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증후군?
- 작성자 예술증후군
- 작성일 2023-12-30
- 좋아요 0
- 댓글수 1
- 조회수 348
잔혹하기도 하셔라… 하다하다 이제는 저한테 그런 질문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건, 이제까지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간단한 의사소통 방식으로 전달 가능한 정보의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나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방식으로 그걸 전달하는 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전달된다는 그 과정 자체에 의해 그 즉시 완전히 다른 사실로 변화할 것이기에… 그저 현재 이곳에서는 저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종류의 사실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실망하실 것도 없는 것이, 이건 저 외의 타인에게 있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닐뿐더러 누구나 개개인의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종류의 것이기에… 네. 그것이 어떠한 사실로 구현화된, 아니 구현화되었다고 고집을 부리는 행위를 통해 생겨난, 착각일 수도 있는 사실이라고 하면……
*
*
*
버스에서 그새 잠들었던 것 같다. 햇빛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자 낯선 풍경이 눈앞에.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 학교를, 지나쳤나? 창밖을 유심히 보니 굽은 등선의 a산이 보인다. 팔짱을 풀고 핸드폰을 들어 시간표를 보니 오전 강의가 없다. 보통 이런 날에는 점심때까지 푹 자고 뒤늦게 일어나는 법인데 뭐 하러 현재… 아침 9시에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조금 둘러보니 버스도 잘못 탔다. n-1번? 평소 타는 시내버스가 아니다. 처음 타는 마을버스다. 왜인지 출근시간인데 직장인도 없다. 창밖을 보니 보이는 것은 a산. 여기까지 와버린 건가. 오랜만에 a산 앞까지 왔으니 등산이나 가볼까. 사실 오후에 시험이 있긴 한데,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경제…라면 지금 공부한다고 바뀔 것도 없겠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수면 부족으로 망가진 체력이나 복구해 보자 생각하며 바로 내린다. 날씨도 꽤 따뜻하고 좋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겨운 골목 동네인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디 갔을까. 평일 낮이라 아무도 없을 만도 한가. 어찌되었든 개인적으로 나는 이 b시의 이런 면이 좋다. 번화가 근처에 가도, 고개를 들어 근처 산을 찾고는 그쪽으로 가보기만 하면 골목골목 산을 얼기설기 감싼 동네들이 나온다. 다닥다닥 층계를 이루며 쌓여있는 하얗고 낡은 집들. 생각하는 와중 날씨가 너무 좋은 탓인지 걷는데도 잠이 온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이미 등산로로 추정되는 길 앞까지 왔기에 올라갈지 어디서 잠시 쉬고 갈지 고민이 되던 찰나, 산으로 가는 길목 사이 나무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딱 좋은 벤치를 발견했다. 저기서 잠시 자면 되겠다. 바로 곁에 가방을 던져놓고는 드러눕는다. 그런데, 지금 뭔가를 잊어버리지 않았나? 확실히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생각하며 순식간에 잠들었다.
*
만약 처참한 몰골의, 비쩍 마른 누군가가 걸친 것도 없이 차갑고 어둡고 흐릿한 붉은 사막의 불안하게 솟아있는 바위 중간쯤 힘없이 걸터앉아 오래된 피가 흥건한 투박한 뼛조각을 들고는 자신의 시야의 초점을 맞추려는 의지조차 없이 공허한 마음으로 그저 붉은 모래 위로 탁한 검은 피가 천천히 있는 듯 없는 듯 떨어지고, 모래 속으로 스며 사라지고, 또 떨어지고, 스며 사라지는 그 광경을 기이하게 바라보고, 그런 자신을 한번 기이하다 생각해 보고, 왠지 이유 없이 조금 외로운 느낌으로 속이 서늘하며 우울해 다시금 머리를 비우고,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잊고, 자신의 시야가 흐린 이유가, 안개의 실재 때문인지 그 자신의 마음가짐 때문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 생각하며 그저 멍하니 다시금 미지근한 핏물이 모이는 뼛조각 끝을 바라볼 뿐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 그의 머리채는 푸르다. 누군가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누군가는 서술로써 용납할 수 있다고 했고 그에 동조하는 누군가는 상징까지 내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누군가는 머리가 상당히 길다는 서술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시작 부분의 서술로 만족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게 밤이 다 되었을 적에 우리는 그 사람을, 아니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일어나서 그 즉시 너무나 차가워진 바위가 끔찍해서 주먹으로 치고 아파하며 뼛조각을 집어던진다. 던지자마자 후회하고, 후회한 것을 또 후회한다. 바위를 뒤로하고 어디론가 걸어간다. 걸어가도 제자리라는 것을 왜인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단 걸어간다. 이 사막이라는 것을 진정 전장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전의 그 사실을 기억해 줄 사람이 없다면 이곳을 뭐라 부르던 상관이 있는가. 그 찰나의 순간에도 몸의 중심은 앞으로 쏠려있어 힘없이 한 발 한 발 털썩털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육체다. 거친 피부에 느껴질 정도의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저 사막과 자신과 나아감이 있을 뿐이다. 안개도 있다. 그리고 저 뒤편 어딘가에 바위의 형상을 가진 무언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저 '저 앞의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한다'라는 가능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원하는, 그 모순적인 상태를 그가 계속해서 느낀다는 것이고 그 사실은 그의 공허한 마음 한켠에서 비롯된다. 그 공허한 한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면, 그건 그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것으로, 남들에게는 보이기 힘든 것이다.
문득 이 공간을 또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깊이 감으면 어떤 새로운 것을 직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옅은 기대감을 품고, 다시 한번 꿈속에 정신을 섞고 싶다는 갈망을 억제하지 못한 채 다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듯이 온몸에 힘을 빼고 눅눅하지만 충분히 푹신한 모래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바라보며 뒤로 강하하고, 어딘가에 닿았다 생각할 때쯤 꿈을 꾸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
이야기의 뼈대가 수십 번 회전하고 몇 가지 종류의 시점이 흘러가는 것을 그들이 봅니다. 또한 그들은 그 사이에 어떠한 독특한 종류의 대화를 엿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였습니다. 그 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군가: 이게 그때 저희가 그렇게 명명했던 증상입니다. 정보처리의 오작동으로 인한 혼란입니다. 어쩌면 오작동보단 과작동이 더 알맞은 표현일까요.
다른 누군가: 제 동생도 어린 시절에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제 동생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가지 세계만을 추가로 경험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겠네요.
누군가: 음… 이건 제 개인적인,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만한 이상한 생각입니다만, 어쩌면 이 환자 또한 한 가지 세계만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쪽 동생분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다른 누군가: 무슨 뜻이죠? 이렇게나 많은 세계를 경험하는데, 그럴리가 있나요?
누군가: 그럴리가 없죠. 그런데 자꾸만 그렇게 생각됩니다. 이상하네요?
*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잠시 어… 제가 연구했던 화가 한 명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물론 시험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 이런 이야기도 해 드리면 분위기 환기가 될 거 같아서요… 그… 여기 사진에 보이는 이 사람인데요, 이름은 아마 처음 들어보실 거예요. 현대 화가 중 한 명인데, 그렇게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고. 그런데 어…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여러분들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뭔가를 느꼈거든요. 그때 마침 부득이한 사정으로 잠시 직장을 잃어서 힘들었던 시기인데, 참 이 그림을 보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어요. 이 조용하지만 어딘가 스쳐가는 희망이 느껴지는 우울함. 우울로 우울을 이기게 해 준 셈이죠. 그런 셈이죠…. 그때 제가 이 화가 관련해서 썼던 논문입니다. 현대 한국의 고흐…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건 조금이라도 더 주목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 사실은 고흐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화가죠. 그 그림의 성격을 어떤 특정한 장르로 분류하기는 어려운데, 아예 그 작가 본인이 한 장르가 되기에는 커리어나 그림의 수 자체가 턱없이 부족해서…, 저 같은 작은 연구자의 주목을 받는 정도로 끝난 거겠죠. 하지만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그는 약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계에서 그의 괴상한 예술관 자체를 일종의… 그… 질병으로. 분류하고, 그에 대해서 완벽한 치료 체계를 구축하려 했던 사람이 실제로 있어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지인을 통해서…."
이미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이 없는 듯하다.
"에, 그냥 이제 시험범위 정리해 드릴게요. 자 8차시 자료부터 보시면 되는데요…"
*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나요. 뭐 보기만 했지 실제로 직접 시작해 본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네요. 그러나 정말 누군가에게 그걸 보여주기 시작한 건… 올해 4월인가… 5월이네요. 보여주든지 보여주지 않든지 뭐 어떻게 되었든 계속 쓰긴 했을 거니깐 상관은 있을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도 보지 않아도 글은 쓰게 될 텐데, 그 모양은 완전히 같더라도 타인의 존재 자체가 글을 변화시키는 것 같아요. 이 이유 말고도 다양한 측면에서 글이라는 건 참 특이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보는데요, 그중 또 한 가지에 대해 말하자면 다른 비슷한 종류의 무언가들과 비교했을 때 말이죠, 활자 자체는 굉장히 연약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마치 글을 쓰다 보면, 왜인지 일부러 최대한 단순한 방법으로 무언가를 굳이 힘들게 표현하는, 도전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마치 이쑤시개 같은 단순한 물건으로 남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거대한 탑을 쌓아야 하는, 그런 종류의 방향성을 가지는 일로 생각되는데, 뭐 그건 제 입장에서만 그런 걸까요? 다른 위치의 사람들은 또 다르게 생각할 거예요. 관객석에 앉아있는 분들의 생각도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남자는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의 관객석을 본다.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조금 더 유심히 관객석을 본다. 서서히 눈이 어둠에 적응해 시야가 트인다. 관객석에 있는 이들은, 씁쓸하게도 대충 사람 모양의 검은 판들 뿐이고, 그런 거였지. 예측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좌석 사이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들에서 다시금 기다렸다는 듯 녹음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언제부터 혼자 이러고 있었던 거죠?" 목소리가 적당히 울린다. 목이 메고 갑자기 공기가 가볍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한숨을 쉬며 얼굴을 찡그렸다 펴니 마침 세트장이 무너진다.
세트장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세트장 밖에는 스태프고 뭐고 아무것도 없고, 보이는 것은 그저 흰색. 눈이 멀 정도로 하얀 세상이다. 세상이 명암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하니 위아래가 어딘지조차 헷갈린다. 세트장의 잔해 정도가 기준이 될 뿐이다.
이렇게나 세상이 비어버렸다면, 무언가 다시 만들어 보아야 할까? 단순한 발상에서 비롯된 세계는 너무나 빨리 닳고 무너져버린다. 인공적인 것은 그런 법이다. 하지만, 머릿속 깊숙한 것들을 꺼내 다시금 세워 본다면, 더욱더 이야기들은 얽히고 복잡해지겠지만, 일단은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한번 다시 눈을 감아 보자.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오래된 이야기가 아직 더 남아있을 것이다.
이제 방식이야 어찌 되든 좋기 때문에…
눈을 뜨면 어디에 도착해 있을지 알 것도 같다. 또 그 작은 방에서 몸을 일으키게 되지 않을까. 여전히 너무나 낯설지만, 낯선 만큼이나 익숙한 작은 방에 도착하고는, 다시금 머릿속을 조용히 비우게 될 것이다. 아마 그곳이 내 정신의 정류장인 것이리라. 그곳 자체도 결국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야기가… 일종의
"일종의 기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
예컨대 그 작은 집은 그랬다. 항상 그랬다. 아직도 그 집을 떠올리려 할 때면 항상 기분이 어딘가 찝찝하면서도, 여전히 너무 그립다. 그러나 그곳으로 돌아갈 방법도, 필요도 없다. 그저 기억 속에 놓아두면 될 뿐. 그 기억이 진실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 기억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가려져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드러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집이라기보다는 작은 방에 가까웠다. 방은 온통 파스텔톤의 따뜻한 하얀색을 띠었고, 방에 있던 것은 침대와 책장 정도였다. 침대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내가 침대에서 자 본 적이 있었던가. 침대. 낯설다. 하지만 먼 옛날 어떤 시간들에서 나는 어떠한 형태로 침대에서 자곤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다. 상관이 없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는다. 창문이 있다. 창문 밖에 보이는 것은, 흰색. 빛나지 않는 흰색이다. 평범하다. 머릿속이 고요하다. 편안하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다. 그저 왜인지 가슴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 뿐이다. 가슴속에 추위가 들어찬 듯도 해 이불을 주워 몸에 두르지만 식은땀이 맺히는 듯한 기분이 들 뿐이다. 실제로 땀은 나지 않았다. 방이 너무 건조해서 그런 것인가. 그러나 방이 건조하다기엔 목이 마르는 듯한 느낌도 전혀 들지 않는다. 모든 것들은 그저 평범함, 특히 왜인지 울적한 평범함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머릿속으로만 말을 하고 있자니, 이 텅 비고 조용한 듯한 공간에 홀로 있는듯한 느낌이 들어 입을 열고 소리를 내 본다. 아―. 생각보다 강한 떨림을 느끼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이곳은 생각 이상으로 비어있다. 내 목소리의 울림이 이 공간의 적막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곳은 완전한 적막에 감싸여 있기에 내 목소리가 이렇게나 크게 들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침대와 이불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주목할 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불을 다시 바라보며 부스럭거려 본다. 부스럭거린다. "어쩌면 이 세계는 그만큼 보잘것없고 평범한 것인가" 평범하게 울리는 평범한 진동이다. 명확히 설명되는 것은 무엇 하나 없지만 머릿속이 철저하게 비어있는 탓인지 혼란스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쩔 도리 없이 본질적으로 평범하고, 그 공간 자체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공간에 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이 불쌍하다. 공간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슬프니 또 잠이 온다. 잠깐만 눈을 붙였다 일어나면 좋을 것 같다. 자시 자리에 눕는다. 아니 어쩌면 잠든 것이 아니다. 책장에서 먼지 쌓인 두툼한 책을 꺼내 조심스레 펼쳐 본 것이다. 아니면 어떤 낡은 기억을 갑자기 떠올렸거나. 아니면… 어쩌면…
*
먹먹한 찰나에 들었을지도 모르는 음성들.
"결국 깨어나지 않는 걸까요?"
"현재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어져만 갈 뿐인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한 개인으로서 너무나 독특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겠죠."
"지금 이 혼란스러운 기억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에 대한 한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게 뭐죠?"
"음… 그저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데, 왜냐하면 이게 또 하나의 이야기라서요…"
*
조작된 기억. 그러나 그 기억을 차마 의심할 수 없다. 깊은 숲속, 아주 먼 옛날 선한 존재들이 자신이 사랑했던 누군가를 위해 지었던 샘물처럼 맑게 세공된 바위 구조물들, 그 정원이자 공터에서, 일생의 절반을 보내었다.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도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 아치형 구조물들 사이에서, 숲의 적막함과 함께 틈새로 새어들어오는 다정한 햇빛의 소리를 들어 보다 이따금씩 벽에 기대어 자고, 잔잔히 흐르는 물을 발견하고 목을 축여도 보고. 그러나 그런 매 순간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종류의 나날들이었다기보다는, 그저 그 모든 순간들을 하나로 종합해 보았을 때에, 그 시작과 끝이 완전히 불분명할 정도로 모든 부분이 서로 이어져 있는, '그 한 가지 순간'이라 명명함으로써 그 이상을 지칭할 수 있는, 소박하지만 완전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 밖으로 빠져나온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현실이라 지칭하는 곳에서 나는 찰나의 순간에 그 기억들을 얻어버린 것이라는, 기이한 사실을 마주하고 차마 아무에게도 그 기억을 전할 수 없었다. 전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 온 것이지만, 그러나 나를 진정으로 혼란스럽게 만든 문제는 거기에 더 이어진다. 나는 차마 그 기억을 마음속에만 묻어둘 수 없었고, 이야기를 써냈다. 이야기는 항상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갔지만, 매번 또 다른 더 작은 발상이자 기억들에서 힘을 얻어 첫 예상보다 더 자라나곤 하며, 모든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얽히며 끊임없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내 그 이야기들을 머릿속에서 한시라도 치워버릴 수 없게 되었고 머지많아 나는 현실 속에서 이야기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었고, 가장 끔찍한 것은 그 모든 이야기들이 나에게 사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이야기의 형태를 띤 것에서부터 막연한 심상이 머릿속에서 일종의 뒤틀린 감정으로 구체화된 것까지 너무나 다양했고, 언제부터인가, 이 수많은 이야기의 흐름 사이에서 현실의 끈을 놓쳐버렸다. 그 정확한 시점은 사실 알 수 없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그중 어떤 이야기가 현실인지 까먹어 버렸다. 그렇게 내 정신은 수많은 이야기들 사이를 유영하게 되었고…
*
"그런데, 사실은 이 이야기도 사실인지 알 수 없다는 거지?"
"응. 난 이제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었는걸."
고개를 들어 보지만 누군가 있음을 막연하게 느낄 뿐이다. 이곳에 도착하면 항상 그렇다. 이 기억에 들어서자마자 감각이라는 인지구조를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그 깜깜함 속에서도, 따스함만은 항상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기억을 아직까지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네가 좀 부러운데."
"왜? 왜 부럽지? 너는 세상을 헷갈리는 일이 없잖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흥분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까."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현실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 걸까?"
"존재하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런 걸까?"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는 거잖아. 이미 영원히 모든 이야기 속에 잠들어버리기를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잖아."
"아…"
*
*
*
……네, 저도 물론 이 작은 이야기가 완벽한 대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마 처음에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일단은 여기서 만족을 해 주십시오. 그러나 언젠가, 언젠가 정말 당신이 슬픔과 기쁨의 눈물을 동시에 흘리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상이 제 대답입니다.
추천 콘텐츠
정육면체로 생각되는 공간, 모든 모서리의 길이가 나의 키와 같다고 생각된다. 조명은 없지만 어둡지 않다. 옅게 바랜 밝은 회색의 벽면이 시야를 차갑게 채우고 있다. 만져보니 차갑지 않다. 처음 손이 닿았을 때는 부드러운 듯했지만 문지르니 거칠다. 재질은 아마 미적지근한 물을 가득 먹은 무거운 석고. 그러나 그렇다기엔 건조하다. 주먹으로 강하게 쳤을 때. 둔탁한 소리가 희미하게만 들려오고 울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리가 애매하게 느껴지는 공간. 오른 검지를 들어 손톱을 벽면을 긁어 본다. 손톱이 갈리는 듯하다. 단단한 벽면. 더 갈아보지만 어째 손톱의 길이는 줄어들지 않는다. 시간이, 말하자면 이제까지 A 만큼 흘러갔다. 이제까지와 같이 단순하고 탐색적인 행동을 5A의 시간 동안 해 본다. 정보를 얻을 수 없어 좌절한다. 정신을 붙들기 위한 대책. 놀이. 정신을 최대한 단순화시키려 노력한다. 근본적이지만 나름 고차원적인 스토리텔링을 진행해 보고 싶지만 물체가 없다. 공간의 유일한 무언가는 나다. 하지만 벽면, 공간 자체를 나와 다른 객체로 인식하는 것이 내 목적-정신을 붙드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인지 고민하다. 고민 자체가 근본적으로 적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는다. 개인적인 놀이를 약 4A의 시간 동안 고안해 보고, 눈을 뜬다. 나의 팔. 나의 팔은 현재 펼쳐져 있다. 이전에 탐색을 진행할 때에 펼쳐진 것이다. 이 순간은, 실존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팔을 굽힌다. 주먹을 쥐어 가슴에 바싹 가져다 댄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뜨고는, 이전의 기억에 대해, 그 기억-방금 전까지 팔을 펼치고 있었다는-의 신뢰성을 점검한다.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혼돈을 느낀다. 첫 번째 형식의 쾌감. 그러나 다시, 다시 이 팔을 굽히고 있다는 순간을 인지한다. 팔의 감각을 집중시켜, 현재 내 모든 오감이 내가 팔을 굽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이 순간은 실재하는 것이다. 현재 나는 이 순간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한 걸음 떨어진 시점에서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조금 뒤에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잘 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이전의 기억이 나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이전의 기억을 철저히 의심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팔을 굽히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지금 확신한다.-이 확신이 이 놀이에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두 번째 쾌감이다- 그리곤 눈을 감고, 팔을 펴고, 눈을 뜬다. 나는 방금 전 내가 팔을 굽히고 있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이 첫 번째 놀이를 8A의 시간 동안 진행했다. 나는 놀이의 특성상 지치게 되었고, 그 대가로 확신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생겼다. 그러나 나는 금세 그 새로운 견해를 잊어버리고 두 번째 놀이를 고안해 내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다. 자고 일어나니 키가 컸다. 방의 한 변을 1이라 하면 현재 나의 키는 1.2 정도로 생각된다.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 예술증후군
- 2023-11-27
대낮에 늦게 일어나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들쳐매고 가끔씩 검어지는 시야 사이로 온 힘을 다해 화장실에 들어가 이상하게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에 물을 묻히고 먼지 쌓인 선반의 지갑을 챙겨서는 밖으로 나선다. 평일 낮에 하릴없이, 특히나 나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은 어르신들밖에 없다. 어느 정도 강하게 내리쬐이는 햇살, 그리고 제법 쌀쌀해진 가을바람 사이의 모호한 괴리감을 느끼며 산발이 된 머리를 매만지다가 딱히 보는 사람도 없기에 그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면서도 그저 계속 어루만진다. 걷다 보니 카페에 도착했다. 최근에 알바 공고를 보고 문자로 알바 문의를 넣었지만 자리가 없다고 했던 곳이다. 그럼 공고는 왜 있었던 것인가 생각하며 카페에 들어서자 멀끔하게 빼입은 깔끔한 청년이 카운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비참한 기분이 든다. 이제는 차가운 음료가 싫다. 아직 태양은 강하게 내리쬐지만 숨만 쉬어도 찬 공기에 목구멍이 갈라지고 콧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뜨거운 커피를 주문한다. 청년이 아메리카노 말씀이시죠 하자 네라 답한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무의미한 행동에 회의감이 들어 내려놓는다. 창밖을 본다. 조금 남아있던 조각구름이 걷히며 도로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에 빛의 선이 잠시 또렷하게 맺힌다. 커피를 들고 저기에 앉아 있어도 되겠지만 사람들에게 폐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커피가 나왔다. 이제 뭐라도 하러 가야 하지만 일단 오늘은 그저 걸어 다닐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책이라도 한 권 빌려서 공원에 가면 어떨까. 하지만 그 생각은 많이 하였지만 왜인지 오늘 같은 쓸쓸한 날에는 무언가 조금 다른 것을 해보고도 싶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니 저편 아파트 단지 뒤에 학교가 보인다. 학교 근처에 가 본다면 어떨까. 학교 후문 근처에 벤치가 있다. 거기 앉는다면 학교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뜬금없이 손에 든 커피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며 지출에 묘한 죄책감을 느낀다.벤치에 앉았다. 햇볕에 조금 데워져 있어서 앉으니 기분이 썩 괜찮다. 벤치에 앉아 학교를 바라보니 기분이 묘하다. 불편하면서도 반가운 듯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나도 얼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저 펜스 안에, 저 붉은 갈색 벽돌 건물에 갇혀 있었는데, 아직도 많은 이들은 저기 갇혀있겠지. 그런데도 참 이상한 건, 저기서 빠져나오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다시 저 철창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마음 깊이 스며들어 오는 것은 왜일까. 사람이 그리운 건가.예전의 그 독서실에도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사람들도 나에 대해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잘 쳐줘 봐야 동물 정도로 느꼈을 것이고 대부분은 식물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타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곳의 모두가 의도적으로 그 삭막함을 추구하기에... 그러나 가끔, 그 와중에도 그 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었지만,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건, 사람들 간의 소통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 예술증후군
- 2023-10-29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런 질문들은 항상 주변과 격리되어 가만히 있는 그에게도 휘몰아치며 가끔씩 그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럼에도 그 질문들이 그의 모든 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면 비로소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 드러난다. 수많은 존재들이 그에게 그런 질문들을 한다. 그때 그는 어린아이가 된 채로 그저 가만히 서서 외친다. "저는, 소설이 될 거랍니다!"글은 머릿속에 휘몰아치고 어느새 눈앞의 모든 것들은 독자가 될 뿐이다. 이 사람은 글 속에만 존재하고,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쉰다. 무형의 공간에 헤엄치고 있는 그는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제공할 만한 것은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그의 현실은 그의 머릿속과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그는 꿈에서 현실을 살고, 이따금 현실에서 깨어나 꿈을 마주한다. 결국에 그는 소설에, 자신에, 꿈의 이야기를 남긴다. 말하자면 이제부터 이어지는 것은 그의 꿈과 현실 사이의 난장판을 최대한 정제한 것, 혼돈의 정수이다. 조금 현실적이게 말하자면 그저 꿈 일기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거리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 어디를 걷는지에 대한 의식도 없이 그저 거리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 망상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사람의 정신을 현실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땀에 젖은 구겨진 셔츠의 옷깃을 펄럭이자 몸이 으슬하니 떨려온다. 주위를 둘러본다. 처음 보는 거리다. 그는 딱히 특색이 없는 도심의 한복판에 있다. 굳이 특징을 찾자면 수목이 조금 많은 편인 듯 하다. 비슷한 일이 한 번씩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걷다 망상에서 깨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니 망상이 아닌 꿈을 꾸다 깨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몽유병. 몽유병이다. 불현듯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머리가 텅 비는 기분이다. 병원에 가 보아야 하나. 그런데 낯선 곳이라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지금 중요한 것은 병원이 아닌 것 같다. 주머니를 더듬어 보지만 딱히 아무것도 없다. 휴대전화도, 지갑도 없다. 갑자기 조금 어지럽다. 이럴 때는...... 아. 파출소에 들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도 길 건너편에 경찰서가 보인다. 근처 신호등이 있는 쪽으로 가 신호를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 왜인지 점점 피곤해진다. 빨리 해결하고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자고 싶다......그는 깊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들어가 흐느끼고 있다. 왜 울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아 두리번거리니 굴이 무너지고 있기에 울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더 서럽게 운다. 결국 구덩이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그는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이미 파란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쳐다본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깜박이는 파란불을 흘깃흘깃 보며 서둘러 건넌다. 신호등을 건너자 우측 구석에 작은 경찰서가 보인다. 그는 경찰서 앞으로 걸어가 서둘러 유리
- 예술증후군
- 2023-09-3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