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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미학

  • 작성자 Sleeperzzz
  • 작성일 2005-12-27
  • 조회수 138

 내 MSN 주소는 Late-sleeper, 닉네임은 Sleeper. 이렇게 상반되는 두 개의 이름을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까닭은 간단하다. 나 김연지는 매일을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낮엔 꾸벅꾸벅 조는 약간 비정상적인 생활리듬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적, 심지어는 유치원 때조차 내가 몇시에 자든지 상관하지 않던 가족들.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자장가 삼아 잠든 덕분에 애국가 받아쓰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하곤 했던 내 유년기의 불면습관은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맹세컨대, 새벽 2시 이전에 잠드는 생활을 일주일 이상 지속했던 적은 지난 십년간 단 한번도 없다. 근래의 평균 취침시간은 새벽 네 다섯시 정도? 나의 불면은 절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은 채 심화되고만 있는 것이다.

 

  새벽에 채우지 못한 잠은 다음날까지 피로를 축적시키기 마련, 깨어있어야 할 때와 깨어있지 않아도 될 때를 가리지 않고 내 눈가를 잠식한 피로라는 괴물은 자꾸만 달려들어 눈꺼풀을 감게 하고, 자지 않으려고 피로와 미친 듯 투쟁하지만 천하장사도 못 이긴다는 졸음을 이 연약한 열아홉 소녀가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결국은 나도 모르는 새 꾸벅꾸벅 졸고 때로는 책상을 베개 삼아 잘 때 안 잘 때 못 가리고 잠드는 덕에 얼마나 많은 눈치와 피해를 봐왔는지.

   '혹시 내가 정서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왜 괜히 잠 못 드는걸까.', '그래도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인데, 수능 날까지 이렇게 졸아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열한시 야자 끝나자마자 이불 속에 드러눕기도 해보았지만, 오히려 정신은 말똥말똥해지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려니 쌓이는 스트레스가 잠자는 것을 두렵게 하기까지 했다. 머릿속에 양을 천 오백마리 남짓 세어봐도 잠이 오지 않아 메신저에 들어가면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시차가 반대인 미국으로 유학간 사람밖에 접속해 있지 않을 때의 그 괴로움이란, '시간이 정반대인 외국으로 나가면 나도 정상인이 되겠지.'따위의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내 의식을 탓하며 내쉰 한숨들은 아마 너끈히 만 그루는 넘는 가로수의 광합성 밑천이 되지는 않았을는지. 일찍 잠들기 위해서 아침 운동을 하고, 낮에 안 자려고 온몸을 꼬집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상담 끝에 몸을 피곤하게 만들기 위해 사십분도 넘는 집과 학교를 수없이 걷고, 지하철을 타고 외출 후 돌아올 때에도 한 역 앞선 정거장에서 내려 걸어오는 생활도 해보았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시체, 잠탱이 등등 잠과 관련된 내가 가진 잠에 관련된 수많은 별명들과 오랜만에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요즘은 안 조냐?"라는 말을 의례 인사처럼 건네는 친구들 속에 "나 불면증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부족한 잠을 학교에서 다 보충하고 가면서 '잠이 부족해'라고 말할 때마다 킥킥 웃어대는 친구들 속에서 늦은 밤 잠드는 Late-sleeper은 그저 고독할 뿐이다. 밤의 불면증과 낮의 수면증, 이 오랜 불균형 상태를 보아온 지인 몇몇은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여러 대안들을 이야기해주며 함께 근심스러워하지만 (심지어 숙면CD를 수능 때까지 빌려준 친구도 있다) 고백하건대 실은 나는 불면을 즐기고 있다.

 

  밤이 낮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선명하다. 이성보다 감성 중심으로 사람을 바꾸는 밤의 기운. 편지나 글, 일기를 쓰고 다음날 읽어보면 너무 감성적이라 글을 쓴 나조차 얼굴 붉히게 만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미친 듯이 풀어놓고 아침이 되면 "내가 왜 그랬지?" 후회하게 만들 정도로 진한 그 향기가 밤을 아름답게 만든다. 또한 시작점이 또렷하지 않은, 그러나 대지 구석구석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의 너그러움 또한 밤이 아름다운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이다. 이런 밤에 음악을 틀어두고 공상에 몰입하거나 무릎 위에 쿠션을 올려놓고 한 손으론 그것을 안고 한 손으론 지금처럼 낙서를 즐기는 게 바로 나의 낙이다.

 

  비록 피곤에 절어 내내 비몽사몽이긴 했지만 어쨌든 하루의 일과라는 굴레를 벗은 해방감과 무엇도 의무 지워질 것이 없는 자유의 상태. 해가 뜬 상태에서 벌어지는 몇시부터 몇시까지 누구와 뭘 해야함 따위의 수많은 의무와 약속 따위의 구속 받을 무언가가 없는 마음에서 오는 여유와 나를 감싸주는 나른한 이불과 베개에서 오는 평온. 그 아름답고 자유로운 밤은 잠이라는 무의식으로 가벼이 보내기는 너무나 아깝고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나의 불면을 걱정해주는 지인들 앞에서 나는 그 걱정을 허투루 넘길 수 없어서, 그리고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고마워, 그러게 어서 빨리 정상 패턴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네.'라고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곤 하지만 절대 Late-sleeper의 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다.  사실 난 더 많은 사람들을 Late-sleeper의 세계로 입문시키고만 싶은데, 건강에 좋지 않다느니 아침형 인간이라느니 하는 인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는, '바쁘게'를 요구하며 채찍질하는 수많은 음모들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밤의 아름다움을 납득시키자니 어렵고, 모두가 불면인이 된다면 밤에도 학교를 간다든지 하는 의무적이고 규칙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생기고 말까봐 두렵기에 스스로 불면모드의 묘미를 터득한 몇몇 소수의 현자들과 함께 즐거운 불면생활을 지속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은 불면진인들과의 교류의 끈이 짧아 가끔 어둠 속 고독을 즐기다가 그 고독이 홀로라는 느낌으로 변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움에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외로움 속에서 전화나 문자를 통해 깨어있음을 확인할 분명 잠들지 않고 있을 불면인이 아직 없는 것은 역시 아쉽다.(새벽에 잘 자는 사람 깨우면 실례잖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밤에 잠 안자고 낮에 자는 사람을 폐인이라 불러온 몇몇 우매한 사람들에게 그들을 폐인이 아니라 불면현자 혹은 불면진인이라 불러줄 것을 강력히 주장하며 한마디만 더 하겠다. 여러분, 아름다운 밤이예요♥

Sleeperz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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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잠 못이루는 밤,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습관인 것 같아요. 바꿀 수 없다면 잘 활용하고 즐겨야겠죠?

    • 2005-12-27 13:04:0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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