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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과 21st century schizoid man

  • 작성자 데카당
  • 작성일 2024-04-20
  • 조회수 136

전락은 대화의 형식을 빌린 극에서의 기나긴 독백이다. 작가는 대화 상대역의 말을 주인공이 대신 되받아 말하도록 했고 이에 그 연극은 일인극이 된다. 일인극에서의 독백. 주인공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전개되는 독백은 세계를 만든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은 현대인의 특징이다.

그리고 극을 정신분열로 치환하면 21세기 정신분열성 인격장애 남자다.

일단 전락을 먼저 보자. 화자는 우선 자신의 예전 삶을 털어낸다. 약자의 편에 서는 잘 나가는 변호사로 평판까지 좋아서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 의도로 바라봐진다. 그런 상황을 연기라고 하면서 일부러 이해되기 힘든 주장을 할 때 이 평판은 저주가 된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피곤한가보다! 하는 식이다. 이미 화자는 사라지고 변호사(화자)가 만들어졌다. 물론 화자는 지속적인 노력,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 변호사를 죽였다. 그러나 변호사는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의 세계에서 발판이었기 때문에 화자는 허무함을 느끼며 방탕한 생활을 했고(전락) 또다른 허무함을 만들다 보니 시간이 흘러 방탕하게 살기에는 몸이 받쳐주지 않는 나이가 됐다. 이때부터 화자는 작은 항구마을로 가서 원래보다는 한가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청자가 왔을 때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자는 과거를 말하면서 자신을 피고석에 세운다. 그리고 피고로 선 화자는 역으로 세상을 고발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냉소는 변호사라는 직업 전반에 대한 냉소로 확장되고 자신이 구하지 않은, 다리에서 떨어진 여자의 이미지로 나타내지는 자신의 법정이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는 법정으로 팽창한다.

동시대의 사고에 갇히지 않고 비판하는 화자는 물론 현대적이지만 화자가 나타내는 현대의 인간은 세상에서 떨어진 개인일 뿐이다. 화자가 법정에 서는 이유는 세상을 고발하는데 있지 성찰을 위하는데 있지 않으며 모든 과정이 화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법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화자는 자신을 쪼개 청자를 만든다. 별개의 인격이 된 둘은 법정을 통해서 다시 한 곳에 섞여든다. 그렇게 진행된 재판에서 확장된 법정은 세계의 주인을 다시 자그마한 개인으로 전락시킨다. 두번째 전락이다. 세계에 빠진 개인은 허우적거리지만 세계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형량의 증가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만든 세계이기에 사형을 언도받는 일은 없고 허우적거리던 화자는 얕은 물 위에서 공포에 질렸었다는 것을 깨닫자 다시 청자에게 밖의 세계를 고발한다. 화자가 계획하는 세번째 전락이지만 화자만의 세계는 무너졌고 밖은 미동도 없다. 무너진 세계와 무관심을 살아가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후의 심판이다.

화자는 냉철한 이성의 합리적 시각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화자의 전락의 모티프는 최후의 심판에서 나왔으니 신앙에 기반한 시각, 신앙에 기반한, 황금률, 보편 윤리에 기반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신앙과 이성이 양립 가능하다고 보고 싶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신앙이 이성의 형식만을 따온 것이다. 이성의 공리와 신앙의 맹목은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에 이성이 멈춘 자리에서 곧 신앙이 발을 뗀다.) 신앙의 얼굴을 이성으로 덮어쓴 화자는 심판을 받으면서 기쁨에 덜덜 떨 것이다. 미래의 끝에 있는 심판이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실재한다니! 그러나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공허함도 찾아온다.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미래에 의지해 왔는데 그 미래가 갑자기 눈 앞에 쬐인 것이다. 미래의 터무니없이 밝은 섬광이 휩쓸고 간 자리엔 타버린 신경과 잔상만이 남는다.

21세기의 남자를 보자. 남자도 마찬가지로 현대인이다. 남자는 신경외과 의사로 보이는 자신을 문 뒤에서 관찰한다. 의사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더! 라는 말만을 반복한다. 어느새 문 앞의 진찰대는 철조망이 감싸고 피로 칠해져 있다. 양복으로 갈아입은 의사는 장작을 쌓아 네이팜을 뿌리고 눈을 가린 채 죽여버리는 씨앗을 뿌린다. 시인이 굶주리고 아이들이 피를 흘리면서도, 남자는 정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21세기를 살아갈 이 정신분열성 인격장애를 가진 남자는, 문 뒤에서 공포에 질려버린다. 현대를 살아갈 이 사람은 시인과 아이들의 고통때문에 공포를 겪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자신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를 한없이 키워왔지만 세계의 일부나마 가진 적 없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공포로 일그러지게 한다. 결국 이 사람은 자신의 방조차도 아닌 방 안에서 나와본 적도 없다.  세들어간 방에서 가진 것은 몸뚱이 뿐인 사람은 언뜻 실존주의적이지만 사고는 종교에 더 가깝다. 혼란한 탓에 비명을 지르며 세계를 원하는데, 그 세계는 남자가 완전하게 속해있는 세계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인 남자는 그 세계의 존재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세들어 살고있는 방을 그 세계의 반영으로 만들 것이다. 그 어떤 정신과 치료보다 효과가 좋은 형이상학의 도움으로 남자의 나눠진 정신은 한 방에 살게 되지만 그 방은 너무 넓어서 나뉜 것보다 나은 점이 없다. 그리고 방이 합해서 돌아온 인격들에 또다시 묶인 남자는 한 손에 집혀서 재판정으로 옮겨진다. 재판의 결과 남자는 감금될 것이고 다시 벽이 아물 것이다.

심판을 받는 존재는 하나이다. 화자는 자신의 세계와 합일을 이루어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쪼개진 정신의 남자는 벽을 헐고 케이블 타이로 머리를 묶어서 재판정 출두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심판을 거치면 전체성은 아무 의미도 없기에 허물어진다. 화자는 세계와의 합일에서 목적의 상실을 겪고 떨어져 나갔고 남자는 다시 벽을 세워버렸다. 그렇게 둘은 두번째 최후의 심판, 예를 들어 미륵불의 도래를 기다릴 따름이다. 두번째 역사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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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밈화

자살. 스스로 죽는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지금까지는 자살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개인의 철학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만을 듣고 배우고 가져 왔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관점 또한 필요할 때인 듯 하다. 시작은 복제 단위로서의 밈이다. 가계를 따라 수직 낙하할 수밖에는 없는 유전자와는 다르게 밈은 가계를 벗어난 것에 더해 수평적이거나 역전되는 전달이 가능하다. 이것은 유전자가 번식기까지는 개체를 유지시키려 하는 것에 비해서 밈은 개체의 안전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효과를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적인 밈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민족끼리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어서 결국 민족국가를 침체시킴에도 끝없이 퍼져나갔고 현재까지 복제되고 있다. 밈으로서의 자살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자살 통계를 보면 때 30대 이상 연령층에서 한순간에 수와 비율이 폭증하는 것을 근거로 자살이 유전자의 작용이 아니냐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전의 특징 덕분에 번식기가 지난 후 발현되는 치사 유전자는 도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논의는 끝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에 논의는 계속된다. 자살이 유전자 차원의 어느정도 퍼져있는 표현형이라면 경험적으로 노화라는 현상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오면서도 그 현상의 표면적인 이유를 집어서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 같은 고전 자료에서 자살이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고 성서에 자살을 죄악으로 적어놓은 것을 보면 자살이 어느정도는 퍼져있다는 가정은 맞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고 극복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또 자살을 죄악으로 터부시하던 중세를 지나면 자살을 예찬하는 이들이 등장해 자살이 훌륭한 이유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하니 이들이 자살 밈을 성공적으로 퍼뜨린 개체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의 자살 예찬을 유전자의 기능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해당 시기, 근대의 유명한 자살 예찬가들이 말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삶의 방식에서 삶 또한 예찬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 플룻을 연주한 어떤 철학자와 풍성한 식사자리에서 자살을 논한 쇼펜하우어가 좋은 예시이다. 자살이 유전자의 표현형이라면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므로 밈이 개입했다고 보겠다. 탈출구, 해결책으로 던져지던 자살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서 드디어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더이상 삶과 자살을 동시에 예찬하지 않는다. 밈의 복제과정은 유전자보다 덜 엄밀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는 단계별로 억제제를 갖지만 밈의 복제에 있어 억제제는 개체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라는 또다른 밈 뿐이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개별 유전자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반면 밈은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감각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복제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며 따라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위의 주장이 사회, 철학적 관점을 모두 사용한다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밈으로서의 자살과 철학적 자살, 사회 구조적 자살을 보는 관점 사이 관계를 짚어야겠다. 우선 밈에 관한 관점이 가장 근본적이다. 개

  • 데카당
  • 2024-04-11
자의적 해석의 자의적 해석

문학작품이든 철학 저작이든 글을 바라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고 각 방법마다 꽤나 명확한 차이점을 갖는다. 문학의 예를 들어 대한민국 경기도 소재 일반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 내신의 어려움을 산맥을 넘는 어려움을 노래한 시에서 비유했다고 해보자. 산의 초입은 수월하기 때문에 경험이 적은 경우 완급 조절을 실패해 급하게 걷게 되고 능선쯤에서부터는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다시 다른 산의 초입이라 힘을 빼고..반복이다. 글 내부의 정보만으로 해석할 경우 이 글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슬기롭게 산맥을 넘는 방법을 제시한 설명문이 될 것이지만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제시된다면 내신 대비 방법에 대한 설명문이 문학적 성격까지 갖게 된다. 철학 저작을 생각해보자. 위의 예에서와 같은 학생이 어느 날 얻은 삶에의 시선을 시로 풀어내려고 한다. 시시포스와 바위에 대해 노래한 시는 학생의 부조리주의적인 깨달음에 대한 정보가 제시되지 않는 한 신에게 반항한 사람에 대해 경고하는 그리스의 신화를 형식이 없는 현대시로 풀어 쓴 것에 불과할 것이지만 정보가 주어진다면 경고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높은 곳을 향해 계속해서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행복함을 알려주며 절대적 진리인 신을 거부하고 자신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좌절해도 멈추지 않는 부조리한 인간상을 제시한다. 같은 정보가 주어지더라도 사람들마다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위의 학생이 쓴 내신의 어려움에 대한 시에서 갑은 고난의 연속이 찾아오는 고등학생의 생활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을 발견하고 을은 즐거운 자기확인의 연속으로 구성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예찬을 발견한다. 이 둘의 발견 중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 옳을까? 알 수 없다. 학생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는데 sns 활동을 하지 않았고 일기를 쓰지도 않은 등 판단의 근거가 될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교과서, 시험에 가장 자주 쓰이는 방식으로 편집위원, 출제자들이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 해석 중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선택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장이라면 자신의 뜻을 멋대로 왜곡한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어쩔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출제자들은 권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글을 읽고 더 깊은 이해, 시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감상을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미덕은 무엇일까? 자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유의할 점은 교과서, 교재, 문제집으로 공부해 정형화된 시험을 봐야 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의적인 해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의적 해석에의 자의적 해석은 예를 들어 이렇다. 위의 학생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대해 노래한 시가 발견됐다고 하자. 출제위원 병은 이 시에 대해 수레바퀴가 의미있기 위해 계속해서 돌듯이 자신도 돌아야만 의미있게 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절망을 토해내는 시라고 해석했고 출제시에 그 해석을 담은 보기를 붙였다. 시험에 나오는 작품

  • 데카당
  • 2024-04-06
4월 테제

윤리는 걸핏하면 목을 조르려 하고 높이 솟은 절벽면의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도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러니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따라, 윤리가 학문임을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도대체 어찌 생겨먹은 것이 학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내 목을 조르려고 하나? 스스로 의미없는 말들만을 골라서 지껄이며 제 목에 칼을 차게 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그러고는 사회에 책임을 모두 지게 하는 것이 학문이란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학문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윤리라는 것들을 학문이라고 부르기 위한다면 전체적 공해주의라는 이름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윤리라는 종양을 뚝 떼어냈다고 해서 사회학에 어떤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윤리의 팔을 빌려 궂은 일을 해왔을 뿐, 중요한 일들은 결국 윤리를 잠시 떼어둔 채 했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어느 사회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가? 가정에 대한 견해는 모든 가정을 뿌리뽑아 햇볕을 쬐게 했다. 학교에 대한 견해는 생각없는 기계들이 돌려 생각없는 기계만을 만드는 컨베이어 벨트로 바꿔놨다. 가장 구역질 나는 국가에 대한 견해는 어느 누가 게워낸 것이든 독재의 변호인으로밖에 서지 않았다. 뭐? 역사를 보지 말고 현재를 보라고? 너무나 슬프게도 무엇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아닌가? 저리 치워줬으면 한다. 앞을 보니 암막에 덕지덕지 붙은 소원들은 면면이 쓰레기들이고 옆을 둘러보니 이곳이 폐수 처리시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남은 선택지는 나가는 것과 뒤로 돌아앉는 것인데 나가기에는 출구까지 가기 귀찮으니 일단 돌아서 생각해 보련다. 되도록 빠르게 돌아앉아서 냄새까지 나기 시작한 폐수에게 관심을 끄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래도 남은 문제가 있다면 믿겠는지? 돌아앉은 후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뒤쪽에 있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돌아앉기 위해서는 어째서 돌아앉으려고 하는건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여기는 또다른 쓰레기들이 굴러와 성을 내며 배설한 것에 공손히 답해야 한다. 뭘 어쩌란 말인가? 보기 싫은게 있어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다른 심오하고 창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건가? 어느 누구의 두개골 속에서 그런 생각이 기어온건가! 뭐? 사명감? 문제 해결? 쓰레기들이 분리수거를 위해 아등바등 분류표를 붙이는 것이 웃기기만 한데 주석까지 붙여대니 할 말을 잃고야 만다. 우선 웃기지도 않는 완장질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문제 해결법인데 자기 완장을 벗기는 싫으니 일단 더이상 완장을 주지 않으려는 심보만 부리는 것들. 이 쓰레기들에게 어떤 사명감이라도 있었겠는가? 대답해달라! 선긋고 틀을 잡는 것에 재미를 붙인 것 뿐인 것들이 완장질을 하는데 그 뒷줄에 있는 사람은 안된다 이건가? 역겹다, 역겨워! 나오라! 나도 그 반짝이는 구토자의 완장 구경이나 한 번 시켜달라! 뭐라뭐라 말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들과 똑같이 도피나 해보자는 것이고, 당신들과 똑같이 그 도피에 어떤 변명도 붙이지 않고 해보자는 것이다.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완장 나도 껴보고 나

  • 데카당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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