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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 작성자 소킴
  • 작성일 2022-11-13
  • 조회수 704

https://youtu.be/VYUUZKjcsJc

이 곡을 듣고 구상한 스토리입니다. 같이 재생하시면 좋겠습니다!

0

지금으로부터 17년 하고도 9개월 전,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며 쌀쌀해질 무렵이었다. 당시의 나는 김해로 가는 비행기였고, 창문 너머로는 햇빛이 미약하게 구름을 헤집으며 그 틈으로 자신을 발산하고 있었다. 내가 간식으로 나온 견과류 봉지를 뒤적거리는 동안, 창가 쪽 자리의 여자는 이어폰을 벗어 부드러운 손짓으로 감고 있었다. 이후 기내식으로 나온 무염 버터를 플라스틱 곽에 포크와 나이프로 옮겨 넣고, 비닐들을 접어 정리했다. 그 분주한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기장의 안내 방송과 함께 금연 표시등이 꺼졌다. 이윽고 스피커에선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아랑곳 않고 기내용 슬리퍼와 담요를 가지런히 정리한 뒤, 큰 숨을 뱉으며 메모장에 적힌 무언갈 확인했다. 그 무렵 건너편 비행기의 플랫 끝자락에서 솟아 오르는 해를 보며,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실감한다. 이럴 때면, 무언가 찌릿한 향기가 나를 설레게 했다. 이 시간에는 늘 기지개를 켜며 시계 추처럼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이 있고, 평온히 잠에 든 사람이 있었다. 각자 살아가는 시간의 밀도는 상대적인 것이다. 간혹, 그 시간의 밀도로 인해 하루가 지나치게 짧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은 매일이 영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승무원이 이어폰을 나눠끼고 잠을 청하는 내 앞의 노부부를 조심스레 깨운 뒤 지나갔고, 둘은 소곤소곤 다정한 아침 인사를 나눴다. 옆 좌석의 여자는 깊은 눈으로 그 광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묘했다. 기뻐 보이기도 했고, 어디선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0.1

당시의 나는 어쩌면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는 만남을 반복했다. 정말 의미가 없었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랬다. 언젠가 꿈에 그리던 여자를 만날 것이라는 미신적인 믿음에 기인한, 운명에 대한 기대가 가속화된 것도 그 탓일지 모른다. 운명의 징표를 뚜렷하게 정의 내리지는 않았다. 가령, 거의 모든 승객이 내릴 때까지도 미묘한 공기를 의식하는 내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는 여자도 내게 있어 어떤 폭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희망을 품게 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나는 짐칸의 작은 가방 하나를 두고 내렸다. 어쩌면 그녀는 내 가방을 챙겨서 분실물을 찾으러 온 나를 마주칠 것이고, 또 어쩌면 자신의 짐만 챙겨 유유히 공항을 떠날 것이었다. 후자이길 간절히 바랐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는 나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1.

두 번째로 그 여자를 마주친 것은 수하물 보관소였다. 나는 가방을 잃어버렸고, 그 여자는 누군가 잃어버린 가방을 신고하고 있었다. 수하물 보관소는 컨테이너 박스처럼 생겨서,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내가 맞은편 벽에 기대 가만히 서있는 동안, 여자는 직원을 마주 보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기도 하고,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차분히 뭐라 말하기도 했다. 절차에 따라 내 가방을 맡기는 중이었다. 그녀는 어떤 보물을 다루듯 낡은 내 가방을 양 팔로 안고 있었다.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가방을 건네받기 위해 팔걸이를 짚고 일어서던 차, 여자는 나를 흘긋 보고는 직원에게 잠시 사인을 보내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선한 눈매를 따라 분홍빛이 감도는 볼, 가느다란 목과 그동안의 생활 습관을 증명하는 듯한 곧은 자세. 사랑스럽다.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 저, 제 가방인 것 같습니다. ”

여자는 싱긋 웃으며 가방을 건넸다. 아아,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다. 입꼬리를 따라 움직이는 소근육들의 움직임마저 아름다웠다.

“ 저어, 아까 두고 내리신 걸 봤어요 ”

그녀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발음하며 내게 가방을 건넸다. 원피스 자락이 펄럭이면서 산뜻한 플라워 머스크 향을 풍겼다.

“ 감사합니다, 아까 같은 비행기 타신 분이시죠? ”

“ 네에, 옆에 앉았던 사람이에요 ”

여자는 네,라는 단어를 길게 늘어트리며 말했다.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여자는 그럼, 하고 몸을 돌려 움직였다.

“ 저기요 ”

여자를 불렀다. 수많은 인파에 휩싸여 여자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주저 앉아서, 한참이고 공항에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2.

그대로 그 여자를 영영 못 만났다면, 비가 내릴 때마다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지독한 폭풍도 없었을 것이고, 이 이야기들을 꺼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만남은 그대로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충동적인 감정들의 모임이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 여자는 내게 어디 사는 지도, 무엇을 좋아하는 지도,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산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그 여자를 3번째로 만났을 때, 나는 17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술기운을 깨기 위해 차가운 커피를 홀짝이며 해안 도로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저만치서 난간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무는 여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눈이 많이 안 좋은 편이어서, 흐릿한 사람의 형체쯤으로 밖에 안 보였지만. 나는 그 여자가 3일 전 만난 사람이란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다. 어젯밤 지독하게도 마신 술의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보폭을 조금씩 줄여가면서, 여자와 살짝 거리를 두어 난간에 몸을 기댔다. 지금 지나쳤다간 정말 영영 못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자는 그때까지도 나를 못 보다가, 바람을 등지며 돌아서는 찰나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슬쩍 눈을 피하고, 담배를 꺼트리고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일련의 동작마저도 내 눈에는 어떤 무용의 일환으로 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 무렵에는 해가 슬슬 뜨고 지고 있었고, 이따금씩 지나치는 자동차를 제외하면, 소금기 머금은 바람만이 둘 사이를 감돌고 있었다. 마치 세상과 우리를 구분 짓는 얇은 막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나는 그 여자 쪽으로 조금씩 발을 옮겼다. 눈을 한 번 더 마주치자, 여자는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조금 숙였다. 며칠 전보다 조금 더 야위었고, 조금 더 작아져있었다. 눈도 어쩐지 회색빛이 감돌았다. 무언가, 요동치는 기분이 들었다. 파도가 수십 번 철썩이는 동안, 우리는 한참이고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여자였다.

“ 여행하시는 중인가요? ”

" 네, 그쪽도요? "

비슷해요. 여자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

여자는 머뭇거렸다.

" 소진이에요.. 김소진. "

" 예쁜 이름이에요 "

여자는 의미 없는 웃음을 짓다가, 또 아까의 어두운 얼굴로 돌아왔다. 이후 또다시 침묵이 둘을 감돌았다. 내 이름은 물어보지 않았다. 파도가 쏴아 쏴아하고 침묵을 가중시켰다.

" 죄송합니다 "

" 네? 뭐가요? "

" 여행길을 방해하려던 의도는 아니었는데, 자꾸 만나게 되네요 "

여자는 싱긋 웃어 보였다. 얼굴빛은 창백했다. 갈매기 떼가 우리 위를 지나갔다. 슬며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별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손은 차가웠다. 며칠 만에 생명력을 거의 상실한 것만 같았다.

좀 걸을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3.0

여자는 죽 땅을 보며 걸었다.

먼저 입을 뗀 건 이번에도 그 여자였다.

" 저기, "

" 네? "

" 절 너무 특별히 생각하지는 마세요 "

특별하다, 속으로 그 단어를 한 번 더 삼켰다.

" 그게 무슨 뜻이죠? "

“ 제게 무얼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저를 얼마나 알았든 간에 말이죠 ”

여자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 자고 일어나면 모든 걸 잊어버려요, 어제 무얼 했는지도 몰라요. "

" 그럼 제가 누군지도 모르겠네요 "

여자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언제부터 그런 일을 겪으셨죠? "

" 17살 이후의 기억은 전부 사라져요. 쭉 그렇게 살았어요, 이유도 몰라요. 안다 한들 내일이면 까먹겠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어요 "

" 메모장에 적힌 대로 행동해요. 9월 18일, 영도 해안 산책로를 걷는다. 보이시죠? "

여자는 웃으며 메모지를 내밀었다. 그리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 그럼, 17살 때부터 담배를 피신 건가요? "

" 아뇨, 그냥 주머니에 있길래 피운 거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유도 모른 채 뭔갈 원하다는 것은 굉장히 불쾌한 일이에요. 내일이면 또 중독 증상 때문에 끙끙 앓을거예요. 오늘도 그랬으니깐요, 내일도, 내일 모레도 그렇겠죠. "

" 끊으시죠 "

여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곤 쿡쿡, 웃었다.

" 내일의 저는 그 결심을 까먹을 테니까요 "

여자는 잠시 멈춰서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내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울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안 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듯했다.

"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

내가 가방에서 물병을 건네주자, 여자는 전보다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집어삼켰다.

여자를 감싸 안았다. 무언갈 막고 있던 댐이 터져버린 듯이, 굉장히 고통스럽게 흐느꼈다. 여자가 잠잠해질 때까지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3.1

" 무슨 약인가요? "

" 잘 모르겠어요, 메모지에 적혀있는 대로 할 뿐이에요. "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조금 웃어 보였다. 아름다웠다. 여자를 보고 있자면, 이 순간을 LP 판으로 만들어서, 쓸쓸할 때 언제까지고 재생하고 싶다, 따위의 생각이 자주 들었다. 소진이 음악이었다면, 사진이었다면, 글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았다. 매일 사라지는 그녀의 하루를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었다.

여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몸의 아주 커다란 조각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17살의 소진이 가졌던 깊고 쓸쓸한 눈빛은 사라졌다. 흐릿한 회색빛의 눈이 재만 남은 불씨처럼 예전의 소진을 간간이 비추고 있었다.

3.2

" 17살 때, 종현이란 친구가 있었어요.

여자는 내 품에 안긴 채로 조용히 속삭였다. 온 세상에서 단둘만이 들을 수 있을만한 목소리였다.

" 부산이었어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이 곳이었어요. "

" 그런데 기억이 안 나요. 얼굴, 목소리,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

"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도 몰라요, 부모가 어떻게 됐는지, 집은 어딘지, 이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요 "

" 그 남자와의 기억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이 범위는 점점 넓어져서,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만 같아요. 오늘 죽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도, 내일이면 상쾌한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할 거예요. 그게 너무 비참해요. "

나는 그녀의 머리에 내 머리를 포개어, 가만히 듣고 있었다.

" 당신은, 누구죠? "

나는 잠자코 있었다.

" 당신은 저를 알고 있는 사람이겠죠? "

여자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무언갈 결심한듯이, 종현이야? 하고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 너는 날 기억하지? 나 소진이야, 김소진, 우리 여기서 만났잖아 응? "

여자는 다시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몸이 차가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거야 넌.. "

온 몸을 비트는듯한 괴로움에 휩싸였다. 이 여자는 내일이면 모든 것을 잊고, 또 다시 어두컴컴한 세상을 맞이할 것이다. 내가 그녀를 찾아가면, 그녀는 나를 원망하며 흐느낄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이 상황에도 점점 몸이 적응해나간다는 것이다. 처음 소진을 찾았을 때는 그저 며칠, 잠을 오래 잔 상황 쯤으로 느껴졌다.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은 건가 싶기도 했다. 그 며칠은 몇 달이 되고, 몇 년이 되고, 17살일 때의 종현과 소진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녀는 세상과 점점 동떨어져 갔다. 처음에는 나도 소진을 껴안고 울 수 있었다. 그 다음, 다음을 거듭할 수록 한없이 피어오르던 감정은 식어갔다. 매번 여자는 나를 붙잡고 흐느꼈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이 운명을 받아들였다. 소진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진의 기억을 옮겨 받은 소진의 껍데기가, 영원히 당시의 그날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것이었다.

손상된 소진의 해마를 복구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리적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어쩌면, 어쩌면 하는 마음을 품어왔다. 나를 알아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 표도 그런 마음에서 샀다. 오늘처럼 나를 원망했던 밤이었다. 천사같이 잠든 그녀의 주머니에 부푼 마음으로 표를 꽂아넣었고, 다음 날 내 옆자리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듯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식이었다.

4

여자를 작은 여관으로 데려갔다. 침대에 눕히고, 간단한 식사를 차린 뒤, 침대에 기댔다. 창 너머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진의 주머니에 담배를 꽂아넣었다.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했으면 했다. 17살의 소진은 강한 여자였다. 나는 해변가에서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여자의 옆모습을 생각했고, 또 간간히 내 손 끝을 스치던 하얗고 가늘었던 손을 생각했다. 점점 그녀가 부스러져간다는 사실이, 나를 걷잡을 수 없이 암울하게 했다. 내가 죽는다면, 그 뒤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 친구, 가족, 모두가 그녀를 떠났다. 그녀를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머리맡에 약간의 지폐를 두었다.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어 메모장에 무언갈 적었다.

- 모든 생활은 주머니 속 카드로 해결할 것

- 목욕을 했다면, 주머니 속 향수를 사용할 것

- 걷잡을 수 없는 기분이 든다면, 주머니 속 알약을 삼킬 것

- 떠난 자리는 말끔히 정리해둘 것

- 핸드폰을 항상 소지하고 다닐 것

- 당신의 이름은 김소진이고, 종현을 사랑한다

눈물을 삼켰다. 소진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해가 져서 날씨는 쌀쌀했다. 코트 깃을 여미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41

그날로부터 2년 뒤 소진이 핸드폰을 잃어버린 날부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5년 동안 핸드폰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더 이상 그 여자가 어디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한때 운명이라 여긴 여자는, 그 껍질만 남아 아직도 세상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자의 웃는 얼굴이 생각난다. 그럴 때면 몸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상자를 꺼냈다. 20년 만이었다. 밖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상자 속에는 수백 장의 편지가 있다. 하나하나 꺼내어 읽었다, 소진과 주고받은 편지다. 가장 밑에는 8살 때 쓴 편지가 있고, 가장 위에는 17살 때 쓴 편지가 있다. 이따금씩 상자 속에서 플라워 머스크 향이 피어올랐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니, 눈물이 차오를 때쯤 상자를 닫는다. 기름을 부었다. 불을 붙인다. 불은 바닥에 옮겨붙고, 내 발끝에 옮겨붙는다. 아아, 바닥에 드러눕는다. 그곳에선 17살의 소진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근육 가닥 가닥이하나둘씩 오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소킴
소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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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셀 프로그램에서 무작위로 추출한 키워드를 주제로 써봤습니다! https://youtu.be/2BphSZW4QvI 작 중에 등장하는 음악이니 같이 재생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 ​ 연이 옆에 쪼그려 앉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 머리가 많이 엉켰네, 하고 손가락을 세워 연의 머리를 빗는 시늉을 했다. ​ “ 지금 나 무시한거야? “ ​ 연은 몸을 휙 돌려 등을 맞대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 ‘ ... ’ ​ 연은 곧 죽는다. 흔한 암도 아니고, 치료법도 없는 희귀 질환이다. ​ 연은 의사가 길게 풀어내는 시한부 판정을 태연한 표정으로 들었다. 모든 치료제를 거부하고 약국에서 진통제를 받아갔다. 피부에 좋지 않다나. 나도 그렇고 연도 그렇고 서로가 망가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고, 이런 난처한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연은 벌써 망가지고 있었다. 날마다 불안에 몸을 떨었다. ​ " 그런 걱정은 하지말자고. 오늘은 기침도 거의 안했잖아. 점점 나아지고 있을 수도 있어 " ​ 연은 대답 없이 아주 작은 소리로 훌쩍였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연이 우는 일은 손에 꼽는데, 모조리 요 몇 달 동안 있었던 일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 " 내일도 컨디션이 괜찮으면 공원에라도 가는게 어때, 병원이랑 집은 슬슬 질리지 않아? " ​ 연은 손목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애써 웃어보였다. 새하얀 얼굴과 얇은 손목, 펑퍼짐한 셔츠와 콧대가 찌그러진 안경, 연이 죽는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 나 부탁 좀 할게, 여전히 쪼그려 앉은 채로 연이 옷깃을 잡아당겼다. ​ “ 물? ” ​ 약을 잊었다는게 떠올라 서둘러 식탁으로 뛰어갔다. ​ “ 약 말고, 노래나 틀어줘 ” ​ “ 저녁 먹고 약 안 먹었잖아, 일단 약부터 먹어 ” ​ 물 한 컵과 약을 쥐고 연에게 다가갔다. ​ “ 안 먹을래 ” ​ “ 답답하게 왜 그래 ” ​ 연은 결국 몸을 내게 기대고, 양 손으로 얼굴을 덮고선 흐느끼기 시작했다. ​ 어떤 말로 위로해야할까, 곧 죽는데 위로가 중요할까. ​ " 난 죽지 않아 " ​ "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한 얘기를 하고 그래 " ​ 들썩이는 연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 “ 무슨 노래 틀어줄까? ” ​ ‘ .. ' ​ “ 야한거 ” ​ 정말, 연이 이상해졌다는게 기분탓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 “ 야한 노래가 뭐가 있을까 ” ​ 서랍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리사 엑달의 앨범을 꺼냈다. Cry me a river가 나오면 좋을텐데. ​ “ 이거 엄청 휘었겠는데, 보일러 바로 위에 있었어 ” ​ 연은 진정이 됐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발치에 안경닦이를 던졌다. ​ “ 어서 틀어줘, 누구 노래야? ” ​ 살짝 기울인 고개, 하얀 얼굴 사이로 잔머리가 사랑스럽게 흩어져있다. ​ “ 리사 엑달, 스위스 가수야 ” ​ 안경닦이로 LP판을 부드럽게 닦는동안, 연이 앨범 케이스를 들여다보러 얼굴을 들이밀었다. ​ " 오늘은 몸을 뒤로 안 빼네 " ​ " 그랬던가, 기억도 안나네 " ​ 연이 킥, 하고 웃

  • 소킴
  • 2023-03-08
편지

​https://youtu.be/Cl8a9b76GMg 새벽녘 중고 서점 너머에서 바라보는 창 밖의 풍경을 잘 알고 있나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도 새벽의 서점이었습니다. ​ 당신이 내게 처음 말을 건 것은 내가 책장 정리를 하던 중 발견한 노랗게 산화된 하이쿠 시집의 책장을 넘기며, 그것의 고소한 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 “ 일본인이신가요? “ 뒤에서 들려오는 어눌한 발음의 한국어에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고, 시선은 당신에게 꽂혔습니다. 정돈 안된 곱슬머리에, 넘실대는 주근깨, 허름하고 사이즈는 또 무지막지하게 커서 손 끝을 겨우 드러내는 점퍼를 입은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습던지요. ​ 내가 한국인입니다, 하고 일본어로 말하자 “ 이 책, 우리 할아버지가 쓴 책입니다 ” 라며 당신은 팔을 뻗어 내가 보던 책을 슬그머니 집어 품에 넣었습니다. ​ ” 할아버지가 이 서점을 알려줬어요. ” ​ 당신은 그렇게 할아버지가 띄엄 띄엄 읊어주는 서점의 이름과 주소를 받아적고는 계획 없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 “ 할아버지가 치호우*를 앓습니다. 젊었을 때 쓴 하이쿠를 가끔 읽습니다. 책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 ​ 나는 자랑하듯 책을 흔들어 보이며 씨익 웃는 당신이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할머니께 물려받은 서점이 처음으로 자랑스럽게 여겨졌습니다. ​ 우리는 어색한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써가며 밤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서점의 이름이 바뀌어서, 제가 아니었으면 책을 못 찾을 뻔했다며 두 손을 꼭 쥐고 눈물을 글썽이던 당신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남은 정리를 마저 하려던 나를 당신이 머뭇거리며 늦은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식사래봐야, 가방에 싸온 주먹밥과 김이 빠진 콜라 뿐이었지만요. 우리는 상가 계단에 나란히 앉아 단촐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 얼마나 급하게 쌌는지 소금기라곤 없는 푸석한 밥 뭉치였지만, 당신이 조그만 손으로 주먹밥을 꼭 쥐고 자꾸만 새어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미소를 짓던 모습을 상상하면, 그렇게 따뜻하고, 또 행복한 식사는 처음이었습니다. ​ 당신이 할아버지의 책을 조심스레 포장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용기를 내어 당신의 주소를 알아냈어요. 편지을 주고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은 구마모토 현의 조그만한 주택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살고 있다며, 그토록 동경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줬지요. ​ “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한국에 사는 친구가 초대해서, 배 타고 한국으로 여행 왔어요. ” ​ “ 한국을 여행하며 하이쿠 시집을 썼어요. 그리고 친구에게 선물했고, 친구는 시간이 지나서 이 서점에 맡겼대요. 할아버지는 시인이 꿈이었어요.” ​ 당신은 그가 들려주던 하이쿠들을 읊어줬어요. 모르는 한자어가 많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당신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던 그 동경심과 사랑은 잊혀지질 않습니다. ​ ​ 당신이 점퍼를 주섬주섬 챙겨 입을 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문을 닫을 때, 문이 덜컹거리며 종이 흔들릴 때,

  • 소킴
  • 2023-03-08
크리스마스에 보내는 편지

마을은 흰 눈과 길과 길을 잇는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으로 가득 찼습니다. 밤이 되면 나는 창문 너머로 거리를 내다 봅니다. 머플러를 두른 두 연인이 입김을 내뿜으며 걸어가고, 아이들은 고무 공처럼 이리 저리 쏘다니다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옆 건물의 싸구려 턴 테이블에서 냇 킹 콜의 Christmas song이 흘러나오고, 어디에선가 건포도를 넣은 빵 냄새가 창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옵니다. 당신이 떠나고 나는 벽지가 파란 단칸방으로 이사왔습니다. 병원에서나 쓸 것 같은 철제 창살 침대와 재떨이 말고는 아무런 가구도 없습니다. 저 광경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씁쓸하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담배 연기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지고 모두가 따듯한 집으로 들어가면, 저 하얀 거리가 내뿜는 서늘한 기운에 털이 곤두서는 것은 나 뿐인가 봅니다. ​ 아무튼, 내일은 집 밖으로 나갈 생각입니다. 맞은편 건물에 크리스마스 상점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트리 오너먼트를 사겠어요. 마을 주민 대부분은 그 상점의 물건이 중국에서 공수해온 싸구려 뿐이라는 것을 알 테지만, 중국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사과를 선물한다며 제작년 크리스마스를 사과와 피아노와 촛불로 보낸 당신과 나를 생각하니 중국산 빨간 오너먼트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것들을 넣은 갈색 봉투를 한 팔로 안고, 클레망씨가 운영하는 빵 가게에 들를거예요. 이틀 전에 장작 모양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클레망 씨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작 모양 케이크를 만들어 줄 거예요.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당신과 나를 위해 빵을 구웠던 클레망씨는 드디어 제빵사가 되었어요, 빵에 박힌 건포도가 싫다며 투덜거리던 당신을 추모하며 클레망 씨는 빵 가게 이름을 레아 (Léa) 로 지었습니다. 그의 빵 가게가 유명해질 수록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아지겠죠. ​ 우리도 한 때는 연인이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마을 외각의 잡목이 우거진 길을 나란히 걸었죠. 그 길 끝에 있는 묘목을 기억하나요? 13년 전 우리가 성탄목으로 삼고자 심은 그 묘목은 어느새 꼬마 아이 정도의 키 만큼 자랐어요, 우리가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다면 딱 이 정도 키였겠죠. 그 작은 나무에 오너먼트를 장식할거예요, 빛나는 물건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저녁이 되면 달빛이 그 나무에 깃들겠죠. 분명 그 나무 밑에 잠든 당신의 부스러기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밝은 빛일 거예요. 장작 모양 케이크는 당신을 위해 샀어요. 건포도는 넣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좋아요. 케이크의 포장을 찬찬히 뜯어 소복히 쌓인 눈 위에 놓을게요. 그 사랑스러운 얼굴로 당신이 케이크를 입에 넣으면, 나는 으레 그래 왔듯 따듯한 시를 읊어주겠어요. 내 말에 집중하지 않는다며 당신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나도 당신이 내 말을 귀담아 듣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어요. 내게, 당신의 눈이 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이제는 날 바라보고 싶어도 바라보지 못하지만, 괜찮습니다. 늘 그래 왔듯이, 내가 당신을 지긋이 바라보면 그만

  • 소킴
  • 20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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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소킴님 안녕하세요. 매일매일 기억을 잊는,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종현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소진과 종현에 대한 정보가 좀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전개가 될 수록 인물들의 서사가 궁금해졌거든요. 주인공들의 감정을 장면들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해보시고 퇴고해보심을 제안드립니다! 그럼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12-08 19:07:01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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