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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좋은 곳에 갈 거예요, 당신과 함께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06-24
  • 조회수 1,604

좋은 곳에 대해 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시간이라는 게 있다면

 

사랑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싶었고목숨을 아무에게나 쥐여주고 싶었고좋은 곳에 쓰세요 덕담하듯이 쨍그랑 던지고 싶었고

 

사랑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고

죽고 싶어서 사랑하지 않았고

 

김소형좋은 곳에 갈 거예요 

*제목 또한 상기 시의 일부 변형이다

 

좋은 곳으로 가는 법

 

나는 종교인이 아니지만우리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음을 믿는다여기서 당신은 우리는 누구고 좋은 곳은 또 어디인가싶을 것이다우선나는 우리라는 말을 참 뜻깊게 생각한다우리는 같은 종의 동물이라는 이유로 한 축사에 갇힌 돼지들의 우리처럼 한 집단을 옥죄어오는 단어가 될 수 있다동시에 또 우리는 상대에게 나를 낮추는, ‘우리나라와 같은 공손한 표현도 될 수 있다그렇지만 이 단어를 발음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나와 당신들을 아우르는 우리내가 말하는 좋은 곳으로 가는 우리는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의미를 반반 지녔다사랑과 연대로 이어진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일컫는 말이자 아무것도 아닌 내가 감히 당신들을 함께라고 불러보는 것나는 참 오지랖이 넓은 편이다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인싸라는 아닌데낯이 두껍거나 친화력이 아주 좋지 않으면서도 공감 능력과 사회에 관한 관심은 많다반장이나 학예부장으로 나서서 반의 분위기를 형성하지는 못하지만변방의 부반장으로 살아가며 학급의 서류 정리를 하고 학급 행사를 진행할 때 말수 없는 친구들의 이야기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부당한 일이 생긴다면 길거리에 피켓을 들고 나가긴 두려워하면서도 SNS에 긴 주장문을 우선 올려보고 주위 사람들을 설득하는 사람그게 나다좋게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나쁘게는 삶을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같은 성별나이국적인 이들그리고 그걸 넘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이들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길 바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테다. -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이렇게까지 말하니 내가 대단한 인권 운동가가 된 것 같지만현실은 또래보다 타인과 나의 행복에 조금 더 관심이 많을 뿐인 사람이다. - 그렇다면 좋은 곳은 또 어디일까거듭 말하지만 나는 종교인이 아니기에 절대적인 천국이나 우리가 평생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대신 우리가 머물 좋은 곳을 직접 일구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나는 구원은 스스로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데이건 구원천국아름다운 곳과 좋은 곳은 특정한 곳에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가 찾아 나서야 한다는 의미로서 말한다다만 사람은 홀로 살아가지 않고 우리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나이기에서로에게 기대 스스로-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그 스스로-구원은 피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듯한 조건에서 발생한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었을 때’.

 

 

여기도 나쁘지 않잖아라고 말한다면

 

앞서 나는 행복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했고자꾸만 좋은 곳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했다누군가는 이러한 나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하루하루 잘 살아가기만 하면 괜찮은 거 아닌가하고그렇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이는 짧다면 짧고또 길다면 긴 나의 생이라는 대륙을 건너갈 때 세상과 부딪히며 단단해진 믿음이다우선나 자체도 지독하고 오랜 우울을 앓았다왜 그랬냐는 물음에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지만아마도 나의 예민함이 한몫했을 거다타인이 쉽게 던지는 한 마디에 깊게 베여 울다 지치는 날이 많았다이를테면 중학교 수업 시간 중 동성 커플의 목격담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지독하게 혐오하던 선생님그리고 거기에 동조하던 반 친구들이 있었다나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굉장한 부조리함과 교실에 대한 환멸그리고 나의 성 소수자 친구들이 겪은 일들이 떠올라 슬픔을 느꼈다다른 아이들이 외국인 노동자장애인어린이를 가지고서 좋지 않은 농담을 할 때 웃지 못하던 기분과 홀로 느꼈던 분노가 나를 괴롭게 했다매일 악독한 말이 오가고 폭풍 속에 있는 듯했다한때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끄고 사회면 기사를 멀리하는 내가 있었지만나는 그 무엇보다 그런 내가 혐오스러워 버틸 수 없었다내 삶에 정의라는 가치를 뺄 수 없었던 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서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의 우울은 그대로였지만적어도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다룰 수 있게는 되었다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는 상태에서 주위를 둘러보니세상 곳곳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사람마다 제각기 우울을 지니고 살아갈 테지만나의 친구들은 백석의 말마따나 하늘이 이 세상을 내릴 적에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서인지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높고 쓸쓸하고 자주 슬퍼했다나와 같은 이유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주파수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느껴지는 우울부터 어찌할 수 없는 근본적 환경에 우는 이들까지 여럿 있었다나는 그들의 슬픔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고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그저 그 속에서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우리가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손에 쥔 건 곰 인형이 아니라

 

그럼 다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좋은 사람을 이야기해볼까이 스스로-구원 행복론이 확고해진 지난해부터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내가 만나는 이 중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꼭 질문하는 게 있었는데바로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글틴 캠프에 참가하여 감사하게도 김선오 시인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이때 시인은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질문해도 괜찮다고 하였는데그때도 어김없이 이 물음을 던졌다시인은 웃으면서 왜 그러한 질문을 하고 다니냐 물었고나는 일종의 AI 학습 같은 거라고 말했다. ‘전 진짜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물론 절대적인 좋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건 알아요그런데 그냥 남들이 얘는 참 좋은 사람이구나그래서 이 사람이랑 함께하면 행복하구나이렇게 느꼈으면 좋겠어요그래서 학습 중이에요제가 요즘엔 만나서 행복했던 사람들에게 묻고 있어요당신은 어떤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 같냐고그 대답을 모으고 있어요물론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고제가 나아갈 길을 찾는 거죠,’ 그리고 시인은 거기에 그런 고민과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답했다물론 좋아하는 시인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자니 춤을 추고 싶어질 정도로 기뻤지만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기에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머리로 이해는 되는데 마음이 못 받아들여의 반대가 세상에 존재하다니시인님의 따스한 마음은 전해지지만 내 머리가 이해를 거부하고 있어...


 

깨어진 유리 조각인데도 불구하고

 

예리함과 포근함은 상반된 관계라도 보아도 좋을 것이다그러나 좋은 사람을 이루는 요소로써 이 둘은단짝이나 다름이 없다정확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부터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흔히 포근하다고 느끼는 할머니나 엄마의 품에는 물리적으로 높은 체온이나 그리운 향기가 있을 거다그렇지만 넓게는 누구보다도 겪어온 세월로 세상과 나를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도 있다물론 무던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 있지만내가 만나온 대부분의 좋은 사람들은 자신의 예리함으로부터 따스함을 끌어내는 이들이었다한 번은 곁에 나보다도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며 사회 문제에 민감한 친구가 있었다그 친구와 나는 같은 반이었는데나를 포함한 학급 친구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불편하리라 예측하고서 움직이는 아이였다내가 곤란한 상황을 겪으며 교실 한복판에서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자잘 들어갔냐는 문자 메시지와 함께 위로의 말을 남기던 아이다그 애의 다정함을 몇 번이고 맛보면서 감동하기도 했지만그걸 너머 나 또한 너처럼 되고 싶어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예리함에서 포근함을 끌어낼 수 있느냐이다예리함을 지니고 있으면 시종일관 스트레스를 받는 것 아닌가어떻게 타인까지 둘러볼 상황이 생기는 걸까세상이 내게 주는 영향과 에너지가 나 자신을 향하는 게 아니라내가 영향과 에너지를 뿜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그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 유리가 세상을 비출 수 있음을 알아

 

나는 서툴다나는 아직 수줍음 때문에 말하길 망설여 사람들의 마음을 배려하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마음이 굴뚝 같아도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달라 입을 뗄 타이밍만 재다가 순간이 끝나버린다그리고 한참 지나서야 그때 네게 조금 더 위로의 말을 건네줄 걸네가 나에게 그러하였듯이 힘이 되어줄 걸하고서 후회한다또 타인이 보내는 호의를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의심한다작게는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음식이 그 사람의 것을 뺏어 먹는 것 같아 손대지 못하고칭찬을 들으면 감히 내가,라는 생각이 들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무엇보다 나는 자꾸만 분노한다사회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소위 말하는 '피곤한 삶'을 살게 된 이상나와 분노와 우울은 다 놓아 눌어붙은 젤리 곰처럼 한 덩어리의 운명일 것이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아주 캄캄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내가 할 것은 적절한 양의 분노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사랑으로 치환하기중학교 때의 나는 참 분노가 많았던 것 같다물론 그 분노를 건강하게 표출하려 노력했고 결과적으로는 여러 글을 쓰고 토론하며 -그때의 글은 지금의 나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놀랍도록 견고하고 푸르게 타오른다자신과 세상을 확장시키려 했던 것 같다동시에 사랑을 마주하는 걸 참 낯부끄러워했다그 힘도 잘 믿지 않았고그렇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며 거짓과 같고 시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사랑의 힘을 배웠다미술사 시간 김환기와 그의 아내 김향안의 사랑과 연대의 역사를 배웠을 때그리고 김환기의 작품을 직접 마주하고 숭고미를 느끼며 눈물을 흘렸을 때김연덕의 시집을 읽고 시인에게 푹 빠져 그가 믿는 사랑에 대해 들여다볼 때최은영의 그 여름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그려볼 때그리고 이곳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누군가에게 받았을 때나는 이제 안다적당량의 분노는 원동력이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훌륭한 원동력은 사랑이라는 걸분노는 파도와 같고 사랑은 당신과 함께 세운 모래성 같아서 두 가지가 충돌했을 때 사랑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만성이 무너졌다는 사실 보다도 함께 성을 축조한 기억과 맞잡은 손 사이로 슬픔처럼 흐르는 모래가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걸.

 

그리하여 나는 믿는다나의 예리함 끝에서 빛나는 분노는 머지않아 사랑의 원료가 될 거라는 걸그 사랑으로 우리는 좋은 곳에 갈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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