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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증후군?

  • 작성자 예술증후군
  • 작성일 2023-12-30
  • 조회수 348

잔혹하기도 하셔라… 하다하다 이제는 저한테 그런 질문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건이제까지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간단한 의사소통 방식으로 전달 가능한 정보의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나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방식으로 그걸 전달하는 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전달된다는 그 과정 자체에 의해 그 즉시 완전히 다른 사실로 변화할 것이기에… 그저 현재 이곳에서는 저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종류의 사실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실망하실 것도 없는 것이이건 저 외의 타인에게 있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닐뿐더러 누구나 개개인의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종류의 것이기에… 그것이 어떠한 사실로 구현화된아니 구현화되었다고 고집을 부리는 행위를 통해 생겨난착각일 수도 있는 사실이라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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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그새 잠들었던 것 같다햇빛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자 낯선 풍경이 눈앞에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학교를지나쳤나창밖을 유심히 보니 굽은 등선의 a산이 보인다팔짱을 풀고 핸드폰을 들어 시간표를 보니 오전 강의가 없다보통 이런 날에는 점심때까지 푹 자고 뒤늦게 일어나는 법인데 뭐 하러 현재… 아침 9시에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조금 둘러보니 버스도 잘못 탔다. n-1평소 타는 시내버스가 아니다처음 타는 마을버스다왜인지 출근시간인데 직장인도 없다창밖을 보니 보이는 것은 a여기까지 와버린 건가오랜만에 a산 앞까지 왔으니 등산이나 가볼까사실 오후에 시험이 있긴 한데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경제라면 지금 공부한다고 바뀔 것도 없겠다그냥 마음을 비우고 수면 부족으로 망가진 체력이나 복구해 보자 생각하며 바로 내린다날씨도 꽤 따뜻하고 좋다그런데 이상하게 정겨운 골목 동네인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다들 어디 갔을까평일 낮이라 아무도 없을 만도 한가어찌되었든 개인적으로 나는 이 b시의 이런 면이 좋다번화가 근처에 가도고개를 들어 근처 산을 찾고는 그쪽으로 가보기만 하면 골목골목 산을 얼기설기 감싼 동네들이 나온다다닥다닥 층계를 이루며 쌓여있는 하얗고 낡은 집들생각하는 와중 날씨가 너무 좋은 탓인지 걷는데도 잠이 온다그런 생각들을 하며 이미 등산로로 추정되는 길 앞까지 왔기에 올라갈지 어디서 잠시 쉬고 갈지 고민이 되던 찰나산으로 가는 길목 사이 나무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딱 좋은 벤치를 발견했다저기서 잠시 자면 되겠다바로 곁에 가방을 던져놓고는 드러눕는다그런데지금 뭔가를 잊어버리지 않았나확실히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생각하며 순식간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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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처참한 몰골의비쩍 마른 누군가가 걸친 것도 없이 차갑고 어둡고 흐릿한 붉은 사막의 불안하게 솟아있는 바위 중간쯤 힘없이 걸터앉아 오래된 피가 흥건한 투박한 뼛조각을 들고는 자신의 시야의 초점을 맞추려는 의지조차 없이 공허한 마음으로 그저 붉은 모래 위로 탁한 검은 피가 천천히 있는 듯 없는 듯 떨어지고모래 속으로 스며 사라지고또 떨어지고스며 사라지는 그 광경을 기이하게 바라보고그런 자신을 한번 기이하다 생각해 보고왠지 이유 없이 조금 외로운 느낌으로 속이 서늘하며 우울해 다시금 머리를 비우고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잊고자신의 시야가 흐린 이유가안개의 실재 때문인지 그 자신의 마음가짐 때문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 생각하며 그저 멍하니 다시금 미지근한 핏물이 모이는 뼛조각 끝을 바라볼 뿐이라 생각한다면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그의 머리채는 푸르다누군가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다른 누군가는 서술로써 용납할 수 있다고 했고 그에 동조하는 누군가는 상징까지 내포할 수 있다고 하였다또 누군가는 머리가 상당히 길다는 서술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했고시작 부분의 서술로 만족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게 밤이 다 되었을 적에 우리는 그 사람을아니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일어나서 그 즉시 너무나 차가워진 바위가 끔찍해서 주먹으로 치고 아파하며 뼛조각을 집어던진다던지자마자 후회하고후회한 것을 또 후회한다바위를 뒤로하고 어디론가 걸어간다걸어가도 제자리라는 것을 왜인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단 걸어간다이 사막이라는 것을 진정 전장이라고 볼 수 있는가이전의 그 사실을 기억해 줄 사람이 없다면 이곳을 뭐라 부르던 상관이 있는가그 찰나의 순간에도 몸의 중심은 앞으로 쏠려있어 힘없이 한 발 한 발 털썩털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육체다거친 피부에 느껴질 정도의 바람은 불지 않는다그저 사막과 자신과 나아감이 있을 뿐이다안개도 있다그리고 저 뒤편 어딘가에 바위의 형상을 가진 무언가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저 '저 앞의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한다'라는 가능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원하는그 모순적인 상태를 그가 계속해서 느낀다는 것이고 그 사실은 그의 공허한 마음 한켠에서 비롯된다그 공허한 한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면그건 그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것으로남들에게는 보이기 힘든 것이다.

문득 이 공간을 또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눈을 깊이 감으면 어떤 새로운 것을 직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옅은 기대감을 품고다시 한번 꿈속에 정신을 섞고 싶다는 갈망을 억제하지 못한 채 다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듯이 온몸에 힘을 빼고 눅눅하지만 충분히 푹신한 모래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바라보며 뒤로 강하하고어딘가에 닿았다 생각할 때쯤 꿈을 꾸게 되었다그렇게 생각했다.

 

*

 

이야기의 뼈대가 수십 번 회전하고 몇 가지 종류의 시점이 흘러가는 것을 그들이 봅니다또한 그들은 그 사이에 어떠한 독특한 종류의 대화를 엿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였습니다그 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군가이게 그때 저희가 그렇게 명명했던 증상입니다정보처리의 오작동으로 인한 혼란입니다어쩌면 오작동보단 과작동이 더 알맞은 표현일까요.

다른 누군가제 동생도 어린 시절에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제 동생은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가지 세계만을 추가로 경험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겠네요.

누군가… 이건 제 개인적인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만한 이상한 생각입니다만어쩌면 이 환자 또한 한 가지 세계만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그쪽 동생분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다른 누군가무슨 뜻이죠이렇게나 많은 세계를 경험하는데그럴리가 있나요?

누군가그럴리가 없죠그런데 자꾸만 그렇게 생각됩니다이상하네요?

 

*

 

"그런 의미에서오늘은 잠시 어… 제가 연구했던 화가 한 명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해 드리려고 하는데요물론 시험에는 나오지 않습니다그래도 한 번쯤 이런 이야기도 해 드리면 분위기 환기가 될 거 같아서요… … 여기 사진에 보이는 이 사람인데요이름은 아마 처음 들어보실 거예요현대 화가 중 한 명인데그렇게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고그런데 어…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뭔가 느껴지지 않나요여러분들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뭔가를 느꼈거든요그때 마침 부득이한 사정으로 잠시 직장을 잃어서 힘들었던 시기인데참 이 그림을 보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어요이 조용하지만 어딘가 스쳐가는 희망이 느껴지는 우울함우울로 우울을 이기게 해 준 셈이죠그런 셈이죠그때 제가 이 화가 관련해서 썼던 논문입니다현대 한국의 고흐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건 조금이라도 더 주목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사실은 고흐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화가죠그 그림의 성격을 어떤 특정한 장르로 분류하기는 어려운데아예 그 작가 본인이 한 장르가 되기에는 커리어나 그림의 수 자체가 턱없이 부족해서저 같은 작은 연구자의 주목을 받는 정도로 끝난 거겠죠하지만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그는 약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정신분석학계에서 그의 괴상한 예술관 자체를 일종의… … 질병으로분류하고그에 대해서 완벽한 치료 체계를 구축하려 했던 사람이 실제로 있어요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지인을 통해서."

이미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이 없는 듯하다.

"그냥 이제 시험범위 정리해 드릴게요자 8차시 자료부터 보시면 되는데요"

 

*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나요뭐 보기만 했지 실제로 직접 시작해 본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네요그러나 정말 누군가에게 그걸 보여주기 시작한 건… 올해 4월인가… 5월이네요보여주든지 보여주지 않든지 뭐 어떻게 되었든 계속 쓰긴 했을 거니깐 상관은 있을지 모르겠네요솔직히 말해서 아무도 보지 않아도 글은 쓰게 될 텐데그 모양은 완전히 같더라도 타인의 존재 자체가 글을 변화시키는 것 같아요이 이유 말고도 다양한 측면에서 글이라는 건 참 특이해요그러니까 굉장히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보는데요그중 또 한 가지에 대해 말하자면 다른 비슷한 종류의 무언가들과 비교했을 때 말이죠활자 자체는 굉장히 연약하다고 봅니다그래서 마치 글을 쓰다 보면왜인지 일부러 최대한 단순한 방법으로 무언가를 굳이 힘들게 표현하는도전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마치 이쑤시개 같은 단순한 물건으로 남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거대한 탑을 쌓아야 하는그런 종류의 방향성을 가지는 일로 생각되는데뭐 그건 제 입장에서만 그런 걸까요다른 위치의 사람들은 또 다르게 생각할 거예요관객석에 앉아있는 분들의 생각도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남자는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의 관객석을 본다웃음소리가 들려온다남자는 조금 더 유심히 관객석을 본다서서히 눈이 어둠에 적응해 시야가 트인다관객석에 있는 이들은씁쓸하게도 대충 사람 모양의 검은 판들 뿐이고그런 거였지예측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좌석 사이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들에서 다시금 기다렸다는 듯 녹음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언제부터 혼자 이러고 있었던 거죠?" 목소리가 적당히 울린다목이 메고 갑자기 공기가 가볍고 불편하게 느껴진다한숨을 쉬며 얼굴을 찡그렸다 펴니 마침 세트장이 무너진다.

세트장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세트장 밖에는 스태프고 뭐고 아무것도 없고보이는 것은 그저 흰색눈이 멀 정도로 하얀 세상이다세상이 명암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하니 위아래가 어딘지조차 헷갈린다세트장의 잔해 정도가 기준이 될 뿐이다.

 

이렇게나 세상이 비어버렸다면무언가 다시 만들어 보아야 할까단순한 발상에서 비롯된 세계는 너무나 빨리 닳고 무너져버린다인공적인 것은 그런 법이다하지만머릿속 깊숙한 것들을 꺼내 다시금 세워 본다면더욱더 이야기들은 얽히고 복잡해지겠지만일단은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없을 것이다한번 다시 눈을 감아 보자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오래된 이야기가 아직 더 남아있을 것이다.

이제 방식이야 어찌 되든 좋기 때문에

눈을 뜨면 어디에 도착해 있을지 알 것도 같다또 그 작은 방에서 몸을 일으키게 되지 않을까여전히 너무나 낯설지만낯선 만큼이나 익숙한 작은 방에 도착하고는다시금 머릿속을 조용히 비우게 될 것이다아마 그곳이 내 정신의 정류장인 것이리라그곳 자체도 결국은 이야기일 뿐이지만그렇지만그렇지만이야기가… 일종의

"일종의 기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

 

예컨대 그 작은 집은 그랬다항상 그랬다아직도 그 집을 떠올리려 할 때면 항상 기분이 어딘가 찝찝하면서도여전히 너무 그립다그러나 그곳으로 돌아갈 방법도필요도 없다그저 기억 속에 놓아두면 될 뿐그 기억이 진실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그래도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하지만 그래도 그 기억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그 무언가는 가려져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그것이 드러날 일은 없을 것이다그것이 드러나는 날이 온다면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집이라기보다는 작은 방에 가까웠다방은 온통 파스텔톤의 따뜻한 하얀색을 띠었고방에 있던 것은 침대와 책장 정도였다침대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내가 침대에서 자 본 적이 있었던가침대낯설다하지만 먼 옛날 어떤 시간들에서 나는 어떠한 형태로 침대에서 자곤 했을지도 모르겠다그럴 수도 있다상관이 없다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는다창문이 있다창문 밖에 보이는 것은흰색빛나지 않는 흰색이다평범하다머릿속이 고요하다편안하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다그저 왜인지 가슴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 뿐이다가슴속에 추위가 들어찬 듯도 해 이불을 주워 몸에 두르지만 식은땀이 맺히는 듯한 기분이 들 뿐이다실제로 땀은 나지 않았다방이 너무 건조해서 그런 것인가그러나 방이 건조하다기엔 목이 마르는 듯한 느낌도 전혀 들지 않는다모든 것들은 그저 평범함특히 왜인지 울적한 평범함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머릿속으로만 말을 하고 있자니이 텅 비고 조용한 듯한 공간에 홀로 있는듯한 느낌이 들어 입을 열고 소리를 내 본다생각보다 강한 떨림을 느끼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이곳은 생각 이상으로 비어있다내 목소리의 울림이 이 공간의 적막함을 확인시켜 주었다이곳은 완전한 적막에 감싸여 있기에 내 목소리가 이렇게나 크게 들리는 것이리라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침대와 이불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주목할 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이불을 다시 바라보며 부스럭거려 본다부스럭거린다. "어쩌면 이 세계는 그만큼 보잘것없고 평범한 것인가평범하게 울리는 평범한 진동이다명확히 설명되는 것은 무엇 하나 없지만 머릿속이 철저하게 비어있는 탓인지 혼란스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어쩔 도리 없이 본질적으로 평범하고그 공간 자체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공간에 와 있다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이 불쌍하다공간이불쌍해서 눈물이 난다슬프니 또 잠이 온다잠깐만 눈을 붙였다 일어나면 좋을 것 같다자시 자리에 눕는다아니 어쩌면 잠든 것이 아니다책장에서 먼지 쌓인 두툼한 책을 꺼내 조심스레 펼쳐 본 것이다아니면 어떤 낡은 기억을 갑자기 떠올렸거나아니면… 어쩌면

 

*

 

먹먹한 찰나에 들었을지도 모르는 음성들.

 

"결국 깨어나지 않는 걸까요?"

"현재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어져만 갈 뿐인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한 개인으로서 너무나 독특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겠죠."

"지금 이 혼란스러운 기억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하지만 그 자신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에 대한 한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게 뭐죠?"

"… 그저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데왜냐하면 이게 또 하나의 이야기라서요"


*

 

조작된 기억그러나 그 기억을 차마 의심할 수 없다깊은 숲속아주 먼 옛날 선한 존재들이 자신이 사랑했던 누군가를 위해 지었던 샘물처럼 맑게 세공된 바위 구조물들그 정원이자 공터에서일생의 절반을 보내었다어떠한 인위적인 노력도 취할 필요가 없었다그저 그 아치형 구조물들 사이에서숲의 적막함과 함께 틈새로 새어들어오는 다정한 햇빛의 소리를 들어 보다 이따금씩 벽에 기대어 자고잔잔히 흐르는 물을 발견하고 목을 축여도 보고그러나 그런 매 순간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종류의 나날들이었다기보다는그저 그 모든 순간들을 하나로 종합해 보았을 때에그 시작과 끝이 완전히 불분명할 정도로 모든 부분이 서로 이어져 있는, '그 한 가지 순간'이라 명명함으로써 그 이상을 지칭할 수 있는소박하지만 완전한 순간이었다그 순간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 밖으로 빠져나온 것을 깨달았다그들이 현실이라 지칭하는 곳에서 나는 찰나의 순간에 그 기억들을 얻어버린 것이라는기이한 사실을 마주하고 차마 아무에게도 그 기억을 전할 수 없었다전할 필요도 없었다그렇게 생각해 온 것이지만그러나 나를 진정으로 혼란스럽게 만든 문제는 거기에 더 이어진다나는 차마 그 기억을 마음속에만 묻어둘 수 없었고이야기를 써냈다이야기는 항상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갔지만매번 또 다른 더 작은 발상이자 기억들에서 힘을 얻어 첫 예상보다 더 자라나곤 하며모든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얽히며 끊임없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나는 이내 그 이야기들을 머릿속에서 한시라도 치워버릴 수 없게 되었고 머지많아 나는 현실 속에서 이야기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었고가장 끔찍한 것은 그 모든 이야기들이 나에게 사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그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이야기의 형태를 띤 것에서부터 막연한 심상이 머릿속에서 일종의 뒤틀린 감정으로 구체화된 것까지 너무나 다양했고언제부터인가이 수많은 이야기의 흐름 사이에서 현실의 끈을 놓쳐버렸다그 정확한 시점은 사실 알 수 없다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그중 어떤 이야기가 현실인지 까먹어 버렸다그렇게 내 정신은 수많은 이야기들 사이를 유영하게 되었고

 

*

 

"그런데사실은 이 이야기도 사실인지 알 수 없다는 거지?"

"난 이제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었는걸."

고개를 들어 보지만 누군가 있음을 막연하게 느낄 뿐이다이곳에 도착하면 항상 그렇다이 기억에 들어서자마자 감각이라는 인지구조를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듯한 기분이다하지만그 깜깜함 속에서도따스함만은 항상 느낄 수 있다그렇기에 이 기억을 아직까지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네가 좀 부러운데."

"왜 부럽지너는 세상을 헷갈리는 일이 없잖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흥분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까."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현실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 걸까?"

"존재하지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런 걸까?"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는 거잖아이미 영원히 모든 이야기 속에 잠들어버리기를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그러지 않았잖아."

""

 

*

 

*

 

*

 

……저도 물론 이 작은 이야기가 완벽한 대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그런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아마 처음에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그러니 일단은 여기서 만족을 해 주십시오그러나 언젠가언젠가 정말 당신이 슬픔과 기쁨의 눈물을 동시에 흘리게 해 드리겠습니다어떤 시점에서어떤 방식으로 전해질지는 모르겠습니다그것은 어쩌면 이야기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이상이 제 대답입니다.


예술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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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7
대낮에

대낮에 늦게 일어나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들쳐매고 가끔씩 검어지는 시야 사이로 온 힘을 다해 화장실에 들어가 이상하게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에 물을 묻히고 먼지 쌓인 선반의 지갑을 챙겨서는 밖으로 나선다. 평일 낮에 하릴없이, 특히나 나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은 어르신들밖에 없다. 어느 정도 강하게 내리쬐이는 햇살, 그리고 제법 쌀쌀해진 가을바람 사이의 모호한 괴리감을 느끼며 산발이 된 머리를 매만지다가 딱히 보는 사람도 없기에 그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면서도 그저 계속 어루만진다. 걷다 보니 카페에 도착했다. 최근에 알바 공고를 보고 문자로 알바 문의를 넣었지만 자리가 없다고 했던 곳이다. 그럼 공고는 왜 있었던 것인가 생각하며 카페에 들어서자 멀끔하게 빼입은 깔끔한 청년이 카운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비참한 기분이 든다. 이제는 차가운 음료가 싫다. 아직 태양은 강하게 내리쬐지만 숨만 쉬어도 찬 공기에 목구멍이 갈라지고 콧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뜨거운 커피를 주문한다. 청년이 아메리카노 말씀이시죠 하자 네라 답한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무의미한 행동에 회의감이 들어 내려놓는다. 창밖을 본다. 조금 남아있던 조각구름이 걷히며 도로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에 빛의 선이 잠시 또렷하게 맺힌다. 커피를 들고 저기에 앉아 있어도 되겠지만 사람들에게 폐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커피가 나왔다. 이제 뭐라도 하러 가야 하지만 일단 오늘은 그저 걸어 다닐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책이라도 한 권 빌려서 공원에 가면 어떨까. 하지만 그 생각은 많이 하였지만 왜인지 오늘 같은 쓸쓸한 날에는 무언가 조금 다른 것을 해보고도 싶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니 저편 아파트 단지 뒤에 학교가 보인다. 학교 근처에 가 본다면 어떨까. 학교 후문 근처에 벤치가 있다. 거기 앉는다면 학교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뜬금없이 손에 든 커피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며 지출에 묘한 죄책감을 느낀다.벤치에 앉았다. 햇볕에 조금 데워져 있어서 앉으니 기분이 썩 괜찮다. 벤치에 앉아 학교를 바라보니 기분이 묘하다. 불편하면서도 반가운 듯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나도 얼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저 펜스 안에, 저 붉은 갈색 벽돌 건물에 갇혀 있었는데, 아직도 많은 이들은 저기 갇혀있겠지. 그런데도 참 이상한 건, 저기서 빠져나오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다시 저 철창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마음 깊이 스며들어 오는 것은 왜일까. 사람이 그리운 건가.예전의 그 독서실에도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사람들도 나에 대해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잘 쳐줘 봐야 동물 정도로 느꼈을 것이고 대부분은 식물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타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곳의 모두가 의도적으로 그 삭막함을 추구하기에... 그러나 가끔, 그 와중에도 그 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었지만,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건, 사람들 간의 소통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 예술증후군
  • 2023-10-29
소설이 된 남자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런 질문들은 항상 주변과 격리되어 가만히 있는 그에게도 휘몰아치며 가끔씩 그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럼에도 그 질문들이 그의 모든 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면 비로소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 드러난다. 수많은 존재들이 그에게 그런 질문들을 한다. 그때 그는 어린아이가 된 채로 그저 가만히 서서 외친다. "저는, 소설이 될 거랍니다!"글은 머릿속에 휘몰아치고 어느새 눈앞의 모든 것들은 독자가 될 뿐이다. 이 사람은 글 속에만 존재하고,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쉰다. 무형의 공간에 헤엄치고 있는 그는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제공할 만한 것은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그의 현실은 그의 머릿속과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그는 꿈에서 현실을 살고, 이따금 현실에서 깨어나 꿈을 마주한다. 결국에 그는 소설에, 자신에, 꿈의 이야기를 남긴다. 말하자면 이제부터 이어지는 것은 그의 꿈과 현실 사이의 난장판을 최대한 정제한 것, 혼돈의 정수이다. 조금 현실적이게 말하자면 그저 꿈 일기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거리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 어디를 걷는지에 대한 의식도 없이 그저 거리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 망상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사람의 정신을 현실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땀에 젖은 구겨진 셔츠의 옷깃을 펄럭이자 몸이 으슬하니 떨려온다. 주위를 둘러본다. 처음 보는 거리다. 그는 딱히 특색이 없는 도심의 한복판에 있다. 굳이 특징을 찾자면 수목이 조금 많은 편인 듯 하다. 비슷한 일이 한 번씩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걷다 망상에서 깨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니 망상이 아닌 꿈을 꾸다 깨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몽유병. 몽유병이다. 불현듯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머리가 텅 비는 기분이다. 병원에 가 보아야 하나. 그런데 낯선 곳이라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지금 중요한 것은 병원이 아닌 것 같다. 주머니를 더듬어 보지만 딱히 아무것도 없다. 휴대전화도, 지갑도 없다. 갑자기 조금 어지럽다. 이럴 때는...... 아. 파출소에 들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도 길 건너편에 경찰서가 보인다. 근처 신호등이 있는 쪽으로 가 신호를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 왜인지 점점 피곤해진다. 빨리 해결하고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자고 싶다......그는 깊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들어가 흐느끼고 있다. 왜 울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아 두리번거리니 굴이 무너지고 있기에 울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더 서럽게 운다. 결국 구덩이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그는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이미 파란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쳐다본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깜박이는 파란불을 흘깃흘깃 보며 서둘러 건넌다. 신호등을 건너자 우측 구석에 작은 경찰서가 보인다. 그는 경찰서 앞으로 걸어가 서둘러 유리

  • 예술증후군
  • 202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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