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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퇴고)

  • 작성자 카임
  • 작성일 2022-07-05
  • 조회수 670

현재에 머무르기 위해선 과거와 미래를 버려야 한다. 한은 그걸 가출한 뒤에야 깨달았다.

 

아빠는 원래 없고 엄마는 어느 순간 기억에서 사라졌다. 내내 할머니 손에 길러졌고 중학교 졸업식 날 이름 모를 사촌의 집으로 옮겨갔다. 한을 교묘하게 죽이려 들었던 건 아니지만 어린 한에겐 그마저도 숨이 막혔다. 눈치와 스트레스가 얽혀 한의 몸을 뒤덮을 때쯤 처음으로 사촌의 이름을 불러봤고, 그날 가출했다. 열다섯의 어린애가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했던 생각은, 나는 나를 버려야 한다. 오로지 현재의 나를 위해 살아야 하고 그 외의 나는 버려야 한다. 버려진 몸뚱어리는 금방 부패해 악취가 풍기겠지만 그런 걸 견디지 못하면 살 수 없겠다는 판단을 했다.

평소 자주 가던 슈퍼 앞에서 한은 자존심을 버렸다.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아무거나 시켜주시면 다 잘 할 수 있습니다, 재워만 주세요. 그때 제일 먼저 손 내밀었던 게 누구였는지 한은 기억하지 못한다. 무릎을 꿇지 말라고 일으켜줬던 게 누구였는지도. 그날은 눈이 오던 날이었고 무척이나 추웠다고 한은 회상한다. 울진 않았는데 휘날리는 눈발이 자꾸만 시야를 가려 구별되지 않았고 무릎 꿇고 있는 건물이 슈퍼인지 세탁소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들어간 실내는 따뜻했고 한은 바로 엎어져 잠들었다. 일어났을 땐 모르는 얼굴이 한의 얼굴을 계속 닦아내고 있었다.

깼나.

…….

이 앞 빌라 살던 애 맞지? 가출했나.

…….

가출한 애들 거둬주는 센터 같은 델 가지 어쩌자고 무작정 이 앞에서 무릎 꿇고 있노.

……휴대폰이 없어서 길을 몰랐어요. 아는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그냥 걸었는데. 문이 열려 있길래, 그래도 살고 싶어서. 죽으려고 가출한 건 아니니까…….

울음과 관련된 최초의 기억이 그것이라. 사투리 억양이 진하게 밴 목소리가 친숙해 울컥했고, 말하다 보니 시궁창 인생이라 서러웠다. 생각하면 날 때부터 처박히지 않았던 날이 없었고 비참하게 굴지 않았던 적 없는데 그걸 형광펜 칠해 강조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은 훗날 강태우에게 말했다.

*

한은 종종 자신의 이름을 인식하는 일에 둔하게 굴었다. 가출 후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 같은 방향으로 등교하는 강태우와 함께 집을 나섰고 굳이 이름을 묻진 않았으나 명찰에 적힌 이름으로 민재야, 하고 부르면 한은 대답이 없었다. 한에게서 대답을 듣고자 하면 그 짓을 대여섯 번은 해야 한단 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강태우는 단지 긴장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실은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한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름이 없어요. 한이 가출한 지 한 달째 되던 날이다. 뻔히 명찰 달고 한단 말이 그거였다. 그날도 강태우는 한을 민재라고 불렀고 한은 대답 대신에 그런 말을 했다. 이름이 없다고.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탄한 인생 그래프를 그리는 애도 아니어서 강태우는 한의 말에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왜 이름이 없는데. 한은 대답한다. 아직 정하질 못했어요.

처음부터 민재라는 이름을 가졌던 건 아니다. 일곱 살 때까지 한은 한으로 불렸다. 이름을 지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라고 이유를 대지만 그런 건 사실 아무 효력이 없단 걸 알고 있다. 누구든 붙여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은 한으로 불렸다. 할머니가 저를 한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한동안 주민등록증에 제 이름이 한 한으로 기재되어 있었고요, 학교에 들어가야 해서 급하게 바꾼 거예요. 중학교 때까지 제 이름은 이한이었어요. 할머니가 한이란 글자를 너무 좋아하셔서. 이름이 있는데 한이라고 불렸어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을 말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이어나갔다. 한의 얼굴에 이름들을 대입하는 강태우의 표정이 옅게 찌푸려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사촌 집으로 옮겨졌어요. 마침 중학교 졸업을 해서. 이름을 싹 바꿔버렸어요. 이질감이 든다고. 사촌 이름이 민규였거든요. 그래서 민재로 바꾼 거예요. 그냥, 통계 사이트 상위권에 있는 이름 아무거나 뽑아오신 거라 뜻은 뒤늦게 붙여졌고요. 그래서 이름이 없어요. 할머니한테는 이한이었고 고모한테는 민재였는데 여기에선 아직 정하질 않아서.

강태우는 때때로 한이 안타깝단 생각을 한다. 함부로 하는 동정이 아니라 아닌 척 품는 낭만이 안타깝다. 한은 묵묵히 걷기만 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대뜸 말을 이었다. 엄마가 저를 도운이라고 부르셨대요. 세상이 도운 아이라고. 세상이 도와 태어난 아이라고 도운이라고 부르셨대요. 유일하게 뜻을 지닌 이름이긴 한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게 슬퍼요.

마침 오는 이십오 번 버스는 한의 학교로 향한다. 강태우는 대답을 고르지 못하고, 정류장에 정차한 등굣길의 만원 버스는 한을 싣고 사라지려 하지만,

도운아.

…….

다녀와라.

숙인 한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강태우는 알지 못한다.

이후로도 도운이라 불렀다. 강태우는 한에게 이왕 이렇게 된 거 개명을 하라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개명은 싫어요. 그냥 형이 불러주는 게 좋아요.

그 대답은 오로지 강태우 한정이다. 강태우의 입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한은 본 적 없는 얼굴을 떠올린다. 울컥해지는 게 있었다. 담담한 척 굴고 싶었는데 그게 안 돼서 자꾸만 이름 불리는 순간에 표정을 굳혔다.

 

한에겐 연필을 잡는 일보다 계산기 두드리는 일이 익숙했다. 한은 슈퍼 앞에 무릎 꿇었던 그 날 자존심을 버렸고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라고 다짐했으므로 살기 위해선 계산기가 손에 익어야 했다.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민폐라고 느끼는 순간은 매번. 눈치로 연명하는 생활이 연장될수록 책상보단 카운터 앞에 자릴 잡는 일이 익숙해졌고 그런 걸 강태우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니가 민폐라고 생각 안 한다.

제가 해요.

아무도 안 하는데 왜 니 혼자 하는데.

형은 안 해도 아주머니는 하실지도 몰라요.

아니다. 민폐였으면 애초에 데려다 살게 하지도 않았어.

늦었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한은 물렁하게 생겨선 단단하게 군다. 자꾸만 벽을 치는데 고의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유일의 수단이라 생각하니 측은해지는 게 있었다. 한과 대화를 할 때면 강태우는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진 부위가 쟤한테도 있구나. 벗겨내면 허물어질 거면서 그래도 단단한 구석이 있다고 당차게 구는 모습. 한의 손가락 끝 살갗이 모조리 벗겨져 엉망인 걸 강태우는 알고 있다.

오래오래 살아라. 백 살이고 이백 살이고 살아서 원하는 거 다 해라. 그중에 행복한 날이 하루는 있겠지, 도운아. 손톱에 의해 난도질당한 손가락에 연고를 발라주며 그런 말을 했고 한은 잠든 채였다.

 

그날은 인생 통틀어 최초로 약해졌던 날이라고 한은 말한다. 슈퍼는 문을 닫았고 함께하는 등교는 마지막이었으며 강태우를 위해 꽃다발을 건넨 건 한이었다. ‘축 졸업’이라 적힌 현수막을 오래 쳐다보던 한은 뒤따라 들어간 교실에서 알려주지 않아도 강태우의 자리를 찾았다. 거기 앉아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뭐가 있나, 도운아. 강태우가 말했을 때 한은 단지, 졸업 축하드려요, 그 말만 했다. 거기 앉아 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강태우는 알지 못하지만, 한은 생생히 기억한다. 부끄러웠다고 말한다.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단 게, 열여덟이란 게, 명찰에 달린 이름이 한민재라는 게. 추웠겠다고도 생각했다. 창가 자리였으므로.

인 서울이란 말이 그렇게 가혹할 수가 없다. 한은 집에 돌아와 벌써부터 짐을 싸는 강태우를 지켜봤다. 서울이랑 부산이 뭐 다를 거 있겠나, 다 같은 땅이지. 그런 말을 하며 소중한 물건부터 넣는 강태우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괘씸했다고. 이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너무 미웠으니까. 이상하게 그 무렵엔 이유 없이 미워지는 마음이 있었다.

언제나 비참하게 구는 건 가능했다. 어쩌면 비참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강태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건 한의 기억에선 최초, 강태우의 기억에선 두 번째. 의도하진 않았지만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자세가 됐고 그걸 본 강태우는 자꾸만 한을 일으키려 들었다. 도운아, 너 왜 그러는데? 그렇게 묻는 질문은 실상 답을 들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은 또다시 울컥, 사랑하게 되어버린 사람의 이름을 발음해버린다. 강태우의 앞에서 더욱 강해지려 하는 한이지만 그런 건 단지 바람에 불과하다. 강태우의 목덜미를 껴안으며 태우 형, 물 탄 음성으로 속삭였다. 한은 어린애처럼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자꾸만 덩굴처럼 얽히려 든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몰라 강태우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여전히 어린 한을 마주 안는 일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라지지 마세요. 와중에 한이 말했고 그날부로 강태우는 짐 싸는 걸 미뤘다.

 

떠나는 날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한은 여전히 슈퍼에서 일했고 강태우는 상경하기 전까지 시내로 나가 알바를 뛰었다. 민재가 대학 갈 때까진 슈퍼가 잘 돼야 할 텐데. 아주머니는 종종 그런 말을 했고 그럴 때마다 한은 어색하게 웃는다. 슈퍼가 예전만큼 잘 되질 않았다.

그 무렵 둘에겐 새벽마다 놀이터에 가는 일과가 생겼다. 하루의 끝이기도, 하루의 시작이기도 한 그 시간을 함께하며 나누는 대화는 한의 중심으로 흐른다. 그럴 때마다 강태우는 한의 얼굴을 버릇처럼 살핀다. 하루의 사건을 일기처럼 뻐끔대는 목소리에선 물비린내가 나고 그럴 때마다 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 탓이다. 한은 언제나처럼 축축한 목소리로 건조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아주머니가 저 대학 갈 때까진 슈퍼가 잘 돼야 한다고 말했어요.

응.

그런데 저는 형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건 바코드 찍는 일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어색하게 웃기만 했어요. 대학에 못 갈 거예요.

내가 가르쳐 줄까.

아뇨 저는 그냥, 일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요. 병행할 자신도 없고 그럴 만큼 일을 대단히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 머린 아예 없어서 어쩌면 초등학교 과정부터 알려주셔야 할지 몰라요.

원하면 언제든지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 말해.

네….

목도리 속에 파묻힌 채 그네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드는 한을 쳐다봤다. 아닌 척 굴지만 속이 썩어드는 냄새가 났다. 자꾸 묻어만 두려 하니 그런 것이다. 터놓고 얘길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들어갈까. 강태우가 말하자 흔들던 몸을 세우고 천천히 그네에서 내린다. 한은 늘 이랬다. 그래서 남들보다 빠르게 부패했다. 먼저 파고들지 않으면 영영 썩기만 할 것이다. 슈퍼까지 함께 걸으며 얼어붙은 한의 손을 잡았다. 나 서울 가면 놀러 와라, 너 혼자. 그 말에는 꽁무니처럼 따라붙는 대답이 없었다. 간간이 코를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착같이 살았다. 강태우가 개강을 몇 주 앞두고 상경한 어느 겨울, 그 이후의 일이다. 강태우와 함께 자던 방에서 혼자 잠들고 함께 등교하던 길을 혼자 오르고 민재라는 이름을 인식해내는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는 과정을 이 악물고 버텼다. 강태우는 자주 내려오진 못했으나 방학이나 명절엔 꼭 얼굴을 비췄고, 그럴 때마다 한은 이별에 익숙해지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매번 가던 놀이터엔 인조잔디가 깔렸고 항상 타던 그네는 새것으로 교체됐다. 세상은 자꾸만 바뀌려 드는데 한은 언제나 한결같다. 강태우는 그 점을 좋아했지만, 한은 그 점이 싫었다. 도태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는 지낼만한가요.

뭐 똑같지. 다 비슷하다.

대체 형한테 안 비슷한 건 뭐예요?

안 비슷한 거?

네. 항상 그렇게 말하잖아요. 다 똑같고 비슷하다고.

글쎄 뭐가 있지.

저는 어때요.

뭐가.

저도 다 똑같고 비슷한가요. 다른 사람들이랑.

항상 그랬다. 커지고 싶을수록 작아지는 건. 한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강한 척 굴고 싶은 사람 앞에선 자꾸만 물러졌다. 이상하게 강태우를 보면 한은 자꾸 물러지고 그럴 때마다 뒤늦게 벽에 머리를 박으며 후회하게 됐다. 오늘의 대화도 계속 리플레이 될 것이다. 머리를 쿵쿵 처박으며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은 미래 따윈 모르는 양 눈을 끔뻑이며 강태우에게 물었다. 부패의 악취가, 도태의 불쾌가, 형한테도 느껴지나요.

도운아.

네.

그거 아나.

뭐가요.

난 항상 니 걱정을 한다.

죽을 만큼 열심히 살지만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남으려 드는 한을, 강태우는 항상 걱정한다.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강해진 부위와 그걸 덮는 살가죽은 눈치로 쌓아 올린 껍질들이라 단단해지는 법은 깨우쳐도 당당해지는 법은 깨우치지 못한다.

난 다른 사람 걱정은 안 한다. 나 하나 사는 것도 숨이 막혀서.

…….

그래도 니 걱정은 한다.

…….

그렇다고 널 다르다 생각한 적은 없어.

때때로 사람은 목숨을 담보로 특별해지곤 한다. 특별함이 담는 의미는 너무 넓고 광범위해 악한 것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속에 한을 섞고 싶진 않았다. 특별로 치부되는 것이 싫었다. 평범이면 족했다. 도운아, 너는 끝까지 살아야지. 한은 대답 대신 킁, 코를 들이마실 뿐이다.

 

십 년이 넘도록 슈퍼 옆을 지키던 세탁소가 사라졌다. 편의점이 생길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은 자연스레 아주머니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슈퍼에 자리 잡은 뒤부터 자꾸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 아주머니가 한에게 슈퍼를 맡겨두고 외출한 사이, 한은 처음으로 강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운이라 불러줄 사람이 필요했다. 연결음이 짧게 끊겼다.

-여보세요.

형.

-도운이가? 니가 웬일로 전화를 하노.

슈퍼 옆에 편의점이 생긴대요.

-아 그거. 엄마한테 들었다.

죄송해요.

-뭐가?

그냥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전부 망가진 것 같아서. 제가 다 망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아주머니 앞에선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못했는데 형한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도운아.

항상 그랬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저는 계속 민폐만 끼쳤고요. 그걸 알고도 재워달라고 한 거였고.

-운아.

죄송해요, 전부.

-한도운.

네.

-넌 세상이 도운 애라며.

…….

-내가 널 도운이라 부르는 건 그 말에 암묵적으로나마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걸 자꾸 잊으려 들지 마라.

한은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강태우에게 전화했다. 상기시켜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으니까 잊게 되는 것이다.

 

그날은 삼 학년의 졸업식이었고 한은 꽃다발을 샀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단 걸 알고 있었지만, 자꾸 고모의 얼굴이 밟혔다. 강태우와의 전화를 도망치듯 끊어버리고 들었던 고개가 최초로 마주한 얼굴을, 한은 아마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눈만 끔뻑이니 고모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서론 없이 본론부터 들이미는 목소리는 퍼석했다. 네 엄마가 널 도운이라 불렀니.

그날 고모가 쥐여준 돈으로 사촌에게 줄 꽃다발을 샀다. 강태우에게 준 것보다 화려했다. 실은 그마저도 의도한 일이었다.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않겠다고, 지금 건네는 꽃다발로 모든 걸 마무리 짓겠다고. 꼴에 하는 발버둥이었다. 등굣길에 산 걸 교실도 들르지 않고 대뜸 사촌에게 건넸다.

졸업 축하해.

…야.

버려도 돼.

대답도 듣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강태우의 졸업식 때 입었던 교복과 달았던 명찰, 그리고 고작 한 살 더 늘어난 나이를 가지고도 부끄럽지 않았다. 다만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서울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이 그러셨지요. 다음에 서울 오라고. 그땐 정말 놀자고 그러셨지요. 평생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어요. 그때는 형이 너무 미웠으니까요. 모든 일에 무감각하게 굴면서, 아무렴 좋단 표정을 지으면서, 가장 소중한 것부터 차곡차곡 쌓으셨잖아요. 근데 거기에 저는 없어서 그게 미웠다고요.

슈퍼로 돌아가는 골목 그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서 갈무리되지 않은 감정을 액정 위로 쏟아냈다.

-저 이제 열아홉이에요. 처음 만났던 날의 형 나이가 돼요, 이제는. 그땐 형이 정말 어른 같았는데 형 눈에는 열아홉 먹은 제가 여전히 어린애 같겠지요. 그래서 형이 사는 원룸 앞에 무릎 꿇고 재워달라고 빌면 여전히 저를 일으켜 줄 거죠?

답장을 바라지 않고 쓴 문자 메시지는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딱 삼 일이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항상 메는 책가방에 짐을 쌌다. 가장 소중한 것부터 넣으려 했는데 정작 소중한 건 이미 서울에 있었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싼 가방을 메고 강태우를 여러 번 실어 날랐을 기차에 탑승하며 여행이라기보단 도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니 종일 한을 기다렸을 얼굴이 보였다. 항상 기다리는 쪽은 한이었는데, 그 상황의 역전이 신기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단 건 행복한 일이라는 감상. 한은 주체할 수 없어 내달렸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안겼다. 토닥이는 손이 오랜만이라 울고 싶었다.

좁은 원룸에 짐을 풀고 노랗게 물든 흰색 벽 위로 몸을 누였다. 강태우가 짐을 정리할 동안 한은 볼 것 없는 실내를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형.

왜.

바빠요?

아니. 다 해 간다. 왜?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혹시, 지금도 애인은 없으신가요.

 

좁은 침대에 억지로 몸을 구기며 한은 계속 잠들지 않으려고 했다. 눈 감는 일이 불안한 것처럼 내내 강태우의 얼굴을 찾았다. 강태우는 한이 결핍된 사람처럼 구는 건 정말로 무언가가 결핍된 탓이라 짐작한다. 한은 내내 실없는 근황을 늘어놓다 별안간 침묵했고, 강태우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감상하다 고갤 돌려 어둠에 파묻힌 얼굴을 바라봤다. 숨소리만이 고요한 방안을 가로지르고, 잠든 건 아닌지 의심할 때쯤, 고모가 왔었어요, 하고 한이 말한다.

형한테 처음 전화했던 날. 끊고 고갤 들었는데 고모가 있었어요. 잘 지냈냐는 말도 왜 집을 나갔냐는 말도 없이 곧바로 말을 내뱉으시는데, 니가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 전까진 지원해줄 수 있다고, 그런 지독히도 이타적인 말을 내뱉고는 사라지시는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맡겨지기 전까진 서로의 존재도 몰랐고 맡겨진 후에도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거든요. 가게를 나서기 전엔 손에 돈까지 쥐여주시더라고요. 근데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묵혀두다 꽃다발을 샀어요. 사촌이 졸업했거든요. 제가 꽃다발 건네니까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데요.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이상한 표정이었어요.

강태우는 한의 표정을 여전히 알 수 없다. 어둠은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는 사촌 이름을 처음 발음한 날에 가출했어요. 스스로가 너무 역겨워서요.

내내 담담하던 목소리는 마지막 문장을 내뱉을 땐 살짝 금이 가 있었다. 강태우는 침묵으로 일관하다 마침내 팔을 들어 한을 뒤덮은 이불 그 어딘가를 토닥였다. 그 손길에 한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밤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댔다.

이제 형이 아니어도 저를 도운이라 불러줄 사람이 있어요. 고모가 저한테 도운이라 불러주셨어요. 엄마가 실종된 날에 쓴 편지를 찾으셨대요. 따져보면 유서겠죠. 죽었을 거예요. 살아있을 거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설령 살아있대도 저를 한 번도 찾지 않았으면, 저한테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한이 눈을 감았다.

 

다음 날, 강태우는 마감까지 코앞인 과제를 제쳐두고 한과 집을 나섰다. 놀이공원 가본 적 있나. 놀이터만 가봤제. 가진 것 중 가장 아끼는 옷을 입은 한을 보며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주말과 방학이 겹친 놀이공원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한은 그것마저 좋았다. 세 시간이 걸려 기구 하나를 타면서도 지루한 기색이 없었다.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기분을 나쁘지 않게 여기지만 회전목마를 탈 땐 겁에 질려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는 모습. 강태우는 한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퍼레이드를 보려던 계획은 없었으나 밤이 깊어가도록 식지 않는, 빛나는 한의 눈을 보며 강태우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터지는 불꽃과 사방에서 울리는 노랫소리에 넋 놓고 서 있는 한을 끌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런 데서 죽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한은 그런 말을 하며 처음으로 웃었다. 이토록 제 감정에 솔직하게 구는 건 한에게도 강태우에게도 최초의 일이다. 강태우가 이유도 없이 한의 이름을 자꾸만 불렀다. 도운아, 도운아, 도운아…. 그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한은 무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서울에서 일하고 싶어요. 놀이공원에 취직하면 매일 행복하겠지요….

 

한은 예정보다 일찍 부산으로 내려갔다.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직후였고 남은 기차표가 없어 택시를 태워 보냈다. 짐은 택배로 보내둘게. 강태우의 말에 한이 어정쩡하게 웃었다. 주로 지을 표정이 없을 때 그런 얼굴을 했다.

연락할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고.

집에 자주 내려오고요.

설에 내려갈게.

강태우의 말을 끝으로 한은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가 떠나기 전, 입술을 짓이기는 모습을 보았으나 차마 저지할 새 없이 택시는 떠났다. 외롭고도 무참한 세계에 강태우를 남겨두고. 환상의 나라인 척하는 공허 속에 버려두고. 보통의 고독을 품은 그곳으로 한을 실어나를 택시는, 금세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

운명은 다른 듯 비슷하게 흐른다. 순간으로 비틀리는 운명, 인연, 신의 뜻, 원래라는 수식어가 붙는 모든 것들. 그것은 모두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지만 실상 운명이랄 것에 무감각하게 구는 사람을 침몰시키는 일엔 흥미를 갖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죽지 않은 이유, 라고 한은 스스로 생각한다.

아마 고모가 한을 찾은 건 최초이자 최후였을 것. 몇 년 만에 정식으로 마주한 사촌은 졸업식 때와 비교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사촌의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러니까 사촌의 손에 들린 꽃다발의 출처를 알아채곤 한을 찾아 슈퍼로 향하던 길에, 편의점 인테리어를 담당하던 업체의 커다란 트럭과 그만 충돌하고 말았다고. 고모부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맺자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를 부라리던 사촌이 이내 화를 내며 덧붙였다. 멀쩡히 멈춰있던 차가, 엄마가 다가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후진해서 박아버리는데, 그게 씨발 어떻게 실수고 고의냔 말이야. 한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무처럼 굳어 있을 고모의 몸뚱어리를 상상했다.

의식이 잠깐 돌아왔을 때 너를 찾더라. 도운이라 부르던데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걸 꼭 전해주라고 했어.

고모부가 한의 손에 색이 바랜 편지지 하나를, 꾸깃하게 접혀 있는 엄마의 유서를, 쥐여주었다. 한은 생각한다. 나무처럼 굳어 있는 고모와 시든 난초처럼 허리가 구부러진 엄마를.

 

고모의 장례식에 참석할 새도 없이 아주머니와 함께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한은 신의 구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정말 신이란 게 있다면 이래선 안 된다고,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내게 이딴 식으로 굴어선 안 된다고, 자꾸만 존재하지 않는 이를 원망했다. 야속하게도 멀리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시간은 영영 멈춰버렸는데, 하필 한의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 부당하다. 억울하다. 몇 시간 전까지 붙어있던 숨이 한순간에 끊겼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단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도 결국엔 연약한 세포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뜰 리 없는 눈을 자꾸만 쳐다보며 한은 당장이라도 강태우의 눈을 맞대고 대화하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아니, 사실은 잡초처럼 짓밟힌 채 버려진 그 몸뚱어리 옆에 함께 눕고 싶단 생각을 했다. 나무처럼이든, 난초처럼이든, 잡초처럼이든, 아무렴 좋으니까. 하지만 현실이란 공간에서 한이 할 수 있는 일은 울기만 하는 아주머니를 위로하는 것뿐이었다. 울음을 참으며 말꼬리를 늘렸다. 울지 마세요오.

강태우의 죽음을 말하는 경찰 앞에서 한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무도 없는 도로 위에서 홀로 식어 갔을 심장을 생각하니 멀쩡히 펄떡이는 제 심장이 지독하게 아렸다. 살 수 있었다면서요. 고통 끝까지 다 느끼고 죽었다면서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요? 사람이 죽어가는데 왜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지요? 사람은 신이 아니어서인가요. 죽어가는 사람한테 손 내밀 구원 같은 건 이족보행 짐승이 지닐 수 없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슈퍼 앞에서 비참하게 자존심을 죽이던 저한테 손 내밀어 준 형은 인간이 아닌가요. 남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 내밀어 준 손이 없어 죽었다는 게,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요. 한의 외침은 처절한 운명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목구멍을 틀어막은 응어리진 문장들을 결국 뱉어내지 못하고, 한은 그저 손가락을 마구 짓이길 뿐이다. 그렇게 짓이겨진 손가락은 흰 피부와 대조되어 붉어진다. 이렇게 짓이기고 짓이겨서 뼈까지 드러나게 되면 어떻게 해요. 연고 발라주셔야죠. 형이 발라줘야죠. 아무도 내 손이 어떤지 알지 못하니까. 형이 해야죠. 한은 강태우의 친절을 전부 알고 있다.

 

세상이 도운 아이라는 것도 그렇게 불러줄 사람이 있을 때 효능이 있는 것. 편의점이 생긴 뒤 꾸준하게 매출이 줄어든 슈퍼는 문을 닫았고 강태우와 함께 가던 놀이터는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여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 강태우의 과제는 아무도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의식 불명이던 고모는 이제 한 칸짜리 작은 방에 뼈만 담긴 채 살아있다. 숨을 쉬지 않아도 사는 것들이 있다.

성인이 된 한은 부산에서 일한다. 살아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 숨 쉬는 일이 버겁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펄떡이는 것이 있다. 살아남기 위해 단단한 부위를 키워나갔듯, 살아가기 위해 펄떡이는 걸 저지하지 않는다. 이제 한은 민재라는 이름을 인식하는 일이 익숙하다. 그러나 한에겐 여전히 이름이 없다. 불러줄 사람이 없어 폐기했고 떠오르는 얼굴들이 괴로워 지워냈다. 아마 다시는 도운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걸 은연중에 생각한다. 살아남으라고 말해줄 사람이 보고 싶다.

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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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코쿠료 묘

카미코쿠료 묘(1943.8.15.~1974.)는 한일 혼혈로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넘어와 죽을 때까지 일본 땅을 밟아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일본어엔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누군가는 그런 그가 일본인으로서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일제강점기를 보낸 것을 안타깝게 평하기도 한다. 한국은 묘가 3살이 되던 해 해방됐다. 이후 한반도에선 철저한 종족 분류가 이뤄졌다. 이분법의 분류 체계 속에서 묘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 다만 양쪽의 피가 섞인 그가 한국에만 체류했던 까닭은 간단하게 설명된다. 카미코쿠료 묘에게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구매할 자격이 없었다.묘가 8살이 되던 해에 한반도에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그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거라 추정된다. 황폐해진 땅을 밟고 서는 데에는 이전과 다르게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생존을 향한 지독한 인간의 본능만이 꿈틀댈 뿐이었다. 누구도 그의 출신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기회로 여겨진다. 허허벌판 위에서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던 영역의 철학에 가닿기까지 걸린 기간은 단 1년. 이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각의 폭을 넓히지 않았더라면 이루어낼 수 없는 성과라는 평을 받는다.한국전쟁이 끝나고 황무지 같던 땅은 다시금 색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은 묘가 황무지 같은 영역에서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의 사상은 온통 비유로 가득하다. 그것은 흡사 철학 서적보다는 허구의 소설류와 비슷해 보이는 게 특징이다. 인간, 양철, 지푸라기, 사자로 비유되는 사상의 전개는 오즈의 마법사를 연상시키며 그중 사자만이 배척된다는 점은 당시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철학은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구분될 수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것이 레오폴드의 생태윤리로, 무생물까지 도덕적 대상으로 봤다는 점에서 양철을 인간의 수용 범위에 포함한 묘의 윤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사자가 배척된다는 점에서 생태윤리의 완전한 분류는 곤란했다. 카미코쿠료 묘의 처음이자 마지막 철학은 그렇게 어느 곳에서도 분류되지 못한 채 한동안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았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이를 두고 어린 시절부터 소속의 열망이 꺾여 자란 인간의 안타까운 무의식으로 묘사하기도 한다.사용되지 못하고 도태된 묘의 철학은 재밌게도 몇 년 뒤 정치계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분석될 수 없다는 한계를 완전히 벗은 그의 사상은 철학계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형성했다. 동물 배척주의. 무언가를 중심으로 삼았던 기존의 철학-이를테면 인간 중심, 동물 중심, 생명 중심 등으로 불리는 것들-은 그의 사상을 대변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배척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그러나 이런 네이밍에 묘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동물 배척주의는 여론몰이가 필요할 때면 항상 등장했다. 제일 처음 그것이 사용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후의 일로, 뒤늦은 빨갱이 처단을 위해서였다. 그때 처음 묘의 철학을 인용한 정치인은 “그들은 우리와 같은 영역에 속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우리에게

  • 카임
  • 2024-01-15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말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영영은 말한다. 과장님 업무 다 끝냈습니다…. 1이 사라지지 않는 메신저 창을 바라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오랫동안 스크린을 바라본 눈꺼풀이 무거웠다. 뒤늦게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여전히 남아있는 1을 무시한 채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저 이제 퇴근해보겠습니다.흐트러진 양복 매무새를 다듬으니 영락없이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 영영은 목을 옥죄던 와이셔츠의 맨 윗단추를 풀었다. 그런다고 숨통이 트이진 않았다. 영영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을 느끼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선거철이라 곳곳에 대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영영은 이제 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태어나는 인구보다 탄생하는 관념이 더 많은 나라에선 매일 같이 새로운 관념들의 싸움이 울려 퍼졌다. 영영은 한갓 관념에 목숨을 바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만 하면 충분하고 그것조차 지켜지지 않은 때에 인권보다 앞서는 관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영영은 후보 15번으로 끝맺어진 대선 포스터를 보며 새삼스러운 권태감을 느꼈다. 이런 지독한 공허 앞에서 지끈거리는 머리 정도는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회사 앞 지하철역은 한적했다. 영영은 잠시 벽에 등을 붙이고 기대섰다. 그때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확인하니 과장의 답장이 뒤늦게 도착해 있었다. 그래, 오후에 보자. 라는 끔찍한 메시지에 따로 답장하진 않았다. 대화는 덧대어 갈수록 길어지기 마련이고 나중에는 끊어낼 수 없어지기 때문에. 어쩌면 과장과 주말 식사 약속을 잡고서야 끝맺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영영에겐 입사 초기에 이러한 수법에 휘말려 부장의 등산 메이트로 두 달을 보낸 전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겨우 정상에 올랐었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장소는 다르지만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그때는 아마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던 중 저혈압으로 쓰러졌던 것 같다. 그 덕에 지금은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생각해보면 영영의 머리는 지끈거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과거는 이유 모를 두통으로 인한 입원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 감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나. 언젠가는 고쳐질 것이라 생각한 믿음은 서른이 되어서야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 영영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생각했지만 언젠가 무당을 찾아간 적은 있었다. 그건 아마 스물 초반의 일로, 점을 보러 간다는 여자친구에게 응당 건네야 할 대답을 했던 결과였다. 나 이번 주 주말에 점 보러 가려고. 궁금하잖아? 오 그래 궁금하네(안 궁금했다). 같이 가줄까? 그곳에서 무당은 여자친구보다 영영과 눈을 먼저 맞추었다. 하지만 1인분의 돈을 지불한 그들에게 따로 2인분의 서비스를 할 필요는 없었다. 여자친구가 한국인이라면 으레 궁금해할 것들, 이를테면 학업이나 취업이나 혹은 연애와 같은 것들을 질문할 때까지도 무당은 답변에만

  • 카임
  • 2023-12-17
해피벌룬 레볼루션

고하은 형은 혁명가 기질이 있었다. 애초에 하느님의 은총이란 이름을 달고 꼬박꼬박 절에 다닌 것부터가 그랬다. 하느님이 알면 니 뒤통수 한대 후리고도 남겠네. 라는 말은 언젠가 실종된 형의 룸메이트가 남겼다. 그러면 형은 무감한 얼굴로 하느님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으셔. 하고 대꾸했는데 그러면서도 나무아미타불 하는 염불을 외우는 버릇을 버리진 못해서 결국 형은 이름을 바꿨다. 고나무. 물론 그건 형식적이라기보단 암묵적인 것이었고 대한민국은 형을 고하은으로서 통계를 낼 터였다. 왜냐하면 형은 성선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순자, 홉스, 그리고 고나무. 출판사에선 형의 생애를 인터뷰해달라는 요청을 수백 번도 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거절한 건 언젠가의 형이 말했듯 인간은 항상 남이 가장 방심한 순간에 뒤통수를 후리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뒤통수 같은 거 안 후릴 테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므로 후릴 수 있는 여지가 왕왕 있다는 것이 논리의 시작과 끝이었다. 물론 그 말투는 룸메이트에게서 옮아온 것으로 실제로 형은 그리 과격한 언어를 자주 사용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도통 ‘성악설을 믿은 고하은, 그는 대체 누구인가’ 따위의 인터뷰에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형은 성선설을 믿었으므로. * 사람 좋은 인상의 남자가 카페로 들어온다. 180이 한참 넘어 보이는 거구의 남성은 멀뚱히 앉아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하곤 크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살짝 올라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게 보였다.“안녕하세요~ 이건우 님 맞으시죠?”“네.”“오늘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저 정말 연락받고 깜짝 놀랐잖아요. 누가 요청을 해와도 거절하신다고 들었는데 먼저 연락이 올 줄이야.”“이제는… 그만 썩힐 때도 됐죠. 부패하기 전에 놓아주고 싶어서요.”“잘 생각하셨어요. 저희 출판사가 소설류의 허구에는 좀 약하지만, 이런 사실 기반 평전 같은 건 기깔나거든요. 쓸데없는 편집도 없고.”알고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다. 나는 몸을 반쯤 접어 내려둔 가방에서 힘겹게 노트북을 꺼내는 인터뷰어의 옆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잘 먹고 잘 자며 굴곡 없이 살아온 사람의 분위기 같은 게 그에겐 있었다. 노트북 세팅을 마치고 마우스를 몇 번 딸깍이던 그는 곧 휴대폰 녹음기를 틀고 눈알을 반짝인다.“그럼 시작할까요?” * 형을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죽음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건 꼭 형이 살인자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건 제 쪽에 가깝죠. 생과 사, 그건 형을 가장 잘 표현하는 키워드가 될 겁니다. 그날은 많이 지쳤습니다. 평소랑 똑같은 노동이었음에도 유독 가라앉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얼른 돌아가서 씻고 싶었습니다. 아니, 씻기 전에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휴식이 절실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룸메이트가 목을 맨 날이었어요.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곳은 가출한 놈들 몇몇이 살던 아지트 같은 곳이었는데 지나는 사람도 없고 관심 두는 이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니요. 룸메이트의 이름이 병으로 끝나던가. 아무도 그 애를 죽이지 않았을 겁

  • 카임
  • 202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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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카임님, 안녕하세요. 퇴고라고 표시해 주셔서 전작을 읽기 위해 카임님의 닉네임을 눌렀다가 다른 게시판에 쓰신 글까지 홀린 듯 읽고 왔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저번에 남겨 주신 댓글도 이제야 읽고 왔습니다. 관성적으로 댓글을 남기는 일이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좋은 글을 만날 때는 따뜻한 마음을 담으려 애를 쓰지요. 그런 마음들이 카임님께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퇴고작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 지금 이대로 꾸준히 즐거운 생각을 글로 많이 남겨주시길 부탁드리는 게 더 생산적일 것 같아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카임님께서 글틴 활동을 하시는 동안 늘 발빠른 독자가 되겠습니다. 지치지 말고 써주세요!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08-22 00:45:10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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