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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세상을 구한다

  • 작성자 김화리
  • 작성일 2021-01-31
  • 조회수 831

고양이가 세상을 구한다. 나만 없어 고양이. 이런 말이 있다. 고양이가 나오는 유튜브 채널은 몇 백만 구독자를 훌쩍 넘기고 사람들은 고양이에 열광한다. 현주도 그랬다. 모든 종류의 고양이를 전부 좋아했고 미친 새끼들 몇 명이 고양이들 죽이는 영상을 자기가 무슨 희대의 범죄자인 것처럼 생각하며 공유할 적엔 청원하고 다 같이 분노했다. 넷플릭스에서 고양이를 연쇄적으로 죽이다 사람까지 죽이게 된 인물의 다큐멘터리를 볼 때였다. 진공비닐팩과 냉동고에서 죽은 고양이들을 보자 숨이 넘어가게 오열하던 현주는 범인이 사람을 죽여 목을 욕조에서 가지고 놀았다는 대목에서는 추스릴 수 있었다. 현주는 항상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다. 관심도 많았다. 또 혼자 살면 강아지는 키울 수 없고, 기다리지 않는 고양이를 키워야 했다고 생각했다. 성숙한 생각이었다. 현주가 동경하는 혼자 사는 여자 유튜버, 연예인들은 모두 고양이를 키웠다. 고양이를 예뻐하며 물고 빨 때마다 부러웠다. 귀엽게 같이 셀카도 찍고. 현주는 원룸 보증금을 넣자마자 고양이를 백방으로 찾기 시작했다. 스코티쉬 폴드가 제일 귀여웠지만 유전병이 있는 아이라 아픈 애였다. 수요가 많아 필요 이상으로 교배되면 안 되기에 포기했고, 매력적인 스핑크스는 너무 비쌌다.
그러던 중 전혀 왕래하지 않던 친척에게 페르시안 고양이를 선물 받았다. 6개월 정도 되었었는데 귀여웠다. 간식으로 유혹하면 간신히 셀카를 같이 찍어주기도 했다. 현주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고른 뒤 자신의 얼굴보다 고양이를 더 열심히 보정했다. 그런데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를 않았다. 영상에서는 분명 이름 부르는 것도 알아듣고, 부르면 울기도 하던데. 현주의 고양이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천장에서 냄비가 떨어졌는데도 태평하게 방석을 긁던 모습을 보고나서야 병원에 데려갔다. 페르시안 고양이는 6개월이 넘으면 귀가 안 들린다는 진단을 받았다. 현주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 후로는 이름을 전혀 부르지 않았다. 3개월 뒤 후임의 실수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그때. 새벽 3시에 귀가해 다음 날 일어나 밥을 챙겨주는데. 고양이가 일어나지를 않았다. 고양이는 원래 하루의 3분의 2를 잔다니까. 그러려니 하고 밥그릇을 조금 더 고양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밀어둔 다음 또 바쁘게 출근했다.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퇴근했을 때. 고양이의 자세가 똑같았다. 밥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고양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현주는 사료와 물을 정리하고 고양이를 본가 뒷마당에 묻어주었다. 다시 돌아와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는데 혈변과 피로 젖은 모래가 나왔다. 최신식 고양이 화장실을 구매해 몰랐던 것이다.

*

2주 후 현주는 인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 남자가 올린 글을 보게 되었다. 집 마당에 고양이가 들어와 어쩔 수 없이 돌봤는데 새끼를 낳았다고, 어미를 포함한 6마리를 무료분양 한다는 글이었다. 자신은 바빠서 키울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추신도 덧붙여져 있었다. 그 중 셋째라는 삼색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방울방울한 눈망울이 현주를 당장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스크롤을 내리자 지하철로 8정거장. 환승은 한 번. 척 봐도 집이 좋아보였다. 서울에 마당 있는 집이라니 말 다했지. 액수가 상상되지도 않는 마당의 넓이, 뒤에 보이는 통유리, 그 옆 커다란 석수. 그것도 모자라 고양이를 구조할 줄도 아는 선한 마음까지. 현주는 기분이 묘했다. 약간 부정적인 방향의 기분이라 의아했지만, 왜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고찰하지는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한참을 걷는 동안 평생 와본 적도 없는 동네에 도착했다. 누구한테 잘 보이겠다는 건지 새로 산 구두를 신은 현주는 이 언덕배기의 경사에 후회하는 중이었다. 저 앞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대부분 여자였다. 작은 케이지를 들고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자 두 명이 보였다. 불안해진 현주가 아킬레스건이 여러 번 쓸리도록 엉거주춤 뛰었다.
이미 열려진 문으로 기웃거리며 들어서자 선하게 생긴 남자 한 명이 현주를 맞아주었다. 치열이 고르고 환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호감형 이라는 기운을 세상에 발산해대는 사람.
“안녕하세요! 입양하러 오셨어요?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아 글 올리신 분이세요? 집주인?”
현주는 말을 마치고 어미처리에 대해 조금 후회했다.
“아, 네. 고양이들 안쪽에 있어요. 따라오세요!”
경쾌한 남자, 싱그러운 남자. 이런 집을 가진 남자, 따듯한 남자.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남자를 따라 또 걸어 안쪽으로 들어서자 마당 한가운데 7~8명 정도의 여자 무리가 보였다. 엄마와 딸도 있고, 친구 둘도 있었고, 자매도 있었다. 혼자 온 건 나뿐인 듯하다. 남자가 가보라고 손짓하자 현주는 남자를 빠르게 지나쳐 저 앞의 교태의 바리케이드로 향했다.
“어? 발뒤꿈치에서 피가 나시는데. 괜찮으세요?”
남자가 빠르게 다가오자 현주는 눈알을 굴렸다. 뜨듯한 게 흐르는 걸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들켜버리고 말았다.
“구두 때문이신가 봐요. 일단 들어오세요.”
아까보다는 상처를 숨기려는 기색을 지운 채 현관으로 향하는 남자를 따라갔다. 왼쪽에서 여자들 한두 명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자기들끼리 소곤대는 거 같기도 했다. 현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우월감에 어깨를 더 펴고 조금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신발을 벗으려고 상처를 확인하자 생각보다 깊었다. 찢어진 살점이 구두 뒤쪽을 약간 덮고 있었다. 의식하자 더 아파지기 시작했다. 옅은 신음을 내며 구두를 벗고 천천히 소파로 가 앉았다. 소파가 현관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 신기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고 쿠션을 손으로 한 번 쓸어보는데, 남자가 돌아왔다.
“여기 구급상자에요. 소독하시고, 피 닦고 밴드라도 붙이세요. 바닥 미끄러운데 슬리퍼 신으시지.”
현주는 소파 너머로 구급상자를 넘겨받고 느린 손놀림으로 구급상자를 열었다. 게임에서만 구급상자를 보았지 실제로 이렇게 완벽한 구급상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구급상자는 다양한 것들이 오와 열을 맞춰 정리되어 있었지만 솔직히 밴드와 붕대 말고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 어떤 게 소독하는 거였죠?”
남자는 이번에도 웃으며 희고 길쭉한 병 하나를 집어 현주에게 건넸다. 현주는 피를 좀 닦아내고 솜에 소독약을 묻혔다. 도중 남자의 팔은 40데니아 허벅지 두 쪽을 건너가 구급상자로 향했다.
“집게로 하시는 게 더 좋아요.”
집게를 받아들어 솜을 잡고는 상처부위를 톡톡 건드렸다. 남자는 또 잠깐 어딘가를 다녀오더니 운동화 하나를 가져왔다.
“돌아가실 때, 이거 신고 가세요.”
그 남자가 현주의 구두를 가방에 넣으려고 살짝 허리를 숙이자 아픈 것도 잊고 달려 나가 구두를 낚아챘다.
“아. 피가 묻어있기도 하고, 더러워서. 제가 할게요.”
현주는 그 남자 특유의 눈웃음을 조금 따라하며, 구두를 가방에 욱여넣었다. 피 따위는 핑계고,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이만 원 주고 산 구두의 정체를 들켜버릴 것 같아서이다. 남자가 구두를 조금 응시한 것만으로도 현주는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현주는 흰색 나이키 운동화를 받아들었다. 만난 지 30분도 안된 사람에게 나이키 운동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현주는 기쁘면서도 약간 착잡해졌다.
필요 이상으로 다리를 조금 들어보며 밴드를 붙였다. 그 때문에 치마가 살짝 올라갔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남자가 정면을 중시하고 있자 현주는 살짝 실망했다. 곧바로 실망한 자신에 대한 약간의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양심이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금방 사라졌다. 구역질을 다시 꿀꺽 삼키는데 바리케이드 중 한 명이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 결정했어요!”
남자는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치료 다 하면 나오라는 따듯한 말도 잊지  않은 채로. 현주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티 나지 않게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시시콜콜한 생각들을 하다 일어났다. 이 운동화는 집에 가자마자 당근 마켓에 올려야지. 같은.
도착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고양이들을 보게 되었다. 순간 아까 남자를 불렀던 여자가 삼색이를 케이지에 넣는 걸 보았다.
“어!”
현주는 순간 삼색이를 쥔 여자의 손목을 잡아채 버렸다. 현주는 붙잡은 손에서 꼬물거리는 삼색이와 자신의 특별히 예쁘지 않은 손 아래로 달랑거리는 여자의 얇은 체인 팔찌를 본다. 브랜드는 메트로시티. 현주는 손을 놓는다.
“아, 죄송해요.”
모두가 현주를 이상하게 쳐다본다고 현주는 느꼈다. 한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고 눈치만 살피며 삼색이가 떠나가는 걸 보았다.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 같아 누가 봐도 화장실이 급해서 들어가는 게 아닌 사람처럼 화장실의 위치를 묻고 30초 전에 걸어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현주는 너무 따듯해서 평생 바지를 벗고 있고 싶은 비데를 뒤로 한 채 쭈뼛거리며 나왔다. 오래 앉아있지는 않았다. 큰 걸로 오해받으면 안 되니까. 나오자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리케이드가 거의 다 허물어져 있었다. 현주가 다가가자 마지막 여자가 떠나고, 남자가 고양이와 함께 나를 바라봤다. 그 싱그러운 남자. 눈꼬리가 빛나서, 주기적으로 관리 받을 흰 치열이 너무 예뻐서. 언제나처럼 말 대신 여유의 미소만 띄워서.

*

“아.”
현주는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를 내버렸지만 다행히 그게 탄식인 것은 들키지 않은 듯 했다. 엄마 고양이 한 마리만 남아있었다. 삼색이가 아니더라도 아기들을 입양 할 생각에 성묘는 보지도 않았는데, 지금 팔자 좋게 고액의 잔디밭에 엎드려있다. 성묘인 엄마 고양이는 못생겼다. 길 냥이 인데 부어서인지 뚱뚱했고, 찢어진 눈도 작다. 크기도 왜 그렇게 큰지. 무늬도 얼룩덜룩하니 안 예쁘다. 현주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그래도 성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덜렁거리는 운동화 창을 애써 바로잡으며 고양이 대신 남자만 본채로 고양이를 케이지 안에 넣었다. 좀 작았다. 현주는 운동화를 사례하고 싶다며 연락 해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이 남자에게 사례하려면 얼마나 들지 알 수 없으니까. 지하철을 타자 현주의 새 고양이는 꽉 끼는 케이지 안에서 하악질만 해댔다. 예쁘게 울지도. 골골 송을 불러주지도 않고. 괜찮나 번쩍 들어 확인하면 난리를 쳤다. 옆자리에 이쪽으로 불편할 정도로 붙어 앉은 아저씨가 노골적으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부인과 현주, 현주의 고양이에 대해 얘기했다. 현주는 케이지를 한 손에 들고 옆칸이나 옆옆칸으로 이동하려 일어섰다.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신경을 쓴다고 썼지만 지하철이 흔들리니 케이지가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현주는 생각하며, 약간 비틀대지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손에 들린 고양이가 연속적으로 철창에 부딪히며 버둥거린다. 그러자 현주가 저 앞의 젊은 여자 눈치를 본다.

김화리
김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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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화리
  •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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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화리
  • 20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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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황선효님이 만든 인물 중에 가장 볼륨감이 있는 인물 같아요! 확실한 선도 확실한 악도 아닌, 그 경계에 있는, 풍부한 감정을 가진 인물이요. 그래서일까, 실력이 많이 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인물을 평면적으로 만들지 않는데에 앞으로도 많은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끝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좋은 인물을 가지고 그려낸 사건임에도 그닥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라는 소재, 그리고 새끼만을 선호하는 사회, 이런 것들이 이미 너무 많이 회자되고 있어서인 듯합니다. 서사도 인물처럼 확실한 선도 확실한 악도 아닌 그 경계에 있는 이야기로 그려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 2021-02-13 17:16:04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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