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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밈화

  • 작성자 데카당
  • 작성일 2024-04-11
  • 조회수 206

자살. 스스로 죽는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지금까지는 자살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개인의 철학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만을 듣고 배우고 가져 왔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관점 또한 필요할 때인 듯 하다.

시작은 복제 단위로서의 밈이다. 가계를 따라 수직 낙하할 수밖에는 없는 유전자와는 다르게 밈은 가계를 벗어난 것에 더해 수평적이거나 역전되는 전달이 가능하다. 이것은 유전자가 번식기까지는 개체를 유지시키려 하는 것에 비해서 밈은 개체의 안전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효과를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적인 밈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민족끼리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어서 결국 민족국가를 침체시킴에도 끝없이 퍼져나갔고 현재까지 복제되고 있다. 밈으로서의 자살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자살 통계를 보면 때 30대 이상 연령층에서 한순간에 수와 비율이 폭증하는 것을 근거로 자살이 유전자의 작용이 아니냐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전의 특징 덕분에 번식기가 지난 후 발현되는 치사 유전자는 도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논의는 끝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에 논의는 계속된다.

 자살이 유전자 차원의 어느정도 퍼져있는 표현형이라면 경험적으로 노화라는 현상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오면서도 그 현상의 표면적인 이유를 집어서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 같은 고전 자료에서 자살이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고 성서에 자살을 죄악으로 적어놓은 것을 보면 자살이 어느정도는 퍼져있다는 가정은 맞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고 극복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또 자살을 죄악으로 터부시하던 중세를 지나면 자살을 예찬하는 이들이 등장해 자살이 훌륭한 이유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하니 이들이 자살 밈을 성공적으로 퍼뜨린 개체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의 자살 예찬을 유전자의 기능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해당 시기, 근대의 유명한 자살 예찬가들이 말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삶의 방식에서 삶 또한 예찬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 플룻을 연주한 어떤 철학자와 풍성한 식사자리에서 자살을 논한 쇼펜하우어가 좋은 예시이다. 자살이 유전자의 표현형이라면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므로 밈이 개입했다고 보겠다.

 탈출구, 해결책으로 던져지던 자살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서 드디어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더이상 삶과 자살을 동시에 예찬하지 않는다. 밈의 복제과정은 유전자보다 덜 엄밀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는 단계별로 억제제를 갖지만 밈의 복제에 있어 억제제는 개체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라는 또다른 밈 뿐이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개별 유전자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반면 밈은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감각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복제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며 따라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위의 주장이 사회, 철학적 관점을 모두 사용한다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밈으로서의 자살과 철학적 자살, 사회 구조적 자살을 보는 관점 사이 관계를 짚어야겠다. 우선 밈에 관한 관점이 가장 근본적이다. 개인과 철학 모두 문화에서 나왔으니 그 문화의 기능단위로 보는 관점은 당연히 그렇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보는 관점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차원의 논의를 무시하고 철학적 관점은 개인의 사유에 가린 사회의 문제를 무시한다. 이제부터는 이 둘을 모두 사용해 밈으로 자살을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형성된 어떤 밈이 또다른 어떤 밈들과 어떤 상호작용을 거쳐 자살의 결과를 내는지, 어떤 밈에는 사회에게서 얻은 밈도 있을 것이고 개인이 사유해서 얻은 밈도 있을 것이다. 이 순간부터 자살은 나 개인의 고민이 아닌 공유되는 개념의 집합으로 기능한다. 흩어져 있던 재료에 규범을 부여해 정보를 저장한 유전자와 같이 개체의 사유에 규범이 부여돼 집단적인 사고에 저장된다.

자살을 밈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을까? 밈의 규제는 사회 가치라는 밈으로 실행 가능하다고 했었다.  밈이 된 자살의 개념은 그 밈을 공유하는 사회의 가치에 묶이므로 더이상 사회의 문제적 상황으로 기능할 수 없다. 자살하는 개인은 사회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외부인이 사회 내부에 침입해서 혼란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 외부인들에게 우리 사회의 가치를 공유할 것인지 말것인지, 그것이 이후에 고려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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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로르의 반항

말도로르의 노래는 로트레아몽이 발표한 산문시집이다. 카뮈는 그의 책 반항인에서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며 한 가지 예로 로트레아몽을 드는데 이후에 서술되는 반항하는 인간상과는 꽤나 큰 차이를 보이는 말도로르의 경우를 자신이 사용하는 반항의 계보에 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말도로르의 특징은 신, 즉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반감과 그에 따르는 사회 규범의 파괴이다. 예를 들어 당시 사회 규범에서의 모범이 되는 가족(명예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아버지, 가족 간 예의를 지키는 현명하고 다정한 어머니,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들)이 나오는데, 그 가족의 아이를 꾀어내고 마대자루에 담아 포물선을 그리게 던져버린다. 반항의 사전적인 뜻을 찾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맞서 대들거나 반대함'이므로 말도로르의 일차원적인 테러들을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카뮈의 반항은 아무런 숙고 없이 벌이는 무차별적인 테러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이때 반항은 절대적 부정에서 변화해 일어난 행동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절대적인 부정은 모든 의미를 거부하면서도 생을 유지하려 하는데, 생을 선택하는 것에서 이미 생에 대한 가치판단을 한 것으로, 이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조리한 인간이며 1차 대전을 통해 막 종교와 이성의 신성화에서 벗어난 유럽에서는 부조리의 추론으로 자살의 정당성을 숙고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절대적인 의미없음에서 나오는 살인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보다 자신까지 부정해서 자살로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시작되고 끝난 시기 유럽에는 부조리의 추론을 비틀어 국가적 단위의 살인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고 개인적인 숙고에서의 자살은 사실상 사라졌다. 부조리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이 아니라 살인을 선택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반항이 아니다. 반항은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침해를 막는 것이다. 침해를 거부하는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반항할 수 있다. 따라서 반항은 절대적 거부도 파괴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적인 긍정이다. 가치의 인정과 거기서 나오는 보존을 원하는 긍정이고, 따라서 폭력은 가치의 보호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써만 행해질 수 있으며 그 책임 또한 짊어져야 한다. 말도로르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한다. 섭리, 절대선 등의 것과 거기서 오는 희망을 없애고자 한다. 그런 것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섭리가 희망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따르는 이들도 용납할 수 없다. 섭리에 대항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섭리만을 공격하고 끝내는게 아닌 것이다. 이때 반항적인 추론은 가치를 손으로 가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섭리를 밀쳐내고 마침내는 섭리를 끌어내리는 것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기준이 아무것도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반항의 추론은 섭리를 끌어내고 자신이 거기에 앉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추론의 단계에서는 이미 섭리의 자리에 앉은 말도로르에게 섭리를 기준

  • 데카당
  • 2024-05-07
전락과 21st century schizoid man

전락은 대화의 형식을 빌린 극에서의 기나긴 독백이다. 작가는 대화 상대역의 말을 주인공이 대신 되받아 말하도록 했고 이에 그 연극은 일인극이 된다. 일인극에서의 독백. 주인공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전개되는 독백은 세계를 만든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은 현대인의 특징이다. 그리고 극을 정신분열로 치환하면 21세기 정신분열성 인격장애 남자다. 일단 전락을 먼저 보자. 화자는 우선 자신의 예전 삶을 털어낸다. 약자의 편에 서는 잘 나가는 변호사로 평판까지 좋아서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 의도로 바라봐진다. 그런 상황을 연기라고 하면서 일부러 이해되기 힘든 주장을 할 때 이 평판은 저주가 된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피곤한가보다! 하는 식이다. 이미 화자는 사라지고 변호사(화자)가 만들어졌다. 물론 화자는 지속적인 노력,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 변호사를 죽였다. 그러나 변호사는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의 세계에서 발판이었기 때문에 화자는 허무함을 느끼며 방탕한 생활을 했고(전락) 또다른 허무함을 만들다 보니 시간이 흘러 방탕하게 살기에는 몸이 받쳐주지 않는 나이가 됐다. 이때부터 화자는 작은 항구마을로 가서 원래보다는 한가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청자가 왔을 때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자는 과거를 말하면서 자신을 피고석에 세운다. 그리고 피고로 선 화자는 역으로 세상을 고발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냉소는 변호사라는 직업 전반에 대한 냉소로 확장되고 자신이 구하지 않은, 다리에서 떨어진 여자의 이미지로 나타내지는 자신의 법정이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는 법정으로 팽창한다. 동시대의 사고에 갇히지 않고 비판하는 화자는 물론 현대적이지만 화자가 나타내는 현대의 인간은 세상에서 떨어진 개인일 뿐이다. 화자가 법정에 서는 이유는 세상을 고발하는데 있지 성찰을 위하는데 있지 않으며 모든 과정이 화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법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화자는 자신을 쪼개 청자를 만든다. 별개의 인격이 된 둘은 법정을 통해서 다시 한 곳에 섞여든다. 그렇게 진행된 재판에서 확장된 법정은 세계의 주인을 다시 자그마한 개인으로 전락시킨다. 두번째 전락이다. 세계에 빠진 개인은 허우적거리지만 세계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형량의 증가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만든 세계이기에 사형을 언도받는 일은 없고 허우적거리던 화자는 얕은 물 위에서 공포에 질렸었다는 것을 깨닫자 다시 청자에게 밖의 세계를 고발한다. 화자가 계획하는 세번째 전락이지만 화자만의 세계는 무너졌고 밖은 미동도 없다. 무너진 세계와 무관심을 살아가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후의 심판이다. 화자는 냉철한 이성의 합리적 시각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화자의 전락의 모티프는 최후의 심판에서 나왔으니 신앙에 기반한 시각, 신앙에 기반한, 황금률, 보편 윤리에 기반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신앙과 이성이 양립 가능하다고 보고 싶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신앙이 이성의 형식만을 따온 것이다. 이성의 공리

  • 데카당
  • 2024-04-20
자의적 해석의 자의적 해석

문학작품이든 철학 저작이든 글을 바라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고 각 방법마다 꽤나 명확한 차이점을 갖는다. 문학의 예를 들어 대한민국 경기도 소재 일반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 내신의 어려움을 산맥을 넘는 어려움을 노래한 시에서 비유했다고 해보자. 산의 초입은 수월하기 때문에 경험이 적은 경우 완급 조절을 실패해 급하게 걷게 되고 능선쯤에서부터는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다시 다른 산의 초입이라 힘을 빼고..반복이다. 글 내부의 정보만으로 해석할 경우 이 글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슬기롭게 산맥을 넘는 방법을 제시한 설명문이 될 것이지만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제시된다면 내신 대비 방법에 대한 설명문이 문학적 성격까지 갖게 된다. 철학 저작을 생각해보자. 위의 예에서와 같은 학생이 어느 날 얻은 삶에의 시선을 시로 풀어내려고 한다. 시시포스와 바위에 대해 노래한 시는 학생의 부조리주의적인 깨달음에 대한 정보가 제시되지 않는 한 신에게 반항한 사람에 대해 경고하는 그리스의 신화를 형식이 없는 현대시로 풀어 쓴 것에 불과할 것이지만 정보가 주어진다면 경고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높은 곳을 향해 계속해서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행복함을 알려주며 절대적 진리인 신을 거부하고 자신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좌절해도 멈추지 않는 부조리한 인간상을 제시한다. 같은 정보가 주어지더라도 사람들마다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위의 학생이 쓴 내신의 어려움에 대한 시에서 갑은 고난의 연속이 찾아오는 고등학생의 생활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을 발견하고 을은 즐거운 자기확인의 연속으로 구성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예찬을 발견한다. 이 둘의 발견 중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 옳을까? 알 수 없다. 학생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는데 sns 활동을 하지 않았고 일기를 쓰지도 않은 등 판단의 근거가 될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교과서, 시험에 가장 자주 쓰이는 방식으로 편집위원, 출제자들이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 해석 중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선택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장이라면 자신의 뜻을 멋대로 왜곡한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어쩔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출제자들은 권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글을 읽고 더 깊은 이해, 시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감상을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미덕은 무엇일까? 자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유의할 점은 교과서, 교재, 문제집으로 공부해 정형화된 시험을 봐야 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의적인 해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의적 해석에의 자의적 해석은 예를 들어 이렇다. 위의 학생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대해 노래한 시가 발견됐다고 하자. 출제위원 병은 이 시에 대해 수레바퀴가 의미있기 위해 계속해서 돌듯이 자신도 돌아야만 의미있게 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절망을 토해내는 시라고 해석했고 출제시에 그 해석을 담은 보기를 붙였다. 시험에 나오는 작품

  • 데카당
  •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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