, 너와 나만의 작은 바다. 부서질 듯한 파도가 현의 입가에서 작게 일렁였다.

미지근한 온기 속에서. 그 작고 커다란 둘만의 바다 속에서. 둘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조용히 고른 숨소리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래, 우리의 작은 바다 안에서. 그 부서지는 파도 끝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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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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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론소다
  •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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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형

    안녕하세요, 멜론소다 님. 이번에도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의 소설을 보여주었네요. 윤과 현의 "작은 바다", 윤과 현이 머무르는 우정의, 사랑의 공동체인 이 작은 바다를 감각화하는 솜씨는 단연 빼어나요. 잔잔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글입니다. 항상 이러한 작은 공간에 깃드는 두 인물의 연대를 환상적인 기법으로 묘사하는데, 공간의 실감, 바다의 이미지를 독자가 함께 감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쉬웠던 점은 글이 소품 같고, 중간부에 드러난 에피소드(튜브와 구명조끼)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어요. 또 항상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만큼 두 인물 사이의 갈등과 균열을 묘사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두 인물 간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쪽으로 플롯을 확장한다면 소설이 "소설적"으로 더 잘 기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성도 있는 꽁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화들도 리듬감 있고 따뜻하기도 한데, 중간부의 실제로 바다를 간 장면을 더 늘려 써보는 건 어떨까요? 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2019-06-11 05:05:08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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