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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이틀 전

  • 작성자 정貞
  • 작성일 2006-05-16
  • 조회수 358

'D-2'

문자가 왔나싶어 괜히 핸드폰 덮개를 열었다가, 액정창에 뜬 숫자를 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남은 시간은 이틀, 스물네시간의 갑절, 이천팔백팔십분. 짧지 않은 시간이다. 즐거운 소풍 날까지의 일수를 하루하루 세어가며 동안이었다거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내본 고백편지의 답장을 기다리는 순간이었다면, 이 시간은 이미 결말을 알아버린 드라마의 재방송처럼 지루했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간고사를 앞둔 나에게 이틀은 촉박하고 다급하다.

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과서며 참고서를 바리바리 싸들고 학교로 들어섰다. 냉장고에 주전부리가 가득 차있고, 푹신한 침대가 유혹의 몸짓을 보내는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아서이다. 혹시나 수위아저씨께 들킬세라, 교실 앞문뒷문을 잠그고 창문 자물쇠도 꼭꼭 내려건 후에야 책상에 앉는다. 시험 계획표를 확인하고서 문학 교과서를 펼쳤다. 공무도하가라는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운문이 나온다. 수업시간에 끄적인 필기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물에는 모두 동그라미표, 첫 번째 물의 의미는 사랑이요 두 번째 물의 의미는 이별이요 세 번째 물의 의미는 죽음.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는 헷갈리지 말것. ‘다음 중 물의 의미가 아닌것은?’ 덧셈뺄셈 계산기처럼 기계적으로 답을 체크한다. 글의 종류가 고전가요라는 것에 밑줄을 한번 더 그으며 다음 장을 펼친다.

책을 덮는다. 도저히 집중이 될 것 같지가 않다. 손을 뻗쳐 추욱 늘어져 있는 커튼을 밀어제치고 창문을 연다. 네모난 창문안에 그림엽서처럼 담기는 학교 운동장의 정경. 아, 우리학교도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어제내린 봄비에 텁텁한 모래먼지를 깨끗이 씻어버린 하늘은 막 짜낸 물감처럼 푸르다. 멀다고 생각했던 저기저편 산들은 놀랄만큼 가까워 보인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한걸음 성큼 다가온 것은 아닐까? 혈기넘치는 남학생들의 발길질에서 해방된 운동장도 햇빛을 받아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듯. 그리고 운동장을 둘러싼 황홀한 벚꽃, 벚꽃의 향연.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저 흩날리는 벚꽃잎의 수만큼 느낌표를 붙여도 차마 이 감동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지나치는 바람결을 따라 하얀나비떼가 날아오른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른다. 놀란 비둘기 한 마리가 꽃잎을 휘감고 날개를 퍼덕인다.

하얀나비떼의 향연이라,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연습장을 펴들고 창틀에 걸터앉았다. 영화에 나오는 청순한 문학소녀처럼 다소곳이 다리를 모으고 앉아 내 글, 내 마음을 한 자 한 자 내려써간다. 신춘문예에 낼 산문을 준비하는 새내기 작가지망생마냥 조심스럽게, 하지만 노련한 명작가처럼 능숙하게. 만일 누군가가 내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봄 정취에 취한 여고생의 순수함에 감동하지나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는다. 그리고 문득, 어렸을 때의 빛바랜 꿈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내 꿈은 작가였다. 해변에 내려다 보이는 하얀 집 창가에 앉아, 저멀리 지평선 너머에 있을 희망의 세계를 써내려가는 외롭지만 행복한 생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삶이었고 나의 미래의 모습이었다. 가나다를 떠듬떠듬 외기 시작하면서부터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들은 작았던 머릿속을 갖가지 빛깔로 채워주었고, 그 빛깔들로 메운 원고지가 다른사람들의 칭찬을 불러일으킬때면, 내 가슴속은 견딜 수 없을만큼 부풀어올랐다. 나는 글이 좋았다. 새로 산 원고지의 빨간 선이 좋았고, 가슴을 열고 글자를 받아들이는 원고지의 하얀 칸이 정겨웠다. 그 칸을 채우며 느끼는 흑연의 매끄러움이 친근했고, 마지막 온점을 찍을때의 성취감이 온몸을 짜릿하게 했다.

어른이 되어 노벨 문학상을 타고싶어했던 야심찬 꼬마는 그러나 더 이상 원고지를 친구로 삼지 않는다. 같이 수다도 떨고 떡볶이도 나눠먹는 ‘진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노래방과 보드까페에서 즐거움을 찾는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 되어 텅 빈 교실 창틀에 앉아있다. 그리고 잃어버린 우산을 학교에 두고왔다고 우겨대는 고집쟁이 아이처럼 십년 전 그 아이가 지금 나와 같다고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흐트러지게 핀 벚꽃같던 내 열정을 앗아간건 것은 무엇이었을까? 끝없이 흩날릴 듯한 저 꽃잎도 어느순간 다 져버려 아쉬운 푸르름만 남듯이, 나의 열정도 한 시기 뜨겁게 타오른 후 영원히 식어버린 것일까?

내 이름은 박민정이야, 라고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래희망 조사서에는 꼭 작가라고 써 넣었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보내고, 좀 더 어른스러워진 스스로를 느끼며 중학교에 입학 했던 그 때, 바로 그 때 였을 것이다. 매일 아침의 신문에는 프로그램 편성표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우리들이 사는 세상도 동물의 왕국 아프리카만큼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나의 열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책상앞에 붙여놓은 세계지도 딱 그만큼의 크기였던 세상은 그 후로 점점 자라나 나를 숨막히게 했고, 거대해진 세계는 동화책에서 읽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장래희망란에 작가 아닌 다른 직업을 써넣었다.

그 후 세 번의 겨울을 보내고, 소위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다시 일년의 시간을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흘려보낸 지금, 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래 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나는 이제 쉽게 울지 않는다. 국어시험 전 날 모범답안지를 외우며 피곤기에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찡그릴 뿐이다. 이틀 남은 중간고사를 앞두고 공무도하가 속 물의 의미를 암기한다. 대입고사의 날 수를 계산하며 명문대 이름을 다이어리 가득 적어놓는다. 이제 곧 대학에 가겠지. 그리고 졸업을 할 거고, 그리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지. 기슴 한 귀퉁이에서 팔딱대는 진짜 꿈, 진짜 희망을 억지로 밀어놓으며 자기 최면을 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일을 좋아하면 되는거 아니겠어, 하고.

알약을 잘못 삼켰을 때처럼 씁쓰레한 기분이다. 후우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몸을 일으킨다. 시험 이틀전인데 시간을 너무 낭비한 것 같다.

하지만 팔딱대는 나의 가슴이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크게 쿵쾅거리며 온몸을 진동시킨다. 왜이럴까, 시험이 이틀 남았는데. 좋은 점수 받고 좋은 대학 가야되는데.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좀처럼 진정시킬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한 탓일까? 다시 책상앞에 앉고 싶지가 않다. 교과서를 외우는 일도 왠지 지겹고 귀찮다. 그냥 여기 이렇게 앉아서,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면서, 연습장에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결국, 교과서를 책가방에 챙겨넣으며, 오늘 공부는 다 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틀 남은 시험이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하지만 쿵쾅대는 심장의 느낌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무언가 가득 차오르는 이 기분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무척이나 익숙하고, 편안하다.

올해 장래희망란에는 과연 무엇을 써넣게 될까, 두근거린다.

정貞
정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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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누가 알랴, 똑바로 보는 세상이 새까만 날벌레무리일지도. 눈 위에 눈 하나 더 겹쳐 쓴다고 해서 보이는 것 이면의 무엇이 더 보이지는 않을 터이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서도 저울의 공평함을 아는데, 뭘 더 잘 보겠다고 눈 네 개 달린 괴물이 되나.      짧게. 

  • 정貞
  • 2007-08-13
이 닦으며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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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貞
  • 2007-08-09
지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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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貞
  • 2007-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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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시험 2일 전이면 나는 막 딜입다~ 공부하겠다.ㅋ

    • 2006-10-19 08: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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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 쓰기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2006-05-26 23:4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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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수성도 좋고 문장도 좋네요.

    • 2006-05-22 21:23:5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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