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

현재에 머무르기 위해선 과거와 미래를 버려야 한다. 한은 그걸 가출한 뒤에야 깨달았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실종됐다. 할머니 손에 길러졌고 중학교 졸업식 날 이름 모를 사촌 집으로 옮겨갔다. 한을 교묘하게 죽이려 들었던 건 아녔지만 그래도 숨이 막혀서. 눈치와 스트레스가 얽혀 걔의 몸을 뒤덮을 때쯤에 사촌과 잤고, 그날 가출했다. 어린애가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했던 생각이 나는 나를 버려야 한다. 오로지 현재의 나를 위해 살아야 하고 그 외의 나는 버려야 한다. 버려진 한의 몸은 금방 부패해 악취가 풍기겠지만 그런 걸 견디지 못하면 살 수 없겠다는 판단을 했다.

평소 자주 가던 슈퍼 앞에서 한은 자존심을 버렸다.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아무거나 시켜주시면 다 잘 할 수 있어요 재워만 주세요. 그때 제일 먼저 손 내밀었던 게 누구더라. 무릎 꿇지 말라고 일으켜줬던 게 누구였더라. 그날은 눈이 오던 날이었고 무척이나 추웠다고 한은 회상한다. 울진 않았는데 눈이 자꾸만 시야를 가려 구별되지 않았고 무릎 꿇고 있는 건물이 슈퍼인지 세탁소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들어간 실내는 따뜻했고 걘 바로 엎어져 잠들었다. 일어났을 땐 모르는 얼굴이 한의 얼굴을 계속 닦아내고 있었다.

깼나.

…….

이 앞 빌라 살던 애 맞제. 가출했나.

…….

가출한 애들 거둬주는 센터 같은 거 있을 건데 그런 델 가지 어쩌자고 무작정 이 앞에서 무릎 꿇고 있노.

……휴대폰이 없어서 길을 몰랐어요. 아는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그냥 걸었는데. 문이 열려 있길래 그래도 살고 싶어서. 죽으려고 가출한 건 아니니까…….

울음과 관련된 최초의 기억이 그것이라. 말하다 보니 시궁창 인생이라 서러웠다. 생각하면 날 때부터 처박히지 않았던 날이 없었고 비참하게 굴지 않았던 적 없는데 그걸 형광펜 칠해 강조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걔는 훗날 강태희에게 말했다.

 

* * *

 

한은 종종 자신의 이름을 인식하는 일에 둔하게 굴었다. 가출 후에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 같은 방향으로 등교하는 강태희와 함께 집을 나섰고 굳이 이름을 묻진 않았으나 명찰에 적힌 이름으로 민재야, 하고 부르면 한은 대답이 없었다. 걔에게서 대답을 듣고자 하면 그 짓을 대여섯 번은 해야 했던 거다. 강태희는 단지 긴장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겨우 그런 이유가 아녔다. 한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름이 없어요. 한이 가출한 지 한 달째 되던 날이다. 뻔히 명찰 달고 한단 말이 그거였다. 그날도 강태희는 한을 민재라고 불렀고 걔는 대답 대신에 그런 말을 했다. 이름이 없다고.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그닥 순탄한 인생 그래프 그리는 애도 아니어서 강태희는 그 말에 관심 가지며 물었다. 왜 이름이 없는데. 한은 대답한다. 아직 정하질 못했어요.

첨부터 민재라는 이름을 가졌던 건 아니고. 일곱 살 때까지 한은 한으로 불렸다. 이름을 지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라고 이유를 대지만 그런 건 실은 아무 효력이 없단 걸 알고 있다. 누구든 붙여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은 한으로 불렸다. 할머니가 저를 한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한동안 주민등록증에 제 이름이 한 한으로 기재되어 있었고요, 학교에 들어가야 해서 급하게 바꾼 거예요. 중학교 때까지 제 이름은 이한이었어요. 할머니가 한이란 글자를 너무 좋아하셔서. 이름이 있는데 한이라고 불렸어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을 말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이어나갔다. 한의 얼굴에 이름들을 대입하는 강태희의 표정이 옅게 찌푸려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사촌 집으로 옮겨졌어요. 마침 중학교 졸업을 해서. 이름을 싹 바꿔버렸어요. 이질감이 든다고. 사촌 이름이 민규였거든요. 그래서 민재로 바꾼 거예요. 그냥 이름 통계 사이트 같은 데서 상위권에 있는 이름 아무거나 뽑아오신 거라 뜻은 뒤늦게 붙여졌고요. 그래서 이름이 없어요. 할머니한테는 이한이었고 고모한테는 민재였는데 여기에선 아직 정하질 않아서.

강태희는 때때로 한이 안타깝단 생각을 한다. 함부로 하는 동정이 아니라 걔가 아닌 척 품는 낭만이 안타깝다. 몇 개월 뒤면 홀로 등굣길에 올라야 할 한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추운 날씨 때문에 빨개진 볼을 담아내다가. 한은 묵묵히 걷기만 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대뜸 말을 이었다. 엄마가 저를 도운이라고 부르셨대요. 세상이 도운 아이라고. 세상이 도와 태어난 아이라고 도운이라고 부르셨대요. 유일하게 뜻을 지닌 이름이긴 한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게 슬퍼요. 마침 오는 이십오 번 버스는 한의 학교로 향한다. 강태희는 대답을 고르지 못하고, 정류장에 정차한 등굣길의 만원 버스는 한을 싣고 사라지려 하지만.

도운아.

…….

다녀온나.

숙인 한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강태희는 알지 못한다.

 

이후로도 도운이라 불렸다. 개명은 싫어요. 그냥 형이 불러주는 게 좋아요. 그건 오로지 강태희 한정이었고 그렇게 불릴 때마다 한은 본 적 없는 얼굴을 떠올린다. 울컥해지는 게 있었다. 담담한 척 굴고 싶었는데 그게 안 돼서 자꾸만 이름 불리는 순간에 표정을 굳혔다. 계속, 도운이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오해할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

 

연필을 잡는 일보다 계산기 두드리는 일이 익숙했다. 한은 슈퍼 앞에 무릎 꿇었던 그 날 자존심을 버렸고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라고 다짐했으므로 살기 위해선 일을 해야 했다.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민폐라고 느끼는 순간은 매번. 눈치로 연명하는 생활이 연장될수록 책상보단 카운터 앞에 자릴 잡는 일이 익숙해졌고 그런 걸 강태희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니가 민폐라고 생각 안 한다.

제가 해요.

아무도 안 하는데 왜 니 혼자 하노.

형은 안 해도 아주머니는 하실지도 몰라요.

아니다. 우리 엄마를 니보단 내가 더 잘 알지.

늦었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한은 물렁하게 생겨선 단단하게 군다. 자꾸만 벽을 치는데 고의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유일의 수단이라 생각하니 측은해지는 게 있었다. 걔와 대화를 할 때면 강태희는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진 부위가 뼈라는 게. 벗겨내면 허물어질 거면서 그래도 단단한 구석이 있다고 당차게 구는 모습 같은 거. 한의 손가락 끝 살갗이 모조리 벗겨져 엉망인 걸 강태희는 알고 있다.

 

오래오래 살아라. 백 살이고 이백 살이고 살아서 원하는 거 다 해라. 그중에 행복한 날이 하루는 있겠지, 운아. 손톱에 의해 난도질당한 손가락에 연고를 발라주며 그런 말을 했고 한은 잠든 채였다.

 

그날은 인생 통틀어 최초로 약해졌던 날이라고 한은 말한다. 슈퍼는 문을 닫았고 함께하는 등교는 마지막이었으며 강태희를 위해 꽃다발을 건넨 건 한이었다. 졸업이라 적힌 현수막을 이상하게 오래 쳐다보던 한은 따라 들어간 교실에서 알려주지 않아도 강태희의 자리를 찾았다. 거기 앉아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뭐가 있나, 운아. 강태희가 말했을 때 한은 단지, 졸업 축하드려요. 거기 앉아 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강태희는 알지 못하지만, 한은 생생히 떠올린다. 부끄러웠다고 말한다.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단 게, 열여덟이란 게, 명찰에 달린 이름이 한민재라는 게. 추웠겠다고도 생각했어요. 창가 자리였잖아요.

인 서울이란 말이 그렇게 가혹할 수가 없다. 한은 집에 돌아와 벌써부터 짐을 싸는 강태희를 지켜봤다. 서울이랑 부산이 뭐 다를 거 있겠나 다 같은 땅이지. 그런 말을 하며 소중한 물건부터 넣는 강태희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괘씸했다고. 이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너무 미웠으니까. 이상하게 그날은 센치해지는 게 있었다.

언제나 비참하게 구는 게 가능했다. 어쩌면 비참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강태희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건 한의 기억에선 최초, 강태희의 기억에선 두 번째. 의도하진 않았지만 무릎 꿇고 애원하는 자세가 됐고 그걸 본 강태희는 자꾸만 한을 일으키려 들었다. 운아 왜 그러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럴수록 걔는 정말이지.

순간이었으나 충분히 틀어막을 수 있었던 행위였다. 강태희의 앞에서 더 강해지려 하는 한이지만 그런 건 단지 바람에 불과하고 결국엔 구차하게 눈물 흘리게 된다. 일으키려 팔을 잡는 강태희의 목덜미 껴안고 그대로 입술 맞댔다. 무식하게 돌진한 거라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키스라기에도 뽀뽀라기에도 너무 옅었으나 그런 말 외엔 부를 명칭이 없었다. 더 놀란 쪽은 한이었고 급하게 떼고 한단 짓이 강태희의 입술을 닦아내는 거였다. 울면서 계속 문질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사과하면서. 강태희는 여전히 어린 한을 안아주는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함께 지낸 날이 늘어갈수록 탁해져서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사라지지 마세요. 와중에 말했고 강태희는 짐 싸는 걸 미뤘다.

 

떠나는 날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한은 여전히 슈퍼에서 일했고 강태희는 서울 올라가기 전까지 시내로 나가 알바를 뛰었다. 민재가 대학 갈 때까진 슈퍼가 잘 돼야 할 텐데. 아주머니는 종종 그런 말을 했고 그럴 때마다 한은 어색하게 웃는다. 슈퍼가 예전만큼 잘 되질 않았다.

새벽마다 함께 놀이터에 가는 일과가 생겼다. 하루의 끝이기도 하루의 시작이기도 한 그 시간을 함께하며 나누는 대화는 한의 중심으로 흘렀고 강태희는 자주 걔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뻐끔대며 하는 말에선 물비린내가 났고 그럴 때마다 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그래도 울진 않았다. 정확한 음정으로 발음했다.

오늘은 아주머니가 저 대학 갈 때까진 슈퍼가 잘 돼야 한다고 그렇게 말 하셨어요.

응.

그런데 저는 형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건 바코드 찍는 일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어색하게 웃기만 했어요. 대학에 못 갈 거예요.

내가 가르쳐 줄까.

아뇨 저는 그냥, 일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요. 병행할 자신도 없고 그럴 만큼 일을 대단히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 머린 아예 없어서 어쩌면 초등학교 과정부터 알려주셔야 할지 몰라요.

원하면 언제든지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 말해라.

감사해요.

목도리 속에 파묻힌 채 그네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드는 한을 쳐다봤다. 아닌 척 굴지만 속이 썩어드는 냄새가 났다. 자꾸 묻어만 두려 하니 그런 것이다. 터놓고 얘길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들어갈까. 강태희가 말하자 흔들던 몸 멈추고 천천히 그네에서 내린다. 한은 늘 이랬다. 이래서 부패하는 거다. 먼저 파고들지 않으면 영영 썩기만 할 것이다. 슈퍼까지 함께 걸으며 얼어붙은 한의 손을 잡았다. 날이 아직 춥다. 그렇게 말했다.

작은 방에 이불 두 개를 펴서 누웠다. 내일 같이 시내 갈래. 물으면 한은 고갤 바닥에 처박은 채 답이 없다. 분명 거절할 걸 알고 있다. 일을 하는 것에 책임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래도 오래 답이 없는 건 갈등한단 뜻이라 안타까웠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굳이 내일이 아니더라도 엄마한테 허락받고 같이 다녀오자. 그제야 끄덕였다.

그 약속은 자꾸만 미뤄지고 미뤄져서 결국엔 무기한으로 연기됐다. 크게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녔지만 속상하지 않은 것도 아녀서 한은 배로 울적했다. 내일 아침 일찍 기차 타고 가신다면서요. 어. 짐은 다 싸신 거죠. 그렇지. 방학에는, 내려오셔야 해요. 그래. 짤막하고 평범한 대화를 나누다 별안간 한은 물었다. 형은 애인 있으세요? 대놓고 묻는 건 첨이었다.

애인?

네. 여자친구.

지금은 없지. 근데 그런 건 왜 묻노.

아뇨 그냥…, 서울 올라가면 여자친구도 사귀고 하시라구. 그 말 하려고 물었어요.

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 돌려 누웠다. 정자세로 누우면 잠이 안 온다고 항상 바닥에 얼굴 박고 잤다. 숨 쉬느라 펄떡이는 등을 보며 강태희는 잠깐 고민하다 손 올려 토닥였다. 담에 서울 놀러 와라. 거기선 정말로 놀자. 한은 코가 눌려 맹맹한 목소리로 네에, 하고 답했다. 그러나 울고 있었다는 걸 강태희는 알고 있다.

 

악착같이 살았다. 강태희와 함께 자던 방에서 혼자 잠들고 함께 등교하던 길을 혼자 오르고 민재라는 이름을 인식해내는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는 과정을 이 악물고 버텼다. 강태희는 자주 내려오진 못했으나 방학이나 명절엔 꼭 얼굴 비췄는데 그럴 때마다 한은 이별에 익숙해지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매번 가던 놀이터엔 인조잔디가 깔렸고 항상 타던 그네는 새것으로 교체됐다. 세상은 자꾸만 바뀌려 드는데 한은 언제나 한결같다. 강태희는 그 점을 좋아했지만 한은 그 점이 싫었다. 도태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는 지낼만하신가요.

뭐 똑같지. 다 비슷하다.

대체 형한테 안 비슷한 건 뭐예요.

안 비슷한 거?

네. 항상 그렇게 말하잖아요. 다 똑같고 비슷하다고.

글쎄 뭐가 있지.

저는 어때요.

뭐가.

저도 다 똑같고 비슷한가요. 다른 사람들이랑.

항상 그렇지. 커지고 싶을수록 작아지는 거. 한도 별반 다를 거 없었다. 강한 척 굴고 싶은 사람 앞에선 자꾸만 약해지는 게 있다. 이상하게 강태희를 보면 한은 자꾸 물러지고 그럴 때마다 뒤늦게 벽에 머리 박으며 후회하게 됐다. 오늘의 대화도 계속 리플레이 될 것이다. 머리 처박으며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한은 눈 끔뻑이면서 강태희한테 물었다. 부패의 냄새가, 도태의 불쾌가, 형한테도 느껴지시나요.

도운아.

네.

그거 아나.

뭐가요.

난 항상 니 걱정을 한다.

죽을 만큼 열심히 살지만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남으려 드는 한을 강태희는 항상.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강해진 뼈와 그걸 덮는 살가죽은 눈치로 쌓아 올린 껍질들이라 단단해지는 법은 깨우쳐도 당당해지는 법은 깨우치지 못한다.

난 다른 사람 걱정은 안 한다. 나 하나 사는 것도 숨이 막혀서.

…….

그래도 니 걱정은 한다.

…….

그렇다고 널 다르다 생각한 적은 없어.

때때로 사람은 목숨을 담보로 특별해지곤 한다. 특별함이 담는 의미는 너무 넓고 광범위해 악한 것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속에 걜 섞고 싶지 않았다. 특별로 치부되는 것이 싫었다. 운아, 살려면 평범해져야 한다. 사람은 목매다는 순간에 비로소 특별해지는 거다. 너는 끝까지 살아야지.

 

십 년 넘도록 슈퍼 옆을 지키던 세탁소가 사라졌다. 편의점이 생길 예정이라고 했다. 자연스레 아주머니 눈치를 보게 되는 게 있다. 한의 탓은 아녔지만 그랬다. 자신이 슈퍼에 자리 잡은 뒤부터 자꾸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 아주머니가 한에게 슈퍼를 맡겨두고 외출한 사이, 걘 처음으로 강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운이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형 말고는 불러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여보세요.

형.

도운이가? 니가 웬일로 전화를 하노.

슈퍼 옆에 편의점이 생긴대요.

아 그거. 엄마한테 들었다.

죄송해요.

니가 왜 사과를 하는데.

그냥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전부 망가진 것 같아서. 제가 다 망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아주머니 앞에선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못했는데 형한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도운아.

항상 그랬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저는 계속 민폐만 끼쳤고요. 그걸 알고도 재워달라고 한 거였고.

운아.

죄송해요 너무.

한도운.

네.

넌 세상이 도운 애라며.

…….

난 그래서 널 도운이라 부르는 거다. 그걸 자꾸 잊으려 들지 마라.

한은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강태희에게 전화했다. 상기시켜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지 못하니까 잊게 되는 것이다.

 

그날은 삼 학년의 졸업식이었고 한은 꽃다발을 샀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단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꾸 고모의 얼굴이 밟혀서였다. 강태희와의 전화를 도망치듯 끊어버리고 들었던 고개가 최초로 마주한 얼굴을. 비현실적인 상황에 눈을 끔뻑였고 고모는 말했다. 서론 없이 본론부터 들이밀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 엄마가 널 도운이라 불렀니.

그날 고모가 쥐여준 돈으로 사촌에게 줄 꽃다발을 샀다. 강태희에게 준 것보다 화려한 걸 골랐다. 의도한 것이다.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겠다고. 꼴에 하는 발버둥이었다. 등굣길에 산 걸 교실도 들르지 않고 대뜸 사촌에게 건넸다.

졸업 축하드려요.

야.

버리셔도 돼요.

대답도 듣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강태희의 졸업식 때 입었던 교복을 입고 달았던 명찰을 달고 고작 한 살 더 늘어난 나이를 가지고도 부끄럽지 않았다. 다만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서울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이 그러셨지요. 다음에 서울 오라고. 그땐 정말 놀자고 그러셨지요. 평생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어요. 그때는 형이 너무 미워서. 모든 일에 무감각하게 굴면서, 아무렴 좋단 표정을 지으면서, 가장 소중한 것부터 차곡차곡 쌓으셨잖아요. 근데 거기에 저는 없어서 그게 미웠다고요.

형. 저 이제 열아홉이에요. 첨 만났던 날의 형 나이가 돼요 이제는. 그땐 형이 정말 어른 같았는데 형 눈에는 열아홉 먹은 제가 여전히 어린애 같겠지요. 그래서 형이 사는 원룸 앞에 무릎 꿇고 재워달라고 빌면 여전히 저를 일으켜 줄 거죠.

 

딱 삼 일이다. 아주머니에게 허락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떠나기 전날, 항상 매는 책가방에 짐을 쌌다. 가장 소중한 것부터 넣으려 했는데 소중한 게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강태희를 여러 번 실어 날랐을 기차에 탑승하며 여행이라기보단 도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착했을 땐 저녁 무렵이었고 종일 한을 기다렸을 얼굴이 보였다. 그 상황의 역전이 신기했다. 항상 기다리는 쪽은 한이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단 건 행복한 일이라는 감상과. 주체할 수 없어 달렸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안겼다. 토닥이는 손이 오랜만이라 울고 싶었다.

좁은 원룸에 짐을 풀고 주변에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으나 먹는 일엔 흥미가 없어 절반을 남겼다. 그런 거로도 배가 찼다. 강태희가 한의 짐을 정리하고 먹었던 그릇들을 씻을 동안에 걘 볼 거 없는 실내를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형.

어. 왜.

바빠요?

아니다. 다 해 간다. 왜.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여전히 사귀는 사람은 없으신가요.

 

일인용 침대는 좁았고 자꾸만 부서질 것 같은 소릴 냈다. 남자랑 해본 적 있어요? 저는 있어요. 그런 말을 수치 없이 뱉었고 그 속에 사랑이나 연애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몸이 하얘 만지는 족족 붉어지는 걔의 피부를 보면서 도운아 도운아 계속 이름 불렀다. 그럴수록 안기려 드는 몸은 낡아빠진 매트리스보다도 약해서 조심스레 다루게 되는 게 있었다.

한을 덮고 있던 천들이 벗겨질수록 걘 더욱 어리게 굴었다. 평생 제 몫이 아니었을 것들. 열일곱에 가출하며 버렸을 과거와 미래를. 계속 울기만 하는 건 아파서인지 슬퍼서인지 기뻐서인지 행복해서인지 알 수 없었고 한은 자꾸만 강태희의 얼굴을 찾았다. 울면서도 눈에 담으려고 했다. 목을 끌어안아 매달렸고 그런 걜 그대로 들어 올렸다. 강태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체 상태로 자꾸만 붙잡으려 드는 건 한이었고 멀쩡히 옷 걸친 채 걔에게 붙잡히는 건 강태희였다.

한의 짝사랑이었냐 물으면 아니다. 연애를 전제로 한 섹스였냐 물어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게 살아가는 필수 과정인 것마냥 엉키려 들었다. 충동으로 점철된 입맞춤을 어떻게든 닦아내려 자꾸만 입가를 문질렀던 그 날의 한과 지금 강태희에게 매달려있는 한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굴면서. 키스하려 했다. 핥으려고 했다. 안아주세요 키스해주세요 이름 불러주세요.

 

좁은 침대에 억지로 몸 구겨 누우면서 한은 여전히 강태희를 찾았고 눈 감지 않으려 했다. 애정이 결핍된 사람처럼 구는 건 정말로 결핍되었기 때문이겠지. 고모가 왔었어요. 강태희는 그런 한을 다독이다 걔가 별안간 입 열어 하는 말에 어둠에 파묻혔을 얼굴을 쳐다봤다.

형한테 처음 전화했던 날. 끊고 고갤 들었는데 고모가 있었어요. 잘 지냈냐는 말도 왜 집을 나갔냐는 말도 없이 곧바로 본론부터 말했어요. 니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게 될 때까지 지원해줄 수 있다. 맡겨지기 전까진 서로의 존재도 몰랐고 맡겨진 후에도 그렇다 할 만큼 좋았던 사이도 아녔는데 신기하죠. 괜찮다고 했는데 끝까지 손에 돈을 쥐여주셔서. 근데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묵혀두다 꽃다발을 샀어요. 사촌이 졸업해서요. 제가 꽃다발 건네니까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는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상한 표정이었어요. 강태희는 한의 표정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담담한 목소리는 강태희의 앞에 설 때 비로소 흔들리고. 가출했던 날 사촌이랑 잤어요. 더럽죠. 알아요. 그래서 가출한 거예요. 너무 더럽고 역겨워서. 우리 둘 다 충동적이었고요 사랑이라기보단 그 나이에 품는 성적 호기심 같은 거였어요. 안지도 키스하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진행된 섹스에서 제가 뭘 더 하겠어요. 한은 그 말을 하며 품속에 더 깊게 안기려 들었다. 걔의 요구는 평범했으나 거기 얽혀있는 것들은 그걸 망가뜨릴 수 있다. 강태희는 아무런 대답 없이 한의 머릴 정리했다.

이제 형이 아니어도 저를 도운이라 불러줄 사람이 있어요. 고모가 저한테 도운이라 불러주셨어요. 엄마가 실종된 날에 쓴 편지를 찾으셨대요. 따져보면 유서겠죠. 죽었을 거예요. 고갤 들어 강태희를 쳐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다음 날에 강태희는 마감까지 코앞인 과제를 제쳐두고 한과 집을 나섰다. 놀이공원 가본 적 있나. 놀이터만 가봤제. 강태희에게 한은 여전히 평범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그중에서도 단지 어린애로 분류될 뿐이었다. 가진 것 중 가장 아끼는 옷을 입은 한을 보며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주말과 졸업이 겹친 놀이공원은 사람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한은 그런 걸 신기하게 여겼다. 세 시간 걸려 기구 하나 타면서도 이런 거 처음 봐요 그렇게 말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기분을 나쁘지 않게 여겼고 자칫하면 죽을 수 있을 법한 기구를 골라 타면서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되려 회전목마 타며 죽으면 어떡해요 떨어지면 어떡해요 손잡이가 없잖아요 목 끌어안아요? 그랬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퍼레이드를 보려던 건 아녔는데 하나를 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어쩔 수 없었다. 터지는 불꽃과 사방에서 울리는 노랫소리에 넋 놓고 서 있는 한의 손을 잡아 이끌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런 데서 죽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한은 그런 말을 하며 처음으로 웃었다. 감정에 충실하게 구는 건 한에게도 강태희에게도 최초다. 도운아.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이유 없이 불러보는 일도.

저도 서울에서 일하고 싶어요. 놀이공원에 취직하면 매일 행복하겠지요.

 

한은 예정보다 일찍 부산으로 내려갔다. 고모가 저를 찾으신대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직후였고 남는 기차표가 없어 택시 태워 보냈다. 짐은 택배로 보내둘게. 한이 어정쩡하게 웃었다. 지을 표정이 없을 때 그런 얼굴을 했다.

연락할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고.

부산에서도 또 놀아요.

설에 내려가면 놀자.

강태희의 말을 끝으로 한은 입술 짓이기다 택시에 몸 실었다. 여전히 손끝은 껍질이 까져 성한 곳 없었고 약한 피부는 겨울바람에 부르튼 채였다. 강태희는 한이 탄 택시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한은 차마 창문 내려 소리칠 자신이 없어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요.

 

운명은 다른 듯 비슷하게 흐른다. 순간으로 비틀리는 그것은 모두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에 무감각하게 구는 사람을 침몰시키는 일엔 흥미 가지지 않는다. 몇 년 만에 정식으로 마주한 사촌은 당장 졸업식 때와 비교해 꼴이 말이 아녔고 아마 고모가 한을 찾은 건 최초이자 최후였을 것. 사촌의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럭에 치였다고 했다. 그걸 눈앞에서 목격한 사촌이 병원 침대에 고갤 처박고 운다. 한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의식이 잠깐 돌아왔을 때 너를 찾았다. 도운이라 부르더라. 이유는 모르겠다. 고모부가 말했고 한은 단지 고모를 쳐다봤다. 특별한 건 없었다.

부산에 내려온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다시 상경했다.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에 날이 밝아지는 게 싫었다. 막을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즉사였나요. 고통은 없었던 거죠. 체념하는 일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같은 질문 반복하게 되는 건 체념보단 미련에 가까운 행위다. 몇 시간 전까지 붙어있던 숨이 한순간에 끊겼다는 것. 뜰 리 없는 눈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게 이상하다. 삶의 흔적이 걷어졌을 얼굴을 자꾸 쓰다듬으며 울기만 하는 아주머니를 위로했다. 울지 마세요오.

한을 배웅하는 길에 사고가 났다고. 뺑소니였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도로 위에서 홀로 식어 갔을 심장을 생각하니 아릿해지는 게 있었다. 살 수 있었다면서요. 고통 끝까지 다 느끼고 죽었다면서요. 즉사도 아녔고 고통이 없던 것도 아녔다고. 손톱으로 마구 짓이긴 손가락은 흰 피부와 대조되어 붉어진다. 이렇게 짓이기고 짓이겨서 뼈까지 드러나게 되면 어떻게 해요. 연고 발라주셔야죠. 형이 발라줘야죠. 아무도 내 손이 어떤지 알지 못하니까. 형이 해야죠. 한은 전부 기억한다.

 

세상이 도운 아이라고 했지만 그런 건 그렇게 불러줄 사람이 있을 때 효능이 있는 거예요. 편의점이 생긴 뒤 꾸준하게 매출이 줄어든 슈퍼는 문을 닫았고 강태희와 함께 가던 놀이터는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여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 과제는 아무도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의식 불명이던 고모는 이제 한 칸짜리 작은 방에 뼈만 담긴 채 살아있다. 숨을 쉬지 않아도 사는 것들이 있다.

성인이 된 한은 부산에서 일한다. 살아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 숨 쉬는 일이 버겁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펄떡이는 것이. 이제는 민재라는 이름을 인식하는 일에 익숙해졌으나 걘 여전히 이름이 없다. 불러줄 사람이 없어 폐기했고 떠오르는 얼굴들이 괴로워서 지워냈다. 한은 다신 도운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걸 은연중에 생각한다. 살아남으라고 말해줄 사람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