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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 바라보게 되는 것들

  • 작성자 절박한참치
  • 작성일 2007-02-02
  • 조회수 376

비파 악기

 

 콘트라 베이스, 콘트라 베이스, 첼로, 바이올린, 바이올린, 바이올린.

 나란히 놓여 있는 악기들은 길이 들지 않아 결이 곱지 못하다. 검고 윤기나고 매끈매끈한 표면이 사실 손때 묻어 그런 것이라는 걸 문득 깨닫게 한 저 악기들. 2층 유리창에서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첼로를 하나 사서, 검고 윤기나고 매끈매끈하게 손때를 묻혀 볼까 했다. 그런 소망들은 언제나 졸업하고 나면, 으로 미뤄진다. 졸업하고 나면, 피아노를 다시 치고, 손이 풀리면 첼로를 배워야지.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켜고 싶었다. 빈 교실에서. 혼자서. 아마 혼자 있는 기분도 들지 않을 테지만. 첼로는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낸다.

 악기점에 불이 꺼져 있고 커튼이 쳐져 있으면 실망하고 만다. 어느 순간부터 보지 않으면 실망스러워지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 길이 들지 않은 연한 갈색의 몸체들. 말도 안되는 환상이 투영되는, 왼쪽에서 세 번째에 놓인, 첼로. 눈에 너무 익어서 보지 않아도 보인다. 오래 놓여 있었지만 연주되고 길들지 않아서 아직도 어색하게 서 있는 악기들이. 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서 본 서툰 배우처럼 빳빳하게, 하지만 자랑스럽게.

 저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가격은 얼마일까. 대학생에게 첼로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을까. 학교에 첼로를 들고 다닐까. 첼로 케이스는 무료로 주는 걸까. 들고 다니면 얼마나 보기 우스울까. 만화에서 본, 콘트라 베이스를 어깨에 무겁게 '지고' 다니는 애처럼 되나. 집에 첼로를 모셔놓을 공간은 있나.

 이런 저런 망상의 틈바구니로 스며드는 나직한 첼로 음향. 그 소리를 내고 싶어서 머릿속으로 현을 켜보고, 너무 연습해서 어렵지도 않을 거라고 느낀다. 아마 활을 첼로에 대는 순간 멋진 소리가 나서, 날 가르쳐 주려던 사람이, 아! 이 사람은 첼로의 천재구나! 하고 감탄해 버리겠지- 하는 말도 안되는 망상이 다시 시작된다.

 그러면 난 첼로는 취미로 켜는 거에요, 하고 겸손한 척 해야지.

 버스는 어느새 집 가까이로 와 있다.

 

 

동물 병원

 

 요즘은 아예 담요까지 깔고 자고 있다. 어느 날은 다른 고양이가 놀러 오기도 한다. 녀석은 계속 잠만 자고, 뚱뚱하고 하얗고 얼룩진 고양이는 열심히 발을 핥는다. 맨 처음 저 고양이가 왔을 때 둘은 싸웠었다. 거만한 놈이 밀려서 한동안 바닥에서 잤는데. 화해했는지, 같이 진열장에 올라가 있다.

 거만한 놈은 고양이 이름이다. 정식 이름은 물론 아니다. 아는 사람이 키우는 고양이도 아니다. 동네 동물 병원에서 언제나 느긋하게 자고 있는, 푹신한 회색 털에 주황빛 눈을 가진 고양이다. 표정이 하도 거만해 보여서 거만한 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보다 보면 그렇게 거만한 것 같지도 않다.

 나이도 성별도 모른다. 가끔씩 돌아다니는 모습이나 병원으로 기어들어온 작은 날벌레를 쫓아다니는 걸 보면 어린 것 같기도 하고, 몇 시간씩이나 퍼자는 걸 보면 영감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표정. 시큰둥한 얼굴을 보기만 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거만한 고양이 같은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매일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난 알러지가 있다. 거만한 놈은 털이 길어서 집에 데려오면 털이 폴폴 날릴 것이다. 그럼 매일 재채기나 해야겠지. 그렇지만 저 느긋한 성정과 되지도 않게 거만한 모습이 너무도 탐이 났다. 햇빛 좋은 오후에 함께 늘어지게 낮잠을 자면 즐거울 것 같았다. 세상사가 힘들 땐 놈의 심드렁한 눈이나 들여다 보면서 함께 단순해지고. 고양이는 말없이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어서, 나는 고양이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 동물 병원 앞을 지나갈 때마다 진열장 위를 기웃거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가끔씩 정신없는 강아지가 입원해서 고양이가 어색하게 성가셔하는 걸 보면 왠지 즐겁다. 잠에서 깨어서 예의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사람들을 깔보는 듯한 눈길로 잠깐 보는 것도 귀엽다. 어쨌든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본 적은 없었으니까.

 여하튼 몇 년 동안이나 거만한 놈은 동물 병원에 규칙적으로 나타났고, 나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돌려 고양이를 찾았다. 그 동그란 주황빛 눈을 보고 있노라면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하기야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별로 없지만. 고양이 팔자가 상팔자야, 하고 느긋하게 꿈속에서 되뇌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파트 사이

 

 환하고 맑고 차갑거나 따뜻하게 빛나는 달.

 언제나 저녁 때가 되면 두리번거리면서 달이 어디 있나를 찾는다. 건물 사이에 낮게 떠 있는 날도 있고,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할 정도로 높이 떠 있는 날도 있다. 아예 없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지. 과학 시간에 외운 지식을 총동원해서 달이 낮게 떠 있는 시간대는 무얼까, 어떤 모양의 달일 때 낮게 떠 있을까를 열심히 짐작해 본다. 역시 답은 모르겠다. 공부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라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녁, 달은 언제나 떠 있고, 또 밝다.

 달이 뿜어내는 저 부드럽거나 현란한 빛. 그 곡선. 누군가의 그림자에 묻힌 저 귀퉁이. 저 커다란 광물이 우주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달이 반사하고 있는 빛을 반대편에서 비추고 있는 해를 생각하면, 우주란 얼마나 식상하고 묘한 것인가.

 오늘의 달은 번쩍번쩍거리고 아파트 10층 정도 선에 걸려 있다. 휘황찬란하다. 달의 모서리가 조금 이지러져 있는지 아니면 오늘이 완전한 보름달인지 확인하기 위해 집에 오는 길에 드문드문 관찰하였다. 그러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길 건너편을 보는 순간 보았다. 길 건너편의 사람도 먼 곳을 보고 있다. 아마도 달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이 왠지 부러워서 이번에는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신호가 바뀔 때까지 미동도 없다. 내가 길을 건너자 그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길을 건넜다. 이제 다음 번에 하늘을 쳐다보게 되면 아마 그 사람도 달을 찾고 있을 것이리라. 달도 한꺼번에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 조금 위안받겠지. 잊혀지고 있지 않아서.

 그토록 아름다운 달을 다들 왜 외면하고 있는지.

 찬 바람에 떨리는 듯한 작고 파란 별들과 달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계속해서 바라보고 싶을 정도다. 겨울의 달은 쨍하니 맑고 밝고, 봄의 달은 꿈같이 부드럽다. 여름 달은 왠지 모르게 빨갛게 더위에 찌든 듯한 얼굴이다. 가을 달은 신선하고 향긋하다. 빈 나무에 걸린 달이나, 꽃이 질 때 낮은 건물 위로 아스라하게 누워 있는 초승달 같은 것을, 왜 사람들은 보지 않을까.

 그렇지만 조금은 봐 주겠지. 횡단보도에서 만난 그 사람도 그렇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봐 주겠지. 추운 저녁에 일부러 걸음을 늦추면서 멍청하게 고개를 하늘로 쭉 빼어들고 있는 것이 나뿐만은 아닌 것이다.

절박한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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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맞이

 학원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다. 12월 31일 밤, 아니 1월 1일 새벽인데,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지, 하고 약간은 짜증이 났다. 성적표 이야기가 당연한 순서로 따라 나왔다. 꼬리표도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 가방 안에 처박혀 있는 꼬리표와 성적표를 꺼내 왔다. 성적표 귀퉁이가 무성의하게 구겨져 있었다. 가방 안에 구겨넣은 광고지처럼. 며칠 동안 가방 안에서 부대꼈을 것이다. 꺼내 들고, 어두운 방 안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참담했다. 문학과 수학 등급이 말이 아니었다. 떨어졌다. 올리려고 했는데, 꽤 열심히 공부했는데, 떨어졌다. 빌어먹을 내신, 빌어먹을 선생. 수학에서 실수한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문학은-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문학 내신 따위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아주 짧게 고민했다. 그리고 여러번 접혀 있는 성적표와 꼬리표를 펴서 엄마 앞에 내 놓았다. 아마 내 얼굴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성적표를 무심히 읽었다. 뭐야, 난 또 많이 떨어졌는 줄 알았네,가 다음 말이었다. "많이 떨어졌잖아, 문학하고 수학 좀 봐." "그래도 조금 오른 것 같은데?" 뭐가 올랐다는 거지. 2학년 내내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하나도 오르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비록 저번 성적이 가물가물해서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이 빌어먹을 놈의 학교는 이런 저런 숫자를 너무 많이 보여준다. 결국에는 다 헛갈려 버리게.  무슨 이야기가 더 오간 것 같았다. 엄마 아빠가 무슨 말만 하면 짜증을 낸다는 이야기였던가, 모르겠다. 피곤한 것 같아서 1년을 미뤘다고, 그렇게 엄마가 말했던가. 아빠는 가만히 TV를 보고 있었다. 연말 시상식이었다. 드라마에 나왔는지도 몰랐던 여배우들이 나와서 상을 타고 울고 있었다. 소감을 말하라니까 죄다 누구에게 감사하구요, 또 무슨 감독님에게 감사하구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그리고 누구야 사랑해 따위의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좀 더 독창적인 멘트를 생각해 낼 순 없나. 잠시 말이 끊기고 다들 TV를 보고 있던 사이였다. 화장 지워지겠다, 울지 말지. 엄마가 다시 말했다. 무슨 이야기였더라. 떨어지지도 않은 성적 가지고 짜증내지 말라고, 그런 말이었나. 이번에는 나도 대꾸했다. 아마 떨어졌다고 우겼을 것이다. 다시 엄마. 또 엄마. 간간히 내 대답. 어느 순간 TV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내가 울고 있었고, 시간이 자꾸 흘렀고, 또 어느새 엄마가 울고 있었고, 아빠가 그만 자자고 말했고, 내가 할 이야기가 더 있다고 말했고, 또 한참이 지났고, 엄마와 나 둘 다 소리를 질렀고, 엄마가 날 때렸고, 나는 안경을 벗어 던지고 대들었고, 또다시 주저 앉아서 싸웠다. 감정만 격해지면 눈물이 나는 것이 화가 났다. 순간 순간 눈물이 완전히 마를 때가 있었고 나는 입을 앙다물고 이것이 이번 싸움의 수확이라고 자축했다. 다음에 싸우게 되면 절대로 눈물 한

  • 절박한참치
  • 2007-01-03
25일의 산책

 크리스마스는 맥이 빠진다.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라고, 그런데 나는 생일 축하도 하지 않았다. 촛불에 불도 붙이지 않았다. 알코올기 하나도 없는 들쩍지근한 가짜 샴페인을 따고 케이크에 바로 칼을 들이밀었을 뿐. 미지근한 맛의 케이크. 12시가 곧 지나버렸다.   크리스마스 오전에는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도시가 텅 비었다. 공허한 겨울 햇살과 알싸한 공기만 남아 부유하고 있었다. 저기, 할 일 없는 남자아이들의 무리. 할머니들. 나는 아득해하면서 먼 산책을 간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까지, 언젠간 해보고 싶던 일이었다.  너무 오랫만에 먼 길을 걷는다. 하지만 숨은 차지도 않고 발도 아프지가 않다. 덥다. 더워서 목도리를 푼다. 날도 푹한데 뭣하러 이런 두껍고 무거운 코트를 입고 나왔는지. 가을 옷 아무거나 걸쳐 입고 올 걸. 눈에 익은 곳에서 벗어나서 한 번도 발을 대 보지 않은 곳으로 - 그렇다,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곳이다 - 간다. 버스 안에서 눈으로 보기만 하던 곳, 방향은 알지만 밟은 적이 없는 길. 좌회전도 우회전도 하지 않는다. 심심하리만치 곧다. 한참 간 후에야 완만한 커브길이 보인다.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크고 넓다. 커다랗게 놓여있는 네모진 건물들, 깨끗하기 닦인 도로, 산책하기 좋지 않은 동네다. 재미가 없다. 막막하게 비틀거리면서 걸어가야 할 뿐이다.  병원을 지나고, 또 한 블럭, 또 한 블럭, 목표하고 있던 동네가 나올 때까지.   나는 자꾸만 웃는다. 동생과 약속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내가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왔다. 40분 가량 걸렸다. 예상보다 훨씬, 훨씬 적게 걸렸다. 무릎 뒤쪽이 뻐근하게 결린다. 동생에게 뭔가 증거가 될 만한 것을 가져가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좀 더 걸어서 그 동네에만 있는 가게로 간다.  너무 비싸다. 계속 고민하다가 가진 돈 범위 내로 산다. 천 원 밖에 없어서, 구백 원 짜리 노트를 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쓰지도 않을 것 같다. 백 원짜리 동전과 노트만 남았다. 다리가 아프지만 버스를 타고 갈 돈이 없다. 어차피 노트를 살 때부터 걸어갈 작정이었다. 다시 걷는다. 햇빛이 바뀌었다. 이제 오후. 휘청거리면서 걷는다. 근처 교회 벤치에 걸터 앉아서 쉰다.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지나가면서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본다. 어째서 교회에 앉아있기만 해도 의심하는 거지, 크리스마스인데 인심도 박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캡을 푹 눌러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어두운 색 코트를 입고, 크리스마스 오후에 할 일 없이 빨간 노트를 들고 상기된 얼굴로 혼자 앉아 있다고 해도, 크리스마스인데, 목사로 추정되는 아저씨가 날 그렇게 보다니.  아저씨는 전화를 하다가 지나갔다. 다시 일어나서 하릴없이 걷는다.   돌아가는 길은 조금 빠르게 지나간다. 침묵과 두서 없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면 어느새 이만치를

  • 절박한참치
  • 2006-12-27
인도에서 멀어지기 위하여

 돈을 모으자. 아니면 적금을 깨자. 걸스카우트 할 때 샀던 커다란 배낭에 옷을 쓸어 담고, 비성수기 비행기 티켓을 사자. 어느 날 나는 학교에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인도, 인도가 좋겠지.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자고, 먹고, 걸을 것이다. 때가 되면 걸어서 인도를 떠날 것이다. 여권이랑 국경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 되겠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일까?  처음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는 말이 정말로 싫었다. 고생을 하면 정말로 낙이 오나. 하고 싶은 것도 안 하고, 하도 억눌러서 나중에는 아무 욕구도 없어지고, 그렇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엘 가고, 좋은 인재가 되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고 부를 얻으면 행복해지는 건가? 그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건가? 만약에 그렇게 되어서도 행복하지 않으면 - 책임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냥 행복하지 않은 걸로 끝나겠지. 다시 고생하고, 있지도 않은 행복을 또다시 찾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는 목표가 그런 식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지금 생각지 않도록 하자. 다만 떠나고 싶을 뿐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리면 정말로 행복할 것 같다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잃어버려도 나쁠 것이 없고, 안달할 일도 없고. 돈이 떨어졌다고 슬퍼할 일도 없는 것 같다. 빌어서 먹으면 되지. 인도라면 사원에 불쑥 들어가도 먹을 걸 주지 않을까. 그것도 안 되면 가정집에 들어가서 일을 해 주고 밥을 얻어먹으면 되겠다. 잘 곳도 걱정이 없다. 인도는 춥지 않을 테니까, 아무 데나 쓰러져서 자면 되지. 입을 것은 또 얻으면 된다. 얼마나 마음 편한 삶일까, 자유롭고, 맺힌 데 없고. 길 잃은 듯한 느낌도 없어질 것이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그렇게 되고 나면 우주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있다.  하지만 부나 명예, 권력 따위는 얼마나 상스럽게 달콤한지 끌리고 말아버린다. 그것도 교묘하게, 가벼워 보이지 않도록 형광 분홍이나 연두색 같은 색은 절대로 쓰지 않고, 금색이나 검은색, 붉은 빛 따위로 그럴듯하게 가장해 놓는다.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나는 별 수 없이 끌려들고 만다. 돈이 있으면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초콜릿을 먹을 수 있겠지, 영화도 원없이 보겠지, 혹은 온 세상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게 되었으면, 하는 헛된 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지만 나도 심각하도록 헛되어서 헛된 것에 혹하는 게 당연하다고 헛되게 변명해 본다. 바보 같다.  그리하여 나는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면서 수학 문제를 풀고, 어떤 날은 새벽 세 시까지 옛날 사람들이 쓴 백과사전류의 책 이름을 외우고(그것도 그 책들의 저자와 함께), 시험에서 한 문제가 틀릴 때마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 보이기 무서워서 겉으로는 실실 웃으면서.  그래, 단지

  • 절박한참치
  • 200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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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에 보는 하늘이나 달이 제일 예쁜 거 같아. 공기가 차가워서 그런가. -얼마전부터 계속 쓰고싶었는데 로그인을 못했...

    • 2007-02-12 23: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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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달은 쨍하니 맑고 밝고, 봄의 달은 꿈같이 부드럽다. 여름 달은 왠지 모르게 빨갛게 더위에 찌든 듯한 얼굴이다. 가을 달은 신선하고 향긋하다." -본문에서 달에 대한 표현이 상투적입니다.

    • 2007-02-08 2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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