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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엔 문의 마을이 있었다

  • 작성자 절박한참치
  • 작성일 2006-09-23
  • 조회수 678

문의 마을에 가서

 

 점심을 먹고 문학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시를 느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는 착한 학생이었다. 시를 읽었고, 느꼈고, 더듬거리며 의미를 찾아내려는 순간 - 선생님은 정답을 말했다. '길'이라는 시어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향이라고 볼 수도 있고 죽음으로 볼 수도 있지.
 선생님, 시에는 정답이 없다면서요.
 절대로 소리내어 말하지 못할 말이 졸음 밑에서 맴맴 돌았을 것이다.
 어째서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지? 선생님은 우리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어려우니까요. 처음 읽는 시니까요. 아이들이 교실 곳곳에서 소리쳤다. 지금 나는 그것과는 다른 대답을 하고 싶다. 말해도 듣지 않으니까요.
 선생님은 시를 읽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억양으로 시를 끊어 읽었다.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선생님은 시를 웅변했다. '문의 마을에 가서'라는 시를 웅변하였다. 어색한 억양이었다.
 시를 스스로 느껴야 한다. 시를 분석하는 능력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가슴으로 이해해야 해.
 하지만 선생님, 저희가 스스로 시를 읽게 해 주세요. 선생님이 읽는 바를 받아들이게 하지 마세요. 선생님의 억양은 그 자신의 억양일 뿐 우리의 감상일 수는 없어요. 선생님, 침묵 속에서 읽게 해주세요. 저희가 저희의 의지대로 흠뻑 느낄 수 있게 해주세요‥.
 따뜻한 교실에서 아이들은 졸았다. 시를 느끼라고 강요당한 후 선생님의 정답을 받아 적어야 하는 수업은 끔찍하게 지루했다. ('길은 추운 쪽으로 뻗어 있었다 - 죽음의 세계. 삶에 동그라미.') 문의 마을은 허물어지고 색색의 형광펜으로 난도질 당했다.
 너무 받아 적지 말아라. 이해하면 되잖아. 이 시간은 분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시간이다. 열심히 펜을 놀리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거듭 말했다.
 분석하라면 분석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시험 문제는 전혀 친절하지 않지요.
 내 나름의 감상은 완전히 틀린 답이었다. 교과서에 적혀 있지 않은 단어는 오답이었다. 정답이 있는 문제를 내 주시는 선생님의 정답을 열심히 받아적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필기, 필기, 필기, 필기만 하면 점수가 잘 나왔다. 선생님 말대로 시를 소설을 '이해'하려고 했을 적 나의 문학 점수는 바닥을 기었다.
 어쨌든 상관 없었다. 30분 만에 문의 마을에 대한 모든 분석이 끝났다. 반 정도의 아이들이 꾸벅거리고 졸거나 엎드려 자고 있었다. 필기야, 베끼면 되는 것 아닌가.
 


문,의 마을에 가서

 

 문의 마을은 잿빛이었다. 야트막하고 어둡고 막막하고 희뿌연 산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눈과 재가 섞여 내렸다. 밤보다 검은 산맥들이 겨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굽어보았다. 아, 난 저 문의 마을에 가 본 적이 있다.
 문의 마을에서 나는 하염없이 산들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막막하여 다가갈 수 없는 산들이었다. 산으로 향하는 길은 눈 내리는 풍경 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다. 잿빛 마을의 사람들은 그림자같은 잿빛 옷을 입고 마을을 바삐 걸어다녔다. 그림자같이 나를 지나쳐 갔다.
 문의 마을은 사실 '문'의 마을이 아닐까. 나는 문을 열고 싶었으나 손잡이를 부여잡고 오직 기원하기만 했다. 밤낮으로 건너가기를 염원했다. 어떻게 하면 추운 길로 스며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문을 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림자처럼 나를 통과해 가는 사람들과 헤어질 수 있는지, 매일매일 꼬박꼬박 생각했다.
 힘든 나날이었다. 눈에는 열이 올랐다. 하염없이 부질없는 성적에만 신경을 썼다. 죽어버린 일상에서 도망칠 수 없으면 차라리 거기에 매여버리자, 하는 심보였다.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일상에 매여버리자고. 선생님의 필기를 미친 듯이 받아 적고, 그것을 의심없이 외우고, 오답은 절대 쓰지 말자고. 교과서는 색색의 펜으로 난도질당했다. 구석구석마다 정답이 빼곡히 적혔다.
 성적표의 등수 칸에는 자꾸만 1이 찍혀 나왔다. 내 손목에도 작은 1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성적표에 찍혀나온 단순하고 길쭉하고 싱거운 숫자보다 더 많은 수의 숫자들이 소심하게 새겨졌다. 마치 날짜를 새기는 것처럼.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아침이 왔고 영어 시간이 되었다.
 질문이 너무 많아. 너무 해석에 집착하지 말고 뜻만 이해하면 돼. 선생님은 역설했다. 나는 착한 학생이었다. 나는 문장을 읽고, 모르는 단어는 문맥상으로 추측하고, 뜻만 이해했다. 선생님이 쏟아낸 단어는 착실한 내 손이 무의식적으로 받아 적고 있었다. 여기서 would는 가정법의 would가 아니고 과거의 미래야.
 선생님, 정작 미국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문법을 따지지 않지요.
 절대로 소리내지 못할 말이 마비된 뇌 안을 빙빙 맴돌았을 것이다.
 나는 납득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받아들였다. ('would-가정법 x. 과거의 미래.') 깨어있는 시간은 오직 괴리감만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공부를 하려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틀렸다. 공부를 하려면, 이 아니고 학교를 다니려면, 이다.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수업 방식을 바꿀 수도 없었고 시험 문제를 바꿀 수도 없었고 내 앞에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거대한 현실을 바꿀 수도 없었다. 나는 무너졌다. 무너지고 포기하는 순간 그림자같던 사람들이 내 동료가 되었다. 그림자들은 서로를 지나치지 않았다.
 선생님은 계속 해석해 나갔다. 아이들은 절박하게 필기해 나갔다. 지금 내뱉어지는 이 해석, 이 문장들만이 답이다. 자습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 해석한다면 분명 틀릴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숨가쁘게 흐르는 수업을 우리는 달음박질하여 쫓아간다. 봉화처럼 새빨간 펜이 저마다의 손에 들려 있다. 저 빨간 배턴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미래의 우리를 위해서. 우리는 대답한다. 숨은 턱까지 차고 다리는 끊어질 것 같지만 어째서 이렇게 힘들게 달리는가는 물으면 아니 된다. 넘어질 것이다. 넘어져서 도태될 것이다. 그런 건 봉화를 올리고 난 다음에 물어도 상관 없다.
 나는 알고 있다. 의문하는 동시에 우리는 넘어질 테고, 죽음만큼 적막한 길임을 인식할 것이고, 절망할 것이다. 누군가는 문의 마을로 터덜터덜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추운 곳으로 향하는 길도 그 반대 방향의 길만큼 적막하였다. 하여 나는 다시 터덜터덜 마을에서 돌아 나왔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손에는 펜을 꽉 쥐고, 아픈 다리는 무시하고, 입은 꽉 봉한 채로. 등 뒤가 사무치고 따뜻하였다.
 뒤를 돌아다 보면 문의 마을이 있다.

 

 

   

 

              *                        *                        *

 

 

 

 

고은 시인의 '문의 마을에 가서'를 수업시간에 배웠어요.

첨부합니다.

 

 

  

문의 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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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어님 댓글 재밌다,ㅋㅋ

    • 2006-09-27 13: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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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생선님/ 안녕하세요 참치입니다.

    • 2006-09-27 12: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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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십니까 생선입니다.

    • 2006-09-25 19: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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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과꽃님/ 문의文義는 정말로 유교적인 이름이죠 [...] 꿈등/ 블루오션에서 평화롭게 살아갈까 고등어여

    • 2006-09-25 12: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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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 공감글. 참치가 글을 올렸으니 나는 올리지 말아야지... 참치랑 겨루는건 어족간의 갈등을 일으키니까.... 그저 바다의 평화를 바랄뿐.

    • 2006-09-25 12:39:2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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