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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이 나오는 나이

  • 작성자 검정머리민영
  • 작성일 2005-12-31
  • 조회수 1,844

 

≪주민등록증이 나오는 나이≫


대한민국 열여덟 살이면 누구나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가 있다. 통과의례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가까운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 신청서를 또박또박 작성하고, 시퍼런 잉크를 열 손가락에 골고루 묻힌 뒤, 작성한 신청서의 뒷면에 손가락의 지문이 또렷이 드러나도록 손가락을 하나씩 찍어나간다. 대략 10분이면 상황이 종료되는 간단한 의식이다.

어떻게 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6,7개월가량 어른이 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민등록증을 신청하려 수없이 망설였고, 주저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을 한 달 이내에 하라는 독촉장이 날아와 버린 지금,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서랍 속에 애지중지 넣어 두었던 주민등록증 발급 통지서를 꺼냈다.


사실 지난 여름방학 때에 주민등록증을 만들기로 마음을 크게 먹고 사진까지 찍었다. 그러나 조금 더 사진을 예쁘게 찍고 싶다는 괜한 욕심에 사진관에 가기 전, 미용실에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미용실 문을 열자 딸랑딸랑 종소리가 날 반겨주었고, 종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내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나를 더 반갑게 맞아준 것은 내 친구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 후, 볼 수 없었던 친구였던지라 나 역시 너무나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를 몸 둘 바 모르게 만들만큼 당황하게 한 것은 친구에 대한 낯설음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한다면서 무심히도 연락이 뜸했던 나는, 미안한 마음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 변했냐며 타박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자리로 안내하고, 잘 지냈냐며 안부를 전하는 친구를 한참이나 훑어봐도 친구는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기에는 먼 상대인 것만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런 내 불편한 눈초리를 눈치 챘는지 친구는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하게 되었다며, 아직은 이렇게 손님맞이하고 머리 감겨주는 걸 하지만 참 좋다는 말을 되풀이 해댔다.

그제야 나는 친구를 제대로 알아봤다. 여전했다. 그 친구는까다로웠던 학교 규정상 짧은 머리였음에도 요리조리 땋아 올려가며 다녔고, 내 머리도 만져 주었었다. 그런 걸 좋아했던 친구다. 게다가 친구는 그림을 배우던 친구답게 감각 있다는 소리를 꽤 들었었다. 또, 누구에게나 살갑게 대할 정도로 붙임성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친구를 미용실에서 만났다. 이제는 학교가 아니라 미용실에서 앞치마까지 입고 내 머리를 감겨주고 있고 있다. 단지 헤어디자이너가 되겠다던 친구의 꿈으로만 여겼던 일이 나도 모르는 새에 현실로 이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참 잘 어울린다.

이렇게 나보다 조금 더 빨리 세상을 접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충실히 자리잡아가는 친구가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도 절실했다. 그동안 공부하는 게 유세인 마냥 유난 떨지는 않았는지, 그러면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지, 혹여나 그렇다면 이것들을 바탕으로 내 꿈에 대해 자신할 수 있을까? 머리 자르는 내내 고민했다. 어떻게 머리가 잘려나가는 지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다행히 만족스럽게 머리는 잘려져 있었고 친구는 원장님께 내 머리 예쁘게 잘라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다음번에 내가 미용실에 왔을 때에는 파마말고 있겠다고 말했다. 이토록 자신감 있는 친구를 볼수록 솔직히 조바심이 났다. 나는 애써 웃으며 미용실을 나왔다.

덕분에 이날 찍은 사진은 미용실에 다녀온 흔적이 담뿍 담겨있게 되었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사진이 나와 버렸으니 말이다.

결국에는 동사무소로 향해야 했던 것이 마땅하지만, 귀찮다는 궁색한 이유를 대가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 때 귀찮다고 한 것은 어른이 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아무에게도 들키기 싫은 부담감을 대변 해줄 가장 그럴 듯한 핑계거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짐했다. 속상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재주가 없는 관계로 나는 공부하는 것 이상의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는 없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기로 했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여기에 쏟아 붓기로 했다. 보란 듯이 원하는 대학에 가서, 내 꿈에 다가가기로 나와 약속했다. 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정작 세상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은 없다고, 그래서 잘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었다.


통지서를 꺼내든 지금의 내 상태로 그날의 마음가짐을 따져보기에는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한심하다. 내 자신에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열여덟 살, 이렇게 서서히 밀려오는 내 인생의 책임감에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도 나를 다시 한번 다독여 본다. 그 이유는 열여덟 살이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이라 주어지는 ‘다시 한번’이라는 기회가 잇기에, 오늘도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이 “낭랑 십팔세”는 축복받은 나이이므로 말이다.

얼마 후면 반드시 나오게 될 주민등록증에 붙어있는 사진 속 나에게 평생 부끄럽지 않도록 한 번 더 나를 재촉해 본다. 오늘 이 다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동사무소에 가기 전, 역시나 미용실을 찾아 가야겠다. 미용실에 가면 친구는 내가 예약 손님인 것 마냥 “손님, 자리로 모시겠습니다아~”하면서 머리를 감겨 줄 텐데, 샴푸 잘 한다고 입이 닳도록 칭찬이나 해주고 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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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 훗날 내가 이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우스워 할지 가히 짐작이 된다. 그 날의 나에게 미리 말해 둔다. 누가 그랬다. 열여덟도 세상 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열여덟 살의 세상 밖에 볼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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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저도 구름빵님처럼 재미있게 잘 읽혀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주장원 축하드립니다!

    • 2006-01-03 1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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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게 잘 읽힙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네요.

    • 2006-01-02 20: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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