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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의 미소

  • 작성자 rlawjd
  • 작성일 2019-11-30
  • 조회수 809

은하의 미소

 

 

더 낯설 것도 없는 이별이 더 멀어질 것도 없는 거리에 눈물을 내렸다. 눈물은 바다가 되고 바다는 육지를 가르고, 그렇게 잠깐 우리였던 너와 나를 갈라놓는다. 너와 나는 하나의 합성어로 존재할 수 없었다. 너와 나는 너와 나였다. 너와 나 사이에는 접속사와 적당한 띄어 씀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가장 가까운 너와 나의 거리였다. 너는 내 최초의 바다였다.

 

우연히 열어본 고등학생 때의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 바다에 가 본적이 없었다. 열여덟의 바다는 물질보다는 관념에 가까웠고, 기껏해야 파도가 부딪히는 이미지에 불과했다. 지금 내게 바다는 다만 물비린내 나는 쓰레기로 점철된 오물 정도의 의미다. 그럼에도 최초의 바다 같은 말은 내 마음을 달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직접 쓴 건지 어디서 베낀 건지 출처가 불확실한 문장에서도 너라는 형상은 생생했다. 형상이 실체로 굳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문장 하나에 온 시절이 기다렸다는 듯 따뜻하게 밀려왔다.

 

먼 곳에서 도착한 마음이었다. 부지런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다 결국 제 명을 다해버린 마음, 물살과 역풍에 돌아선 마음, 국경을 초월하지 못한 마음, 고작 시간에 져버린 마음, 그 뭉텅이의 마음이 다시 내게로 왔다. 시간은 쉽게 마음을 무력화했고, 마음도 시간을 단숨에 거스른다. 나는 내 입장을 분명히 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망설이는 순간, 아직도 너를 떠올리는 건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였다, 같은 문장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너는 구태여 잠깐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왔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너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이 너를 했다. 너는 내가 열외된 문장에서 가장 생생했다. 미소가 스르르 번졌다. 하지만 생각은 밀려오는 피곤에 의해 이내 뚝 끊겼고, 갈 길 잃은 생각은 천천히 잠에 스며들었다. 나는 새카만 바다 속에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은 바다여서 바다 밖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누군가의 뒷다리를 잡고 육지로 올라온다. 바다에서는 소음으로만 통하던 것이 육지에서는 소리가 되었다. 나는 아주 초라한 행색으로 너를 만난다. 인사한다. 너는 나와 달리 아주 단정하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너는 도로 가버린다. 바다로 돌아갈 것인가, 아무도 모르는 섬에 남을 것인가, 나는 고민한다. 너는 떠났다, 떠난다, 떠날 것이다, 시간의 불연속성 속에서 다시 아침이 되었다. 알람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네 시간밖에 못잔 터라 눈꺼풀이 계속 내려앉았다. 지하철을 타고 백화점에 도착해 환복까지 마치자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백화점의 지하통로를 통과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건 학습된 습관이었다. 나의 상념이나 감정은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다는 불안에 사라진지 오래다. 이곳에 들어서면 일단 온갖 잡다한 것들은 꾸역꾸역 밀어넣어야만 했다. 평소처럼 잠을 쫓아내며 오픈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떤 생각은 실밥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자르면 이어진 실 전체가 풀릴 것 같았고 그냥 두자니 튀어나온 모양새가 거슬렸다. 급기야 손님이 왔는데도 미처 상품 제안도 못한 채 어버버거렸다. 3개월 동안 매일 말하던 제품정보가 갑자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매니저 언니가 대신 고객응대를 하고 나서 왜 그러냐고 똑바로 좀 하라고 꾸짖었다. 나는 죄송하다고, 잠을 못자서 그런 것 같다고, 주의하겠다고 대답했다. 매니저 언니는 뭘 새삼스럽게, 우리가 못자는 게 뭐 하루 이틀이냐며, 좀 잘 하자고 했다. 나는 이내 고객님이 들어오시면 최선으로 모시겠다는 산뜻한 포즈를 취했다. 우리는 지하부터 12층까지 조각나고 흩어지고 파편화된 채 웃음을 상비하고 백화점을 품위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들어 온지도 벌써 3개월이 되었고, 어느 정도 일이 익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긴장되었다.

 

점심시간에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한참을 생각했다. 매니큐어 냄새가 혀에 닿아 쓰게 번졌다. 그러니까 이 생각은 전화를 할까 말까가 아닌 어떻게 물어볼까에 대한 생각이었다. 고등학교 동창 중 유일하게 연락이 되는 은주에게 전화해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 넌지시 윤에 대해 물었다. 은주와 통화하느라 20분도 안 되는 점심시간을 날렸다. 나는 주린 배를 안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갑자기 향수에 젖어 옛 친구가 그리울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다 만날 수도 있는 거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깨가 반응적으로 달싹였다. 윤의 순조로운 근황을 들었을 뿐인데 나는 어딘가 공허하게 들떴다. 나는 정신 차려,를 낮게 읊조렸다. 통 내려올 기미가 안 보이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짐이 쌓여있는 비상계단을 통해 숨차도록 올라갔다.

 

*

 

그해 여름은 유독 일찍 찾아와 오래 머물다 갔다.

 

지구의 지각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그래서 모두가 한순간 어디론가 말려들어갈 듯, 지금 당장 모든 것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세상은 어딘가 모를 의뭉스러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여름은 식중독을 만들고, 독거노인 사망률을 높이고, 동시에 휴가를 만들고, 축제를 만들고, 차갑고 건조한 실내의 온도만큼 바깥의 기온은 극값으로 치솟았다. 서로가 서로의 여름을 흡수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여름을 방출했다. 그것이 여름의 방식이었다.

 

속이 안 좋아 새 학기에 학교를 며칠 빠졌을 뿐인데 교실 안은 이미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은근한 분위기가 형성되어있었다. 친구라는 관계는 꽉 잡으면 부서지고 그냥 두면 눅눅해졌다. 나는 학기 중에서야 지난 해 같은 반이었던 은주와 겨우 어울릴 수 있었다. 오직 둘일 때만 피어나는 친밀감이 있었고, 우리는 피차 절박함을 나눠가지며 친구가 되었다. 그 사이에도 교실 밖으로는 무언가 분주히 들끓다 사라졌다. 새로운 것은 매일 쏟아졌기에 새로운 것은 매일 밀려났다.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끝이 나지 않는 인터넷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다 휴대폰을 해지했다. 휴대폰이 없어도 컴퓨터로 충분히 인터넷 접속이나 메신저가 가능했지만, 나는 그 작은 기기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간 권태로웠고, 권태로움만큼 편안했다. 자주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으로 살았고, 실제로도 물건을 계속 잃어버렸다. 가진 건 없어도 잃어버릴 건 많았다. 귀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잃어버리고 아차, 싶은 물건들, 나는 잃어버림으로써 한때 소유했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무언가를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날도 여전했다. 그날이 그날이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아침이 없었고, 오늘과 내일 사이에는 밤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날과 날이 없었다. 정수리를 조준하는 햇빛 아래서 우리는 달리기를 했다. 나는 행렬에 뒤처진 채 설렁설렁 뛰었다. 뒤쪽에서는 벌써 한 바퀴를 더 달린 학생들의 발자국소리가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나는 고작 체육시간의 달리기 따위에 열과 성을 쏟는 애들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의 미세한 차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분명해졌다. 체육선생님은 나더러 지구력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이 세상에는 굳이 내가 견지해 마땅한 것이 없었다. 부족하다는 말이 조금 억울했지만, 그 말에 괜히 오기가 생겨 원래도 미미하던 열정이 더 싸늘하게 식었다. 저렇게 숨차도록 뛰는 것이 고작 체육 수행평가 점수 때문이라면 그건 너무 시시한 일이었다. 나는 중요한 것을 꼭 품고 있는 마음으로 달렸다. 천천히 뛰는데도 목이 아프고 귀가 먹먹했다. 답답했다. 견딜 수 없어서 숨을 더 깊게 들이쉬었다, 얕게 다시 뱉었다. 겨우 짜릿했다.

 

“힘내, 솔아.”

 

매미의 울음소리 사이로 흘러들어온 낯선 소리, 나는 내 이름을 그런 식으로 들어보는 것이 오랜만이라 놀랐다. 그 대상이 윤이라서 더 놀랐다. 윤과는 같은 반이지만 말 한 번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윤을 알았지만, 윤이 나를 알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는 응, 이라고 작게 웅얼거렸다. 물론 이 작은 소리를 저만치나 뛰어간 윤이 들었을 리는 없었다. 앞질러가는 윤을 보면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먼지가 껴 뿌연 안경 너머로 윤이 조금씩 멀어져갔다.

 

윤은 느닷없이 힘내라면서 별안간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니다, 윤은 계속 뛰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늦게 뛰었기에 윤이 갑자기 뛰어가는 것으로 보였을 뿐이다. 근데 윤은 왜 갑자기 내게 힘내라고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에게, 뒤처지는 친구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건 아무 마음 없이, 생각조차 없이 건넬 수 있는 의례적인 말이었다. 그 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윤의 말은 의외의 지점에서 꺾였다. 그 말은 빛을 받아 투명하게 휘였다. 나는 그 말이 특별한 곳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그 미세한 어긋남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인류애를, 그 인류애를 기반으로 한 이타심을, 이타심이 품고 있는 이기심을, 세상의 울퉁불퉁함을, 그에 반해 한없이 나약한 말의 유연성을, 휘발성을, 빛의 굴절을 그때는 몰랐다. 몰랐다, 그랬기에 생길 수 있는 마음이었다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 믿음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전까지 윤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의미 없음마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윤이 내게 힘내라고 했다면,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면, 울림의 파동이 내게 떨어졌다면, 그래서 내가 떨렸다면, 이젠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내가 고고히 쌓아올린 견고한 표면을 뚫고, 사뿐히 이면에 정착했다. 텅 빈 마음에, 늘 비어있어서 비어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곳이 울룩불룩 피어났다.

 

나는 적당히 뛰다가 행렬에 섞여들었다. 체육선생님은 다섯 바퀴를 뛰라고 했지만 눈치껏 네 바퀴만 돌다 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윤에게 말을 걸고 싶다거나 윤이 보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내 몸의 작은 신경 하나가 툭 튀어나와 윤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떤 마음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그 자리로 새살이 차오르는 것을, 그래서 낯선 이물감이 물컹하게 스미는 것을, 그 부자연스러움을 나는 느꼈고, 최대한 자연스레 행동했다. 윤은 보틀에 담은 보리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윤을 한참 보다가 내가 윤을 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윤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7교시는 물리였다. 전 수업이 체육이었던지라 대부분 졸고 있었다. 나도 밀려오는 잠을 굳이 참지 않고 꾸벅꾸벅 졸았다. 반수면 상태에서 선생님의 말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여러 가지 답이 있을 때는 가급적 단순한 답을 찾는 것이 과학의 원칙이에요, 그럼 192페이지 개념활용문제 살펴볼까요?”

 

나는 고개를 들어 윤을 찾았다. 윤은 교과서에 필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교과서에는 익숙한 우주 사진이 실려 있었다. 138억년 전, 하나의 점이 아주 높은 온도와 밀도에서 이유 없는 대폭발을 일으켜 시간과 공간, 에너지가 만들어졌다. 대우주의 탄생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나는 그 새삼스러운 우주의 기원이 마음에 들었다. 새까만 우주 사진 아래에 윤, 이라고 적었다. 쓰고 누가 볼세라 까만 볼펜으로 동그랗게 말아놓았다. 볼록한 동그라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백광년을 헤쳐 온 마음이 생겨난 것 같았다. 머리가 멍멍해났다.

복도에서는 한참 봉사동아리 추가모집을 하고 있었다. 봉사인원 충원을 위해 내려온 공고였다. 그 앞을 지나가다가 문득 윤이 떠올랐다. 나는 주위를 살피고 재빨리 신청서를 뽑아들었다.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원래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다짐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일을 잘했다. 어떤 본성적인 마음이 피어올 때마다 나는 늘 익숙한 방식으로 합리화를 했다. 그것이 나름 악을 써서 얻어낸 세상과의 최종타협이었다. 세상이 무심하게 허락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나는 얼른 신청서를 가방에 넣고 학교를 나왔다.

 

길거리에서는 온갖 것들이 여름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여름은 특히나 몸이 도드라지는 계절이었고, 그래서 온갖 예쁜 것들이 앞 다투어 돋아나는 계절이었다. 길을 걷다보면 흔히 보이는 헬스장 전단지와 성형외과 광고, 지방흡입시술 팻말, 그 앞을 지키는 치열이 고르고 몸매가 고르고, 옷의 조화가 고른, 등신대의 하얀 여자들을 지나치면서 나는 나의 존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모든 환함이 내게는 외면 같았다. 그런 것에 소외를 느끼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히 애먼 이를 꽉 악물었다.

 

문구점에 들러 다이어리를 새로 샀다. 8000원짜리와 10000원짜리 중에서 고민하다 10000원짜리로 골랐다. 영어프린팅이 조금 촌스러웠지만 10000원이라는 가격표는 그 촌스러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긴 했지만 괜찮았다. 나는 돈을 지불하고 주인의 안녕히 가세요, 같은 말에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건조하게 대꾸했다. 바깥은 여전히 쨍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의 랩핑을 뜯었다. 유선인 줄 알았던 노트는 무선이었다. 이미 뜯었으니 환불은 안 될 것이다. 다이어리 표지에는 I will always love you 가 두껍게 새겨져있었다. 나는 그런 허무한 말들에서 감동을 느꼈다. 저 문장에서 내게 중요했던 건 love나 you가 아닌 will 이었다. 그리고 저 문장은 오직 영어의 형태로만, will을 중심으로만 완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will이 갖고 있는 무구한 가능성이 희망스러웠다. 어떤 가능성은 시작점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법이었다. 하지만 막상 다이어리를 쓰려고 하자 노트가 너무 작고 소중해서 어떤 말도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색한 마음을 뒤로 하고 신청서를 꺼내 공란을 채웠다. 펜촉의 머뭇거림이 종이에 닿아 여러 점이 어지럽게 흩뿌려져있었고, 글씨가 자꾸만 떨렸다. 지원계기에 평소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책임감과 사명을 갖고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같은 형식적인 문장을 써넣었다. 시시했지만, 이 시시하고 평범한 것이 나는 꽤 좋았다.

노트북을 켜서 sns에 접속해보았다. 비활성화를 풀고 윤을 검색했다. 윤이 환하게 웃는 프로필 사진과 여행지에서 흰 눈을 배경으로 찍은 커버사진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스크롤을 내려 윤의 과거에 다다를수록 나는 윤과 가까이 지내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윤은 기독교인이었다. 윤은 명진이랑 친했다. 윤은 시를 좋아했다. 윤은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클릭 몇 번으로 쉽게 드러난 윤의 얕은 세계를 탐방하며, 나는 남의 생활을 훔쳐봤다는 것에서 엷은 죄책감과 알 수 없는 우울을 느꼈다. 윤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땀범벅인 얼굴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을 내가 부끄러워졌다. 윤의 프로필을 볼수록 내가 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 속의 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급히 노트북을 껐다. 책상에 엎드리자 노트북의 잔상 탓인지 보라색의 얼룩한 빛이 어둠속을 찌릿하게 파고들었다.

 

학교에서 은주가 동아리 신청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마치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그거 윤이 하는 동아리 아니야?”

은주의 입에서 윤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온 몸이 철렁했다. 윤이라는 발음은 마치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발음처럼 어색하고 놀라웠다. 속으로 윤, 윤, 발음해보자 그건 나만의 고유명사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 이거 느티나무라고, 동아리, 추가 모집하길래, 한 번 지원해보려고. 나 봉사점수도 부족하고...... 대학 갈 때 봉사점수도 보잖아.”

 

나는 내 입에서 나온 대학이라는 말에 놀라웠지만, 침착하게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너 대학 안 간다며?”

 

“대학에 어떻게 안 가, 대학은 가야지 그래도.”

나는 불과 며칠 전의 내가 낯설었다. 갑자기 흠뻑 철이라도 든 기분이었다. 학교 전체를 뜨겁게 감도는 입시분위기에서 필사적으로 나를 떼어내려 했는데, 갑자기 대학이라는 새로운 곳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일상에 이상처럼 끼어들었다. 대학이라는 말이 주는 안정감이 욕심났고, 대학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것은 더 이상 환상이나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현실로 느껴지는 착각도 들었다. 갑자기 온 세상에 아름다워 보였다. 교과서를 가지런히 꺼내 수업준비와 예습을 했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눈치를 살피다 혹여 불필요한 마음까지 흘러넘칠까 최대한 덤덤하게 접수봉투 안에 넣었다. 신청서를 중간 즈음에 슬쩍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남자애들이 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헤어스타일에 비슷한 얼굴이었지만 윤은 쉽게 눈에 띄었다. 나는 윤의 잘 다려진 교복셔츠의 꼿꼿한 선이나 실밥이 튀어나온 바지밑단이나 조금 까진 흰색 운동화 같은 것을 보며 이상한 기쁨을 느꼈다. 그러다 정작 윤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 것 같으면 깜짝 놀라 눈을 피했다. 윤이 곁에 있으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헤맸고, 한 여름에도 이가 다닥다닥 부딪혔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를 스쳐가고 자극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마치 그것이 불순물이라도 되는 양 나를 꼭 숨겨두었는데 새삼 잔잔하고 미세한 세상의 흘러감, 가끔은 역동적이기까지 세상의 흐름이 그리웠다. 그 속에 내재된 안정감을 갖고 싶었다. 윤은 나의 원초적 신경을 자극했다. 어딘가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갑갑했던 그래서 벗어던지고 싶었고, 어느 정도 벗어던진 소속감, 그것을 다시 주어다 입고 싶어졌다. 나는 늘 뒤처지는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그 뒤처짐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는데 다시 세상의 보폭에 발맞추고 싶어졌다.

 

그동안 나는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과학 동아리에 들어가서 숙제도 대충 하고 모임에서 늘 빠졌다. 장래희망에 적었던 생물학자라는 꿈을 보고 담임선생님이 넣어준 동아리였지만 나는 한때 아름답다 여겼던 식물의 광합성 같은 것에 더 이상 감흥이 없었다. 어릴 때의 나는 눈치 없이 질문이 많은 애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립된 것들에 엉뚱한 질문을 품었다. 이 물음표가 가끔은 어른들을 당황시켰다. 누군가 이 의문의 싹을 잘라주었을 때 나는 모욕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만약 그 과학 동아리에 윤이 있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열심히 따르는 것이 어렵다면 열심히 따르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누가 봐도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투쟁을 멈추고, 그냥 그럭저럭 무난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내가 바란 것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나의 아둔한 고집이 부끄러웠다. 그 고집을 아둔하다 여기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시험 기간이라 지원한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 없었고, 지원한 사람 대부분이 통과되었다고 했다. 지원서에 전화번호 대신 이메일을 적어 넣은 내게 윤이 찾아왔다.

 

“솔아, 너 신청서에 번호 왜 안 적었어?”

 

“아, 나 휴대폰 없앴는데...... 혹시 필요하면 다시 개통할까?”

 

윤은 잠시 생각해보니 괜찮다고 했다.

 

“주소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나올 거야, 선배들 중에서도 핸드폰 없는 사람 있으니까, 아마 크게 불편하진 않을 거야, 중요한 공지는 내가 전해줄게.”

 

“.......응.”

 

나는 미처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윤은 자기 자리로 갔다. 어쩔 수 없이 토요일만 기다렸다. 운동화를 빨고, 방을 치우고, 시험을 준비하고, 책 같은 걸 읽으면서 겨우 시간을 때웠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마음은 계속 오지도 않은 토요일에 가 있었다.

 

바람에 떨리는 나뭇잎의 가지를 보며, 며칠 전 장에서 사왔다던 콩자반을 먹으며, 먼지가 쌓인 단정한 배열의 책 기둥을 만지며, 나는 이따금 윤을 떠올렸다. 떠올렸다, 떠올린다. 윤을 떠올린다는 말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작용했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보고 웃었고, 콩자반을 먹으며 웃었고, 먼지를 만지며 웃었다. 윤을 생각하다보면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웃음을 따라가다 보면 윤이 보였다. 이것은 계속 순환되는 반복이라서 무엇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토요일 아침, 알람에 맞춰 몸을 일으키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보육원의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묶고 이불을 개고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나와 시계를 보았을 때 손목시계는 정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햇살이 기분 좋게 내려앉았다. 집으로부터 보육원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직통버스가 있었다. 버스 안은 에어컨 바람 때문에 조금 소름이 돋았고, 나는 해가 직시하는 창가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윤 생각을 했다. 윤에 대한 생각은 늘 연쇄적이었다. 그 생각은 윤과 전혀 상관없는 것까지 끌어당기는 이상한 성질이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윤을 가장 중간 자리에 배치하고 모든 사고를 재편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안경을 덮쳤다. 앞이 뿌예졌다. 나는 잠깐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십 분정도 걷다보니 보육원이 나왔다. 손길보육원이라고 쓴 낡은 표지판이 풀밭이라 하기엔 애매한 잡초 사이에 꽂혀 있었다. 정자에는 동아리원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윤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솔아, 안녕. 오는 길에 많이 더웠지?”

 

나는 윤의 갑작스런 인사에 놀라 속으로 생각했던 말이 엉켰다. 어색하게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투명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나 빠져서 차마 윤의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응, 이라고 대답했다. 윤은 내 시선 왼쪽 하단에 뿌옇게 존재했다. 윤은 패턴이 있는 남색 셔츠와 청흑색 진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순간 나의 가장 깨끗한 옷이 부끄러워졌다. 시선은 윤을 제외한 다른 곳에 가 있었지만, 윤을 제외한 모든 것도 사실 윤이라서, 마음이 시각을 제어할 수 없어서 둘 곳 없는 시선과 어색한 마음은 보존적이고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갔다. 윤 앞에서 나는 종종 공명 상태가 되었다.

 

오기로 했던 사람들이 다 모이고 나서 우리는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보육원 내부는 낡기는 했지만 깨끗했다. 보육원에서는 어딘가 정겨운 냄새가 났다. 담당자는 보육원 내부에서의 모든 촬영을 금지한다는 안내서를 내밀었고, 우리는 차례대로 싸인을 했다. 보육원 동아리라서 아이들을 볼 줄 알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정원을 정리하는 일-잡초를 뽑는 일-이었다. 구역을 나눠 3인1조로 일을 했고, 나는 윤과 같은 조가 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아쉬우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잡초를 뽑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나눠준 초모자가 질서 없이 흩뿌려진 햇빛을 막아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같이 쓰는 공용모자는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계속 벗겨지려고 했다. 나는 문득 잡초를 뽑다가 내가 왜 이 곳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고, 주말의 한낮에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신기했고, 이런저런 생각 끝에 오직 힘들다는 감각만이 남아 있을 때에도 먼발치의 윤을 보면 힘이 났다. 힘내 솔아, 이 희미한 음성이 무심코 재생되었다. 게으른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 풀을 뽑는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해는 저물기는커녕 점점 달아오르기만 했고, 조금씩 지쳐갈 때쯤, 윤은 조금 쉬어가자고 했다.

 

볕 아래에 오래 있은 탓에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땀이 흘러내려서 무너져 내릴 듯한 얼굴로 멍하니 벤치에 앉아있었다. 힘들다는 감각과 함께 갈증이 밀려왔다. 물이 간절했다. 하지만 물을 마시러 일어서기가 싫었다. 내가 있다는 사실을 굳이 나서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겠지만, 나는 그런 작은 행동마저 부담스러웠다. 그 부담스러움은 그동안 나의 행동반경을 좁혀주었고, 나는 이젠 좁은 생활에 적응했다. 나는 보육원에 올 때의 들뜸이 축 늘어지는 것을, 속이 들끓고 있는 것을, 조금씩 졸아가는 것을, 그러다 말라버릴 것을 가만히 앉아 지켜봤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어색했다. 아니, 이 풍경은 너무나도 익숙했는데, 내가 이 풍경의 안이 아닌 바깥에 있는 것이 어색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해있는 일이 내겐 당연할 수 없다는 걸 어린 시절로 꼬박 겪어냈다. 여느 한부모가정의 아이들이 그렇듯 우리 집은 무언가가 늘 부족했다. 엄마는 매일 10시간씩 일하는데, 나는 매일 늦게까지 공부하는데도, 엄마는 돈이 나는 성적이 부족했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보다는 아빠가 없다는 사실로부터 우수수 따라오는 부가적인 결핍을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인간은 존재자체보다는 존재의 기능성이 더 중요하도록 설계되었는지도 몰랐다. 인간 자체가 오직 기능성일지도 몰랐다. 인간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당연한 속성, 머릿수 하나 비는 것만으로 정상가족을 벗어나는, 머리통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그런 고유의 무언가, 하지만 충분히 다른 것으로도 대체가 가능한, 그러나 충분한 다른 것이 없었기에, 더 비어있는,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낯선 호칭, 그것이 내게는 없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성적은 노력에 비례하지 않았다. 겨우 중상위권 정도에만 머무르는 애였다. 하지만 못하는 것도 계속 하다보면 어느 정도는 늘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물렁한 상태에서는 충분히 제고가 가능했다.

 

늘 전교 100등 정도에 머물다 처음으로 24등으로 껑충 오른 적이 있었다. 나는 감격스러워 성적표를 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었다. 그때 마침 친척들이 우리 집에 놀러왔고 나는 집에 가자마자 친척들에게 성적표를 보여주었다. 너무 뿌듯했다. 나는 당연히 나에게 솔이는 엄마 말 진짜 잘 들어야 돼,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엄마에게 효도해야지, 솔이는 참 야무지네, 하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칭찬해주던 어른들이 나를 더 칭찬해줄 줄 알았다. 다른 사촌들이 좋은 성적을 자랑할 때처럼 포근한 칭찬이 드리울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칭찬은 소박했다. 나는 어마어마한 칭찬이 살포시 내려앉아 내 고개를 쓰다듬는 순간을, 조금은 호들갑스러울 법한 상황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싱거웠다. 사실은 미리 칭찬에 부담 갖지 말자는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칭찬은 생각보다 너무 헐거웠다. 그래도 그날은 너무 좋아서 심장이 뛰고 내가 대견스러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려는 순간, 거실에서 들려오는 친척들의 말소리가 내 귓가에 스몄다. 중학교 때 점수 요즘은 하등 쓸모없지, 공부 잘하면 뭐해, 아니, 요즘은 좋은 대학 나와도 다 힘들다니까? 따위의 말을 들었다.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짐작컨대 너무 날카롭게 이쪽이라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흘러나오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닦아서 온 얼굴에 콧물을 묻히며,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고 어두운 방에서 외롭게 다짐했다. 사촌들보다 더 좋은 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의지에 불탄 건 나였다. 천진하게도 나는 그때까지 나만 잘하면 나의 미래도 잘될 줄 알았다. 미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오직 나의 오늘에만 달려있는 줄 알았다. 중3마지막 기말고사에서 7등으로 껑충 뛰었을 때 나는 엄마의 애매한 걱정스런 싸늘한, 잘 모르겠지만 기쁨이 없는 것만은 확실한 눈빛을 읽었다. 나는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 대신 랜덤으로 이곳에 왔다.

 

하지만 나는 이런 비장함과 증오를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삼켰다. 나는 어른들을 싫어하면서도 어른들을 보면 꼬박꼬박 인사하고, 말을 잘 들었다. 그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엄청난 것을 갖고 있고, 내가 미처 갖지 못한 것들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마음을 어리고 잘나고 똑똑한 나에 대한 질투로 이해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졌다.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천진을 연기했다. 그때는 그것이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 모든 것도 부질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가 나의 가장 간절한 속마음이 되어버렸다. 어떤 특별한 일을 계기로 우울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내 삶은 단지 처음부터 결핍을 전제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결핍은 내가 자라는 속도에 맞춰 내 안에서 바글바글 알을 부화했다.

 

그렇다고 누군가 특별히 내게 아빠 없음을 이유로 놀리거나 비웃은 건 아니었다. 아빠 없음을 이유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거나 최소한 공식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가장의 부재는 언제나 가정 안의 문제였고, 사람들은 남의 가정에 관여할 권리가 없다는 불문율을 철석같이 지켰고,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은근한 것이 사실은 가장 노골적인 것이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왜 적어내야 하는지 모르는 부모직업란을 공란으로 남겨둘 때마다 마치 삶이 텅 빈 것 같은 부끄러움, 선생님의 측은하게 바라보는 다 안다는 눈빛,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별 거 아닌 듯 이야기했을 때 친구의 미묘한 표정, 그리고 그 이후에 은근히-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늘어난 아빠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아빠가 용돈을 많이 주었다, 아빠랑 놀이공원에 다녀왔다 같은 일상적인 말들, 남을 비하하는 용도로 자주 쓰이는 부모님 홀수냐는 댓글, 가족관련 서류를 제출할 때마다 맨 아래에 깔고 초조히 앉아있던 순간들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오히려 누군가 내게 아빠 없음을 이유로, 그리고 그 때문에 따라오는 부가적인 결핍을 이유로 나를 노골적으로 괴롭혔다면, 나는 사람들을 원망했을 것이다. 저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정도로 못되지 않았다. 나는 악의가 없는 얼굴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였다. 그래, 개인적인 문제,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우리 가정 안의 문제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바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갑자기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목이 울컥 차올랐다. 얼굴을 마구 구기고 싶었다.

 

아이스박스에서 음료를 꺼내는 윤의 흰색 티셔츠가 아른거렸다. 흰색인데도 윤의 색은 유독 튀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윤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기에 그나마 볼 수 있었다. 실눈을 뜨고 보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싶지 않았는데, 윤이 가까이 오자 이상하게 얼굴근육이 순간 허무해지고 웃음이 팍 났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윤은 내게 생수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 생수를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받았다. 한참 후에야 고맙다는 말이 생각났지만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았고 다시 고맙다고 말하기도 쑥스러웠다.

 

두부처럼 희고 말랑한 아이가 윤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쫄래쫄래 뛰어왔다. 반갑게 인사하더니 한껏 얼굴을 찌푸리고는 무릎을 보여주었다.

 

“샘, 저 지난주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어요.”

 

“은하 많이 아팠겠다, 이젠 괜찮아?”

 

“네, 지금은 괜찮아요!”

 

이제 막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으로 보이는 은하라는 아이가 다친 무릎을 보여주었다. 나는 흘긋 곁눈질해 보았는데, 누구나 어릴 때 뛰어놀다 넘어지면서 생길 법한 상처였다. 상처딱지를 보고 선혈이 연상되어 찌릿했지만, 은하의 명랑한 웃음을 보고는 이내 괜찮다고 생각했다. 원래 아이들은 다 저러면서 크는 거니까. 윤은 호호 불어주었다. 나는 윤의 그런 자연스러운 관대의 포즈가 부러웠다. 원래 보육원아동과의 접촉은 제한되어있지만 윤은 오래 봉사했던 터라 얼굴을 익힌 아이들도 몇 명 있다고 했다. 나는 윤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좋았다. 무언가를 인정받거나 증명 받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떤 부합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저 멀리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내게 다음에 또 봬요, 인사했고 나는 그것이 나에 대한 인사인 줄 알면서도 시선을 뗀 채 딴청을 피웠다. 웃음이 고여 있는 그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활기차게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숨이 턱 막혔다.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가슴에 언친 듯 이상했다. 멀미가 났다. 은하가 말하는 다음, 이라는 말이 나는 너무 무구해, 갑자기 슬퍼졌다. 이런 식으로 슬픔을 느끼는 내가 지겨웠다.

 

“다음에 또 봐.”

 

은하에게 손 흔들어 인사하는 윤을 보면서 나는 은하의 다음과 윤의 다음의 다름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은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윤의 말은 이내 둥실 떠올라 생각을 짓눌렀다.

 

“솔아, 오늘 일 많이 힘들었지?”

 

“.......”

 

“날이 많이 덥다!”

 

“......괜찮아.”

 

“이번 주 봉사실적은 다음 주에 채워질 거야.”

 

“......”

 

나는 윤의 말에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윤이 보내는 일상적인 대화의 시작이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나는 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윤의 옷에 인 보풀을 관찰했다.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것에조차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성격인데다, 그 대상이 윤이라서 여러 종류의 소심함은 크로스의 형태로 서로를 제곱했다. 아무 감정 없이 이어지는 대화가 싫으면서도 그 대화조차 제대로 못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윤의 이야기에 맞장구 쳐주고,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윤과 친해지고 싶었으나, 그 이면에는 친해지고는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이상하게 깔려 있었다. 그것이 어떤 합리화된 무의식이었는지, 더 큰 사랑을 향한 갈망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내게는 관계 발전의 첫 단계에 응당 놓여야 할 것들이 없다는 사실만 뚜렷했다.

 

윤은 내 팔꿈치에 난 멍을 보더니 어디서 다쳤냐고, 괜찮냐고 물었다. 얼마 전에 걷다가 넘어져서 생긴 상처였다. 나는 남의 상처에 대해 불쑥 묻는 무례함이나, 그 무례함 아래에 깔려있는 천진함이나, 그 천진이 야기하는 불편보다는 괜히 윤이 이것을 결핍의 징조로 받아들일까 겁이 났다.

 

“아, 이거 저번에 길 걷다가 모르고 넘어졌어, 이젠 괜찮아.”

 

나는 거의 항변하듯 대답했다. 지금까지 윤과 얘기하면서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내보기는 처음이었다.

 

“아, 그렇구나, 조심해서 걸어야지, 약국에 멍 빨리 빼는 약 팔아, 챙겨 발라.”

 

윤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윤이 나를 어떻게 보지 않았으면 싶었다. 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갑자기 진지한 톤을 잡았다.

 

“여기 있는 애들은 전부 다 버림받은 상처가 있어. 자전거를 타는 데엔 담력만 필요한 게 아니잖아. 누군가 뒤에서 받쳐줘야 하거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이 친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거니까. 우리라도 더 챙겨줘야지, 나는 애들을 도와주는 일에서 보람을 느껴. 아이들이 정말로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일 거야.”

 

나는 고개를 들어 윤을 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버림받은 아이들이라고 하는 말이 언짢았다. 윤이 말하는 우리란 무엇이었을까. 찰나의 윤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런 류의 웃음은 오만을 품고 있어서, 그것을 오만함이라고 해석하는 스스로에게 자격지심을 씌워주어서 어딘가 불편했다. 아무렇지 않게 버림받은 아이들이라고 하면서 윤은 웃고 있었다. 자전거는 그 나잇대 애들이 타면서 넘어지는 거 아닌가. 윤이 말한 우리는 무엇일까, 나는 윤과 우리가 될 수 없을 텐데, 그리고 행복이라니, 행복이라니. 여러 생각이 마구 뒤엉켰지만 의외로 쉽게 결론이 났다. 나는 윤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그리고 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행동이 생각보다 너무 자연스러워, 나는 처음 윤과 똑바로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솔아, 너도 왼쪽 눈 아래에 점 있네, 내 동생도 거기 점 있는데.”

 

윤은 내 얼굴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집합하자고 소리쳤다. 내 왼쪽 눈 아래에 점이 있었나. 나는 오후 내내 윤이 이야기한 점이 신경 쓰였다. 얼굴을 만져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점이 궁금해졌다.

 

봉사는 세 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윤은 다음 주에 학교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너도, 라는 가급적 단순한 말을 겨우 자연스럽게 했다. 말하고 나서는 조금 더 근사한 말을 할 순 없었을까 후회했다. 좀 쉬고 싶다는 생각과, 윤도 많이 피곤하겠다는 걱정과 지금 내 앞의 윤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았다. 정말로 눈 아래쪽에 점이 있었다.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점이었다. 고동색의 점이 눈 아래에 콕 박혀 있었다. 이토록 선명한 점을 그동안 모르고 살았다는 게 이상했다. 나조차 몰랐던 점을 발견해준 윤이 조금 더 특별해졌다. 방으로 들어가 앨범을 뒤져보았다. 어릴 적 화소가 다소 떨어지는 사진에도 눈 아래의 점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점은 내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든 아마 높은 확률로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의 기원은 과거의 어느 날 -혹은 나의 탄생-이 아닌 바로 지금이었다. 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윤을 자꾸만 내 어린 시절에 대입해보았다. 단정했다. 가져본 적도 없는 단정함이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그날 밤, 나는 아주 깊은 꿈을 꾸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빠를 만나는 꿈, 아빠가 당연하게 내 유년에, 내 생일에, 내 주말에, 내 입학식에, 내 졸업식에 있는 꿈,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빠가 저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내가 마주해야 했던 건 허무한 천장과 달라진 것 없는 나의 방이었고, 꿈에서 만난 아빠에 관한 그 어떤 모습도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다음 주에 보자던 윤을 나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자주 윤의 뒷모습이나 옆모습만 바라봤다. 그럴수록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일은 점점 아득해져갔다. 윤이 내게 인사를 하면 나는 자꾸 어색하게 반응했다. 이런 경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윤이 건네는 말에 계속 어버버거렸다. 그러고 나서는 돌아서서 윤의 말을 종일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갔다. 이대로 눈을 맞추고 입을 열면 모든 마음이 새어나갈 것 같았다. 나조차 잘 모르겠는 마음을 윤이 먼저 알아채는 것이 나는 싫었다. 나는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새어나가려고 할 때마다, 도무지 너무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나는 일기를 썼다. 매일 썼다. 일기 내용은 주로 사실보다는-사실이랄 게 없었으므로- 관념에 가득 찬 문장들이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든 남겨두어야 했다. 남기고 싶었다. 완전히 잊고 싶지 않았다. 일기를 쓰고 난 뒤, 일기장을 닫고 나면 온 세상이 환해보였다. 모든 마음은 그 안에 문장에 결박된 채 바깥으로 한 줌 새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언어로 묶여있는 마음들이, 완전히 표현되지 못하는 단어들이, 좋았다. 그렇게 맺히는 것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기를 쓰고 나면 무언가를 안심할 수 있었고, 더 이상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잔잔한 망각의 기쁨이 온 마음을 흔들었다.

 

내가 본 윤은 다른 애들에게도 친절했다. 여유로움이 그득한 친절함, 그것은 근사한 것이었다. 가질 수 없기에 더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친절은 표면적으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너무 옳은 것이었다.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굳이 이면을 들춰보고 재단하려는 시도조차 불경스러울 만큼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었다. 안녕, 잘 가, 고마워, 파이팅. 이런 말들은 너무 평범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들의 관념을 하나하나 쪼개서 갖고 다녔다. 그것을 나노단위로 분석했다. 그러다 보면 나도 윤 앞에서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자랐지만, 그런 희망은 윤의 친구들 앞에서 천천히 풀이 죽었다. 윤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잘생기고 예뻤다. 내가 윤의 친구가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아득했다. 윤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볼 때 나는 가장 서러웠다. 서럽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괜히 그래, 친하게 지내라, 친하게 지내는 게 좋은 거지 뭐, 보기 좋네, 하하, 이렇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도 윤과 친해지고 싶고, 윤에게 어떤 것들을, 기왕이면 좋은 것들을 주고 싶었는데 나는 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나의 집이 생각났다. 나의 친구 적음이 생각났다. 나의 좋지 못한 성적이 생각났다. 내 일부는 여전히 그곳에 묶여있었다. 그것은 나의 밖이 아닌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몸에 배인 것들, 나를 이룬 것들은 잊지 않고 겉으로 다 드러났다. 사실 사랑보다 더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할 건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그늘을 들키기 싫어 점점 더 웅크렸다.

엄마는 굳이 남에게 업신여겨 보일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가령 삐죽 튀어나온 잔머리라든지, 어지러운 운동화라든지, 잘 웃지 못하는 성격이라든지, 쉽게 동화되지 않는 고집이라든지, 이런 사소한 것들이 너를 판단할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판단 같은 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윤을 만나고 나서 가장 걱정스러운 건 이런 판단이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무의식, 나는 그게 가장 두려웠다. 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질문에 자꾸 걸려 넘어졌다. 그때 우리들에게 한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은 친구가 많은지 적은지였다. 인기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인기가 있다는 것과 친구가 많은 것은 미묘하게 달랐다. 인기가 없고, 친구가 적은 것은 여러모로 별로 좋게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친구가 많으려면 유머가 있거나, 엄청 예쁘거나, 엄청 공부를 잘하거나, 엄청 힘이 있어야 했다. 저 힘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힘이 분명 존재했다. 그 불문율은 내 머리를 퉁 치고 갔다. 나는 더 이상 세상 탓을 할 수 없었다. 윤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가소롭다는 듯 꼈던 팔짱을 풀어야 했다. 세상을 향한 냉소를 거둬야만 했다. 언젠가 윤의 친구들끼리 했던 저급한 농담을 잊어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물질 대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쫓아야 했다. 세상과의 화해가 필요했다. 용서가 필요했다. 그렇게 윤에게 닿을 길이 필요했다.

 

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태양은 매일 부지런히 솟아오르고, 여름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윤은 윤의 친구들끼리 지내고, 나는 은주랑만 친하게 지냈다. 그러는 사이 학교에서는 3일 동안 급식이 제공되지 않으니 개인도시락을 지참하라는 통신문이 내려왔다. 어떤 애들은 야유를 보냈고, 어떤 애들은 좋다고 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멍청하니 앉아있었다.

 

“야, 급식실아줌마들 공무원 대우해달라고 출근 안하는 거래. 이게 말이 됨?”

 

“그니까, 존나 어이없어. 완전 꿀 보직 아니야? 공짜 밥 처먹으면서 뭘 더 바라는 거야?”

 

“야, 급식 어차피 존나 맛없는데 잘됐다, 쭉 대체급식 먹고 이제 차라리 급식아줌마들 다 잘렸으면. 점심에 컵라면 콜?”

 

가방을 메고 복도를 빠져나오면서 윤의 친구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들었다. 그 말은 내 귓가를 오래 맴돌았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그 말을 향해 환히 웃고 있는 윤을, 무언가를 삼키는 것도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도 아닌 가장 환한 미소를.

 

......

나는 거의 매일 학교에서의 일들을 엄마에게 전했다. 오늘은 급식이 맛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오늘은 선생님이 칭찬하셨다, 같은 말들을 전했다. 그렇게라도 엄마를 웃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급식실에서 일하는 엄마의 삶은 고단했고, 단조로웠고, 고단함의 시작과 단조로움의 끝에는 내가 있었다. 오직 나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고, 나는 괜찮다고 늘 대답했다. 엄마는 울면서 널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너무 많은 걸 못해주었다. 엄마의 울음이 이젠 좀 지겹다고 생각했다. 서늘하게 식어가는 마음이 무서웠다.

 

엄마는 가끔 내가 윤을 떠올리느라 주체하지 못한 웃음을 보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했다. 나는 순간 정색했다. 내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그건 엄마를 아프게 했을 것이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엄마에게 느낄 미안함보다는 내가 느낄 죄책감의 몫이 더 컸다. 나는 악역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울음이었다. 나는 이 울음을 윤에게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윤 앞에서 웃고 있는데, 이 웃음이 윤에게는 울음으로 보일까봐, 나의 어색한 웃음이 괜히 이상해 보일까봐, 나는 늘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차라리 멍해있는 척 하는 것이 더 속편했다. 그래도 학교에 가는 날은 즐거웠다. 주말이 얼른 지나갔으면 했고,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서 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모든 생활이 진심으로 좋았다. 나의 살이 있음이 보람차고,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런 살아있음이 계속될 줄 알았다. 윤에게 다가갈까 머뭇거리다 결국 다가가지 못하는 이 불안한 행운이 언제까지나 당연할 줄 알았다. 일단 학교에 가기만 하면 나의 의무가 연결된 곳에서 윤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 축복은 의심만으로도 아슬했다. 언젠가 윤을 만날 수 없겠지, 윤과 다른 대학에 갈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언젠가의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언젠가를 기대했다. 지금은 이렇지만 언젠가는 멋진 사람이 될 것이었다. 나는 윤이 좋아하는 시집을 사서 읽었고,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고, 기말고사 준비를 열심히 했다. 가끔, 아주 가끔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아주 멋져졌을 때 학교가 아닌 바깥에서 윤을 만나는 상상도 했다. 나는 역설적으로 언젠가 윤과 헤어질 것이라는 -사실 헤어지고 말 것도 없는 사이지만- 생각으로 윤이 지금 당장 사라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밀어냈다. 그리고 내가 한참 세상과의 화해를 강행할 때쯤, 윤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오래 전부터 예견되었는데 나만 몰랐다.

 

윤이 내게 인사를 한 뒤로 한 달이 지난 날이었다.

 

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원래 학교에 일찍 가니까, 내가 교실에 도착했을 때 윤이 없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3교시가 될 때까지 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은주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조금 더 기다려보았다. 하지만 4교시가 시작되었는데도 윤은 나오지 않았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혼자서 속이 타들어갔다. 아무것도 집중되지 않았고, 윤의 빈자리만 바라보았다. 의욕이 팍 꺾인 것처럼 시들해졌다. 나는 참다가 겨우 은주에게 물었다.

 

“은주야, 나 봉사동아리 하는데 너도 한 번 해볼래, 어, 근데 윤 오늘 학교 안 나왔네?”

 

“아, 윤 스페인으로 이민 간다던데? 어머니 사업 때문에.”

 

“......언제?”

 

“몰랐어? 한 달 전부터 걔네 친구들이 걔 이민갈 수도 있다고 그러던데? 지난주에 윤 자퇴서 쓰고 있더라. 아, 부러워.”

 

윤은 왜 갑자기 스페인으로 갔을까. 이건 내가 품을 수 있는 적절한 의문이 아니었다. 그건 엄연히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지난주에 봉사동아리에서도 윤은 이민 간다는 말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윤과의 이 정도 거리가 가장 먼 거리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윤은 조금의 징조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 모든 것이 의미 없어졌다. 세상과 연결된 단 하나의 끈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건 한 번도 연결되어본 적 없는 마음이라는 것, 그건 오직 나의 환상이었다는 것, 그 환상이 스페인이라는 현실적인 곳에 닿아 사라졌다는 것, 이 가능성들이 마지막으로 터져 나오는 서운함마저 밀어 넣었다. 스페인이라니, 그건 윤만큼이나 낯선 단어였다. 내 세상을 벗어난 곳이었다. 삶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를 잡아주기에 힘내, 라는 말은 새삼 너무 실체가 없었다. 내가 그 말을 채우기도 전에 윤은 떠났다. 사실 윤은 내 작은 세상에서만 사라졌을 뿐 더 넓은 세상에서 앞으로 살아갈 것이다. 무엇이 더 나를 아프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윤에게 연락이라도 하기엔, 너무 이상했다. 나는 윤에게 잘 가, 혹은 잘 지내렴, 한국 오면 연락해 같은 뻔한 말들을 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저런 뻔한 말을 주고받기에도 윤과 나의 관계는 너무 얕았다. 내가 윤에게 작별인사를 전하기엔 윤이 나에게 인사했던 그날처럼 세상은 여전히 울퉁불퉁했다. 세상에는 저 너머가 있었다. 그 울퉁불퉁함 덕분에 윤을 좋아했고, 이젠 그 울퉁불퉁함 때문에 윤을 좋아하는 일이 힘들어졌다. 나는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아무에게나 이것이 말이 되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간자습을 빠지고 집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고 걸은 만큼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걸음을 돌리는 그 순간, 나는 인생의 한 지점을 다시 건넜고, 이젠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어렴풋이 예감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에게 처음 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윤에 대한 마음은 빼고 우리 반 친구가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 아쉽다고 했다. 엄마는 부럽냐고 했다. 나는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친구가 가버린 게 조금 아쉬울 뿐이라고, 그냥 해본 소리라고 둘러대고 방으로 들어갔다.

 

메일이 한 통 왔다. 용돈을 모아 윤이 좋아하는 시인의 신간시집을 두 권 구매했었다. 책을 사면서 응모한 낭독회 이벤트에 당첨되었으니, 참석 가능하시면 회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윤이 있어도 주지 못했을 시집을, 윤에게 같이 낭독회 가자는 말도 못 꺼냈을 거면서. 나는 윤이 갑자기 스페인으로 떠나버린 것이 나에 대한 거절 같았다. 울음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눈을 꾹 감았다. 울음은 닫힌 눈동자를 비집고 기어코 흘러내렸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내가 남긴 댓글을 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두 권 구매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꼭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인님의 ㄱ너필을 기원합니다.”

 

마치 내가 윤과 갈 수 있는지 없는지가 윤이 아닌 주최 측에 달려있는 듯한 저 태도가 나는 새삼 기가 막혔다. 저런 말로 가리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랜덤의 확률은 엇나가지 않고 내 마음의 포장을 뜯어주었다. 세상은 나를 환대 속으로 초대했지만 그 따뜻한 곳에 대한 응답을 받고도 나는 갈 수 없었다. 20자이상의 글을 반드시 남기라고 해서 급하게 쓰다가 오타가 났다. ㄱ너필로 전송이 되었다. 누군가를 향한 절대적 환대는 내가 그 대상에게 마음이 없어도, 오히려 특별한 마음이 없기에 더 함부로 줄 수 있는 마음이었다. 내가 겨우 이름만 아는 시인의 건필을 기원한 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단순한 보편적 인류애 차원에서의 찰나의 마음이었다. 이런 찰나로 세상은 얼마나 가득 찼을까. 나는 그런 비어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비어있는 말 한마디가 간절해, 그 말에 오래 기댔다. 빛이 조금씩 거둬지고 있었다. ㄱ너필, 윤이 내게 보낸 환대도 저런 종류의 환대였을까. 그것을 내가 알맞게 건필로 고치고, 건필이라 여기고, 건필의 뜻을 찾아보고, 그 뜻의 뜻을 해석하면서 여기까지 온 걸까. 나는 며칠 후 배송 온 시인의 시집을 받았다. 그 시집은 문제집 사이에서 책장의 일부가 되었다.

 

윤이 없는 시간은 아주 희미하게 기억되었다. 나는 윤이 떠난 후에도 매일 일기를 썼다. 윤이 없는 데도 내용은 오직 윤에 관한 것이었다. 윤은 갑자기 떠올라 팍 가라앉았다. 일상을 잔잔히 흔들었다. 그 흔들림은 어떤 권태들과 상충하며, 살아있다는 감각을 주었다. 나는 윤이 없는 학교에서도 습관적으로 윤을 의식했다. 나는 언젠가라는 말을 자주 달고 살았다. 언젠가 나는 더 나아질 것이다, 더 좋아질 것이다, 그래서 윤을 만날 것이다. 하지만 생각은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는데 그건 윤을 만난 후의 일은 너무 이상한,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아득함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일어나자마자 윤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에 차있었고, 그러면 꼭 공허했고, 그런 날의 오후에는 꼭 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때의 나에게 감정에 연연한 일상의 흔들림과 무너짐은 모두 과분한 사치였고, 나는 어느새 좋아한다는 마음보다는 그 마음이 주는 안정감 같은 것에 더 몰두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이상하지만 행복을 안겨주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에 부가적으로 오는 옅은 기쁨 같은 것에 더 몰두했고, 이제 남은 것은 좋아함이 갖다 준 어떤 경지이지, 좋아하는 감정 그 자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안에 있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를 테면 원망이나 미움이나 자학 같은 감정-은 가끔, 아주 가끔 아프게 밀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3학년이 되었다. 대부분 수험생들이 그렇듯 모든 생활을 오직 대학에만 맞췄다. 예전에는 이따금 세상만사가 허무해지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런 생각은 3학년이 되고 나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 생각을 할 틈조차 없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입시생활이었다. 다른 애들처럼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무료인강과 함께 학교자습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했다. 학과에 대한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았다. 교대는 다행히도 엄마의 바람과 큰 충돌이 없었다. 나는 지원한 교대에 붙었고, 이제 세상이 바뀔 것을 기대했다. 그전부터 만약 대학에 붙는다면 가장 먼저 윤에게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친구추가가 되어있지 않은 윤의 sns 주소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연락하려고 보니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졌다. 입시가 끝나자마자 횟집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윤은 조금씩 옅어져갔다. 가끔 횟집 손님들에게서 모욕적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윤이 생각나곤 했는데, 정말로 그건 가끔이었다. 시간은 윤을 조금씩 지워주었다. 떠오르고, 사라지고, 떠오르고, 사라지고, 여러 번 반복하다 끝끝내 완전히 어느 순간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었다.

대학에 들어가 사람을 만나면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함부로 포기했던 것-살갑게 구는 것, 잘 챙겨주는 것, 잘 웃어주는 것, 친절하게 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이었는지 다시 느꼈다. 친척들은 내게 여전히 친절했고, 나는 그 친절안의 연민을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았고, 종국엔 내가 이렇게 상냥한 사람들을 꼬아서 본 건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들은 애가 너무 잘 컸다고 겉으로나마 엄마에게 부럽다고 말을 했고, 나는 잠깐의 분노를 느꼈지만, 이내 따뜻한 행복감이 몰려왔다. 그런 류의 기쁨은 허울뿐이라고 비웃었는데, 어느새 그 허울에 기대고 있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도 손길보육원에 계속 봉사하러 나갔다. 처음에는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하다가 2학년이 되고 나서는 학습봉사자로 주마다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의 이름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었는데 도무지 보육원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희망찬 이름들이었다. 하늘이라든가, 보람이라든가, 소망이라든가. 이런 이름들은 어딘가 어색한 활력을 띠었고, 나는 그 무구한 희망 안의 작위성이 너무 훤히 보여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딘가 서글퍼졌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무기력해있었고, 내가 이름을 불러도 통 대답이 없었다. 수업을 잘 듣지 않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공부에도 큰 흥취가 없었다. 그 중 은하는 학습 첫 날부터 교재를 달라고 요구하고, 수업이 끝나면 늘 질문하러 왔다. 선생님, 선생님, 부르는 은하의 목소리는 늘 나를 들뜨게 했다. 안도의 들뜸이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은하에게 여러 심화문제집을 챙겨 주며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다독여주었다.

 

은하는 꿈이 화가라고 했다. 은하는 내가 보기에도 그림을 잘 그렸다. 잘 그려서 더 슬펐다. 은하의 꿈이 화가라고 했을 때 어쩔 수 없이 현실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시절 미대입시를 준비하는 은주의 친구가 방학에 학원비만 천만 원을 썼다는 말이 떠올랐다. 예견된 가난을 왜 굳이 이어가려고 하는지, 그 꿈이 현실보다 더 소중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게는 그만큼 소중한 것이 없었다. 아주 어릴 적, 누군가 내 그림을 보고 너는 커서 화가 하면 되겠다고 칭찬해주었는데, 그때 나는 속으로 누구 인생 말아먹으라고 저주를 퍼붓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현실의 암담함을 잘 알았으니까. 그러나 은하는 아직 어리니까 충분히 다른 꿈을 꿀 수도 있었다. 그리고 꿈을 동력으로 사용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예기치 못한 꿈을 꿀 수도 있으니까. 나는 은하에게 다른 꿈은 없냐고 물었다.

 

“선생님, 저의 꿈은 오직 화가뿐이에요. 저는 꼭 커서 화가가 될 거예요. 화가가 아닌 미래의 저를 상상할 수 없어요.”

 

“그렇구나. 일단 선생님이랑 공부하면서 성적 관리 잘해보자.”

 

“저는 진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갈 거예요. 꼭 잘 살 거예요. 꼭 좋은 화가가 될 거에요!”

은하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 가장 빛났고, 들떠있었고, 애정과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도 응원할게.”

 

나는 은하의 꿈이 바뀌기를 바랐다. 화가를 꿈꾸는 이상 은하는 그림이 아닌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해도 화가가 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나는 은하가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보육원 애들에게는 보통 스마트폰이 없지만, 은하는 할머니가 사준 스마트폰이 있었고, 격주로 본가에 내려간다. 여기 있는 애들이 전부 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아니었다. 다 버림받은 것도 아니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오는 애들도 많았다. 은하는 할머니가 있어서 다른 애들보다는 더 열정적이라고 보육원 선생님이 말해주었다.

 

나는 이따금 은하와 외출을 했고, 은하를 처음 영화관에 데려갔고, 시내를 구경했고, 은하의 생일날에 맞춰 케이크를 사먹었다. 보통 원생들은 달마다 한 번씩 몰아서 생일을 쇠는데 나는 은하의 생일만큼은 챙겨주고 싶었다. 나는 어릴 적에 친구들에게 생일선물을 사주지도, 받지도 못했는데 그것이 많이 아쉬웠다. 한명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보육원 측에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조금씩 친해졌다. 나는 은하에게 무슨 일 있으면 샘한테 연락해, 같은 문자를 종종 보냈는데 은하는 그 문자에 샘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라고 대답했다.

 

은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금 생활에서 벗어날 거라는 말을 자주 했다. 얼른 어른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서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리고 싶다고. 은하는 보육원과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쉽게 분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바깥이 아니라 네 안에 있는 건데. 속으로 말을 삼켰다. 은하는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속상하다고 했다. 보육원에서는 10시에 소등이라서 그 후부터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대신 아침에 5시에 일어나서 공부하는 걸 선생님이 허락해주었다고 좋다고 했다. 다른 애들은 벌써 고등학교 선행을 하고 있는데 나는 할 수 없어서 속상하다고 했다. 은하는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않았다, 늘 자기 안에서 찾았다. 보육원 선생님들은 그런 은하가 기특하다고, 은하 같은 애가 어디 있겠냐고, 참 잘 자랐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더 쓸쓸했다.

 

그 쓸쓸함은 내 삶의 쓸쓸함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대학을 2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나서 휴학을 하고, 백화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도무지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일요일을 제외한 주6일 백화점으로 출근했다. 처음에는 반년만 휴학하려고 했는데, 반년 벌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매일 8시 반부터 8시반 까지 꼬박 일했다. 그 시간동안 계속 서서 일해야 했다. 일하는 물건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계속 들었으나, 지금 이 일자리라도 없으면 이번 달 월세조차 낼 수 없었다.

 

처음 이곳에서 입문교육을 받을 때의 일이었다. 강사가 물었다.

 

“왜 고객님들이 로드샵이나 인터넷이 아니라 굳이 백화점까지 와서 물건을 산다고 생각해?”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노트에 글씨를 마구 깨작거렸다.

 

“대우받으려고 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지, 우리의 업무는 무조건 웃고 긍정하는 거야. 우리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이, 안 돼요, 몰라요, 없어요야, 첫째도 친절, 둘째도 친절. 무조건 친절!”

 

3달 동안 친절을 품다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나의 주된 업무는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리고 판다는 사실을 웃음으로 숨겨내는 일이다. 나는 하루 종일 나의 감정을 조절하고, 감정이 아닌 표정을 하고, 감정을 숨긴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나를 버린다. 환한 미소는 곧 내가 된다. 하지만 유독 은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부모에게 화장품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볼 때면 엄청난 박탈감을 느꼈다. 그 박탈감을 숨기고 싶어 더 친절하게 응대하고 더 수그러들었다. 오직 그것만으로 나의 박탈감을 지울 수 있다는 듯이, 철저히 판매원이 되었다.

 

나는 백화점의 판매원 역할에 충실했다. 나는 종일 서서 매장을 지키는 사람, 손님이 없을 때에도 앉지 못하고 아랫배를 계산대에 기댄 채 잠깐 서서 쉬는 사람, 비상계단에서 쪼그리고 앉아, 고객을 감동시키는 친절인사 세 번 따위의 포스터를 보며 일하는 사람, 고객님을 무조건적으로 모시는 사람, 그리고 이 모든 나를 cctv는 언제 어디서나 감시했다. 매일 아침, 우리는 구호를 외쳤다. 내가 웃으면 매장이 활기차고 매장이 활기차면 고객이 만족하고 고객이 만족하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고객응대나 매출압박보다는 화장실에 제때에 가지 못하는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오줌을 잘 참지 못했다. 백화점에서 일할 때는 화장실에 한 번 가기 위해서는 눈치를 봐야 했고, 하루 3번 이상 화장실에 가지 못했다. 직원용 화장실은 멀리에 있고, 고객용 화장실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자연스럽게 오줌을 참는 습관이 생겨버렸는데 나는 오줌을 참을 때마다 그것이 너무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자취방에서 화장실만큼은 자주 청소하고 온갖 방향제를 구비해두었는데, 그것은 오줌을 눌 때 최대한 모욕감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집에 와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토익공부를 했다. 일요일이면 오전에 보육원에 가서 학습지도를 하고, 오후에는 잠들었는데, 이튿날 아침까지 꼬박 잠만 잤다. 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만, 언젠가의 나를 상상하면 지금 힘듦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라는 희망을 달게 먹으면서 지냈다. 다른 동기들이 해외여행을 가거나 어학연수를 가는 것이 부러웠지만, 나도 언젠가는 갈 거라고 혼자 다짐하며. 어떨 때엔 언젠가는 나도 이 백화점의 vip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은밀한 욕망을 굳이 숨겼다. 그렇게 하루를 차곡차곡 쌓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평범한 가난한 대학생처럼 살았다.

 

 

*

 

“다음 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강남에서 사람들이 와르르 쏟아져나갔다. 강남역 출구에는 ‘중요한 건 너지, 널 보는 시선이 아니야.’라는 글자가 휘황하게 걸려있었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온갖 성형외과 광고들이, ‘예쁘면 다야’라는 글자 밑에 정말 예쁜 게 전부인 사람이 활짝 웃고 있었다. 거리는 한창 사람들로 붐볐다. 연말의 뉘앙스를 한껏 내뿜은 잡화점 속으로 사람들이 속속 들어갔다. 나는 강남의 열기에 살짝 짓눌린 채 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윤도 이 길을 걸었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긴장되었다. 나는 길을 천천히 아껴 걸었다. 윤은 스페인에서 공부하다가 한국에 들어와 다른 디자이너들과 카페를 빌려 전시회를 열었다고 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금방 정보가 나왔다. 전시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기 글이 올라와있었다. 참여 작가들은 마지막 날 전시장에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오래 전의 마음은 기어코 살아나 나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 윤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해야 할까, 윤에게 어떤 말을 할까, 나는 바깥을 한참 서성이면서 속으로 말을 가다듬었다. 추위에 이가 다닥다닥 부딪혔다. 어서 들어가자고 마음먹었다, 다시 나오기를 몇 번, 겨우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2층 카페 입구에는‘네가 그리는 것만큼이 너의 우주야.’한참 유행하는 네온사인이 반짝거렸다.

카페 안은 생각보다는 컸고, 여러 그림들과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가 별로 전시되어 있었고, 나는 윤의 이름을 어색하게 찾았다. 후기 글에 의하면 작가들은 안쪽 굿즈 판매대에 있다고 했다. 윤의 그림은 검정색 바탕에 사람 얼굴이 꽃으로 흘러내리는 그림이었다. 나는 한참 그림을 뚫어져라 보다가 굿즈 판매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을 멍하니 보다가 순간 윤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라 절로 뒷걸음질 치다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분명해졌다. 기억이 물컹하게 밀려왔다. 오래 간직한 망각은 조금씩 풀려나기 시작했다. 어떤 시절이 다시 무심코 재생되었다.

 

윤이 내게 인사한 날, 모든 망각의 시작, 소음이 소리가 된 날,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날, 하나의 점이 갑자기 우주로 번진 날, 한 세계의 탄생, 그것은 철저히 이율배반적이었다. 그 모든 망각의 시작에는 무수한 조작이 깔려 있었다.

세상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어느 새벽 무렵이다. 어린 시절 나는 야뇨증을 앓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야뇨증인 줄도 몰랐다. 오줌을 누는 꿈을 꾸면 어김없이 이불이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축축한 느낌에 깨면 나는 엄마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이불에 손을 넣어 어서 마르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엄마가 세포로 쪼개지고, 그 세포가 다시 톡톡 튀어 오르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상상으로도 두려움은 쫓아지지 않았고, 그보다는 엄마가 먼저 알아채는 날이 많았다. 나는 문 밖으로 내쫓겼다. 스산한 바람이 옷 안으로 스며들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깜깜한 복도가 무서웠다. 나는 문을 두드리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집 안에 들어가면 맞을 것이 분명했지만, 밖에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얼른 엄마의 화가 풀리기를 바랐다. 한참을 빌다가 겨우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맡았던 익숙한 집 냄새는 복도보다 더 숨이 막혔고, 나는 그런 불운한 생각을 애써 쫓아냈다. 나는 다시 베란다에 가서 밤새도록 벌을 섰다. 엄마는 방에 들어갔는데 나는 시간도 알 수 없고, 세탁기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베란다가 너무 무서웠다. 조심조심 베란다 문을 열어 시계숫자를 확인할 때 확 끼쳐오는 포근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의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던 그 짧은 순간이 무서워 재빨리 문을 닫았다. 계속 서 있다 다리가 아파 잠깐 앉아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베란다 문이 벌컥 열렸을 때 나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일어섰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문을 닫았다. 나는 그것이 다행스러웠다.

 

해가 뜨고 아침이 되었을 때서야 나는 베란다에서 나왔고, 종일 꼬꾸라져 잠들었다. 오후에 엄마의 친구가 쟤는 왜 아직까지 자냐면서 갖고 온 쥐포를 주었는데, 나는 거실 주방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나의 이부자리를, 그 위에서 잠을 자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잠은 몰려왔고, 나는 꿈에서 엄마의 세포가 아닌 나의 세포가 완전히 흩어져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나는 한약을 먹었고, 병원에 다녔고, 그보다는 더 자주 매를 맞았다. 그리고 어떤 고기를 먹었는데 오랜 시간 지나서야 그것이 강아지 성기라는 말을 친척에게 들었을 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온 몸이 수치스러웠다. 이불에 오줌을 싸는 증상은 벌이나 약이 아닌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주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오줌을 가릴 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습관은 남아 있어서 밤에는 일부러 물을 마시지 않았고, 자기 전마다 화장실에 꼭 한 번씩 들렸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나는 여느 애들처럼 할 수 없는 것을 주렁주렁 달고 역시 인생은 뜻대로 안 되는군 같은 자조적인 말투를 사용하는 여느 중학생이 되었다. 아니, 여느 중학생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급식실이 아닌 교실에서 밥을 먹었는데, 꼭 무리지어 모여 먹었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나의 몇 단짝들과 옹기종기 모였고, 그것은 뿌듯했고, 뿌듯함만큼 불안했다. 나는 그들과의 사이가 깨지지 않도록 -혼자 밥을 먹지 않도록- 조심했는데, 그런 압박은 학기 초마다 매년 감돌았지만, 학기 중이 되면 느슨해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뜰하게 하루의 유일한 자유시간인 점심시간을 채웠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교실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 매일 학교 앞 화단을 돌면서 오늘은 선생님께 혼나지 않게 해주세요,를 빌던 아이였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온 나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뿌듯했다. 학교 가는 날이 좋았고, 교복을 입는 것도 좋았다. 그곳에는 예쁜 선생님과 다정한 친구들과 맛있는 밥이 있었다. 다만 가끔 나는 맛있게 먹은 급식을 두고 친구가 아, 이거 존나 맛없다 라고 할 때 나는 옅은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그 음식을 집지 않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지켰다. 그리고 나만 방향이 달라 집으로 매일 혼자 걸어갔는데, 나는 그 길이 너무 싫어 15분 거리를 한 시간동안 돌아서 걸었다. 계속 걸음으로써 무언가를 지켜냈다고 안심했다.

엄마는 내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깨닫고는 은근히 내 친구들의 총명이나 성적 같은 것을 내세우고, 친구들과 자주 놀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다 언제 한 번 엄마가 너는 왜 친구도 없니? 계속 멍해있지만 말고 친구도 좀 사귀어,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 후에는 조금씩 노골적으로 친구들과 주말에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거나 산책을 간다고 얘기했다. 사실은 그냥 애들끼리 여러 화장품 가게를 돌다가 편의점에 들어가 라면을 사먹는 날이 많았지만, 건전한 사이임을 어필하기 위해 노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을 골라 대답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또 너는 네 친구들만 보이고 엄마는 안 보이지?라고 말해서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기분이 좋을 때면 이따금 친절했다. 엄마가 늘 나를 때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친절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갑자기 다정하게 굴 때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치욕스러웠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다채롭게 매를 벌었는데, 엄마는 나를 때리고 나면 미안하다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눈물을 닦고 최대한 모든 것을 잊었다는, 아까의 나와는 다른 나로 천진하게 웃으며, 엄마 괜찮아요, 대답했다. 그러면 엄마는 딸, 사랑해 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마치 역할극 같았다. 나는 다시 엄마 저도 사랑해요, 라고 대답했다. 어김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엄마는 나를 다시 꼭 안아주었는데 느껴지는 엄마의 체취가 토할 것 같아 자주 숨을 참았다. 나는 더 맞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맞은 나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실 엄마가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데 내가 잘못해서 교육한 것뿐이라는 말을 믿었다. 그게 여러모로 편하고 좋았다. 좋고 편한 정도가 아니라 그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다른 가정은 생각만으로도 아득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어쩌면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속으로 역겨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나의 사랑은 역겨움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겨움 안에 피어난 사랑을 감추기 위해, 그러니까 진짜 사랑을 오히려 역겨움으로 감췄는지도 몰랐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이해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납득하려고 노력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그 자체로 많은 사건의 시작과 끝 혹은 중간 어디쯤, 어디에 넣어도 어울렸다. 사랑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면 나는 최대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했고, 나의 잘못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것은 켜켜이 한 쪽에 쌓여갔다.

그래도 엄마가 친척들한테 애를 때렸다는 말을 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어른들이 너 엄마한테 혼났다며? 라고 눙칠 때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혼났다는 다소 약하고 귀여운 어감으로 모든 것을 뭉뚱그리는 기만이 싫었던 걸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그 환함이 싫었던 걸까. 아니, 나는 맞는 내가 다만 수치스러웠다, 아무도 그걸 몰랐으면 했다. 근데 엄마는 그 사실을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녔다. 엄마의 끝은 역시 애들은 맞으면서 커야 돼, 였는데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열심히 때렸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책상과 벽을 때렸다.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비명을 질렀다. 처음 비명을 지르고는 옆집에서 찾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지르다보니 걱정 대신 옅은 기쁨이 올라왔다. 그러다가 주먹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짜릿했다. 하지만 머리는 중요한 곳이니까, 나는 머리가 나빠지고 싶지 않았고, 타박상의 위험도 있었다. 나는 머리 대신 주먹으로 뺨을 갈겼다. 시원했다. 아팠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도 너무 화가 나 종아리나 팔, 허벅지나 어깨, 내 주먹이 닿을 수 있는 곳을 모두 한바탕 때렸다. 나는 내 몸을 견딜 수 없었다. 생생한 몸의 살아있음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이젠 더 이상 때릴 수도 없어서 온 몸을 배배 꼬고, 오른 쪽 발바닥과 왼쪽 발바닥을 마구 비비고 짓눌렀다. 온 몸 안에서 괴생물체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한 번씩 내게 말을 걸 때마다 습관처럼 머리나 뺨을 쿵 내리쳤다. 겨우 살아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집에 있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비명을 지를 수 없었는데, 그래서 나는 속으로 비명 지르는 법을 터득했다. 귀가 먹먹해왔다. 머리가 아프고 조금 억울했지만, 이 부작용의 반작용에 해당되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씩 미음이 새어나갔는데, 조금 단련되었을 때는 더 이상 미음조차 새어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자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자해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어딘가 어정쩡했다. 이것을 자해라고 보기에는 나는 칼을 무서워했다. 나는 칼로 내 팔을 긋거나 칼로 내 몸에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의 목적은 죽음이 아니라 언제나 삶에 있었다. 오히려 나는 아픈 것을 무서워하는 쪽에 가까웠다. 내가 나를 때릴 때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팠지만, 무섭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이겨내게 했는데, 나는 나를 때리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 엄마는 늘 내가 너를 함부로 대해도 다른 사람이 너를 함부로 하는 건 못 본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끔찍했다. 왜 못해? 엄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건 나야,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 사랑의 한 방식이었다. 엄마를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나는 엄마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다.

 

엄마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건 -그러니까 인정한 건- 열여덟의 어느 봄이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내리쬐는 햇빛과 바람이 너무 고요하고 좋아서, 나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내게 전화를 거는 사람은 거의 엄마였는데- 그 소리가 마치 경고음 같았다. 너는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다는, 너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포박과 감시의 힘이 있었다. 전화는 끊기지 않고 8번 더 왔다. 나는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 모든 벨소리를 끝까지 들었다. 온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벌레가 이젠 내 살갗을 파고들어 온 몸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집에 갔을 때 엄마는 마트에 갔는데 뭐 필요한 것 있으면 물어보려고 전화했다고, 왜 안 받았냐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고 대답하고, 방으로 갔다. 엄마는 따라 들어왔다. 그러더니 문제집 사이에서 나의 일기장을 꺼냈다. 나는 일기장을 무엇이라고 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일기는 잊기 위해서 마구 갈긴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꺼내는 그 행동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는 그 일기장을 박박 찢었다. 그날 울었고, 맞았고, 그날 처음 엄마에게 맞고도 나를 때리지 않았다. 피곤함뿐이었다.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나는 그날 처음 두 팔로 나를 안아주었다. 팔이 두 개인 건 때리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안아주라고 있는 거야, 같은 말을 겨우 외면서.

 

나는 원흉인 핸드폰을 해지했다. 나의 감정이 드러나는 모든 물건을 버렸다. 방을 버리기로 했다. 나를 지키는 건 오직 나뿐이라고, 되도록 나를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학교 자습실에서 늦게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집에 있을 때면 사실적인 두려움이 늘 내 곁을 감돌았다. 티브이가 켜지는 소리, 설거지를 하는 소리, 현관소리, 방문이 열리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내겐 공포였다. 공포를 견디기 위해 또다시 때리고, 안아주고, 때리고 안아주고를 반복했다. 어떤 날은 나를 미친 듯이 자학했고, 어떤 날은 필요이상으로 나를 귀하게 여겼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나는 가정폭력으로 신고하고,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청소년쉼터를 알아봤다. 쉼터에는 쉼터만의 규율이 있고, 엄마 돈이 아닌 다른 사람 돈을 쓰는 것이니 눈치가 많이 보일 거야, 그곳에도 어쩌면 폭력이 있을지 몰라.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겠니, 얼마 가진 것도 없지만 이 가진 걸 모두 다 버릴 수 있겠니. 나는 이 질문을 매일 품고 살았다. 이 질문을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었으므로 든든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바닥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시간이었다. 시간은 그 가능성을 축내고, 내게 과거의 기억을 매일 또렷하게 알려주었다.

 

경찰서에 가기 전, 나는 인터넷에 가정폭력을 검색해보았다.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를 밟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세상에, 인터넷에서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보다 더 맞고 산 애들이 한 가득이었다. 밥도 안 먹이고, 회초리로 때리고, 물건을 부수고, 맞아서 입원하는 애들도 있었다. 나는 세상에 가정폭력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놀랐다. 그것에 비하면 내가 맞은 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엄마가 회초리로 때리고,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때리고, 오빠만 챙겨준다는 한 14살 여자애의 고민에 달린 교육부 학교생활컨설턴트 18의 드림, 속상하실 것 같아요. 제 마음도 아파옵니다. 지금 현재 어머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 것 같아요, 님의 속상한 마음을 어머님께 전해보면 어떨까요? 잘 해결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힘내세요, 파이팅^^.

 

나는 힘내세요, 가 그렇게 끔찍한 말인 줄 처음 알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내가 당한 폭력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한 번 맞을 때 옆에 엄마의 친구도 있었는데 그녀가 나의 피해사실을 증명해줄 리는 만무했다. 게다가 엄마는 늘 나를 때리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자주 친절했다. 엄마는 엄마 말대로 매일 나를 위해 찜통 같은 주방에서 매일 60인분의 식사를 준비한다. 아프면서도 병원에 가지도 못한다. 종일 나를 위해 일하시고, 오직 나의 미래에 모든 기대를 건다. 나는 그 모든 노동과 시선에 맞는 값어치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값어치에 충족하지 못한 채 다 지나간 일로 엄마를 배신하는 나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근데 경찰서에서 나의 신고사건을 받아줄까. 이 모든 일에 나의 감정을 소거하고 이성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것은 큰 일이 아니었다. 집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교육의 일환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맞은 이유는 일단 일차적으로 내게 있었다. 만약 신고했는데 접수가 안 되거나, 경찰이 엄마에게 전화해서 잘 타이르세요, 이렇게 나를 집에 보낼 수도 있었다. 나는 내가 맞은 횟수와 엄마의 노고를 계산해보았다. 내가 맞은 횟수를 떠올리면서 기억을 복기할수록 더 괴로워졌다. 그 괴로움만큼 무서웠다. 얼른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선택을 해도 좋지 않을 거라는 것만 확실했다.

 

그리고 마침 윤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게 힘내라고 했을 때, 나는 지금까지의 일상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버텨온 최소한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마음속으로 얼마나 무수히 경찰서와 집 사이를 오가며 동동거렸는지 모른다. 그러다 어쩌다 완전히 낯선, 그러나 세상 쪽에 있는, 새로운 곳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또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은 정말로 내 모든 삶의 의지를 끝까지 끌어올린 최대치였다. 그리고 그것은 망각을 결과로, 아니 망각을 조건으로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숭고한 모성의 승리였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쪽을 믿는 것이 편했다. 어떻게든 더 잘 살아보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곳에 두어야 했다. 과거의 나는 윤의 말에 닿아 사라졌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품은 마지막 희망의 변형이었고, 나를 구하려는 최종적인 의지였다. 완전한 소멸, 그것은 사랑이 할 수 있는, 기억에 해당되는 가장 큰 축복이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사랑의 발화로만, 포근한 마음으로만 덮을 수 있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폭력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 과거형의 폭력이 현재에 스며드는 와중에도, 엄마는 나를 때리지 않겠다고 말한 것에서 한 번을 뺀 만큼 나를 때렸다. 나는 잘못할 때마다 맞았다. 그리고 맞을 때마다 윤이 떠올랐다. 윤을 생각하면, 윤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윤은 나처럼 이렇게 맞고 살진 않겠지. 이상한 감정이었다. 질투도 할 수 없는 순수한 부러움이었다. 사람의 깊은 사정은 잘 모르는 거라지만, 윤이라면 이런 일을 겪은 적도, 앞으로 겪을 리도 없을 것 같았다. 나처럼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 것 같진 않았다. 나는 한 번도 화장실 바닥에서 굴러본 적은 없는데 자주 화장실 바닥을 핥는 상상이 떠올랐다. 윤이라면, 이런 상상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머리채를 잡혀서 질질 끌려가는 일도, 주먹으로 뺨을 맞는 일도, 맞고 또 맞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반듯한 윤의 삶이 부러웠다. 세상에 아무리 맞고 사는 사람이 많아도 윤만큼은 아무에게도 맞을 일 같은 건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윤과의 짧은 인사만으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가끔은 그 짐작이 틀렸기를 바랐다.

 

*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되었다. 모든 상흔은 윤과 함께 밀려왔다. 나는 예전 일들은 시간이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잊혔다고 믿었는데, 그 무의식이 오랫동안의 의식의 단련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코트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결심을 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그사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실내의 온기가 비수처럼 온 몸에 촘촘히 꽂혔다. 피부에 스몄다. 잔잔히 나를 흔들었다. 나는 진동음을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껐다.

 

나는 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보여주고 싶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윤과 잠시 눈이 마주쳤고, 윤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나도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은하의 미소가 부은 뺨을 찢고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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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lawjd
  • 201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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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형

    안녕하세요, rlawjd 님. 지난번 월장원을 선정했던 소설이네요. 소설은 훨씬 좋아졌어요. 글틴 측에 전달해 지난번 버전을 내리고 이 퇴고한 버전을 월장원으로 선정해 놓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변화된 지점에 대해 묻고 싶으시면 tolevinas@naver.com로 메일 주세요. 고생 많으셨어요.

    • 2019-12-11 23:47:24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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