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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살 어린이도 어린이를 그리워했다

  • 작성자 위다윗
  • 작성일 2024-03-26
  • 조회수 286

 어린시절 모습이 담겨 있는 나의 추억사진들을 돌아보면, 항상 나의 마음 한구석은 소망을 느꼈고 다른 한편은 잡히지 않는 안개와도 같은 허무감을 느끼곤 했다. 난 언제나 어린 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사실 애썼다기 보단 그렇게 되길 막연히 바랬다. 애쓰다라는 말의 의미는 적어도 이룰 수 있는 목표를 가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의 원함은 그저 원함속에 피어나고 끝났다. 그 이상에 어떠한 것은 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내게 어린 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면 안되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불평하신다. 어리고, 아기같이 유치하고, 천사같이 밝게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이 진실로 나의 과거의 실제였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다. 인생이란...참...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난 내가 과거에 느꼈던 특별한 감정들을 때때로 회상한다. 내가 어린 시절 느꼈던 생각중에, 내게 특별하게 뇌리에 남겨진 기억을 말해보고자 한다. 난, 아무런 걱정도 스트레스 받을 어떤 구실도 찾지 못할만한 세상속에 해맑기만 했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길 원했다. 과연 난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나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행복에서 멀어져가고, 세상에 눈이 밝혀질수록, 절망은 더욱더 깊어져가고...왜, 이런 현실을 나는 몰랐을까?, 라고 나는 묻는다. 어린이의 유토피아는, 그 어린이가 없어지며 같이 사라져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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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내 인생은 미치도록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 복잡하고 답답한 사실을 증명해보고 싶어 쓰고 버린 내 글들과 시간이 참으로 아까울 뿐이다. 모두가 어지러운 인생, 모두가 특별해지기 위해, 위대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 세상에서 나 위다윗이 얼마나 특별한지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뭐, 그렇다고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지하철만 타도 남고딩들이 신나게 욕을 쏟아 붓는 그 “문제적” 기독교 (어떤 불특정 다수에게는 *독교이겠지만)를 독실하게 믿고, 그 신앙에 자신의 젊음을 던진 목회자 부부의 외동아들이자 어릴적부터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으나 그걸 억제하며 버텨온 꽤 인내심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말하면 적당할 듯 하다. 참고로, 이미 보편적인 상식이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사랑”의 형태가 아닌 인간 본성의 “뒤틀어짐” 내지는 인간행위의 “탈선”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오늘날 정통 개신교 내에서 동성애라는 죄와 그 죄를 행하는 LGBTQ 집단의 사람들은 주로 공감과 긍휼 대신 극심한 혐오, 경계와 거절을 받는 대상이다.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우가 노골적이다기 보다는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한 사람들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에 가깝게 보여진다.) 부모님께서 내가 여성의 몸보다 남성의 몸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사춘기를 시작할 즘,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두분 모두 굉장히 속상해하셨지만 기도와 통제 속에서 충분히 꺾일 수 있는 죄의 씨앗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물론 이 씨앗은 보수적인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했고 오늘날 나는 더이상 내가 남편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며 신앙안에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게 되는 남자가 되었다. 내게는 게이라이프 아니면 독신밖에, 적어도 솔직하게는, 선택권이 없게 느껴진다. 다행히 성경은 독신라이프를 반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핵심교리를 확립했던 사도 바울도 독신으로 살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원하는가이다. 아니, 내가 그걸 견딜 수 있는지이다. 아무리 내가 애늙은이라도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은 곧 스무살이 될 나에게 다른 이성애자 젊은이들보다 덜 강하게 일어나진 않는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갈지 모르겠지만, 난 동성애가 죄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과 오해, 적대심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동성애라는 욕구는 한 남자의 한 여자를 향한 자연스러운 욕구만큼 실제이며 이 끌림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한 인간의 영적, 정신적인 필요까지를 담고 있다. 동성애에 대해 말할때 흔히 내 교회 지인들은 “게이들은 온전히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목적으로 다른 남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인사이더로서 분명한 것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이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의 케미, 친밀감, 대상의 지적 능력,

  • 위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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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로 숨쉰다는 것

어린 시절, 난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환경들은 오직 나를 위해 조성된 이들이고, 난 그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하게 살면 된다고 믿었었다. 난 세상과 나자신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유년기를 지나왔다. 어리기만 한 아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하나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많은 것들과 상충되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난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나와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한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사실로서 다가왔지만, 사실은 전보다 나의 두눈을 더 감기게 만들었다. 도통 이 모든 현실이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 혼란속에서 어쩌면 나의 인생에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충격과 두려움은 나의 머리 위를 덮는 어두운 나무의 그림자와도 같았다. 마치 키가 큰 나무옆에서 조용히 자라던 새싹이 키가 자라, 그 나무의 가지에 부딪치는 것처럼, 나또한 그순간 어떤 딱딱한 가지에 머리를 박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이상 내가 중요하거나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사라졌다. 더이상 내가 자유롭고 행복한 미래를 갖을 수 있다는 소망도 사라졌다. 대신 나의 성장과 미래를 가로막는 어두운 철장벽과 그늘진 가지의 모습만이 남았다. 그 모습은 너무도 볼품없고 연약해 보였다. 무지라는 암흑속을 헤메다가 외로히 그 속에서 끝나고 마는 이미지가 나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오직 진리라는 거대한 퍼즐의 파편들 뿐이었다. 그 속에서 내게 다가오는 파편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그 파편들은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었고, 잔인할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사실들과 느껴지는 사실들은 절망의 구덩이를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현재를 기준삼았을때, 현재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받아들일때, 우리의 삶은 제한적이고 움츠려든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들이나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시위하는 여러 사실들은 이해하기 쉽다. 가시처럼 툭 쑤셔대며 우리의 마음에 통증을 일으키는 생각들은 우리의 기억에 선명히 그려진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너머에 있는 더 큰 진리가 있다라는 사실을 믿을때, 우리는 그 믿음안에 도전하고 성장해나가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어떤 환경과 상황이든지 희망과 꿈을 품을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이해되는 것 이상의 것, 즉, 이해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더 큰 진리가 우리의 인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며 때로는 현실에 부딪치고 키가 큰 나무의 가지에 머리를 박게 되는 경험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어두움과 고통속에서 피어나는 내면의 힘이란 믿음이며 신뢰이다. 그 어두움 속에서 피어나는 서광과도 같은 희망은 우리의 인생을 무지안에 갇힌 삶이 아닌, 그 무지속에서 붙들어지는 새로운 내일의 세계로 인도한다. 내가 내일을 기대하며 붙드는 그것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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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녕! 그리고 사랑해”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고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보낸 마지막 문자였다. 안녕. 비록 너는 시퍼렇게 내 기억의 다락방들에 살아 돌아다니고, 실제로 이 세상 어딘가 나를 필요로 했듯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겠지만, 아니, 내 눈 앞에서 그러겠지만. 이젠 정말 너는 내 삶에 존재하지 않는거야. 나는 이 모순이 얼마나 어렵든지간에 이 모순을 실현시켜 나가야 하는거야. 아니야. 결코 아니야. 이건 말이 안돼. 난 널 영원히 기억할지도 몰라. 너가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아니? 너의 숨소리, 표정, 말투가 압구정 학원선생님의 조언보다 더 내 감각을 곤두세웠어. 너에게 이 말도 안되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내가 얼마나 고민했고 번뇌했는지. 어쨌든 안녕은 안녕이니 안녕히 가렴. 행복하게 살고 우리 최대한 서로를 기억하지 말자. 기억한다면 좋은 것만 기억하자. 그리고 사랑해. 사랑해! 너가 다시 돌아온다면 난 펑펑 울지도 몰라. 너무 행복해서 아플지도 몰라. 너의 잔인한 냉대가 날 아프게 했던 것만큼 아플지도 몰라. 너가 혹시라도 너무 멍청해서 내 마음을 몰랐다면 똑똑히 들어. 널 미치도록 사랑했고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널 향해 화산을 폭발시키듯이 사랑해. 넌 정말 나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난 너가 정말 좋았어. 마치 이 사랑이 저주였다는 듯이 말했지만, 우리 참 순수하기도 했잖아. 마치 꽃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히 잔디를 걷듯이 서로가 서로의 보석을 감탄하며 그 보석을 지키기 위해 애썼잖아. 너가 날 좋아한다고 말했을때는 또 어찌 기분이 좋았던지, 이 세상에 해롭지 않은 마약이 있다면 바로 너의 그 문자와 말이었을거야. 너의 포옹도 참 그리워. 싫은척 밀어내려 하는 나를 꼭 붙잡은 너의 온기가 나의 큰 위로였어. 우리는 너무 멀어졌지만 너를 원망하지는 않을게. 난 참 부족함이 많았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아픈만큼 너도 아픈거니? 아니면 나는 그냥 너의 장난감에 불과했던거니? 너의 진심은 결코 알 수 없을거야. 상처받을 나를 위해 그 진심을 감추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너의 미덕이다. 사랑해, 바보멍충아.

  • 위다윗
  •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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