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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금 아픈 사랑

  • 작성자 위다윗
  • 작성일 2024-04-08
  • 조회수 324

그렇다. 내 인생은 미치도록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 복잡하고 답답한 사실을 증명해보고 싶어 쓰고 버린 내 글들과 시간이 참으로 아까울 뿐이다. 모두가 어지러운 인생, 모두가 특별해지기 위해, 위대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 세상에서 나 위다윗이 얼마나 특별한지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뭐, 그렇다고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지하철만 타도 남고딩들이 신나게 욕을 쏟아 붓는 그 “문제적” 기독교 (어떤 불특정 다수에게는 *독교이겠지만)를 독실하게 믿고, 그 신앙에 자신의 젊음을 던진 목회자 부부의 외동아들이자 어릴적부터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으나 그걸 억제하며 버텨온 꽤 인내심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말하면 적당할 듯 하다. 참고로, 이미 보편적인 상식이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사랑”의 형태가 아닌 인간 본성의 “뒤틀어짐” 내지는 인간행위의 “탈선”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오늘날 정통 개신교 내에서 동성애라는 죄와 그 죄를 행하는 LGBTQ 집단의 사람들은 주로 공감과 긍휼 대신 극심한 혐오, 경계와 거절을 받는 대상이다.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우가 노골적이다기 보다는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한 사람들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에 가깝게 보여진다.) 


부모님께서 내가 여성의 몸보다 남성의 몸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사춘기를 시작할 즘,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두분 모두 굉장히 속상해하셨지만 기도와 통제 속에서 충분히 꺾일 수 있는 죄의 씨앗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물론 이 씨앗은 보수적인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했고 오늘날 나는 더이상 내가 남편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며 신앙안에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게 되는 남자가 되었다. 내게는 게이라이프 아니면 독신밖에, 적어도 솔직하게는, 선택권이 없게 느껴진다. 다행히 성경은 독신라이프를 반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핵심교리를 확립했던 사도 바울도 독신으로 살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원하는가이다. 아니, 내가 그걸 견딜 수 있는지이다. 아무리 내가 애늙은이라도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은 곧 스무살이 될 나에게 다른 이성애자 젊은이들보다 덜 강하게 일어나진 않는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갈지 모르겠지만, 난 동성애가 죄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과 오해, 적대심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동성애라는 욕구는 한 남자의 한 여자를 향한 자연스러운 욕구만큼 실제이며 이 끌림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한 인간의 영적, 정신적인 필요까지를 담고 있다. 동성애에 대해 말할때 흔히 내 교회 지인들은 “게이들은 온전히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목적으로 다른 남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인사이더로서 분명한 것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이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의 케미, 친밀감, 대상의 지적 능력, 따뜻한 성격, 등등으로, 혹은 지구의 존재하는 각기 얼굴만큼 다른 이유들로 누군가를—-그 지겹지만 사실 지겹지가 않은 특별한 사람을—-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사랑해봤다. 


첫인상은 왠지 모르게 오징어가 생각나고 “배우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봐 날 경악하게 만들었던, 까만 얼굴과 귀여운 무식함만큼 첫인상이 엉망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운명이 장난을 쳤는지, 몇년을 함께 지내며 그 사람의 깊고 진지하고 어둡다고도 할 수 있는 내면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서서히 그에게 그 전에 다른 이에게 느꼈던 감정들 보다 더 진한 감정을 느꼈다. 이 감정이 꽃피기 시작하자 나도 두려웠고, 그 사람도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원망인지 모르겠는 이유로 (말해주지 않았기에) 거리를 두며 우리의 5년간 조심조심 쌓아온 관계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바벨탑처럼 깨끗하게 무너졌다. 내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단절당한 것이기에 상대쪽 입장에 의해 깨끗이 지워진 셈이다. 겉으로는 호수같지만 실제는 지진같았던 관계를 지나고 난 다음 난 그 사람이 나로부터 도망친 것을 고마워야 할지 아니면 평생 저주해야 할지 헷갈렸다. 착한 크리스챤답게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퉁 쳤다. 아무리 그를 위해 보낸 내 응답없는 문자가 우스워보일지라도. 예수님도 침 뱉음을 당하셨고, 발가벗기셨는데 이 사람에게 씹히는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또 내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더라면 나는 이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셈 아닌가. 우리는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을까. 이런식으로 혼잣말을 자주 하곤 한다. 어쩔때는 눈물로 모멸감을 씻어내릴 때도 있다. 끝나지 않는 눈물 같더라도 눈물은 언제나 멎게 되있다. 이제는 너무 똑같은 이유로 많이 울어 그가 남긴 상처나 엉킨 실타래처럼 끓어오르는 내 감정들을 바라보지만 굳이 동참하지는 않는다. 그냥 오늘 너 상태가 별로구나, 하며 넘어간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우리나라와 해외에서 관심을 받은 몇 안되는 퀴어소설인데 소설의 전개보다 이 문장하나가 내 뇌리에 박혔다. 나에게 정확하게 해당되는 말이었기에.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되는 건가? 누군가에게 항상 집착했고, 집착하고 있고, 집착할 사람. 그게 정녕 자기소개 거리란 말인가. 모두가 타이타닉에서 눈물을 흐르게 했던 그런 위대한 로맨스가 아닌 후회와 수치만을 남기는 뿌리채 잘못된 사랑이었다라고 평할 만한 야윈 사랑만이 나의 사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정말 레미제라블(les miserable, 비참한 인간)인 것일까. 마치 내 영혼이 뼈다귀밖에 없는 좀비임을 고백하는거나 다름 없지 않나. 슬프게도 그게 맞는 듯 하다. 



난 동성애자들이 건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나를 포함해 그들이 남들보다 조금 더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원해서는 아니지만 “우리”의 사랑은 병들어 있는 것이다. 동성애가 정상이며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이(우리나라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조금 더 보수적이다고 한다.)  그렇게 믿는다. 각자가 믿는 바는 개인이 결정할 몫이지만 동성애자들이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별개임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굳이 비교 하자면, 마약에 빠져있는 자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그 마약이 아이에게 가져다주는 폐허에 마음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이 공존하고 있듯이, 동성애자들 자체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별개로 동성애 자체에 대한 비판은 합당하다고, 적어도 그 비판은 어느정도 마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동성애가 처음 꽃피는 사회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늘 흔히 떠오르는 나이나 위치에 있어서 동등한 남성간에 관계가 아니라 주로 성인과 아동, 주인과 노예간에 동성애 관계가 흔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종의 착취의 형태로 동성애가 발현된 것이다. 


당연히 동성애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눈에 띄게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커플들이 있을 것이며 대부분의 동성관계들 안에도 부분적으로 미덕적이고 심미적인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충격적이게,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라고 불리는 C.S. 루이스가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로 전혀 씨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나는 감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원래 하나님께서 디자인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적 DNA가 있을 수 있다. 나또한 자라면서 동성애와 이성애 중 취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몸은 남자이지만 내면은 여성같은, 몸과 감정이 충돌하며 일상을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고 동일한 이유로 나보다 더 심한 내적 동요를 통과한 이들도 많다. 동성애는 죄이지만 동성애로 씨름하며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회앞에서 뒤로 물러난 존귀한 사람들에게 돌을 던져 세상이 더 나아지는 것도, 더 온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누가 내게 어떤 집단을 가장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난 한국인들과 동성애자들 중 후자를 택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의지하고 나의 삶의 반석과도 같은 성경이 그르다고 말하는 것을 옳다고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와 다른 종교나 무교를 믿는(나는 무신론도 믿음이라고 생각하기에) 사람에게 내 견해는 다소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자신의 입장을 바꿀 필요는 없다. 


부모님은 내게 언제 그런 말을 해주셨다. 

불행중 다행으로, 내가 동성애로 씨름하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을 향한 전에 없던 긍휼함이 생겼다고 한다. 내 비밀을 모르실때에는 동성애자들을 떠오르면 거부감이 먼저 일어났는데 나와 함께 이 여정?을 지나며 그들을 떠오를때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느끼신다는 것이다. 나나 부모님이나 나의 그림자 자아와 같은 동성애가 진리를 갖고 있다 자부하며 세상에게 손가락질하는 교회와, 사랑과 용납을 외치며 교회를 손가락질하는 세상 사이에 다리가 되는 이 세대의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빚어낼 것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그 꿈은 내 주제에 맞지 않는 “허영심” 혹은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일지도 모르지만 나의 미래는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조금 덜 서로에게 소리지르는 사회가 되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정도이다. 



나는 내가 참 아기같다. 나이는 열아홉인데 틈만나면 부모님을 찾는다.

“아빠… 우리 드라이브 가요…” 

“엄마…우리 같이 영화 봐요…”

친구아닌 친구같은 부모님과 나의 고집으로 얻어낸 패밀리 타임이 셀 수 없이 많다. 난 친구가 없어서일까 부모님과 어울리지 않고는 가끔 너무 외로워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은 생각도 올라온다. 내가 존경하는 이지선 작가가 사고 이후 스스로를 신생아로 여겼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 그 말이 내게 동아줄 같은 말이다. 몇달 후 대학을 결정짓는 시험을 보고, 한국을 떠나 혼자 해외에서 찬 밥을 먹어야 할 나이지만 왜일까 난 참 아기같다. 

연애를 포기해야 되니까 가족간의 사랑이라도 주라고 나이값 못하고 칭얼대는….


참 장황하다 느껴질 수 있는 글이지만 내 혼동과 깨달음, 고통과 치유가 조금이라도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마치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린도전서 1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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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로 숨쉰다는 것

어린 시절, 난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환경들은 오직 나를 위해 조성된 이들이고, 난 그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하게 살면 된다고 믿었었다. 난 세상과 나자신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유년기를 지나왔다. 어리기만 한 아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하나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많은 것들과 상충되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난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나와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한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사실로서 다가왔지만, 사실은 전보다 나의 두눈을 더 감기게 만들었다. 도통 이 모든 현실이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 혼란속에서 어쩌면 나의 인생에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충격과 두려움은 나의 머리 위를 덮는 어두운 나무의 그림자와도 같았다. 마치 키가 큰 나무옆에서 조용히 자라던 새싹이 키가 자라, 그 나무의 가지에 부딪치는 것처럼, 나또한 그순간 어떤 딱딱한 가지에 머리를 박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이상 내가 중요하거나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사라졌다. 더이상 내가 자유롭고 행복한 미래를 갖을 수 있다는 소망도 사라졌다. 대신 나의 성장과 미래를 가로막는 어두운 철장벽과 그늘진 가지의 모습만이 남았다. 그 모습은 너무도 볼품없고 연약해 보였다. 무지라는 암흑속을 헤메다가 외로히 그 속에서 끝나고 마는 이미지가 나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오직 진리라는 거대한 퍼즐의 파편들 뿐이었다. 그 속에서 내게 다가오는 파편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그 파편들은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었고, 잔인할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사실들과 느껴지는 사실들은 절망의 구덩이를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현재를 기준삼았을때, 현재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받아들일때, 우리의 삶은 제한적이고 움츠려든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들이나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시위하는 여러 사실들은 이해하기 쉽다. 가시처럼 툭 쑤셔대며 우리의 마음에 통증을 일으키는 생각들은 우리의 기억에 선명히 그려진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너머에 있는 더 큰 진리가 있다라는 사실을 믿을때, 우리는 그 믿음안에 도전하고 성장해나가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어떤 환경과 상황이든지 희망과 꿈을 품을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이해되는 것 이상의 것, 즉, 이해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더 큰 진리가 우리의 인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며 때로는 현실에 부딪치고 키가 큰 나무의 가지에 머리를 박게 되는 경험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어두움과 고통속에서 피어나는 내면의 힘이란 믿음이며 신뢰이다. 그 어두움 속에서 피어나는 서광과도 같은 희망은 우리의 인생을 무지안에 갇힌 삶이 아닌, 그 무지속에서 붙들어지는 새로운 내일의 세계로 인도한다. 내가 내일을 기대하며 붙드는 그것이 무엇일까

  • 위다윗
  • 2024-03-27
열세살 어린이도 어린이를 그리워했다

어린시절 모습이 담겨 있는 나의 추억사진들을 돌아보면, 항상 나의 마음 한구석은 소망을 느꼈고 다른 한편은 잡히지 않는 안개와도 같은 허무감을 느끼곤 했다. 난 언제나 어린 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사실 애썼다기 보단 그렇게 되길 막연히 바랬다. 애쓰다라는 말의 의미는 적어도 이룰 수 있는 목표를 가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의 원함은 그저 원함속에 피어나고 끝났다. 그 이상에 어떠한 것은 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내게 어린 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면 안되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불평하신다. 어리고, 아기같이 유치하고, 천사같이 밝게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이 진실로 나의 과거의 실제였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다. 인생이란...참...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난 내가 과거에 느꼈던 특별한 감정들을 때때로 회상한다. 내가 어린 시절 느꼈던 생각중에, 내게 특별하게 뇌리에 남겨진 기억을 말해보고자 한다. 난, 아무런 걱정도 스트레스 받을 어떤 구실도 찾지 못할만한 세상속에 해맑기만 했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길 원했다. 과연 난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나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행복에서 멀어져가고, 세상에 눈이 밝혀질수록, 절망은 더욱더 깊어져가고...왜, 이런 현실을 나는 몰랐을까?, 라고 나는 묻는다. 어린이의 유토피아는, 그 어린이가 없어지며 같이 사라져가나 보다...

  • 위다윗
  • 2024-03-26
"안녕! 그리고 사랑해"

“그럼 안녕! 그리고 사랑해”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고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보낸 마지막 문자였다. 안녕. 비록 너는 시퍼렇게 내 기억의 다락방들에 살아 돌아다니고, 실제로 이 세상 어딘가 나를 필요로 했듯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겠지만, 아니, 내 눈 앞에서 그러겠지만. 이젠 정말 너는 내 삶에 존재하지 않는거야. 나는 이 모순이 얼마나 어렵든지간에 이 모순을 실현시켜 나가야 하는거야. 아니야. 결코 아니야. 이건 말이 안돼. 난 널 영원히 기억할지도 몰라. 너가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아니? 너의 숨소리, 표정, 말투가 압구정 학원선생님의 조언보다 더 내 감각을 곤두세웠어. 너에게 이 말도 안되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내가 얼마나 고민했고 번뇌했는지. 어쨌든 안녕은 안녕이니 안녕히 가렴. 행복하게 살고 우리 최대한 서로를 기억하지 말자. 기억한다면 좋은 것만 기억하자. 그리고 사랑해. 사랑해! 너가 다시 돌아온다면 난 펑펑 울지도 몰라. 너무 행복해서 아플지도 몰라. 너의 잔인한 냉대가 날 아프게 했던 것만큼 아플지도 몰라. 너가 혹시라도 너무 멍청해서 내 마음을 몰랐다면 똑똑히 들어. 널 미치도록 사랑했고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널 향해 화산을 폭발시키듯이 사랑해. 넌 정말 나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난 너가 정말 좋았어. 마치 이 사랑이 저주였다는 듯이 말했지만, 우리 참 순수하기도 했잖아. 마치 꽃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히 잔디를 걷듯이 서로가 서로의 보석을 감탄하며 그 보석을 지키기 위해 애썼잖아. 너가 날 좋아한다고 말했을때는 또 어찌 기분이 좋았던지, 이 세상에 해롭지 않은 마약이 있다면 바로 너의 그 문자와 말이었을거야. 너의 포옹도 참 그리워. 싫은척 밀어내려 하는 나를 꼭 붙잡은 너의 온기가 나의 큰 위로였어. 우리는 너무 멀어졌지만 너를 원망하지는 않을게. 난 참 부족함이 많았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아픈만큼 너도 아픈거니? 아니면 나는 그냥 너의 장난감에 불과했던거니? 너의 진심은 결코 알 수 없을거야. 상처받을 나를 위해 그 진심을 감추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너의 미덕이다. 사랑해, 바보멍충아.

  • 위다윗
  •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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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금실린더

    안녕하세요. 예전에 글에 댓글 남겨주신 기억도 있고, 종종 위다윗님 수필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 수필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이끌리듯 들어왔는데 생각할 점이 많은 글이라서 좋았어요. tmi지만, 저도 기독교 집안의 외동 자녀이고... (현재로서는 이성애자라고 정체성을 판단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퀴어'의 당사자성에 대해 깊게 생각한 적도 있어서, 공감도 많이 되었습니다. 중간에 인용된 박상영 작가님의 글도 좋았고요. 조심스럽게나마, 위다윗님의 삶에 사랑이 가득했으면 한다는 생각도 드는 글이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2024-04-25 20:22:55
    눈금실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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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다윗

      @눈금실린더님, 저에게 큰 격려를 선물해주시네요... 사실 전 이제까지 되게 작은 공동체에서 자라와서 저와 비슷한 이슈로 고민하는 또래를 만나거나 이런 이슈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난 적이 없어요..그래서 그런지 이 댓글이 저에게 매우 의미있게 다가오네요...난감한 주제에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도 있었을 수 있는 것 같은데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4-04-26 00:45:14
      위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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