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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로 숨쉰다는 것

  • 작성자 위다윗
  • 작성일 2024-03-27
  • 조회수 255



어린 시절, 난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환경들은 오직 나를 위해 조성된 이들이고, 난 그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하게 살면 된다고 믿었었다. 난 세상과 나자신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유년기를 지나왔다. 어리기만 한 아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하나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많은 것들과 상충되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난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나와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한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사실로서 다가왔지만, 사실은 전보다 나의 두눈을 더 감기게 만들었다. 도통 이 모든 현실이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 혼란속에서 어쩌면 나의 인생에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충격과 두려움은 나의 머리 위를 덮는 어두운 나무의 그림자와도 같았다. 마치 키가 큰 나무옆에서 조용히 자라던 새싹이 키가 자라, 그 나무의 가지에 부딪치는 것처럼, 나또한 그순간 어떤 딱딱한 가지에 머리를 박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이상 내가 중요하거나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사라졌다. 더이상 내가 자유롭고 행복한 미래를 갖을 수 있다는 소망도 사라졌다. 대신 나의 성장과 미래를 가로막는 어두운 철장벽과 그늘진 가지의 모습만이 남았다. 그 모습은 너무도 볼품없고 연약해 보였다. 무지라는 암흑속을 헤메다가 외로히 그 속에서 끝나고 마는 이미지가 나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오직 진리라는 거대한 퍼즐의 파편들 뿐이었다. 그 속에서 내게 다가오는 파편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그 파편들은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었고, 잔인할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사실들과 느껴지는 사실들은 절망의 구덩이를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현재를 기준삼았을때, 현재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받아들일때, 우리의 삶은 제한적이고 움츠려든 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들이나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시위하는 여러 사실들은 이해하기 쉽다. 가시처럼 툭 쑤셔대며 우리의 마음에 통증을 일으키는 생각들은 우리의 기억에 선명히 그려진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너머에 있는 더 큰 진리가 있다라는 사실을 믿을때, 우리는 그 믿음안에 도전하고 성장해나가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어떤 환경과 상황이든지 희망과 꿈을 품을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이해되는 것 이상의 것, 즉, 이해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더 큰 진리가 우리의 인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며 때로는 현실에 부딪치고 키가 큰 나무의 가지에 머리를 박게 되는 경험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어두움과 고통속에서 피어나는 내면의 힘이란 믿음이며 신뢰이다. 그 어두움 속에서 피어나는 서광과도 같은 희망은 우리의 인생을 무지안에 갇힌 삶이 아닌, 그 무지속에서 붙들어지는 새로운 내일의 세계로 인도한다. 


내가 내일을 기대하며 붙드는  그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그 어둠과 제한이란 철장속에서도 빛과 성장이란 목표로 이끌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나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더이상 타인이 아닌 나라는 유일한 존재로서 숨쉬고 말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꽃마다 각기다른 색감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듯이 우리도 자신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재능과 선물들을 갖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의 파도가 닥쳐 올때 자신의 존재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 평소에는 그저 편안하고 안락한 상황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몰라도, 갑작스런 사고나 상황이 돌변할때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환경과 상황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없다. 키큰 나무의 가지에 부딪치며 그 한계가 웅변하는 고함을 견디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코 상황이 아니다. 나자신에 대한 신뢰가 그것을 극복하도록 만든다. 한동안 나의 청소년기 시절을 장악하던 한가지 큰 절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회의였다.  나라는 존재는 진짜 존재하는 걸까? 난 그저 무가치하고 남들과 다른 것 하나없는 허무한 인간들중에 하나아닐까?  나는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걸까? 난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결론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다시 돌아보면 그당시 나는 나의 특별함과 고유함을 부정했기에, 상황이 내게 그러한 특별성을 부여해주지 못할때마다 깊은 회의를 느꼈다. 나의 학업성적이나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내가 얼마나 특별하고 가치있는 존재인지를 증명해주지 못할때면, 난 신음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붙들었던 상황적 요소들 없이는, 즉, 나의 존재자체만으로만 남겨졌을때는, 난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난 나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누구이며 내가 왜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존재가 중심으로 서고 그 주위에 상황이나 나의 평판과 인정이 있어야 했지만 나에겐 그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상황이나 나의 평판과 인정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잡고 나의 존재는 그저 허무한 바람처럼,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난 그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을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헤맸다. 내가 진정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수학문제보다 더 어려운 것 같이 느껴졌다.  감사하게도 이제 나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를 이해한다. 나의 존재는 다시 되찾아졌고 그는 나의 삶속에 중심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평가나 내가 이룬 외부적인 성과들로가 아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부모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발견해갔다. 그 사랑은 나를 외부적인 것들로부터의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 시켜 나갔다. 나는 이제 진정한 ‘내’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는 아주 작지만 아주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 어려움 속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씨앗과도 같은 존재, 세상에 영향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물과도 같은 존재, 그 존재가 바로 나였다. 믿기지 않을 만큼 멋지고 소중한 그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과 내게 펼쳐진 꿈들이  나의 생각을 채우기 시작했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존재가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우리들은 모두 이 세상에 가능성이 될 소중한 씨앗들이다. 그 진리가 아직 바로 받아들여지고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괜찮다. 나도 그 진리가 살아서 나의 마음을 울리게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진리가 진리라는 사실, 아직 이해할 수 없지만, 나의 이해 너머로 존재하는 진리가 있다라는 믿음을 연습하면 된다.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고, 나의 존재를 나의 삶에 중심으로 옮기는 것, 마지막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아마 이 마지막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아직 그 단계를 완성하지 못했다. 단지 과정중에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토록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드는 원인은 나자신과 거리가 먼 타인의 기준을 맞추려 하는 시도이다. 나와 타인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기준들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 할 필요가 없으며 설사 노력한다고 정말 맞추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목소리와 재능을 성장시켜  진정한 나됨안에서 살아야 한다. 꽃과 나무의 역할이 다른 것과 같이, 나와 타인은 다를 수 있다. 꽃과 나무를 억지로 끼어 맞추어 똑같게 만드는 것은 꽃, 나무, 또 그것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와 타인을 억지로 끼어 맞추어 기준삼는 것은 나와 타인, 또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에게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시도들에서 벗어나 타인과 다른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를,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성장을 이루는 발판으로 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난 내가 나로 숨쉴 수 있을때 그 어떤 순간보다 더 행복하다. 난 내가 갖고 있는 고유의 향기와 재능들을 아낌없이 누리고, 베풀며,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나답게 살 수 있는  인생을 걷고 싶다. 난 종종 시를 쓰거나, 다른 사람들과 나의 생각을 서로 주고받으며 대화할때  엄청난 기쁨과 자유를 느낀다. 이러한 '나다운' 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이 내 안의 심겨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신뢰하게 되는 계기가 될 때도 있다.  이처럼 나답게 살 수 있는 자유는 우리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나의 가치를 알고, 나의 재능과 꿈을 알고, 나를 가꾸어 나가는 일, 이 일은 아마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사실 나로서 살기란 어쩌면 남을 따라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작은 빛들과 퍼즐조각들을  따라 한걸음씩 모험해갈때 언젠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감으로 그 과정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올것이다. 그 순간이 내게, 그리고 나와 같은 여정을 걷고 있는 많은 청소년들에게도 찾아오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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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내 인생은 미치도록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 복잡하고 답답한 사실을 증명해보고 싶어 쓰고 버린 내 글들과 시간이 참으로 아까울 뿐이다. 모두가 어지러운 인생, 모두가 특별해지기 위해, 위대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 세상에서 나 위다윗이 얼마나 특별한지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뭐, 그렇다고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지하철만 타도 남고딩들이 신나게 욕을 쏟아 붓는 그 “문제적” 기독교 (어떤 불특정 다수에게는 *독교이겠지만)를 독실하게 믿고, 그 신앙에 자신의 젊음을 던진 목회자 부부의 외동아들이자 어릴적부터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으나 그걸 억제하며 버텨온 꽤 인내심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말하면 적당할 듯 하다. 참고로, 이미 보편적인 상식이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사랑”의 형태가 아닌 인간 본성의 “뒤틀어짐” 내지는 인간행위의 “탈선”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오늘날 정통 개신교 내에서 동성애라는 죄와 그 죄를 행하는 LGBTQ 집단의 사람들은 주로 공감과 긍휼 대신 극심한 혐오, 경계와 거절을 받는 대상이다.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우가 노골적이다기 보다는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한 사람들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에 가깝게 보여진다.) 부모님께서 내가 여성의 몸보다 남성의 몸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사춘기를 시작할 즘,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두분 모두 굉장히 속상해하셨지만 기도와 통제 속에서 충분히 꺾일 수 있는 죄의 씨앗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물론 이 씨앗은 보수적인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했고 오늘날 나는 더이상 내가 남편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며 신앙안에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게 되는 남자가 되었다. 내게는 게이라이프 아니면 독신밖에, 적어도 솔직하게는, 선택권이 없게 느껴진다. 다행히 성경은 독신라이프를 반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핵심교리를 확립했던 사도 바울도 독신으로 살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원하는가이다. 아니, 내가 그걸 견딜 수 있는지이다. 아무리 내가 애늙은이라도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은 곧 스무살이 될 나에게 다른 이성애자 젊은이들보다 덜 강하게 일어나진 않는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갈지 모르겠지만, 난 동성애가 죄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과 오해, 적대심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동성애라는 욕구는 한 남자의 한 여자를 향한 자연스러운 욕구만큼 실제이며 이 끌림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한 인간의 영적, 정신적인 필요까지를 담고 있다. 동성애에 대해 말할때 흔히 내 교회 지인들은 “게이들은 온전히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목적으로 다른 남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인사이더로서 분명한 것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이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의 케미, 친밀감, 대상의 지적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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