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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랑할 의무를 진다

  • 작성자 Levine
  • 작성일 2022-01-04
  • 조회수 232

1.

민희는 몇 번의 기침 끝에 결국 피를 토해냈다. 입에다 가져다 댄 접힌 휴지엔 검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비틀대며 세면대로 걸어가 잔류한 기침을 내뱉고 입가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희는 갑작스럽게 현기증을 픽 느끼고선 변기에 쓰러지듯 앉아 어지러움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 어지럼증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찾아오는 것이었고, 그럴 때마다 민희는 꼼짝없이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죽 하나 끓여주는 건 과한 기대라고 쳐도 자신의 옆에서 경과를 지켜봐 줄 교분 깊은 이가 없다는 데에 그녀는 깊은 외로움과 슬픔을 느꼈다. 집채만 한 파도처럼 몰려드는 상실감은 누워 있는 그녀에게 우울감을 불러일으켰고, 우울은 마음 깊숙이 파고든 서슬 퍼런 칼날처럼 날 선 상처를 내며 이불에서나마 그녀가 고통을 감내하며 몸부림치도록 만들었다. 그 처절한 움직임을 지켜보는 우울은 사념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불을 나갈 수 없는 동안 울적한 상념과 염세의 보기 좋은 먹잇감이 된 그녀는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저 우수에 찬 달빛만을 바라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수도꼭지에선 물이 묵직하게 방울질 때까지 모이다가 똑-똑-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고, 그 물방울 중 하나가 세면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며 낑낑거리는 벌레 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그녀는 보았다. 이름 모를 작은 벌레는 습기의 속박에서 달아나지 못하고 물 한 방울에 눌려 박살 나버리고 말았다. 민희는 살며시 수돗물을 틀었고, 벌레의 잔해가 수압에 휩쓸려 깊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을, 그런 장면을 그녀는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민희는 거실의 크게 난 창에 기대서서 1층 화단의 관목을 게슴츠레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관목이 듬성듬성 흩어져있는 모양새가 썩 예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은 공허가 들어찬 그녀의 지친 두 눈을 사로잡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침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민희는 젊은 편에 속했지만 젊어 보이지는 않았다. 근묵자흑. 두 자릿수가 넘는 주위 사람들과의 나이 차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부여된 과중한 업무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서서히 새겨진 세월의 흐름은 눈가의 패인 깊은 주름으로서 형상화되었고 그 패인 자리엔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민희는 지금보다도 더 젊은 시절의 혹사로 건강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바짝 모아둔 얼마의 목돈 덕에 이젠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남은 날들을 요양에 전념해야 하는 삶을 보내야만 하는 운명을 지게 되었다. 수년 전, 모든 것을 걸고 일에 투신하던 때만 하더라도 그런 열정이-마치 불길을 꺼뜨리기 직전의 횃불은 마지막 발악으로써 가장 큰 불꽃을 피워내는 것처럼-삶의 촛농을 빠르게 태우는 최후의 연소라는 것을 몰랐다. 얼마간의 부귀에는 건강이라는 큰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당시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기대감은 기대할 수 없었고, 여유는 사치였고, 설렘은 생소한 것이었다. 감정을 거세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고, 건강을 바치지 않고서는 약간의 부유함조차 누리지 못하는 민희의 삶은 비극적인 요소가 한껏 가미된 희극이었다.

병을 앓게 된 이후로 민희는 웃음을 잃었고 늘 기침을 달고 살았다. 하루에도 여러 번, 격한 기침 끝에는 늘 피가 배어 나왔다. 어릴 적부터 피라면 벌벌 떨었던 그녀는 이제 익숙하게 피를 닦아낼 수 있었다. 무덤덤해지지 않으면 환자로의 삶을 유지할 수가 없다. 한번은 자신이 지금까지 뱉어낸 피를 모두 한데 모아 욕조에 붓고 몸을 씻는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자신의 몸이 피에 함뿍 젖은 모습을 한번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은 상식적인 이성에 밀려 금방 사라져 버린 한때의 욕구로 남았기 때문이다.

민희는 언젠가, 방황하던 시절의 한때, 달빛의 쪼개진 줄기들이 창가로 깃들어 흑백의 공간에 가득 찬, 침체되어있는 공기를 가르는, 좁은 방의 한구석에서 긴 밤을 잠들지 못한 채로 지새우던 시절이 있었다. 우울과 염세로 점철되어 있던 밤을 증오했다. 자신에게 닥쳐올 지독한 운명을 예기하기라도 한 듯이 한동안 세상을 비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박복한 신세를 한탄했다. 등거리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새벽녘의 바람이 불어오면 그 싸늘함이, 그 쌀쌀함이, 그 쓸쓸함이 목전까지 휘감아 올라왔다. 민희는 웅크려 앉아 스스로를 안았지만, 그녀를 보듬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슬픈 달빛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불쌍한 자를 둘러쌌다. 동정심은 동료의식이었다. 각자가 서로를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달의 위로를 기쁘게 받아들인 외로운 자는 이제 울지 않는다. 무뎌진 눈물샘이 멎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은 아니다.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새는 전봇대와 전봇대를 연결한 전깃줄 위에 날아들어 앉았으되 다시 포롱거리며 날아오를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오랫동안 한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가까운 날에 들어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아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음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순간순간 변모하는 사회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 그의 뺨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자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어딜 봐도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황량한 눈밭이었다.

흰 들판에 홀로 남은 듯, 그는 눈을 찌푸리며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의 어느 지점을 향해 시야의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먹구름이 낀 하늘에선 눈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점점 하얘져 갔다. 셔터를 누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흰 빛. 입김을 내뿜는 그는 목도리를 둘러멨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은 그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걷는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은 방향을 바꾸어 그에게로 맹렬히 향해 그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혹한의 계절은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된추위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얼굴이 벌게지고 입을 잘 벌리지도 못하는 그는 목도리를 올려 매고 순례자처럼 묵묵히 걷는다. 순결한 눈밭에는 그의 발자국만 남아있었다. 남은 발자국만이 표지가 되어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창문에 스민 서리를 발견한 민희는 오한이 들었다. 몸을 가볍게 떨었다. 민희는 옷장에서 카디건을 꺼내 걸쳐 입었다. 겨울이 왔구나. 또 겨울이 오고 말았구나. 세 번째 겨울이었다. 삼 년 전 그 해부터 지금까지 민희는 겨울이 올 때마다 얼어붙은 냉기가 뿜어내는 혹독한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살갗을 에는 추위에 고통스러워했다. 아침이면 창틈으로 불어든 칼바람에 깨곤 했다. 그렇게 깨어나면 그 날은 다시 잠들지 못했다. 강제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민희는 전날 우려낸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이불을 개고, 개어진 옷들을 펴는 것으로 하루를 열었다. 민희는 식욕의 부진과 소화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침은 거의 거르는 편이었다. 점심도 인스턴트 식품으로 간단히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냘픈 손목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인다. 얇은 손가락 끝에서 탄생한 정교하고 복잡한 문양의 큼지막한 휘장도 벌써 몇 장이나 쌓여 있었다. 민희는 집에 머무는 시간의 대부분을 바느질과 뜨개질로 보냈다. 그런 생활에서 민희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북적이는 것을 기피하는 그녀의 천성 때문이었다.

2.

그는 옷을 두껍게 입은 탓인지 분명 겉으로 드러난 살갗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지만, 속살은 땀에 흠뻑 젖고 말았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숨이 차는지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코트 속의 색 바랜 셔츠로 땀을 닦아내며 끝 모를 눈길을 마냥 걷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나름 오래 걷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기도 하였으나 이번처럼 구름 위에서 눈을 폭격처럼 쏟아붓는 듯한 폭설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계속해서 쌓여만 가는 눈을 헤쳐나가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심지어 폭풍같이 몰아치는 바람은 역풍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심히 지쳐가고 있었다. 물론 그의 체감상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 정도 재난까지는 아니었고 예년보다 좀 더 많이 내리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적지 않은 양의 수분섭취가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의 주위에는 고체화된 액체가 넘치도록 많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수백 리는 족히 걸어온 그는 한계가 임박했음을 느꼈으나, 주변은 사방이 똑같은 풍경의 반복일 뿐인 고요한 벌판뿐이었다. 먼 곳을 향해 모든 힘을 짜내어 외쳐봐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울림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긴 것처럼 일시에 시야의 암전을 느꼈다.

민희는 멀리서 걸어오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그녀에게로 가까워지며 점점 느려지는 것을 좁은 방의 작은 창을 통해서 보고 있었다. 지평선을 넘어올 때부터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직했다. 민희는 그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민희는 내심 그가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친 그는 마침내 눈밭에 쓰러졌다. 눈의 두께는 그만큼 낮아졌고, 그는 북풍의 눈보라에 점점 덮여가고 있었다. 눈밭 위에 쓰러졌던 그는 눈의 이불에 덮여 눈밭 아래로 침전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이는 민희뿐일 것이다. 민희는 작게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민희는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을 홀로 지켜볼 수 있음에, 또 그 순간이 지나면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자신마저 그 누군가를 따라가게 되는 때가 온다면 이제 이 세상에는 잊혀진 사실이 매몰된 거짓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묘한 들뜸과 희열감, 어떤 열망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민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누운 그를 생각하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한 손에는 데워진 물을, 다른 한 손엔 모피 가죽을 들고 눈길을 바삐 걷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로 누운 그의 앞에 당도한 그녀는 쓰러져 미동도 없는 남자의 입술을 축였고 모피를 덮은 그를 짊어지고 온 길을 되돌아갔다. 작은 아파트의 넓은 거실을 지나 좁은 방의 큰 2인용 침대의 한 켠에 그를 눕히자마자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은 민희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정제된 숨이었다. 수염이 번들거리는 듬직한 풍모의 그가 눈을 깜박이기 시작한 것은 지친 민희가 눈을 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두꺼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낮은 음향의 신음을 듣고 깬 민희는 이미 깨어난 그와 눈동자를 마주쳤다.

실로 어색한 대척으로 형성된 무거운 분위기를 누른 것은 간병인의 명확하고도 차분한 음성이었다.

“쓰러졌어요. 괜찮으신가요.”

그는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다시 이어진 침묵에 그녀는 말했다.  “뜨거운 물을 가지고 올게요.”

민희가 부엌으로 나가 잘그락대는 소리를 내며 가재도구를 뒤지는 소리를 내는 동안, 나그네는 일전의 총기와 이글거리는 특유의 눈빛을 되찾았다. 아, 아, 하며 목소리를 시험해보는 그의 목소리는 중후함과 활달함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는 안심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마침 그 순간에 그녀가 방에 들어왔다. 민희는 돌아오면서 기운을 차린 그의 모습을 보고 놀란 기색을 잠깐 내비쳤으나 곧 태연한 안색으로 돌아와 침대 옆 좌탁에 따뜻한 물이 담긴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너무 뜨겁지 않도록 식혔어요. 네, 미지근한 물. 지금 마셔도 편하게 마실 수 있을 거예요.”

강인한 턱선을 지닌 남성은 곧 컵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깨질 듯이 잡아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그가 말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에 금세 환자의 모습에서 탈피한 그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보니 전형적인 남성상이었다. 독수리의 눈매처럼 이글거리는 전매특허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그도 사랑에 빠졌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낯선 남자와 낯선 여자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난 만큼 금방 감정을 트고 친교를 맺게 되었다.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머지않은 일이었다. 민희와 그는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정말 잘 맞는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그녀는 그의 사진작가로서의 일화-대부분 이역만리의 타국에서 벌어진 기상천외한 사건들이었으므로-를 가장 재미있어했다. 이를테면, 초원 한복판에서 사자무리와 맞닥뜨려 탈출하기 위해 필사의 추격전을 감행한 일이나 악어가 가득한 늪지를 건널 때 악어 등을 뛰어넘어 갔던 일, 사막의 원주민 부족과 친해져 부족장의 딸을 소개받고 하마터면 그곳에 정착할 위기를 겪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경험자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생생함과 실감 나는 묘사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일화 몇 가지 중에서도 그녀는 정글의 어느 한 부족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안개가 자주 덮이는 정글에선 원주민 여성들이 나체로 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북을 닮은 생소한 악기를 연주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나팔을 불어댄다, 그곳 사람들은 음식을 날로 먹기도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코를 찌르는 악취를 동반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마치 어디서 보기라도 한 것 마냥 강한 데자뷔를 그의 말 속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었던 그는 금방 그녀의 울타리를 넘게 되었다. 그녀의 집에 머문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3.

“달이 아름답네요.”

“정말, 달이 아름다워요.”

“달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우리도 달을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전 당신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네요.”

“언제나 예측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니까요. 영롱한 달의 눈동자를 보고 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재밌네요, 저도 당신이 좋아요. 달이 여전히 아름답네요.”

“지금이니까 드는 생각입니다. 보름달이 기울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저 아름다운 달을 지금부터 당신과 영원토록 만끽하고 싶어서요.”

“지구를 멈추게 하면 되겠죠.”

“불가능하다는 거군요……. 좀 슬픈 사실이네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너무 염려는 마세요. 달은 지지만 그 자리는 더 뜨겁고 밝은 햇빛으로 채워질 테고 또 그 해가 진다면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달빛이니까요.”

“저 달에 닿을 수만 있다면……. 당신은 달을 만져보신 적 있으신가요.”

“달은 바라보는 것만도 족하지만 저는 달을 만져본 적이 있죠. 단단하던 걸요.”

“달 모양 과자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지도 모르죠. 하나 분명한 것은 달은 반드시 단단하다는 거예요.”

“재밌는걸요.”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되기를.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저도 동감이에요.”

“우리가 만나게 된 건 운명이겠죠.”

“그럴걸요, 그렇지 않을까요.”

“우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요.”

“그러길 바라야죠.”

“사랑합니다.”

“저도요. 사랑하고 있어요.”

“아,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이 행복을 어떻게 표현해야 만족스러운 표현이 될지…….”

“저도 제 마음을, 오랫동안 가꿔오고 키워왔던 당신에 대한 연모를, 연정 깊은 소회를 털어내도 괜찮을까요. 지금 이 자리가 아니면 기회를 잡지 못할 것 같거든요.”

“정말요. 네, 좋아요.”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고, 당신 같은 친구를 만나서 얼마나 좋았는지, 당신이 나에게 보낸 애정과 정분과 헌신에 비하면 내 그릇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다는 것, 어떤 아름답고 미려한 문학적인 수사를 줄줄이 늘어놓아도 당신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받은 나의 심정을 표현하긴 힘들다는 것, 세상의 어떤 미문이라도 당신에게 붙인다면 평범한 사실의 나열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이밖에 모든 찬양과 찬미를 합쳐도 열렬한 신도의 신앙에는 미칠 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기억하고 계십니까. 처음으로 저에게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을 선사해 준 당신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 준 당신을 보던 나를 본 이가 있다면 나더러 아둔한 자라고 꾸짖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앞으로도 저와 친하게 지내주십시오. 저에게 계속해서 애정을 보내주십시오. 그럼 저는 미약하나마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것이 제 보답입니다. 마음속에 떠다니는 단어들을 붙잡아 끌어내는 것이 혼잡하여 다소 두서가 없이 들릴지도 몰랐겠습니다. 달을 보면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물웅덩이를 봐도 당신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풀이며, 꽃이며 심지어 공기에서마저 전부 당신의 내음이 피어오릅니다. 제가 보는 모든 것에서 당신이 튀어나와 저를 유혹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가슴 속에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저 한 단어를 꺼내기까지의 고통을, 저의 빈곤한 매력과 대조되는 당신의 고매한 인품, 그 괴리에 갇혀 얼마나 괴로웠는지, 오랜 고뇌와 번민 끝에 혀에 한 글자씩 배어 나온 글자들을 초연히 늘어놓던 그때의 제 심정을, 당신은 헤아려줄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당신의 여유로움을 흠모하고 있었고 어떤 때는 질투했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끝끝내 당신의 여유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만일 배웠더라면 이런 긴 고백은 하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모든 면모를 제가 따라가기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큰 간극이 가로막고 있는지라 저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려 깊은 당신은 이 장광설을 모두 이해할 겁니다. 나는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최선입니다. 당신을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네,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모든 것을 알려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오늘만큼 아름다운 밤하늘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정말, 밤하늘이 반짝이고 있네요.”

“오늘 밤은 부디 좋은 꿈을 꾸십시오. 그러면 그 꿈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만 잔뜩 나와 당신을 기쁘게 해줄 것입니다.”

4.

강렬한 후각의 반응!

민희는 숲속에서 희뿌연 안개의 습격으로 길을 잃고 말았다. 똑같아 보이는 두꺼운 나무들 사이를 헤매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깊은 숲속에서도 민희를 찾으러 온 그의 향수 냄새, 언제나 똑같은 향수를 쓰는 듯 그의 몸 구석구석까지 배어버려 이제는 그의 냄새라고도 할 수 있을 그 냄새, 후각을 자극하는 그 냄새를 맡고서 그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희는 그의 향수 냄새를 맡았고, 그는 민희의 샴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몸을 밀착시킨 채로 있었다. 꼭 안고 있었다. 서로의 육체가 포개어져, 몸과 몸을 맞부빌 때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각이 체향에 취한 각자의 기분을 고취시켰고, 민희는 그 포옹에서 충분한 만족과 안도감을 얻었다. 민희의 등에 얹은 그의 손등엔 핏줄이 돋았고, 민희는 그의 품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섬세한 숨결은 민희의 코로 들어갔고 민희의 희미한 콧김은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애(愛)와 희(喜)로 가득 찬 밤이 기울고 있었다.

새벽녘의 을씨년스러운 안개는 아침 해가 떠올랐음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짓궂게도, 몸을 부풀려 더욱 두꺼워졌고 커진 부피에 힘을 빼고 몸을 흐느려뜨려 더욱 넓게 퍼진 안개는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산맥의 거대한 봉우리마저 높아진 안개의 수위에 잠겨버린 그 날 오후엔, 빛이 잘 들지 않는 좁은 거실에서 서로 뒤엉켜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엉켜 누워 있어도, 그들은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만큼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들의 사랑은 순식간에 무르익고 있었다. 그는 팔 위로 민희를 눕히고는 베개가 된 팔은 민희의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만졌고, 다른 팔로는 민희의 볼에서 허리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민희는 어느새 균일한 호흡을 내뱉으며 편안한 얼굴로 쌔근대며 곤히 잠들었다.

민희의 얼굴은 예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냉정하고 차분했으며 꾹 다문 입에선 세인의 일에는 관심을 끊었다는 것을 드러내듯, 노골적인 따분함을 냉소로 여과 없이 드러내던 경직된 표정에서 벗어나 이제는 소녀의 순수성과 다정함과 따뜻함을 고이 간직한 표정과 온화하고 예쁜 미소를 되찾았다. 팜므 파탈과는 거리가 먼 그녀의 소녀다움이었다. 그는 그런 민희를 내려다보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만면에 완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5.

잎을 떨구는 나무는 날이 갈수록 앙상해져 갔다. 겨울이 깊어가던 시기의 어느 날 밤, 민희는 자신의 남자친구와 창 너머로 낙엽이 쌓인 바닥과 마른 숲을 보았다. 숲의 천장이 되어 그림자를 만들었던 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지자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그는 민희에게 낮게 속삭였다. 지극히 매력적인 음색이었다.

“우리, 오랜만에 나가지 않을래?”

민희는 뒤돌아보며 해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좋아.”

우뚝 선 아파트를 벗어나자 민희는 기분이 좋은 듯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눈 내리는 모습을v 바라보던 그는 민희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았다. 민희는 눈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종횡으로 뛰어다녔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며 눈을 만지고, 눈에 얼굴을 비비고, 눈에 누워 발버둥 쳤다. 그는 그런 민희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민희에게서 눈만 보면 뛰어다닌다는 강아지의 귀여움과 재기발랄함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언제나 눈이 내리는 곳이어서 눈은 전혀 희소성을 갖지 못하는 흔한 것이었지만, 그는 민희와의 첫 만남을 땅바닥에 내린 눈에다 새겨놓았기 때문에 눈을 볼 때마다 언제나 그때가 떠올랐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생활의 시초가 되는 기억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버렸다. 해는 지고, 달은 떠올랐다. 빛을 사르는 어둠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1.  민희는 그를 다정하게 올려다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 걸어나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원으로 향했다. 각자 다른 하루를 보낸 사람들은 그곳에서만큼은 남들과 같은 일정으로서 똑같은 시간을 할애하여 보내고 있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모두 온갖 사념을 비워낸 것처럼 보였다. 얼굴엔 함박웃음이, 주위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천국이 있다면 여기인가, 그렇다면 저들은 천사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음에도 둘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며 같은 타이밍에 쿡,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의 진위를 파악한 둘은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편승한 그들은 인파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다니며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둘은 오랫동안 천천히 교감하며 거닐었다. 그들은 비어있는 벤치를 찾아 앉았다. 민희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벅차오른 한숨을 기분 좋게 내쉬었다. 공원에 캐럴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듣는다. 민희는 눈사람 앞에서 해맑게 웃음을 터뜨리는 수많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벤치 뒤로 눈은 내리고, 끝없이 쌓여갔다.

0.

들풀은 바람의 휩쓸림에도 침묵하였다. 이슬은 풀잎의 맺힌 눈물, 들풀은 일제히 울었다. 지평을 덮은 잿빛 하늘은 안개 때문이 아니다. 전날부터 내린 눈 탓이었다.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진,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의 부유 때문이었다. 그 먼지는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희게 변한 들판 속에 홀로 서 있는 것은 아파트 한 채. 민희는 그곳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노동자이자 성실한 세금 납부자이자 소시민이었다. 민희는 빛이 들지 않은 거실에서 창가에 기대섰다. 창 너머로 먼지가 이룬 안개의 장막을 본다. 흐린 동공에 비친 것은 흔들리는 그림자. 장막 너머의 흐릿한 그림자였다.

더러운 안개는 서서히 걷혀갔다. 곧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의 정체를 보게 된 민희의 동공은 종래의 그것보다 훨씬 확장되어 있었다. 민희의 의지로 그것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걷힌 안개의 저편에는 장대한 기골과 풍채를 지닌 나무들이 우거진 숲이 펼쳐져 있었다. 숲에선 늑대의 울음소리와 민희는 처음 듣는 악기의 연주 소리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 귀로는 늑대 소리를 들었고, 다른 귀로는 악기 소리를 들었다. 긴 수풀의 막후에서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은 민희는 어딘가에서 들었던 전설을 생각한다. 미지의 목소리를 듣고 숲으로 뛰쳐 들어간 그는 점차 호랑이로 변해갔다, 마침내 본연의 자신을 잃게 된 산중의 호랑이는 매일 밤 빛 잃은 달을 향해 울부짖었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마치 오랜 전설 속 처연한 운명의 포승줄에 묶인 맹수의 처절한 포효라고 민희는 생각했다. 늑대와 악기의 합주. 나체의 여인들이 불 주위를 돌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굴곡진 나신의 여성들은 모두 하나같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인들이었지만, 육체의 강렬한 자극이 빼어난 용모를 가렸다. 치장하지 않은 원시의 여인들은 매력을 잃었다. 그들은 그저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뛰어다니고 겨울에 핀 붉은 열매의 즙을 짜고 마시는 것. 어느 주술적 의식처럼 보이는 낯선 이들의 낯선 동작은 자연스럽게, 시계 초침의 움직임처럼 끊기지 않고 천천히 민희의 눈동자에 들어찼다. 모든 것은 반복되는 영상처럼 각자의 행위를 그저 반복하고 있었다.

민희는 창 너머에 있었지만, 가려지지 않은 채로 선명하게 살갗의 표면에 닿아오는, 그 기묘한 풍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무력함을 느끼며 벗어날 수 없는 아파트의 마룻바닥에서 지칠 줄 모르는 늑대의 긴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악기 소리를, 벌거벗은 여인들의 취무(醉舞)를, 이질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가만히 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민희의 사고는 가학적인 늑대에게 피학적인 양 떼를 바치는 순종적인 양치기의 이야기로 향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의 시원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야기의 전개도, 결말도 일절 아는 이가 없다. 민희의 머릿속에서 생성되고 있는 자작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Lev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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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Levin님 안녕하세요! 긴 글을 올려주셨네요. 문장 하나 하나에 힘을 준 느낌이 들어 성실하게 집필하셨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문장 하나 하나에 힘을 주었다는 것이 약간의 단점으로도 작용한 것 같아요. 문장에 리듬감이 생기도록 어떤 문장에는 잠시 힘을 빼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독자도 그 리듬에 빠져 함께 글에 빠져들게 되거든요.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02-15 09:55:27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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