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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그 애들

  • 작성자 김한세
  • 작성일 2020-02-10
  • 조회수 1,632

1.

그 애한테서는 독특한 향이 났다. 나는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언제 한 번 향의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애는 향의 이름부터 출처까지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 애의 음성을 떠올리려 하자, 자음과 모음이 뒤섞이다가 뭉그러지고 말았다. 기억 한 줄기를 겨우 건져냈다. 스리랑카에 산다던 그 애의 할머니가 주기적으로 보내주는 거라고 말했던 것 같다. 어쩌면 떠올리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운 순리일지도 모른다. 다른 곳에서 그 애의 향을 맡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향은 그 애의 오롯한 색깔인 셈이다. 그 애의 이름 세 글자면 향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충분했다.

향은 낯선 거리감을 상쇄하려는 듯 그 애의 흔적이 깃든 거의 모든 곳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그 애의 옷가지, 그 애의 머리카락, 그 애의 책, 그 애의 침대에서. 그 애의 육체를 이루는 분자에도 향이 스며있을 것처럼. 언제 한 번 그 애가 긴팔을 걷어 올린 채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을 때, 손등을 붙잡고 체취를 맡고 싶다고 생각해봤다. 그 애의 향기는 여름에는 서늘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다가왔다.

사람에게는 집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대부분의 애들이 그랬다. 다들 집이 품고 있던 향기를 몰고 왔다. 어렸을 때 친구들의 집에서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온갖 냄새를 섭렵했다. 옷장 속의, 이불 속의, 화장실 속의 냄새. 그렇게 다른 애들이 갖던 냄새의 출처를 금방 알아챘다. 그 애는 내가 알던 것과 반대였다. 마치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 같았다. 우리의 집은 기숙사였다. 우리는 기숙사에서 공부했고, 잤고, 먹고, 울었고, 놀았다. 그러니까 기숙사는 우리 집이었다. 기숙사에서는 기숙사의 냄새가 났다. 지하실 창고에서는 누군가 햇볕 아래 땅콩을 말리는 것처럼 고소한 향이 났는데, 어떤 애는 그 향을 두고 지네의 발자취 냄새라고 했다. 어떤 때는 녹슨 냄새가 나기도 했다. 수돗물이 잘 정비되지 않은 쇠파이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청소 대행업체가 기숙사비를 떼어먹었다면서 수군거렸다. 북쪽을 바라보는 벽에 위치한 방들에서는 단단한 나무의 냄새가 났다. 밤에 방에서 자다가 아침에 교실로 막 나온 북쪽 방의 학생들에게서는 숲의 어둠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 애와 내가 쓰는 방은 이도저도 아닌 곳에 있었다. 지하와 옥상의 딱 중간에 걸친 층, 사감실 쪽 화장실과 연결된 덕에 녹슬 일 없는 수도관 파이프, 학교 본동과 기숙사를 연결하는 통로 근처에 위치한 방. 우리 방 앞에 서면, 문이 닫혀있는데도 그 애의 향이 흘러나왔다. 나는 호실 숫자를 따로 읽지 않더라도 냄새만 맡고서 우리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가끔 복도에 아무도 없을 때면,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서 새어 나오는 냄새를 맡았다. 만약 사생 중에 몽유병 환자가 있었다면, 우리 방을 이정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향은 문에 코를 갖다 대지 않아도 될 만큼 풍요로웠고, 그만큼 품위 있었다. 두개골 속의 뇌가 향기로 완전히 잠길 때쯤이면 황급히 문고리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애는 다른 방을 배정받더라도 자기 향으로 공간을 압도할 같았다. 그 애라면 충분히 그럴 것이다.

어느 날 그 애는 내게서 옷가지 하나를 빌려갔다. 시내에 나가려는데 기숙사 옷장에 있는 옷은 죄다 체육복뿐이라면서. 나는 하얀색 니트를 빌려주었다. 활달한 얼굴을 한 그 애는 옷을 손수 세탁해서 돌려줬다. 니트를 엮는 두꺼운 실 다발과 그 실 다발을 이루는 부슬부슬하고 가느다란 실 사이로 특유의 향이 배었다. 나는 니트를 가끔 꺼내 입어보았다. 아주 가끔. 그 애가 외박을 할 때나 밖으로 놀러나갔을 때, 그러니까 방에 나 혼자만 있었을 때만 말이다. 니트를 입고 밖을 활보할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향이 바깥 공기에 뒤섞여 날아갈까 싶었다. 무엇보다, 왠지 모르게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향을 계속 잡고 싶어 하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옷장에 걸린 니트는 향이 점점 옅어졌다. 그토록 강렬하던 그 애의 향이 내 옷장만큼은 침범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향이 배인 옷은 세 번 밖에 입지 못했다. 그 애가 옷을 돌려준 지 이 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니트는 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내 니트를 입고 밖에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애의 머리칼은 다른 애들에 비해 유난히 짧아서 경쾌한 인상을 주었다. 특히나 체육 시간에 다 같이 나와 운동장에서 뛸 때면 그 애의 짧은 머리카락이 더욱 돋보였다. 키가 작은 그 애는 가느다란 팔다리를 소유했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뛸 수 있었다. 유약해 보이는 신체조건으로 남을 압도하는 모순성이 화려하게 빛났다. 다른 학생들도 그 애가 뛰는 모습을 좋아했다. 어떤 여자애는 체육 시간 때 운동장을 돌고 온 그 애가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물병을 미리 챙겨두었다.

외국에서 유년을 보냈다던 그 애는 우리가 갖지 못한 낭만을 상기시켰다. 한국에서 유년을 보내면 자연스레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생명력, 자기 확신, 열정, 쾌활함 같은 가치들은 그 애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소유물처럼 보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당시의 우리 대부분이 상실하고 만 것들. 그 애는 홀로 작열하는 불꽃이었고 우리는 깜부기불이 된지 오래였다. 얇은 연기가 끔뻑끔뻑 피어오르는 다 무너진 숯들.

사랑받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사랑받는지 잘 아는 법이다. 그 애도 자신의 사랑스러움에 충실하게 행동했고 결과물을 만끽했다. 그 애는 굳게 믿는다. 그 애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애정을 확신한다. 증거이자 결과로 그 애는 추종자를 거느리고 다녔다. 단체 활동의 주도자가 필요할 때면 굳이 지도자가 되지 않더라도 목소리를 높여서 요구하는 바를 주장했다. 토론을 할 때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작게 내린 채 자기 입장을 주지시켰다. 남을 흘겨보는 그 애의 눈자위에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우리는 조화롭지 않은 구성에 몸서리쳐야 했다. 쩔쩔매며 그 애를 달래는 것으로 속죄를 대신했다.

그 애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인물이 맞았다. 그렇지만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독특한 배경을 적용하는 순간, 모두가 그 애의 행동에 납득하고 말았다. 애정 어린 포용의 형태였다. 아마도 그 애는 인생이 오롯하게 자기의 몫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고, 삶에 증오를 품지 않아도 될 것이다. 흔치 않은 축복을 거머쥐고 있던 셈이다.

 

헌법 11조는 만인의 평등을 규정하지만, 그 애는 스스로 노예를 자처했다. 그런 점에서 그 애는 열성적이었다. 모두가 그 애의 신심 어린 사랑을 알았다. 그 애는 권력에 충실히 봉사했다. 나는 그 애를 보면서 제아무리 위계가 가장 높다는 헌법도 결국 최소한의 구실만 보장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 애는 대놓고 남의 발아래에 엎드려 꼬리를 흔들지는 않았다. 그 애가 남에게 봉사하는 방식은 제법 영악했다. 조금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고, 엄지와 검지를 들어 봉사하려는 대상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야아. 확고하게 뱉은 음절을 질질 늘이면 누구나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 애는 사냥감을 덮치는 것처럼 뒤에서 팔짱을 껴왔다. 시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는 시위. 제 목에 걸린 목줄을 남에게 주체적으로 쥐여 주었으니 반쯤은 성공했다. 하지만 자기 행동이 남에게는 그저 애처롭게만 보인다는 걸 알기나 했을까? 결핍이나 빈곤을 가리려는 것처럼, 얄팍한 포장을 씌워두고 관계에서의 우위를 만들려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빈자 같았다. 그 애의 주위를 두르고 있는 것들은 자연스레 상속된 것이 아니었고, 결국 그 애는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굴어야 했다.

그 애는 길쭉한 목을 수그리고 팔짱을 낀 애와 머리의 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는 콧소리를 올려 이름을 불렀다. 누구는 그 애의 사랑을 기꺼워했고, 다른 누구는 그 애의 사랑을 역겨워했다. 그 애가 헌납하는 사랑을 만족스럽게 누리던 애들도 가슴 한구석에는 일말의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곁에서 친구와 적은 계속해서 뒤섞였고, 최종적으로 졸업할 즈음에 그 애에게는 적이 많았다. 물론 그 애는 개의치 않고 꽃다발을 든 채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 애는 행복하게 웃었다. 미소는 누군가에게 종속된 생활이 끝을 고했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나는 사납게 올라간 그 애의 눈꼬리가 무서웠다. 그 애의 표정이 어떻게 움직일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서였다. 샐쭉 풀어지다가도 금세 날카롭게 뭉친 칼끝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 주인을 위한 충신 노릇의 일환이든, 자기 방어의 목적에서든 말이다. 다른 학생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만약 그 애가 반항적인 눈빛을 죽이고 타인에게 성실하게 봉사했다면, 노예가 될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모두가 그 애를 사랑했을지도 몰랐다. 그 애의 뚜렷한 방향성만큼은 높이 살만했다. 어쩌면 그 애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시대의 새로운 노예다.

그 애는 사랑이 좌절되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 애의 사랑은 욕망이었다. 어느 겨울에 다 같이 합창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파트별로 무대에 서는 위치를 달리 조정했다. 소프라노는 맨 앞, 메조소프라노는 뒤. 목소리가 낮았던 그 애는 자연스레 중간 성부를 맡았고, 뒷줄로 가게 되었다. 그 애는 자기가 고학년이니 앞에 서야 한다고 고집했다. 한참의 씨름 끝에 지휘부는 그 애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자리를 뒤로 뺐다. 잠시 후 돌아와, 바뀐 자리를 목격한 그 애는 지휘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나도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늘이 드리운 그 애의 눈동자는 아득하게 새카맸다. 그 애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드러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세게 조여들다가 시꺼먼 피를 꿀렁거리며 뱉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 배치 사건을 계기로 그 애는 잠시 고립되었다. 타인의 목소리가 닿지 않아 형성되는 대화의 그림자가 그 애의 자리였다. 그림자는 원래부터 그 애의 일부마냥 보였다.

합창 공연이 끝난 뒤, 그 애는 공연에 참가한 합창단원 20명 모두에게 붉은 장미꽃을 한 송이씩 안겼다. 대단한 공세였다. 아연한 표정의 다른 학생들 앞에 두고 그 애는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덕담을 건넸다. 자기 안의 복종하는 성향을 회복한 것이다. 나는 그 애에게 받은 장미를 내 기숙사 방에 두었다. 장미는 점점 말라갔다. 법은 언제나 최소한의 테두리를 그린다.

 

그 애는 애처로웠다. 그 애가 두르고 있는 미지의 아우라가 조그만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언제 한 번 핀란드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핀란드에는 해가 들지 않아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고. 그 부분을 읽으면서 핀란드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 애가 떠올랐다. 그 애의 얼굴에는 무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햇볕이 들지 않는다는 핀란드의 숲을 닮았다. 웃을 때면 시선을 허공에 두고 목을 살짝 꺾는 그 애는 웃음조차 온당하게 누리고 있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허. 하는 웃음소리는 짧게 끊겼는데, 그 애의 미세한 표정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가느다란 한숨처럼 들렸다. 겨우 17년 된 인생에서 그렇게 뚜렷한 표징을 가진 건 드문 일이었다. 배경에 모종의 무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볼 뿐이다. 그렇지만 발표는 조리 있게 잘했다.

집중할 때면 그 애의 두 눈에 낀 우울은 무아지경으로 번뜩였다. 그 애는 색연필을 잘 다뤘다. 날카롭게 깎인 심 끝에서 황홀이 암울하게 작열했다. 재빠른 솜씨로 종이를 가득 메우는 손길을 보면 불꽃이 종이를 적시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때는 색이 압축되어 선이 되었고, 또 어떤 때는 선이 펼쳐져 넓은 평면으로 변모했다. 솔직히 둘 사이에 차이점은 없어 보였다. 그 애가 사용하는 선은 단순한 선의 개념을 넘어선 깊이를 획득했다. 그런 의미에서 선은 자기 주인을 닮았다. 분명한 윤곽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선은 공간과 공간을 분할하지 못하다가, 퍼지고 스며들었다. 그 애는 제 작품을 묵묵하게 바라보았다. 몰락을 경건하게 짊어진 고행자처럼 말이다. 그 애가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전히 신기하다.

우리가 미술 수행평가로 그렸던 자유 그림은 축제 때 모두 전시되었다. 그 애는 오페라와 코발트블루, 단 두 개의 색만 썼다. 색채가 마구잡이로 뒤섞이고 흩어지던 그림은 맨 가운데에 걸렸다. 축제가 끝나던 밤,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복도는 비어있었다. 적막함 속에서 홀로 그 애의 작품을 봤다. 강렬한 색채는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다가 이내 말소리가 되었다. 내 귓가로 다가오는 말소리와 발표할 때 들었던 그 애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건 비명일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부여한 의무에 휘청거리다가 내지르는 소리.

많은 학생이 그 애한테 일종의 질투심을 느꼈다. 만약 그 애의 이름을 미술관에서 봤다면 아무도 감정적 동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학생 명부에서가, 교실에서가 아니라. 멋들어진 작품 아래, 투명한 아크릴판 위로 의기양양하게 놓인 이름이라면 당연히 납득했을 것이다. 미술관에 걸린 작가의 이름이 경탄의 지위를 누리는 건 지당했다. 대중의 경외를 얻은 건 언제나 다른 차원으로 격상되는 법이었다. 그렇게 작가들은 하나둘씩 일상의 영역을 벗어나곤 한다. 그런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건 오직 비평가와 애호가뿐이다. 그 애와 우리 사이에는 단절을 중재해 줄 전문가가 없었다. 소통의 매개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애를 질투했던 걸까?

그렇지만 그 애가 많은 학생의 자의식을 위협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소통의 매개가 없더라도 무형의 위협은 실제적이었다. 자아가 비대했을 때. 그러니까 아직 자기 존재의 특별함을 굳건하게 믿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는 아직까지만 해도 확신했다.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과신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우리 몫의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베게에 머리를 누이면서 인생에 대한 꿈을 꾸었다. 익숙한 일상의 범위에 있는 누군가가 보여주는 비범함은 일종의 위협이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서글픔이 가슴 가운데에서 솟았다. 타인과 공유하는 순간 스스로의 유치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욱욱 삼켜내야 했다. 우리는 그 애를 보며 인생과 타협하는 법을 배워갔다. 질투는 미성숙을 보여주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5.

그 애들은 두루뭉술하다. 그 애들은 풍경의 일환이다. 놀이터에서 뛰어놀았던 초등학교 때, 옆으로 등굣길 옆으로 이어진 10월의 황금빛 논, F 건반이 소리 나지 않던 피아노가 있던 집. 소품과 배경은 떠올리더라도 정작 그 애들을 서술할만한 문장은 잘 쓰이지 않는다. 밀레의 만종을 보듯 그 애들의 얼굴 윤곽은 풍경에 뒤섞여버리고 녹아내리다가 결국에는 기억되지 못한다. 그 애들은 물감 자국으로 환원되고 만다. 손끝으로 캔버스 위를 더듬어보면 똑같은 감촉을 받을 뿐이다. 그 애들의 성격은 어땠는지, 무얼 좋아하고 싫어했는지, 목소리는 어땠는지, 나는 아무것도 반추하지 못한다. 그렇게 그 애들은 뚜렷한 형상이 아니라 어렴풋한 느낌으로 기억된다.

그 애들을 통해 채색되는 것은 그 애들 자체가 아니라 나다. 얼마 전에 그 애들의 근황을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너무 많이 달라진 그 애들을 보며 이질감이 들었다. 최근이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던 때에서 너무 멀어진 시점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턱이 좁아 들고 어깨가 넓어진 그들은 각막 위에서 미끄러졌다. 성장한 그 애들을 보는데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내 사고의 범주에 든 그 애들과 범주 밖에 위치한 그 애들은 다른 존재일 것이다. 무례하게도. 어쩌면 낭만을 추억하는 과정은 오만한 일이다. 내 멋대로 풍경의 일환으로 녹여내고, 끼워 넣다가, 지워버리기 때문에.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나는 왜곡하고 있다.

김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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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

중간 고사를 봤다. 새로운 시점에서 맞게 되는 첫 중간고사였다. 내 첫 과목은 일요일 오후 3시에 잡혀 있었다. 인터넷 강의의 필기 고사 일정은 모두 주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4시간을 소요하는 통학생이었다. 고로 3시의 시험에 맞추기 위해서 적어도 1시에는 나가야 했다. 나는 1시 반에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바닥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교재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도 못했고, 책을 읽자니 활자가 눈에서 미끄러졌다.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버스의 도착 예정 시간이 1분씩 줄어들 때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딱 도살당하기 직전의 가축 같았다. 어떻게든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교재를 펼쳤다. 읽히지 않았다. 진리표가, 귀납이, 기호가, 영어가, 한글이, 아무것도. 주말 오후의 고속도로는 평일 출퇴근 시간의 그것에 비하면 한산했다. 버스는 세차게 달렸다. 항상 내리는 정류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버스의 맨 뒷자리에다 머리를 구겨 넣었다. 결국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했다.   나는 낯선 정류장에 내렸다. 봄볕이 좋았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벚꽃 아래로 화사한 색을 자랑하는 철쭉이 싱그러웠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노는 아이들이 고왔다. 카페로 갔다. 최근에 유명하던 브라운슈가치즈폼스무디를 주문해봤다. 빨대에 처음 입술을 가져다 대었을 때 밀려오는 맛이 새로웠다. 가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캐롤을 꺼내 들었다. 타피오카 펄을 씹으면서 책장을 넘겼다. 원수 같은 활자들이 그제야 고개를 조아렸다. 서로에게 헌신하는 테레즈와 캐롤의 사랑 이야기는 낭만적이었다.   싱그럽다, 곱다, 달다, 사실 이 감상은 전부 거짓말이다. 옷 위로 내려앉는 햇빛이 따뜻했지만 그저 따뜻한 것으로 끝나버렸고, 철쭉과 아이들은 금방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페에서 주문한 음료가 첫 맛은 새로웠지 몰라도 그 이후에는 마시는 행위에서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며 삼켜냈다. 테레즈와 캐롤의 이야기는 거칠한 종이 위로 버석버석하게 그려졌고, 나는 거기서 로맨스의 독서에 충실하기 위해 쥐어지지 않는 낭만을 찾아 헤맸다. 그러므로 저것들은 내가 체험한 풍경을 열거하고 그에 대해서 기계적인 반응을 뱉어내는 말에 불과하다. 저것들은 내 말이 아니다. 상황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끌어온 타인들의 언어다. 그 관습적이고도 온후한 어휘들은 내게는 없는 언어였다. 누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박탈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내가 열거했던 어휘들을 진실한 정서로 표현할 수 있는, 현실감과 유사한 성질을 띠고 있을 것이다. 내게는 온종일 한탄하고 원망할 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홀로 박탈감을 설명해야 했다. 일상적인 박탈감은 덩어리지다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물결이 잔잔해졌다. 내가 스스로의 관찰자가 되어 먼 곳에서 나를 조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모든 상황으로부터 격리된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nbsp

  • 김한세
  • 2019-04-30
원숙함에의 갈망

    지난 12월 22일, 잠실 롯데 콘서트홀에서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 독주회가 있었다. 나는 힘겨운 수험 생활에 지칠 때면 힐러리 한이 연주한 바흐의 샤콘느를 들었다. 단정한 음색과 안정된 기교가 전달하는 질서정연한 슬픔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름의 역경 속에서 갖게 된 애정 탓인지, 바이올린의 거장을 그리는 마음이 깊어져 결국 연주회의 티켓을 구매했다. 빈곤한 지갑 사정으로 인해 만족스러운 좌석에 앉지는 못했고, 2시간의 연주회 내내 그의 등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만족했다. 항상 이어폰 너머로 접하던 이를 직접 보고, 그 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기 때문이다. 이날 연주회는 내게 두 가지의 감정을 선사했다. 첫 번째 감정은 경이였다. 힐러리 한에 대한 나의 애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모양이었다. 입장하는 순간 비치던 그의 옆모습을 보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울컥 올라왔다. 미소 띤 얼굴로 넓은 무대로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그 모습이 참 단단해 보였다. 나는 그가 첫 소리를 내는 순간까지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두 번째 감정은 괴로움이었다. 사실 이 감정이야말로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내 수험 생활을 지탱해주었다는 개인적인 서사에서 비롯되는 감동은 힐러리 한이 첫 음을 내는 순간까지만 지속되었다. 나는 힐러리 한의 연주에서 아무런 감상을 느낄 수 없었다. 내 가슴에서 오롯하게 우러나오는 생각을 갖고서 그의 음악에 임하지 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투브에 연주회의 곡목을 검색해서 들어보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나는 두 시간 동안의 공연 내내 왼쪽에 앉은 관객의 외투 스침소리에 괴로워야 했고, 오른쪽에 앉은 관객의 코먹는 소리에 고단해야 했다. 연주회가 끝나고서 8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마음에는 망연자실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토록 그리던 힐러리 한의 연주를 두 귀로 직접 들었는데도 머리에는 박힌 게 없었다. 각종 클래식 커뮤니티에 감상을 검색해보았다. 콘서트를 갔다 온 모든 사람들이 힐러리 한의 연주를 두고 길이 남을 거장이라며 기립박수를 쳤다. 왜 나는 그의 음악에서 감동을 느낄 수 없었을까? 나는 뭐가 부족했을까?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채 회장에 들어갈까, 그런 걱정에 티켓을 구입하자마자 프로그램에 올라와 있는 곡목을 공부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바흐의 파르티타를 들었고, 그 비평을 찾아보았다. 그 무엇도 내 감상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는 생각에 강남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허망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내 것이 아닌 감상을 마치 내게서 비롯된 오롯한 사유인 양 그렇게 떠들었다. 힐러리 한이 스타일을 바꾼 느낌이었어요. 왜, 그 사람은 되게 기계적인 연주의 정석이잖아요. 정경화랑은 대조적으로요. 그래서 그 질서정연한 맛이 좋아서 평소에 그분의 연주를 선호했는데, 특히 바흐 말이에요, 이제는 스타일을 바꾸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포르테가 대담해지고

  • 김한세
  • 2018-12-30
포스트 수능의 시대

11/15~16   지난 12년, 그 중에서도 이번 1년은 유난히 고통스러웠다. 육체도 정신도 모두 고달파서, 그래서 내가 영원히 고통 속으로 침전할 줄 알았다. 그동안 나는 스트레스성 두드러기로 인해 매일 밤마다 온몸을 긁어야 했고, 병원에서 임시방편으로 처방한 약을 먹어야 했다. 계속 앉아있던 탓에 척추는 뒤틀렸으며, 더 이상 내 허리를 뒤로 젖힐 수 없게 되었다. 체력은 내 육신을 떠받치는 것으로 그 쓸모를 다했다. 움직이는 일이 없으니 육체는 물 먹은 솜인 것 마냥 불어났다. 자유로운 정신이 살로 이루어진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 매 순간이 답답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침마다 갈빗대 아래의 가죽을 가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나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된 상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날카로운 메스가 뱃가죽을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가 그 안의 장기를 하나씩 빼내, 종내에는 붉은 살덩이 몇 점으로 환원될 내 존재를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나를 이루던 것들이 의미를 상실하고 의미 없는 자유를 누릴 영혼을 상상했다. 뒤틀린 해방감이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내 12년의 공교육은 막을 내렸다. "막을 내렸다"고 표현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수능을 치르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영영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았던 탓이다. 그토록 내 정신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미성년의 삶이 이제는 정녕 그 뒤통수를 보이고 있다. 이내 나는 비로소 강압적인 의무에서 탈피해서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제도교육 12년의 종착지가 있었고, 동시에 12년의 내 인생에 대한 구속이기도 했던 그것은 비로소 끝을 맞았다. 어떻게 보면 나는 1789년의 정신을 만들어 낸 파리의 민중들처럼 내 자신에 대한 자유를 쟁취해 낸 셈이다. 시험을 마친 후에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제 2외국어 과목까지 다 보고 나니, 태양은 산 너머로 이동한 지 오래였다. 버스 창 너머로 휙휙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 라 단조를 들었다. 그 특유의 딱딱하고 절도 있는 리듬, 바로크 음악의 단아한 화음 진행이 피아노의 청명한 소리와 어울려 내는 소리가 질서정연했다. 선율이 내게 선사해주는 그 질서감에 안정감이 들어, 나는 버스에서 내리고도 계속 그 곡을 들었다. 주황색으로 빛나는 가로등 불빛을 맞으면서 기숙사가 있는 산 위를 올라갔다. 내 두 발로 경사를 밟아 올라갔다. 그러면 나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기도를 홧홧하게 태우는 숨을 뱉었다. 비로소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시험이 끝나기 전부터 벼르고 있던 롤랑 바르트를 뒤적거렸다. 단테의 신곡 첫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의 삶이 어떻게 소설을 창작하는 재료가 되는지에 대해 전개되는 아이디어가 피어나는 꽃처럼 고매했다. 텍스트를 훑은 다음에는 피아노를 쳤다. 1학년과 2학년이 모두 빠져나가고, 귀사한 3학년이 한 줌이 되지 않는 학교에서였다. 부조니가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샤콘느의 음색은 아무도 없는 넓은 강당을 오롯하게

  • 김한세
  • 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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