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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의 가치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07-31
  • 조회수 1,739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노력해야 해요. 이를테면 숨을 허파로 밀어 넣었다가 다시 끄집어내야 하고, 모든 장기의 생명활동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살기 위한 극소량의 의지가 있어야 하죠. 몇몇의 사람들은 후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해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살아가려고 어떻게든 발버둥 친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는 없겠지마는, 실은 그것은 양질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지 그저 ‘생을 이어간다’라는 전제 하에서는 과도한 노력을 들이고 있는 셈이죠. 사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ㅡ그 극소량의 의지조차도 없어서 스스로의 생을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아주 조그마한 불씨는 바람을 불어넣어 키울 수 있다지만, 불씨조차도 미약하고 산들바람에도 꺼져버릴 불이라면 차라리 유리 온실에 넣어 두고 공깃구멍만 뚫어 간신히 연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의지라거나 희망도 같은 맥락상에 위치하고 있어요. 책꽂이에서 찾아보자면 같은 행의 책인 것이에요. 나는 내 불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요. 저기 전부 타 버린 잿더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빛이 보이잖아요. 나는 지금 내 불씨를 위한 유리 박스를 세울 여건이 되지 못해요. 더더욱 돌보아 줄 여건은 되지 못하구요. 나는 실은 내 불씨를 바라보는 것을 무서워해요. 끔찍하고 또 끔찍하거든요. 지금까지 내가 보아 왔던 나의 화려한 불꽃은 전부 환영인 것처럼 스러져 버렸고, 이제 아주 초라한 잿더미만이 남고야 말았어요. 그래서 나는 눈을 감고 차라리 도피해 버리고야 말았어요. 내가 더 이상 무너지는 건 싫었거든요. 더 이상 가라앉는 것은 싫었거든요.

그렇지만 불씨를 지키는 일은 퍽 어려운 일이라서, 내가 항상 들여다보지 않으면 꺼져 버리고 말 것처럼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어요. 바람이 불면 새빨갛게 달아오르다가 그치면 픽 하고 명을 다할 것만 같았죠. 생을 놓고 싶다는 생각과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항상 충돌하고 있었어요. 있잖아, 학교에서는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나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멍청이예요. 그렇지만 사리분별은 할 수 있는 그런 멍청이. 이 생각들을 털어놓고 함께 고민하고 울어 버리고 털어내고 묻어 버리고 다시 일어나기에는 이미 이 사회가 너무 팍팍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었어요. 나는 이 사회가 나를 받아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죽도록 학생의 본분을 다해 만들어낸 가면으로 나의 겉모습을 받아들일 수는 있겠죠. 외려 환영할지도 몰라요. 학교와 사회가 학생들에게 바라는 이상에 가까운 사람이니까요.

어쩌면 사회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인재들을 뽑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모든 것을 짊어지고 아파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감추는 법을 배우고 있을지도 모르겠구요. 그러니까 예컨대, 어릴 때의 당연한 본성마저도 우리는 억압받아 왔어요. 아플 때 우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몸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인데도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울지 못하도록 교육받았고, 우리는 성장하면서 당연하게도 전두엽이 발달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으나 체벌과 교육으로서 금지 당했어요.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죠? 숨기고 감추지 않으면,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속이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사회는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배운 도덕적인 기준이라거나, 법적인 기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거예요. 자신의 입맛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어차피 도태될 것이었고, 다시 본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그 길들임의 기류에 휩쓸리기 위해 아등바등거릴테니까요. 영악하죠. 사악하고.

그래서 나는 나의 간절한 기도과는 상관없이 나의 안쪽을 들여다보아야만 했어요. 흉악하고 보잘것없고 초라한 불씨를요. 나는 그것을 버텨낼 만큼 강하지 않았어요. 첫 번째로 나는 생물학적으로 다 자라지 않은 청소년의 신분이었고, 사회에 소속된 학생의 신분이었어요. 학생의 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다시 가족구성원으로서도 해내야 할 의무와 본분과 과업들이 존재했어요. 그것들을 지켜내지 못할 경우 어김없이 협박과 위협이 다가왔죠. 주로 그것들은 내가 청소년이고 경제적으로 나를 부양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와 큰 괴물을 만들고는 나를 덮쳐 버렸어요. 이를테면 이런 것들 말이에요.

ㅡ경제적인 지원을 해 주지 않겠다는 협박들과,

ㅡ주거지를 박탈하겠다는 협박들과,

ㅡ기본적인 욕구들에 대한 협박들과,

ㅡ생명을 위협하는 몸짓들과,

ㅡ그것과는 별개로 당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또 다른 협박과,

ㅡ수많은 고함과 소리와 울음과 분노와 정체 모를 여러 감정들이 섞여 버린 것들의… 감정 쓰레기 잔반 처리와도 같은 것이요.

내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겠어요,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다른 이들은 지금 잘 버텨내고 있는데 너는 왜 버틸 수 없느냐는 말이었어요. 나는 내게 뻗는 손길들을 뿌리쳐 버렸어요. 그것들은 마치 선악과와도 같아서 너무도 달아 끌어안아 버리면 다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마지막에 상처받는 것은 끝내 나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거든요. 사실 모든 말에 베이고 찔리는 것은 나였는걸요.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누구보다도 많이 경험했고…, 그러니까 나를 욕하고 비난하고 비아냥거려도 좋아요. 너는 왜 도움을 주겠다고 해도 지랄이니, 하고 비웃고 동정하고 친절을 빙자한 가식을 마음껏 뽐내도 좋아요. 설령 그것이 진심이었다고 해도 나는 아직 무섭고 두려워요. 그러니까 뒤에서든 앞에서든 다른 사람에게든 나에게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마음껏 해도 괜찮아요.

하지 말라고 수도 없이 말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귀담아듣지 않았거든요.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싫어 입에서 흘러나오는 언어들을 틀어막고 있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불쾌감을 유발한다며 이래저래 치이거든요. 상담을 할 때의 원칙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수용하고 상담자의 이야기를 곁들이는 것이라지만, 애석하게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상담자가 아니었고, 심지어 공인 상담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이조차도 저를 전부 파악하지 못했거든요. 이십 분의 일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어요. 그래서 이제는 지친 것일지도 몰라요. 내가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감정을 죽이면 일시적으로는 잠잠해지거든요. 사 년, 그 이상의 시간들을 버텨내는 것은 악몽 속에서 살고 있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고 앞으로도 삼 년이라는 시간을, 어쩌면 십 년 이상의 시간들 속에서 발버둥치며 호흡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지만요.

내가 졸피뎀과 아빌리파이와 디아제팜 같은 약물들을 어떻게 알고 있었겠어요? 약물들이 뇌의 어느 부분에 작용해서 어떤 작용으로 사람들을 진정시키는지를 어떻게 알고 있었겠어요? 코르티졸과 옥시토신의 작용기제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었겠어요? 요즈음 약국에서 처방해 주는 수면제에는 구토유발제 성분이 첨가되어 있어 많이 먹어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들을 어디에서 알았겠어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혈관이 지나가는 곳이 손목과 목 뒤 뿐만 아니라 허벅지 깊숙한 안쪽에도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조현병과 우울증과 바이폴라와 경계선 인격장애와 연극성 인격장애와 해리성장애와 무기력증과 무력과 환청과 환시와 환각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요? 자해와 자살과의 상관관계와 자해를 하는 이유들과 호르몬작용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요? 아동학대와 가정폭력과 언어폭력과 학교폭력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쓰고 논문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동반자살은 왜 자살이 아니라 살인 후 자살로 처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나는 한동안 저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어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전부 회복하고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면서 본분을 다한다는 학생의 형상을 갖추고는 있지마는 나는 아직 회복하지 못했는걸요. 아직도 나는 나를 마주보는 일이 버겁고 두려워요. 싫어요. 상처에서는 아직도 선혈이 배어나오고 있어요. 사실 이 상처는 자상보다는 망치로 전력을 다해 내리쳐 버린 함몰되어 조각나버린 조각상에 가까워요. 이미 조각나버렸고 몇몇 부분은 바스라져 맞출 수도 없는, 그런 것.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우울증은 완치할 수는 없지만 관리할 수는 없다고. 내가 정말로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장된 내 행동을 보지 못해요. 눈을 꾹꾹 눌러내리감는 내 이상행동을 알아채지 못해요.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달달 떨어버리는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해요. 입 안을 씹어 찌푸려진 내 얼굴을 몰라요. 스스로 목을 조르는 나의 손은 상상조차 하질 못해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냐는 물음을 받아 본 적이 있어요. 일정을 매일같이 잡고, 약속을 매일같이 잡아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항상 어딘가에 매달리고 집중하고 끌어안고만 있느냐는 질문을요. 웃어넘기고 그것이 편하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내 생명을 부여잡는 방법이에요. 내가 내일 약속을 잡는다면 적어도 내일 지장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를 해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죠. 일주일 후에 삼 일간 캠프를 간다면 들키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거예요. 내가 한 달 후에 약속을 잡는다면 나는 그 약속을 위해서 한 달 후 그 날까지는 죽지 않을 거예요. 내가 육 개월 후에 일정을 잡는다면 그 날까지 몇 시간을 할애해야 할지 생각한 후 매일같이 습관처럼 그 일을 해나가겠죠. 그런 식으로 나는 생을 연장하고 있어요.

물론 내 몸이 그것들을 전부 받아들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쓸데없이 강한 책임감 탓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짓기는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반쯤은 시체 상태가 되어 침대에 쓰러져 자기 일쑤죠. 내 몸을 혹사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을 나는 부러 만들어내요. 그러면 나는 적어도 내 몸을 해하지는 않을 수는 있거든요.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들에서도 해야 할 일들이 있으면 어떻게든 밀어붙여 해 버릴 수는 있거든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누군가의 양해를 구해서라도. 나를 체력적으로 한계점까지 밀어붙인 다음 죽이는 것은 내가 태어난 이래로 가장 잘 하게 된 일이에요.

초기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나체를 나는 이제 비교적 잘 받아들이고 있어요. 타협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처사인걸요. 나는 부러지는 것이 휘어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지만, 사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봐요. 다시 나를 감추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에 능숙해졌고, 웃고 떠들고 수다를 떠는 일에 능해졌고, 다시 공부를… 이전처럼…….

그래요, 사실 온전히 정상으로 보이지도 않을 테예요. 조금만 관찰한다면 이상한 습관들을 관찰할 수 있겠죠. 뒷목을 긁적거리는 척 하면서 손톱을 박아넣는다던지, 숨을 과도하게 많이 들이마신다던지 하는 따위의 것들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집중하는 것마저도 버거워서 나는 종종, 아니 매일 자학하곤 해요. 내가 이리저리 망가지기 전까지만 해도 높게 유지되던 집중력과 성적들과 비교하면서. 꽉 찬 캘린더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해서 생을 연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따금씩 의문이 들고, 사실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공포에 바들거리며 떠는 순간들도 있어요. 나는 벼랑 끝을 따라서 걷고 있는 기분으로 매일같이 위험한 순간들을 넘기고 있어요.

있잖아요, 나는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발버둥치고 있어요. 지금 나는 맨 밑바닥에서 올라갈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저 위에서 메아리쳐 들려오는 바다 소리를 들으면서 버텨내고 있어요. 언젠가는 빛이 보일까 싶은 순간들도 있지만, 실은 지금 내 앞에는 캄캄한 어둠뿐이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몰아쳐 오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의 불씨를 움켜쥐고 있는 중이에요. 무엇인가를 위해서. 영영 알아내지 못한다고 하면 분명히 슬플 테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무엇인가가 보이겠죠.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유리면이 언젠가는 단단해져 돌아보았을 때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었겠죠.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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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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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3-31
연극이 끝나기 전에*

연극이 끝나기 전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그게 이학년들끼리 비상회의를 소집해 나온 결과였다. 축제까지는 이제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원래대로라면 소품까지 전부 준비되어 들고 동선을 맞춰야 하는 시점이었다. 박스도 몇 번만 더 주우면 그만 주워야 할 정도로 꽉꽉 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본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은 전년도 축제를 준비한 입장에서 보자면 축제에 공연을 올리고 싶기는 한 건지,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을 품기 충분했다. 저녁에 삼학년 선배들이 내려왔다. 동아리 시간에 삼학년 기장 선배가 내려와 한바탕 혼이 난 후였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도 동일하게 이 주일이었다. 이학년 기장 Y에게 문자를 받은 순간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직격했다. 삼학년뿐 아니라 이학년들도 거의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이학년들이 매달려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삼학년 선배께서 직접 내려와 상황을 체크하고 최선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회의를 소집하면 텅텅 비어 있곤 하던 큰 강의실은 어쩐 일인지 이학년과 일학년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학년 기장 Y가 울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년간 걱정 될 정도로 연극부를 위해 헌신한 건 Y였고, 맨 땅에 헤딩을 하려던 일학년들에게 완충작용을 한 것도 Y였고, 의욕 없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대본을 쓰게 시키고 지속적으로 찾아갔던 것도 Y였다. Y는 할 만큼 했고, 짊어질 만큼 짊어졌다.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Y를 위로했고, 그 후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남자작가 H와 배우장 G와 부원 J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이 모였다. 일학년들은 학교 편의점 앞의 공간에서 저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학년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을 법한 벽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게 타일을 불규칙적으로 밟는 소리만 들렸다. “대본도 아직 안 나왔다며.” 내가 운을 뗐다. “일단 장면 전환 아홉 번은 미친 짓이야. 절대 못 올려.” “너희가 계속 같이 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봐 줬지, 봐 줬는데…….” 약속하기라도 한 듯 우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우리는 그 전 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 비상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학년 기장 S와 다른 부원들 간의 불화에 대한 문제가 주 안건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힘 빠진 논쟁이 오갔고, 연극부 특성상 이번 무대를 어떻게든 올린다고 하더라도 불화가 지속된다면 당장 다음 무대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애들이 자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오리엔테이션 무대를 올리지 못하고 동아리는 폐동되고야 말 것이다. 아찔한 감각이 목 뒤편부터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갔다. “Y는 이제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거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놓고 있을 거야?”

  • 윤별
  •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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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8-23 19: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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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urie

    들님의 수필은 '생명', '숨'에 관련이 많네요. 도 그렇고 도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생명' 3부작인가요?

    • 2016-08-01 20:21:31
    lau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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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에요, 삼부작 형식으로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 아마 가장 밀접한 주제인만큼 그 주제가 더 많이 나올 수도 있답니다.

      • 2016-08-05 22: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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